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5강-계시의 단면 1203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5. 07:23

2012-03-16 01:18:43 조회 : 1353         
계시의 단면 120315 이름 : 이근호 (IP:117.55.1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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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315-요한계시록20장(계시의 단면)35강a-이 근호 목사
제 35강a

강의 전 질문에 대한 답변

주석가들이 오해한 게 뭐냐 하면 하늘 개념이 따로 있고 인간 개념이 밑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이란 인간이 있는 그 장소를 고려해서 하늘이 그 짝을 맞추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하늘은 삼 층천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이 이걸 몰라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삼 층천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구약에서의 인간의 땅은 이게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있으면 거기서 말하는 하늘은 저쪽의 하늘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그 하늘이기 때문에, 이 하늘은 없는 하늘인데 언약이 이뤄질 때만 나타나는 하늘입니다. 그러니 이게 굉장히 어렵죠.

우리의 사고방식은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내가 있든 없든 하늘은 그 자리에 있잖아요. 집에 가고 있고 내가 달을 생각하지 않아도 달이 있고 내가 별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 순간, 별이 따로 있잖아요.

구약의 개념은 언약 개념이기 때문에 언약을 보여주기 때문에 언약을 나타내기 때문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새롭게 늘 구성돼야 됩니다. 구성되려면 분해했다가 조립돼야 되는 거예요.

   분해--↑--> 조립

        하나님의 언약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새롭게 투입될 때마다 언약이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하늘에서 주어지죠. 새로운 하늘이 몰고 들어오면서 이 하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현재 있는 땅의 개념, 하늘 개념은 분해되고 분해된 부속품이 다시 조립되면 새로운 언약에 맞는 하늘이 주어지는 겁니다. 굉장히 복잡하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성경에서의 모든 것은 구성을 위하여 피조물이 있다.

인간 속에 뭐가 있다? 인간의 개념이 있다. 인간의 언어가 있다 이렇게 보면 되거든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구성에 보면 인간은 죄인이 돼야 되잖아요. 죄인이 돼야 되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인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이것이 죄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죄를 우리가 지을 수밖에 없게 돼 있습니다. ‘나는 이 죄 안 져야지. 이 죄 안 져야지.’ 이러면 이건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던 그 세계관을 그냥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게 돼요.

자, 나의 세계관 있고 ‘나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저쪽에 나무에 있는 것은 원숭이가 돼야 돼요. 원숭이가 만약에 인간되면 나는 인간이란 말이 의미가 없다니까요. 나만 인간돼야 되죠. 저 바다에 물고기는 악어가 돼야 되죠. 저거는 악어고 나는 뭐다?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앞에 것, 뒤에 것 생략하면 ’저거는 악어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저것을 악어라 하는 나는 인간답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너는 악어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음에 인간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처음에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슨 권세를 주었습니까? 모든 피조물을 앞으로 통과시키면서 뭘 짓죠? 이름을 짓죠. ‘멍멍’한다고 멍멍이. 소 새끼는 송아지. 이름을 짓는 거예요.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이름이 지어진 그것들은 이름을 진 쪽에 종속되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이름은 누가 졌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기? 없기? 없기. 인간은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부터 벌써 출발점이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을 위한 예수나 하나님은 다 사기예요. 왜, 나를 위한 하나님 하면 나의 세계 따로 있고 나에 필요해서 내가 원해서 내가 죽고 난 뒤에 좋은 천국 가기 위해서 동원되는 유사개념으로서 동원되는 그러한 예수요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반대였어요. 그리고 모세도 반대였습니다. ‘주여 나, 주의 일을 못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주여, 저 더 이상 일을 못 해.’ 못한다 이 말이죠. 진짜 하나님 만난 사람은 무섭고 두렵고 떨면서 ‘주여. 할 수만 있거든 난 이 일을 못합니다.’하는 식이 돼 버리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우상과 접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어떤 세계가 되죠? 이스라엘 자체 세계관을 위해서 인간의 리얼리티, 현실이 되고 마는 겁니다. 멸망해야 되죠.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곳을 포위했을 때 그때 사환이 벌벌 떨면서 ‘왜 저쪽은 숫자가 많은데 우리 쪽은 선생님하고 나밖에 없습니까?’ 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내가 보이는 대로 구성한 나의 현실과 나의 세계는 우리들밖에 없습니다.‘ 했잖아요. 그때 엘리사가 기도를 하죠. 기도를 하니까 뭐가 보입니까? 저쪽에 있는 군사보다 엘리사와 함께 있는 군사가 숫자가 훨씬 더 많죠. 왜 선자자의 사환은 그걸 몰랐을까요? 본인 자체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주인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구성하기 위한 구성요소가 되는데 자기는 주인공으로 보는 겁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모세 언약 이후에 다윗 언약, 항상 언약은 뒤에 있는 언약은 앞에 있는 언약을 완성하면서 새로움을 주고 그것도 나중에 새로운 언약을 위해서 이것은 새로운 언약의 완성 태로 그 다음에 넘겨가거든요. 다윗 언약 안의 구성요소로서 선지자가 개입되고 그중에 하나인 엘리사죠. 그렇다면 엘리사는 자기 자신의 세계관이 따로 없어요. 없고 다윗 자손의 세계관 속에 선지자로서 자기는 부속품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인생관은 없어요. 내 인생이라는 거 없습니다. 그런데 사환은 자기가 보고 듣고 있는 게 자기에게 전부고 그것으로 자기 현실은 새로 구성한 겁니다.

그러니 오늘 강의 초반부터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은 내가 누구의 구성요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자기 생각 턱~ 하니 만들어 놓고 ‘주여, 빨리 내 세계관,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 달라.’고 이렇게 하니까 초반부터 성경해석이 잘못될 수밖에 없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담 자체의 이름을 지으신 분의 복속되고 예속되는 입장에서 선악과라는 그 구조의 구성요소로서 아담이 있는 겁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는 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걸 따먹게 되면 죽게 돼 있는 역할을 누가 담당하느냐, 따먹은 자가 역할을 해야 돼요. 선악과를 집어넣고 누가 따먹었습니까? 마귀가 안 따먹어요. 아담과 하와가 따먹죠. 그러니 죽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말이죠. 그 다음에 그것이 후차적으로 ‘그건 하나의 역할이야.’라고 나타났을 때 나온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 여자 나오죠. 뱀의 후손, 뱀 나오죠. 여자가 아들을 낳죠. 남자 나오죠. 남자, 여자, 뱀 전부 다 무엇의 구성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돼 버리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존심이나 체면 같은 것은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피 앞에서 어디 건방지게 그걸 챙깁니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양쪽에 강도 둘 있었죠. 얼마나 주님께서 배치를 잘 해요. 한 사람은 나쁘고 한 사람은 구원되는 양쪽을 배치해 놓고 양쪽이 저쪽에 쏠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두 사람 가운데 있죠. 둘 다 구원하든지, 둘 다 탈락을 시키든지, 왜, 둘 다 강도니까, 나쁜 짓 했으니까, 지옥 가든지.

어제 뉴스에 보면 부산 거제동이 있습니다. 거제도에도 거제동이 있고 부산에도 거제동이 있습니다. 그 거제동에 어떤 가정집에 강도가 들어왔는데 이 강도가 ‘돈 내놔라’ 하는데 저항하니까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강도가 사람을 찔러 죽였어요. 열여덟 된 딸애가 죽고 하나는 부상당하고 강도는 잡혔어요. 다른 사람은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살다 보면 희한한 일도 있네.‘ 하지만 막상 그 집안이 우리 친척이고 만약 내 가정이라고 생각한다면 18년 동안 키운다고 돈부터 얼마나 많이 들었어요. 돈, 정성, 애정이 얼마나 들었겠어요. 그런데 그를 누가 죽였다? 아무도 모르는 강도가 돈 훔치려다 죽였다 말이죠.

