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7강-새 하늘과 새 땅 1204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6. 09:26

2012-04-20 01:19:46 조회 : 1408         
새하늘과 새땅 120419 이름 : 이근호 (IP:117.55.1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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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419-요한계시록21장(새하늘과 새땅)37강a-이 근호 목사
제 37강a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렇게 돼 있죠? 여기서 사람들이 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제거하니까 하나님께서 옛 하늘과 옛 땅을 제거하니 사람들이 지는 하나님이 아닌데 지도 옛 하늘과 옛 땅을 제거한 것처럼 이렇게 처신을 그렇게 한다는 그런 오류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하나님께서 치워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다고 하니까 건방지게 자기도 ‘나 이제 옛 하늘과 옛 땅하고 상대 안 할래.’ 이렇게 나오니까 그게 인간은 오버하는 게 되죠. 너무 인간들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해서 새 하늘과 새 땅만 쳐다보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주께서 치워버리겠다는 옛 하늘과 옛 땅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쳐다보고 그걸 좋다고 기다리는 그 사람이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알아야 돼요. 누가 야구를 할 때 홈런을 치니까 자기는 홈런도 치지도 못하면서 지가 덩달아서 홈런 쳤다고 좋아하거든요. 그럼 관중석에 있지 말고 니보고 나와서 쳐 보라 하면 지는 공을 치지도 못하고 피해버리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 속한 말씀인데 마치 나한테 당연히 속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들을 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할 때 우리는 먼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옛 하늘과 옛 땅은 어떤 원칙 속에 그동안 관리돼 왔는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돼요.

자, 이쪽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하늘과 처음 땅이 이렇게 있으니까 여기 처음하늘과 처음 땅을 없애 버리고 이렇게 바꾼다 하니까 우리는 여기 서서 박수 치면서 ‘나 처음하늘 안 들어가고 나 여기(새 하늘) 들어갈래.’라고 나설 수 있는 여기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는 거예요.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우리가 제 3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시면 난 내 선택 여하에 따라서 이걸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처럼 오해들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은 사실 우리 인간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해준다는 것이지, 우리 듣기 좋아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무리 만들어져도 우리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를 약을 올리는 겁니다.

제가 멍멍이, 개고기를 못 먹거든요. 못 먹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목사님, 오늘 맛있는 거 준비했습니다.’ 그럼 나는 잔뜩 기대해서 ‘오늘 점심은 굶어야지. 그래서 저녁 때 맛있게 먹어야지.’ 일방적으로 잔뜩 해놓고 ‘그래서 뭐 했는데요?’ 개고기 탕에다가 개고기 편육에다  개고기 무침에다 개고기 회에다 전부 다 개고기로 할 때 난 뭘 느끼느냐 하면, ‘왜 나는 저분이 좋아하는 그 개고기에 난 왜 끼어들 입장도 못되는가.’ 생각을 해보죠. 그러면 그 다음에 뭐냐, 저분은 개고기 세계에서 개고기를 즐겨하는 세계라면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것은 전혀 개고기를 못 먹는 다른 세계에 내가 놓여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야기가 간단한 거예요. 다른 세계에 놓여있는 내가 저분이 좋아하는 개고기를 준비했을 때 난 거기서 건너갈 수 있다? 없다? 건너갈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게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나님한테는 좋아요. 우리한테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해석하고 이해를 해야 돼요. ‘아! 그림 속의 떡이구나.’ 왜, 우리가 현재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우리가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으면 일단 빠져 나와서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주께서 새 하늘과 새 땅 만들면 이렇게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헌 나라와 헌 땅,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빠져나올 도리와 방도가 없다는 거예요. 교회 나오고 뭘 해도 소용없어요. 여기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고 옛 하늘과 옛 땅과 한통속으로 굴러가고 있는데 거기다가 ‘ 니 개고기 맛있지?.’ 해봐야 그림의 떡이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우리와 해당도 되지 않는 문제를 이렇게 주께서 언급하신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자들이 문 닫고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똑똑 문 열어 주세요.’ 이런 것 없었거든요. 그냥 그들이 벌벌 떨면서 아마 문을 철저히 닫아 놨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홀연히 등장했을 때, 제가 질문을 하나 할게요. 들어오시는 것은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제 질문이 뭐냐 하면 제자들이 무슨 수로 주님께서 그 현장을 떠났을 때 어떤 수로 같이 따라서 떠날 수 있는 출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너희들이 무서움에 떨고 있다.’라고 통보해 줬는데 주님이 창 자국, 못 자국 보여주고 이야기하시다가 가셨잖아요. 가실 때 같이 새끼로 묶어서 같이 떠나갈 수 있는 출구가 우리한테 허용이 됩니까? 안 됩니까? 허용이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오시고 가시는 게 가능한데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영접했을 뿐인데 갈 때는 따라 나설 수 있는 그런 출구가 우리한테는 일체 허용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50년, 목사, 장로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란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주님 따라 못 가는데 교회 져서 왜 그러한 이상한 짓을 하죠?

어떤 분이 결혼에 대해서 언급해서 제가 그걸 생각했다가 십자가마을에 ‘결혼의 의미’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제 출발점이 그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짝 지어 준 것을 사람이 함부로 헤어지지 못한다. 남자에게 복종해야 된다.’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결혼’이라는 게 이상한 짓이라는 겁니다. 출발점이 이상한 짓이라는 거예요. 혼자서 살아왔잖아요. 혼자서 살아온 것이 습관화되고 이것이 계속 혼자 살아왔으면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면 되는데, 친구야 그냥 사귀면 되지, 친구는 같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사는 것은 식구들과 혼자 살아왔고 나중에 식구들 다 늙어 돌아가시면 혼자 사는데 혼자 사는 버릇으로 계속 혼자 사는데 왜 그것을 생판부지의 사람과 같이 살아야 됩니까?

이게 아~주 이상한 짓 이예요. 참 이상한 짓 이예요. 친구로 사귀는 것은 이해하자 말이죠. 친구는 만날 같이 사는 건 아니니까, 좋았다가 헤어지면 집에 가니까. 그런데 친구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그런데 내 사는 방에 들어오고 화장실도 같이 사용하고 지가 뭔데 밥을 나한테 해주고 내가 뭔데 그한테 용돈을 주고 그분이 뭔데 내 손빨래를 지가 하느냐 말이죠. 이건 정말 이상한 짓이다 이 말이죠.

평범한 것 같으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상식 같으면 이것은 일단 결혼하고 난 뒤에 ‘잘하자’가 되지만, 안 되도 되는 일을 억지로 이상한 짓을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헤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신경을 써야 돼요. 처음부터 혼자 사는 사람이 풍속 따라 주변의 권유 따라 강요 따라 이렇게 억지로 하나 됐으면 그 다음부터는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한 짓이기 때문에 혹시 언제 삐져서 ‘갈라서자.’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써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을 하는 것도 신경을 쓰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 끝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언제 틈만 나면 갈라설까를 염두에 두고 그걸 억지로 붙잡아 매는 곱빼기 노력을 경주를 해야 되니 이건 이상한 짓에다가 이상한 노력까지 첨부를 해야 되네요.

