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308-요한계시록19장19-21(짐승과 인간)34강a-이 근호 목사 제 34강a
요한계시록 19장 19절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이렇게 돼 있죠?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늘 혼란스러운 대목이 또 나오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19절에 보면 짐승들과 땅의 임금들이죠. 짐승 + 땅의 임금들이죠? 땅의 임금은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잖아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땅에 사는 몸짓이 큰 그런 동물을 짐승이라 하잖아요. 사자나, 코끼리 같은 짐승이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이런 동물에 해당되는 짐승과 사람에 해당되는 임금과 결합을 시켜 놨다 이 말이죠. 해석을 어떻게 하란 말 이예요? 보통 해석을 할 때는 같은 부류들이 집합이 돼 있을 때 그때 한꺼번에 해석이 가능한데 이질적인 거, 성질이 다른 레벨이 다른 것을 각기 해놓고 같이 포함이 된다면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사람을 해석하는 그 해석은 이게 통한다? 안 통한다? 이건 요한계시록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국어책 해석하듯이 사람들이 문자 해석하듯이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되지 않는 겁니다. 짐승이라 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짐승이란 단어를 인간세계에서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의 큰 원을 더 그리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언어세계의 일부로서의 짐승이 된다면 이 짐승 된 짐승과 이쪽에 성경에서 담고 있는 이 짐승과의 하나의 경계선에서 가늠을 할 수 없다.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을 할 때 이렇게 인간 안에서 해석을 못하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해서 여기 출입구를 통해서 들어와서 해석을 해야 되겠죠. 그렇죠? 출입구를 통해서.
이 출입구가 뭐냐 하는 문제예요. 요한계시록의 출입구는 어린양이 돼요. 양인데 짐승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 하죠? 예수 그리스도죠? 어린양이란 짐승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러한 다리가 여기 이미 마련돼 있죠? 앞에 제가 짐승과 사람이 혼합된다는 것은 인간세계에는 성립이 없죠? 코끼리하고 왕이 어떻게 노니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애완용으로는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짐승이 땅의 임금을 지배하고 있는 입장에서 대통령보고 ‘당신보다 더 높은 사람이 코끼리라면서?’ 이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짐승과 혼합된 짐승과 인간이 혼합되면서 해석이 가능하려면 현재 일반 사람들이 사람들끼리 사용하고 있는 언어 가지고는 이런 법칙 가지고는 해당이 안 된다 했죠?
여기서 빠져 나와서 그 동물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그 무슨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내면 된다 말이죠. 요한계시록에서는 특징이 뭡니까? 어린양 되시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란 표현은 인간이고 어린양이란 표현은 앞에 동물 표현이지만 이게 결합이 되어서 비로소 이쪽 세계에 의해서 해석이 가능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해석이.
그런데 어린양 앞에 뭐가 붙습니다. 부사가 뭐가 붙어요. 뭐냐, ‘죽임을 당한’이라고 돼 있고 요 앞에 더 붙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여기 ‘일찍’이라는 것은 이쪽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이런 직선적인 시간적인 개념으로서의 ‘일찍’이라는 개념은 여기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기존의 인간의 언어나 이런 것 가지고는 전혀 해석이 안 돼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찍’이라는 것은 만약에 우리가 오후 2시라면 ‘너 오늘 여기 몇 시에 왔어?’ ‘일찍 왔어.’ 이게 뭐냐 하면 오후 2시가 아니고 아침 열 시에 왔다 이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의 시간 개념은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하고 있는 시간 성에서 나온 직선적인 시간 개념이 아니고 묵시적 시간개념이기 때문에 여기보다 더 이른 시점은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보다 더 위에 있는 시점을 ‘일찍’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묵시적으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
그러면 우리가 직선적으로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BC 1440년, 그러니 이것은 직선적으로 보면 이것은 첫 번째 출애굽 당시 그때 어린양이 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세언약에 의해서 제사제도가 반복이 되면서 그것이 하나의 성소와 성막의 중심이 되어서 무비, 이동하는 성막의 역할을 하다가 다윗 때에 고정적으로 정착되죠.