그 다음 이야기, 그 강도가 천국 갔다면 누가 용서 안 됩니까? 그 가족은 용서가 안 되겠죠. 그게 밀양이란 영화 주제 아닙니까? 바로 사람이 자기 세계관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구원받은 것은 분명히 나한테 긍정적인 요소, 착한 게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거는 마귀가 그려낸 가짜 예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좋게 보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어주는 이것만은 죄가 아닐 거야, 이건 아마 의인인거야.’라고 자기 정당화에 나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도로 하여금 구원받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스스로 내 가치를 높일 수 없는 한계를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강도, 진짜 내 가족을 18살 먹은 내 딸을 죽인 강도로 하여금 만약에 구원받게 했다면 지금 문제가 어디 있어요? 내가 내 가치관 속에서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끌어당겼던 같이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겠다는 식으로 한 모든 성경해석은 이건 전부 말짱 다 ‘마귀 짓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죠. 외부에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럼 강도가 구원받는 것과 똑같은 경우가 무슨 경우냐 하면 바로 사울이란 사람이 스데반 집사를 돌 던져 죽일 때 거기에 주동 인물이었죠. ‘일이 잘 돼 가느냐.’하는 감시관이란 말이죠. 그렇게 했던 사울이란 사람을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구원을 해줘버리니까 나중에 사도바울이 입에서 나온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자기가 부흥회 때 억지로 과거에 일부러 오줌 싼 거부터 해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죄의 집합, 기껏 그 정도의 죄를 가지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사람들은 간주하고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게 아니에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어두움의 깊이예요. 어두움 자체가 어두움의 깊이를 갖고 있어요. 어두움 자체가 공간을 가져야 되는데 이 공간을 가지려면 어두움의 합당한 공간이 누굽니까? 바로 내 육신, 내 몸 자체가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구성요건에 우리가 포함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된다? 어두움이 돼야 되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데 이 어두움이 되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는 이 방법조차도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관 속에서 이게 접근하는 방법은 우리는 실패합니다. 할 수 없어요. 아무리 반성하고 죄를 안 지으려 해도 그 죄는 그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누가 내 딸에 대해서 건드리면 우리는 사적인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야? 18살 먹은 내 딸 죽인 놈 누구야?’ 뭐 예수님이 용서한다고? 그런 예수는 안 믿겠다. 어떻게 죄 없는 내 딸을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어? 그렇다면 그 예수는 난 안 믿겠어. 그런 예수 천국 있으면 나는 지옥 가겠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18살 먹은 애가 자기 딸이 아니고 만약에 본인이라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욥처럼 자식 열 명, 아들 7명 죽고 딸 3명 죽고 재산 다 날라 가고 종들 다 죽고 할 때 어제는 설교할 때 박피 작업. 껍데기를 벗기는, 피부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하면서 마귀가 노렸던 점은 뭐였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 현실에서 나오는 껍데기에 불과한 신앙이기 때문에 껍데기만 벗기면 ‘주께 원망하게 돼 있다.‘는 것이 악마의 자신만만한 그러한 도박판이죠.

지금 하늘나라에서 화투를 치는데, 게임을 하는데 악마는 질 수 없는 패를 가진 거예요. 풀 에이스(full ace)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에이스 넉 장 정도, 이게 최고라면서요? 난 몰랐는데 초한지 보니까 나와요. 에이스 넉 장 들고 있으니까 누구한테도 질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마귀의 종이고 마귀를 이길 수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천국 가는 용도로서 마귀가 주장하는 그걸 집어넣어 버린다니까요. 마귀 주장을 집어넣으면 누구도 같이 끌려 들어옵니까? 마귀한테 벗어날 수 없는 우리도 하나님 천국의 구원받는 요소가 돼 버려요. 그게 요한계시록 20장 해석의 시발점입니다.

이제 그림을 한번 그려야죠. 도무지 우리가 구원될 수가 없는 자예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의 효과를 성령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 거짓말 이예요. 죄라고 여기면서 그 죄라고 여기는 그 자체를 의로운 걸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다시 나한테 회수되는 거예요. 남들은 죄인이라 하지 않는데 나는 죄라고 나를 봄으로써 그 자체는 의로운 것으로 다시 소유되려 하는 겁니다. 남들은 예수를 안 믿는데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자체는 그것은 의로운 것으로 ‘나는 예수 믿는 사람’하고 여기다 명찰을 붙이는 거예요. 이런 식의 현실관은 이건 천국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왜냐,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가면 천국에서 면류관을 반납 못해요.

만약 천국에 가서 내 딸을 죽인 원수를 만난다면 천국의 심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죠. ‘안녕하십니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하! 그때 3월 달에 우리 집에 와서 내 딸 죽여서 내가 기절할 뻔했던 사람. 반갑습니다.’ 이러지 못한다 이 말이죠. ‘니 죽었어. 이제 여기서 만나다니 이제 죽었어.’ 하늘나라에서 그걸 보고 ‘아! 저쪽에  C동에 205동에 있는 두 사람 멱살 풀어줘라.’ ‘못 풉니다. 내 딸을 어떻게 키운 딸인데.’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러면 천국이 개판돼 버립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을 못하는 세계예요. 그 상상을 못하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서 성경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성경은 달리 해석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케이크 조각처럼. 케이크가 이렇게 있는데 이 케이크에서 한쪽 조각을 잘라냅니다. 그러면 단면이 생겨요. 잘라내면 여기에 색깔마다 층이 생깁니다. 케이크 한 조각도 여기에 만들어 지겠죠. 여기 잘라낸 곳에 뭐가 있느냐, 색깔마다 층이 생겨요.

케이크의 단면->계시의 단면



                    

1:무저갱 열쇠, 2: 목 베인 영혼, 3: 천년,  4: 불못과 천국 가는 사람,

 peanut : 땅콩, pine nut : 잣, raisin : 건포도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걸 자르는 칼이 있죠. 이 칼이 십자가 그리스도의 칼 이예요. 그리스도의 칼이 동원돼서 단면을 잘라낼 때 여기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첫 번째(1) 천사가 무저갱 열쇠 열었다. 그 다음에 4절에 보면 두 번째(2) 목 베인 영혼, 세 번째(3) 천 년 이 차매 사단이 옥에서 나왔다. 네 번째(4) 불못과 천국 가는 사람, 이렇게 케이크 단면을 잘라내게 되면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칼에 의해서 단면이 잘라져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칼은 뭐냐, 이게 역사를 초월한 묵시 칼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진행 절차에 따르지 않고 있는 깊이를 이야기하죠.

이해하기 어렵죠. 그럼 쉬운 거 하나 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해부할 때 간이 나타난 것과 그 다음에 간 밑에 있는 창자 나타나는 것과 시간적 의미가 있습니까? 우선 잘라보니까 허파 나오네, 간 나오네, 대장 나오네, 뒤에는 등짝 나오네, 이것이 해부학 할 때 그게 시간적으로 의미가 있습니까? 없죠. 왜냐 하면 앞쪽 뒤쪽 뜯어내 보면 등짝 뜯어내 보면 뒤가 나오니까 그게 뭐냐 늘 거기 있었잖아요. 늘 거기 들어있었다는 것은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가 중요하지, 3시 5분에 간 나왔다. 3시 10분에 허파 나왔다. 그 시간적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시간적 순서 서열은 의미가 없죠.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20장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시간적인 의미가 없고, 그것은 이 안에 함께 들어있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 인간들이 왜 시간적으로 1000년 다음에 뭐가 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따진 이유가 그리스도의 칼이 아니고 누구 칼입니까? 나의 칼이니까 나의 세계관 가지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나의 세계관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시간성이 들어있어요. 이건 하이데거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시간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다. 존재가 존재자로 될 때 시간성을 도움으로써 존재자가 된다 이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기억과 미래 현재 과거 이런 걸 따지는 걸 합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아! 지난날에 이렇게 잘났는데, 왜 이 모양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뭘 얻는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이렇게 미남이었고 아직도 미남이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구성하는데 시간들이 필요한 거예요.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그런 노래도 있지만‘ 10년 뒤에 이 나무 밑에서 만나자.’ 엽기적 그녀에 나와요. 캡슐에 추억을 담아서 나무 밑에 파묻고 10년 뒤에 만나서 우리 같이 파보자. 그런 게 나와요. 옛날에 그런 장난 한 번도 안했습니까? 10년 뒤에 만나야 정수기 하나 팔아 달라 하고, 변액 보험 들어 달라 나오면 만나도 곤란하겠죠. 우리 애 취직시켜 달라든지.

어쨌든 이건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든 행위에 나섭니다. 너무 이것이 좀 냉정하고 비정하고 너무 차가운 이용인지 모르지만, 차갑든지 뜨겁든지 내 소관이 아니고 어쨌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나는 이런 유의 인간이구나.’라는 식으로 내가 누구일지, ‘아!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라는 해답을 가지고 자기한테 끌어 모으는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그런 지향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계속해서 ‘내가 누구지? 아! 내가 이정도구나. 내가 대단해, 내가 이정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럼 자살할까?’ 이런 식으로. 항상 자기 문제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벗어나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못 벗어나는 걸 가지고 주님은 케이크를 만드는 하나의 알맹이로 집어넣어버리는데 그냥 집어넣는 게 아니고 무엇과 연관시킨다? 악마와 더불어서 이걸 구성요소로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항상 나만 생각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감히 구원되죠. 이거 굉장히 많이 모순되죠. 나는 처나 자식이나 아무나 오직 내가 우선이고 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내가 편하면 내 남편 내 자식 그 다음에 주님이고 교회 목사는 저리 가 있고, 자기중심이 되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벗어나라 하는 것은 악마의 시험이고, 악마는 항상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는 벗어나지 않는 것을 케이크 안의 하나의 건포도? 또는 땅콩? 또는 잣? 하나, 하나를 요소요소에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그래야만 되는 존재예요.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존재, 주님보다 날 사랑하는 존재로서 이 안에 가담되었음을 그 다음에 중요한데, 예수님의 안목이 찾아오면, 성령이 오면 이걸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사환에게 엘리사가 기도를 해주니까 비로소 사환이 엘리사와 함께 있는 천군천사가 아람나라에 있는 군사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죠. 그걸 눈이 열리지 않은 제 3자가 보면 뭐라고 보겠습니까? ‘둘 다 미쳤다. 여기 미친 놈 하나 더 있다. 전에는 엘리사만 있었는데 엘리사 덕분에 물들어서 미친놈 하나 더 생겼다.‘고 하죠.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볼 수 있다 하니까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다시 태어나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고 해석하는 그 해석 외에 다른 해석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수 없죠. 주님께서 약 올리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고 싶나? 가고 싶나?’ ‘예‘ ’다시 태어나야 돼.‘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아요. 내가 모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그것을 태어난다고 유일하게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의 과거의 경험상 엄마 몸에서 태어난 육적인 안목만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 하늘나라도 그 육적인 안목의 범위 안에서 하늘나라를 들어가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그 방법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아까 선교사님하고 이야기했지만 사기 중에 최고의 사기는 바로 성경 가지고 사기 치는 그 사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졌죠. 제 말 논리를 엮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졌죠. 오케이? 맞죠. 아브라함을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조상이라 했죠. 오케이? 맞죠. 그러면 두개를 합쳐 봅시다.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은 육에서 낳은 거니까 제하고,  아내가 임신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식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죠.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은 마치 기관차와 같아서 여기 기관차 있고 뒤에 열차 있다면 기관차가 아브라함이라면 여기 있는 열차는 어떤 사람에게만 이 기관차에 붙을 수가 있어요? 믿음의 조상이니까 믿음의 조상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믿는 자가 생기니까 믿는다는 말은 ‘나는 믿는다.’라고 해서 믿는 자가 아니고 믿음의 조상과 동일한 상태, 상황의 환경 속에 있는 경우에만 그 믿음의 조상에 합한 믿음의 자손이 되겠죠.

