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20강-묵시의 숫자화 1108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4. 18:49

2011-08-13 01:32:10 조회 : 2551         
묵시의 숫자화 110811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이한례 (IP:203.♡.47.76) 11-08-14 20:39 
가락교회110811요한계시록13장-(묵시의 숫자화)-20강a-(이 근호 목사)
제 20강a

요한계시록 13장 11절, 지난 시간에 강의가 녹취돼 있습니다마는 쭉 보면 그 논리가 이해는 되는데 안 보신 분은 막연하게 어렵다는 인상을 갖게 될 겁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한 그것을 오늘 요약을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난번에 짐승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이 있는데 문제는 이거예요. 이게 왜 짐승이냐 하는 겁니다. 반인반수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데, 반인반수를 그걸 신화적 동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짐승이 나온다 할 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다. 사람이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해서 설득을 시켜야 되는데, 왜 요한계시록 13장에 짐승이 나오고 머리에 뿔이 있고 머리가 죽어있고 그러한 것을 이해해서 언제 천국 갑니까?ㅎ 사람이 천국 가려면 납득이 되는 그들이 쓰는 용어를 써줘야 ‘예~, 예~, 예’ 하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데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 뿔 이렇게 마치 가리듯이 ‘너희들은 이거 보고 모르지?’ 약 올리는 식이라 말이죠.

그럼 구원을 시키겠다는 말인지 구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긴지 의도적으로 어렵게 나오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흔히 반인반수라면 신화적 동물인데 짐승이란 말을 했는데 왜 짐승이라 했느냐 하면, 이걸 매개, 또는 매개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매개라는 것은 이쪽과 이쪽을 연결시키기 위해 중간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화학에서는 촉매라고 해요. 서로가 아무리 붙어 있어도 반응이 안 일어나요. 하지만 중간에 촉매라는 분자 화학물질을 집어넣으면 이쪽 편하고도 맞고 저쪽도 촉매와 저쪽 구조와 딱 들어맞아서 다리 역할을 해서 둘 다 반응을 하는 촉매 역할을 하죠. 촉매가 생물학에서는 신비에 속합니다. 아주 희한해요.

DNA라는 분자 구조가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데 촉매가 거기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생물학에서는 ‘도대체 생명이 어느 구석에 있는 거야? 어느 과정을 생명이라고 해?’ 왜냐하면 DNA는 분자구조인데 생명이 아니잖아요. 생명이 아닌데 지금 우리는 머리카락이 자라고 눈동자는 껌벅이고 하니까 우리는 생명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 과정, 과정 어느 대목이 생명이 나오는 대목이냐 말이죠. 이거 해결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전체 과정 그 물질의 전체 과정을 생명이라고 추상적인 개념 가지고 이렇게 갖다 엎어버리죠. 따지고 보면 다 물질인데, 우리는 물질이 움직이는 걸 생명이라고 보잖아요.

그 다음 질문입니다. 가만히 있는 물질이 왜 움직입니까? 돌멩이가 왜 움직여요? 그게 신기한 거예요. ‘돌멩이가 왜 움직이느냐.’ 말이죠. 생명이 있어서 움직인다 말하잖아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물질은 생명이 없어요. 없는데 움직이니까 그걸 생명이라고 하죠.

매개라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가지고 다른 바깥에 있는 세계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여기에 무리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지금 내가 나를 파악하고 있는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짐승이라는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는 용어가 튀어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는 매개가 아니라는 거예요. 매개라 아니라는 말은 너는 아무리 신학을 연구해도 삼위일체를 연구해도 그것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매개, 매개체, 매개물, 이걸 다른 우리가 아는 용어로 하면 중보자라 하죠. 왜 저는 중보자란 말을 쓰지 않고 왜 매개물이라 하느냐 하면, 중보자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짐승이 나오죠? 짐승은 중보자는 아니지만  중보자 같은 기능을 그동안 인간 속에서 해 왔던 겁니다.

짐승이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 보면 사단으로 돼 있죠? 사단은 영물입니다. 영물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이는 것과 우리 몸은 눈에 보이잖아요. 손에 만져지잖아요. 만져지는 사이에 매개물로 작용하는 거예요. 매개물로 작용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걸 가지고 구원을 위한 작전을 시도하려하는 겁니다. ‘목사님, 헌금을 얼마내면 됩니까?’ 자, 보세요. 목사 눈에 보이죠. 돈 지폐 보이죠. 그걸 봉투에 넣어서 강대상 올리죠. 다 눈에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 매개물 없이 보이는데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매개물이라 할 때 나의 행함을 매개물로 스스로 만들어 내려 하는 거예요. 매개물을 내가 만들어 낸 매개물을 사용해서 구원 받고자 한다 이 말이죠.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크게 쓸게요. 바로 행함 이예요. 이거 아니면 자기가 납득이 안 되니까. 매개자가 끄집어 낸 매개물이 아니면 우리는 납득이 안 돼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니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행함은 걸림돌이라는 매개물에 의해서 다 깨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개물 만드는 것을 눈치 채고 그 매개물을 깨는 쪽으로 성경말씀을 줘 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37절에 보면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뭘 요구합니까?