그런데 우리의 시간성에 의하면 어린양으로 연결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건 우리의 시간성이 아닌 출애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일종의 먹구름, 어느 지점 산과 마을이 있다면 먹구름이 어느 지점이나 늘 이렇게 주어졌던 겁니다. 이걸 묵시의 세계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한 세계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한 세계에 일찍 죽임을 당한 그런 정보를 잠복 적으로 갖고 있던 분이 역사 속에 등장할 때는 십자가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등장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약 성경 다니엘에 나오는 이 짐승이란 개념이 비로소 인간은 짐승이란 개념을 파악을 못하지만 일찍 죽임을 당한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짐승의 정체는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복음을 전해야 돼요.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짐승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 전해버리면 전부 다 경건하고 훌륭한 신자들이 돼요. 그렇게 신자 되는 이유가 그들이 시간적인 자기의 시간성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내가 험하게 살았는데, 술 담배 했는데 교회 와서 술 담배 끊고 그 다음부터....‘ 이래 돼 버리면 이건 점점 더 자기 성화가 돼서 점점 더 훌륭해져 버려요.
그런데 이게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여기서 강조합니다. 왜 바리새인을 자꾸 언급하느냐, 예수님의 최측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제자들도 분석 못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적인 육적인 것은 다 지혜를 총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다고 결정짓고 규정한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결정짓게 된 그 근거는 뭐냐, 구약성경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말씀의 생활화 아닙니까? 말씀의 생활화!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화가 돼야 된다. 교회에서 엄청나게 반복적으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바리새인들이 했던 이야깁니다. 인간이 교회에서 인간들이 끄집어 낼 수 있는 경건의 최고 레벨, 바리새인들이 이미 다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이래 돼 있죠. 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최고의 윤리와 경건 성을 주장해야 될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너희 아비는 악마다.’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마가 악마의 모습이 유사 어린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릴 수밖에 없죠.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죠. 양의 탈을 쓰지만 속에는 자기 의가 들어있는, 자기 의를 더 높이기 위해서 양의 탈을 더욱 더 굳게 쓸 수밖에 없는 최고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지혜가 집대성된 것이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분석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바로 악마다. 악귀다, 사탄이다. 또는 귀신이다.’ 이렇게 언급했다는 말은 도대체 인간의 힘으로서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인간의 어떤 대상도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여기서 무엇을 암시하느냐 하면, 누가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를 누가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핍박하고 누가 학대를 했느냐 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오늘날 말씀의 새로운 근거로서 이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침투해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일찍 죽임을 당한 흔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야? 예수님한테 이런 죽음의 흔적을 남기게 했던 세력이 누구야?’ 라고 지적하는 것이 복음이거든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날 때, 주고받던 대화를 보세요.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 전에 사도되기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학문으로는 남한테 뒤질 것 없는 최고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요새 같으면 서울대학교 수준의 최고라 이래 나온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이 거기 대해서 ‘사울아, 니가 공부 많이 했구나.’ 이렇게 나왔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키운다는 것은 키우면 키울수록 예수님을 핍박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을 키우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예수님 몸에다가 죽음의 흔적을 타격을 가하는 타격의 힘을 배양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를 키우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이스라엘 적들이 주변에 있는 모압, 암몬, 블레셋, 미디안, 아람, 에돔, 이런 주변에 있는 이런 국가지만 이게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육이라는 것, 악마의 세력이 구약의 이방민족의 실체로서 등장하는 거죠. 그래서 구약에서는 반드시 신약의 십자가로 해석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구약은 한때 지나간 에피소드로 끝나버립니다. ‘옛날에는 그때는 그랬었었지. 하지만 우리는 잘하면 되지.’ 이런 아이디어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했어요.
예레미야에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 날 금식하지 않고 먹고 즐긴다.’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그 아이디어를 채택해서 ‘우리는 옛날처럼 되지 말자. 옛날 우리가 안식일 날 너무 쉽게 봐서 우리는 망했고 포로 잡혔잖아. 그러니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본받아서 두 번 다시 실수하지 말자.’ 해서 그들은 기도와 금식에 열중했어요. 십일조와 구제 하라 해서 구제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타격을 줌으로 죽이는 가장 최측근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곡해하는 이유가 될 줄이야 그들은 상상도 못했죠.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그 말을 모른 거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만 죄인으로 느껴지는데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죄인 되겠다고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하고 고난주간에 가슴을 치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자기가 죄인으로 되는 줄 알고. 그러나 가슴을 칠 때마다 자기 죄를 아는 의인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 모순을 그들은 분석할 길이 없습니다. 치면 칠수록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난 반성까지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기 의가 누적이 된다는 이 누적된 것을 걷어낼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겐 없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제가 지금까지 해석한 것을 다시 해보면 요한계시록 해석은 이렇게 혼합돼 있다. 짐승과 인간이 이렇게 혼합돼 있다. 그렇다면 이 짐승은 특수용어다. 특수용어인데 인간에서 말하는 동물원에 있는 짐승은 아닐 것이고, 이 짐승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밝혀지는가. 출입구를 통해서 들어갈 때 비로소 밝혀진다 했습니다. 출입구가 뭐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인간을 양으로 해서 양을 잡는 짐승과 이렇게 엮어버린 거예요. 양을 잡아먹는 짐승, 못된 짐승, 그리고 순하디 순한 흠 없는 양, 그런 예수님의 역할, 이쪽은 짐승의 역할.