그러면 육적으로 생각해 보면 결혼은 일단 해야 돼요.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을 못해야 돼요. 임신 못한다고 해서 애기를 못 낳은 사람이 또 누가 있느냐 하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라 임신이 안 됐습니다. 안 되어서 요새 같으면 별 방법을 다 했을 거예요. 못 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주기 위해서 에서와 야곱이라는 언약을 집어넣기 위해서 리브가는 임신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까 뭐라 했습니까? 구성요소라 했죠.

그래서 리브가나 이삭이나 아브라함은 도대체 자기 인생이라는 건 애초부터 허용되지 않았고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그 거대한 케이크가 그 시대에 언약이라는 칼로 잘라보니까 그 안에서는 애기를 못 낳아야 되는데 애기가 생겨버리고, 니고데모에서는 뭡니까? 모태에서 다시 태어나도 못가는 그 나라를 바람처럼 찾아온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성령이 임해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그러한 케이크의 구조가 돼 있어야 말이죠. 요 지점이 아브라함 지점이라면 이쪽을 잘라내면 니고데모 지점이 있겠고 이쪽을 잘라내면 사도바울 지점이 되겠죠. 나중에 요한계시록이 있고.

이 모든 것은 인간적인 현실을 나타내는 시간 가지고 뭔가 수습하려는 이러한 버릇에 대해서 주님께서 충분히 아십니다. 인간은 기껏 해봐야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과거에 자기가 잘한 것, 그거 주어모아서 그것 가지고 하나님 천당 보내서 천국은 십자가로 가고 상급은 행함으로 간다는 식으로 들어 밀려는 것을 아는데 그 죄, 죄도 모르면서 죄라고 우기는 그 말도 안 되는 그 오류, 잘못, 그것마저 하나님께서는 악마와 결부시켜 놓고 그것을 예수님 찾아오셔서 너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악마를 주께서는 악마를 묶어서 무저갱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너 구원에 대해서 힘을 못 쓰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가뿐하게 우리 자신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여러분 다 아시죠? ‘우리가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서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주께서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 대목 있잖아요. 하늘에 앉힐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과거 완료형으로 이미 하늘에 앉혔다 이 말입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과거 완료로 보는 것은 여기 케이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 아래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안에 들어있는데 다만 깊이와 깊이를 파 들어가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처음부터 깊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단면으로 다 끊어서 보여주는 게 요한계시록 20장  이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마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세간 도둑질해서 가져가듯이 들어와서 가져갈 때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고 이런 식으로 일한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고 안 되고는 여러분 자유고, 계속 어려운 것 해봅시다. 하나님 나라란 인간에게는 존재죠. 인간은 거기 있는 걸로 봅니다. 왜냐 하면 인간 자체가 ‘나 여기 있는 것처럼 거기 있습니다.’ 존재를 이야기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번, 어디 있습니까? ②번, 얼마나 오래 갑니까? 어디, 이게 바로 공간이고, 얼마나,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어요. 칸트란 철학자가 바로 이것가지고 이야기해요. 인간의 이성이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이성이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이성으로 알 수 없다. 물 자체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인간이 따지는 모든 이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본 겁니다. 그 당시에 뉴튼의 그 세계관의 입장에서 본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어디에, 얼마나. 여기서 나온 것이 뭐냐, 언어개념이거든요. 모든 언어는 두 개로 보면 어디에, 얼마나. 성경이 언어로 쓰여 있잖아요. 언어로 쓰여 있으니까 하늘나라 묘사할 때 어디에? 얼마나?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얼마나? 1000년 동안, 어디에? 하늘나라. 악마는? 밑에 무저갱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 구성요건 속에 뭐가 포함돼 있다? 죄악 된 인간이 포함돼 있고 인간들은 뭐를 사용한다?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언어를 사용하는 그 한계는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표현을 해줘야 인간은 그것을 해석하면서 자기 속내에, 자기가 품고 있던 자기 한계의 시간과 공간을 마구, 마구 적용시킨다고 분주하죠.

아까 엘리사의 사환처럼 ‘저기는 숫자가 수십만인데 우리는 몇 명입니까?’ 이렇게 헤아리도록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부터 엘리사 쪽에 이십만 명 있고 저쪽에 십만 명 있다면 사환이 엘리사한테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저쪽 십만, 우리 편 이십만, 이렇게 되면 인간의 한계가 죄로 드러납니까? 안 드러납니까? 안 드러나죠. 안 드러나면 인간이 이해하는 그것이 마치 하늘나라의 언약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한다 말이죠. 언약이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투입되는 거거든요. 외부의 관점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자꾸 내부의 관점을 확대시켜서 외부의 관점으로 그렇게 자꾸 투사하는 버릇이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저 우편에.’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돌에 맞을 때 하나님 우편에 누가 서 계셨습니까? 예수님이 서 계셨잖아요. ‘어! 저기 하나님 계시고 어! 주님 계시고.’ 이렇게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편지에도 그렇고 요한복음 17장에도 어떻게 돼 있어요? ‘너 안에 내가, 내 안에 너가,’ 돼 있어요. 여러분 이거 안 찾아봐도 알죠? 요한복음 17장22~23절이나 요한복음 14장 20절, 여러분은 다 아시지만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진도가 너무 빠르다 할 건데 요한복음 17장 22~23절 예수님의 기도에 보면 “내게 주신 그들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이렇게 돼 있죠.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거 박 윤진 성도님 이거 그린다고 애먹었잖아요. 동그라미 그린다고. 보세요. 이거 그림이 안 그려집니다. 왜 안 그려지느냐 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림 어떻게 그려요? 아버지 안에 예수님, 예수님 안에 우리, 우리 안에 예수님, 그림이 안 되잖아요. 혼선되면 안 된다 말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뭐로 돼 있습니까? 하늘에 주님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음식을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먹었죠. 요한복음 21장에 나오잖아요. 고기를 드셨다. 그때 소화됐을 때 그 배변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한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그런 것들이 평소에 그런 것들이 이해가 돼야 내가 구원받는다고 확신이 되는데 그게 이해 안 되면 구원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확신 돼봤자 구원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내가 끄집어 내지 않은 내 바깥의 안목이 와야 돼요. 내 바깥의 안목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님의 안목이고 예수님의 안목은 십자가 지신 분의 안목이죠. 예수님 십자가 지신 안목이라는 것은 너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든 것이 내 십자가 피 앞에서는 죄다.‘라는 것을 규정짓고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그 안목이라 이 말이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든지 간에 죄가 되는데 그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구성요소로 집어넣으면 돼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일에 하나의 구성요소, 그러면 내 안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내 안에 있어도 괜찮고 내 바깥에 있어도 상관없어요. 왜, 그게 믿어지니까. 이런 이야기 나오면 ‘목사님 안 믿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하면  그건 내가 주님도 아니고 내가 십자가 진적도 없는데 그것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는 문제고. 또 어떤 사람은 어렵게 질문해요. ‘어떤 때는 믿어졌는데 어떤 때는 안 믿어져요.’ 계속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가는데 그것마저 용서됐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마저.

