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3강-전략 1202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7. 17:49

2012-02-17 01:14:31 조회 : 1371         
전략 120216 이름 : 이근호 (IP:117.55.1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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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216-요한계시록19장(전략)33강a-이 근호 목사
제 33강a

요한계시록 19장 11절, 몇 절만 제가 읽어 볼게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 가운데서 우리 개인의 위치가 여기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우리보고 뭘 시키고 ‘자, 이렇게 해, 이렇게 실천에 옮겨.’ 이러면 요한계시록이 어렵지 않죠. 그걸 순종해서 그걸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우리보고 ‘야, 너 이리 나와. 이거 해, 저거 해.’ 시키면 쉬운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우리보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보고 시키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있겠죠. 첫 번째는 우리보고 시켜봤자 소용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 돼서 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보고 시켜서 ‘ 너 잘했어. 잘하면 너 구원해 줄게.’라는 것을 애초부터 기대 안 할 경우 죄인이기 때문에 방금 뭐만 나온다 했습니까? 죄만 나오기 때문에 전혀 우리 구원에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시키지 않는 방법.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두 번째가 정답인데 우리가 사라질 존재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사라질 존재로 절대로 이해 안 합니다. 꿈에도 나타나고 죽어서도 천국에 우리가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내가 없어진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사라질 존재 같으면 그냥 안개 같이 해서, 안개의 뜻이 뭡니까? 이렇게 하나를 집어서 ‘야, 너 이리 나와.’ 잡을 수가 없는 게 안개잖아요. 안개는 하나의 물방울로 집합이 되어서 이리 하면 흩어지고 저리해도 흩어지고 햇빛 나면 ‘없네.’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없는 존재로 보는 겁니다. 이건 쉽게 말해서 우리는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런 뜻인데 성경은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이름은 아담이다.’ 이렇게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 여기 있습니다. 명령만 하소서. 우리가 순종하겠나이다.’ 이걸 원하는 거예요. 과연 우리가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내가 스스로 측정해 보고 만약에 못하면 반성하고 잘하면 칭찬해 주소서. 이게 일종의 우리의 자존심이라 할까요. 우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마지막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바탕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 자체가 사라지기에 우리가 현실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현실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죠. 사막에 신기루가 있는데 갑자기 사막 저쪽에서 폭풍이 분다. 그러면 폭풍이 한번 싹 지나가면 신기루가 어떻게 됩니까? 신기루에 포함이 돼서 날아가 버리죠.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것이 과연 질문의 초점이 그겁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과연 현실이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자신이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누구는 죽어도 ‘나는 안 죽을 거야.‘라고 우기면서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내는, 생산해 내는 이것을 하나의 현실이라 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현실 이예요? 내가 구성한 현실이죠. 내가 구성한 현실 이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리니까 이것은 ’내가 안 사라질 거야.’라는 그런 근거에 의해서 나의 현실도 안 사라진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현실을 사라지게 날아가 버리면 이걸 현실로 붙들고 있는 우리도 같이 사라져 버리죠. 그러면 우리가 사라지면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아라, 죽으면 낙원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그 당사자는 누굽니까? 우리가 사라져 버리면 강도보고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든지 엘리야는 뭐고 모세는 뭐고 그 자는 누구냐 이 말이죠.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주체는 사라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새로운 주체가 우리에게 발생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뭐냐 예수님의 현실을 줘 버리면 우리가 갖는 현실은 사라지면서 크로즈 업 돼서 주님의 몸에서 만든 현실이 이렇게 덮쳐 버리면 그 현실 속의 일부로서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그리스도인 몸의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그리스도 몸은 영원해요. 하나님이 보장하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하다는 말은 그 밑에 붙어있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영원한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것이 누구한테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우리보고 뭐 하라는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은 우리 현실을 안개처럼 신기루처럼 날라 가 버리고 그 날라 가게 만드는 그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현실이 이렇게 주어지니까 여기 나오는 용어, 단어 하나가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여기 나오는 충실이고 진실이고 공의고 눈이 불꽃같고 많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백마 탄 사람, 이것은 우리가 시장 바닥에서 우리 인간들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단어와 호칭되는 내용들이 아니다 이 말이죠. 분명히 백마는 알아요. white horse, 우리는 분명히 백마는 아는데 여기 나오는 백마 내놔라 하면 없어요. 왜, 우리가 만든 현실을 없애기 위한 용어 동원이기 때문에 현재 안 없어지는 현실 속에서 끄집어 낸 단어 가지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시시키려고 애쓴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공식으로 만들어 볼 테니까 공식을 알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공식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하는가, 말씀에서 주체를 만들고 주체에서 다시 말씀으로 갑니다. 이게 공식 이예요. 말씀-> 주체->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 입은 주체가 되고 그 주체가 말씀을 다시 완성을 해서 이 세상을 예수님의 나라로 만드는 그것을 천국이라, 또는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식을 안다고 치고 이 말씀이 왔을 때 이 말씀의 그림자 격으로 이 주체라는 것을 우리는 뭐로 이걸 대신하고 싶냐 하면, 내 몸이 있잖아요. 이 있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 있는 걸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분리수거할 수도 없고 내 몸을 이 주체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말씀을 볼 때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집사님이 성경 보고 있으면 제가 만약에 ‘집사님, 성경에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그렇게 물어보면 ’목사님, 본인이 보세요. 왜 자꾸 나보고 이야기하는가요?‘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나는 성경을 봐도 소용없어. 집사님은 신앙이 좋기 때문에 집사님 본 게 진리야.‘라고 하지를 않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해요. 구원받는 것도 내가 받으려고 하지, 나 빼놓고 남 구원받는 것은 짜증나서 견딜 수 없어요. 남 천국 갈 때 난 지옥 가면 약 오르잖아요. 중요한 것은 나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이렇게 가야 될 화살표가 어디로 옵니까? 나 여기 있음에 여러분 따라갈 것도 없죠. 말씀을 나한테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말씀이 주체를 만들 때 우리는 말씀 주체를 만들 필요 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주체에다 플러스(+) 말씀을 더 보태면 되죠. 그런데 예수님의 주체는 말씀이 주체가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으로 뭉쳐지고, 뭉쳐지고 사라지고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주인공인양 버티고 있으면 말씀이 이렇게 와 버리면 말씀을 알고 성화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교회 봉사 하고 십일조 내고 기도 많이 한 나를 이렇게 신앙 좋기는 어려운데 그만큼 얼마나 투자 했습니까? 30년 신앙 경력, 40년 해서 이 멋진 나를 만들어 낸 이걸 도로 도루묵으로 사라지게 만들어요? 미쳤어요? 그동안 나하나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고 교회 얼마나 돈을 갖다 바쳤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바친 내가 이제 와서 지금 와서 그걸 전부 다 ‘아!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받는구나.’ 이런 식으로 우리가 뒤로 물러 설 그런 마음이 생뚱맞죠. 그런 의도는 없죠. 사라져야 되는데 기어이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말씀이 와서 주체가 되고 그 주체가 사라지면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간다. 그건 로고스, 예수님이죠. 그런데 이 자리에 건방지게 우리가 뛰어 들으니까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야, 우리를 구원 시키는구나. 고맙습니다.’ 끝나 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나 구원 받았다. 건드리지 마라. 나 구원 받았어. 나 너보다 더 믿음이 좋아.’ 이렇게 돼 버리죠.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두 가지를 내세웁니다. 이 노선, ①말씀에서 예수님으로 가는 이 노선도 유지시키고 ②말씀으로 인간도 유지시키는 이 노선,  ①번 ②번 노선 다 유지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을 ②번 노선에서 사라지게 하면서 예수님의 업무의 완성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요. 주님도 일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주님의 일하심에 여기 참여시켜서 주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시키는 방식을 성경 전체가 사용합니다.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요번에는 공식이니까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이제부터 무척이나 어려워요. 어려운데 조 한주 집사님, 처음 오셨는데 배려해서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말씀이 올 때 하나의 주체로 이렇게 형성 된다는 요 과정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겁니다. 사람이 뭘 하나 행동에 나서게 되면 동일시, 또는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성경 말씀에서 엘리야, 세례요한, 사도바울이 있다 합시다. 성경에 사도바울, 엘리야, 모세 있다면 사람의 주체는 어떻게 읽느냐 하면 엘리야, 사도바울 이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여겨요. 첫 번째 사람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지금 천국 가서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너희들은 죽은 걸로 여기지만 그분들은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다. 마르다 마리아 오빠도 살아있었잖아요. 마리아, 마르다는 죽었다고 여겼지만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흘 만에 불러냈죠. 불러와서 또 고생했겠지만.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저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 다음에 첫 번째 사람, 저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두 번째, 그들의 주체와 나를 어떻게 동일시시키느냐, 두 번째 작업이 문제가 돼요. 모세 믿음 좋다. 사도바울 믿음이 좋아.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 방법은 이제는 하나밖에 없겠죠. 그 사도바울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세계와 내가 일치시키면 사도바울이 간 나라, 예수님이 간 나라, 베드로가 간 나라에 내가 합류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퍼뜩 떠오르죠.