동물들을 보면 한 가족이 이렇게 부부가 같이 사는 동물들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새끼 낳고 일단 역할은 다 끝났으니까 서로 갈라서는 겁니다. 새끼 낳고 난 뒤에 남편은 다른 암수 만나든 수컷이 다른 암컷을 만나든 간섭하는 것도 없고 암컷이 다른 수컷을 만나서 새끼를 낳아도 수컷이 책임지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얼마나 쿨 합니까? 시원해요.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새끼 낳기 위해서 결혼한다면 오히려 새끼 낳아 주었으면 그 다음부터 서로 서로 새끼 하나, 둘 낳아 주었으면 그 다음부터 새끼 얻었으면 됐다 이 말이죠.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하지 말고 니는 니, 나는 나, 간섭하지 말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새끼 낳고 난 뒤에도 왜 그렇게 간섭하고 어디 가면 못 가게하고, 왜 그런가.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 나와서 미안합니다. 좀 어렵게 해야 되겠어요. 옛 하늘과 옛 땅,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속에는 어떤 너희들이 모르는 잉여분의 원리가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하늘과 땅은 이런 여분의 원리 때문이 아니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남자, 여자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자식 낳기 위함이고 서로 끌려서 그런 거거든요. 그럼 끌려서 결혼하는데 끌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뭐냐, 틈만 나면 모세가 이야기한 이혼증서 써주고 틈만 나면 이혼증서 해서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이혼해서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자기 욕정을 만족할 새로운 짝을 찾는 거기에 아주 예민해 있어요. 어떤 수를 쓰면 하나님 앞에도 죄가 아니면서도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거기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잖아요. ‘모세의 말한 이혼증서 써주면 되지 않느냐.’ 할 때 예수님 말씀이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그 다음에 내가 속으로 웃었어요. 제자들이 하는 말이 ‘ 그러면 누가 결혼하려 하겠습니까?,’ 아! 참, 솔직하죠? 한 여자 하고 살 것 같으면 처음부터 그랬다면 못 헤어진다면 결혼 미쳤다고 합니까? 결혼이 그야말로 미친 짓이죠. 지가 스스로 굴을 파고 굴속으로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은 자기 선택 없이는 답답해서 못 삽니다. 자기 선택!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이 결혼을 내가 선택했다는 걸로 쳐달라는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내가 알아서 내가 원해서 결혼한 걸로 하나님도 그것 좀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초를 쳐버리잖아요. 니가 결혼하고 싶어서 했든 발작을 했던 실수를 했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듣고 천당 갈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것은 이혼하고 안 하고 간에 마음에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이미 애정이 식어버리면 이것은 이상한 짓을 하다가도 다시 정신 차려서 제 정신으로 돌아온 거예요. 요 말이 어렵습니다. 결혼한 것이 이상한 짓이 되고 결혼도 내가 선택하고 이혼도 내가 선택하고 다시 결혼하고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해도 내가 선택하고 이것을 우리는 정상적인 나의 욕구와 부합되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합되는 일에 주님께서 박수를 쳐줄 때 우리는 주의 말씀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브레이크를 걸어버리니까 그 당시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면서 ‘그렇다면 누가 결혼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 뜻을 그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결혼 못하지.’ㅎ 이게 더 어려운 문제죠. 그러니까 아무도 결혼 못하는 거예요. 결혼을 해놓고 다른 남자, 다른 여자 찾는다는 그 자체가 이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게 아니에요. 지가 선택한 거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옛 하늘과 옛 땅 안에서는 니가 마음껏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결과가 하나의 똥, 오줌 배설물로서 옛 하늘과 옛 땅을 더욱 더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과 교체되는 이유를 니가 짊어져라 이 말입니다. 맘껏 내놓아라, 꿍하고 있지 말고 니 속에 들어있는 니 하고 싶은 대로, 아까 뭐라 했어요? 인간의 사는 목적이 뭐라 했습니까? 자기 선택! 사업을 하던 뭐를 하든, 남이 아무리 좋은 것 갖다 줘도 처음엔 기쁘지만 나중에는 짜증나요. 아유,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가 하는 거예요. 사람은 내가 할 때 나라는 정체성이 확립이 되고 나라는 존재 이유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땅과 하늘 속에 아담을 만드시면서 아담이 땅과 하늘 속에서 무슨 죄들을 맘껏 발산시키고 그것이 결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해야만 될 근거를 이 땅에 질펀하게 펼치는 그러한 활동들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우리 자신들이 포함돼 있고 옛 하늘과 옛 땅이 망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이야깁니까? ‘니 망해야 돼.’ 그런 이야기예요. ‘니 망해야 돼.’라는 그걸 보고 우리는 마치 제 3의 영역에 따로 빠져 나와서 ‘나 새 하늘과 새 땅 들어가야지.’ 이러고 있다 말이죠. 누구 맘대로? 참,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인간이 자기 선택하는 그 더러운 버릇이 심지어 주님의 말씀 가지고 선택하려고 하는 거예요. ‘난 처음 하늘은 싫어. 새 하늘? 나 거기 들어갈래.’ ‘누구 맘대로? 아직도 니가 선택하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인간이 선택해서 들어간다면 그 선택이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고 어디에 적용되는 원리냐 하면,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맘껏 지가 기껏 써먹었던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원칙 중 일부에 포함이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21장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라는 말은 이건 사실은 인간한테는 해당도 안 되는 겁니다. 슬슬 약 올리는 거예요. ‘아이쿠, 나한테는 주어지지도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2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어디로부터 오죠? 하나님께로부터 오죠. 이게 웬 횡재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자들에게 문이 닫혔을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찬스입니까? 부활의 나라에 가기를, 주님하고 허리끈 해서 야무지게 꽉 잡고 주님 떠날 때에 꽉 붙들고 있으면 같이 타임머신 타고 부활의 세계에 같이 들어가면  좋겠는데 그게 소용없는 거예요.

그럼 주님 떠나버리면 또 어디 놓여 있습니까? 역시 옛 하늘과 옛 땅에 또 놓여 있는 거예요. 주님은 혼자 왔다갔다 다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혼자 출입구를 아시고 혼자 출구를 아시는 거예요. 우리는 출구가 어디 있느냐를 지금 찾는데 그 찾는 방식 자체가 나의 선택과 기껏해야 옛 하늘과 옛 땅에서 회자되고 풍문에 떠도는 그런 방법들 있잖아요. 십일조, 기도, 헌금, 예배, 예수 믿기, 성령 받기, 그런 온갖 성경에 나오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더듬거리면서 그걸 연결시켜서 조직신학 이름으로 짜임새 있게 신학을 외우기도 하고 빡세게 기도도 해보고 금식도 해보고 하지만, 그게 출구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무슨 짓을 해도 출구를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다 안 되니까 몸부림 쳐보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기도도 해보고 가만히 있으니까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지옥 갈까봐 겁나서 헌금도 해보고 그냥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다 씨잘 데 없는 짓이죠. 그게 출구가 아니다 말이죠.

어떤 경우는 자기가 잠시 착각할 때가 있어요. 기도하고 난 뒤에 은혜 받아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가 부르면서 하는데 그 5분 지나면 또 ‘여보, 당신 속도 과속했나?’ ‘왜?’ ‘구청에서 벌금 나왔네.’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다 날아가 버리고 벌금에다 오후에 애가 ‘엄마 성적표 가져왔다.’ 하는데 보니 20등 하던 애가 25등으로 떨어져 버리면 화가 나서 새 하늘 새 땅이 아니죠. 내가 선택한 니가 왜 못 났냐고 자기에 대한 자책감을 ‘아유, 왜, 나는 이런 것밖에 선택 못해.’ ‘뭘 더 선택할 수 있는데? 니가 무슨 선택을 해봐라. 출구가 되는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출구가 안 돼요. 왜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옛 하늘과 옛 땅의 특징은 우리를 가두어 놓는 하나의 잠수함, 동굴 같은 겁니다. 야무지게 가두어 둬서 어떤 인간도 거기서 탈출이 불가능한 그러한 밀폐된 용기, 그러한 그릇.