케이크를 다시 한 번 그려봅시다. 생각할 때는 잘 생각했는데 그림 자체가 생각이 안 나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여기 나오는 단어가 지금 나중에 일어날 일도 아니고 지난날에 한번 일어날 일도 아니고 그 단면 속에 다 처음부터 애초부터 있었어요. 이미 예정돼서 디 생긴 거라 이 말이죠. 여기에. 여기에 그리스도의 칼날만 들이대면 다른 말로 하면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안목만 받아버리면 이것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게 다 나온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1000년도 있고 그 다음에 1000년 후도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뭐가 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유황불에 가지 않고 생명책에 기록이 없는 사람은 유황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 또 질문합니다. 유황불에 들어갈 때 온도가 몇 도입니까? 더 뜨거운 데는 죄 많은 놈이 갑니까? 아니면 뜨거움의 차이에 따라서 고통의 양도 좀 차별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또 이런 문제를 제기하죠. 어디 뜨거운 지옥 불에 가서 시원한 구석 따로 있고 뭐 좋은 곳이 따로 있습니까? 유황불인데.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지옥이라는 것이 죄 지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요. 악마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지옥은 죄 지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는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살기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을 애초부터 우리 인간을 배제하고 악마 집어넣기 위해서 유황불이 있는 지옥 만들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천국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거기에 자꾸 우리 자신은 죄 적게 졌으면 지옥 가라면 가기는 가도 서늘한 곳, 유황불인데, 꼭 뭘 생각하느냐 하면 불가마 있는 찜질방을 생각하는 모양 이예요. 불가마 근처는 뜨겁고 뒤에는 달걀이나 까먹고 있으면 안 뜨겁고, 그런 것 생각하는 모양이라. 생각하는 꼬라지가 전부 다 지가 세상에서 지가 구성한 세계를 가지고 거기다 다 집어넣어서 하는 겁니다.

골프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 가서 나는 골프 쳐야지.’ 왜, Green, Green Grass Of Home, 푸른 잔디가 있으니까 골프 칠 생각만 하는 거예요. 그건 여호와 증인의 ‘깨어라‘에 보면 나오는 거예요. 여자 밝히는 사람은 천국 가서 여자 밝혀보겠다고 아내 하나와 살려니 숨통 막혀서 못 살겠다고 맘껏 여자 밝히겠다. 그것은 이슬람교의 천국이지, 그걸 이슬람교가 주장하는 천국 이예요. 거긴 여자 7명까지 살 수 있어요. 8명은 왜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솔로몬은 1000명인데.ㅎ

성경 자체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봐야 되고 우리 현재가 직접 하지 마세요. 우리는 언약의 구성요소지, 언약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구성요소지, 아브라함언약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브라함언약의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언약의 구성요소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누굴 보기를 원했던가요?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죠. 언약의 구성요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베드로가 왜 구원받습니까? 배반해야 돼요. 베드로가 배반을 안 하게 되면 닭이 화가 납니다. 자기는 울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시나리오대로 배반을 안 하니까 울 기회가 없는 거예요. 배반을 해줘야 ‘이 때다.’ 큐 하니까, ‘꼬끼오,’하고 세 번 씩이나 우는 거예요.

모든 것은 십자가 증거 하라고 우리가 있는 거예요. 그게 두 증인 이예요. 두 증인이 이야기한 것을 함축하면 ‘십자가,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다.‘ 여기 케이크 안에 이쪽의 단면을 잘라내면 이쪽이 미국이든 아마존이든 여기는 전부 다 뭐가 됩니까? 십자가 예수님 못 박히신 곳이고 동시에 뭐다? 애굽이고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겁니다. 저주받은 동네에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두 증인이 있는 거예요. 거기가 나이지리아든지, 어디든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가락시장이 아마존인 거예요. 여기가 세상 끝 이예요. 이 지점이. 왜 같은 케이크 안에 같이 들어있으니까. 같은 말씀의 저촉을 받고 말씀이 해당되는 겁니다.

여기에서는 창세기 1장에서 ‘흑암이 수면위에 있다.’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왜, 그 당시의 언약은 창조언약이기 때문에 창조언약대로 하는 거예요. 두 번째가 노아언약, 세 번째가 모세언약, 그 언약에 맞도록 그 용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이것이 뭐냐, 예수님 십자가 이후이기 때문에 이 전체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 4절 중간에 보면 ‘예수의 증거’, 예수의 증거가 뭐죠? 십자가죠.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목 베인 자들이죠. 목 베인 자! 그러니까 현재 2012년 3월 이것은 뭐냐,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목 베인 사람이 아니고, 목 베인 영혼으로 사는 거예요. 왜, 목 베인 영혼이라고 십자가 언약에서는 그걸 구성요소를 그렇게 표현하라고 해서 구성이 있거든요. 우린 이걸 보면서도 ‘나는 목 베인 영혼이 아니고 목 베인 사람인데,’ 아니야, 사람 아니야, 목 베인 영혼이야. ‘아직 목은 안 베었는데?’ 목이 안 베이고 목이 털털하든 목이 살찌든 관계없어요. 그냥 목 베인 영혼이라 하면 까라면 까는, ‘내가 목 베인 영혼이라’ 하면 목 베인 영혼이 돼요. 자꾸 목 베인 영혼 되려고 순교하지 마세요. 사자굴 들어가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하고 배불러서 자장면 먹고 배 두드리고 있어도 목 베인 영혼이라니까요. 골프 치고 있어도 목 베인 영혼 이예요. 십자가 안에서! 골프 치면서도 그걸 믿어야 돼요. 이렇게 골프채 잡고 있는 것도 순교라고.

꼭 북한 공산당 앞에서 ‘난 공산당이 싫어요.’ 이래야 죽게 되는 게 아닙니다. 또 누가 나를 순교하게 하고 미워하나 기다리면 안 됩니다. 십자가 마을에 너무 순교자들을 너무 많이 양성해 놨어요. 양 무리 마을 때문에. 요새 순교자가 너무 많아요. 그 순교자는 순교자 아닙니다.

마귀도 하나의 역할을 맡은 사람인데 마귀는 자기의 할 일을 다 해야 됩니다. 가룟 유다보고 이야기했잖아요. ‘니는 니 할 일을 해라.’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회계 장부 영수증 처리하러 가는 줄 알고, 카운터 돈 내러 가는 줄 알았지, ‘니는 마귀 짓을 해라.’는 줄 몰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처음부터 우리 안에 예수, 예수 안에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굳이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동심원을 갖고 있어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위에서 보면 예수님 중심으로 십자가 있고,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 계시고 우리가 있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요한복음 17장에 돼 있는데 이걸 측면으로 본 건데, 이걸 수직으로 안테나 잡아당기듯이 잡아당기면 하나님은 감춰져 있고 예수님이 오면서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들어있어요. 내 설명이 더러워요. 예수님 안에 아버지 계시고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가 내 안에 일하시는 것을 너희가 믿어라. 그러니까 예수님 일인 동시에 아버지의 일이 되는데 그 예수님의 일에서 붙잡힌바 된 사람은 예수님께 속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돼 버려요.

그 말도 맞고 반대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내게 속한 자라는 그 말도 맞고, 이게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이게 뭐다? 하늘나라는 지금도 일하고 있는 기능이다 이 말이죠. 기능인데 인간의 언어로 성경을 이야기하니까 기능이 아니고 뭐로 표현을 해야 된다? 바로 존재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우리의 모든 은혜가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존재로 표현하면서 그 존재에서 기능, 예수님의 하신 일을 성령께서는 활동 화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는 거예요. 존재를 불러 모아서 존재 안에서 예수님의 기능과 십자가의 일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그 다음에 아까 케이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안목으로, 십자가 안목으로 새롭게 하나, 하나 그게 확인되고 믿어지는 역사가 성역 없이 이뤄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4-08 19:20 
가락교회120315-요한계시록20장(계시의 단면)35강b-이 근호 목사
제 35강b

첫째 시간이 난해한 것이 많아서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언약이 개입하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언어, 문자, 이런 것들이 분해되면서 재조립되고 분해되면서 재조립될 때에 들어가는 것이 언약이 들어간다. 언약이 들어가게 되면, 분해된 것을 재조립 하는데 재 조립과정에서  완성의 형태로 간다. 케이크를 다시 그리면 세 번째 그리니까 그림 같은 그림이 되네요. 조각을 자르면 이 한 조각이 되죠? 그림이 어설퍼도 그렇게 추상적으로 이해해 주세요.           

  

분해되고 그 다음에 재조립될 때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언약이라고 했죠. 언약은 과거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안에 완성형으로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새 언약이 들어온다는 말은 이 새 언약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던 과거에 있던 모든 것이 완성형으로 들어오죠. 새 언약 다음에 또, 또 새 언약 또 있습니까? 없죠. 새 언약 다음에 또 새 언약, 새 언약2, 새 언약 버전, 이런 것 없죠? 새 언약, 새새언약 이런 것 없죠? 원조 떡 볶기에다 진짜 원조 떡 볶기, 원래 진짜 원조 떡 볶기, 이런 것 붙이는 것이 소용없죠?

소용없으니까 새 언약 상에서는 뭐냐, 모든 흔히 말하는 미네르바 적으로 이미 다 이루었다. 부정사,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그 대목을 읽어야 돼요.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어서. 에베소서 2장 5~6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앉히시니, 이미 인간의 시간을 완전히 무시해요. 앉히시니, 인간의 시간을 품고 있는 단어를 사용해요.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새 언약에서 재조립으로 들어가 보니까 앉히게 됐다 말이죠. 지금 보니 그림이 그럴싸하게 됐네요. 처음엔 이상했지만, 케이크입니다.