그러면 그 다음 작업은 뭡니까? 그 다음 작업은 바로 모방이고 흉내 내는데 그 모방과 흉내는 무엇을 동원시키느냐 하면 규범을 동원시키죠. 규범은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법을 적용시키죠. 그 법을 동원시키는데, 그러니까 교인들이 목사한테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승리한 사도바울이 있는데 목사님, 제가 목사님 교회 출석했습니다. 이제 목사님은 저한테 뭘 해주느냐 하면 사도바울과 같은 동일한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작업에 목사님이 나를 도와줘야 되겠습니다.‘ 도와주는데 방금 어떻게 도와준다 했습니까? 규범이나 법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목사님이 저한테 ’성경에 이런 말씀 있으니까 그거 지키시면 당신은 사도바울과 동일한 신앙인 돼서 구원받습니다.’라는 그러한 방법들을 알려 달라고 교인들은 그걸 요구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 좋으라고? 그게 누구 좋으라고 한 짓 이예요? 목사한테 요구한다는 것은 누구 좋으라고? 내 좋으라고. 나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거예요. 아주 근원적인 자존심이죠. 신앙적인 명예고 체념이고. 그럼 목사 입장에선 편하죠. 굉장히 편한 거예요. 믿으라고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 행하세요.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명령은 반드시 명령 주는 자는 명령 받은 자가 명령 주는 자에게 예속되게 돼 있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든 원하든 상관없이 예속되게 돼 있어요. 그러면 똘마니가 되죠. 목사의 똘마니가 됩니다. 목사의 똘마니가 되면 목사는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요. 한 자로 돈이죠. 목사는 돈 빼는 기술밖에 없어요. 돈 빼낼 수 있다면 어떤 짓도 다 해요. 자기 부인도 하고 기도 빡세게 하고 희생도 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로 가는 그러한 모든 멋진 거 있잖아요. 선교하는 업적에 자기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그런 것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돈을 빼내려는 것이 목사의 수법입니다. 이런 것을 가서 해야 되는데, 2시간만 하면 다 나가는데.ㅎ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돈 달라는 것보다 더 미운 것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잖아요. 대개 돈 달라는 목사보다도 나는 돈 필요 없다고 하는 목사가 단수가 더 높아요. 그거 아마추어들, 교인들은 몰라요. 한 목사님은 아시지요. 그 고단수를 모른다고요. 한 경진 목사의 고단수를 모른다고요. 그런데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는지.

문제는 이겁니다. 이게 뭡니까? 동일성! 이건 성경에서 한마디로 탐욕! 욕심입니다. 일종의 도 닦기. ‘니가 되는데 내 안 될 게 뭐 있노.‘ 이래요. 사도바울 니가 구원받는데 내가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모세 니 하는대로 한다. 니가 한 그대로 하면 되니까. 솔로몬 재판 보고 솔로몬 재판 흉내 내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ㅎ

지난 주 설교 제목이 나귀새끼였잖아요. 나귀새끼 설교 하면서 제가 예를 하나 들었죠. 나귀새끼 임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가서 임자 새끼 가져가려하니까 임자가 뭐라 합니까? ‘뭐요? 당신 임자 있는데 왜 이럽니까?’ 할 때 제가 예를 들었죠. 벤츠를 정비소에 맡겨놨는데 벤츠 타고 싶어서 시동 거니까 주인이 옆에서 ‘어, 남의 차를, 당신 뭐요?’ 할 때 우리가 시험적으로 당해보란 말이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벤츠를.’ 이러할 때 덜렁 내 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맞아죽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노림수가 있다는 걸 알아요. 흉내 내기를 너무 잘해요. 모든 교육의 시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입니다. 모방이 어린애일 때는 교육의 시발점입니다. 흉내 내기, 모방하면 그것이 어떻게 그 사람과 일치됩니까? 아니죠.

모방해야 될 대상은 나에 종속돼요. 누가 높으냐 하면 모방하고 싶은 사도바울보다 사도바울을  흉내 낸 내가 결국은 사도바울보다 더 우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논리를 우리가 내뱉게 돼요. 이걸 반드시 발설하게 돼 있습니다.

동일성이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이거는 안 됩니다. 동일성이 되질 안 해요. 성경에 사도바울은 구원받았다. 그런데 제가 방금 결론 내리기는 결코 사도바울처럼 같은 신앙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우리에게 뭘 안겨줍니까? 절망을 안겨주는 거죠. 사도바울은 구원받았는데 사도바울처럼 되지 아니하면 나는 결국은 사도바울이 간 천국에 합류를 못하게 되면 나는? 갈 곳은 지옥밖에 없죠. 그래서 이것은 우리한테 절망이 되는 겁니다.

성경 모든 말씀이 마치 우리가 그걸 모방하고 반복적으로 교육받으면 마치 그것처럼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규범적이고 법적인 것을 계속해서 솎아내고 있죠.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 그럼 여기 열 명이 있다고 하면 십계명을 열 명에게 나눠주고 지키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 지켰다고 숙제 해온 숙제가 동일합니까? 열 명이면 열 명 다 다르죠. 왜 다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각자, 각자가 각각 다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 자기 모방들을 해놨기 때문에 이건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열 명 중에 어느 것이 모델입니까? 그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다 그게 가짜죠.

이것을 영어로 Copy라고 합니다. 복사판. 복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유사품, 다른 말로 하면 가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너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걸 들통 내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그럼 사도바울은? 그럼 베드로는 구원받았잖아. 세례요한도 구원받고 엘리야도 구원받았잖아.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그 다음에 툭 튀어나와야 되겠죠. 그 사람들도 우리같이 복사판인데 구원받았잖아. 우리가 복사판 유사품 가짜라서 만약에 지옥 갔다면 그들도 지옥 가야지, 아브라함도 가야 되고 가야되는데 그 사람들은 천국에 갔잖아. 그런데 우리보고 복사 품이라 하면서 우리는 안 된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에 건성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쉽게, 쉽게 보면 안 된다는 거죠. 요한복음 5장 39절에 말씀 아시죠?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제가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 말을 하신 것은 예수님 단독으로 있을 때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둬야 돼요. 많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라 봅시다. 이 사람들은 전공이 뭡니까? 성경 말씀을 연구해서 그 다음에 거기서 뭘 끄집어내고? 규범과 법을 끄집어내고 그걸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 그러한 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그 당시 세상 , 유대인에게 전파해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생활화 되고 말씀을 실천에 옮겨서 뭘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생산하기 위해서 한 거죠.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말씀 들어본 적 있습니까? 마태복음 5장 20절에 그런 말씀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이 말은 바리새인이 하는 일, 주특기가 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의에 접근하기 위해서잖아요. 그 방식이 뭘까요? 그 방식은 성경을 뭐로 재조립합니까? 성경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걸로 다시 재조립하고 정리하고 배열하고 정돈하고 정렬해놓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라‘ 하면 이게 안 되니까 세세한 세부조항을 ’안식일을 지켜라’의 부대조항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안식일 날 담요를 들고 가게 되면 어긴 것이 되고, 안식일 날 담요를 안 들고 가면 지킨 것이 되고, 왜 부대발생 법칙을 만들어 내느냐 하면 결국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의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의를 만들려면 그 의가 있는 사람에 한에서만 메시야 나라에 참여한다.‘라는 공식이 이미 성립 돼 있는 거예요. 그거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죠? 주님 머립니까? 인간의 머립니까? 인간의 머리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은 기껏 해봐야 바리새인이 하는 그 작당들 아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오늘날 교회는?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이 뭡니까? 교회목사들이 하는 일이 뭐고 교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교인들이 교회 앞에 나와서 스스로 만들어 내고 정리하는 그 구원받겠다는 원리 원칙이 뭐예요?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거잖아요. 본인이 얼마나 고상해 보이고 성숙돼 보이는 하나님의 의로 숙성된 푹~ 농익은 포도주처럼 이제는 어지간한 환난과 핍박도 이겨내는 순교하라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죽으면 죽으리라 할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믿음에 자생력을 갖춘 기도하면 병도 낫고 어떤 것도 행할 수 있는 기적을 유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서 똥배 나오듯이 불룩해서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기도하면 안 되지만 지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많아서 기도하면 병 낫고 이런 거, 그런 것을 모델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을 모델로 뽑아서 ‘나도 저처럼 나도 될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나도 당신 따라붙을 거야.‘ 이런다고요.