그렇다면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눈에 보이는 걸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죠. ’내가 그분을 붙들 수 있는 행할 수 있는 건덕지를 주옵소서.’하죠. 그건 건덕지가 없어요. 이 소자한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럴 때 소자한테 물을 준 사람도 깜짝 놀래요. ‘내가 언제 주님이 목마를 때 물 드렸습니까?’ 보세요. 천국 가는 사람, 오른쪽에 양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의 매개물을 자기 행함에서 매개물을 끄집어내지 않았죠.

쉽게 가겠습니다. ‘내가 이 소자한테 물을 줬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구원시켜 달란 말입니다.’라는 주장을 누가 하지 않는다? 천국 가는 오른쪽에 있는 양들은 절대 주장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목마를 때 물 마시게 했잖아요.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줬잖아요.’ 내 행함, 행함, 행함 있잖아요. 그것 가지고 구원해달라는 소리를 누가 안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쪽에서 나오는 행함으로는 나를 구원하는 매개물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목회하는 목사 입장에서 매개물 없이는 교회가 운영이 안 됩니다. ‘이번에 계시 받았습니다. 교육관 지라고 합니다. 돈 내세요.’ 전부 다 이건 매개물로 지가 행한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중보가 되는 매개물은 우리의 행함과 매치가 안 되는 매개물로 우리에게 온다 이 말이죠. 이걸 오늘 강의하려고 설명하려고 하는데 정말 어려워요. 지난 강의도 어려웠지만 오늘 강의는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 주께서 주시는 매개물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로 인하여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매개물이 죽음입니다. 십자가가 뭐냐, 이건 징표와 사인이 돼요. 징표와 사인이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냥 다가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육에서 나오는 것은 자꾸 눈에 보이는 매개물을 원하죠. 그 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찾아오게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숫자化라는 게 일어납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얼마로 돼 있죠? 144,000, 지금 이 논리가 너무나 비약되고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먼저 질문 하나 던지고 이거 들어가겠습니다.

이거 읽고 질문 하나 던질게요. 요한계시록 21장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행동을 똑바로 못해서 지옥 가죠? 분명히 그렇죠? 그런데 왜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왜 지옥 가는 겁니까?

제 질문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생명책 명단에 빠져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까? 행동을 똑바로 안 해서 지옥 가는 겁니까?‘라는 걸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그 말씀은 빠져야 될 게 아닙니까? ’끝까지 생명책에 기록 돼,‘이렇게 돼야 되는데 왜 쓸데없는 이러 이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식으로 이 구절이 동원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뭐냐 하면 윤리적이냐, 아니면 예정론이냐 하는 그 두 개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문제예요.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이 말이 맞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창세전에 예정되지 않았던 생명책에 리스트가 빠져있어서 지옥 가느냐.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원 방법을 제시해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매치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걸 만약에 결합되지 못한다면 신앙 전반에 성경 전체 이해에도 혼란이 와요. 생명책에 기록돼도 윤리적으로 여기에 해당되면 지옥 가느냐 하는 문제, 그 다음에 행동을 똑바로 한 그것이 곧 생명책에 기록된 자냐 하는 문제,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모르겠는데 행동은 똑바로 한다. 그걸로 구원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발생돼요.

지금까지 신학 2천년 역사 동안에 이걸 결합시킨 사람이 없어요. 결합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뭐를 몰랐느냐 하면 숫자화 시키는 겁니다. 144.000, 또는 666, 어떤 피조물을 숫자화 시키는 그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겁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사람을 숫자로 표현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는 겁니다. 사람이 세 사람이 있으면 ‘3’ 이라고 표시하면 이건 잘못된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설명해요. 체리가 다섯 개 있다. 그러면 이것을 ‘5’라고 하죠. 이건 인간들만이 쓰는 용도예요.

그러나 묵시가 위에 있고 아래에 역사가 있고 그 중간에 매개물이 있으면 매개물이 두 개인데 하나는 중보자 예수님이 있고 하나는 짐승이 있죠. 짐승도 영물이니까. 우리는 항상 예수님만 매개물로 생각했지, 현재 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매개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짐승이라는 영적과 묵시 세계의 육적으로 통하는 그 매개물이 사단이 톡톡히 자기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 버려요.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누구와 누구 싸움입니까? 매개물끼리의 싸움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냐, 사단이냐, 사단이냐, 예수 그리스도냐, 이것이 창세가 3장 15절에 나오잖아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매개물끼리의 싸움 이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매개물이 뭐 필요해? 성경 말씀 주시옵소서. 십계명 주시면 그대로 제가 지키겠나이다. 부자 청년이 어릴 때부터 뭘 했다고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또 뭐가 부족합니까? 이만하면 됐지.‘ 라고 할 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 할 때 주님이라는 매개물을 버렸잖아요.