앉히시니, 부정사 동원하는, 부정사는 말은 ‘아니다’라는 부정이 아니고 정할 수 없는 것, 명사냐, 동사냐, 를 정할 수 없는 것, to 부정사, 하나의 동사를 쓰면서도 하나의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것, 문법에는 그렇게 돼 있어요. 앞에 to를 쓰게 되면, do, 하면 ‘하다‘ 아닙니까? 그런데 to do, 하면 ’하기‘ 성도 되어라, 가 아니라 ’성도 되기‘ 되어버린 성도. 이미 성도다. 결정 난 거예요. 그러면서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동사일 때는 시간이 수반되지만 동사 아니고 명사가 돼 버리면 그걸로 시간이 떨어져 나가버리죠. 그래서 성경에서의 이것은 새로운 인식에서의 언어로 해석을 해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자꾸 동사를 끄집어내려는 것은 기존의 자기 인생관, 자기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자기 해석을 집어넣으니까 예수님 안목이 아닌 자기 것을 집어넣는다 했죠. 그래서 거기서 엘리사 사환 예를 들었지 않습니까? 우리 편 없잖아요. 외롭잖아요. 천군천사와 함께 있는데. 외롭지 않다. 새로운 안목을.

그것을 신약에서는 뭡니까? 하나님 안에 예수, 예수님 안에 우리, 우리 안에 예수님, 어떻게 말로, 그림으로 우리 형상학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걸 가지고 하나 되죠? 하나! 하나 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1이라는 의미의 하나는 아니에요. 그냥 하나예요.

그런 이런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어떻게 풀이하느냐가 정답이지, 우리가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하나 됨이 지상에서의 존재의 하나가 아니고 아까 뭐라 했죠? 기능이다. 기능의 하나가 우리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가, 죄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그것을 하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교회를 이루는 그걸 교회를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지체가 다른데도 하나로 보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됨에서 나온 하나죠. 그럼 방언이 뭐냐, 통역이 뭐냐, 모두가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에서! 그래서 방언, 통역이라 하는 것은 그 모든 내용이 오직 하나로 쏠릴 때 진짜 그게 은사로서의 방언가 통역이 되는 겁니다. 은사도 마찬가지고. 모두가 ‘예수님은 주시다.‘ 거기에 몰입될 때 은사지, 자기에게로 회수돼 버리면 그건 은사가 아니고 지 자랑밖에 안 되죠. 주께서 그렇게 기적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성령의 비췸을 얻어서 능력을 받고 하더라도 그건 구원과 상관없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악신이 들렸죠. 주께서 그렇게 새로운 언약, 다윗이 등장하면 옛날에 기존에 사울이 쓰던 사울 자기의 언약에서 이루었던 구성요소는 분해되고 다윗 중심으로 다시 재조립이 되면서 그걸 새로운 언약에 집어넣죠. 그러니까 우리는 다윗이 대단하다든지, 다윗이 이거 하나(물맷돌)는 잘 돌린다든지, 하면 안 되고, 주님께서 다윗을 무엇 때문에 썼나를 봐야 돼요. 무엇 때문에 쓰셨습니까? 사울처럼 저런 식으로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적으로 나온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도 어른 다윗이 아니고 애초부터 무슨 다윗? 소년 다윗!

이것이 시편 8편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어른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고 젖먹이 아이가 동원되죠. 아이, 젖먹이 아이가 무슨 총을 쏩니까? 탈레반도 아니고요. 젖먹이 아이가 이래가지고 총 쏩니까? 지 응아도 못하는 인간이 기저귀 차고 총 쏠까요? 총 쏘다 기저귀 갈고, 총 쏩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받은 너의 자리가 언약의 아래서 너의 자리는 어린아이같이 아무것도 못하는 자리가 너의 자리다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을 못 가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천국에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못 가는 거예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못 간다. 길잖아요. 짧게 석자로 줄이면, ‘못 간다.’입니다. 참 쉽죠.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이 긴 말을 세 자로 하면, 못 간다.

베드로가 제대로 하죠. ‘그러면 누가 천국에 갑니까?’할 때, ‘못 간다.’를 믿는 사람이 가죠.ㅎ ‘오직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할 때 ‘왜 나는 못 갑니까? 내가 죽기까지 주를 따라가겠는데 왜 안 됩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할 때 주께서 ‘지금 사탄이 너를 청구하려고 밀 까부르듯이 한다.’ 하셨죠. 진짜 까불었어요. 까불이,  진짜 까불었다니까요. 잘난 체 했다 말이죠. 그럼 마귀가 까부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은 전부 다 주께서 그렇게 구성요건으로서 베드로가 사용되면서 그가 일한 자리는 십자가자리고, 그가 일한 바깥 현장은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고, 우리 처지와 동일한 겁니다. 목 베인 영혼까지 이야기했죠.

그 다음에,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 살았다. ‘살아서’란 말이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뜻이냐, 라는 이 문제를 가지고 1000년 왕국 설이 그동안 4가지의 설이 있었어요. 전 전년주의, 무 천년주의, 세대주의, 후 천년주의, 이렇게 해서 4가지, 전 천년설, 무 천년설, 세대주의, 후 천년설. 신학교 학생들, 전도사님들 지금 교회 목회하기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외우려 하니 골치 아프죠. 이거 시험치고 그랬어요. 그래서 교육도 힘든데 막상 배워놓으니까 그 전도사들이 교회 가서 청년 때 자기 유식한 체 하느라 멋들어진 거거든요. ‘야, 이거 신학교 때 고생해도 다 우리에게 이익 되기 위해서 하는구나.’

성전의 구조 이야기할 때 공부할 때는 힘들었지만 나중에 부흥회할 때 그거 수요일 날, 목요일 날 써먹으면 시간 그냥 가잖아요. 나중에 돈도 챙기고, 아이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일반 교인들에게 ‘오늘 이거 알면 신학교 3년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압니다.‘ 하면 그 소리 듣고 은혜 받아서 커피 마셔가며 듣고 하죠. 이거 다 전 천년설, 무 천년설, 세대주의, 후 천년설, 다 소용없는 겁니다. 4가지 다 틀렸어요. 안 돼, 다 틀린 거예요.

왜 다 틀렸을까요? 그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전 천년설, 무 천년설, 세대주의, 후 천년설, 왜, 이 4개가 다 틀렸느냐 하면 그 출발점이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출발점이 자기의 구원욕구, 종교적인 욕구로 인하여 나온 발상들입니다. 그동안 2천년동안 나온 발상들이예요. 교회사 초반부터 천년설은 바로 무 천년설 이것이 주류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19세기 말 미국에 부흥운동 이후에 나온 것이 바로 무 천년설에서 그 다음에 세대 주의로 갔다가 그 다음에 전 천년설로 갔다가 요 근래 와서 4개로 갈라집니다. 사실 미국에서 본격화 된 것은 그렇고.

그전에 종교개혁 때 이미 이런 전 천년주의, 그때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전 천년주의와 세대주의가 초반에 침례교 쪽에서 나온 재세례파 쪽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런 아이디어의 특징은 뭐냐, 이겁니다. ①,나는 구원받고 싶다. ②,나는 성경을 이해하고 싶다. ③, 그래서 나는 구원받는다. 나는 구원받고 싶다. 어떻게 구원받는가?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세 번째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확정 짓는 것, 이 3개를 중 첫 번째 세 번째는 같은 말이죠? ‘나는 구원받고 싶다.’에서 ‘기어이 나는 구원받겠다.‘가 사실은 ①번 뒤에 점점점(...)해서 같이 붙여도 상관없죠.

‘구원받고 싶다.‘라는 것이 결국은 뭡니까? ’구원받고 싶었는데 구원이 안 되는구나.‘ 이런 말을 처음부터 안 하죠. ’구원받고 싶다.’ 이 말은 기어이 어떤 식으로도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확정해 내고 말거야.‘ 이 뜻입니다. ’엄마, 빵 줘.‘ 뭔 뜻입니까? ’빵 안 주면 나는 빵 줄때까지 계속 개길 거야.‘ 그런 뜻이잖아요. 이게 후세의 현상학이란 겁니다. 사람이 지향하는 그것은 결국은 그것이 하나의 현실로 간주할 때만 그것을 지향하게 돼 있다.

‘나는 녹차를 마시고 싶다. 나는 커피보다 녹차를 좋아한다.’ 뭔 뜻입니까? ‘녹차가 날 위해 존재한다.’ 그런 뜻 이예요.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돼 버리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재 구성돼 버립니다.

그러면 남은 게 뭐 남았어요? 두 번째 남았죠. 두 번째는 쉬운 거예요. 성경이 무슨 내용인지 상관없어요. 내가 이해되는 대로 성경 해석되면 그것이 곧 성경의 본뜻이 되고 말죠. 그렇죠? 내가 성경을 실천 했는데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라고 한다면 그럼 성경 해석 하나 마나죠. 해도 죄고 안 해도 죄면 뭐하나? 하죠.