창세기 7장 노아 홍수에 보면 우리 상식에서는 비가 위에서 오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땅의 샘이 터졌다는 거예요. 땅의 샘이 터졌다. 땅에 그리 물이 많았는가, 그런데 과학자들이 지각 50킬로미터, 2500킬로미터까지는 맨틀, 총 6000킬로미터까지는 외핵, 내핵, 여기 지각에 있는 태평양 바다에 있는 모든 바다보다 여기 맨틀 안에 있는 물이 10배가 더 많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7개판들이 있는데 판들이 밀도가 높은 판이 있고 밀도가 약한 판이 들어가는데 밀도가 높은 판이 대륙판이고 아래 빠지는 것이 해양판인데 해양판들이 물을 가지고 자꾸 깊숙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밑에는 지하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확실한 증거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성경에 보면 밑의 샘이 터지면서 지금은 그런데 그 당시는 우리가 알 수가 없으니까 샘이 터지면서 아래위로 물바다가 된 거예요. 이 말은 뭡니까? 무지개라 하는 것은 ‘너는 물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이제사 알았느냐. 물속에 갇혀있지만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갇혀 있기는 갇혀 있는데 물로 조지는 그런 식으로는 갇혀 있음을 확인시키지 않겠다. 나중에는 베드로후서에 보면 불로서 조지겠다. 그러면 결국 이 말은 뭡니까? 옛날에 노아 홍수 때는 아래위 물이 있는 것처럼 지금은 불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하는 불이라 돼 있죠? 항상 모든 것이 불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그때가 되면 지구가 어떻게 된다? 종이에 라이터 대면 홀라당 타잖아요. 타버리면 분명히 종이가 있었는데 타버리면 종이가 없어지죠. 그때는 한마디로 없다. 불에 태워서 있는 것을 뭐로 만든다? ‘없다.’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없다는 것을 비디오 거꾸로 하듯이 되감기 해봅시다. 없다는 것을 되감기 하면 있다가 되죠. 우리는 그 있음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게 영원한 줄 알고 ‘없어질 그 있음’에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다 걸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어떤 원리에서 그것이 물로 보호받던 것이 불로서 태우는가,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는 상관이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그거, 눈에 보이는 것에 달 있고 나 있지, 별 있지 나 있고, 그게 전부예요.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를 제가 한번 봤어요. 그냥 이렇게 슬쩍 봤는데, 왕이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렇게 둘이 사랑해봤자 갇혀 있잖아요. 갇혀 있고 사랑할 때 얼마나 나의 선택을 우쭐대겠습니까? ‘내가 저 여자 선택하길 난 잘했어.’ 백날 선택해도 그곳의 열매와 결과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이 안 돼요. 왜, 단절이 돼 있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는 본문 2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주셔야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서 내려온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는 거죠. 마치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을 때에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들이닥친 것처럼.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들이닥쳤을까요? 주님께서 개구멍으로 안 오시고 왜 홀연히 나타났을까요? 자기 백성 말고 아무도 못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입구가 없다는 말은 출구도 없다는 말이고 없는 출구에서 어떤 사람이 홀연히 사라졌다면 그 사람은 지가 알아서 찾아 간 게 아니고 누군가 데려갔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처럼 데려가는 식으로만 구원된다는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확립한 원칙이라는 겁니다. missing, 실종, 실종된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어려운 문제 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처음하늘과 처음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흔적과 원리가 여기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없다. 이게 질문입니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 뭐 긁고 지나간 어떤 흔적이나 증거물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까? 안 생겨났습니까? 생겨났죠. 생겨났습니다.

그걸 제가 설명하고자 합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갇혀있다고 보여주면서 거기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징후 같은 것이 여기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하기를 ‘자꾸 지금 있는 하늘과 땅에서 얼마나 잘 됐는지, 그런 유의 기적, 흔히 교회서 말하는 복 받은 그걸 기대하지 말고 ’요나의 표적‘을 가지고 진정한 복이라 했거든요.

그럼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죽음-> 사는 것이다. 죽음에서 산다는 이 아이디어는 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인간들은 누구나 다 그런 걸 상상해요. 그런 의미에서 죽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왜, 인간은 살다보면 괴로우니까 ‘빨리 죽고 좋은 나라 가고 싶다.’ 이런 것은 종교 상관없이 교회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엎어지면 ‘하나님’ 이고 교회 안 나가도 ‘예수님’ 부르짖으면서 어떻게 도움 요청하려 하는데, 뭐가 여기서 떠오르느냐 하면 이런 죽음 자체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증거물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제가 방금 이야기하기를 옛 하늘과 옛 땅은 뭐를 품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을 품고 있다. 그러면 품고 있으면 우리는 파악하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품고 있는데 우리는 그 증거를 뭐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선택성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키는 실수를 자꾸만 범하게 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면서 ‘아, 나도 죽어서 사는구나.’라고 안심들을 하시는데 그건 소용없는 짓 이예요. 뭔가 이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짓들이 보이더라도 그 해석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죄악 된 습관이 거기다 스며들어서 그것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덤벼들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나버려요. 제대로 흔적을 흔적의 가치답게 파악할 수 있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는 요 말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먼저 흔적에 희한한 흔적이 있어요. 히브리서 7장 봅시다. 얼마 전에 제가 주일 오전에 요 대목을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서 7장에 2절에 보면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죠? 그냥 제사장으로 오래 한다. 이러면 될 건데 제사장과 관련됐는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이야기를 왜 구태여 제사장하고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이걸 집어넣느냐 말예요. ‘어떤 분이 제사장직을 오래합니다.’ 이러면 될 걸 가지고, ‘어떤 마을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계시는데 그분은 늙어 죽을 때까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하면 되는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걸 구태여 밑에 깔고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뭘 뜻하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가 어디 훌륭한 도사 같은 제사장 없나, 우리가 나의 선택, 기존의 것 말고 진짜 훌륭한 제사장 없을까, 이렇게 어떤 선택을 우리가 하게 될 때 그 멜기세덱은 선택될 수 있는 대상에서 멜기세덱은 인간에게 포착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옛 하늘과 옛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흔적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잡으려 하면 안 잡히는 그런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예수님 왔을 때 허리끈 잡고 빡세게 테이프로 아예 다리를 칭칭 감아서 ‘주님 가시는 곳에 나도 따라 가렵니다.’ 이렇게 돼야 될 텐데 ‘니는 죽어도 못 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같이 가는 게 아니고 뭔가 떨치고 가는 거예요. 떨치고 가야 될 이유가 ‘너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했고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했기 때문에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넘어 갈 때에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끊어질 것은 다 끊어지고 떨어질 것은 다 떨어지는 그 작용으로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살려고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지, 어느 인간이 ‘나 지옥 가게 해 달라.’고 데모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거든요. 혹시 행여 하나님이 속을까 싶어서 ‘주여 저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하면서 속으로 ‘웃Ti, 이렇게 겸손하면 주께서 알아주겠지.’ 꼼수는 꼼수로 망합니다. 민주당이 꼼수 쓰다가 꼼수로 망한 게 민주당 이예요. 꼼수로 망하는 데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통하지만 주님한테 통할 리가 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시편 37편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구원은 어디서 건진다? 악에서 건진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는,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결국 옛 하늘과 옛 땅은 저한테는 개고기 먹으라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예요. 전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고 좋은 나라 가서 오래 살아볼까 하는 이런 꼼수는 전부 다 거절해요.

그렇다면 주께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하나님의 신부가 위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를 건져 가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을 만드는데 그럼 여기 위치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원리를 가지고 옛 하늘과 옛 땅에 들어오면 오면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우리가 미워질 수밖에 없는 원수의 양상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모든 내 뜻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옵니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얼굴이죠. 악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모습으로 와서 우리가 그분을 쳐 죽이고 그렇게 해서 그분이 주님 메시야를 기다리는 나보고 ‘니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적받는 그러한 양상을 띠는 거예요.

자, 여기에 우리가 있고 주님이 계시다 합시다. 주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존재, ‘나 있습니다.’ 존재거든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우리가 보통 사람 만나듯이 ‘나 여기 존재해 있으니까 주님도 존재로 나타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 몰고 온 바람은 뭐냐, 존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 하늘나라에 합당한 개념과 언약과 분위기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동감되는 하나님의 의와 전쟁, 율법, 이런 것들이 여기서 죽~ 몽고의 황사바람처럼 이런 것이 몰려오는 거예요. 몰려오게 되면 결국 이 속에 뭐냐 하나님의 원수가 포함돼 있다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덮쳐서 와 버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원수라고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고 원수다운 태도를 오신 주님 앞에 맘껏 보이게 돼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해버리면 ‘내 행함과 내 자존심과 내 체면 뭐가 됩니까?’ 이런 소리가 팍팍 유발되게 하는 거예요.

