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216-요한계시록19장(전략)33강b-이 근호 목사 제 33강b
두 번째 시간, 하얀 말이 있고 그 위에 누군가 올라탔다. 백마를 올라타시고 공의로 심판했다. 요런 요건들을 집약을 해보자. 집약을 해 보니까 12절에 그 눈은 불꽃같았다. 그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고 이것은 바로 솔직하게 그냥 ‘예수님이 그렇다.‘ 라고 적지 않는 이유가 뭐냐,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이 계신데 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다.’라고 예수란 이름을 거론시키고 이런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계시고 부활 승천 하실 경우는 예수님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해요. 일을 벌이는데 옛날 예수님이 열 두 제자와 할 때는 주로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수행자들이 있었잖아요. 열 두 명의 제자들과 여러 따르는 제자들,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서 했죠. ‘내가 너희들은 택한 백성은 너희들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택하여 세웠나니 가려면 가라. 하지만 나는 끝까지 너희들을 사랑한다. 너희들은 떠나고 나는 너희들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내게로 오게 만들겠다.’ 전부 다 누구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사람들 보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되면 요 범위가 피자 판을 팍팍 돌리면 면적이 늘어나잖아요. 피자 판이 제자들이란 소규모에서 이게 전체로 퍼져버립니다. 전체로 퍼지면서 예수님의 위치는 제자들과 가까운 위치에서 점점, 점점 더 높이 올라가죠. 높이 올라가서 전 세계 모든 역사와 전 세계 모든 공간을 아우르는 전부를 커버할 수 있는 기능으로 실시가 돼요. 실시가 되게 되면 전에 제자들에게는 ‘니가 십계명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이 전 세계를 커버하게 되면 여기서 하는 기능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전 세상에 대한 포괄적인 심판 기능을 행사하게 됩니다. 포괄적인 심판 기능을 행사하게 되는데 기능이 뭐냐 그게 궁금하거든요.
포괄적인 심판을 행사하게 될 때 요 기능의 모습은 예수님이 전 우주를 봐보게 되면 여기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그동안 숨어있던 표면에 있던 악한 세력들, 마귀죠. 마귀가 평소에 인간들을 다루었던 그 힘들이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화살처럼, 미사일처럼 전부 다 집대성해서 올라옵니다. 올라오게 되면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이 전체가 무슨 장이 되느냐 하면 투쟁의 장이 됩니다. 투쟁의 장이니까 주님께서 쓰시는 기능이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면 전쟁을 위한 용어들이 기능성을 가지고 발하게 돼요.
그러면 이 전쟁은 주인공이 누굽니까? 주인공이 예수님하고 그 다음에 여기 있는 졸개들 아니고 인간들 뒤에 숨어있던 그 짐승, 사탄이 그동안 사람들을 ‘꼼짝 마.’라고 써먹었던 그러한 힘과 거기에 대해서 궤멸하는 주님의 힘의 마주침 이예요. 이 논리는 어렵지만 그림으로 보면 쉽잖아요. 그만큼 예수님께서 이제는 노는 것이 제자들하고 노닥거리는 차원이 아니고 전 세계를 심판해야 될 주로써 올라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기능은 결국 이렇게 논리를 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필연적인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기능은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확대함으로써 발각된 그 악마의 무기들이 있어요. 악마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학대할 때 이렇게 간지렀습니까? 물 고문했습니까? 그런 거 아니죠. ‘ 너 예수 믿지 마. 너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돼.’
요한계시록에서 유대인을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단의 회, 사단의 모임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과격하게 나온 것은 마태복음에 보면 나오죠. ‘너희 아비는 악마다.’ 이런 게 있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새끼라 하는 것은 욕이거든요. 욕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아’ 요즘 방송 같으면 XX로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진노의 잔을 피할 수가 없단다. 마지막 때 너희들은 독사의 새끼들아, 자기도 지옥 가면서 천국 가야 하는 사람까지 지옥 가게 만드는구나. 지옥 가게 하는구나.’ 이런 욕설이 막 나온다고요.
그걸 잠시 설명 드리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처음에 이야기할 때 소곤소곤하게 열두제자하고 이렇게 병든 사람 고치고 이렇게 했잖아요. 규모가 작아져요. 때가 되매 예수님이 어디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135키로 쯤 되는데 정확히는 아니죠. 왜냐 갈릴리는 면적이 넓기 때문에 도시가 아니거든요. 갈릴리 호수로 보면 되는데 점점 더 접근하면서 점점 수위가 높아집니다. 높아지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는 채찍 들고 들어가죠.