그러면 그 전에 지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기 위해서 만든 매개물이 뭐예요? ‘십계명을 지키면 구원이 된다.’라는 이것을 짐승의 매개물이 그렇게 그동안 지배해 왔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 속에 죽음을 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 배후에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다른 매개물, 사단(짐승)의 손에 의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 안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사단이 들어갔죠. 일반 철학자들이나 자연주의 철학자들은 가룟 유다가 팔아먹었다고만 이야기하지, 같은 인간이니까 사단에 의해서 움직였다는 그 영물이라는 매개물을 철학자들은 싫어해요. 왜, 그게 들어가 버리면 자기네 논리가 자기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걸 겁을 내고 그 선을 영적으로는 안 넘어가려고 해요. 신비주의 되면 계룡산 내려왔다고 할까봐 겁을 내고 발을 뺀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철학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남는 게 인간의 윤리와 행함밖에 남지를 않죠. 주제를 다시 해봅시다. 체리가 다섯 개 있다. 그러면 ‘5’라고 하죠. 사람이 세 명 있다. 그러면 ‘3’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숫자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은 뭐로 돌아오느냐 하면,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돌아오는 육적인 숫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한번 봅시다. 묵시가 있고 여기 역사가 있다면 묵시가 내려앉아요. 내려앉다가 다시 떠오릅니다. 묵시가 내려앉은 묵시하고 다시 떠오르는 묵시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내려앉았다가) 다시 어디로 갑니까?  올라가시죠. 내려오실 때 육신을 입고 내려오죠. 떠오르실 때는 뭐로? 죽음으로 떠오르죠. 결국이 이거다 말이죠.

이쪽 역사 세계에서는 뭐냐, 역사 속에서 사단이라는 매개물이 인간들에게 들어온 것은 뭐냐 하면, 창조에 대한 찬미, 또는 창조에 대한 유지, 소유, 창조의 기적에 대해서 환희, 기쁨, 이런 겁니다. 역사에서는.

그런데 가라앉은 묵시에서는 가라앉은 하나님이 죽음으로 떠오른다 했죠.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창조했음이 아니라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다. 소스에 찍어 먹을 때 초코렛이나 치즈를 소스가 묻잖아요. 핫도그에 케찹이 벌겋게 묻히듯이. 묵시 되신 분이 이 땅에 와서 찍어서 올리니까 죽음으로 올라가죠. 그러면 이 세상 전체가 분명히 우리들은 뭐로 보는가, 창조의 아름다움이죠.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오셔서 찍어보니까 창조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뭡니까? 저주 받아야 될 죽음의 세계였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죽어야 될 인간의 그 관찰점, 또는 안목 점, 이 자체가 우리가 어떤 것을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관찰하는 것, 바라보는 그 관점, 사람이 눈이 있고 이렇게 바라본다면 이 자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게 왜냐하면 죽음의 세계에 휩싸여서 바라보거든요. 여기 예수님이 나타나든, 하나님을 상상하든, 결국은 주님 보시기에 이 관점 자체가 왜곡돼 있고 왜곡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 보낸 거예요. 그래서 여기 문제되는 것을 보자, ‘인간은 누구나 모든 인간의 관찰점을 메시야에 대해서 왜곡되게 보게 만드느냐’ 하는 그 배후에 또 다른 눈동자, 이걸 찾아내는 거예요. 인간을 이렇게 바라보게 만든 또 다른 눈을 찾아내는 겁니다.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면, 나를 둘로 나눠버려요. ‘나’라는 게 있고 이걸 주체가 있고, 그 다음에 나를, 목적이 되죠. 나는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이는 나, 두 가지 ‘나’가 ‘나’에 포함돼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된 것은 나1, 나2, 나3, ‘나’가 셋이 돼 버려요. 내 안에 내가 둘이 있는데 그 두 개를 합친 더 높은 차원의 ‘나’가 생기니까 결국은 인간은 세 종류의 ‘나’가 돌아가면서 생각하게 돼요. 참, 이것이 제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점을 계속해서 추궁해 나가요. 제가 만들은 게 아니에요.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소경이 못 본다 하니까 그건 보는 사람이고, 니가 본다 하니까 니는 소경이다. 이게 무슨 이야깁니까?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긴데.ㅎ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요. 그러면 잃어버렸는데 뭘 얻어요? 얻고자 해서 잃어버린다면 그건 결국은 얻고자 한 것밖에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트릭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그걸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이 끄집어내는 방법에 동원하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요한, 사도들의 편지입니다. 사도들의 편지는 주의 계시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실존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성령을 통해서 왔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육이 어떤 식으로 3개, 2개로 돼 있는 것을 까발리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조지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한번 써 보겠습니다. S를 주체라 하고 S는 P와 非P(p가 아닌)로 바뀔 때 주체가 깨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이 왔을 때 메시야로 왔는데 스스로 너희들 보기에, 그들이 원했던 관점으로 봤을 때 메시야가 아닌 걸로 바뀔 때 예수님이 아닌 걸로 바뀌면서 누가 깨지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었다.’하는 내 자신에게 뭐가 깨진다?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내가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우리 보기에는 P-> 非P 아닌 것으로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이 본래 바뀐 적이 없는 진짜 예수님 이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마치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니까 주님께서 원래 바뀌어서 온 걸로 생각한 이것이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신학입니다. 우리 자신은 문제가 없는데 예수님이 낮아졌다가 높아졌다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을 거론하면서. 예수님이 낮아졌다 높아진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 주님은 바뀐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대로 하거든요. 십자가 죽으실 때도 말씀대로 부활할 때도 말씀대로, 주께서는 달라진 일이 없는데 그 말씀대로 하는 그 모양새가 변하지 않는 우리모습 보기에는 뭐로 바뀌었다? 낮아졌다가 그리고 높아진 걸로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있죠. 주님께서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왜곡된 관점을 ‘아 잘못됐구나.’ 이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발생시켜요. 죽음을 발생시키니까 성령께서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문제 삼으면서 인간 배후에 들어있는 영적 매개물까지 소갈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창세가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마감이 돼요. 인간은 상대할 그것도 안 돼요. 인간은 놀아나는 존재기 때문에. 배후의 사단에 의해 놀아나는 존재기 때문에 상대할 잽이 못 된다는 거죠.