이건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합시다. 이건 실제는 못 봤습니다만 드라마를 예를 들겠습니다. 며느리가 바람을 피워서 도망을 갔다 합시다. 그걸 보고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서 ‘니 들어오기만 해봐라. 애는 덜렁 시어머니께 맡겨 놓고 지 혼자 바람나서 젊은 애하고 놀아나는 나쁜 여자’라고 했을 때 속이 상한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니까 남자 주인공이 착한 역할 해야죠. ‘어머니, 세월이 10년 지나고 애도 엄마를 용납한다 합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니 어머니도 고만 아들을 봐서 며느리가 나가서 폭삭 망해서 빈털터리가 돼서 온다 하니까 그냥 받아 주세요.’ ‘그래, 니가 정 그렇다면 내가 용서해 줄게.’라고 하는데 점점 더 며느리가 집 가까이 오거든요. 생각은 용서를 했는데 그 오는 꼬락서니하고 머리 귀신같이 해서 거지꼴해서 들어오는 걸 보니 옛날 일로 부아가 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믿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믿어요.’ 하는데 막상 주님께서 들이닥칠 때는 우리가 그만 부아가 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부아가 나서 ‘주님 믿는데 나한테 돌아온 게 이것뿐입니까?’라고 부아가 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성공한 거예요. 니 자리를 시편 37편 40절, 원수에게서 구한다. 이 시편을 누구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한테 하는 거거든요. 다윗의 자손 이야기니까. 이게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원수에게서 건져낸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씨앗 이예요. 그것이 성령으로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구원의 씨앗이 오게 되면 시편에 나오는 악인, 원수 다 누구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구원받는 당사자, 우리를 악인 만들고 주의 원수 만드는 작업과 동시에 ‘우리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긍휼과 자비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절차는 치우고 우리가 착한 양심, 착한 신앙인 돼서 주께서 저만치 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기다렸습니다.‘ 라고 박수치고 환영해서 그런 식으로 메시야를 영접해서 하늘나라 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었다 말이죠. 우리 대신 앞당겨서 주님 오실 때 메시야 오기를 만만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없다고 해서 남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그 현장에 가보세요.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름타고 오시는 분을 기다렸지, 초라한, 만날 우리에게 죽으라고 이야기하는,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런 되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분을 우리는 믿을 의사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선택의 가치가 윤기가 나고 빛이 나는 그런 협상과 타협의 대상자를 우리는 원했던 거예요.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했거든요. 지옥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바리새인이 얼마나 메시야가 오기를 자기 정당하게 요즘으로 개혁주의 성화죠. 자기를 얼마나 정갈하고 철저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관리해 왔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그의 아비가 누구라고? 악마죠. 악마가 그 일을 시켰다고, 주님께서 그 이야기를 안 했으면 주님도 곱게 인생이 좋을 텐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결혼해서 애 낳든지 했을 텐데, 말하는 것도 밉상을 사요. ‘어이쿠, 훌륭하다.’ 하면 될 텐데 ‘너의 애비는 마귀다. 귀신이다.’ 이렇게 하니까 아예 부아를 돋아요. 자기를 죽이라고 이렇게 분위기를 추임새를 넣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들에게만 하셨겠습니까? 주님 우리 찾아올 때 우린 안 그랬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우리가 주님께 돌아서고 예수를 영접한 그 순간 ‘주님이 저를 건져내지 않으면 저는 가망성이 없었습니다.‘ 주님께 피 흘리지 않으면 우리 손에 죽었던 그 피가 오히려 우리를, ’피를 흘리게 한 당사자인 우리 죄인을 그 피가 오히려 살려냈습니다.’ 그 고백, 그 고백 관계 말고는 다른 관계는 마귀가 설치는 관계죠. 그 피를 가려놓기 위해서 마귀가 설쳐대는 관계입니다.

조직 신학해서 새 하늘 새 땅 들어가려고 전략 꾸미고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늘나라, 새 하늘 새 땅 안 넣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새 하늘 새 땅을 그리워했을까요. 어디 나오느냐, 이사야에 나오죠. 이사야 65장 17절 한번 볼까요. 왜냐 오늘 본문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성경 너무 찾으면 피곤한데 미안하지만 찾아봅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다음에 유명한 구절 있죠? 이사야 65장 끝에 보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20절에 보면 ”그때는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죽 나오죠?

이 이야기를 누구도 같이 봤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걸 얼마나 보고 가정마다 심방할 때 이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메시야 나라는 우리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주어집니다. 메시야께서 오셔서 완성하시면 이거 주십니다.’라고 했던 그들이, 천국의 본 자손들이 천국에서 쫓겨나고 개 같은 이방인 백부장은 그 천국을 차지하고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뭐 영화 반전 말하는데 세상에 성경이 엄청난 반전 이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우리는 주님의 존재만 달랑 나하고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주님의 아우라가 있어요. 주님 주변에 태풍같이 몰고 오는 태풍이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하나님의 원수임이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원수 된 자를 위해서 경건치 않은 자, 죄인을 위해서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의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분명히 언급하시죠. 그 하나님의 원수라서 니는 원수라서 원수 같은 짓을 해야 돼요. 원수 짓이 뭡니까? 주님을 자꾸 발로 차고 공격하고 모독하고 주님을 싫어하고 그런 짓을 유발된 이유가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니까요. 오늘 제가 올린 김 명현 목사님 설교에 나오죠? 우리를 지옥 가라고 저주한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저주했다고요.

자꾸 존재로, 나 여기 있고 ‘주님, 제가 뭐 해야 될까요?’ 하지 말고 현재 주님이 우리 자신한테 주께서 유발시키는 일들이 있어요. 그 짜임새, 어떤 사태에 반응하는 내 숨어있는 본심,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 모든 것이 옛 하늘과 옛 땅, 망해야 될 불쏘시개가 될 그러한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푸라기고 우리가 불 잘 타는 우리는 휴지고 그런 불 탈 수밖에 없는 기름이 묻어 있어서 불만 가면 홀랑 타는 그런 모습을 우리는 맘껏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니가 속해 있던 그 전부가 옛 하늘과 옛 땅에 흐르고 있던 하나님의 원리 원칙 질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유황불에 들어가는 마귀가 옛 하늘과 옛 땅에 너희들과 더불어 함께 그동안 살아왔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이사야 62장에 보면 내 신랑, 신부, 그 신랑, 신부라 하는 것은 니가 자꾸 생각하지 말고 들이닥치니 신랑이고 들이닥치면 우리는 신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는 것도 들이닥칠 때 원수 되는 동시에 원수 된다는 그 이야기도 있지만 다른 이야기에 보니까 너는 내 신부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부라는 이야기도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신부됨이 들이닥치니까 신부 되었고 입혀주니 입어보니 웨딩드레스라.

 우리가 우리 쪽에서 어떤 꼼수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꼼수는 꼼수로 통하지도 않아요. 구원받기 위해서 알랑방귀 뀌는 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그냥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신부되기 위한 절차로서 주님께 반발하고 반항하는 옛 하늘과 옛 땅의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는 뭘 증거 하느냐, ‘나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하는 존재였는데 주께서 들이닥치니 주의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나이다.’라는 고백이, ‘어이쿠, 내 입에서 왜 나오지?’

새 하늘과 새 땅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선택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날마다 추궁하는 그 추궁의 힘이 힘을 뒤따라 가보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내려온 능력으로 인하여 내가 누구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까발리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하는 사도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 귀양살이는 이건 문제 되지도 않아요. 혼자 신났어, 신났어. 너무 기쁜 거예요. 웬 떡이요. 웬 떡이요. 왜 나한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십니까? 신부거든.

우리가 주님 앞에 뭘 더 원합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뭐로 삽니까? 주어진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말씀 지키며 사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살려내는 그 살려냄으로 사는 것이죠. 말씀이 와서 우리를 말씀되게 만드는 그 작용으로 ‘아! 지금 살아있구나.’ 아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면
①우리의 자리를 주님의 말씀의 천으로 카펫처럼 덮쳐 버리면
②우리는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너희 속에 갔다가 어떻게 죽을 고생하면서 너희 속에서 탈출했는가, 그 경로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주께서 옛 하늘과 옛 땅에 오셨다가 혼났죠? 뺨까지 맞았으니까 옷 벗기고 욕 얻어먹고 혼났죠. 열두 제자 다 도망가 버리고 얼마나 혼났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아버지한테 간절히 기도했잖아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잖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그만큼 지독하게 옛 하늘과 옛 땅 고수 파에 속한다니까요. 때려죽여도 이 땅에서 이 하늘과 이 땅에서 승부보고 복을 줘도 이 땅에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복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죽어서는 좋은데 가고 천국 가게 해주시고, 메시야 나라 가게 해 주시고. 그 나라요? 천국이 주님의 나라 안 되면 자기나라 돼요. 이 땅에서 원수가 천국가면 천당에서 멱살 쥐고 싸울 겁니까? 싸울 것이냐, 아니냐는 뻔히 알죠.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4-26 10:54 
가락교회120419-요한계시록21장(새하늘과 새땅)37강b-이 근호 목사
제 37강b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들어요. 옛 하늘과 옛 땅은 버리려 한다. 이제는 포기하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누구 맘대로 포기해요? 포기 못 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은 알아야 돼요. 옛 하늘과 옛 땅의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지금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키워주시고 관리하고 계십니다. 이단이든 삼단이든 주님께서 아침저녁마다 양식 주시고 심장 뛰게 하시면서 이단들, 삼단들을 키워내시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게 지식이 아니거든요. 믿음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생활하시다가 느꼈던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은 믿음으로 인정도 안 해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면서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믿음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믿음은 어떤 중심이냐 하면 ‘언약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되는 믿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셨잖아요. 그처럼 성령을 통해서 믿음이 와 버리면 우리가 떡으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언약으로 사는 거예요.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고,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다 이루어진 언약을 품고, 해를 품은 달처럼 우리는 언약을 품고 우리는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를 그림으로 그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있었던 것은 새 언약을 다 이루기 위해서, 모든 언약을 이룬 게 새 언약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면 그래서 발생된 관계가 믿음이라면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그냥 ‘순교하겠다.‘이래서 믿음이 아니고요. 우리 안에 요것이 예수님의 언약이 이렇게 들어와 버리면 발그스레하게, 술 먹으면 술 먹었다는 표시로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되잖아요.