성전은 뭐냐 하면 성전은 용납을 할 수 없어요. 성전은 하나님만이 거기서 관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전에서의 모든 행사는 여기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다른 일반인들이 이 거룩한 분을 뵈면 죽으니까 오지 못하도록 경비대라든지 시위대나 경찰처럼 막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거룩한 공간이 성전입니다.
만약에 성전을 우습게 봐 버리면 유대인이라는 나라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는 이런 나라’라는 정체성이 없어져 버려요. 태국에서 왕을 욕했다고(집사님, 태국 출장갈 때 주의해야 됩니다.ㅎ) 왕한테 약간의 욕이 아니고 그냥 평소에 일반인에게 하듯이 그런 글을 썼다고 해서 징역 20년 받았어요. 외국 사람이. 그건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밉고 왕이 대단한 게 아니라 왕이 모독 받아 버리면 태국의 모든 질서가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마치 북한의 어떤 유학생이 파리에 오니까 ‘너희들은 김일성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하니까 북한인이 ‘니들은 말야. 니들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라는 동일성, 사람의 주체라 하는 것은 동일성을 갖출 때 주체가 있어요. 동일성이 와해돼 버리면 사람은 있어도 없는 존재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주님께서 채찍으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아지트로 만들었죠. 강도가 누굽니까? 누가 강도예요? 유대 지도자가 강도가 돼 버립니다. 그럴 때 그 모습은 뭐냐, 가장 잘 여호와를 섬기는 그들이 가장 악마적인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악마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악마가 자기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발칵 화를 내는 겁니다. 딸하고 엄마하고 그렇게 사이가 좋아도 엄마한테 복음 한번 전해 보세요. ‘앞으로 그런 소리 하려거든 친정 오지 마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원수가 되게 돼 있어요. 원수가 되든지 아니면 형제가 되든지, 둘 중에 쇼부가 나겠죠. 그래서 예수님의 옷과 모든 몸에는 참람한 ‘니가 무슨 하나님이야? 니가 하나님 같으면 나도 하나님 된다.’하는 식으로 모든 모욕적인 것,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모욕 화 시키는 그러한 것들로 악마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뭐 스탈린이 사람 죽인 것, 히틀러가 유대인 죽인 것, 그건 악마의 제 모습이라 볼 수 없어요. 악마의 제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만 나타나지, 그냥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투쟁 가운데서 악마가 악마라고 자기들끼리는 하지만 그거 별거 아닙니다. 리비아 사태, 시리아 사태, 그거 한다고 서로 악마라 해요. 그건 둘 다 꽈당 헤딩해야 돼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조시대 때는 봉건시대는 신분제도가 있는 신분사회라 하거든요. 신분사회에서 양반 건드리면 악마예요. 왜냐 신분사회기 때문에. 그런데 신분사회 끝나면서 개화기를 거치면서 근대화 되면서 신분사회가 무슨 사회로 되느냐 하면 계약으로 맺은 사회입니다. 계약으로 신분이 계약된 것 같으면 만약에 계약서 사기 친 놈이 악마라.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양반을 욕하고 임금님을 욕하면 그건 악마가 돼요. 그건 능지처참감입니다. 삼족을 멸해요. 어디 감히 점치는 무녀가 왕하고 정분을 나눕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월이라는 아가씨는 고초를 받잖아요. 시청률 40% 나와요. 그게 신분 사회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지금은 계약사회기 때문에 돈만 주면 다 되는 거예요. 노래방에 가서 분명히 2시간 하면 30분 더 준다고 하다가 안 주면 그건 마귀가 돼요. 계약서가 말해주는 세계입니다. 이건 모든 현실은 뭐라? 기억하세요. 뭐라 했습니까? 고원, ‘에이씨, 어디 내 회사를? 어디 내 가정을?’ 각자, 각자가 뭐라고요? 하나의 도두라진 두드러기처럼 돋아난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남의 교회 망해도 괜찮아요. 내가 돈 투자하고 내가 십일조 한 내 교회는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현실 앞에선 전부 다 뭐가 된다? 악마가 평소에는 유하게 부드럽게 우리의 친구로서 모나미라 하죠. 서로 다정한 친구로서 ‘도와줄게, 도와줄게, 해, 뭐를 도와줄까, 쌍꺼풀 찢고 싶어? 어디 성형의사 소개해줄까?’ 이런 거, 전부 다 천사, 무조건 나한테 유리하면 다 천사고 나를 욕하면 전부 다 악마고, 이게 왜냐 하면 내가 주체고 현실을 구성한 내 주체가 내가 일종의 신이죠. 내가 신이 됐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훈련시켜 온 겁니다. ‘예수 믿지 마라. 