요한계시록

계시록36강-몸과몸 1204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6. 09:24

2012-04-06 01:19:29 조회 : 1377         
몸과 몸 120405 이름 : 이근호 (IP:117.55.1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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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405-요한계시록20장(몸과 몸)36강a-이 근호 목사
제 36강a

요한계시록 20장은 어떤 식이냐 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제일 편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말로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그리면 제일 좋아요. 강물이 죽 흘러오다가 여기에 댐이 있다 합시다. 여기 댐 뒤에는 하나의 저수지인데, 여기는 물이 흐르지 않고 스톱돼 있습니다. 여기서 다양한 계층으로 흘러내려오는 층들이 있어요. 층들이 내려오다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층들이 각기 자기 서랍, (옷 정리하는 데) 각자 여기 서랍에 다 정리해 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이건 하나의 지난 시간의 케이크의 단면처럼, 단층처럼 절단면을 잘라버리면 바깥에서는 케이크가 크림으로 돼서 똑같이 보이지만 잘라보니까 색깔별로 층층이 다 나타나죠.

 
 
                  drawer: 서랍

층층이 포개져서 나타나는 현상! 이게 요한계시록 20장입니다. 요걸 달리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여기부터 약간 어려운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려운 거부터 해 봅시다. 처음에 아담을 만드셨잖아요. 아담을 만들어 놓고 아담을 납작하게 쥐포처럼 쫙 펴 봅시다. 쥐포처럼 롤러 통과해서 쫙 펴버리면 아담이 납작하게 되겠죠. 이걸 쭉~쭉 키다리 아저씨처럼 늘여보자 말이죠. 늘여보면 이 발끝은 사람을 창세기 2장에 만들었으니까 창세기 2장이고, 머리 끝 부분은 요한계시록 22장, 또는 20장, 21장이라고 말해도 괜찮아요. 다 포함되니까.

아담이 납작하게 된 것은 귀족의 거실에 깔린 양탄자처럼 밑에 깔려버리면 이게 인간의 몸이죠. 여기 인간의 몸에다 주님의 몸에서 나온 사건과 사건들이 수를 놓듯이 자수하듯이 수를 놔 버리면, 이 위의 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몸에다가 위에서 수를 놓았으니까 이 몸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수를 놓는, 사건으로 수를 놓는 것이라고 이렇게 봐버리면, 인류 역사라 하는 것은 결국 두 몸 사이의 관련성이죠.

밑에 누워있는 것은 인간의 몸이고, 그 다음에 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인간의 숫자가 지금까지 태어난 숫자가 한 200억 정도로 봅니다. 200억이 과하다 싶으면 100억으로 봅시다. 태어났다 죽고 사라진 숫자를 합치면. 그 100억의 인간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단 1명으로 이걸 뭉쳐버리죠. 수제비할 때 이걸 뚝, 뚝 떼기 전에 있는 밀가루 덩어리, 그 밀가루 덩어리를 ‘아담 안에서’라고 로마서 5장에서 표현합니다.



 

incident: 사건    Revelation:요한계시록   Genesis:창세기   It is finished:다 이루었다

그러면 여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나도 그것은 전부 다 아담의 변신, 아담의 자식들, 아담의 다양한 모양새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 느낌과 죄악에 대해서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우리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태어나게 하셔서 아담이 지었던 죄를 우리가 동참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선악과 현장에 없던 우리도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의 기분과 감정과 느낌과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같이 누리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권력이 집중된 그 제일 중앙 지점이 바로 ‘저게 내 자린데, 저게 내 자린데.’ 권력이 모인 집중 자리가 내 자린데.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거미가 자기 그물망을 만들어서 자기 집을 짓죠. 그 중앙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죠. 그래서 아담은 선악과 따먹고 나서 신이 돼서 자기가 중앙에 있는 거예요. 원래 중앙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어야 되는데 아담이 그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니까 결국은 선악과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것마저 따먹은 누가 주인공 됩니까? 지가 주인공 이예요. 지가 ‘나 선악과 안다. 나도 같이 맞먹자. 나도 안다.’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한가운데 중앙을 점령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인간 속에 적그리스도, 나중에 성전 한가운데 서서 내가 적그리스도라고 우기는 적그리스도인 요소가 모든 인간의 요소 속에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몸은 두 사람밖에 없어요. 아담이냐, 마지막 아담이냐,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아담 둘로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현재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있는 모든 사건들, 반 사건들은 거기 누가 있기 때문에 일으킨 사건이거든요. 누가 있습니까? 아담을 길게 죽 당겨서 아담의 있음에 주의 몸이 거기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거기 십자가의 의미를 거기다가 수놓듯이 새겨버립니다.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 ‘어떻게 알아서 해.‘ 일단 수를 놔 버리죠. 십자가 피를 전해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못 받아들이는 자 따라서 생명나무에 기록된 자와 안 기록된 자 둘로 갈라져 버립니다.

자, 방금 제가 설명했듯이 이렇게 설명을 보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사실은 전부 다 정리가 다 된 셈인데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못 보고 있는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릴게요.

여기 이 아담의 몸은 납작하잖아요. 납작하면서도 전체가 하나의 아담이 되죠. 그런데 우리는 교육 받기를, 태어나기를, 가정교육 받기를 이런 식의 아담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느냐, 통실해요. 너구리처럼 우리는 통실해서 하나의 독자적인 개체입니다. 그래서 나 외는 나가 따로 없어요. 성경에는 너도 아담이고 나도 아담인데 새삼 구분할 필요 없어요. ‘어, 아담 하나 지나가는구나. 어, 어떤 여자가 지나가면, 어, 여자 같이 생긴 아담이 또 있네.’ 다 아담인데 일반적인 우리의 실상은 뭐냐 하면 나 여기 있으매 고걸로 나는 끝나요. 그리고 내 앞에 지나가는 것은 ‘나‘가 아니고 전부 다 뭐가 되느냐 하면 ’너‘가 돼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성경을 볼 때 통실, 통실한, 좀 야윈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통실한 내가 성경을 볼 때는 성경이 뭐로 보이느냐 하면 산천경개(山川景槪)로 보이죠. 봉우리로 보고. 아, 창세기, 오, 홍해. 옛날에, 오, 요단강. 옛날에 있었지. 오, 십자가. 옛날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신다.

세대주의 같으면 재림을 두 번 합니다. 공중 재림 하나 있고 지상 재림 있고 세대주의는 재림을 두 번 합니다. 공중 재림해서 지가 아는 사람 데려가고 그 다음에 다시 주님께서 지상 재림해서 천년 왕국 누리고, 그 다음에 심판 벌어지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죠.

전 천년주의는 재림은 한번입니다. 7년 환난, 대 환난 다음에 주께서 재림해서 전부 다 자기 팬들, 자기 사람들을 다 데려가고 그 다음에 지상에 천년 왕국 일어나고 그 다음에 둘째 사망 있고 그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식으로 굉장히 비슷해요.

 

  individual: 개체 Red sea:홍해  Jordan:요단  Cross:십자가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구름 타고 오시리라

어쨌든 간에 통실한 걸 잊지 마세요. 여기는 납작하잖아요. 이건 통실한 것은 너가 통실한 것도 아니고 저쪽 삼촌이 통실한 것이 아니고 누가 통실합니까? 나죠. 그러니까 이것은 나는 나부터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찾는, 이 말은 뭣을 따먹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우선 가까이 있는 나부터 챙기고 그 다음에 나하고 가까운 사람들 상대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멀리 있기 때문에 멀리 하늘을 쳐다보면서 상대하고, 중앙에는 누가 있어요? 자기 자신이 자기 영역에 중앙지점에 이미 점유하고 있죠.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면 이 성경은 뭐냐 하면 ‘나 언제 데려갈 건데? 주님 언제 천년 왕국 할 거야? 시나리오 되면 그 시나리오대로 내가 알아서 처신할게.’ 그렇게 되죠. 유럽에 가면 유명한 성당들이 있는데 그 성당이 100년, 200년 됐는데 그 성당에 뭐가 있느냐 하면 모자이크나 성화가 있죠. 그 모자이크나 성화 그림이 왜 있느냐 하면 옛날 사람들은 무식해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책이 없었어요. 책이 없으니까 그림으로서 파노라마를 쫙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소위 메디치가라 해서 르네상스 이태리, 거기서 유명한 천재적인 예술품을 모아서 작품을 만든 것이 오늘날 최고가의 예술품이죠.