이것을 가지고 푸크란 철학자는 ‘전략’이라 했습니다. 전략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주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전략만 있다고 어려운 말을 했어요. 이걸 풀이하면 내가 이렇게 확정돼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지가 목표한 게 있으면 목표 앞에서 자기는 해체돼 버립니다. 내가 요걸 반드시 해 내겠다 하면 지난 과거의 지가 구축한 것까지 다 과감하게 부술 용의가 있습니다.

결혼할 총각이 너무나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자 친구가 담배 냄새를 너무 싫어한다. ‘까짓 거 내가 저 여자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뭔들 못해.’ 담배 당장 끊어요. 그렇게 끊어라, 끊어라한 담배를 여자 친구 말 한마디 ‘나 담배 안 끊으면 자기와 안 만날 거야.’ 요 지나가는 한마디 했는데 담배 확 끊어버린 거예요.

뭡니까? 전략이죠. 그럼 주체는 어디 있습니까? 주체가 있었는데 있으니까 저 여자를 꼬인다든지 하는데 주체는 있었는데 그 여자에게서 뿜어 나온 힘이 나로 하여금 나라는 주체를 해체시키면서 그 전략 안에서 재조립되는 거예요. 여자 안에서. 마징거제트입니다.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는 거죠. 그래서 푸크는 이 세상에는 전략밖에 없다. 전략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목표가 없고 희망이 없고 계획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도 죽은 사람이라 말이죠. 새로운 목표가 나로 하여금 전략을 위해서 해체됐다가 분해됐다가 다시 조립하는 새로운 내가 미처 나도 모르는 새로운 능력이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제2, 제3의 자아를 전략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유도시킨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교육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도 마찬가지인데 평소에는 건성으로 기도하다가 갑자기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목사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교인들 보기에 믿음 되게 좋아 보이게 유도하는 것도 그게 뭡니까? 전략이죠. 그 다음부터 만약에 목사가 자진해서 이렇게 기도하면 찬바람 부는데, ’당신들은 교회 생각하나? 나만 교회 생각하나?‘라고 강단에서 꾸중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죠. 그렇죠? ’당신들 뭐 하느냐?‘ 그런데 듣는 장로나 집사는 기분 나쁜 게, ’니는 노는 인간이니까 기도나 하지, 우리는 지금 바쁘잖아.‘

그 말은 목사가 그 말을 알고 있어요. 내가 이런 소리 하면 그들이 ‘당신은 목회가 당신 전공이고 우리는 사업이 전공이기 때문에 당신같이 시간이 남으면 몰라도 그렇잖아서 우리는 못한다.’라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어요. 프로는 생리적으로 이걸 감을 잡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처럼 기도하라. 나처럼 성경보라.’ 이런 뜻이 아니고 회사 나가면 당신이 오야붕이고 돛대지만 교회 앞에서는 나한테 입 다물라 그 뜻입니다.

회사에 질서 있듯이 교회에서는 이미 질서가 내 중심으로 한 척추처럼, 뒤 척추, 쫙 고속도로 뻗었으니까, 나이 어리다고 목사가 젊다고 함부로 까불지 마라. 하나의 전략이라니까요. ‘니 입 다물라.’ 나오잖아요. 해를 품은 달에서.ㅎ

사실 이러한 수법들이 모든 처소에 다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으로 설명을 했잖아요. 천개의 고원 그림 한번 그려 볼까요? 말미잘 같이 생겼는데 밑바닥에서 다 올라오죠. 산이 뾰족한 산이 아니고 산이 올라오고 평평하고 요걸 개마고원 같이 고원이죠. 정상이 편편한데.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각자, 각자가 하나의 무슨 노릇을 하느냐 하면 주체 노릇을 한다는 겁니다. 가락시장 협의회, 이쪽에선 전국 미용사, 여기는 KTX 여 승무원 단체, 요거는 대성 초등학교 23회 동창회, 모든 인간은 이 사회 자체가 마치 피부에 두드러기 나듯이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의 자기 고유의 주체성을 성립하고 있으면서 주체성에서 뭘 뿜어낸다? 전략을 뿜어낸다 이 말이죠.

이런 것들을 합치면 현실인 거예요. 그럼 교회가 있다는 말은 뭡니까? 교회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교회 가면 좋으니까 중요하죠. 그런데 여기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는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도 모임이니까 중요하죠. 자기 애 깡패한데 맞으면 안 되니까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오후 6시에 성경공부 있고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 있다면 어디 가야 돼요? 요거 30분 듣고 빨리 뛰어가든지 아니면 임원회 회의 참석하고 가든지, 아니면 미안하지만 요거만 참석하고 못 가고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 하나가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나는 안 죽었어, 나는 이 땅에 안 죽었단 말이야. 나는 이렇게 살아간단 말이야.’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전략적 주체로서 성립되는 거예요. 여기고 가담도 못하고 저기도 가담도 못하면 그 사람은 따로 모여야 됩니다. 전국 백수협회 회장해서 다시 만들어서 모여야 되죠. 진짜 있어요.

자, 이렇게 죽 이야기해보니까 결국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실입니까? 내 몸이죠. 내 몸! 그런데 성경은 어떤 현실입니까?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이 전체를 현실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전체를 어떻게 한다? 사라지게 만든다.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수한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인간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도저히 내가 나의 전략을 포기 못하고 나의 주체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주께서는 그 용어들을 섞어서 사용해 버려요.

한번 봅시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이 열린 경우에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하늘이 열린 경우는 어떤 경우에 하늘이 열리죠?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에 지붕이 열리잖아요. 우리가 아는 하늘이 열리는 경우는 어떤 겁니까? 영화에 보면 UFO 떴을 때 그런 경우죠.

그런데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내가 만들어 놓은 현실을 그걸 유지하면서 거기서 하늘이 열린 경우를 찾는다고 난리예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하늘이 열린 경우는 나의 현실이 날라 갔을 때 그때만 하늘이 열려요. 현재 나라는 것을 기초로 해서 이걸 부수지 않고 이걸 꼭 잡고 유지하면서 거기다가 성경 말씀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벌써 강의 시간이 됐으니까 다 잊어버렸을 테니까 다시 할게요. 말씀이 주체를 드러내고 주체는 말씀대로 가죠.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주체가 안 죽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내 주체가 납득이 되도록 만들겠죠. 이걸 뭐라 했습니까? 동일시, 또는 동일성이죠.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유지하면서 내 현실에 납득이 되는 말씀으로 이렇게 해석하고자 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합니까? 모든 성경은 바리새인 너 말고 서기관 너 말고 너희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직접 누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한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은 이 예수 내게 대해서 증거한 것이다. 이걸 모든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따로 뭘 챙기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은 내가 납득이 돼야 내가 그걸 지켜서 행동에 옮겨서 의를 이루어서 그래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자기 구원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엘리야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 왕들도 마찬가지고 여호사밧 아사 왕 여호람 다 마찬가지고 그들도 한 때는 잘했다고 칭찬받지만 끝에 가면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왕들이 그렇게 변변치 못한 것은 이 세상에 말씀을 지킬 왕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자식 죽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이 지가 그렇게 제대로 의를 만들었으면 자기와 하나님과 직접 거래하면 될 문제기 때문에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누가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을 기다릴 이유가 없죠. 그렇잖아요. 자기가 이삭 바치는 훌륭한 일을 했으면 그걸로 믿음 있다고 인정받았으면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서 그걸로 자기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고 여기고 누굴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천국에 합격했으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굴 기다리고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원했죠.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에게 성령 오기 전에 그걸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이상하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거래했으면 그걸로 끝인데 지 구원받으면 됐지 왜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자꾸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집어넣으려고 하는가? 자기 본인으로서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 됐다고 칭찬받았으면 그걸로 됐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뭘 믿었느냐 하는 겁니다. ①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②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죠. 약속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약속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계명, 지시, 규범, 법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이 그 약속이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인물로 집약되는 겁니까? 그 인물로 집약되는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믿읍시다.

모든 성경 말씀은 나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한테 가서 그 예수님이 홀로 다 지켜서 그분의 공로와 성령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 안의 그리스도의 의로만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실천의 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럼 교회 역할은 뭡니까? 교회 역할은 그걸 철저하게 가리는 역할을 해야 돼요. 교회가 없으면 안 돼요. 교회 다니셔야 됩니다. 왜, 이 교회가 우리를 복음을 가리고 망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그리고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 능력에 함몰될 것이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가 구원하는 것을 교회 다니면서 다시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교회 다니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복음 아는 사람한테는 무리한 요구인데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교회 다니시라고 강요는 안 하겠는데 자기 집안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요거는 아까 교회 다니시라와 같은 차원의 이야깁니다. ‘가정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돌보다 보면 자기 딸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좋아질 때가 있을 거예요. 자기 아내나,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 예수님보다 더 사랑스럽고 좋아질 때가 있을 겁니다. 우리 김 집사님은 그럴 경우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 뭘 느낍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그 다음에 뭐죠? 어디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거는 요 포기하세요. 이건 뭐 거기서 그걸 꺾고..심지어 그보다 더 심한 말 할까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너를 네가 미워하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거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가 이뻐보이는데 그걸 이뻐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 미워하라. 그러면 니가 구원받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도리어 잃어버린다는 것, 이 모든 말씀들이 우리보고 실천에 옮기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말씀이 어디로 쏠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너를 거쳐서 딴 데로 쏠리고 있는데 거치면서 나라는 주체는 해체돼야 돼요. 누구 전략 때문에? 내가 만들 전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 때문에 벌리는 전략으로 인하여 나는 그 앞에서 해체되고 사라져야 됩니다.