니가 신인데, 신을 이용하려면 이용해라. 그건 허용하지만 니는 최종적으로 사랑할 것은 니밖에 없어. 아무도 니를 대신할 존재는 없어. 하나님도 니 죽으면 하나님도 없는 거야. 니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필요하지, 너가 없는데 하나님이 뭐 필요해?’ 이런 이야기가 남이 하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밤중에 꿈속에 우리가 우리자신을 그렇게 회유하는 그런 과정을 매일같이 겪습니다. 꿈속에 또는 기도하는 가운데. ‘꼭 신앙 좋아야 될 필요 뭐가 있겠어? 신앙 좋다고 누가 돈을 주나, 출세하나, 신앙 좋아가지고 내 몸만 힘든데 신앙 안 좋으면 어때, 안 좋은 사람도 잘 먹고 잘만 살더라.’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오르죠.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러면 그 대목을 보면서 ‘내 기쁘면 최고지, 내 말고 하나님이 기쁘면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바쁜 사회에서 언제 하나님 생각합니까? 눈만 코만 뜨면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서류정리하고 컴퓨터 앞에 할 일이 많은데 언제? 언제, 언제, 안 돼. 하나님 생각을 어떻게 해, 안 되죠. 그런 것은 할 일 없는 목사들이나 할 일이지 우리 같은 교인들은 자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생각하고 만날 성경 공부하고 만날 기도하고, 안 되죠.
사도바울은 뭐라 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도바울은 할 일도 없다. 할 일 없는 사람이나 기도하지 우리같이 할 일 많은 사람이 언제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국은 예수님이 하시는 심판의 기준이 ‘심판 받아야 돼.’라는 그 내용들이 우리가 어디서부터 교육받는 것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십자가를 놀리고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 되게 만드는 그러한 국물 속에 우리가 푹~ 젖어서 퐁듀라 하죠. 빵에다 치즈 담가먹는, 우리 온 몸을 뒤집어썼어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그 능력과 자질과 품성과 성격이 완전히 머리부터 뒤집어썼어요. 완전히 국수, 라면이 국물이 흙탕물 뒤집어 씌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옷에만 충신이고 진실이 거기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돼요. 우리가 죄를 안 뒤집어 써버리면 마치 내가 나를 위해서, 아까 다시 해봅시다.
전략에서 하나의 주체가 나올 때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진리와 지식이 나온다 하죠. 이 지식과 진리만 뽑아낼 때만 ‘역시 나 똑똑해. 나는 믿음 좋아.’라고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런 방식들이 누구한테 왔다? 우리 배후에 우리로 죄 짓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돼 버리면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다’ 하면 ‘예수님은 불꽃같아서 괜히 나만 겁만 주고 눈에 힘 좀 빼소.’ ‘예수님은 흰 말 탔다.’ ’혼자 깨끗해, 나도 흰 말 까지는 안 되지만 나도 만날 차 세차하고 반들 반들한테.‘ 그러니 성경에 나온 것 같으면 여기서 모방하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충신과 진실’이라 하면 ‘나도 한 진리 합니다.’ 자꾸 비교하는 그 버릇, 아직도 죄의 국물로 뒤집어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간단한 거예요. 이미 그리스도 몸이 내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의 주체의 지체가 돼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할 일이 굉장히 쉽습니다. ‘주여, 이런 것까지 죄가 되는군요.’ 그걸 즐거이 수용하면 됩니다. ‘아! 이것까지 죄가 되는군요. 강의하고 복음 전하고 그런 것도 죄군요. 아! 기쁘다. 역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구나.’
코미디 프로에 개그콘서트를 여러분이 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그콘서트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 Pull House라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집이 꽉 찼단 말이죠. 집은 요만한데 식구가 자식이 아홉인가, 엄마가 애를 또 낳아서 업고 있어요. 아빠도 없는데 어떻게 애들이 그렇게 많은지,ㅎ 애들이 아홉 쯤 되니까 이렇게 집이 좁아도 웃고 돕고 살아간다는 그런 테마인데 여기서 제가 항상 보는 것은 뭐냐 끝에 끝마디에 애 하나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요. ‘제발, 제발 이 집구석, 지긋지긋한 집구석, 빨래 하나도 못 너는 집구석, 이게 사는 거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성훈아, 그러지 마라.’ 하면 ‘성훈이가 아니고 성호입니다.’라고 나와요.