거기에 나오는 그림들이 전부 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동방박사 예수님 찾아오심, 전부 다 성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은 그 당시 국가가 기독교 국가로서 지배를 해야 되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할 때 질서가 잡혀요. 쓸데없는 반란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다른 말로 국가 입장에서 하는 교육이 되는 겁니다.

교육! 요즘 교육은 어디서 합니까? 학교 다닐 때만 하잖아요. 옛날에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받습니다. 누구한테 교육받습니까? 지배해야 될 사람한테 지배당할 사람이 교육을 받는데 교과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니는 나한테 지배받기로 운명 지어졌다.’로 끝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육을 왜 시키는 겁니까? 오동통한 참한 이런 사람은 너가 감히 그 권력의 중앙에 있으면 안 되고 누가 있어야 된다? 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나만이 조망하고 내가 성경을 보고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그 판단에 너는 무조건 따라줘야 되고 무조건 교육받아서 거기서 창조할 때 이 나라는 신의 왕국이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제가 옛날 이야기하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기업체에서 지금도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이겁니다. 권력 중앙에 누가 앉는가, 그 권력 중앙에 앉는 사람의 파생된 힘, 에너지를 받으면 우리는 밥 먹고 살아요. 이 회사 사장님이 만약에 불교신자라면 제가 여기 성경공부 왔다면 ‘나가세요. 우리 사장님, 절에 다닙니다.’ 그거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요? 권력의 중앙지에, 거미가 만든 그 거미줄 중앙지에 누가 있어야 돼요? 오동통한 죄지은 아담의 대리 아담이 여기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갖고 있는 권력을 뜯어먹고 또는 혜택을 입으면서 그들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에 사는 거예요.

산다는 게 뭐냐 하면 힘을 주워 먹고 살 때 사는 겁니다. 나보다 더 센 힘을 공급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는 겁니다. 만약에 그게 싫으면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중심지에서 본인이 거기서 남한테 베풀듯이 본인이 중앙에 서는 거지요. 그래서 본인은 계속해서 남한테 줘야 될 힘들을 배양할 필요가 있어요. 만약에 힘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늙은 여우, 늙은 사자 힘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토끼가 수염 잡아당겨 버리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항상 아담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힘이 필요한 거예요. 그 힘인데 내가 중앙에 설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나는 중앙에 있는 그 인간을 잡아당겨 버리고 ‘내가 그 인간이 섰던 그 중앙의 힘을 언젠가 차지하고 말거야.‘ 치토스! ’언젠간 그 중앙의 힘을 차지하고 말거야.‘ 하는 겁니다.

안철수를 좋아한다? 무슨 뜻입니까?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뜯어먹을 게 많을 경우에는 표를 던지겠다. 그리고 안철수하고 친밀하게 지내서 혹시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청와대 경호실장이라든지 한국토지공사 임원이라든지, 하나 얻어 걸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구조라 하는 것은 전부 다 단독 자들이기 때문에 이 단독 자들과 단독 자들이 엮이는 방법은 우리 중에서 누가 권력의 중앙에 점유하느냐, 중앙에 점유한다면 점유한 사람의 똘마니가 돼서라고 혜택을 입을 것이고, 만약에 이 사람이 중앙에 점유하는 것이 실패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걸레조각처럼 ‘저리 가, 씨.’ 차버리는 거죠.

이것을 어디서 보여주는가, 성경에서 보여줍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나오죠. 왕이 나오죠. 이스라엘의 중앙 장소에 누가 차지합니까? 이스라엘의 중앙 지점은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지만 제가 해드립니다. 성전이 차지합니다. 성전에는 누군가 계시는데 누가 계시죠? 보이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성전의 중앙을 점유하고 차지할 때 일어나는 기능이 뭡니까? 날마다 제사 드리죠. 야, 희한하죠.

그런데 이방나라에서는 그 중앙지점에 누가 있느냐, 왕이 있습니다. 왕이 무슨 짓을 합니까? 매일같이 백성들과 신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죠. 자칭 자신이 제사장이 됩니다. 왕이면서도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똘마니한테는 삯(임금)을 받는 선지자들을 두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방나라의 모습이죠. 그걸 이스라엘이 그렇게 부러워했다 이 말 아닙니까? 왜 눈에 안 보이는 존재가 왜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하느냐,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남들처럼 유신이든 왕건이든 이성계든 세종대왕이든 누가 하나 턱 보좌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아침마다 문안하면서 보고 ‘인물 좋다.’ 하고 이게 훨씬 믿음이 와 닿는데 왜 우리 이스라엘은 왜 텅텅 비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 지금도 교회도 마찬가지거든요. 목사가 인물 잘 생기고 목사가 말 잘하고 목사가 멋있고 모든 여인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울만한 그런 게 있으면 교회는 마구 부흥돼요.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 대장도 없고 ‘성령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면 누굴 의지해요?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지. 권력의 중앙지에 누가 있어야 되는데 그 자리를 만약에 공석으로 비어놓고 ‘교회 머리 되시는 분은 예수님.’ 이라고 하면 말은 맞는데 현실성이 뚝 떨어지잖아요.

우리나라에 조선시대나 근대에 오게 되면 마을 한가운데 뭐가 있습니까? 비뚤어진 굵다란 고목이 있죠. 그 고목에 왜 새끼를 감고 두레 제사를 지내고 왜 그렇습니까? 특이한 것 가운데서 특이한 기운이 나오는 겁니다. 그냥 조그만 나무 하나 심어놓고 거기다 안 하잖아요. 마을 한가운데, 중앙지점에. 그걸 우리나라는 뭐라 하느냐 하면 ‘솟대’라 해요. 하늘과 땅의 접선지점이거든요. 이것을 학자들은 우랄알타이계통에서 나오는 몽고에 발달한 샤머니즘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나라 사람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신과 접선하는 그 중앙지점에는 우리보다 월등하고 탁월한 어떤 영적 기운을 가진, 그걸 카리스마라 합니다. 영적 카리스마 가진 존재가 그 중앙지점을 점령하면서 우리는 그 기운을 받아서 신과 우리 사이에 교류가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건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 나오죠? 야곱이 밤중에 사다리가 내려올 때 그때 돌을 취해놓고 기름을 갖다 부었죠? 기름을 갖다 부면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구멍이 뻥 뚫렸다. 이 말은 아무데나 뚫려도 되는 게 아니고 오직 여기에 올 때만, 여기만 하늘과 통풍이 돼서 딴 데 가면 막혀있는 기운도 여기 오면 뚫린 거예요. 야곱이 큰 오해한 겁니다.

왜 야곱이 오해했느냐 하면 야곱은 장소적 의미로서 베델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움직이는 야곱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었어요. 집이었습니다. 나중에 특정 장소에서 주께서 계시하는 것이 아니고 떠돌아다니는 야곱의 몸을 통해서 나중에 하나님의 야곱언약이 계속해서 벌어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셨잖아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두 개의 용어가 다 나옵니다. ‘세상 끝 날이니까’ 시간이죠. ‘함께 있으리라’ 하니까 공간이죠. 시간과 공간의 중심지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다니까 그 중심지가 따로 설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없다는 말 이예요. 옛날 어느 적 오후 두 시, 아니에요. 예루살렘 그 중앙,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다는 말은 주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는 주님 쪽에서 드러내 줄 때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걸 ‘우발 성’이라 해요. 다른 말로 하면 사건!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같이 임의로 불매’ 요새 같으면 매일 바람이 붑니다마는 가끔 불잖아요. 임의로 불매, 성령이 임하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니가 교통정리 못하듯이 붙잡을 수 없듯이, 쉽게 말해서 소유대상이 안 된다 말이죠. 성령이 우리를 소유하지, 우리가 성령을 소유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특이한 장소 그곳에 가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특이한 기운을 소지할 수 있다는 그 편리성을 ‘교회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대신 대체해주신다면 그 교회 다니겠습니다.’라는 조건부로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를 주장하면서 이 역사는 옛날 어느 장로님이 기도하다가 큰 계시 받고 이 땅 사놨는데 이 버려진 땅이 갑자기 땅 값이 올라서 여기다 예배당 지었습니다. 역사성을 부여해 버리면 그 같은 기적적인 혜택을 맛보기 위해서 그 교회는 똑같은 걸 맛보기 위해서 그렇게 오는 거예요.