새 언약이 있으면 얼굴이 언약답게 발현, 발그스레하게 언약이 피어나옵니다. 그 언약이 피어나오면 나와 비로소 주변 환경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현장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가는데 아내가 대낮에 간음을 한다. 그러면 한국 남자 다 그렇잖아요. 자기 아내가 지는 해주지도 못하면서 자기 아내가 바람피우면 돌멩이 들고 ‘내가 그만큼 사랑했는데 니가 배신하다니.’하고 돌로 치려고 던지려 하잖아요. 던질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아내한테 바람 피웠다고 돌을 던지는 이 모습은 요한복음 8장 시나리오에 보니까 그게 바리새인 한 짓이 어느새 나로부터 유출되죠? 그러면 나는 뭐냐, 주께서 세상에 공생애 살았던 그 양상 속에 우리가 거기에 하나의 배역을 맡아서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 눈이 화들짝 떠지는 겁니다. ’야, 바리새인이 딴 사람이 아니고 내가 바로 바리새인 짓을 해 왔구나.‘

아내가 바람 안 피운다는 조건 때문에 그동안 사랑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 아니었구나. 내가 이렇게 모든 걸 도와줄 테니까 단지 바람은 피우지 말라는 은연중에 조건 걸고 아내를 사랑했지, 바람피우는 아내를 용서할 그런 마음 준비는 애초부터 나한테는 없었구나.‘라는 것을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발각 당할 때 그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습니다.‘는 정말로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말씀 테마로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그 속에 놓여 있는 게 믿음 이예요. 말씀 테마가, 주제가, 말씀이, 무슨 말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모든 현장에 우리가 거기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의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져라 해도 빠질 것이다.’ 그걸 어떻게 해낼 수가 있습니까? 응용문제, 간단하죠. 그때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못 합니다.’ 했죠. 결국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 하신 것은 믿음은 니가 한 게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자꾸 바리새인들이 ‘믿음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니까 점점 더 못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용서해 줘라.’ 베드로 하는 말이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줘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니는 원래 안 돼. 용서라는 것이 안 된단 말이야.’ 그것이 베드로에게만이 아니고 성령이 오면 베드로 자리가 바로 내 자리라는 사실, 절대로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자리예요. 만약에 우리가 용서를 해보려 하면 용서하는 대신 ‘주님께서 나한테 돈 벌게 해 줘야지.’ 반드시 요러한 보상을 염두에 두고 용서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사랑을 때려죽여도 포기 못하는 그 자기 죄가 노출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옛 하늘과 옛 땅은 예수님께서 풍덩 잠겼다가 빠져나온 그러한 환경으로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옛 하늘과 옛 땅을 지금도 유지관리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있을 때 그 안에서 나오면 안 돼요. 그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겪었던 그 믿음이 바로 너와 함께 있는, 예수 안에 있는 너도 동일한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걸 우리가 확인하기 위해서 옛 하늘과 옛 땅은 지금도 관리하는 겁니다. 지금도 이단, 마귀, 바리새인, 사두개인, 온갖 것들이 설쳐야 될 이유가 우리도 저 사람과 똑같이 동일한데 어떻게 해서 참, 예수님 피가 우리를 불공평하게 용서해 주시는지, 정말 편파적인 시도로서 일방적으로 사랑해줬거든요. 조건보고 사랑해 준 게 아니고 편애(偏愛), 일방적으로.

똑같이 죄 지었는데 ‘너는 구원받아.’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짓은 똑같이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배치를 많이 해놓는 겁니다.

여기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바로 예수님 안목에서만 비로소 요 항목이 보이지, 같이 옛 하늘과 옛 땅에 푹 빠져 있는 인간으로서는 이런 소리를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우리들이 믿지 않는 자요. 흉악한 자요. 우리가 살인자요. 행음자요.’ 우리가 다 그런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간단하게 ‘습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우리 몸에 있는 습관 이예요. 우리가 행음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남을 미워하고 죽여 버릴까 하는 모든 것은 이건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운전할 때, 그리고 사교 춤출 때, 자전거 타기, 그리고 수영하기, 전부 다 뭡니까? 이건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운전 10년, 20년 하면서 일단 브레이크 밟아주고 이러다 보면 사고 납니다. 그냥 자동차하고 나하고 한 몸 되어서 마치 몸이 움직이듯이 하면 자동차는 저절로 움직이잖아요. 이게 몸에 습관화 된 거예요.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나만 사랑하고 하는 이것은 따로 몸에 분리가 안 됩니다. 왜, 습관화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전거 탈 줄 아는 사람이 나 따로 있고 자전거 타는 재주 따로 뽑아내고 그게 됩니까? 안 되죠. 운전하는 운전술과 내 몸이 분리가 안 되듯이 이미 우리 몸은 나만 챙기는 것이 습관화 됐기 때문에 이것은 주께서 피를 흘려야 의인되고 구원받지, 습관 고쳐서 구원되지 않습니다. 습관을 누가 고칩니까? 고칠 것 같으면 습관도 아니죠. 그건 지식이지, 습관 같은 것은 못 고친다고 해서 이름이 습관 이예요.

뭐 성령이 습관들이면 가능하다? 성령에 습관들이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죠. ‘다 나 탓이요.’ 하고 회개하는 것뿐이죠.


이렇게 보면 요한계시록 21장 내용이 얼마나 난해하고 어려운지 알 수 있죠. 21장 이제 서론 했고 본격적으로 들어가는데요. 들어가면서 우리는 오늘 강의에서 이거 하나는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는 이거는 다, 지나 개나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은 바로 은밀한 주님과의 밀담(密談)이예요. ‘니 알지? 새 하늘 새 땅 알지?’ ‘예, 알죠.’ 밀담 이예요. ‘니만 알고 있어.’ ‘예, 저만 알게요.’ 밀담 이예요. 밀담!

이거는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 20장도 마찬가지고 성경이 다 그렇지만 21장도 여기에 마찬가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온대.’ ‘고맙습니다.’ 이렇게 밀담 이예요. 밀담.

‘새 하늘 새 땅 온다.‘ 하면 미친 놈 돼 버리죠. 세상에 나가서. 혼자서 소녀가 첫 사랑에 설레는 것처럼, 우리는 신랑이 있다는 그 기분에 마음껏 설레는 거예요. 그 설렐 때가 그게 순수한 신부의 모습입니다. 요새 신부는 그런 신부도 없죠. 남자 친구 열도 더 바꿔서 없는데.

옛날 어릴 때 촌에서 살다가 가끔 서울서 방학 때 오는 사각모 쓴 대 힉생 교복 입고 오게 되면 순진한 처녀 가슴을 흔들어 놓잖아요. 이웃집 오빠 대학생 한번 보려고. ‘소나기‘라는 소설에 보니까 나중에 비 맞아서 소녀가 비 맞아서 감기 걸려서 죽어 버리죠. 대학생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우리가 거짓과 가짜를 구분해야 돼요. 거짓과 가짜는 차이가 나는데 이빨을 해 넣을 때 이빨을 금이빨을 하면 금이빨이 진짜 이빨입니까? 가짜입니까? 가짜죠. 그러면 그 가짜가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런데 금이빨 했는데 ‘난 이빨 안 했다.’ 이러면 뭐가 됩니까? 이건 가짜가 아니고 거짓말이 되죠.