‘제발, 제발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그걸 우리 성도는 그걸 웃으면서 할 수 있어야 성도예요. ‘세상 참 제발 이 더러운 집구석’ 그걸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성남 같은 경우에 ‘제발, 제발 이 더러운 교회’ 그걸 지금은 찡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걸 활짝 웃으면서 해야 돼요. ‘역시 교회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이상적인 교회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교인 중에 망하는 인간으로서 행세를 했다는 것,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는 진짜 진실과 진짜 진리와 진짜 길이고 생명 되시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와주심으로 우리는 그 안에 몸이 되었으므로 그분 예수님의 전략에 깊숙이 휘말려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죠.
그러면 이 성경이 보이는 겁니다. 어떻게? ‘조지세요. 주여 내가 일구어 낸 이 멋진 것을 맘껏 조지세요. 나는 주로 인하여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처자, 아내 가정 이 모든 것도 주의 전략에 휘말리게 하옵소서. 오직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마저 진리입니다. 내가 거기 터치할 수 없고 내가 거기 항의할 수 없는 그것마저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입니다.’하고 동의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여기 15절 봅시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이한 검은 예리한 검이죠. 여기 동원하는 무기와 철퇴들 여기 심판하는 기구들을 보면 뭡니까? 이게 어디 자비를 베푸는 모습입니까? 아니죠. 그냥 조지죠. 이것을 시편 2편에 보면 질그릇을 깨듯이 한다는 거예요. 질그릇이 있고 토기가 있고 거기에 철퇴를 들고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그림이 뭡니까? 고걸 깰 때 누가 즐겁겠습니까? 깨시는 분이 즐겁죠. 그 주님의 즐거움에 여러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ㅎ 그것이 내 머리를 친다 할지라도.
주께서는 질그릇 깨듯이 깰 때 주님은 되게 재밌어 하는 거예요. 왜 그 재미에 우리가 참여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한 몸이고 한 지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주님이 세상을 깨뜨리는데서 우리는 왜 동의 못합니까? 왜 동의 못해요? 수마트라에 쓰나미로 그때 죽은 사람이 12만 명이었거든요. 왜 주님과 같이 기뻐하지 못합니까? 왜 기뻐하지 못해요“? 뭔가 우리가 아직도 내 현실을 찌그러뜨리지를 못하는 그 미련, 미련 때문에~, 그 미련 때문에 뭔가 내가 투자한 게 있고 내가 공들인 게 있고 내가 정준 게 있고 내가 뭔가 아낌없이 전략적으로 내가 ‘요거는 하나 키워보겠다.’는 게 있기 때문에 고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을 모독하고 못마땅하고 별로 같이 신나하지 않는 ‘주님이 너무 오버하시는 것 같아.’ 한 느낌을 준다면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식을 다시 볼게요. 어려워서 반복해야 돼요. 말씀이 뭐가 된다? 주체가 돼서 주체가 말씀으로 완성이 되는데, 말씀이 갑자기 주님에게 가야 될 주체가, 모든 성경 말씀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하신 일이 OK, Good인데 갑자기 누가 등장합니까? 우리가 등장해서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너무 과격합니다. 나는 요한계시록은 보기 싫어, 너무 과격해.’ 철장 들고 설치고, 칼 들고 설치고, 사무라이도 아니고 말이죠. 주님은 완전히 사무라이예요. 신나게 칼 춤 추면서 다 죽여 버리고.
15절 끝에 봅시다.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그 다음에 무슨 포도주? 진노의 포도주. 이 표현은 세상에 아무리 욕을 해도 이것보다 더 심한 욕은 아직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게 어떻게 세상에 대한 막되 먹은 욕인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포도가 익어서 그냥 놔두면 벌건 포도주가 안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 하나를 지근지근 밟아서 톡톡 알갱이를 터뜨려야 됩니다. 터뜨리는데 뭔가 밟다가 안 터진 게 있다. 확인 사살해야 돼요. 바퀴벌레 터뜨리듯이 ‘이게 어디 씨.’ 밟으면 탁하고 붉은 벌건 포도주가 팍 튀죠. 그때 밟는 사람은 왠지 속이 시원한 ‘아따, 참 이 포도주가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구나.’
그 전자제품 싸온 찍찍이 있잖아요. 성질 날 때 애 성적 내려갈 때 어떻게 합니까? 티긱, 티긱하고 터뜨리죠. 목사 같으면 참석할 교인 안 나오고 헌금도 안 나오고 할 때 티긱, 티긱 터뜨려요. 나중에는 한꺼번에 뭉개서 터뜨리죠. 요거 포도주 밟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래 쪽에서 뭐가 강물처럼 흘러나오겠어요? 포도주가 막 나오죠. 거기서 나온 포도주를 같은 동료, 같은 형제, 친척 일가 친구 동창생 같은 교인들, 그 피를 누구한테 갖다 던지느냐 하면 ‘에라, 너희들이 죽여서 흘린 포도주를 도로 그들에게 ’맞 좀 봐라. 메시야의 맛이다.‘ 한다 말이죠.