기도원 질 때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런 전설들이, 충청남도 서산 거기만 전설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기도원에 전설이 있어요. 이곳에 지려고 하니까 꿈에 나타나서 ‘그래, 이곳이다.’ 그런 식으로. 결국은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오동통한 ‘나’가 단독자기 때문에 이것처럼 하나의 아담으로 쫙 뻗어버린 여기의 일부가 아니고, ‘우리는 이거 되기 싫어.’ 내가 아담 속에 포함된 것은 싫고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그 속성이 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은 내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오동통한 내가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그것은 뭐냐, 하늘의 기적적인 힘이 나오는 그 중심지를 찾아서 그 사람의 자리에 접근하게 되든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엮이면 되겠죠.

그렇다면 오동통한 사람에게 필요한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바로 그것을 성경은 주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죄 성을 우리자신이 발굴할 수는 없어요. 알아챌 리도 없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니는 이런 죄를 갖고 있다.’라고 의도적으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6장 같은 경우에 5천명을 먹이죠. 사람들은 그게 올무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줄 때 주께서 우리의 죄를 이런 오동통한 나밖에 모르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런 이적을 일으킨 줄 모르고 오동통한 나밖에 모르는 이것을 주께서는 이걸 옹호하는 줄 알고 당연히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이걸 당연히 옹호하는 줄 알고 그 기적을 수용하고 우리에게 이런 기적을 베풀어준다면 우리가 왕으로, 임금으로 삼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협상합시다. 해서 줄기차게 예수님을 쫓아다녔잖아요. 산 넘고 물 건너서.

그때 주님께서는 이야기합니다. ‘왜 나를 따라오느냐.’ ‘우리에게는 옛날에 모세가 주셨던 만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만나가 어디서 오는 줄 아느냐?’ ‘우리는 받아 챙겨서 먹으면 됩니다. 어디서 오는지는 관계없습니다.’ ‘그 만나는 내 살과 내 피, 내 죽음이 주어질 때 비로소 만나가 내린다. 니는 만나만 쳐다보고 그 만나가 내 죽음, 예수님의 피와 살의 죽음에서 온다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으면 따라오고 없으면 못 따라온다.’ 사람들이 미쳤습니까? 못 따라오죠. 다 가버렸죠.

오동통한 나는 내가 필요한 힘만 먹을 것, 입을 것만 챙기면 그만이지, 오동통한 자기 자신이 독자적인 존재기 때문에 자기 존재 말고 예수라는 존재의 인생까지 관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거 해결 안 되면 오늘 요한계시록 20장 해결 안 됩니다. 서론 길은 게 긴 게 아닙니다. 허비한 게 아니에요. 다 연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는 내 문제만 신경 쓰면 되지, 나 바깥의 예수라는 그 하신 일과 운명에 대해서 내가 구태여 신경 쓰고 관심 갖고 관여할 이유가 나한테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절대로 안 나와요. 예수님이 주신 건 좋은데 줬다고 해서 예수님 종이 될 이유는 우리한테 하등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아니, 여러분한테 누가 좋은 것 주면 그 사람 종 됩니까? 말도 안 되죠. 동사무소에 가서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초본 떼 주면 그 다음부터 동사무소 아가씨 종입니까? 안 되죠. 사람은 누구한테 은혜를 받더라도 여전히 누가 중앙입니까? 내가 중앙이 되지 자기가 점유하고자 자기가 그동안 찾고자 하는 그 중앙지를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내 줄 의인 없습니다. ‘그냥 같이 있읍시다.’이 정도는 나오죠. ‘돈 버는 일이라면 우리 같이 있읍시다.‘이렇게 나오지, 내 자리를 ’나는 갭니다. 내 있을 자리가 아니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죄인인데 의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라고 그걸 포기하고 자기자리로 갈 사람이 없어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0장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형은 납작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흔적을 새기는 계시를 받는 그런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가 주인공 돼서 자기 앞에 전개되는 모든 예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을 자기한테 얼마나 유리할까, 불리할까를 계산하는 식으로 그동안 성경해석을 해왔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한 것은 오병이어를 행해서 사람들을 배불리게 해놓고 나중에 방금 떡 먹은 사람들에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떡 먹고 있었던 것은 생명인 겁니까? 아닙니까? 아닌 거예요. 주께서 생명도 아닌 걸 준 거예요. 왜, ‘니들은 이런 것 좋아하잖아. 너는 생명 아닌 것 좋아하잖아.‘ 그걸 먹고 ’아! 이건 생명이 아니구나.’ 그걸 알아라 이 말이죠.

‘나는 생명 아닌 것을 평소에 찾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알아달라는 이 말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준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준 것은 니가 원하는 것은 생명은 아니니라.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런데 생명이 아닌 것을 원하는 것을 보니까 니 자체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니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니 자체가 문제가 있게 되면 네가 찾고 네가 원하는 그 메시아라는 자체가 예수님도 아닌 엉뚱한 마귀를 예수 상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찾고 있는 거예요.

이 책(복음이냐, 교회냐)에 보면 뒤에 논문이 두 개 나오는데 마지막 70이레 논문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짐승 같은 그리스도를 원한다. 악마 같은 그리스도를 원하고 진짜 그리스도는 악마라고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그럼 왜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가, 그건 오동통한 인간 자체가 이미 죄가 규명된 아담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렇게 쫙 뻗어야 될 인간이 전부 다 이런 기름 위에 물방울처럼 전부 다 독자적으로 놀면서 공동체 유지하고 독자적으로 놀면서 우리끼리 손에, 손잡고 형제 사랑하고 사실 물방울과 기름방울이 백날 뭉쳐봐야 하나가 안 되는데 되지도 않을 이웃사랑을 그들은 해서 교회 흉내나 내보겠다는 거예요. 집사님 그렇죠? 사람을 아무리 구제하고 자선을 베풀어도 그 베풀고 자선해봐야 그 공로가 도로 누구한테 옵니까? 자기한테 오죠. 고무줄 튕겨봐야 나한테 도로 오니까.

이게 이미 선악과 있는 자리에 누가 점령했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인간이 점령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움직이는 선악과예요. 그냥 주님께서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나가.’ 선악과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상대하는 건데 예수도 아닌 게 예수님 행세를 하니까 얼마나 꼴 보기 싫겠어요? 그래서 나가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가니까 거기서 선악과 행세하는 거예요. ‘우리도 선을 알고 악을 압니다.’ 라고 행세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전부 다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독자적인 자기의 구역과 영역, 자기 나름대로의 중심체를 한껏 소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마지막 댐 뒤, 요한계시록 20장에 와서는 이 전체 이스라엘 역사를 아담이 쫙 뻗어있는 여기에 그리스도의 사건을 집어넣는 이것을 층층이 보여줘서 여기서 일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그걸 정리하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왜 인간은 새 시대를 오해할 수밖에 없느냐, 왜 모든 것을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돼 있는가를 그걸 말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0장 1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방금 읽은 요 구절에서 사람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사람이 안 나오죠. 사람이 안 나오는 것을 사람이 해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사람과 관련된 것만 사람은 해석이 가능해요.

지금 이 시각에 북한에 김정은 궁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제가 서울에 있는데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잖아요. 그 현장에 없으면 나는 모르는 거예요. 메일로 주고받으면 알겠지만. ‘나 지금 이거 한다. 컴퓨터 게임한다.’ 이러면 아는데 그게 아니고 그쪽은 북한에 살고 나는 여기 남한에 사는데 모르잖아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20장 1절의 이 말을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해석이 돼요? 해석이 안 됩니다. 해석이 안 되는 것을 사람들은 기어이 해석을 해내려고 시도하면서 그걸 계기로 해서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너 아까 해석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석했어?’라고 나오죠.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해석했습니다.’라고 나오면 그게 숨겨져 있는 자 기의 구원의 욕심입니다. 드디어 더 이상 감추지 못하죠.

그래서 정리하면 성경말씀은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우리의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했던 죄 성을 말씀을 줌으로써 그들은 그걸 반기면서 해석을 하는 순간에 그들은 포착되는 겁니다. ‘엉터리, 아, 드디어 엉터리 해석이 속에 내장돼 있었구나. 엉터리.’하고 탁 끄집어내게 됩니다.