여기 8절에 보세요.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그 다음에 모든...” 뭐 하는 자다? “거짓말 하는 자” 그러니까 앞에 있는 믿지 않는 자, 다 합치면 결국 뭐가 나온다? 거짓말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가짜예요. 왜, 진짜는 우리 조상이 진짜를 말아먹었어요.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맛을 가버렸어요. 진짜, 진짜는 없어요. 어디 갔어? 어디 갔어? 진짜 인간 없어요.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나는 진짜 인간이 아니고 가짜 인간이다.‘하면 되는데 그 가짜 인간을 가지고 거짓말 해대니까 그건 바로 악마가 역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짜인 것을 즐거이 아주 기쁨을 가지고 고백합시다. ’나는 가짜입니다. 나는 가짜 믿음 소망 들고 돌아다니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 가짜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 피를 흘려줬습니다.‘ 그래서 진짜 피, 진짜 믿음을 내 쪽에서 발현시키지 말고 2절의 말씀처럼 위에서부터 항상 내려온다는 거예요.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신부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완제품으로 내려오는 거죠. 제가 대구에 아는 부산안면옥이란 냉면집이 있어요. 그 음식점에는 음식이 내려오는 통로로 엘리베이터처럼 돼서 음식이 내려와요. 주문하면 음식이 내려오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그처럼 내려올 때 면 따로, 국물 따로가 아닙니다. 냉면 완제품으로 그냥 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을 이뤘기 때문에 만들었거든요. 예수님이 만든 것은 이것은 하나의 완제품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따로 뭐 추가해야 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자체가 완제품이죠. 왜 완제품이냐 하면 내가 구상하지도 않았고 내가 계획하지도 않았고 내가 거기에 개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제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완제품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행함을 가지고 거기다 내 행함을 첨부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어주는 행함이라든지 그걸 기뻐하는 행함이라든지, 헌금하는 행함이라든지, 그거 받고 좋아서 찬양하는 행함이라든지 이걸 집어넣으면 안 돼요. 아무리 그걸 받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더라도 그걸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헌금하더라도 그걸 자기 행함의 항목에다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모습이 완제품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한 일에 보탤 필요도 없이 그거 없이도 주님 자체가 주께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찬양과 헌금을 통해서 ‘주께서 하셨다.’하는 고백이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거기서 나올 때 내 것이라는 것이 완전히 삭제돼 버리죠.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에서는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 아담과 아담을 비교하는 겁니다.
원리 원칙 같은 경우에. 같은 아담끼리 여기서 원리, 질서를 만들어 내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기서는 마귀가 뭐 보태주는 것도 없어요.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를 지옥 보낸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왜 가룟 유다 없었으면 예수님 십자가 죽지도 않았을 텐데, 지젝이란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는데,
가룟 유다 없으면 십자가도 없으니 가룟 유다가 공로자 아니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건 피조물의 위치를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야기해서 했지,
가룟 유다 이런 인간들을 동원시켰을 뿐이지 거기다 보탰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런 발상을 하느냐,
평소의 습관이 자기 행함의 가치를 살리는 쪽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2절 봅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거죠. 그러면 이 내려오는 것이 신랑입니까? 신부입니까? 신부만 내려왔죠. 그럼 신랑은 어디 있습니까? 신부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남편이죠.

그렇다면 여기 신부가 단장한 것이 신부가 자기 화장, 자기 옷을 자기가 고른 게 아니고 일체 모든 선택권을 주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이처럼 아름답게 해서 주께 바치겠습니다.’ 이런 것을 주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아요. ‘꾸며도 내가 꾸민다.’ 누구 좋으라고? 남편 좋으라고 꾸미는 거예요. 남편이 빨간 옷을 좋아한다면 빨간 옷을 입히는데, 신부는 파란 옷을 좋아하네? 그래도 남편의 신부지, 신부의 신부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뭐를 포기해야 돼요? ‘나를 위한 나’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완벽하게 차단되고 포기해 줘야 됩니다. 신부되고 나서 조져버렸어. 이건 예수님 좋아하는 쪽으로 우리 인생을 질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인생은 소용없습니다. 기도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원하는 인생, 주께서 보기에 심히 좋은 인생.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 기뻐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게 아니고 누가 좋아해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그러니까 주님께서 초콜릿이 좋다하면 여기에 초콜릿을 쳐 바르고
주께서 개고기 좋아하시면 내가 완전히 개 돼버리고
예수님이 좋아하는 식으로 우리가 바꿔지기 때문에
우리는 만날 거기서 반항하고 막 발로 차고 하죠.


엄마하고 애하고 시장가면 그 코스가 누구 좋아하는 코스예요? 엄마 좋아하는 코스인데 애는 ‘사탕 사줘,’ 잡아당기고 ‘떡 볶기 사줘. 뭐 사줘.’ ‘집에 가면 맞는다.’ 강제로 질질 끌면서 엄마가 사야 될 것, 시금치 사고 미나리 사면, ‘또 미나리야? 나 미나리 안 먹어.’ ‘먹지 마라. 달래기만 해봐라.’ 이런 식으로 엄마가 원하는 코스대로 ‘따라오지 마라 했잖아. 왜 따라 왔어.’ 우리는 따라 가야 돼요. 따라 가서 우리가 얼마나 주 앞에 반항하며 아직도 내 인생 내 식대로 살려고 고집을 부리는지 우리는 주님 따라다니면서 만날 얻어터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국 갈 때는 신랑이 만들어 낸 신부죠.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믿음이라 했거든요. 이만한 믿음 못 봤다 하셨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한마디로 ‘까라면 까라’는 거예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겁니다. 니 인생 내가 만들지, 니 인생 니가 만드는 게 아니다 말이죠.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든 니 인생 니가 만드는 게 아니라 니 인생은 내가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왜 너는 네 힘으로 지옥 갈 수밖에 없는가. 왜 천국은 못 가느냐. 똑똑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니 속에 아담 있다.’ 내가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그 속성이 니 조상에게 물려받아서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행세다.‘ 선악과라 하는 것은 지금도 우리가 그 선악과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 따먹은 대로 주님한테 다루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부, 신랑이라 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왜 자꾸 혼인잔치를 하려고 할까요? 혼인잔치를 왜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냥 하늘나라에서 살면 되잖아요. 하늘나라에서 ‘나 주님이다.’ ‘주님이십니까?’ ‘너는 내 백성이다.’ ‘백성입니다.’ 이야기 끝났는데 왜 신랑 신부로 이렇게 매치가 될 이유가 뭐냐, 신랑과 신부는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이미 신랑 신부의 원리가 거기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신부를 만들어서 아담의 한 몸 되게 하죠.

이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랑 신부를 합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옛 하늘과 옛 땅의 철학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리 연구해도 이게 풀리지 않아요. 왜냐 하면 신랑과 신부는 분명히 숫자로 하면 2가 됩니다. 2가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이건 중요한 것은 아닌데 알아두면 좋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볼 때 아담 본인이 숫자를 칩니다. 1, 그 다음에 너는 나와 다르니까 2,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아담이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담 몸에서 갈비뼈에서 나왔죠. 그래서 처음에 아담은 나 1, 그 다음에 너 1, 해서 둘이 합치면 2가 되는 게 아니고 1이 되게 하는 겁니다. 1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1에서 나왔으니까 하와는 이렇게 바깥에 나와 있지만 사실은 아담의 갈빗대 속에 본래 품 안에 있는 여자죠. 아담 품에 있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라는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죠. 이것이 뭐냐 이것이 첫 번째 아담이었어요.

예수님은 무슨 아담입니까?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 하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렇게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으니까 아담으로 왔다.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으니까 아담 안에 여자 들어있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그런데 이것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니까 그 틀, 형식은 그대로 유지가 돼야 되겠죠. 유지가 되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고 하와는 아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러한 것이 신약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고 이게 구약에도 있는데 구약에는 어떻게 있느냐, 제가 그림그릴 때는 이렇게 한 몸에서 그렸지만 구약에서는 이걸 펼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펼쳐서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너는 내 아내고 남편이다.’ 라고 처음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면 좋겠는데 꼭 호세아에 의해서 하는 말이 ‘내가 그때 애굽에서 나올 때 니 아내로 불러줬잖아.’

그러면 우리는 대번에 어디를 찾아봅니까? 출애굽 할 때 있었나? 없어요. 없는데 주님께서는 ‘그때 니 애굽에서 나왔을 때 니를 아내로 불렀다.’이렇게 돼 있거든요. ‘진작 그러시지, 진작.‘ 이게 뭐냐, 아까 부채 살 이야기예요. 잠재돼 있던 것이 주름 잡힌 것을 죄를 질수록 점점 펼쳐지는 거예요. 우리가 죄 안 졌을 때, 젊은 직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몰라요. 살아가면서 죄를 아는데, 죄를 펼치면 펼칠수록 자기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느끼도록, 물론 성도에게는 느끼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죄를 펼치면 펼칠수록 주님의 관계는 우리가 아무리 죄를 져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걸 두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하아, 그러니까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게 끊어진다고 끊어지면 애초부터 언약이 아니구나. 그런데 우리가 끊어졌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나로부터 출발하니까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도 그걸 또 이용해요. ‘나는 너와 언약이 끊어졌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니쪽에서 보는 그 안목을 하나님이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았다고 본 거예요. 사12장 1절 봅시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죠. 전에는 뭐했다고요? ’노하였다‘고 한 거예요. 왜 처음부터 노하시지 말지, 왜 지금은 노가 풀렸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진짜 신랑 신부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 때문에 희생당했다는 것이 요소가 정보가 삽입될 경우에만 진짜 예수님의 신부가 됩니다.