이거는 깡패도 아니고요. 이거 영화로 만들면 예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지 싶어요. 너무 심해서. 너무 잔인하고 잔혹 사. 처참하게 아주 작살내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포도주를 밟는데 어디까지 밟느냐 하면 이게 물이 될 때까지, 포도주가 될 때까지 밟을 때 그때 밟는 그 다리에 이름이 있어요. 뭐라 합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그러니까 주라는 말은 기존의 세상에 있는 왕과 주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세상의 만왕과 만주를 백성들이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자비로운 것,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 우리보다 뛰어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뛰어난 지혜로서 전 국민에게 빈곤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좋은 어진 성군, 이런 의미의 만주의 주라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너희들이 좋다고 여기는 왕들을 작살내는 그러한 만주의 왕으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맞닥뜨리지 않고 우리가 못마땅하다면 결국 우리는 누구와 한패였다? 악마와 한패였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기능, 그게 전략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체를 우리가 보는 현실을 전부 다 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가꾸어놓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간절한 기도하면서 되고자 하는 그것이 핏빛으로 변하는, 그럴 때 진짜 성도는 그 내 꿈과 계획을 묵사발 만드는 그 다리를 보고서 그 다리에 이름이 쓰여 있어요. 보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주의 만왕이 되심을 새삼스럽게 이해하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이예요. 이게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가지 않고 이렇게 가서 묵사발 되고 우리를 어디에 합류시킨다? 진짜 말씀을 지켰던 만주의 주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합류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동네 있을 때는 이런 이야기 안 했어요. 그런데 점점 더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끄집어내요. ‘얘들아, 저 건물아 뭐지?’ ‘저 건물은 성전입니다. 예수님 46년 동안 지었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46년 동안 지어도 아직 진행 중인 건물이 어떤 건물이 있습니까? 없죠. 몇 백층을 지어야 46년입니까? 46년 동안 지었다는 말은 가장 공들였고 가장 46년 동안 기능적으로 이어옴으로 말미암아 이건 국가 정책하는 자들로 하여금 일반 대중들과 민중들과 백성들에게 머릿속에 뭘 지킵니까? 각인 시키는 거예요. ‘너희들 집구석보다도 46년 동안 짓고 있는 이곳에 우리의 승부, 우리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 너희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떤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심단결해서 힘을 모아서 정신을 모으고 신앙을 모아서 모든 기도를 하면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현재 46년 짓고 있는 이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운명이 좌우된다. 이거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시비 걸면 안 돼.‘라고 하는 건물이 뭐냐 성전이었습니다. 46년 지어도 다 못 지었거든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지금 성전이 다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니까 ‘이걸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거든요.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뒤에 이게 명령이죠.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갑자기 곡괭이 들고 삽 들고 그랬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명령이라 하는 것은 하라는 게 아니고 ‘너희들의 인식과 내 인식이 너희들의 현실과 내 현실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걸 실천에 옮겨 봐야 소용도 없는 거야.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니는 니가 얼마나 무식하며 니가 그동안 물들어 온 것이 마귀인 것을 그것만 나중에 알아서 고백하면 돼.’
만유의 왕과 진짜 세상의 왕은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세상은 무슨 장이다? 투쟁의 장, 투쟁의 영역 이예요. 이건 양보 없는 전쟁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할 때 했죠. 마리아 여자가 아기 낳으니까 그 다음에 슬금슬금 누가 튀어나옵니까? 예수님이 있는 곳에만 마귀가 나와요. 그러니까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까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악마가 나오죠. 아기 예수가 오니까 헤롯이 동방박사 죽이려고 했고 베들레헴 2살밑의 애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걸 가지고 사탄이 이행했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사탄 찾으려고 하면 못 찾아요. 그런데 복음만 전하면 어디서 숨었던 사탄이 튀어나와서 ;십자가만 믿어서 안 되지, 행함도 해야 되지.‘ 서슴없이 나오는 겁니다. 뭔 뜻입니까? 각자의 주체는 각자가 알아서 지켜라 이 말입니다. ’예수보다 당신이 더 중요해.’ 이 말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 그런 소리 듣기를 평소에 원하고 있고 예수님보다 내가 더 좋은 존재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우쌰, 우쌰해 주기를 은근히 얼마나 고대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께서 이런 일을 벌이니까 거기서 우리가 동의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다? ‘내가 바로 짓밟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할 때 이것은 ‘주여 감사합니다. 잘 조졌습니다. 암요, 마땅히 그래야죠.’라는 아멘의 의미가 첨부가 되죠. 우리 속에서 나오게 돼 있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 이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이 문제 이전에 누가 문제다? 내 자신이 문제인데 내 자신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니까 주어진 현실이 내가 꾸며낸 내가 공개된 나의 현실이 아니고 누구의 현실입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덧입혀준 그런 현실이라는 것을 알죠. 이 현실을 보고 가짜라고 만든 그 현실 속에 우리가 놓이게 하신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안절부절 하는 어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생을 거기다 결정하는 거기다 우리의 모든 걸 투자하는 그러한 오류를 우리가 할 필요 없죠. 내가 예수님 위해서 살았지, 내가 한 일로 내가 사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가 바보같이 모든 걸 맡긴다는 것은 하나의 자살행위입니다.