이 성경 안에서만 나오는 용어가 이것이 그냥 출입구 없이 그냥 이렇게 덮쳐버렸으니까 사람들은 자기 인간들이 소통하는, 언어는 인간들의 소통의 매개거든요. 인간이 소통하는 언어 세계 속에서 이런 엄청난 영적인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릇이 되지를 못하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 마중을 나와서 해석을 할 것인가 이 문제가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이슈가 되겠죠? 그거 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에서 해석을 직접 들어가 보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옛날에 천문학자인데 갈릴레이,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그걸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로마 중세 교회에서 잡으려고 하는데 잡으려고 하다가 그 책 내기 전에 먼저 죽어버렸어요. 재판 걸어서 죽이지도 못하고 이미 죽은 사람 두 번 죽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천체를 보는데 이것이 하나의 해석이 좋은 아이디어가 되는 겁니다.
밤에 별자리를 보니까 이렇게 뭔가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이리 갔다 이리 갔다 움직이는 거예요. 지구가 중심에 있고 별이 움직이면 이렇게 1,2,3,4,5,6,7 이런 식으로 흘러가야 되는데 이게 왔다 갔다 한다 말이죠. 도대체 왜 그런가 보니까 여기에 태양이 있고 발상을 어떻게 전환하느냐 하면 그 태양 바깥에 지구가 있다면 내가 움직인다. 내가 변화한다는 것을 발상을 해보니까 여기서 1번을 보니까 1번은 이렇게 되고 2번은 이렇게 되고 3번은 이렇게 되고 4번 위치가 이렇게 되고 5번은 이렇게 되고 6번은 이렇게 되고 7번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real : 실제 이동 경로 expectation : 인간이 예상한 별의 이동 경로
그러니까 내가 ‘나는 뭐든지 똑똑하고 뭐든지 알고 나는 정확하게 진리를 안다.’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이건 세상을 완전히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도 변하고 ‘내가 알긴 뭘 알아?’ 같이 묶여서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성경을 볼 때에 성경 해석을 하는 내가 아침에 보는 해석, 오후에 보는 해석, 내가 은혜 받았다는 것도 작년에 은혜 받은 것, 앞으로 은혜 받을 것, 늘 상 다르고 늘 상 변화된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예수 믿는 나를 과연 믿을 수 있느냐? 못 믿죠.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예수 믿는 나를 믿으면 그건 100% 오류가 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도록 하나님이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오해한 거와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늘나라 가라고 우리에게 율법과 쉐마, 쉐마 말씀 들어라 해서 우리에게 말씀 들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철저하게, 철저하게 실천에, 실천에, 실천에 생활화, 생활화, 생활화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유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배후에 악마의 최후의 모습이거든요.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고 난 뒤에 그걸 육적인 해석이라고 한 겁니다. 문자로 해석을 했다고 본 겁니다. 지금도 많은 신학자들은 문자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철저히 철저함을 기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이 다 그래요. 모든 학문은 따지고, 따지고 다시 분석하고 점검하고 실험해 보고 데이터 내보고 그래서 아니면 다시 고치서 수정하고, 수정하고 더 나아지고, 수정하고 더 나아지고 그래서 수정의 반복으로서 더 점점 더 approach, 진리에 접근한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하나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쩌죠? 인간의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다. 이건 신앙이고 철학이고 해봤자 그건 어리석음의 도를 더욱 더 증가시키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아는 것은 이건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깊은 마음은 오직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는 알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는 감추어진 것이다.