해석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누굴 위해 증거 한다.‘ 그랬죠? 예수님이죠. 그러면 성경과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도 해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석 못하죠. 그걸 바리새인들은 해석을 못하는 사실을 모르고 해석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바리새인들은 속에 담겨있던 선악과 따먹은 악마성이 노출이 되는 겁니다. 해석이 안 되는 인간이 어설프게 해석을 하면서 자기 해석을 고집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것을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우리의 본색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악마의 본색으로 맞닥뜨리게 만들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빠지고 우리 속의 악마와 그리스도와 만나면서 비로소 요한계시록 20장 1절이 이해가 되죠. 천사가 무저갱 열쇠를 열어서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그 다음에 뭐를 잡습니까? 용을 잡으니, 1절과 2절 여기에는 누구는 빠져야 됩니까?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이 빠진다는 말은 인간은 빠지면서 요 성경말씀대로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어나는 효과에 대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습니까?‘ 저 효과를 저한테 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 하면 빠질 때 왜 빠졌습니까? 잘못된 해석자 일수밖에 없다는 그걸 확정지어 놓고 뺏다 말이죠. ‘니는 개입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야. 너는 어른들 노는데 니는 오지 마.’ 그래서 빼버리는데 빼버리고 난 뒤에는 기다릴 뿐 이예요.

그 다음에 용과 주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어느 누구한테 그 혜택이 돌아갈지, 안 갈지는 그건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거기서 ‘저도 천국 가고 싶습니다.’ 손 내밀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0장이 만약에 해석이 된다면 그 해석은 본인의 해석이 아니고 주께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마감하시고 마감한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그걸 안겨줄 때만 안겨준 결과물로 해서 이 해석이 해석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결과물이 뭐죠? 우리가 개입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마귀하고 상대해서 얻어낸 결과물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부활이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방금 “생명이요” 뭐라 했습니까? “부활”이죠. 여기 20장 5절에 보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첫째 ”부활이라” 그 다음에 15절 봅시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생명’이란 말이 나오죠. 여기 생명이란 용어와 부활이란 용어가 우리가 예상한 그 용어입니까? 아니면 주께서만 알고 있던 그 부활이요, 그 생명입니까? 주께서만 아시고 주께서 모든 걸 완성하고 난 뒤에 우리에게 혜택을 줬을 때만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용어죠.

그러면 그 혜택을 입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자세입니까? ‘제가 여기서 어떤 솜씨를 부렸습니다.’라고 할 수가 없죠. 왜, 완전히 ‘니는 나가 있어.’ 우린 빼놨잖아요. 우린 빼놓고 주님께서 홀로 그 용을 잡았다 이 말이죠. 제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악마를 용이라 하잖아요. 그 악마를 용이라 하는데 그 ‘용이다, 아니다.‘를 그 사전에 우리가 알아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아챌 수가 없죠. 왜냐 하면 20장 1절에 우리가 관여를 못한다니까요. 어느 분이 예수님이고 어느 게 악마라 하는 것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어요. ’니는 나가 있으라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성령이 온 사람에게만 ‘아! 무엇이 악마냐’ 가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데 대해서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전부 다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용이고 뱀의 하수인들이죠.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할 때 뭣에 근거해서 생명, 부활이라 했죠? 예수님의 십자가, 자기 죽음에 근거해서 그랬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 했잖아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근거해서 이미 뱀과 용을 이겼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분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판단해서 ‘저거 뱀이야, 악마야. 용이야.’ 할 수 있는 판단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말이죠.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 때 생명과 부활이 뭐냐,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에 근거 한다 그랬죠? 그러면 십자가 죽으심에 근거해서 우리가 나중에 ‘아, 저건 용이야, 뱀이야, 악마야.’라고 판단할 때 그때 무슨 기준에 의해서 뱀이고 악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그 세력들이 뭐다? 뱀이고 악마다 이 말이죠.

오동통한 나라는 존재가 있으면 누가 악마고 누가 뱀 이예요? 나한테 해코지하면, 나를 지옥 가게 한다면 전부 다 뭐가 돼요? 악마고 뱀이 되겠죠. 왜 나는 독자적인 존재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영생 구원받는 게 내가 우선 급한 기대가 되기 때문에, 이것에 충족하지 않으면 그게 누구라고 그게 악마고 뱀이 되고 만약에 나에게 충족이 되면 뭐가 돼요? 나의 메시아가 되죠. 이런 해석들이 잘못된 해석이 된다는 거죠.

왜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을 빼시는지 이제 아시겠죠? 요한계시록 마지막의 입장에서. 구약에서 내려오는 모든 층층은 이 마지막에 모아 놓으면 여기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인간의 근원적인 죄에서 나온 용어기 때문에 여기 모아 놓은 모든 용어를 우리가 해석할 수 있다? 못 한다? 할 수가 없고 여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이 사용한 용어만 여기다 사용한다. 사용하다 보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뱀이라든지 용이라든지 그 개념조차도 비로소 확실하게 새롭게 구성이 되는 겁니다.

구성된 것에 의하면 뱀과 용, 악마는 오직 누구와 결부했을 때만 정체를 드러냅니까? 우리하고 결부될 때가 아니고 누구하고? 내 구원 방해한다고 뱀이 아니고 사단이 아닙니다. 나보고 지옥 가라 한다고 이단이 아니에요. 누구하고 입니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느냐, 그야말로 율법에 속한 사람이죠.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 그 아비는 누구라 했습니까? ‘니 아비는 마귀니라.’ 바리새인의 아비는 마귀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누구의 우상처럼, 인간으로서는 제일 하나님의 의에 가까이 접근한 집단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처럼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바리새인이 해놓은 것만큼 그걸 15센티, 손이 조금만 더 닿으면 천국에 닿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일 높은 자리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바리새인이 앉아 있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구라 했습니까? 사도바울 아닙니까? 그 바울이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 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사울의 모든 것이 똥이라 했죠. 그동안 자기는 자기 배설물을 그렇게 쌓아올리고 그 위에서 돌아서서 구원받은 거 아닙니까? 배설물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에서 나온 것들이죠. 사도바울이 자기 몸에서 뭐했습니까? 율법에 완전하게 이르고자 하는 그 모든 노력들이 그걸 계속해서 배설물이 된다는 말은 그런 노력들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바로 악마적인 요소, 적그리스도의 요소가 있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용을 잡으니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이 용어는 우리 시간에서 나오는 용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이걸 일천년이라 해서 999년 그 다음에 하루 더하기 1년, 우리가 아는 시간 계산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왜, 애초부터 네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해석에서 누가 빠져야 된다? 우리 자신들의 해석이 여기서 빠져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일천년 동안 연구한다고 해서 뱀이 안 나오고 마귀가 안 나오거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 개인의 적은 내 하는 일에 방해하면 다 적이 돼요. 나의 원수라 하는 것은 내 일을 방해하면, 내 욕하는 인간들은 다 내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런 식으로 나의 원수를 규정한다는 그 원수에 누가 섞여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도리어 섞여 오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원수로 간주할 수밖에 없어요. 가룟 유다 같은 사람, 더 나아가서 수제자 베드로 같은 사람,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뭐라 했습니까? ‘나는 저주 하노니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고백에 대해서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옆에 뭐가 있었죠? 닭이죠. 그게 닭이 아니고 닭이라 하는 것은 여기 뻗어있는 인간의 몸에 붙어있는 보조 품이거든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그때,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그때의 상황이 닭에게 임하니까 닭이 우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우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언의 말씀이 우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스케줄의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말이죠.

그걸 알고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시나리오에 포함이 돼 있다 말이죠. 포함된 인간이 전체를 알 수 있습니까? 지는 포함이 돼 있는데. 포함된 것의 전체를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지, 지는 포함될 뿐인데,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파악합니까? 말이 안 되죠. 지는 전체 되시는 주님의 주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부분으로 가입된 것뿐이라니까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천년이란 용어는 누가 쓸 용어입니까? 주님께서 쓰시는 용어예요. 여기 역대상 16장 15절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찌어다” 천대란 말이 나오죠.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죠. 이 천 대라는 기간을 우리가 측정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천대를 누가 정합니까? 모세가 정합니까? 누가 정합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이 천대를 정하죠.

그러면 예수님이 천대를 정할 때 그 천대의 의미는 뭐냐 하면 마귀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효과가 뭐라는 것이 드러나는 그러한 수평적인 길이가 아니고 수직적인 영향력, 수직적인 고정된 상황,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천대가. 다 이루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천대까지 이르느니라. 아유, 천대 해석이 이렇게 어려워요. 천대 해석하는데 50분 걸렸습니다.