여러분도 화투 쳐보면 알죠. 명절 날 식구들하고 화투 쳐보면 처음에는 10원내기 하다가 나중에는 100원내기하다가, 나중에는 1000원내기, 시어머니하고 붙어서 10000원 짜리 하는데 왜 자꾸 판이 커집니까?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지면 그만인데 마귀가 자꾸 꼬여서 거기다 판을 키워서 나중에는 지려고 해야 질 수가 없는 목숨 걸고 합니다. 학교도 대충 가면 되는데 적성대로 가면 되는데 꼭 명문대학 가려고 삼수 사수 오수, 우리조카가 그렇습니다.
이제 성경이 슬슬 보이죠? ‘아하! 완전히 일방적으로 치는구나.‘ 보이죠. 18절 봅시다. “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그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무슨 덩어리로 본다? 고기 덩어리로 보는데 작업을 하신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 그렇게 작업을 하신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을 보기를 뭐로 보라? 삼겹살로 보라 이 말입니다. 사람을 보기를 고기같이 보라.
황금을 돌같이 보라고 최영 장군이 하다가 지가 돌 돼 버렸죠. 사람 보기를 돌같이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렵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뭐로 보면 된다? 자기 자신을 고기로 보면 돼요. 자기 자신을 당뇨 걸린 고기라든지 자기 자신을 고기로 보면 돼요. 자기를 고기로 본다는 것은 이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면 이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몸에다 토핑을 하려하니까 꾸미려 하니까 피자 판은 그냥 밀가루 덩어리인데 거기다 자꾸 치즈, 양파 등 이런 것을 토핑을 하니까 거기 토핑 한 게 아까워서 자기를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장식을 주께서 하게 하셔요. 주께서 만왕의 왕이라는 그 이름을 나를 면적으로 삼아서 나를 도화지 삼아서 주님이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주님한테 내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화지가 되세요.
존 로크란 사상가는 우리는 하나의 백지라 했어요.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여 지게. 어떻게 쓰여 지나, 어떤 사람은 판사로 쓰여 지고 어떤 사람은 검사로 쓰여 지고 어떤 사람은 의사로 쓰여 지고, 어떻게 쓰여 지든지 쓰여 지는 대로 쓰세요. 또 연필로 쓰면 안 돼요. 지우개로 지우지 말고, 전 영록이가 한 이야기고. 사랑을 쓰려거든 뭐? 연필로 쓰세요. 또 지우려고? 백번도 지우겠다.ㅎ
고깁니다. 고기. 요한계시록 이 말씀을 거두절미 하고 설교 시간에 목사가 ‘고기 여러분, 오늘도 고기가 됩시다.’ 이러면 그 목사 쫓겨나죠. 성경 말씀이 원래 그런 거예요. 예수님도 교회에서 쫓겨난 거예요. 주님께서 열두제자 그 사람들을 고기로 본 겁니다. 최고기, 박고기, 김 고기, 김 태희 고기, 장 동건 고기, 현빈 고기, 고기를 뜯어봐야 고기를 고쳐봐야 또 고친고기죠.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세계, 자연세계라 하는 것은 그림을 다시 그려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다? 예수님은 우주 밖에 계시죠. 그럼 우주 전체를 뭐로 보신다. 고기로 봤죠. 그럼 여기에 참여할 손님들은 뭐로 돼 있어요? 새, 참새나 독수리, 또는 두루미, 각종 새들, 피조 세계가 주님의 하시는 기능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너희도 들풀처럼 너희도 참새처럼 내가 너희를 사용하되 성도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찾는 사람으로 내가 너희를 써줄게. 니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관계없이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내가 써줄게. 그 모든 공로가 너희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루신 전략이죠.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그 전략 앞에서 전략에서 뭐가 나온다 했죠? 지식과 진리가 나오죠. 주님의 전략에서 나온 지식과 진리가 주체가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새로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있는데 그런데 누가 만든다? 옛날에는 내가 만들었는데 사실은 옛날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교육한 대로 만들었는데 그 주체에서 나온 현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주님이 만든 세상을 고기로 보는 그 현실에 맞춘 동참된 새로운 주체로서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걸 성경에서 잔치인데 18절을 다시 보면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왜 구체적으로 직업을 거론합니까? 왕, 장군들, 장사들, 이 세 것들, 옛날에는 계약사회가 아니고 무슨 사회입니까? 신분사회죠. 신분사회라 하는 것은 (잘 들어보세요. 마지막 어려운 건데) 모든 법과 규범이 어디서 나온다 말입니까?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걸 하향식이라 합니다.