왜 감추어 놓는가, 창세전에 택한 백성에게만 날름 주기 위해서!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주기 위해서 귀 있다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해 못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분명히 그걸 언급했어요. 이건, 들을 귀 있는 자란 말은 들을 귀 있는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들을 귀가 없는데 요 입구, 그림 다시 그리면, 일찍 죽임을 당한 입구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 들어갈 때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나는 인간이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들어가 버리면 더 이상 여기서 통용되던 인간이란 개념은 깨져버립니다. ‘아! 나는 사람도 아니었구나. 사람도 아니고 짐승의 예하부대원이었구나. 짐승에 소속된 2사단 33연대 17대대의 병장 아무개였구나.’ 그래서 에베소서 2장 2, 3절에 보면 우리는 세상 신의 진노의 자녀였구나.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우리의 시간관을 가지고 시간성을 유지하면서 그것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쯤 믿고 언제쯤 구원받나 그것을 따져서 스케줄을 갈기갈기 끊어서 따진 거예요. 그게 아무 소용없는데. 시간 자체도 아무 소용없는 건데. 이미 창세전이란 말 한마디에 이미 묵시적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들어갈 때는 기존의 모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없어지죠. 문제는 이렇게 들어가 버리면 여기 인간 속에서 인간이라고 여기던 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아담에 속했다고 해요. 아담에 속했던 인간이 새로운 아담, 예수 그리스도에 동참하려면, 일찍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되는데 요 들어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그게 참 궁금하죠?
궁금하죠?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기 있는 것은 뭡니까? 아담의 세계, 유다 배반했고 도마도 참석 안 했으니까 열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건 사람들만 있는 거예요. 문은 닫혔습니다. 그 다음에 문은 분명히 닫혔는데 무서워서 떨었는데 ‘두려워 말라’ 하고 ‘짠’ 하고 등장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자, ①번, 천장을 뚫고 왔다. ②번, 문 열고 왔다. ③번, 밑으로 뚫고 왔다. 어떻게 왔습니까?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을 우리가 질문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해야 된다? 안 된다? 하지 않아야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우리가 믿게 되면 그 자체가 방법이 아니고 결과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우리 속에 어떻게, 어떻게는 모르겠는데 주께서 작용한 작용의 결과물이 여기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걸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주라고 못 한다 이해해 버려요. 그러니까 성령이라 하는 것은 어느 쪽이냐, 우리 인간 쪽에 속한 것이 아니고 어느 쪽에 속한다? 예수님 세계, 다시 말해서 말씀의 세계에서 활약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어떻게 그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자기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 것이 ‘엄마의 모태, 자궁에 들어갔다가 한 번 더 태어나는 겁니까?‘라고 그걸 물었어요. 제왕절개 수술로 하는지...
이것은 니고데모의 궁금증뿐만 아니고 이건 창세기 19장, 20장, 그 뒤에 죽 나오는 이삭이 어떻게 임신됐느냐, 사라가 어떻게 임신했느냐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의 해석, 우리 인간의 언어 해석력에 대해서는 이미 단절하고 끊어버립니다. 죄 져놓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자기 밖을 본다는 것은 말 자체가 모순되잖아요. 내가 아는 것을 아무리 범주를 확대시켜봐야 내가 아는 내면이지 외곽이 될 수 없는 거거든요.
문을 닫아놨는데 예수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왔을 때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놀라워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분명히 부활한다고 했잖아.’하는 그런 톤으로 하시면서 뭘 보여줬는가, 도마한테는 자기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죠. 그게 뭐냐 하면 ‘지금 너희들이 이해 안 되는 식으로 너희들이 들어온 것은 전부 다 어디서 어떤 일의 효과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이것이 그냥 인간들이 아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소매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놀랄 일을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놀랄 일을! ’어떻게?‘라는 말조차도 입이 쑥 들어갈 정도로. ’어떻게?‘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놀라서 ’어떻게‘하면 괜찮지만 ’주여 어찌... 주여 제가 어떻게 구원...???‘ 이렇게는 되는데 따지려고 ’어떻게?‘가 나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를 며칠 하면, 어떻게 찬양을 몇 번 했으면, 구원됩니까?‘ 라는 모든 ’어떻게‘를 다 일소해 버립니다. 찢어버립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들으라고, 모든 사람에게 믿으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분별작업이죠. ‘너 아니거든. 제발 좀 오지 마, 교회 다녀도 안 돼. 너는 안 돼. 너는 아니야. 가 주세요. 너는 무조건 와야 돼.’하는 능력이 성령에서 나옵니다. 이걸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 안의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말씀 안의 세계’는 말씀 바깥에서 ‘말씀 안의 세계’를 보는 것은 ‘말씀 안의 세계’가 아니고 신학의 세계입니다. 그건 소용없는 거예요.