천대란 말은 너희들이 1:1이 계산한 것이 아니고 수평적인 1대 2대 3대 죽 늘여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예요. 그리고 이미 완료된 ‘천대다 아니다’하는 결정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뱀이 무엇이며 내가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 이미 모든 천대에 담긴 내용이 다 드러나는 그 순간이 천대의 시점이고 상황, 상태라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천대까지란 말은 뭔 뜻인지 압니까? 더 이상 모든 것이 누락됨이 없이, 모자람이 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고 완전한 거룩 상태거든요.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거룩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그 시간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영역이 생기죠. 시간으로 천대라 표현한 하나의 공간이 생깁니다. 그 공간 안에서는, 예수 안에서는 누구든지 의인이 되고 거룩하면서 천대의 다 이루심의 혜택을 같이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천대가 뭔가를 알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4-09 21:42 
가락교회120405-요한계시록20장(몸과 몸)36강b-이 근호 목사
제 36강b

요한계시록에 일어난 모든 일은 인간이 배제되었으니까 그럼 누구와 상대하는가, 예수님이 상대하죠. 그럼 예수님의 몸을 그려봅시다. 요한계시록 20장 안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 일대기,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렇게 쫙 여기에 전부 다 파노라마처럼 깔려있죠. 인간은 빠졌으니까. 말씀 자체가 예수님이 홀로 이루시거든요. 그럼 인간은 빠져 있고 예수님이 홀로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의 튀어나오는 결과물이 하나님이 주시는 용어가 부활이요, 첫째 죽음이요, 둘째 사망이고,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이고, 목 베인 것이고, 전부 다 여기서 나온 용어들이라 말이죠.

예수님의 몸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시간성이 없거든요. 예수님 자체는 묵시적 몸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나오긴 하지만 그 자체는 시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나옵니다. 선지자의 몸에 무슨 영이 들어있죠? 그리스도의 영, 보세요. 선지자, 예레미야나 이사야, 아직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오시기도 전에 그때 그들 속에 뭐 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있다고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나와 있잖아요.

그리스도는 이미 천지 창조할 때부터 관여 했죠. 말씀으로서 지혜로서. 잠언서 8장에 보면 그때 지혜가 등장해서 말씀으로 창조에 관여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그때는 숨겨진 몸에서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몸이 그냥 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홀로 당했던 모든 수모와 역할이 요한계시록 20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담고 있고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했던 그것이 쫙 펼쳐지면 그것이 남은 인류의 역사가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몸을 눕혀버리면 그게 인간의 남은 역사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 아까는 납작하게 된 몸을 누구 몸이라 했습니까? 아담의 몸의 납작한데다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루어진 것이 수놓듯이 여기다가 자수하듯이 재봉틀로 박아버린다 말이죠. 쫙 박아서 요한계시록까지 박을 때 이 박음질하는 모든 용어들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온 용어가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4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목 베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있다 했죠? 이분들은 누구겠습니까? 이분들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인 영혼들이 누구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똑 이렇게 안 죽어도 괜찮아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순교한 모든 사람들, 이 사람들은 짐승과 우상에게도 경배하지 아니했죠? 그러면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은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경배 안 했잖아요. 경배하지 않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결국 어떤 인간, 성도는 경배하지 않았더라면 이게 성도의 본인의 자질입니까? 능력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주신 주님의 말씀이 펼친 거예요? 주의 말씀을 펼쳐보니까, 베드로가 주께서 뭐라 했어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이 말은 원하는 길이 따로 있는 거예요. 원하는 길이 따로 있는데 주께서 계속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계속 갈 때 베드로는 목 베인 영혼에 포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거 누가 기도한 거죠? 예수님의 기도인데 그리스도의 몸에 성령이 들어온 사람은 이제부터 누구의 기도가 되는 겁니까? 성도, 우리 전부의 기도가 되는 거예요. 기도가 된다는 말은 그렇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기도하든 관계없이 그 식대로 우리의 뜻을 꺾는 식으로 아버지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바깥으로 배출해 버립니다. 펼쳐버리죠. 왜, 요한계시록 20장이 그러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첫째 부활에 포함돼 있습니다.

여기 4절 끝에 보면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이렇게 나와 있는데,  집사님, 이마에 뭐 표 있습니까? 손에 666 지우는 거 약, 지우개 있어요? 없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표 받았습니까? 받았잖아요.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 흔적을 가졌노라’ 그 흔적이 뭐냐 하면 성령이 주신 십자가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해석을 할 때 그리스도 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만약 우리 몸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마에 뭔가 영화처럼 십자가 표시가 나오든지 손에 표시가 나든지 있어야 돼요. 이거 자고 나온 사람이 이 표시 없으면 구원 못 받은 사람이 돼 버려요.

144.000이란 숫자가 있잖아요. 144.000이란 숫자를 누구만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사용할 수 있죠. 그러면 성도가 144.000을 이해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주 안에 있을 때 주께서 144.000이라는 사건을, 144.000을 주님만 아시니까 그 내용을 아시는 주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켜 버리면 그 사람은 144.000에 포함된 사람입니다. 144.000에 포함된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그 안에 같이 터지거든요.

그러면 144.000을 아실 때 그 아시는 주님께서 어떤 주님이십니까? 앞에 붙는 게 있어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144.000을 언급했잖아요. 그럼 누가 144.000에 속하느냐 하면 144.000을 언급하신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분의 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144.000이 되는 거예요.

그걸 인간들이 숫자로 ‘얼마야? 얼마야? 139998명, 이제 구원 얻었다.’ 우리 몸을 중심으로 이렇게 타이밍을 계산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돼요. 주님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찍 죽임을 당한 적도 없는 자기가 말씀의 중앙에 서서 지가 말씀을 지켜나가면 안 된다 말이죠. 우리는 이미 말씀이 144.000이라는 말씀을 지키고 그걸 역사 속에 펼쳐나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144.000되기 위해서 거기에 초대받은 겁니다. 지가 144.000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는 144.000에 해당 돼.’라고 초대되게 되면 그 144.000이 갖고 있는 말씀의 위력에 의해서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게 돼 있죠.

또 요한계시록 두 증인 같은 경우에 두 증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어디라 했습니까?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에 달린 곳이라 했죠. 거기 나란히 나와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따져 봅시다. 그 애굽과 십자가 달린 사이의 거리가 몇 천 키로 떨어져 있어요. 공간적으로 안 맞죠.

그러면 그 안 맞는 공간은 우리가 어떤 장소를 점유했을 때 우리 몸 중심으로 그 키로 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몸 중심으로 해버리면 십자가 예수님 죽으신 그 장소가 애굽이고 애굽이 소돔이고 소돔이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런데 그 장소는 뭐냐, 무슨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리스도께서 못 박혔다는 그 묵시적인 우발 성 사건이 터지면 그 터진 사건 안에서 성도가 같이 순교 당할 때 그때 그곳이 애굽이고 소돔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고 세상은 어두움으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내 중심으로 하면 존재가 되지만, 예수님의 몸의 중심으로 해버리면 모든 것이 임의로 부는 사건 하나, 하나, 말씀 사건에서 삐져나오는 말씀 사건입니다. 그 사건에서 우리는 144.000이 되기도 하고 천년왕국의 통치를 받는 성도이기도 하고 목 베인 영혼도 되기도 하고, 성경 전체가 한꺼번에 전부 다 우리한테 적용이 되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의 몸에 포함된 지체기 때문에.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 주의 말씀대로 실시하다 보니까 이 안에 포함된 사람도 본의 아니게 그 말씀의 적용을 공히 같이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요한계시록 20장은 주께서 공생애 때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고 그 이루어진 것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적용되게 되면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 겁니다. 목 베인 영혼은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절에 보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뭐가 있다? 복이 있고 거룩하다.