교회가 상향식입니까? 하향식입니까? 하향식이죠. 하향식일 때 교회의 높은 분들 당회장 있고 그 밑에 장로 있죠. 장로에서 삐져나온 게 뭐냐 하면 부목사, 부목사 밑에 전도사, 당회장은 같은 교역자 계열 따로 만들고 장로 밑에 장립집사 그 다음에 서리집사, 그 다음에 평신도, 그 다음에 세례교인, 학습교인, 처음 온 교인, 이래 되잖아요. 이런 조직 표를 하나 만들고 여기 당회장에게는 행정 실, 이거 완전히 일반 회사와 똑같죠? 이걸 나무 구조라 하는데 나무 구조를 했을 때 느낌이 뭡니까? 모든 법은 어디서 결정해서 어디로 내려온다? 여기 고위층에서 결정해서 아래로 내려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결정하니까 결국 이것을 카리스마, 또는 권위라 하죠. 이게 어려워요. 권위하고 권력과 이게 다릅니다. 권위는 전통적이고 권력이라는 것은 항상 수시로 나타나는 것이 권력입니다. 국가 조직의 일을 보는 권위와 권력을 이렇게 나눠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가 셉니까? 권력이 셉니까? 권위가 세죠. 이건 항구적이고 계속 지속되는 거예요. 권위는 카리스마인데 권위는 인과관계가 성립돼 있고 그 밑에 관계되는 일이 뭐냐 하면 우발 성을 갖고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되죠. 예를 들면 교회를 30명 교인이 했는데 갑자기 대기업의 이건희 회장이 등록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지금 안달이 났어요. 왜냐 하면 빨리 저분을 장로 시키라고, 원래 조직이 많잖아요. 빨리 초고속 승진으로 장로 시켜야 돼요. 왜 이건희 회장님을 장로 시키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분이 교회 장로가 되면 자기는 헌금을 적게 내도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결국 돈 문제입니다.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조직을 할 때 돈을 누가 지불해서 막아 줄 것이냐, 회사가 어려울 때 누가 많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그것이 하나의 한시적인 임시적인 뭐가 돼요? 권력자가 되죠. 하지만 목사는 돈이 얼마 안 돼도 계속 목사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건 전통적이고 이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인데 주께서 세워줘서 기름 부어서 종 됐다 해서 이것은 목사가 어지간해도 감히 평신도가 손대면 안 되고 목사 잘못은 누가 손대야 된다고 미신이 퍼졌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손대야 돼요. 사람이 손대면 안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도록 해야 돼요. 왜냐 하면 그쪽에는 권위와 권력이 있어야 되니까.