신학은 장난감입니다. 학자들이 장난감 가지고 노는 취미 활동인데 이건 아무 능력도 없어요. 그런데 ‘말씀 안의 세계’라 하는 것은 말씀 안에 들어가서 말씀을 볼 때만 말씀 안의 세계지, 말씀 바깥에서 말씀 안의 세계라 하는 것은 그냥 공자, 맹자, 윤리, 도덕에 지나지 않지, 공자, 맹자가 잔소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 바깥에서 말씀 안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이죠. 반드시 말씀 안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말씀 안에 이미 두 발을 그 안에 딛을 때만 비로소 나는 뭐든지 말씀이 좋아라고 말씀이 원하는 대로 되어질 결과물이라는 거예요. 나한테 내 신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 결과물 이예요. 누가? 말씀의 결과물 이예요. 내가 잘못을 하고 내가 어떻게 나쁜 짓을 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렇게 ‘너는 그런 역할을 해야 돼.’
탤런트에 악한역할을 하는 사람이 성질이 더러워서 악한역할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감독에게 배역 맡은 게 악한역할이잖아요. 우리가 사람마다 다양성 있고 다 다른 것은 그 말씀의 구조의 배치 물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달라야 돼요.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은 남들의 신앙을 모방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너의 신앙 주께서 맡긴 신앙 따로 있고 사명 따로 있는데 자꾸 누구, 누구를 따라가려고 흉내 낼 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건 자존심 문젭니다. 지 자존심 없습니까? 왜, 누구, 누구, 손양원이, 주 기철, 왜, 그런 이단들을 따라가려고 해요. 말도 안 되지, 그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진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 같으면 ‘당신은 우상에 절도 하지 않고 당신은 목사로서 감옥소 가고 참 대단합니다.’하고 하면 그 사람이 진짜 성도라면 뭐라 그러겠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나와야죠. ‘병을 고치고 누굴 어떻게 하고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왜 자꾸 우리의 경건과 우리의 노력으로 이 사람이 병 나았다고 왜 자꾸 우리를 쳐다보느냐,’ 예수님께 난 믿음,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난 믿음, 문 닫았는데 들어왔던 어떤 분, 그 사람만 아는, 남까지 알려줄 것 없이 그 사람만 아는, 그 주님이 그 사람을 낫게 하신 겁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눈을 떠 주니까 아는 거예요. 눈을 떠 주니까 주님과 몇 시간동안 이야기했던 걸, 아는 거예요. 속속들이 주님은 계십니다. 다만 어디에? 말씀 안에! 말씀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이 사실을 알죠.
말씀 바깥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이 지식 덩어리, 신학 덩어리, 교리 덩어리에 불과한 겁니다.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런 걸 끌어 모으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학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지만 말씀 안에 들어오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거기 허락되죠. 무슨 이야기죠? 허락! 허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9장 19절에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렇게 돼 있죠? 여기 중요한 용어가 여러 가지 다 빼고 주체만 해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이거 하나, 하나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설명을 하려면 엄청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짐승, 거짓 선지자, 우상, 경배하는 자, 이 네 가지를 설명할 건데요. 짐승, 거짓 선지자, 우 상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 이렇게 될 때 이 사람들의 개념이라는 개념 규정, 이 규정은 제가 코페르니쿠스가 한 것처럼 우리 자신이 고정됐다고 생각한다면 이거 백날 해석해봐야 엉터립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고정되지 않았다면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간단합니다. ‘우리가 짐승의 하수인으로 살고, 우리가 거짓 선지자로, 내가 바로 우상숭배자고, 내가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라.’라는 생각만 가지면 해석 저절로 다 돼요. 왜, 내가 바로 그들에게 휘말리면서 항상 이 육이 있기 때문에, 육은 죽고자 하는 것보다도 육이 살고자 해서 육의 왕, 육에 대한 지배자, 육의 마왕, 악마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에 우리는 굴복할 수밖에 없죠.