그 전략의 하나가 뭐냐 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략에 말려든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나의 전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략으로서 휘말리게 됐습니다. 쉽게 합시다. 나는 주의 일을 하기 싫은데 주님의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걸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부득불이라 하는데, 부득불 나는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그렇게 조져놨습니다. 만들어 놨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이 된다? 니 증인이 되리라? 아니죠.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란 말이 아니고 그렇게 사태가 이미 그렇게 꼬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체되면 우리의 해체와 더불어서 제일 먼저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꾸며 놓은 나의 현실이 와르르 무너지죠. 그 무너지는 방법이 죽음의 장막이 찾아올 때죠.

프랑크시나트라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My Way라는 곡인데 마지막에 나의 갈길 다 가는데 마지막에 죽음의 커튼이 드리워지죠. 그러면 나, 나, 나 하다가 죽음의 커튼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여기 있다 합시다.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영물이라서 어려워요. 내가 여기 있죠. 이걸 누가 지켜봅니까? 내가 지켜보죠. 곤란한 질문이죠. 지켜 보여 지는 내가 납니까? 지켜보는 내가 납니까? 이 둘 다 보고 있는 이게 납니까? 셋 중에 어느 게 나예요?

내가 착한 일 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 나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그 머리는 누구 안에 들어있는 두뇌입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내가 그리고 있는 그 이미지는 지금 이쪽에 들어있는 머리에 있는 겁니까? 그걸 지켜보고 내 두뇌에 있는 거예요? 그 둘 다를 지켜보는 이 머리에 있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는 절망한다. 나는 착해보려고 애쓰는데 내 안에 다른 법이 있는데 그 법은 그건 내가 죄라는 거예요. 그것이 죄란 말은 나는 죄가 아닌 거예요. 죄가 아닌데 내가 아닌 죄가 내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나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인 돼 버렸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은 영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육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영으로 판단하게 되면 인간은 내가 아닌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한다고 히브리서 2장15절,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서 누구한테 종노릇한다? 마귀한테 종노릇하는 그러한 모습은 성경이 아니면 누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철학가들 대단한 석가모니 ‘당신 안에 죄 들어있어. 당신 마귀 들어있어.’라고 석가모니보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제자들이 하겠어요. 누가 하겠어요. ‘한 경직 목사 당신 안에 마귀 들었어.’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영락교회 교인 중에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안철수 당신 안에 마귀 들었어.’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나 철수가 이야기하겠어요.ㅎ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교회에서 이야기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만 해야지, 딴 소리 할 수가 없어요. 다 이루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 나와서는 절대로 교회 믿지 마세요. 교회가 말아먹든 교회를 떠나든 뭉개지든 목사가 퇴직금을 가지고 수십억을 가지고 가든 그런 것 가지고 의롭니 정의니 성경에 나오는 바른 뜻이니 그런 기도 제목, 그건 기도 제목도 아니에요. 그건 뭐냐 하면 결국 자꾸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있잖아요.

우리 현실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항상 전략적으로 움직이면서 나는 이런 바른 교회되기를 위해서 이런 전략을 위해서 난 이 몸 하나 바치겠다는 이 전략에 말려든 채로 주체로서 자기가 재조립된 거예요. 그래서 전략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이 전략을 목 따고 있는 나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전체가 문제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전략 누구로부터 나온 전략? 예수 그리스도 몸으로부터 나온 전략이 이거 전체를 비현실로 간주하고 이걸 비현실로 간주하게 까발리는 그 힘이 현실입니다. 그게 현실 이예요.




그러면 나는 일 하겠다 안 하겠다. 내가 결정권이 없고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해체돼야 되고 남들은 판사 돼서 사라지고 의사돼서 사라지는데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인생을 종쳐야 돼요. 마감해야 돼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돌 맞고 사라졌잖아요. 열두제자가 다 뭔가 고난 받고 사라졌어요. 사라지면서 좋아서 ‘나의 갈길 다 달렸으니 나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죽는 게 좋아서, 미쳤어요. 나한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 내가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잘되어라. 나는 세상의 찌꺼기가 되겠다.’  이걸 놓고 함석헌이라는 사람 알죠? ‘나는 즐겨 하수구가 되겠다.’ 하수구란 뭔 뜻이냐 하면 하수구가 있어야 앞에서 깨끗한 상수도가 성립되는 거예요. 하수구가 설치 안 됐으면 수돗물을 틀어야 그것은 전부다 역류돼서 넘치잖아요. ‘너희들은 깨끗한 물 돼라. 내가 시커먼 물은 나를 관통하도록 내가 허용할게.’ 이 뜻 이예요. 하수구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 일을 참여시켜야 되는 거죠. 하수구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 될 수가 없다는 다른 표현을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지금 내가 기대 목적 기획 그것을 내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나를 동일시, 몇 번 나옵니다.

동일시하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죠. 동일시하는 이유는 동일시 할 때마다 내가 주체가 돼요. 그러니까 내가 나답기 위해서 우리는 전략을 해야 되고 전략에 내 몸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걸 하나님 일로 간주해서 결국 노리는 것은 ‘역시 나는 괜찮은 존재야.’ 결국 자기 이득과 자기 주체 확인, 동일성, 그래서 ‘이 현실은 내가 생각한 현실 그대로네.‘라고 자기가 만든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고 싶어 하는 그러한 충동들이 이런 것들을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 말씀 하면 ‘오늘도 성경 말씀 주시옵소서. 내가 큐티 해서 이걸 지키겠습니다.’ 이런다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여러분 다 내려놓으세요.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주체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한테 구원해 주려고 이러한 전략과 이러한 구조, 요러한 방침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냥 주는데 그게 뭐냐, ‘백마 내가 탈게. 그리고 타는 것도 내가 탈게. 그 이름을 쓰는 것도 너보고 쓰라고 하지 않고 내가 진실과 충신으로 그렇게 내가 심판할게.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은 모르는데 너희들은 몰라도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는 모르는 채 내가 이루어서 반드시 너희들을 구원 시켜줄게.’하는 주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첫 시간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쉽시다. 그렇다면 모든 게 전략인데 전략에서 나오는 게 뭐냐, 전략에서 주체가 나온다고 했죠. 요 과정이 있어요. 과정에 뭐가 나오느냐, 요거 중요하니까 이것만 이야기하고 쉽시다. 전략에서 주체가 될 때 그 과정에서 뭐가 나오느냐 지식과 진리가 나옵니다. 상당히 재밌죠? 뭐냐 하면 ‘그래 이게 진리야. 그래 이게 진짜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야.’라는 것이 뽀송뽀송 막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이거는 결국은 인간은 자기의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서 뭘 끄집어낸다? 결국은 나는 지식을 알고 있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걸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전략을 만들어 놓고 그걸 현실로 간주하고 현실 속에서 나라고 진리와 지식을 내 것으로 끌어 모아서 한껏 축적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의 현실을 그렇게 구성해 나가는 겁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대안과 대책이 있어요.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한례 (IP:203.♡.40.73) 12-03-04 21:59 
가락교회120216-요한계시록19장(전략)33강b-이 근호 목사
제 33강b

두 번째 시간, 하얀 말이 있고 그 위에 누군가 올라탔다. 백마를 올라타시고 공의로 심판했다. 요런 요건들을 집약을 해보자. 집약을 해 보니까 12절에 그 눈은 불꽃같았다. 그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고 이것은 바로 솔직하게 그냥 ‘예수님이 그렇다.‘ 라고 적지 않는 이유가 뭐냐,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이 계신데 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다.’라고 예수란 이름을 거론시키고 이런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계시고 부활 승천 하실 경우는 예수님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해요. 일을 벌이는데 옛날 예수님이 열 두 제자와 할 때는 주로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수행자들이 있었잖아요. 열 두 명의 제자들과 여러 따르는 제자들,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서 했죠. ‘내가 너희들은 택한 백성은 너희들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택하여 세웠나니 가려면 가라. 하지만 나는 끝까지 너희들을 사랑한다. 너희들은 떠나고 나는 너희들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내게로 오게 만들겠다.’ 전부 다 누구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사람들 보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되면 요 범위가 피자 판을 팍팍 돌리면 면적이 늘어나잖아요. 피자 판이 제자들이란 소규모에서 이게 전체로 퍼져버립니다. 전체로 퍼지면서 예수님의 위치는 제자들과 가까운 위치에서 점점, 점점 더 높이 올라가죠. 높이 올라가서 전 세계 모든 역사와 전 세계 모든 공간을 아우르는 전부를 커버할 수 있는 기능으로 실시가 돼요. 실시가 되게 되면 전에 제자들에게는 ‘니가 십계명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이 전 세계를 커버하게 되면 여기서 하는 기능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전 세상에 대한 포괄적인 심판 기능을 행사하게 됩니다. 포괄적인 심판 기능을 행사하게 되는데 기능이 뭐냐 그게 궁금하거든요.