자, 그러면 숫자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묵시세계에서 이 땅 역사세계에 들어올 때 개입하여 내려올 때 예수님 자신이 하나의 숫자로서 와 버려요. 그 숫자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가 뭐냐 하면, ‘7’이라는 숫자예요. 7별을 쥐고 있다. 7별을 누가 쥐고 있다? 1분이 쥐고 있는 양상,  1분이 쥐고 있는 7 전체를 묵시로 보자 이 말이죠. 왜냐 하면 만약에 7을 역사로 봐 버리면 이 세상에 교회 7군데밖에 없어요. 각 지역에 흩어진 지 교회 많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그래서 아무리 역사에 교회가 많고 한국교회에 교회가 많다 할지라도 그것을 묵시적으로 볼 때는 어디에 속한다? 7교회 범주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죠. 7로 규정짓는 거예요. 7은 한분의 모습을 규정짓는 겁니다.

자 여기서 사람들은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뭐가 해명이 안 되느냐 하면, 어떻게 수많은 교회가 7이라는 이 7개 교회 안에 전부 다 제한되는 논리적인 과정이 어떻게 돼서 그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젝이라는 사람이 이런 표현을 했어요. 한정된 숫자 안에는 무한정의 개수가 담겨있다. 144.000이라는 한정된 숫자 안에 수많은 성도들이 거기에 다 포함돼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체리가 다섯 개 있으면 숫자로 5죠. 5는 무한정이 아닙니다. 다섯 개가 5예요. 만약에 1개다 더 있다면 이건 다섯 개가 아니고 여섯 개예요. 이건 인간들끼리 통하는 숫자 개념이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숫자를 알게 되면 체리 하나, 하나마다 가치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체리가 다섯 개 있는데 이것을 만약에 7이라고 한다면 이 하나, 하나가 다 7이 되는 거예요. 이걸 모아보면 다 7이 되고 흩어져도 7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너희들 개수 세면서 숫자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숫자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메시야의 구원의 기능에서 나온 숫자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럼 메시야의 구원의 기능에서 나온 숫자가 7이잖아요. 그러면 메시야의 기능이란 숫자를 왜 7로 합니까? 그것은 영적 매개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해되리가 기대 안 합니다.ㅎ 7이라는 숫자가 이것이 인간이 이해되는 숫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천지 창조를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손들고 이야기한다. ‘왜 9일 만에 창조를 안 하고 17일 만에 창조를 안 합니까?’라고 따지는 것은 왜 17일 만에 창조를 안 하고 7일 만에 창조를 했습니까? 17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우리의 왜곡된 관점에서 나온 거죠. 매개물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는데, 인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에 거쳐야 되는 중간 과정을 설정할 때, 이거 만들기, 매개물, 중보자, 이 만들기를 누가 만드느냐 하면 인간이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왜, 내가 납득되지 아니하면 이 매개물이 감당이 안 되니까, 내가 납득이 안 되는데, 내가 납득이 되는 것을 해서 하는 거예요.