복음이 뭡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성경을 해도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 앞에서는 피 흘릴만한 이유를 그냥 양산한 것뿐 이예요.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착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집사님이 장소까지 해줘서 하는 그것조차도 십자가 앞에 섰다 합시다. 뭐예요? 나는 강도요. 나는 죄인이고. 주님이 아니면 단독으로 구원 된다? 안 된다?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주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해 줬다는 그 환희와 행복, 그 행복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내 고집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고집대로 사세요. 그리고 항상 십자가에서 그걸 죄라고 인정해 주세요. 그걸 뭐냐, 막 사세요. 막 사시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그 막 사는 가운데서 착한 것도 막 사는 것이고 성경공부 하는 것도 막 사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막 살고 안 살고를 구분할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처음 날 때부터 막 살았고 우리는 던져진 존재이면서 우리가 내가 아버지를 고르지 않았고 내가 엄마를 고르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버지, 엄마 고르라면 장 동건이 아니면 아빠도 아니에요. 재벌 아니면 아빠가 뭐 할 거예요? 애들 보고 ‘너희 아빠 고르라.’ 하면 전부다 잘 생기고 돈 많은 사람 고르지, 가락시장에서 빌어먹고 있는 사람보고 ‘아이고, 아버지’ 지가 심청이도 아니고 말이 안 되죠. 어디 장님을 아버지라 합니까? 말이 안 되죠. 눈 뜬 사람 많은데 장님하고 아버지라 엮일 일이 없잖아요. 말을 하고 보니 제대로 말한 것 같네요.

우리가 아버지를 싫어하면 그 싫어하는 사람의 연장선이 바로 우리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것은 곧 누굴 미워한다? 나는 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가 터뜨리고 있다는 뜻 이예요. 모순이죠. 모순. 나는 누굴 미워하는 이유는 저 사람은 내가 미워하는 대상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큼 내가 자랑스러워야 되는데 내가 아버지를 미워해 버리면 내가 아버지 자식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아버지 자식으로서 불신이 되기 때문에 나는 사랑하고 싶은 내가 그 사랑 자체가 내가 미워 받아야 될 이유가 된다니까요.

그 모든 모순은 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의 존재 같으면 ‘예수님 존재는 착합니다. 훌륭합니다. 턱수염도 이쁩니다.’ 존재 같으면 그냥 즐기고 기뻐하고 동의하고 이러면 되는데, 주님이 십자가 피를 흘린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그 피가 예수님이 잘못해서 흘린 피인 것도 상관없어요. ‘주님 너무 나대지 싶더라. 채찍 들고 그럴 때 죽을 줄 알았다.’ 이런 줄 몰라도 예수님 피는 나중에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누구 때문에 흘린 피다? 나 때문에 죽은 거니까 결국은 예수님 피에 우리가 말려들면 우리는 뭐가 돼야 돼요? 피를 위한 구성요건으로서 죄인이 돼야 돼요.

그 다음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할 때 우리가 죄인이 안 되고 싶어도 죄인 되게 만들어요.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죄인을 주께서는 니가 안 되는 죄인을 주께서 죄인으로 되게 만드는 놀라운 기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감사할 뿐이죠. 자기가 죄인인 걸 알면 범사에 감사해요. 모든 일에, 죄인인데 녹차 마시잖아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죄인인데. 죄인인데 사기당할 뻔 했다가 아까 전화해보니까 아니라네요. 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새로운 언약인 십자가가 개입될 때만 밝혀지는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예요. 인간은 알 수 없는 철학으로 노력해서 양심으로 알 수 없는 그 죄, 그 죄를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문제는 두 번째예요. ‘나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 이해하는 스펙트럼, 그동안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건 다 끄집어냄으로서 전체가 다 죄악 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이 전체가 죄악 된 해석이 되느냐 하면, 자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논리인데 어려운 논릭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하나의 케이크의 단면인데 그것은 새 언약에서 새 언약 입장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보여줬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모든 우주의 운명은 요한계시록 20장 안에 다 포함이 돼 있습니다. 마지막 유황불까지 끝나니까. 숨어있던 영적 존재까지 다 들춰내고 거기 합쳐져서 결국 마귀가 가는 곳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다 합류가 되니까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전체를 다 보여준 것을 우리 눈앞에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본문을 해석하는 그 순간 그동안 우리가 나올 수 있는 모든 죄악 된 해석은 이 본문 말씀으로 다 끄집어 나오게 돼 있어요. 논리가. 끄집어 나오니까 여기 나오는 4가지 이론 전부 다 여기 어떤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가지고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이 하나, 하나의 논리의 뒤에는 뭐냐 하면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한 해석적인 전제가 각자 다른 색깔로 전부 다 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천년 왕국이라는 해석을 하나 봄으로 말미암아 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음을 숨길 수가 없어요. 그대로 다 보여주게 돼 있습니다. 그게 천년 왕국이 주는 매력입니다. 천년 왕국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은 ‘역대 하’는 이렇게 설명했고 나는 에스더는 이렇게 본다는 것을 본의 아니게 숨길 수가 없게 돼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 하나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들어보면 내가 이걸 이야기하면서 화가 나요. 너무나 이것이 아까 자기 사적인 욕망,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부산강의에서 했습니다만 부산강의에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성경에 구원은 사적인 구원은 없습니다. 무슨 구원이라 했습니까? 집단구원이죠. 집합구원. ‘주님 저 구원해 주세요.’ 이런 거 없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우리가 이스라엘 속에 포함 됐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지, 우리 단독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구원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서!

아담이 죄인이란 뜻이 뭡니까? 아담만 죄인이란 뜻 이예요? 아니죠. 아담만 죽고 우리는 안 죽으면 아담만 죄인 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분신이기 때문에 아담도 죽고, 죽고, 죽고 해서 결국 따라 죽는다면 결국 우리는 뭐로 증명됩니까? 아담이라는 집합개념의 하나의 일원이지, 그동안 아담을 떼어놓고 만날 ‘나 어떻게. 나는 어떻게.’ 앞에 나를 붙였던 자체가 그게 아담에게 전수받았던 죄의 하나의 현상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집합 개념 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경우는 없고 단체로 구원받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단체로 구원받는 겁니다.

단체로 구원받는 것을 교회라고 언급한다고 해서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의 머리라 한다면 그 교회 개념은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개념하고 또 다르죠. 어떻게? 우리가 있는 교회가 무너지면 나오는 교회 개념이 그 교회 개념 이예요. 이스라엘이 무너져야 이스라엘이 나오듯이, 그걸 가지고 세 자로 ‘남은 자’라 해요. 남을 때는 반드시 행위로 남는 자는 있기? 없기? 없기. 반드시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고 로마서 9장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엘리야 시대에도 남은 자 7천명이죠? 7천 1명도 아니고 6천9백9십9명도 아니고 딱 떨어지는 7천명 이예요. 꼭 144,000 같아요. 딱 떨어져요. 구약의 엘리야 시대는 땅의 역사기 때문에 딱 7천명입니다. 144.000은 언약이 뭐로 개입됐습니까? 새 언약이 개입됐기 때문에 그 144.000은 우리가 헤아리는 엘리아시대처럼 그 7천이란 숫자가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주께서 그대로 그걸 사용하면서 숨어있는 의미는 하나의 케이크의 단층으로 1000년을 받혀주는 다른 기본 되는 다른 언약에 의해서 다시 이 안에서 서로서로 종합적으로 다시 해석해야 돼요.

엘리야 시대의 7천명이라는 것은 그때는 아직까지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한 악마의 존재가 개입되지 않는 7천명이죠. 그들은 뭐냐, 바알과 아세라가 개입된 7천명이죠. 아세라와 바알이 몇 명이었습니까? 850명이고 엘리야는 단 1명이죠. 그래서 엘리야가 말하기를 ‘나만 남았다.’ 해서 하는 말이 맞아요. 분명이 나만 남았어요. 아까 엘리사의 사환이 ‘우리는 엘리사 와 둘 밖에 없습니다.’ 라는 말과 똑같아요. 나만 남은 것 맞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7천명이란 숫자를, 7000명하고 850명, 누가 이깁니까? 7천명이 이기잖아요. ‘아이쿠, 남아있는 사람이 7천명 있었구나.’라고 아는 것처럼.

똑같은 구조,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를 분해하고 새 언약으로 재조립해 버리면 이건 144.000명이 되는 겁니다. 그때 조립될 때 개입하는 게 뭐라고요? 언약이다. 그 언약이 뭐냐, 야곱언약의 완성이니까 야곱이 12아들이죠. 구원받은 12, 12X12X1000(완료하는 숫자),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야곱에게 준 언약의 바탕으로 다 구원이 됩니다. 한 사람도 누락되거나 오류 없이 탈락이 없이 다 된다. 그 뜻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하나 빠짐없이 다 구원된다. 그 뜻입니다.

이걸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집어넣으니까 144.000에 들어가려도 신천지는 난리 났어요. 그 아이디어는 신천지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고 여호와증인도 144.000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돈 문제예요. 돈을 많이 바쳤어요. 돈 바치고 시간 바치고.