포괄적인 심판을 행사하게 될 때 요 기능의 모습은 예수님이 전 우주를 봐보게 되면 여기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그동안 숨어있던 표면에 있던 악한 세력들, 마귀죠. 마귀가 평소에 인간들을 다루었던 그 힘들이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화살처럼, 미사일처럼 전부 다 집대성해서 올라옵니다. 올라오게 되면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이 전체가 무슨 장이 되느냐 하면 투쟁의 장이 됩니다. 투쟁의 장이니까 주님께서 쓰시는 기능이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면 전쟁을 위한 용어들이 기능성을 가지고 발하게 돼요.

그러면 이 전쟁은 주인공이 누굽니까? 주인공이 예수님하고 그 다음에 여기 있는 졸개들 아니고 인간들 뒤에 숨어있던 그 짐승, 사탄이 그동안 사람들을 ‘꼼짝 마.’라고 써먹었던 그러한 힘과 거기에 대해서 궤멸하는 주님의 힘의 마주침 이예요. 이 논리는 어렵지만 그림으로 보면 쉽잖아요. 그만큼 예수님께서 이제는 노는 것이 제자들하고 노닥거리는 차원이 아니고 전 세계를 심판해야 될 주로써 올라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기능은 결국 이렇게 논리를 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필연적인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기능은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확대함으로써 발각된 그 악마의 무기들이 있어요. 악마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학대할 때 이렇게 간지렀습니까? 물 고문했습니까? 그런 거 아니죠. ‘ 너 예수 믿지 마. 너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돼.’

요한계시록에서 유대인을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단의 회, 사단의 모임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과격하게 나온 것은 마태복음에 보면 나오죠. ‘너희 아비는 악마다.’ 이런 게 있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새끼라 하는 것은 욕이거든요. 욕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아’ 요즘 방송 같으면 XX로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진노의 잔을 피할 수가 없단다. 마지막 때 너희들은 독사의 새끼들아, 자기도 지옥 가면서 천국 가야 하는 사람까지 지옥 가게 만드는구나. 지옥 가게 하는구나.’ 이런 욕설이 막 나온다고요.

그걸 잠시 설명 드리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처음에 이야기할 때 소곤소곤하게 열두제자하고 이렇게 병든 사람 고치고 이렇게 했잖아요. 규모가 작아져요. 때가 되매 예수님이 어디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135키로 쯤 되는데 정확히는 아니죠. 왜냐 갈릴리는 면적이 넓기 때문에 도시가 아니거든요. 갈릴리 호수로 보면 되는데 점점 더 접근하면서 점점 수위가 높아집니다. 높아지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는 채찍 들고 들어가죠.

성전은 뭐냐 하면 성전은 용납을 할 수 없어요. 성전은 하나님만이 거기서 관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전에서의 모든 행사는 여기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다른 일반인들이 이 거룩한 분을 뵈면 죽으니까 오지 못하도록 경비대라든지 시위대나 경찰처럼 막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거룩한 공간이 성전입니다.

만약에 성전을 우습게 봐 버리면 유대인이라는 나라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는 이런 나라’라는 정체성이 없어져 버려요. 태국에서 왕을 욕했다고(집사님, 태국 출장갈 때 주의해야 됩니다.ㅎ) 왕한테 약간의 욕이 아니고 그냥 평소에 일반인에게 하듯이 그런 글을 썼다고 해서 징역 20년 받았어요. 외국 사람이. 그건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밉고 왕이 대단한 게 아니라 왕이 모독 받아 버리면 태국의 모든 질서가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마치 북한의 어떤 유학생이 파리에 오니까 ‘너희들은 김일성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하니까 북한인이 ‘니들은 말야. 니들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라는 동일성, 사람의 주체라 하는 것은 동일성을 갖출 때 주체가 있어요. 동일성이 와해돼 버리면 사람은 있어도 없는 존재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주님께서 채찍으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아지트로 만들었죠. 강도가 누굽니까? 누가 강도예요? 유대 지도자가 강도가 돼 버립니다. 그럴 때 그 모습은 뭐냐, 가장 잘 여호와를 섬기는 그들이 가장 악마적인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악마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악마가 자기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발칵 화를 내는 겁니다. 딸하고 엄마하고 그렇게 사이가 좋아도 엄마한테 복음 한번 전해 보세요. ‘앞으로 그런 소리 하려거든 친정 오지 마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원수가 되게 돼 있어요. 원수가 되든지 아니면 형제가 되든지, 둘 중에 쇼부가 나겠죠. 그래서 예수님의 옷과 모든 몸에는 참람한 ‘니가 무슨 하나님이야? 니가 하나님 같으면 나도 하나님 된다.’하는 식으로 모든 모욕적인 것,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모욕 화 시키는 그러한 것들로 악마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뭐 스탈린이 사람 죽인 것, 히틀러가 유대인 죽인 것, 그건 악마의 제 모습이라 볼 수 없어요. 악마의 제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만 나타나지, 그냥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투쟁 가운데서 악마가 악마라고 자기들끼리는 하지만 그거 별거 아닙니다. 리비아 사태, 시리아 사태, 그거 한다고 서로 악마라 해요. 그건 둘 다 꽈당 헤딩해야 돼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조시대 때는 봉건시대는 신분제도가 있는 신분사회라 하거든요. 신분사회에서 양반 건드리면 악마예요. 왜냐 신분사회기 때문에. 그런데 신분사회 끝나면서 개화기를 거치면서 근대화 되면서 신분사회가 무슨 사회로 되느냐 하면 계약으로 맺은 사회입니다. 계약으로 신분이 계약된 것 같으면 만약에 계약서 사기 친 놈이 악마라.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양반을 욕하고 임금님을 욕하면 그건 악마가 돼요. 그건 능지처참감입니다. 삼족을 멸해요. 어디 감히 점치는 무녀가 왕하고 정분을 나눕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월이라는 아가씨는 고초를 받잖아요. 시청률 40% 나와요. 그게 신분 사회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지금은 계약사회기 때문에 돈만 주면 다 되는 거예요. 노래방에 가서 분명히 2시간 하면 30분 더 준다고 하다가 안 주면 그건 마귀가 돼요. 계약서가 말해주는 세계입니다. 이건 모든 현실은 뭐라? 기억하세요. 뭐라 했습니까? 고원, ‘에이씨, 어디 내 회사를? 어디 내 가정을?’ 각자, 각자가 뭐라고요? 하나의 도두라진 두드러기처럼 돋아난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남의 교회 망해도 괜찮아요. 내가 돈 투자하고 내가 십일조 한 내 교회는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현실 앞에선 전부 다 뭐가 된다? 악마가 평소에는 유하게 부드럽게 우리의 친구로서 모나미라 하죠. 서로 다정한 친구로서 ‘도와줄게, 도와줄게, 해, 뭐를 도와줄까, 쌍꺼풀 찢고 싶어? 어디 성형의사 소개해줄까?’ 이런 거, 전부 다 천사, 무조건 나한테 유리하면 다 천사고 나를 욕하면 전부 다 악마고, 이게 왜냐 하면 내가 주체고 현실을 구성한 내 주체가 내가 일종의 신이죠. 내가 신이 됐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훈련시켜 온 겁니다. ‘예수 믿지 마라. 니가 신인데, 신을 이용하려면 이용해라. 그건 허용하지만 니는 최종적으로 사랑할 것은 니밖에 없어. 아무도 니를 대신할 존재는 없어. 하나님도 니 죽으면 하나님도 없는 거야. 니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필요하지, 너가 없는데 하나님이 뭐 필요해?’ 이런 이야기가 남이 하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밤중에 꿈속에 우리가 우리자신을 그렇게 회유하는 그런 과정을 매일같이 겪습니다. 꿈속에 또는 기도하는 가운데. ‘꼭 신앙 좋아야 될 필요 뭐가 있겠어? 신앙 좋다고 누가 돈을 주나, 출세하나, 신앙 좋아가지고 내 몸만 힘든데 신앙 안 좋으면 어때, 안 좋은 사람도 잘 먹고 잘만 살더라.’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오르죠.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러면 그 대목을 보면서 ‘내 기쁘면 최고지, 내 말고 하나님이 기쁘면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바쁜 사회에서 언제 하나님 생각합니까? 눈만 코만 뜨면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서류정리하고 컴퓨터 앞에 할 일이 많은데 언제? 언제, 언제, 안 돼. 하나님 생각을 어떻게 해, 안 되죠. 그런 것은 할 일 없는 목사들이나 할 일이지 우리 같은 교인들은 자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생각하고 만날 성경 공부하고 만날 기도하고, 안 되죠.