이 거룩하다는 이 말을 히브리서 식으로 표현하게 되면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거하고 요한계시록 20장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같은 말이잖아요. 같은 대상이고 우리라는 인간을 두고 주께서 말씀을 다 이루심이 히브리서 식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계시록 식으로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이미 ‘첫째 부활에 속한 자는 거룩하고 복되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뭐가 어려워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하면 우리는 이미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통치 안에 있고 성경 해석 할 것도 없네요. 할 것 없죠? 그런데 오동통한 내가 여기 서 있으니까 나는 지금 어떤 봉우리, 어떤 정경에서 그 다음에 무엇을 내가 가져와서 구원을 받을까, 자꾸 내 구원위주로 성경해석을 해나가게 되면 어떤 것 하나 해석 곤란한 겁니다. 뱀도 내가 골라잡아야 되고 내가 스스로 알아서 손에다 이마에다 십자가 문신도 해야 되고, 흔적도 없는 걸 흔적도 만들어 내야 되고, 성경 말씀 지킨다고 지 딴아 분주해요. 지 딴아 열심 낸다고. 이게 뭐냐, 오동통한 내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자체는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배제하고 우리 대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다 이뤘다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 다 우리에게 해당 적용되는 이야깁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5절에 봅시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천년이란 것을 기준이 돼서 이미 산 사람과 절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주어지죠. 그런데 여기 보면 “천년이 차기까지” ‘~까지‘란 말은 구차하게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설명하면 더 어려우니까, 이걸 영향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까지란 말은 이미 영향력이 종결된, 이미 완성된 영향력을 입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2장20절에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걸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우리 인간적 시간으로는 이렇게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만 하고 그 다음에는 난 몰라’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아니고 이걸 복음적으로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미 완료가 된 상태의 영향력 적용을 받는다.’ 이 말입니다. 까지란 말은 그 이후에는 시간이 진척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시간 진척이란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까지’ 하면 그것은 이미 모든 게 종결된 걸로 인정하라 이 말이죠.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란 말은 이미 심판을 이겼다 이 말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길 때까지’라고 표현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천년이 차기까지‘하면 이미 그건 된 거예요. 그 다음에 잠시 놓였다는 말은 풍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일하실 때, 나사렛 예수님으로 활동하실 때 성경에서 예수님이 활동을 하고 그 활동의 영향력으로 주께서 이미 천년 왕으로 오시고 그 때문에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이죠. 이 반응이 어떤 반응이냐, 예수님 때문에 생긴 반응이라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무게가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의 무게를 합쳐보면 우주 전체 5%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95%는 어디 있느냐, 그 중에 25%가 암흑물질이고 그 다음에 70%가 암흑에너지로 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별들이 찬란히 빛을 내도 하늘은 어둡다는 거예요. 일리가 있죠. 그리고 이렇게 안드로메다 수운에 태양도 은하계 속에 돌거든요. 돌 때 그 중심이 뭐냐 하면 이게 중심이 암흑 물질로 돼서 중심이 돼요. 눈에 띄지 않고 뭔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중심으로 빙 빙빙 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도 오동통하고 나도 오동통하고 내가 예수님 생각하면 예수님 생각나도 생각 안하고 내 일하면 생각 안 하고 이것은 마치 이웃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둘 다 오동통해서 단독자로서 존재하게 되지만.

악마는 그렇게 안 봐요. 예수님이 떴다 하면 벌벌 떠는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 기 안 죽었습니다. ‘어이, 니 어느 신학교 나왔어?’ 아주 당당했어요. ‘니 이단이구나.’ 바리새인은 당당히 이야기하지만 정작 무덤에 있는 귀신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여, 당신 누군지 압니다.’ ‘쉿, 그 입 다물라.’ 하죠. ‘주께서 하나님 아들이죠? 우리를 멸하려고 이제 왔죠? 멸할 때가 안 됐는데 왜 일찍 오셨습니까?’ 악마는 암흑물질에 해당되죠. 그래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데 이 바보 같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야,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야, 이 동네 우리가 접수했어.’ 이런다 말이죠.

우리가 오늘날 교인들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께서 말씀이 계시고, 은혜를 감사할 텐데 성령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주여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예배당이 예수님 계신 줄 알고, 자기 집에 가면 예수님이 안 계신 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공간적인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고 그 장소에 주님이 좌정해 계시고 바깥에 나가면 없는 줄 알죠. 이게 바로 우상숭배의 특징입니다. 우상숭배는 거룩한 공간과 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그 중심에 가야 접선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다 자기는 일상 속에 빠져 버리면, 그래서 멀리 떨어지면 영향력이 없다고 본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요나 나오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어디 향하여 기도했습니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데 바다 속에 있는데 기도발이 물길을 뚫을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 해야 영발이? 요나가 알았죠. 시편에 나오죠. 바다 깊숙이 있을지라도 하늘 끝에 갈지라도 아마존에 갈지라도 주님은 의외로 곁에 계신다. 주님 없는 곳으로 멀리 갈 수가 없어요. 바다 끝에 갈지라도 내가 거기 있고 시편 50편에 보면 산에 있는 고기를 잡아서 나한테 바치지 마라, 왜 산에 짐승 그냥 있어도 다 내 것이다. 그런데 뭣 때문에 잡아서 여기 나한테 가져오느냐 말이죠. 제물 때문에 너한테 닦달내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존재들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귀신들이죠. 귀신들이 나와서 귀신들이 알아서 기어나가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니까 귀신들이 제자들보고 물러간 것이 아니고 제자들 속에 있는 주의 능력, 권세를 보고 물러갔죠. 그런데 제자들이 좋다고 ‘주여, 주여,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졌어요.’ 하니까 주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그거 니가 했다고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뭔 뜻입니까? 악마가 떨어지는 영향력이나 니 이름이 기록된 이름이나 너가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어디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나의 존재에서 나오는 나의 힘, 예수님의 힘이죠.

 그 예수님의 힘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을 내 몸 중심으로서는 해석을 못한다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면 그 다음에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 그리스도의 안목에서 이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 그 나오는 그 내용은 오직 십자가 못 박힌 주님께서 이미 다 이뤄놨다는 사실만 고백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도 다 이루심을 보여줄 하나의 파장이라 말이죠.

하나의 지진파가 있잖아요. 그 지진파가 있음으로서 그 중앙에 일이 터졌음을 보여주는 지진파를 가지고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라 합니다. 예수의 증인이라는 것은 그 파가 와서 증인 안 될 수가 없게 만들어요. 성령은 주님 말 듣지, 우리 말 안 듣거든요. 주님께 속한 성령께서 주의 말씀대로 실시해 버리면 우리는 예수증인 안 되려고 해도 될 수밖에 없어요.

빌립 집사가 집에 있다가 왜 갑자가 광야에 갑니까? 수레 타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왜 만났겠어요? 베드로가 자기 집에 자고 있다가 왜 갑자기 뒤 따라 와서 고넬료 만나라는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모든 전도의 엮임은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 이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은 주제가 뭐냐, ‘예수님은 주시다.’ 그게 주제입니다. 인간이 어떤 식으로 한번 교회 만들면 된다는 주제가 아니라 예수님은 주가 되신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 천년이 차고 잠시 동안 누가 옵니까? 사탄이 옥에서 나오죠? 그러면 사탄이 잠시 옥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리 인간의 몸으로 계산하게 되면 천년 왕국 다음에 잠시 풀렸다가 그 다음에 악마가 옥에서 풀려 나온다. 우리 몸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으로 해석해 버리면 우리와 관련된 사건 따로 있고 그 시간에 예수님 몸 때문에 벌어질 악마의 활동 시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악마는 악마의 역할이 있어요. 무슨 역할이냐, 그 다음에 8절에 보면 악마는 자기 역할을 해야 되죠. 뭐냐, 사탄은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싸움을 붙이는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고 다 나눠주고 난 뒤에 가룟 유다보고 뭐라 했습니까? ‘가룟 유다야, 이제 니 할 일 해야지?’ 니 할 일 해야지, 할 때 제자들은 기룟 유다가 회개를 맡았기 때문에 오늘 행사비 카운터에서 치르는지 알았죠. 그게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그 시간에는 이쪽에는 무슨 일 해야 돼요? 가룟 유다는 저쪽과 가야바와 결탁해서 예수를 어떻게 소동 없이 말썽을 적게 일으키면서 조용하게 체포할 수 있느냐, 그 작당을 하겠죠.

그걸 예수님 몸에서 보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이쪽 사건(제자들과 떡 떼는)도 있어야 되고 가룟 유다 같은 일도 있어야 되겠죠. 그 두 가지 사건을 하나의 층층으로 하나의 지층으로 나란히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아! 우리가 이런 첫째 부활에 있을 때 이쪽 일도 생기는 구나.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성도들이 부활에 참예할 때 이쪽의 악마들과 다른 종들은 어디 가 있습니까? 둘째 사망에 소속돼 있는 거예요.

참, 여자분들 계신데 군대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훈련소에서 점호시간이 제일 괴로워요. 잠은 오죠. 꾸벅꾸벅 조는데, 당직 사관이나 고참들이 와서 괴롭힙니다. 군기 들라고, 일부러 고향 잊으라고 일부러 해요. 일부러 괴롭혀요. 왜냐, 한적하면 자꾸 탈영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때 내부반이 1, 2 내부반이 있는데 여기에 당직 사관이 하나가 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 명이 와요. 이쪽에서는 바짝 서있고 이쪽에서는 엎드려뻗쳐 있고, 보세요. 똑같은 시간에 한쪽은 엎드려뻗쳐 있고 한쪽은 바짝 서있죠. 그러니 한쪽은 유황불 들어가고 한쪽은 뭡니까? 부활에 참예하고 있고, 이걸 표면적으로 대보면 같은, 한 스크린에 여러 가지 장면이 같이 다 보이는 겁니다.