세상적인 남편은 남편이 아닙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알지만, 세상적인 남편이, 남편 될 수 없는 이유가 남편 1, 그 다음에 나를 위한 2,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둘은 합치될 수가 없어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맘껏 결혼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제일 좋은 것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이니까 저보고 돌 던지지 마시고, 결혼 안했거든 ‘참 잘했다.’ 참, 딸이나 아들 가진 자녀한테는 할 말이 아닙니다마는 ‘결혼 안 했져요?’ ‘참 잘했져요. 참 잘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 여전도사가 안 계시지만 여전도사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 해놓고 남한테는 뭐냐 하면 주를 위해서 결혼 포기한 것처럼 그렇게 또 꼼수를 쓰네. 꼼수는 꼼수로 망하는데. 그래 가지고 상처한 목사 있으면 나이를 불문하고 뭐 20살,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사랑 앞에서는 핑계를 대면서 후닥닥 결혼해서 남편이 교회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수입을 노리면서 결혼을 하죠.ㅎ 그러고서 뒤늦게 아이 낳겠다고 하니 하여튼, 아이 낳으면 남편 재산 지 아들 앞으로 해놓고 죽 계획이 있잖아요.

그러니 주의 말씀은 지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지 주제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고자가 있는 건 맞는데요. 고자 아무나 지가 내시된다고 고자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울면서 고자 되고 자기도 결혼하고 싶은데 고자 되고 하는 그런 경우는 결혼 아직 하지 않은 경우지, 그냥 죄인 행세 하세요. 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을 때 말고....지 맘대로 하고.

우리는 1이라는 자격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정답은 이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에서 ‘그냥 죽어줘!’ 이게 주님의 방법입니다. ‘제발 죽어줘’ 죽지 않고 사는 법은 없습니다. 깨끗하게 잘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소용없습니다. 지저분하게도 죽는 이유를 알면 돼요. 그게 사는 거예요. 지저분한 것을 알면서 죽는 이유만 알면 그게 바로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살아도 깨끗하게 살련다. 영광 돌리며 살련다. 백날 영광 돌린다. 니 맘대로 하세요. 니가 생각하는 영광, 그런 것 없어요.

날마다 우리가 죽는 이유를 놓쳐버리면 우리는 마귀 시험 듭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를 놓칠 경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뭔가를 기대하게 돼요. 어떤 목표를 만들어 냅니다. 목표 기대 만들면 집 나간 일곱 귀신이 다 들어옵니다. ‘해줄게. 빠른 시간 내에 내가 해줄게. 요렇게 기도하고 그러면 빨리 달성되는데, 요 목표 달성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니가 믿음 좋고 복 받았다고 하겠느냐.’ 온갖 집 나간 마귀들 다 들어와요. 기대하고 목표 하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시선은 새 하늘 새 땅은 눈에 안 보이고,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뭔가 한번 멋지게 성공하고 죽을 때 죽을 각오라도 성공한 폼을 하고 죽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마귀의 시험 드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이 기대 때문에, ‘창창합니다. 사장님. 창창합니다. 내가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거나 내가 좌절할 아직까지 청춘은,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만.’ 이게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래 많이 뜯겨라. 빈대한테 막 뜯기고, 세상 다 빈대거든요. 빈대한테 뜯기고 사기꾼한테 뜯기고 보이스피싱한테 뜯기고 여자한테 뜯기고 남자한테 뜯기고 다 뜯기는 거예요. 돈에 울고 사랑에 울고 다 울어봐야지.

그런데 기대와 목표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의 습관이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공부 해도 돌아서면 또 기대와 목표는 슬그머니 또 옵니다. ‘요거 하고 난 다음에 뭐 할꼬?’ 슬그머니 떠오르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죠. 이 습관의 기대와 목표기 때문에 여기 마귀가 달려드는 것도 습관이고 합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마귀와 노닥거리는 것도 이건 우리의 습관이고 우리 평생 살 동안에는 그러한 시달림이 늘 계속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니 신랑은 누구다? 니 신랑은 예수님이고 너는 그(예수님) 안에서 1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0, 제로, 0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나는 0으로 존재하고 내 안에 1로 있는 것은 내가 ‘하나’인 것은 그리스도가 1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부 입장으로 가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그 형식입니다.

제가 수요 설교할 때 이야기했죠. 예를 들면 세무서 납세 고지서 양식, 서식이 있다 했죠. 양식에 보면 모든 양식은 똑같죠. 다만 그 내용은 자기 해당하는 내용만 써서 제출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양식은 동일한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동일한데 거기에 예수님도 사인하고 우리도 사인하고, 우리가 사인하면 그건 죄고, 주님이 사인하면 의가 되고, 그래서 우리가 버려놓은 양식을 주님께서 우리 자리에다 주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 양식 속에 자기의 원래 했던 창조의 완성을 거기다 담아 버리면 그 서식은 하늘나라 통과되는 서식이 되는 겁니다. 그 서식이 바로 신부와 신랑이라고 요한계시록 21장 밑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늘나라에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절을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게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뭔가 이 구절에서 삽입해야 될 내용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바로 감을 잡으셔야 됩니다. 뭐가 삽입돼 있느냐 하면 자진해서 울고 자진해서 사망하고 자진해서 아프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우리 몸은 습관이 나를 위해서만 울고 나를 위해서만 웃습니다. 이건 몸의 습관이 그래요. 옆집에 누구 하나 이번에 죽었다 하면 우리는 좋아서 못 견뎌요. 갑자기 엔돌핀이 팍 돌면서, 연애 인 누가 이혼했다 하면 기분 좋아서 ‘봐라. 봐라 이혼했잖아. 훌륭한 남편 만난 줄 알아라.’ 이런다 말이죠.

남의 불행이 우리 행복이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서울 날려 보낸다 하니까 지방에 있는 사람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ㅎ 강남 땅 값 확 내려버려라.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이 친히 저희와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할 때 이걸 먼저 우리보다 앞서서 이걸 실습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누구냐, 12제자들입니다. 함께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함께 안 했습니다. 결국 함께 할 수가 없었어요. 함께 울 수가 없고 함께 애통할 수도 없고 곡할 수도 없고 그들이 흘린 눈물은 자기의 생각한 목표, 자기가 기대한 그것이 안 되니까 흘린 눈물이지,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12제자가 주님과 함께 가면서 12제자는 항상 구박 받는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무엇이 새롭게 추가됐을 때, 진짜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곡하는 사람들이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추가를 시키면서 흔히 12제자라고 으스대는 사람들을 여기서 지적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바로 개 같은 여인, 그리고 백부장, 울면서 향수를 허비하고 낭비하면서, 향수를 부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5만 원짜리 돈 가지고 구두 닦았다 이 말 이예요. 5만 원짜리 끄집어내서 구두 닦고 찢고, 그렇게 했다는 이 말입니다. 비싼 향수로 울면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럴 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비웃습니까? ‘아유, 저 돈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데.’이러잖아요.

결국은 흔히 나는 예수를 안다는 사람을 모르게 만들고, 함께 있다는 사람이 생각은 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세리와 창기 그리고 죄인들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만들어요.

뭐 임금 좋아한다 하다가 혼인잔치 참석하라 하니까 핑계 대기를 뭐 소를 샀는데 소를 돌아봐야 되고 밭을 샀는데 밭을 갈아야 되고 그럴싸한 핑계는 뭐냐 하면 ‘몇 시입니까?’ ‘두시’ ‘그날 마침 내가 결혼식 하는데.’ 지가 결혼한다고 못 가고. 자기가 결혼하니까 참석을 못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그 핑계가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왜, 생각이 함께 있지 않다는 거예요. 결국 함께 있으려면, ‘나는 함께 있을 자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불러주시니 너무 황공무지로소이다.’라는 마음을 가질 경우에만 함께 있음이 인정받는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니 우리가 자꾸 0, 제로, -(마이너스), 우리가 0, 없는 것으로, 주님의 것으로만, 내 것은 아예 없는 것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왜냐 제자들의 건방짐이 우리 속에 항상 들어있기 때문에.