사도바울은 뭐라 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도바울은 할 일도 없다. 할 일 없는 사람이나 기도하지 우리같이 할 일 많은 사람이 언제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국은 예수님이 하시는 심판의 기준이 ‘심판 받아야 돼.’라는 그 내용들이 우리가 어디서부터 교육받는 것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십자가를 놀리고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 되게 만드는 그러한 국물 속에 우리가 푹~ 젖어서 퐁듀라 하죠. 빵에다 치즈 담가먹는, 우리 온 몸을 뒤집어썼어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그 능력과 자질과 품성과 성격이 완전히 머리부터 뒤집어썼어요. 완전히 국수, 라면이 국물이 흙탕물 뒤집어 씌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옷에만 충신이고 진실이 거기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돼요. 우리가 죄를 안 뒤집어 써버리면 마치 내가 나를 위해서, 아까 다시 해봅시다.

전략에서 하나의 주체가 나올 때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진리와 지식이 나온다 하죠. 이 지식과 진리만 뽑아낼 때만 ‘역시 나 똑똑해. 나는 믿음 좋아.’라고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런 방식들이 누구한테 왔다? 우리 배후에 우리로 죄 짓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돼 버리면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다’ 하면 ‘예수님은 불꽃같아서 괜히 나만 겁만 주고 눈에 힘 좀 빼소.’ ‘예수님은 흰 말 탔다.’ ’혼자 깨끗해, 나도 흰 말 까지는 안 되지만 나도 만날 차 세차하고 반들 반들한테.‘ 그러니 성경에 나온 것 같으면 여기서 모방하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충신과 진실’이라 하면 ‘나도 한 진리 합니다.’ 자꾸 비교하는 그 버릇, 아직도 죄의 국물로 뒤집어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간단한 거예요. 이미 그리스도 몸이 내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의 주체의 지체가 돼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할 일이 굉장히 쉽습니다. ‘주여, 이런 것까지 죄가 되는군요.’ 그걸 즐거이 수용하면 됩니다. ‘아! 이것까지 죄가 되는군요. 강의하고 복음 전하고 그런 것도 죄군요. 아! 기쁘다. 역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구나.’

코미디 프로에 개그콘서트를 여러분이 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그콘서트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 Pull House라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집이 꽉 찼단 말이죠. 집은 요만한데 식구가 자식이 아홉인가, 엄마가 애를 또 낳아서 업고 있어요. 아빠도 없는데 어떻게 애들이 그렇게 많은지,ㅎ 애들이 아홉 쯤 되니까 이렇게 집이 좁아도 웃고 돕고 살아간다는 그런 테마인데 여기서 제가 항상 보는 것은 뭐냐 끝에 끝마디에 애 하나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요. ‘제발, 제발 이 집구석, 지긋지긋한 집구석, 빨래 하나도 못 너는 집구석, 이게 사는 거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성훈아, 그러지 마라.’ 하면 ‘성훈이가 아니고 성호입니다.’라고 나와요.

‘제발, 제발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그걸 우리 성도는 그걸 웃으면서 할 수 있어야 성도예요. ‘세상 참 제발 이 더러운 집구석’ 그걸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성남 같은 경우에 ‘제발, 제발 이 더러운 교회’ 그걸 지금은 찡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걸 활짝 웃으면서 해야 돼요. ‘역시 교회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이상적인 교회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교인 중에 망하는 인간으로서 행세를 했다는 것,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는 진짜 진실과 진짜 진리와 진짜 길이고 생명 되시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와주심으로 우리는 그 안에 몸이 되었으므로 그분 예수님의 전략에 깊숙이 휘말려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죠.

그러면 이 성경이 보이는 겁니다. 어떻게? ‘조지세요. 주여 내가 일구어 낸 이 멋진 것을 맘껏 조지세요. 나는 주로 인하여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처자, 아내 가정 이 모든 것도 주의 전략에 휘말리게 하옵소서. 오직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마저 진리입니다. 내가 거기 터치할 수 없고 내가 거기 항의할 수 없는 그것마저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입니다.’하고 동의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여기 15절 봅시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이한 검은 예리한 검이죠. 여기 동원하는 무기와 철퇴들 여기 심판하는 기구들을 보면 뭡니까? 이게 어디 자비를 베푸는 모습입니까? 아니죠. 그냥 조지죠. 이것을 시편 2편에 보면 질그릇을 깨듯이 한다는 거예요. 질그릇이 있고 토기가 있고 거기에 철퇴를 들고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그림이 뭡니까? 고걸 깰 때 누가 즐겁겠습니까? 깨시는 분이 즐겁죠. 그 주님의 즐거움에 여러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ㅎ 그것이 내 머리를 친다 할지라도.

주께서는 질그릇 깨듯이 깰 때 주님은 되게 재밌어 하는 거예요. 왜 그 재미에 우리가 참여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한 몸이고 한 지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주님이 세상을 깨뜨리는데서 우리는 왜 동의 못합니까? 왜 동의 못해요? 수마트라에 쓰나미로 그때 죽은 사람이 12만 명이었거든요. 왜 주님과 같이 기뻐하지 못합니까? 왜 기뻐하지 못해요“? 뭔가 우리가 아직도 내 현실을 찌그러뜨리지를 못하는 그 미련, 미련 때문에~, 그 미련 때문에 뭔가 내가 투자한 게 있고 내가 공들인 게 있고 내가 정준 게 있고 내가 뭔가 아낌없이 전략적으로 내가 ‘요거는 하나 키워보겠다.’는 게 있기 때문에 고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을 모독하고 못마땅하고 별로 같이 신나하지 않는 ‘주님이 너무 오버하시는 것 같아.’ 한 느낌을 준다면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식을 다시 볼게요. 어려워서 반복해야 돼요. 말씀이 뭐가 된다? 주체가 돼서 주체가 말씀으로 완성이 되는데, 말씀이 갑자기 주님에게 가야 될 주체가, 모든 성경 말씀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하신 일이 OK, Good인데 갑자기 누가 등장합니까? 우리가 등장해서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너무 과격합니다. 나는 요한계시록은 보기 싫어, 너무 과격해.’ 철장 들고 설치고, 칼 들고 설치고, 사무라이도 아니고 말이죠. 주님은 완전히 사무라이예요. 신나게 칼 춤 추면서 다 죽여 버리고.

15절 끝에 봅시다.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그 다음에 무슨 포도주? 진노의 포도주. 이 표현은 세상에 아무리 욕을 해도 이것보다 더 심한 욕은 아직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게 어떻게 세상에 대한 막되 먹은 욕인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포도가 익어서 그냥 놔두면 벌건 포도주가 안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 하나를 지근지근 밟아서 톡톡 알갱이를 터뜨려야 됩니다. 터뜨리는데 뭔가 밟다가 안 터진 게 있다. 확인 사살해야 돼요. 바퀴벌레 터뜨리듯이 ‘이게 어디 씨.’ 밟으면 탁하고  붉은 벌건 포도주가 팍 튀죠. 그때 밟는 사람은 왠지 속이 시원한 ‘아따, 참 이 포도주가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구나.’

그 전자제품 싸온 찍찍이 있잖아요. 성질 날 때 애 성적 내려갈 때 어떻게 합니까? 티긱, 티긱하고 터뜨리죠. 목사 같으면 참석할 교인 안 나오고 헌금도 안 나오고 할 때 티긱, 티긱 터뜨려요. 나중에는 한꺼번에 뭉개서 터뜨리죠. 요거 포도주 밟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래  쪽에서 뭐가 강물처럼 흘러나오겠어요? 포도주가 막 나오죠. 거기서 나온 포도주를 같은 동료, 같은 형제, 친척 일가 친구 동창생 같은 교인들, 그 피를 누구한테 갖다 던지느냐 하면 ‘에라, 너희들이 죽여서 흘린 포도주를 도로 그들에게 ’맞 좀 봐라. 메시야의 맛이다.‘ 한다 말이죠.