 주님께서 양발차기 하시느라 굉장히 바빠요. 마귀도 달아야 되고 이쪽도 달아야 되고. 그래서 여기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 말은 2000년 됐으니까 이틀 됐다 그렇게 계산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이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이상은 시간이 수천 년 수만 년 흘러도 그걸 마음에 두지 말라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역사를 종결하고 역사를 마감하는 것은 니가 시간 기다린다고 니가 알아서 마감되는 게 아니고 니가 예상해서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자기 반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 증거 할 때가 되면 알아서 가게 셔터 문 닫아버리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몸이 있거든요. 우리 몸에는 시간이, 기억이라는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출생지 어디십니까? 초등학교 어디 나오고 고등학교 어디 나오고 결혼은 누구하고 했다는 나름대로의 자기 일기장처럼 자기 역사가 새겨져 있죠. 역사가 새겨져 있는 폭이 좁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일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펼쳐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모든 일을 이것을 여기(우리 몸)다 담으면 개인의 시간성이라는 것은 엄청난 일 앞에서는 이건 일식 간, 다른 말로 하면 찰나, 또는 순간, 또는 안개니라. 또는 사람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고 하는 말이 적당하다. 니가 어디서 뭘 했는가, ‘있었어?’ ‘없는데.’ 없는 것처럼 있다. 시편에 30 몇 편에 보면 나옵니다. 안개고 순식간에 한 뼘 밖에 안 되고, 한 뼘은 오므려 보면 없잖아요. 백날 해야 이 뼈 바깥으로 못 벗어나니까.

주님의 모든 시간성을 우리가 이해를 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시간성이 따로, 진열대가 따로 있어서 여기다 이걸 박아버리면 우리는 소멸되고 왜곡되고 거짓말 돼 버려요. 심지어 우리가 기억해 놓은 우리 인생에서의 모든 만남이라는 것은 사실은 부채 살처럼 딱 접어버려야 돼요. 접어서 없애 버려야 돼요. 없습니다. 제 인생 없습니다.

왜 우리 인생이 없느냐 하면 주께서 인정한 것은 내 인생을 인정하지 않아요. 무슨 인생을 인정합니까? 아담의 인생! 우리 전체가 아담이고 아담에서 주께서 건져내버리면 우리는 구원받은 아담이 돼 버려요. 남겨진 사람은 저주받은 아담이 되고, 그리고 할 때 개인 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 몸으로서 구원받기 때문에 이름이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됩니다.

그러니까 집사님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받고, 집사님도 구원받고 저도 구원받으면 우리는 맞먹어도 되는 거예요. 왜, 자기 고유의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각자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있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가 그야말로 형제자매로서 통할 수가 있는 겁니다. 왜, 각자 오동통한 자기 게 날아가 버렸으니까. 자기 인생, 자기 기억, 있는데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부정당할 요소로서만 있는 거죠. ‘아! 내 인생, 내 청춘 이건 의미 없어.’라고 부정당할 인생으로서만 흔적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작은 아담으로서, 뻗은 아담으로서 있는 것뿐이지, 우리가 우리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입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하고 이런 걸 하면서 결국 제게 들려오는 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목사님, 방금 한 거 진짜 맞습니까? 제가 이야기한 게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실 때 의미가 뭐며, 부활할 때 의미가 뭐냐, 그리스도에게 찾아야 돼요. 당신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 나한테 찾으면 곤란합니다. 사람 경험은 다 조작된 거예요. 자기 기억을 근거로 해서 겨우 꾸며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이건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작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내 인생 이렇게 살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what happened. ‘주님한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가 모든 어떤 인간도 구원받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외에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으로 구원이 안 됩니다. 저주 받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게 십자가 복음 이예요.

교회 가면 각자, 각자, 개인 개인이 너무 많이 개인 개인들이 우글거립니다. 그 개인을 묶어낼 수 있는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묶어 내봐야 그 권력의 중앙에는 서로 자기가 차지하려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공자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세 사람만 길을 가도 그중에 하나는 스승이 된다. 그 말이 맞아요. 꼭 대장 하나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대장은 나중에 잘못 인도하면 쿠데타 역모를 당할 대상이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권력의 중심을 찾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모아 놔봤자 그야말로 교회는 될지언정 구원은 못 받습니다. 구원 못 받는 교회, 그건 헛수고 한 거죠.

중심이 그리스도가 돼 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나만의 것이라는 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만 구원받죠. 그리스도의 소유된 것으로만 구원받죠.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찻잔이 열 개가 있어서 나눠줬을 때 나중에 구원받는다 하면 ‘내가 준 찻잔 가져 오세요.’ 해야지, ‘저 여기 있습니다.’ 하면 안 받아요. ‘내가 준 것 가져 오세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께서 떡을 뗄 때에 한 덩어리 놓고 떡을 떼잖아요. 떡을 뗄 때 받아먹는 사람이 뭘 느끼겠습니까? 이 떡은 우리가 돈 낸 떡도 아니고 너가 돈 낸 떡도 아니고 예수님에게만 나온 떡이죠. 그럼 내 살은 너가 먹는 떡이고 내 피를 너희가 마심으로서 너희는 나와 하나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거기에 인간의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와 가치라 하는 것은 그건 용서가 안 되죠. 그건 용납이 안 되죠.

누가 하늘나라에서 높으냐, 이건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제자들이 늘 상 했던 일입니다. 왜, 그게 재밌잖아요. 선거가 재밌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앞서가면 재미가 없어요. 비슷비슷해야, 바둑에 눈터지는 개가란 말이 있는데, 그야말로 한두 집 차이, 퍼센트 이럴 때 재미가 있다니까요. 현재 80군데가 접전 지역인데, 재미가 있잖아요. 누구든지 싸움을 붙여놓고 재미를 느낀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니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누구든지 서로 싸움을 해야 삶의 활기를 느끼고 재미를 느낀다 말이죠.

목사님들 만나면 하잖아요. ‘교인 몇 명입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누가 많은지 시합해 볼까, 그 뜻이거든요. 그게 목회의 재미라니까요. ‘두 명입니다.’ 이러면 이건 ‘눈 깔아라.’ 화투에서 이건 패를 덮어야 돼요. 어디 두 끗 가지고 어딜 끼려고. 적어도 5천 명, 만 명 정도는 돼야 마지막 권력의 제일 중심에 서는 게임의 도박을 할 수 있는데, 이건 2명, 3명 모여서는 되지도 않죠.

이게 인간, 아담을 쫙 펼쳐 놓으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기껏 생각하는 것이 따먹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호하고 방어하고 정당화 하고 자기 의를 챙기는 그걸로 전 역사에 인간 몸을 뻗어놓은 거예요. 거기에 그리스도의 피로 거기다 수를 새기듯이 수놓으면 그 사람들만 그리스도 몸의 하나가 된다 말이죠.

그리고 그 작업할 때 다른 쪽은 뭡니까? 마귀는 저희끼리 모여서 그리스도를 대항하기 위해서 성도를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죠. 그러니까 이 전쟁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선택인 동시에 같은 시각에 여전히 전쟁은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영적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쪽은 지금 유황불에 들어가 있고 한쪽은 생명책에 구원받아 있고, 모든 것이 동시성, 현재 같은 시간에 일어난 장면들을 요한계시록 20장에 펼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요한계시록 2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현재 우리가 보고 있고 딛고 있는 하늘과 땅이 없다 했죠? 목사님, 이건 미래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는 미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미래가 없고 이미 다 이루었다고 보는 거예요. ‘거참, 이상하다, 아직도 이 땅은 시커먼 먼지 나는 땅인데 뭐가 이게 새 땅이냐.’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리 육신이 살아있으니까 이 땅인데 주께서 앞으로 장차 될 일도 주 안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서 너희는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다려야 됩니까? 아니면 다 이루어진 그리스도 십자가를 봐야 됩니까? 십자가를 봐야 구원받지, 앞으로 되나 안 되나 기다리면 구원 못 받아요. 중심이 십자가에 있지, 재림하는가 보자, 하고 망원경 들고 본다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성경 본문을 해석해도 반드시 십자가로 풀려져요. 이미 다 이루어진 사건으로 증거 돼야지, 만약에 ‘여러분,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립시다.’ 그러면 기다리다 졸아버리면 어떡해요? 침해 걸려서 ‘권사님 그렇게 기도만 하셨더니만 지금도 예수님 기다리십니까?’ 하면 ‘예수가 누군데?’ 그럼 수술하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심지어 그 질문을 집사님도 저한테 전에 하신 적이 있는데.