전에 부산서 강의할 때 한국교회 목회 5가지 방법 했죠? 육, 혼, 영에다 플러스(+)뭐라 했습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행함으로 복 받고, 이거 집어넣으면 한국교회 목회 끝 이예요. 분석하면 이것만 남아요. 예수 믿고 구원받고 행함으로 성화돼서 복 받고 세상에서 복 받고 그것 뿐 이예요. 그리고 육에서 영으로 혼에서 영으로, 3분설, 뭐 좀 유식하다 하면 육, 영, 2분설, 신학자들이 주장해요. 인간요소 자체에서 내부적으로 스스로 나온 거예요. 이건 바깥의 외곽 안목이 아니고 스스로 된 안목으로 분석한 겁니다. 이건 철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한 거니까, 이런 식으로 장난질을 치는데.

여기 1000년이란 말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온 거다 말이죠. 1000년의 내용이 뭐냐, 기능이 뭐냐, 1000년이 어디 있느냐, 얼마냐가 아니라 기능이 뭐냐, 아까 했죠? 존재가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기능이라 했죠. 자꾸 해야 돼요. 존재가 돼 버리면 ‘살아서’란 말이 나오는데 이 ‘살아서’라는 말은 살았다, Ezesan 이것은 살아있다는 뜻 이예요. 살아있다니까 아무리 죽여도 안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죽었다가 부활돼 버리면 두 번 다시 이것은 죽일 수 있다? 못 죽인다? 아무리 죽여도 죽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목 베인 영혼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년동안 주와 함께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말은 부활된 사람이 아까 요한복음 17장과 14장에 예수 안에 우리 있고, 우리 안에 누가 있다? 예수님 있다. 그러한 주님의 일이 완료가 돼 버리면 예수님 안에 엘리야, 모세 안에 예수님,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3인방, 12제자 임원진들 3명하고 이쪽에 엘리야, 모세 예수님 3명, 3, 3으로 만났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누가 있었다? 엘리야도 있었고 모세도 있었잖아요. 나타난 것은 모세, 엘리야지만 그 안에 아브라함이 없었겠습니까? 이삭이 없겠습니까? 왜냐 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 살았다 할 때 이 살았다죠. 안 죽는다 이 말입니다. 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살았다는 거예요. 살았다 하면 그 사람은 개인적인 목숨의 능력 때문에 살은 겁니까? 그 안에 죽어도 살아난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통치한다는 것은 결국 뭔 뜻이냐 하면 1000년이란 뜻은 지금 부활의 세계를 두고 이야기한다 이 말입니다. 부활의 세계니까 이 케이크를 층으로 하게 되면 지금 이 안에서 현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엘리야, 모세, 같이 다 있는 거예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어디라?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당시는 십자가 전이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어졌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임하면 아버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내가, 아까 요한복음 14장 20절에 이것은 진리의 영이 와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다음에 내가 거처를 너와 함께 한다. 성령 안에서 함께 있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라 하면 영지주의라 몰아세워요.

전 천년주의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을 1층으로 깔아버리면 전 천년설이라는 것은 뭐 전에? 예수님 재림오시기 전에 1000년이 있다는 것이고, 후 천년설은 뭐냐 하면 예수님 재림하고 난 뒤에 1000년이 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세대주의는 전 천년설과 유사하죠. 세대주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먼저 1차 부도 맞고 2차 부도 맞는 거예요. 먼저 택한 백성 건져요. 건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이 땅에 환난을 보내요. 일단 환난을 줘놓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에서 천년동안 그동안 복수 못한 것, 한 맺힌 것, 이런 것 통치해서 속을 풀고 나서 그 다음에 잠시 마귀가 풀려서 다시 활개 칠 때 마지막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걸 끝장낸다. 순서가 뭐냐 하면 휴거해서 백성들 올려놓고 주께서 천년동안 통치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뒤에 마귀가 잠시 풀려서 극심한 환난이 오게 되면 다시 주께서 제 2탄, 처음에는 소총 갖고 쏘다가 폭탄 쏴서 전부 다 싸그리 마지막 심판을 해버린다. 그러한 천년 왕국이 있다는 겁니다. 꼭 동화 같아요.

**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과 역사적 전 천년설의 차이점 **

세대주의 : 예수님의 공중 재림 ⇒ 성도들의 휴거 (어린양의 혼인잔치) ⇒ 대 환난 ⇒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 천년 왕국 ⇒ 둘째 사망 ⇒ 최후의 심판 ⇒ 새 하늘과 새 땅

전 천년설 : 7년 대 환난 ⇒ 예수님의 재림 ⇒ 성도들의 부활 및 휴거 (어린양의 혼인잔치) ⇒ 천년 왕국 ⇒ 둘째 사망 ⇒ 최후의 심판 ⇒ 새 하늘과 새 땅

후 천년설 : 천년 왕국보다 그리스도의 재림보다 앞선다. 이 세상이 천년 왕국이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심 같은 것에 대해서 아직까지 미련이 있죠. 그렇잖아요. 사적으로 사람의 복수심을 주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사실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원수가 아니고 자기 사적인 원수를 ‘주께서 대신 갚아줬으면 좋겠다.’란 그 응어리 같은 것을 성령이 속 시원하게 또는 목사가 속 시원하게 풀어줄 때는 저절로 우리는 ‘아멘 할렐루야‘가 나올 수밖에 없죠. ’그래, 조금만 참자. 주께서 내 원수를 갚아 줄 거다.‘ 무슨 미친 소리 하는 하느냐, ’니가 원수야, 니가. 원수인데 니 원수를 누가 갚아줘.‘ 이런 소리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 사회서 사기당한 사람들, 억울한 일 당한 사람들, 저 남대문 불 지른 대신 교회 와서 내야 되는데, 먼저 불부터 질러서 문제돼 버렸는데.

뭔가 불을 질러버리고 싶은데 불 지르면 경찰이 출동할까봐 겁이 나서 원한을 풀어주는데 대해서 그 한 맺힌 원한을 뭔가 푼다는 데서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해방감을 제공함으로서 교회가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뭣 때문에 오셨습니까?’ 원한 관계, 두 번 기도 하시고 새벽기도 나오시면 됩니다. 천주교 신부들이 칸막이해서 삐딱하게 앉아서 하잖아요. 그게 뭡니까? 고백성사 하잖아요. 주기도문 외우시고 아침마다 기도하세요. 처방전, 의사가 처방전 해주는 것처럼. 식사 전에 기도 한 번 하시고 식사 후에 30분 후에 기도 한번 하세요. 이거하고 똑같은 소리예요. 그러면 그것이 맞고 안 맞고 간에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누가 나에게 내 억울함을 들어준 데서 심리적으로 해소가 되면서 병이 낫는 거예요. 그럼 장사가 되죠. 그런 장사 누가 못합니까? 나도 하겠다. 그때는 평범한 목소리로 하면 안 돼요. 저음으로 ‘알렐루야, 믿습니까?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데 역시 주의 종이 내 사정을 들어주고 내 억울함을 풀어주는구나. 마치엘리야 때처럼 온갖 선지자 동원해서 그리 하겠죠. 많이 안 해보셨습니까?

바로 사람들은 예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원할 때 그 사람은 아직도 살아갈 희망과 동력을 얻습니다. 죽을 사람도 한강에 뛰어들 사람도 목사 잘 만나서 ‘으쌰, 하면 된다.’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지옥 가지만.

바로 종교라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그 한 부분을 담당함으로서 서비스 기능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처소를 유지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겁니다. 사람들이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가족이 바빠서 해결 못하는 것, 그 틈새시장을 노리면서 거기서 상담과 정성과 애정과 관심과 관계를 시켜서 나는 외롭지 않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준다는 그런 스스로 자기에게 체면 걸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모든 병이 낫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그것이 오늘날 종교단체가 유지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소망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적극적 사고방식을 해야죠.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줘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국 뭡니까? 누가 우상화 되죠? 자기 우상이죠. 바로 이런 시대가 이 층층이 이런 시대, 이런 교회가 나타나 줘야 왜 이스라엘이 주변에 있는 여호와 말고 왜 다른 신을 껍데기는 여호와고 속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 내부에 그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무저갱에서 풀려나와서 인간을 장악한 겁니다. 선악과에서 무저갱에 갇혀 있던 악마가 풀려나와서 선악과 따먹게 했다는 거예요.

그게 시대적으로는 옛날이지만 이 층층이 시간 관계없이 단면을 보면 모든 것이 같은 장소에서 그때가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고 모두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지금 죽어도 우리는 목 베인 영혼이 되어서 영원히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왕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1000년이란 단어가 붙어있으면서.