이거는 깡패도 아니고요. 이거 영화로 만들면 예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지 싶어요. 너무 심해서. 너무 잔인하고 잔혹 사. 처참하게 아주 작살내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포도주를 밟는데 어디까지 밟느냐 하면 이게 물이 될 때까지, 포도주가 될 때까지 밟을 때 그때 밟는 그 다리에 이름이 있어요. 뭐라 합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그러니까 주라는 말은 기존의 세상에 있는 왕과 주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세상의 만왕과 만주를 백성들이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자비로운 것,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 우리보다 뛰어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뛰어난 지혜로서 전 국민에게 빈곤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좋은 어진 성군, 이런 의미의 만주의 주라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너희들이 좋다고 여기는 왕들을 작살내는 그러한 만주의 왕으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맞닥뜨리지 않고 우리가 못마땅하다면 결국 우리는 누구와 한패였다? 악마와 한패였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기능, 그게 전략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체를 우리가 보는 현실을 전부 다 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가꾸어놓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간절한 기도하면서 되고자 하는 그것이 핏빛으로 변하는, 그럴 때 진짜 성도는 그 내 꿈과 계획을 묵사발 만드는 그 다리를 보고서 그 다리에 이름이 쓰여 있어요. 보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주의 만왕이 되심을 새삼스럽게 이해하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이예요. 이게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가지 않고 이렇게 가서 묵사발 되고 우리를 어디에 합류시킨다? 진짜 말씀을 지켰던 만주의 주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합류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동네 있을 때는 이런 이야기 안 했어요. 그런데 점점 더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끄집어내요. ‘얘들아, 저 건물아 뭐지?’ ‘저 건물은 성전입니다. 예수님 46년 동안 지었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46년 동안 지어도 아직 진행 중인 건물이 어떤 건물이 있습니까? 없죠. 몇 백층을 지어야 46년입니까? 46년 동안 지었다는 말은 가장 공들였고 가장 46년 동안 기능적으로 이어옴으로 말미암아 이건 국가 정책하는 자들로 하여금 일반 대중들과 민중들과 백성들에게 머릿속에 뭘 지킵니까? 각인 시키는 거예요. ‘너희들 집구석보다도 46년 동안 짓고 있는 이곳에 우리의 승부, 우리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 너희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떤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심단결해서 힘을 모아서 정신을 모으고 신앙을 모아서 모든 기도를 하면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현재 46년 짓고 있는 이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운명이 좌우된다. 이거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시비 걸면 안 돼.‘라고 하는 건물이 뭐냐 성전이었습니다. 46년 지어도 다 못 지었거든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지금 성전이 다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니까 ‘이걸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거든요.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뒤에 이게 명령이죠.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갑자기 곡괭이 들고 삽 들고 그랬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명령이라 하는 것은 하라는 게 아니고 ‘너희들의 인식과 내 인식이 너희들의 현실과 내 현실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걸 실천에 옮겨 봐야 소용도 없는 거야.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니는 니가 얼마나 무식하며 니가 그동안 물들어 온 것이 마귀인 것을 그것만 나중에 알아서 고백하면 돼.’

만유의 왕과 진짜 세상의 왕은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세상은 무슨 장이다? 투쟁의 장, 투쟁의 영역 이예요. 이건 양보 없는 전쟁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할 때 했죠. 마리아 여자가 아기 낳으니까 그 다음에 슬금슬금 누가 튀어나옵니까? 예수님이 있는 곳에만 마귀가 나와요. 그러니까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까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악마가 나오죠. 아기 예수가 오니까 헤롯이 동방박사 죽이려고 했고 베들레헴 2살밑의 애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걸 가지고 사탄이 이행했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사탄 찾으려고 하면 못 찾아요. 그런데 복음만 전하면 어디서 숨었던 사탄이 튀어나와서 ;십자가만 믿어서 안 되지, 행함도 해야 되지.‘ 서슴없이 나오는 겁니다. 뭔 뜻입니까? 각자의 주체는 각자가 알아서 지켜라 이 말입니다. ’예수보다 당신이 더 중요해.’ 이 말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 그런 소리 듣기를 평소에 원하고 있고 예수님보다 내가 더 좋은 존재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우쌰, 우쌰해 주기를 은근히 얼마나 고대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께서 이런 일을 벌이니까 거기서 우리가 동의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다? ‘내가 바로 짓밟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할 때 이것은 ‘주여 감사합니다. 잘 조졌습니다. 암요, 마땅히 그래야죠.’라는 아멘의 의미가 첨부가 되죠. 우리 속에서 나오게 돼 있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 이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이 문제 이전에 누가 문제다? 내 자신이 문제인데 내 자신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니까 주어진 현실이 내가 꾸며낸 내가 공개된 나의 현실이 아니고 누구의 현실입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덧입혀준 그런 현실이라는 것을 알죠. 이 현실을 보고 가짜라고 만든 그 현실 속에 우리가 놓이게 하신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안절부절 하는 어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생을 거기다 결정하는 거기다 우리의 모든 걸 투자하는 그러한 오류를 우리가 할 필요 없죠. 내가 예수님 위해서 살았지, 내가 한 일로 내가 사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가 바보같이 모든 걸 맡긴다는 것은 하나의 자살행위입니다.

여러분도 화투 쳐보면 알죠. 명절 날 식구들하고 화투 쳐보면 처음에는 10원내기 하다가 나중에는 100원내기하다가, 나중에는 1000원내기, 시어머니하고 붙어서 10000원 짜리 하는데 왜 자꾸 판이 커집니까?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지면 그만인데 마귀가 자꾸 꼬여서 거기다 판을 키워서 나중에는 지려고 해야 질 수가 없는 목숨 걸고 합니다. 학교도 대충 가면 되는데 적성대로 가면 되는데 꼭 명문대학 가려고 삼수 사수 오수, 우리조카가 그렇습니다.

이제 성경이 슬슬 보이죠? ‘아하! 완전히 일방적으로 치는구나.‘ 보이죠. 18절 봅시다. “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그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무슨 덩어리로 본다? 고기 덩어리로 보는데 작업을 하신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 그렇게 작업을 하신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을 보기를 뭐로 보라? 삼겹살로 보라 이 말입니다. 사람을 보기를 고기같이 보라.

황금을 돌같이 보라고 최영 장군이 하다가 지가 돌 돼 버렸죠. 사람 보기를 돌같이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렵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뭐로 보면 된다? 자기 자신을 고기로 보면 돼요. 자기 자신을 당뇨 걸린 고기라든지 자기 자신을 고기로 보면 돼요. 자기를 고기로 본다는 것은 이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면 이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몸에다 토핑을 하려하니까 꾸미려 하니까 피자 판은 그냥 밀가루 덩어리인데 거기다 자꾸 치즈, 양파 등 이런 것을 토핑을 하니까 거기 토핑 한 게 아까워서 자기를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장식을 주께서 하게 하셔요. 주께서 만왕의 왕이라는 그 이름을 나를 면적으로 삼아서 나를 도화지 삼아서 주님이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주님한테 내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화지가 되세요.

존 로크란 사상가는 우리는 하나의 백지라 했어요.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여 지게. 어떻게 쓰여 지나, 어떤 사람은 판사로 쓰여 지고 어떤 사람은 검사로 쓰여 지고 어떤 사람은 의사로 쓰여 지고, 어떻게 쓰여 지든지 쓰여 지는 대로 쓰세요. 또 연필로 쓰면 안 돼요. 지우개로 지우지 말고, 전 영록이가 한 이야기고. 사랑을 쓰려거든 뭐? 연필로 쓰세요. 또 지우려고? 백번도 지우겠다.ㅎ

고깁니다. 고기. 요한계시록 이 말씀을 거두절미 하고 설교 시간에 목사가 ‘고기 여러분, 오늘도 고기가 됩시다.’ 이러면 그 목사 쫓겨나죠. 성경 말씀이 원래 그런 거예요. 예수님도 교회에서 쫓겨난 거예요. 주님께서 열두제자 그 사람들을 고기로 본 겁니다. 최고기, 박고기, 김 고기, 김 태희 고기, 장 동건 고기, 현빈 고기, 고기를 뜯어봐야 고기를 고쳐봐야 또 고친고기죠.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세계, 자연세계라 하는 것은 그림을 다시 그려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다? 예수님은 우주 밖에 계시죠. 그럼 우주 전체를 뭐로 보신다. 고기로 봤죠. 그럼 여기에 참여할 손님들은 뭐로 돼 있어요? 새, 참새나 독수리, 또는 두루미, 각종 새들, 피조 세계가 주님의 하시는 기능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너희도 들풀처럼 너희도 참새처럼 내가 너희를 사용하되 성도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찾는 사람으로 내가 너희를 써줄게. 니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관계없이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내가 써줄게. 그 모든 공로가 너희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루신 전략이죠.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그 전략 앞에서 전략에서 뭐가 나온다 했죠? 지식과 진리가 나오죠. 주님의 전략에서 나온 지식과 진리가 주체가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새로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있는데 그런데 누가 만든다? 옛날에는 내가 만들었는데 사실은 옛날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교육한 대로 만들었는데 그 주체에서 나온 현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주님이 만든 세상을 고기로 보는 그 현실에 맞춘 동참된 새로운 주체로서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걸 성경에서 잔치인데 18절을 다시 보면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왜 구체적으로 직업을 거론합니까? 왕, 장군들, 장사들, 이 세 것들, 옛날에는 계약사회가 아니고 무슨 사회입니까? 신분사회죠. 신분사회라 하는 것은 (잘 들어보세요. 마지막 어려운 건데) 모든 법과 규범이 어디서 나온다 말입니까?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걸 하향식이라 합니다.