히브리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마귀한테 종노릇하는 자를 풀어주려 하심인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이라. 그러니 아브라함 자손이란 말은 아브라함 당시는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이삭이죠. 이삭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이삭이 육에서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 이삭이 육에서 태어나지 않은 최초의 자식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할례 행하고 태어나게 하죠. 인간의 고추 끊어놓고 태어나게 했어요.
육에서 난 자가 아니어야만 아브라함 자손에 편입될 수가 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영에서 영으로 나야 되는데 영에서 난다는 말은 육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육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유가 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문제가 뭐냐, 육에 나한테 육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은 바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말씀 세계에 들어와서 여기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드는 짐승, 거짓 선지자, 우상, 우상 경배하는 자, 바로 이것들과 철저하게 딱 들러붙어서 결부하고 있는 그 본인이 누구라고? 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만 눈에 확 열리는 거예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마귀의 종노릇 했다는 걸 안다는 말이죠. 구원받았기 때문에! 마귀의 종노릇 안 하면 구원시켜 주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짐승이 뭐며 다 아는 거예요. 만약에 성령이 없이 구원받았다고 우기면서 이걸 따져버리면 이 거짓선지자는 뭐냐 하면 우리 담임 목사 빼놓고 다. 우리 노회 빼놓고 다, 우리 교파 빼놓고 다. 이렇게 되겠죠. 더 압축해서 말하면 날 공격하는 모든 놈은 다 이단.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날 공격하는 최고로 악랄하게 공격한 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죠. 마귀니까.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할 정도로 최고의 정점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최고 정점에 섰던 그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자가 없는 바리새인이 결국은 육의 악마의 최고 마지막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저주를 심하게 했어요. 자기도 지옥 가면서 천국 가는 사람을 막는다고 했고, 속에 나오는 게 더러운데 자기는 꾸민다고 무덤 이야기를 했고 안에는 썩은 해골이 냄새가 나는데 바깥에는 이쁘장하게 페인트칠을 해서 그것으로 포장하고 꾸미는 이런 짓하는 사람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이 답답한 게 바리새인들도 인간으로 달리 뭘 할 게 있어야죠. 교회 와서 할 게 있어야죠.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바자회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찬양하고 할 게 그거밖에 더 있습니까? 자기도 사실은 억울한 거죠. 구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하지 않았다는 자체가 그게 저주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자체가 저주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죄 져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고 허락 못 받아서 구원 못 받는 거예요. 미치죠.
어떤 애는 태어나면서 재벌 집 태어나고 어떤 애는 태어나면서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아빠, 나 왜 부자 못 돼.’ ‘너는 그 집에 안 태어났거든.’ 이게 정답입니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옳은 분이니까 옳은 일하면 복 주리라 나쁜 일하면 벌주리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건데 그 상식이 선악과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상식 같은 모든 것이 다시 한 번 요한계시록 진입하면서 꾸준하게 그것이 잘못이다. 내가, 지구도 나도 돈다는 그런 의식 가지고 요한계시록 짐승, 거짓 선지자, 이런 것들을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용기가 아니라 사실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입장에서 우리는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짐승은 뭐냐, 이 짐승은 구약에서 나오는, 이 전부 다 구약 용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게 또 어려워요. 요한계시록에 신약 용어가 몇 가지 안 나와요. 교회, 이런 건 신약 용어인데 대부분 구약 용어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 있고 그 다음에 구약 있고 십자가 있고 예수님의 재림 있다 이렇게 보잖아요. 넓죽하게 보죠. 그러니 이 구약의 역사를 어떤 사람은 6천년이라 하는데 6천년이든지 아니든지 긴 역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역사도 그거 못지않게 길어질 수도 있다. 왜, 벌써 2천년이 지났으니까. 앞으로 몇 천 년이 지날 수도 있고 몇 백 년이 갈 수도 있고, 이렇게 보고 있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길이, 이 길이 같은 질의 같은 성질의 시간이 흘러간다고 보지 않고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담벼락으로 봐요. 그러니 기차가 있는데 기차가 공사 중 끝났을 때, 뭐로 막아버리죠. 그리고 댐 같은 경우에 강물 흐르다가 댐이 있으면 물이 못 흐르잖아요. 이렇게 세로로 쳐버립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여기 있든 저기 있든 뭐가 있든지 간에 위에서 보는 겁니다. 시간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 이 하루 같은 이게 얼마가 지나든지 이건 전부 다 하나의 정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날에 지나지 않아요. 이 날을 요한계시록에서 무슨 날이라? 주의 날이라 해요.