하지만 주께서는 또 세리와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또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가끔은 성령을 통해서 흘리게 하시는 그러한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인하여 고난 받고 복음 때문에 설움 받고 특히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것은 뭐냐 하면 가장 힘든 것은 누가 욕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예수 믿고 난 뒤의 외로움,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누가? 바바바 누가? 윤 복희, 임 재범, 누가 위로해 주죠? 여러분?

아무도 위로 받을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다른 객 손님들이 와 버리면 우리는 옛 하늘과 옛 땅에서의 습관 때문에 어울리면서 우리는 주님 주신 외로움을 그런 인간적으로 달래려고 시도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일종의 일진회인데 같은 일진회 사람들한테 위로받음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하려고 하는 옛 습관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헤집고 그런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사람 없음을 깨달음을 통해서 진정한 눈물과 주님의 기쁨으로 같이 함께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도 같이 느끼게 만들죠. 흘리게도 하시고 씻겨주시기도 하시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보면 탕자가 행복해 하는 걸로 느끼지만 만약에 우리가 탕자로 돌아왔다고 칩시다. 집에 온지 이틀도 안 돼서 옛날 돈 벌었을 때 잘나갔던 그 친구들이 그리워지게 마련이죠. ‘참, 내 신세 돈이 없어 기껏 아버지 것으로 만족하지.’ 돈 생기면 또 똑같이 아버지 집을 나갈 생각을 하죠. 그때 돈 있다고 뜯어 먹으려고 오는 기생들, 그 모습이 아른거리죠. 그러니까 우리는 버릇과 습관이 주님이 기뻐하는 기쁨이 이상하게 나의 기쁨으로 오래 가지를 않아요. 내 기쁨은 따로 챙기려고 내가 주인공 되는 내가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그런 기쁨을 스스로 자꾸 마귀의 도움으로 만들어 내고 있어요. 우리 자신이. 정말 희한해요.

그게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연애할 때는 ‘당신만 있으면 내가 뭐든지 하겠다.’ 했는데 그게 통계에 보면 6개월도 못 넘긴다 하잖아요. 이렇게 슬쩍 눈 돌려버리면 젊은 여자, 아니면 돈 많고 늙은 여자, 자꾸 이렇게 되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집사님이 말씀하셨지만 나 자신이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이게 변해요. 나 자신이 새로운 욕망을 향하여 자꾸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옛 하늘과 옛 땅의 그리워하는 것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한테 한두 번 얻어맞을 때 눈물이 확 쏟아지죠. ‘과거 이스라엘 우상 숭배하는 게 니 꼬라지다.‘ ’맞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아!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감을 해야 됩니다. 십자가로만 구원받지, 내가 충실하게 주님 따라다닌다고 구원될 수도 없어요.

어디서 강의했더라. 안양강의에서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할 때 그때 누구 이름으로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지, 우리가 기대했고 우리가 예상하고 있던 우리가 상상한 미래상을 위하여 우리의 비전과 소망을 위해서 주께서는 그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길로 인도하면 우리는 완전히 지옥 가는 거죠.

사람이 울고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신랑 때문에 울고불고 해야 성도입니다. 이게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이건 여러분이 아시니까 안 찾아봅니다. 너희가 내 종이라는 것 때문에 욕을 얻어먹거든 오히려 기뻐해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주님 나와 복음을 인하여 핍박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니가 복음을 위해서 핍박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성령이 너와 함께 있다. 이건 복음 때문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께서 그런 사태를 만들어줘야 되지 우리가 일부러 그걸 만들 수가 없어요.

참, 우리는 복음 때문에 뭐든지 남한테 외로움 타고 서러움 받아버리면 있던 친구 다 떠나버리면 우리는 그렇게 외로움 타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몸이 항상 요청하는 습관이어서 그래요. 항상 요청해요. 그래서 혼자 못 사는 거예요. 어리광을 부리든지 아니면 뭘 요청하든지 누가 대상이 있어줘야 돼요. 넓은 40평 아파트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기껏 하는 것은 술로 달랠 뿐이죠. 뭔가 다투고 티격 거리더라도 내가 뭔가 내가 외로울 때 좀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있고 내가 외로울 때 위로할 수 있고 뭔가 내가 속 풀이를 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이 산다고 말을 할 수 있지 속 풀이해도 벽보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거죠. 개나 고양이. 뭔가 말동무가 돼 준다든지. ‘아이쿠, 니 신세나 니 팔자나 내 팔자나 똑같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니까요. 그러면 개보고 개 잃어버렸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성령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개가 어디 남편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상도 못한 예수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게 할 때 그 사람이 신부다 이 말입니다. 신부와 남편 사이는 ‘너와 항상 있다. 하나다.’ 하나인 증거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나로 인하여 울고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로 인하여 내 눈물을 씻어주는, 남편의 존재가 부각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만들죠. 어디에서? 옛 하늘과 옛 땅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만들죠. 그것이 주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코스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7장에서는 세 자로 이야기하죠. 좁은 문! 좁은 길! 찾는 이가 적다. 왜? 밀담이기 때문에, ‘니만 알아.’ 찾는 이가 없어요. 또 좁은 길, 사람 찾지 않는데 간다고 해서 주님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지가 찾아가는 것은 소용없어요.

주께서는 결국 가다보면 우리 주님만 아는데 남은 안 알아주는 그길로 자꾸 그쪽으로 가요. 하지만 그 끝은 영생이고, 반면에 으쌰, 으쌰, 알아주고 기뻐하고 할 때 아~주 수상합니다. 이건 지옥으로 갈 수가 있어요.

원래 폭포라 하는 것은 눈에 안 보이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배타고 이렇게 가게 되면 폭포가 있는데 폭포는 가봐야 보이는 거예요. ‘어~ 폭포로 새네.’ 하면 나이아가라 폭포예요. 그때는 소용없어요. 배가 꼬라박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넓어서 안 보입니다. 이런 폭포는 없어요.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갈 때.



주께서 가는 길이 주님으로 인하여 흘린 눈물, 그게 언뜻언뜻 우리에게 다가와야 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없으면 그런 흘릴 눈물도 그런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목사님들을 보게 되면 복음 때문에 울어야 되는데, 복음을 외쳐야 울든지 말든지, 복음은 외치지 않고 뭐 교인들이 안 알아준다느니, 나보고 나가라 했다느니,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것은 지 사업하다가 망해서 그러는 것이고, 복음 때문에 할 때는 반드시 저렇게 복음을 거부하는 것도 옛 하늘과 옛 땅의 관리를 주님이 하신다는 것, 그게 새삼스럽게 느낄 때 오는 기쁨 있잖아요. 기쁨의 눈물! 주님이 관리했는데 마치 저 사람이 일부러 나를 치는 것처럼, 주께서 나를 치라고 했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저 사람을 저주했고 하는 그것이 우리마음이 느끼죠. 주께서는 일부러 믿음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걸 모르고 저 사람의 자체에 대해서 뭔가 자꾸 저주하라고 하는 건데, 사람은 상대할 가치가 없어요. 안개인데 안개 붙들고 뭐 따지고 목 조르고 할 필요가 없어요. 지도 지 맘대로 못한다니까.

지가 복음을 반대하는 것도 지 맘대로 안 돼요. 주께서 관리 하에 반대하게 하시는 거예요. 오죽하면 가룟 유다가 자살하겠습니까? ‘아이쿠, 내 인생 내 맘대로 안 되네.’ 그래서 자살한 거예요. 자기 인생 자기 맘대로 안 돼요. 베드로도 자기 인생 자기 맘대로 안 됐어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맘대로 안 돼요. 모든 옛 하늘과 옛 땅의 관리권은 주님한테 있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만 건져내기 위해서 전체 총체적으로 다 그렇게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있고요.

그래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6절에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해서 그동안 헌 하늘과 헌 땅을 여태까지 유지하고 관리해 왔고 그 안에서 나의 신부는 신부로서 창세전에 사랑주기로 한 사람만 따로 뽑아내는데 빈틈없이 성공하고 있다. 그 사실을 지금 동행하는 사람에게만 밀담으로 ‘니만 알아라.’ 이 소식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그러한 성경말씀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따르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실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 현실 자체에 우리가 이미 푹 젖어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