비행기도 없다. 자동차도 없다. 배도 없다. 그럴 때는 냇가 건널 때 뭐하면 됩니까? 돌멩이를 놓아서 가면 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건널 때 돌멩이 놓은 곳을 뛰면 되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매개물을 설치해서 그래서 저쪽 가겠다는 것이 인간이 숨길 수 없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안 온다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서 하늘나라 가는 거예요.

이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불교하고 복음하고 차이점은 뭐냐, 불교는 어떤 갭이나 간격을 메우는 것을 해요. 사랑과 미움이 있으면 그걸 자비로서 메우면 되는 거예요. 서로 대자대비하게. 어떤 갈등이 있으면 본드가지고 메우든지 다리를 놓든지 메우면 되는 거예요. 이 험한 세상 ~~가 되어서? 다리가 되어. 험한 세상 서로 다리가 되어서 서로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복음은 뭡니까? 갭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버리죠. 접근 못하도록, 어디에? 천국에 못 오도록. 계속 갭을 만들어요. 걸림돌을 만들고. 장애요소를 계속 깔아놔요. 그 말은 ‘너희들이 매개물 만드는 것을 익히 알거든. 하지만 나는 그 매개물을 일체 안정하지 아니하거든. 그리고 니가 생각할 때 니가 매개물을 만들고 중간 다리를 만들 때 의도했던 그 천국, 그건 천국이 아니거든.’ 이러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매개물을 만들 때는 차츰 차츰 조금씩, 조금씩은 없습니다. 매개물 자체가 완료예요. ‘다 이루었다’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것은 7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1에서 나왔죠. 1이라는 것은 완료를 말합니다. 완료가 이렇게 결합돼 있으니까 7이라는 것은 결국 뭡니까? 완료 성을 이야기합니다.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는 말은 뭡니까? 창세전에 다 이룬 것을 창세후의 세계에다 개입돼 놓은 겁니다. 이게 이번 수련회에 나오죠. 창세전에 인간이 가담한 적이 없는 다 이루심을 창세후에 집어넣으니까 창세후가 난리가 났어요. 이해 못하겠다고. 우리 손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데, 왜 완제품이 왜 날아와야 되는지, 도대체 우리를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없어. 왜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꾸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는 말씀대로 ‘다 이루었다.’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왜 당신은 말씀대로 이룹니까? 우리도 인간인데 우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인간인데 같이 말씀을 이루어 나갑시다. 왜 당신 혼자 길이고 당신 혼자 진리고 당신 혼자 생명이 되는가를 대 봐라.’ 그래서 그 이유를 댔죠.ㅎ

성경 말씀에는 누가 자기를 증명할 때는 2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했죠. 그래서 주님께서 2명의 증인을 댔죠. 내가 나에게 증인이 되고 내 아버지가 내 증인이 되니까 딱 몇 명입니까? 딱 두 사람, 내가 메시야라는 걸 증명했다 말이죠. 이게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나도 그런 소리 하겠어요.ㅎ 그것이 예수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때부터는 무지무지하게 복잡해집니다.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했겠죠. 그러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 할지라도 저주 받는다 했거든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그 사도가 전하는 복음, 이거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는 확실한 완료된 복음이 사도바울이 개인적인 의견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계시입니까? 주님의 계시죠.

주님의 계시와 사도바울의 계시는 어디서 찾습니까? 이게 골치 아프죠. 이거 푼다고 박 윤진 성도님 그림까지 그려놨어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들의 주체가 나와 나로 분리돼 있다는 걸 감안해서 계시로 와 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행할 수 있는 ‘나’와 그 결과로 생기는 ‘나’가 두개로 쫙 갈라지면서 그 간격을 인간은 도저히 메울 길이 없음을 스스로 탄식하게 만듭니다.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게 성령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성령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게 쫙쫙 갈라지는 거예요. 지퍼 열리는 정도가 아니에요. 완전히 이거는 '도끼로 이마 까'예요.ㅎ 쫙 갈라지는 거예요. 도저히 그 간격을 메울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왜 ‘숫자화’ 해야 되는지를 설명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이 두 개가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어요. 항상 ‘나는 예수 믿는다.’ 해놓고 그 뒤에는 반드시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알거든,’ 이라고 주장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내가 물어봐요. 내가 내 속을 끄집어내서 ‘잘 믿고 있는 거야? 안 믿는 거야? ’하고 뭘 하느냐 하면 취조해요. ‘똑바로 해. 똑바로, 니 제대로 못 믿으면 우리 함께 지옥 가는 거야. 똑바로 해. 니 성경 말씀 봤지?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희미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렇게 지적하는 지는 정신 차리고 있습니까?ㅎ