인간의 짧은 육신 속으로 말씀을 담아버리면 우리는 대기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몸의 만들어진 영화에 우리가 배역을 맡았다면 우리는 기다리는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은 그 감독은 이미 다 미래의 것도 확정돼서 이미 이루어진 걸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과거 완료로 표현돼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도 주님 만나 본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죠. ‘아이, 이쯤 나타나야 될 텐데.’ 그런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돌 던지게 하시는 일이나 내가 돌 날아온 가운데서 설교하는 그 일이나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내린 영화의 한 장면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이미 영화의 한 장면 속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란 말은 죽고 난 뒤에 기다리란 말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구원의 영역 속에 보이는 몸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장충 체육관 속에 하나의 바퀴벌레, 우리는 큰 체육관 속에 있는 바퀴벌레로 지금 꼬물락, 꼬물락 하면서 서울 땅에 모여 있는 겁니다. 바퀴벌레끼리 누가 착하냐, 이쁘냐, 하는 게 말이 안 되죠. 고슴도치끼리 누가 더 부드러운 털을 가졌느냐,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지 선악과 따먹은 걸 자랑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선악과가 가시처럼 튀어나왔는데, 부드럽고 성화됐으니까 한다면 안 되죠. 고슴도치의 털은 다 딱딱하기 마련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면 다 우리는 그 통속에서 출생된 거예요. 푹~ 젖은 거예요. 그냥 선악과의 죄에 푸욱 젖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죄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만든 겁니다. 따라서 죄 시커먼 것끼리 연탄 뒤집어쓰고 모여서 누가 더 하얗느냐를 비교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다만 그러한 역할 자체가 첫째 부활 속에 포함된 역할이라는 거예요. 첫째 부활됨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세력 속에 지금 시커멓게 연탄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실컷 뒤집어쓰고. 실컷 우리의 죄를 맘껏 발휘하고 보여줘야 돼요. 그 죄가 우리가 아는 죄가 아니고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 그런 죄가 쏟아질 때마다 우리는 감사,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 했죠? 우리는 앞서 일어날 상황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준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책이 몇 권입니까? 책이 몇 종류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행함 책에 가 있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는 어떤 징벌의 차이가 납니까?‘ 물어요. 하여튼 호기심도 대단한 호기심이죠. 책이  2권입니다. 생명책 1권 있고 그 다음에 다른 책을 사람 수대로 555억 권이 아니고 책이 달랑 두 종류의 책 이예요. 두 종류의 책이라면 이 생명책에 기록된 법칙은 동일하게 이쪽 다른 행위 책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두 가지 책은 ’구원 받았다.‘를 알기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한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에 이쪽에는 무조건 긍휼 이예요. 이쪽은 무조건 버림받음입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사‘입니다.

어떤 책이든, 생명책이든 행위 책이든 ‘니는 이만큼 행했으니까 이렇게 나빠.’하는 개인의 행함을 증거 하는 책이 아니고 주께서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셔서 그들로 하여 유황불에 빠지게 했느냐,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두 책이 있는 거예요. 항상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춰야 그게 옳은 해석입니다. 왜,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증거 한다 해놓고 돌아와서 내 증거 하면 그러면 논리가 앞뒤가 안 맞게 돼 있어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의인된 사람 이예요.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하나님께 죄악 된 자에게 자기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죠. 그 말은 행위 책에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바로 이런 사람에게는 바로 생명책에 있는 사람의 혜택이 이 사람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생명책은 누굴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니고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묻습니다. 행위 책은 누굴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까? 저주 받는 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만든 피조물 가운데 지옥 가야될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예수님의 행하심, 버림받음이 어떻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행위 책의 명단에 기록된 거예요. 둘 다 기록된 거예요. 누가 기록했습니까? 주께서 명단을 기록을 하신 거예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운명은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랑받기로 하기 위해서 명단이 기록되어 태어났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해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이 논리에 약간 어려움이 있어요.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미움 받기로 작정됐다면 야곱은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지옥 가야죠. 왜,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야곱이 에서 이름을 바꿔도 마찬가지예요. 그 이야기를 만약에 에서가 듣고 이제부터 ‘야, 이제부터 니가 에서하고 내가 야곱 할게.’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나라는 ‘에서는 천국 가고 야곱은 지옥 가라.’ 하겠죠.

예수님이 하는 일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하는가를 보고서 예수님의 일을 거기다 해버려요. 우리가 주의 뜻이라고 해서 잡으면, 고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주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피해서 다른 일을 만드는 식으로 주의 일을 벌여버리죠.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행함이 섞이지 않고 순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혼자의 작심으로서 구원받고 주님의 결심에서 지옥 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칼빈주의 예정론이 문제점이 뭐냐, 주님대신 뭘 집어넣는가, 주님대신 뭘 집어넣었습니까?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을 집어넣으니까 그 다음은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정하셨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한테 예정 받았겠는가, 안 받았겠는가, 가 골치 아픈 문제가 돼 버려요.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저 예정 된 자예요. 안 된 자예요?‘ 이런 질문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이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주님의 예정이 나와요. 주님의 예정은 우리하고 결정한 게 아니고 주께서 다른 주에게, 시편 110편의 말씀처럼 다윗이 말한 주께서 내 주에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이미 선택을 결정져놔요. 그럼 누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 선택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구원받을 자를 누가 만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이름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럼 ’아버지, 제가 선택 될 사람을 제가 알아서 만들겠습니다.‘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 따로 만들고 지옥 갈 사람을 따로 만들고 그걸 회수하는 식으로 주 예수 안에서 선택받아서 된 거예요. 창세전에.

그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뭐가 되느냐, 인간의 존엄성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 이예요. 인간은 일종의 인형 같은 존재다 말이죠. 주인만 기쁘게 하면 되지, 인형 지가 지 기쁘게 한다는 것은 우리 머리에는 넣지 맙시다. 앞으로도 지금부터 쭉 넣지 맙시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이건 죄가 되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주께 기쁘신바 되지 못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 주님입니다. 하나님 알고, 나와 하나님 관계가 아니고 예정으로, 우리는 빠지고 우리는 빠져줘야 돼요. 빠질 때 참, 우리가 서럽죠. ‘구원받는 당사자가 난데, 구원에 대해서 제3자가 결정 내려 버리면 나는 구원받은 내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느냐.’ ‘니가 왜? 그 자리에. 왜 끼는데? 니는 구원을 결과적으로 받으면 되지, 니가 구원 받겠노라고 손들고 나서서 열심히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한번 봐 주세요.’ 손 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11장 32절에 보면 나오죠.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오직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는 이유는 긍휼함을 입지 못하게 하심이라. 그렇게 결정하시는 고유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예수님한테 있음을 믿게 된 것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아! 나의 무거운 짐이 쑥하고 내 속에서 빠져 나가요. 빠져 나가서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과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한테 쑥 빠져나가서 주님 쪽에 가 있어요. 그런 상태를 간사한 것이 참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겁니다. 주께서 모든 걸 아시고 나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알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여기서 박수를 쳐야 됩니다. 주님, 짝짝짝, 참, 일 잘하셨습니다. 구원될 자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받고, 생명책에 기록이 안 된 사람에게는 다른 책,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은 다 유황불에 내어주니, ‘일 너무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구원된 사람이고, ’아이쿠, 같은 인간인데, 저 사람 내 자식인데, 저 사람 내 마누라인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저 사람 예수도 안 믿는데 저 사람과 헤어지면 나 그런 주님 싫어.‘ 이러면 너는 원래부터 날 싫어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 이예요.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더라도 싫어한 게 있었는데 그 일을 통해서 그 말씀을 줌으로써 그 자기의 본색을 들통 내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오묘하심, 우리는 그것마저 그분 앞에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미 다 이루어진 일이 앞으로 남은 역사 가운데 어떻게 펼쳐질까 미리 당겨서 보았습니다. 헌 하늘과 헌 땅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하셨고 마지막에 유황불 들어간다 하셨사오니 비록 앞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벌써 이루어진 일로 믿게 하시니 이 모든 능력이 성령의 은혠 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