새 언약 (완료 언약)
이걸 언약 적으로 따지면 여기서는 언약이 창세기 있었고 그 다음에 창세기에는 약속이 있었고 제일 처음에 나온 언약이 노아언약, 그 다음에 아브라함 언약, 이삭, 야곱. 모세, 그 다음에 다윗 언약, 예레미야의 새 언약, 이렇게 돼 있잖아요.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이렇게 달려가야 되는데, 이것은 한꺼번에 어디서든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뭐냐 하면 완료언약입니다. 언약이 완료가 되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짐이 다 이루어짐이냐를 증명하는 것이지 남아있는 일이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 재림까지. 예수님 재림까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짐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물로 있는 것이지, 여기서 시간의 진척이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강도처럼 오늘밤 죽어도 낙원에 가 있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도 맨 거기 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물은 새 언약의 위력을, 주의 날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5장에 보면 주의 날을 무슨 날로 보느냐 하면 캄캄한 날, 그리고 통곡의 날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날’ 개념이 하루 개념이 아니고 날 개념은 전체를 응축하는 개념, 이러한 이 세상 자체를 응축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날 개념은 주의 날에 너는 죽었다. 깜깜한 날이다.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이걸 자꾸 시간으로 집어넣으니까 여기 시간 스케줄이 나와 있어요. 뭘 조사하느냐 하면 이것은 여섯 환난, 일곱 환난, 자꾸 조사를 하려고해서 자꾸 1992년 10월 18일 예수님 재림한다. 자꾸 달력에 시간 계산을 하려고 한다 말이죠. 대부분 나왔던 현혹했던 사람들이 다 그랬잖아요. 거기 유명한 이 장림이 대표적인 사람이고 이 장림뿐만 아닙니다. 모든 교파들이 다 그런 짓 했어요. 조 용기 목사도 마찬가지고 다 날짜 계산하다가 이야기 나오니까 쑥 들어가 버리고 다른 사람들도 날짜 계산하고 여호와 증인도 물론이고 문 선명이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시간계산해서 사람들한테 돈 빼먹으려는 짓을 한 거예요. 결국 돈입니다. 돈 집에 놔두면 뭐하느냐, 마지막 때 교회에 바쳐야지.
날 개념이 이렇게 주의 날이 있다는 말은 날이라는 것은 하루처럼 보이지만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이게 예수도 아니고 나사렛도 아니고 주니까 주의 날이기 때문에 주라는 것은 구약에서 뭐냐, 여호와예요. 여호와! 여호와로 시작된 모든 일을 한 날로 꽉 압축한 날이 이 날입니다. 이 날 이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짐승이라는 의미는 여러분 어렵게 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쉽게 하겠습니다. 어렵게 하면 복잡한데, 짐승이란 의미는 이게 뭐냐 하면 포로 잡힌 유다 나라의 운명과 관련되면서 등장해야 될 용어가 짐승입니다. 이거 어렵더라도 할 수 없네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고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이라고 돼 있죠? 그 혼돈이란 말의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무질서란 뜻이 아니고 틈, 틈이라는 뜻 이예요. 조개와 조개 사이에 틈이 있잖아요. 틈이 벌어지고 그 틈이 봉합되면 창조가 되는 겁니다.
바다와 땅이 구분되죠. 구분되면서 틈은 메워집니다. 틈은 창조 때 흑암 중에 어두움이 있었는데 어두움이 빛이 되고 그러면 뭔가 쭉쭉 자기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되면서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게 창조예요.