바로 사도바울은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와 나를 아는 나와 우리를 매개물로 엮을 재주가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맡기게 되면 주께서 이런 현상을 이걸 기대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어렵게 했는데 한순간에 다 풀립니다. 다시 봅시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있습니다. 중보자 누굽니까? 예수님이 중보자죠. 우리가 알고 있던 왜곡된 것은, 내가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다는, 이러한 틀 자체가 엉터리란 말이죠. 이게 마귀적인 사고방식 이예요.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와 버리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일을 이루는데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매개물이 돼요. 이 매개물을 뭐라 하느냐 하면 ‘죄인’이라고 해요. 비로소 죄라는 걸 알아요. 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걸 알아요. 나쁜 짓해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죄인 되도록 하신 것이 주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죄인 되게 했어요. 죄인 돼야 죄인이 꼴값 한다는, 죄인이 왜 구원 받아요? 말이 안 되잖아요. 죄인은 지옥가야지, 죄인 되게 만들어서 내가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 자체를 ‘입 다물라’ 하고 입을 막는 그 매개물로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보고 ‘아버지, 얘 한 놈 잡았습니다. 구원해 주이소. 내가 이런 인간을 구원합니다.’ 뭐로? 자신의 피로. 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한테 매어있었느냐 하면 사단에게 매개물로 매어있었어요. 주님께서는 사단에게 매개물로 매어있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누구 앞에 등장하느냐 하면, 사단 앞에 등장합니다. 마귀 앞에 등장시켜서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죄인을 내 피로 구원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이런 식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안에 있는 죄인은 개인적인 모든 인격은 사라지고 뭐가 되느냐 하면 ‘숫자화’가 돼요. 매개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묵시로 역사 속에 매개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기이히 나타나기 때문에 이게 숫자화가 되는데 이 숫자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실 일을 기능으로 이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12라는 야곱이 언약대로 12의 축복을 가야되는데 1000이라는 숫자는 축복의 숫자예요. 십계명에 나옵니다. 천대까지. 많다는 뜻 이예요. 이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다는 뜻입니다. 민수기에도 나와요. 1000배나 갚아준다는 이 말이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손대야 축복받는 넘치도록 축복을 준다는 의미거든요. 12X12X1000, 12는 야곱언약이고 구원받는 자의 숫자입니다. 구원받는 자의 기능으로의 숫자죠. 야곱의 아들이 있지만 숫자로 표현할 때는 뭐라고요? 12라는 언약의 숫자와 그걸 1000번이라고 해서 완성 시키는 144.000, 이 144.000에 숫자化 시키죠. 이게 숫자化 된다는 것은 원래 매개물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중보자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 영적인 매개물이었죠. 그 영적인 매개물의 기능 속에 누가 포함됐다? 이 죄인 된 우리가 포함됐기 때문에 우리는 뭐로 나타납니까? 숫자化로 등장해요.

처음부터 다시.(박 윤진씨가 늦게 오시므로 ^^) 사람이 이렇게 있고 사람은 하늘(신)을 바라봅니다. 바라볼 때 여기 매개물(방법, 방식)을 통해서 신에게 가고자 할 때 이 매개물을 누가 만든다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든다 했죠. 이걸 로마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했죠. 인간이 징검다리를 놓을 때 자기가 갈 수 있는, 어린아이가 징검다리 놓으면서 ‘나 저쪽으로 갈 거야, 건너가야지.’ 여기 놓고 3미터 던지고 합니까? 왜 그렇지 않습니까? 10센티미터 놓죠. 왜? 지가 건널 수 있는 방법, 지가 행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매개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갈 때 매개물을 가지고 가죠. 그런데 신은 점점 뭘 닮아갑니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매개물을 닮아가는 거예요. 이게 우상이라고요. 신은 인간을 닮았어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구름이 우연히 돼지 모양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 안 해요. 그리고 코끼리 모양이라도 그래요. 그런데 갑자기 옆모습이 인간의 모습을 닮으면 뭐라고 봅니까? ‘야! 신의 계시가 나타났다.’ 신의 계시가 뭐냐, 날 닮았다는 뜻 이예요.

그래서 중국에서 사진 찍을 때 눈 사진이 누굴 닮았습니까? 인간 닮았고 점잖은 맥도날드 아저씨 닮았잖아요. 인간이 매개물을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상상한 신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행함을 할 수 있는 매개물을 닮아가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매개물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보자, 중보자는 누구를 말하죠? 예수님이죠. 두 번째 매개물은 사단이죠. 둘 다 인간의 행할 수 있는 행함 차원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아요. 왜, 둘 다 영물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도 사단은 안 믿어요. 악마는 외계영화에 나오는 게 악마인가? 지 돈 떼먹은 사람이 악마지, 이러죠. 악마는 믿지를 않아요.