다시 말해서 카리스마는 헬라 말인데 성령 받은 걸 이야기해요. 결국 교인들이 아까 집사님이 목사만 나쁜 게 아니고 교인들도 나쁘다 했죠? 교인들이 성경을 안 보고 눈에 보이는 카리스마를 보이는 가연체, 눈에 보이는 집사와 직책을 소유해서 그 안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건 안 믿어지고 진짜 눈에 보이는 어느 교회에 등록해서 거기서 내가 한 자리 차지해서 그걸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걸 대체하려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당에서는 성찬식, 성내 미사와 성내 행사가 그렇게 민중들한테는 그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거예요. ‘이래도 나 영세 받았는데, 난 이름이 베드로인데. 제발, 제발 이 위에서 제발, 제발 규칙과 규범을 제공해라. 우리보고 흐리멍덩하게 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하면 골치 아프니까 ’이거 영세 받으세요. 영세 받았으면 이번에...하세요. 하세요. 하세요. 이거 지키세요. 지키세요. 그런 이야기만 해 달라.‘ 그러면 그 질서체제에 내가 등록된 것으로 구원받은 걸로 안심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은 그 성전을 어떻게 했습니까? 채찍 들고 들어갔죠. 누가 교회다? 이게 성전이 아니고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고 두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내가 있으매 무조건 교회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한 예수님이 믿어지면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게. 세상 끝 날까지 너희를 버리지 않고 함께 있겠다.‘라는 말은 예배당 옮기라는 말이 아니고 교회 가나 안 가나 상관없다 이 말 이예요. 이것을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죠. 그래도 믿으면 뭔가 믿을만한 듬직한 게 있어야지 너무 우발적이고 돌발적이고 사건화 되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내가 교회 안 가도 늘 듬직하게 운영 잘 되는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죠. 우리 십자가마을도 그런 의미에서 유념을 해야 돼요. 십자가마을 자체가 기존교회를 대체해서 신앙의 대상이 되면 안 되죠. 그래서 십자가마을 옛날 글에 보면 십자가마을이 이단이란 글이 올라가 있어요.
자, 다시 봅시다. 전체 우주의 모든 것을 질서화 시킬 때 주님은 하나의 새로운 전략으로서 새로운 현실, 심판하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라면 국물 뒤집어 쓴 것처럼 죄를 뒤집어 쓴 것을 빛 앞에 발각당할 때 기쁨으로 주의 일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잊게 되느냐 하면 옛날에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얼굴을 돌릴 수가 있어요. 그걸 저는 뭐라 하느냐 하면 추억이라 합니다. ‘추억을 잊어라’ 아! 이거 정말 어렵습니다. 그때 그 사람, 추억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왜, 모든 게 내가 있다고 여기면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저 나이면 내가 고등학교 여고시절 때 어떤 선생님을 좋아했던 이 교정인데 이 교정에서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른 수업은 다 빠져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은 100점 맞았어. 왜,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라고 했던 그 시절 그 교정에 가보면 이미 사라졌어요. 왜, 그 교정만 사라진 게 아니고 나도 같이 하나의 모래시계 모래알처럼 사라졌죠. 나는 사라지고 꿈만 남는 거예요. 그때 만약에 사랑했던 선생님을 오르막길에서 만났다. 머리 훤하게 다 까져가지고 머리 얼마 남지도 않고 허여멀개 가지고 ‘저 아줌마 누구예요?’ 하면 ‘나보고 아줌마래.’ 본인은 그걸 보면서도 본인은 추억에 잠겨서 자기도 변하고 이쪽도 변하고 다 변해요. 세상에 변화 안 되는 게 없어요. 시속 300키로 달리는 기차에 있으면서 전부 다 우리 안 가고 있다고 우기는 거와 똑같이 착각하는 거예요. 다 달라져요.
지금 우리 죽어보세요. 자식들이 몇 달 동안 울고불고 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헤헤 거리며 웃고 다녀요. 제 ‘피’라는 책에 보면 뭐라고 돼 있던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더라도 관을 묻더라도 묻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가족들이 울면서 내려가면서 부조금 정리하고 유산 정리하고 내려갈 때 관을 살짝 열어서 산 밑에 내려가는 자식들을 보란 말이죠. 그때는 헤헤 거리면서 내려가자마자 짬뽕 시켜먹죠. 수고했다고. 아마 짬뽕보다 돼지갈비 먹을 거예요.ㅎ
그래요. 우리는 언제는 다 잊어집니다. 왜냐 하면 우리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은 추억 속에 나지, 지금의 나가 아니거든요. 나중에 사진 찍어보세요. 동영상 강제로 찍고 있지만 나중에는 사진 못 찍게 합니다. 왜, 사진발 보니까 내가 기가 차죠. 내가 이만큼 늙었나. 분명이 난데 이만큼 늙었나. 그때가 좋아요. 5년 뒤에 찍어보세요. 이만큼 늙었나 했던 그 사진이 얼마나 젊은지 그때 알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이 모든 것이 주의 뜻 맞습니다. 주의 뜻대로 다 지금 흙으로 부서지는 전부 다 가루가 되는 과정 속에 있어요. 우리가 바랄 것은 원인과 결과와 모든 전략과 기술은 모든 질서는 모든 카리스마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 말씀 그대로 실시하는 주님한테 가 있는 겁니다. 바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고 세상 사람들 고기라고 본다는 것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잊어야 되고 그 추억을 꺾어야 되는 그러한 주의 능력인 줄 압니다. 고기라도 좋고 우리가 흙이라도 좋으니 예수님께서 일하심이 하나의 현실로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