그러면 창세기 1장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그 밑 원동력, 에너지원이 거기 소개가 안 되어 있습니다. 여섯 째날 인간을 만들 때 그때 소개가 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을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는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이 말은 인간의 밑바탕의 힘으로서 이게 형상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우리 복음 아는 사람 다 알지만 형상은 누구죠? 예수님이죠. 조직 신학에서는 뭐라 합니까? 우리의 의와 신이라 하는데 그거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은 게 아니고 누굴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증거 하라고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 인간을 만들어진 이유가 짐승과의 그 숨어있는 틈을 메우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는데 인간이 범죄 하면서 그 틈에 누가 올라옵니까? 지각이 갈라지면서 마그마가 올라오듯이 짐승이 올라오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누가 따먹으라고 했어요? 뱀이 따먹으라고 했잖아요. 그래놓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갈구는 것보다도 인간을 배제하고 제일 먼저 누구와 맞대결합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맞대결하죠. 아담은 인간의 대표는 남자니까, 인간은 그냥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하고 이것뿐이고, 여자의 후손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아담에 속한 세계는 아담이 자식 낳아도 아담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남자가 자식을 낳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남자 없이 태어난 자식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고 하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통해서 낳은 거죠. 그걸 마태복음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다 하죠.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 너 좀 빠져라. 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악마를 다루는 것은 피조물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악마에게 졌기 때문에 우리 피조물이 악마를 다룰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악마를 다룰 수 있습니다.
무덤가의 귀신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여, 아직 때도 안됐는데 벌써 오셨습니까? 우리가 멸망할 때가 안 됐는데..’ 이 소리는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습니다. 돼지 키우는 사람, 목축하는 사람은 예수님보고 재수 없다고 빨리 나가라고 했지, 귀신이 그 소리하는 게 그들 귀에는 안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귀신은 알아요. ‘예수가 우리를 멸하러 왔다는 걸 안다니까요. 그래서 제 책에 보면 나오잖아요. 귀신은 자기가 악마인 줄 알기 때문에 인간을 이긴다고. 인간은 자기가 악마의 종인 줄 모르기 때문에 악마한테 눌려 살아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제 모습이 드러나요.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그러나 십자가만 눈 돌리면 인간과 인간의 리그가 돼 버려요. 누가 목회 잘 하는가, 누가 교인 수 많은가, 누가 신앙 좋은가, 인간 대 인간의 자기들끼리의 리그예요. 메이저리그. 이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와요.
문제는 악마가 형체가 없다는 거예요. 형체는 반드시 인간의 형태가 있는 인간을 앞장 세워서 한다는 거예요. 보세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을 누가 이용했습니까? 뱀이 이용했지만 사실 뱀은 아무 죄도 없어요. 뱀은 그냥 기다가 마귀한테 간 거예요. 뱀을 통해서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께 나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사탄의 종이고 양의 탈을 쓴 자라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온다 말이죠.
짐승이라 할 때 결국 짐승은 풀렸죠. 짐승은 맞는데 모습은? 인간이다. 짧은 결론인데 이렇게 깁니다. 짐승은 인간의 모습이다. 어떻게? 바로 유다 나라를 지배했던 누굽니까? 느부갓네살. 느부갓네살 왕의 나라 이름이 바벨론,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을 모든 나라를 한 나라, 큰 성 바벨론, 다른 말로 음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말씀 안에 있는 사람만 이 의미가 무슨 말인지 알죠. 말씀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아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출입구로 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가 보게 되면 바로 이런 새로운 용어들이 통용되는 새로운 그런 모임과 그러한 영역이 활짝 그 안에 전개됩니다. 그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혜택을 입을 사람과, 허락 받을 사람과 허락 받지 못할 사람 구분이외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 고유의 노력한 것이나 자기의 선행이나 자기 업적이나 행함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왜, 출입구 자체가 죽여서 가는 거예요. 나와 함께 죽여서 가기 때문에 이미 죽은 인간에게는 뭐 할 마음도 없잖아요.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런 입장에서 들어가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말씀의 결과물로 살아요. 말씀의 결과물! 내가 공부를 하고 뭘 해도 말씀께서 ‘공부하라’ 하게 해서 하게 한 거예요. 하다가 퇴학당하면 말씀께서 퇴학당하게 했다가 다시 복학하게 했다가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항상 펄펄펄 말씀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말씀은 지키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뭐는 영원히 서리가?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우리가 왜 늙습니까? 말씀에 보면 흙에 속한 것은 아프게 돼 있고 쇠하게 돼 있고 망하게 돼 있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았는데 왜 죽었어요? 안 죽고 버티지, 육의 것은 돌에 맞으면 당시에는 채석장에서 돌로 조지거든요. 돌에 맞으면 죽게 되는 허약한 흙임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드러내가 위해서 스데반 집사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흙으로 난 것은 흙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 모습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데 그렇게 사는 원인까지 집어넣어야 돼요. 다 욕심이고 죄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그런데 이 죄를 안다는 것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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