인간이 예수님 등장하니까 예수님을 어디에 맞추려고 했어요? 자기가 생각했던 매개물에 그렇게 맞추려고 애썼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매개물은 뭐였습니까?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했는데 예수님은 뭘 제공했습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여기서 뭐가 주어졌다 했어요? 죽음, 실제로 묵시가 내려앉을 때는 죽음이 찾아왔죠.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해서 예수 죽은 것을 믿으면 어디 간다?? 구원받는다고 또 다시 오해한 거예요. ‘나 예수님 죽은 거 믿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을 거야.’ 여전히 뭘 포기 못했어요? 내 구원받겠다는 것을 포기 못하고 있었죠. 죽음이란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이 전체가 관점이 왜곡인데 인간은 지가 본 것을 왜곡됐다고 지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소경이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 하니까 소경이 아니죠. 이것을 자기가 고칠 수 있는 능력 밖에 일이 뭐냐, ‘나는 뭐를 봐도 왜곡돼 있어.’라는 것을 증명할 수 길이 이 세상에는 없다니까요. ‘나는 죄인이야.’  ‘증명해 봐.’ 증명 못해요. 그냥 해본 거예요.ㅎ 그걸 증명해 줄 수가 없어요. ‘나는 날 스스로 부인한다. 나는 내 목숨을 미워한다.’ ‘언제까지?’ ‘몰라’ 미워한 게 아니라니까요. 미워한 척 하는 거라니까요.

‘척‘이란 말은 0지점을 우회하는 걸 말합니다. 0은 없음이죠. 인간이 없음을 통해서 달라져야 되는데 인간이 없음을 통과하면 누가 없어집니까? 나도 날라 가기 때문에 없어진 척 하면서 우회하죠. 이게 척하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죽을 것처럼, 거의 죽을 때까지, 그게 아닌데.

예수님의 숫자화라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반복합니다. 체리가 다섯 개 있을 때 뭐라고 표현하죠? 5라고 표현하죠. 5라고 표현한다면 5라는 숫자에는 하나에 다 살아있죠. 1+1+1+1+1=5가 되죠. 그럼 여기 1이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영적인 매개물로 오는 메시야에서 만약에 5라고 한다면 요 하나, 하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0로 바꾸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는 인간을 붙들어서 5되게 하는 거예요. 없애버리고 5되게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교회도 아닌데, 무슨 교회 되느냐, 교회는 1에서 나와요. 1에서 뭐가 나온다? 7이 나와요. 하나의 촛대에서 7개 가지가 나오죠? 7교회는 우리가 있어야 교회 되는 게 아니고 어디서 나옵니까? 주님에게서만 나오는 거예요. 그때 7이라는 숫자화가 되는 겁니다. 숫자화. 그래서 뭐라 했습니까? 한정된 숫자 안에는 무한정의 개수가 들어있다. 144.000안에는 무한정의 개수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존재론 적으로 설명을 못하고 발생론 적으로 설명을 해야 돼요. 계속해서 그 숫자에 합한 것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하려면 그 사전에 작업이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개물로 오실 때 죽음을 통해서 왔을 때 이것은 이 죽음의 주된 의미가 뭐를 관여하느냐 하면 왜곡된 것을 지적함이죠.

왜곡된 것을 지적한다는 말은, 다시 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 중간에 유대인들은 말씀, 또는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 이게 왜곡됐다 이 말이죠. 그럼 뭘 바꿉니까? 인간이 십계명 지켜서, 또는 말씀 지켜서 ‘구원 받는다’ 하는 이것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앉는 묵시로 와 버리면 이 전체가 죽음이 되죠. 그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주께서 이 안에 들어왔다 빠져나올 때, 가라앉은 묵시가 떠오를 때 뭐로 떠올랐다? 죽음으로 떠올랐죠. 분명히 창조로 와서 죽음이죠. 세상 사람들은 뭘 구한다? 창조를 찬미하죠. 왜, 존재기 때문에 있음을 기뻐하죠. 있음을 뭐로 바꾼다? 죽음으로 바꾸는 이 흐름, 이 흐름에 주께서는 영적 매개물로 개입하죠. 개입돼 버리면 뭐가 왜곡됐어요? 죽음을 야기 시키는 이것이 뭐가 된다? 진정한 매개물이 되고 전에는 예수님이 매개물이었는데 누가 매개물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매개물 되어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아버지 뜻을 이루는 매개물로 우리 죄인을 사용한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죄인은 뭐가 됩니까? 숫자화가 되면서 창세전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다 해서 우리 구원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 구원 작업에 우리가 동원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7.76) 11-08-19 14:59 
가락교회110811요한계시록13장-(묵시의 숫자화)-20강b-(이 근호 목사)
제 20강b