교회가 상향식입니까? 하향식입니까? 하향식이죠. 하향식일 때 교회의  높은 분들 당회장 있고 그 밑에 장로 있죠. 장로에서 삐져나온 게 뭐냐 하면 부목사, 부목사 밑에 전도사, 당회장은 같은 교역자 계열 따로 만들고 장로 밑에 장립집사 그 다음에 서리집사, 그 다음에 평신도, 그 다음에 세례교인, 학습교인, 처음 온 교인, 이래 되잖아요. 이런 조직 표를 하나 만들고 여기 당회장에게는 행정 실, 이거 완전히 일반 회사와 똑같죠? 이걸 나무 구조라 하는데 나무 구조를 했을 때 느낌이 뭡니까? 모든 법은 어디서 결정해서 어디로 내려온다? 여기 고위층에서 결정해서 아래로 내려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결정하니까 결국 이것을 카리스마, 또는 권위라 하죠. 이게 어려워요. 권위하고 권력과 이게 다릅니다. 권위는 전통적이고 권력이라는 것은 항상 수시로 나타나는 것이 권력입니다. 국가 조직의 일을 보는 권위와 권력을 이렇게 나눠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가 셉니까? 권력이 셉니까? 권위가 세죠. 이건 항구적이고 계속 지속되는 거예요. 권위는 카리스마인데 권위는 인과관계가 성립돼 있고 그 밑에 관계되는 일이 뭐냐 하면 우발 성을 갖고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되죠. 예를 들면 교회를 30명 교인이 했는데 갑자기 대기업의 이건희 회장이 등록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지금 안달이 났어요. 왜냐 하면 빨리 저분을 장로 시키라고, 원래 조직이 많잖아요. 빨리 초고속 승진으로 장로 시켜야 돼요. 왜 이건희 회장님을 장로 시키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분이 교회 장로가 되면 자기는 헌금을 적게 내도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결국 돈 문제입니다.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조직을 할 때 돈을 누가 지불해서 막아 줄 것이냐, 회사가 어려울 때 누가 많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그것이 하나의 한시적인 임시적인 뭐가 돼요? 권력자가 되죠. 하지만 목사는 돈이 얼마 안 돼도 계속 목사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건 전통적이고 이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인데 주께서 세워줘서 기름 부어서 종 됐다 해서 이것은 목사가 어지간해도 감히 평신도가 손대면 안 되고 목사 잘못은 누가 손대야 된다고 미신이 퍼졌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손대야 돼요. 사람이 손대면 안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도록 해야 돼요. 왜냐 하면 그쪽에는 권위와 권력이 있어야 되니까.

다시 말해서 카리스마는 헬라 말인데 성령 받은 걸 이야기해요. 결국 교인들이 아까 집사님이 목사만 나쁜 게 아니고 교인들도 나쁘다 했죠? 교인들이 성경을 안 보고 눈에 보이는 카리스마를 보이는 가연체, 눈에 보이는 집사와 직책을 소유해서 그 안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건 안 믿어지고 진짜 눈에 보이는 어느 교회에 등록해서 거기서 내가 한 자리 차지해서 그걸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걸 대체하려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당에서는 성찬식, 성내 미사와 성내 행사가 그렇게 민중들한테는 그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거예요. ‘이래도 나 영세 받았는데, 난 이름이 베드로인데. 제발, 제발 이 위에서 제발, 제발 규칙과 규범을 제공해라. 우리보고 흐리멍덩하게 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하면 골치 아프니까 ’이거 영세 받으세요. 영세 받았으면 이번에...하세요. 하세요. 하세요. 이거 지키세요. 지키세요. 그런 이야기만 해 달라.‘ 그러면 그 질서체제에 내가 등록된 것으로 구원받은 걸로 안심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은 그 성전을 어떻게 했습니까? 채찍 들고 들어갔죠. 누가 교회다? 이게 성전이 아니고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고 두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내가 있으매 무조건 교회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한 예수님이 믿어지면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게. 세상 끝 날까지 너희를 버리지 않고 함께 있겠다.‘라는 말은 예배당 옮기라는 말이 아니고 교회 가나 안 가나 상관없다 이 말 이예요. 이것을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죠. 그래도 믿으면 뭔가 믿을만한 듬직한 게 있어야지 너무 우발적이고 돌발적이고 사건화 되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내가 교회 안 가도 늘 듬직하게 운영 잘 되는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죠. 우리 십자가마을도 그런 의미에서 유념을 해야 돼요. 십자가마을 자체가 기존교회를 대체해서 신앙의 대상이 되면 안 되죠. 그래서 십자가마을 옛날 글에 보면 십자가마을이 이단이란 글이 올라가 있어요.

자, 다시 봅시다. 전체 우주의 모든 것을 질서화 시킬 때 주님은 하나의 새로운 전략으로서 새로운 현실, 심판하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라면 국물 뒤집어 쓴 것처럼 죄를 뒤집어 쓴 것을 빛 앞에 발각당할 때 기쁨으로 주의 일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잊게 되느냐 하면 옛날에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얼굴을 돌릴 수가 있어요. 그걸 저는 뭐라 하느냐 하면 추억이라 합니다. ‘추억을 잊어라’ 아! 이거 정말 어렵습니다. 그때 그 사람, 추억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왜, 모든 게 내가 있다고 여기면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저 나이면 내가 고등학교 여고시절 때 어떤 선생님을 좋아했던 이 교정인데 이 교정에서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른 수업은 다 빠져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은 100점 맞았어. 왜,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라고 했던 그 시절 그 교정에 가보면 이미 사라졌어요. 왜, 그 교정만 사라진 게 아니고 나도 같이 하나의 모래시계 모래알처럼 사라졌죠. 나는 사라지고 꿈만 남는 거예요. 그때 만약에 사랑했던 선생님을 오르막길에서 만났다. 머리 훤하게 다 까져가지고 머리 얼마 남지도 않고 허여멀개 가지고 ‘저 아줌마 누구예요?’ 하면 ‘나보고 아줌마래.’ 본인은 그걸 보면서도 본인은 추억에 잠겨서 자기도 변하고 이쪽도 변하고 다 변해요. 세상에 변화 안 되는 게 없어요. 시속 300키로 달리는 기차에 있으면서 전부 다 우리 안 가고 있다고 우기는 거와 똑같이 착각하는 거예요. 다 달라져요.

지금 우리 죽어보세요. 자식들이 몇 달 동안 울고불고 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헤헤 거리며 웃고 다녀요. 제 ‘피’라는 책에 보면 뭐라고 돼 있던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더라도 관을 묻더라도 묻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가족들이 울면서 내려가면서 부조금 정리하고 유산 정리하고 내려갈 때 관을 살짝 열어서 산 밑에 내려가는 자식들을 보란 말이죠. 그때는 헤헤 거리면서 내려가자마자 짬뽕 시켜먹죠. 수고했다고. 아마 짬뽕보다 돼지갈비 먹을 거예요.ㅎ

그래요. 우리는 언제는 다 잊어집니다. 왜냐 하면 우리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은 추억 속에 나지, 지금의 나가 아니거든요. 나중에 사진 찍어보세요. 동영상 강제로 찍고 있지만 나중에는 사진 못 찍게 합니다. 왜, 사진발 보니까 내가 기가 차죠. 내가 이만큼 늙었나. 분명이 난데 이만큼 늙었나. 그때가 좋아요. 5년 뒤에 찍어보세요. 이만큼 늙었나 했던 그 사진이 얼마나 젊은지 그때 알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이 모든 것이 주의 뜻 맞습니다. 주의 뜻대로 다 지금 흙으로 부서지는 전부 다 가루가 되는 과정 속에 있어요. 우리가 바랄 것은 원인과 결과와 모든 전략과 기술은 모든 질서는 모든 카리스마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 말씀 그대로 실시하는 주님한테 가 있는 겁니다. 바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고 세상 사람들 고기라고 본다는 것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잊어야 되고 그 추억을 꺾어야 되는 그러한 주의 능력인 줄 압니다. 고기라도 좋고 우리가 흙이라도 좋으니 예수님께서 일하심이 하나의 현실로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