이 1000년이란 숫자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데 성경을 찾아봅시다. 찾아보는 게 오늘 처음입니다. 창세기 5장, 여기 보면 족보들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죠? 그 나이가 까딱, 까딱 뭘 안 넘습니까? 절대로 천년을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 이후에 천년이란 말이 어디 처음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5~6절, 십계명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한번 계산을 해 봅시다. 삼, 사대니까 그 당시에 한 대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낳을 때까지 그 간격이 한 대거든요. 그 당시에는 나이가 50이고 80이고 살았다고 보고 50년으로 봅시다. 삼, 사대라 하면 150~200년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천대 같으면 1000X50=50.000년 이예요. 그러니까 50.000년 전에 한번 말씀 지켜놓으면 그걸 얼마동안 우려먹느냐 하면 50.000년 우려먹을 수 있죠. 한번 착한 일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후손이 어떤 잘못을 하느냐에 관계없이 50.000년을 그냥 먹는 거예요. 그냥 가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가 생기죠. 만약에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50.000년이 취소되고 다시 삼, 사대까지 저주가 임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그 시대에, 모세언약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의 무한 개념은 천대 까지가 무한 개념으로 사용하던 그 시대였어요. 그리고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삼, 사대정도는 같은 집에서 목격하면서 생존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는 니 살아 생전에 그 어긴 흔적들을 니가 목격하면서 살아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천대까지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말씀을 지킨 적 없지만, 천대까지 지킨다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천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영역에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니가 말씀을 지킨 것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까 창세기 5장에서 사람의 수명이 아무리 길어봐야 제자리 뛰기, 뭘 못 넘어요? 장대높이뛰기가 뭘 못 넘습니까? 1000이라는 장대를 못 넘는 거예요. 러시아 선수 장대높이뛰기 해봐야 1000미터를 못 넘잖아요. 넘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은 선악과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갇혀있고 마치 어항 속에 금붕어 노는 것을 주께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해봐, 해봐, 천천히 해봐. 삼, 사대 저기 먹이 안 줘야 되겠네. 고생하라고.’  이렇게 뭔가 가지고 노는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모든 게. 그런데 그게 당연한 것이 우리는 주를 위해서 나온 피조물이지 우리가 나 쳐다보면서 나 즐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사진 찍어서 어항에 넣어놓고 그거 지켜보고 그러라고 우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가 돼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갑자가 관찰자의 위치가 주님의 위치는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위치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누가 합니까? 우리 자신이 하니까 우리가 들여다보니까 ‘아이쿠, 갑자기 하체가 부끄럽네. 치마 하나 만들어 입어야지.’ 그래서 무화과나무로 치마 만들어 입고 있다 말이죠. 결국 치마를 입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뭔가 비정상적이 되었으며 그 비정상적인 된 그 흔적을 부끄러움이 발생되었다는 자체가 수치거리가 있다는 말은 이미 우리 몸이 정상이 아니란 뜻이고 주께서 오시면 수치가 굴러간다 했죠? 할례를 행하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다 했죠. 성경에. 여호수아 5장 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주님께서는 다른 흔적으로 교체시켜주는 방법으로 니가 구원받았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장차 와서 주님이 손수 입혀주는 그 뭔가 가려주는 그것, 그 가려주는 것은 어떤 지점에 가려줍니까? 우리가 수치가 드러난 그 지점을 가려주죠.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우리 온 몸이 머리카락부터 발까지 온 몸이 수치스러워져야 우리는 온 몸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은 것이 확인되는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만날 십자가 팬티 입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그야말로 성경에 보면 피에 잠겨 풍덩 빠져버리는 피에 온 몸을 적시는 거예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옷에 피로 말미암아 흰 옷을 입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3~14) 또는 갈라디아서에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마치 구약에서  제사장이 다음 제사장에게 옷을 벗겨 주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의 옷을 입음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된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존재가 아니고 뭐다? 전부 다 현재 기능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기능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 천년설이나 이런 사람들은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기능이 아니고 존재죠. 존재! ‘나 천년동안 어디 가 있습니까?’ 만날 관심이. ‘휴거할 때 어디 가 있습니까? 천년 통치할 때 어디 가 있습니까? 재림하고 나서 어디 가 있습니까?’ 어디 가 있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대주의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어요. 세대주의는 7년 대 환난이 있게 된다. 7년 대 환난 속에서 환난을 이긴 사람은 구원받고 못 이긴 사람은 지옥 간다. 그런데 그 7년 대 환난이 곧 닥쳐온다는 거예요. 왜, 마지막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야 되니까. 적그리스도라 할 때 이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존재예요? 존재 아니에요? 존재로 오셔서 뭘 보여줍니까? 존재로 오셨고 십자가의 부활로서 지금 기능으로서 작용하죠.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뭔 뜻입니까? 무한 속에 유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고 합시다. 이걸 존재로 설명하면 우리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기능으로 하면 돼요. 내 안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우리가 ’내 안에 예수님 있다.‘ 하면 안 되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실 때에 ’가만 있어봐라. 뒤에 계신 양반이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어요? 안 물었죠. 그냥 아무리 요리보고 조리 봐도 예수님밖에 없죠. 심지어 얼마나 안 보였으면 귀싸대기 뺨까지 때리겠습니까? 옷까지 주워 모았겠어요? 누구만 있다고 본 거예요? ’당신은 아무리 우겨도 당신은 당신 혼자 있는 거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내가,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 하죠. 그 있음은 존재의 우리가 보는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지 아니하고 기능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부활한 것만 아니고요. 죽었다는 그 자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저주받는 그 모습이 부활했던 그 기능 이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기능입니다. 옆에 있던 백부장이 부활되기도 전에 ‘저 분은 진정한 의인이다.’고 이방인 백부장이 그걸 고백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옆에 있는 강도가 ‘주여, 저를 생각해 달라.’ 같이 죽어가고 있어요.

바다 물에 빠졌으면 안 빠진 사람보고 ‘살려 달라.’고 해야지, 같이 물에 빠진 사람보고 ‘같이 물에 빠진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 이건 정말 인간의 힘으로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기능이 되풀이 될 때만 그게 진짜 아브라함 자손에 속한 그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보고 믿는 건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죽고 난 뒤에 계산해보고 ‘죽고 나면 부활하지.’ 이거 계산해서 믿는 건 그건 지식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이유도 없어요. 논리도 아니에요. 그냥 죽었던 분이 날 살리러 온 거예요. 십자가 죽었던 그분이!!

그분이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 이예요. 이 동네 청년 다 나쁜 놈이 아닙니다. 그 청년이 나의 구세주라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이 나의 구세주라 해야 뭔가 고상한 걸 믿는다 하잖아요.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건 이슬람교도 하나님 믿고, 힌두교도 하나님 믿습니다. 다신이긴 하지만, 나중에 다신이 문명이 바뀌면서 다신이 일신으로 바뀝니다. 그걸 종교의 진화라 하는데. 그렇죠? 다신에서 정령숭배에서 다신에서 일신으로 바뀝니다.

신을 믿는 것은요 이건 종교성인데 그건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고 구원받는 믿음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예수님의 기능이 바로 숨어있는 하나님이 기능인 것을 믿는 거예요. 그 기능 중에 하나가 택한 백성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한다. 그 기능까지 성령이 와야 믿어지는 겁니다. 그게 믿어진다면 나는 그냥 주님이 하는 천국에 구성요건이지, 예수님 때문에 나한테 어떤 이득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 때문에 어떤 이익을 봐야 된다는 내 자리, 내 존재 자리가 기능의 자리로 분해되고 날마다 분해되고 날마다 재편집돼야 될 필요가 있어요. 그것만 있으면 돼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고, 그것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게 어디 나오죠?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0~11) 

내 안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만 나타나서 성도들만 성도되게 하는 기능으로 나는 ‘쓰여 진다 했죠. 그 말이 얼마나 어려워요. 요새 목사들처럼 하면 쉽잖아요. ’여러분, 예수 믿었습니까? 구원받았네요. 그럼 복 받고 싶으면 기도하세요.‘ 이게 얼마나 수월해요? 정말 이건 알아듣는 이야기잖아요. ’정성껏 하시면 복 더 받습니다. 복 받으면 상급 더 받습니다.‘ 이 얼마나 납득이 돼요? ’혹시 여러분, 죄 지었으면 회개하시면 여러분 저주 그치고 하나님 복 주십니다. 하지만 복 받았다고 대들면 저주 받습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납득이 됩니까? ’그래, 그래.‘ 이게 납득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납득이 될 수밖에 없죠. 선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저주 받는다. 그건 악마의 기능이지, 예수님의 부활의 기능이 아닙니다.

죽었다 살아나신 분이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해요. ’니는 무슨 짓을 해도 죄인데 그 죄를 이미 난 다 이뤄졌다. 이제 증거 할 것은 나 같은 죄인의 괴수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것만 앞으로 새로운 사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거 증거 하면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만 이 말을 알아듣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다른 사람은 못 듣게 하는 것이 주께서의 솎아내는 작업, 분류작업, 악한 고기, 선한 고기를 분류하는 분류작업에 너는 기능으로 이미 참여했느니라.‘ 그것이 바로 주께서 살았다하는 이유입니다. 살았다는 이유를 알았으니까 다음시간에는 그 다음에 전쟁 개념은 소급해서 과거에 곡 전쟁, 이것은 과거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것을 소급해서 이 세상이 어떤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는 다음 4월 초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항상 아무리 말씀 들어도 돌아서면 내 편한 게 제일이고 내 중심이고 내 잘난 것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를 용서했다는 그 기능만이 우리에게 터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