시작하겠습니다. 창조가 기적인가, 죽음이 기적인가, 이 문제, 우리 인간이 있으면 ‘내가 여기 왜 있는가.’ 하면 ‘누가 창조했기에 내가 있겠지.‘라고 여기서 창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이 누굴 옹호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옹호하기 위해서 ’누가 창조했겠지.’ 하는 거예요. 그럼 ‘누가 창조했겠지‘하면 누가 나옵니까? 여기는 사단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사단이 안 나오는 거예요. 여기 나만 있으면 되지 사단은 왜? 나만 있으면 되지, 마귀는 왜 집어넣어요. 마귀 생각 안 해도 내가 예수 믿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있음과 이단이 차이가 난다고요.

예수님 있음은 사단을 끄집어내게 돼 있는데 인간에서 출발해 버리면 사단이란 매개물이 필요치 않아요. 그저 내 복주고 내 잘되면 뭐가 되든지 관계없어요.

인도에 강이 두 개 있는데 하나 이쪽에는 갠지스 강, 이쪽에는 인더스 강이 있는데, 인더스 강에 보면 여기에 처음에 인도가 제국 할 때 아리아왕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있던 민족들이 옮겨가면서 힌두교라는 게 처음 생겼어요. 그때 신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신이시여, 여기 갠지스 강에 물이 많으므로 신께서 오셔서 맘껏 드시고 우리를 축복해 달라.’라는 거예요. 보세요. 매개물이 뭡니까? 지금 여기 물이 가물었거든요. 지금 가물어서 옮겼거든요. 그러면 누가 좋아요?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좋은 것에 거기다 누굴 동참시킵니까? 하나님을 동참시켜서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신께서 오셔서 맘껏 목욕하시고 맘껏 물드시고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도 갠지스 강에는 힌두교가 뭐 합니까? 거기에 하나의 영혼을 뿌리면 그 물줄기를 타고 어디 가느냐? 천상에 올라갑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처음에 강을 만들 때는 하나님 머리카락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타고 올라간다는 거예요.

하나님, 신의 머리카락 가지고 강을 만들었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만들어졌어요? 내가 여기 있음, 있는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좋게 있음, 선하게 있음, 그리고 값어치 있게 있음, 그러면 여기서 뭐가 안 나옵니까? 만약에 사단을 거론한다면 이건 누구를 해롭게 할 때만 사단일까요? 나를 괴롭게 할 때만 사단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단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악마의 모습으로 오니까 몰라본 거예요. 주님은 ‘니가 니 존재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소급해서 창조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중에 뭐를 이야기합니까? 구원을 이야기해요. 소급해서 창조를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걸 뭐를 매개체로? 성경책을 매개체로 해서 이야기하니까 전부 다 뭐가 돼요? 전부 다 거짓말이 되죠.

창조가 기적이냐, 죽음이 기적이냐, 창조가 기적이 아닌 구원은 우리는 얼마든지 내가 여기 있음, 있다는 것은 누가 있어서 먼저 있었던 분이 나를 만들었기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건 기적이 아니에요. 왜, 인간이 매개물로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그런데 뭐를 모르느냐, 하이데거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내가 왜 죽지? 이걸 도대체 모르는 거예요. 내가 왜 죽지? 그리고 죽는 게 왜 무섭지? 사는 것은 안 무서운데 계속 오래 사는 것은 안 무서운데 죽는 것은 무서워요. 병원에 가서 ‘폐암입니다.’하면 무섭고, ‘폐암 정상입니다.’하면 기분 좋고, 왜 그러느냐 말이죠.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누가 죽음이 싫어하도록 그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그것은 바로 영적인 매개물, 사단이 그렇게 만들은 거죠.

성경에서는 사단이 매개물로 만드는 것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라지는 매개물’로 간주합니다. 매개물인데 사라지는 매개물이니까 일시적으로만 쓰여 졌다가 활용이 끝나버리면 없어져야 되죠. 그러면 누구만 매개물로 영원히 남는 겁니까? 예수님이죠.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데 중간에 영적인 매개물로 잠간 쓰임 받다가 날아가는 존재가 누구다? 사단입니다. 사단!! 그리고 보니 사단도 충실한 일꾼 이예요. 주님이 쓰시는 충실한 일꾼이 되는 겁니다.

사단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역할 이예요. 그래서 사단이 있음으로서 내가 여기 있는 게 기적이 아니고 있는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함을 나타내는 그것이 기적이죠. 세상에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이 튀어나온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고백 이예요. ‘저쪽은 다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이게 정상인데 ‘주여, 저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내 입이 의심스러워요. 나한테 이런 고백이 튀어나오다니,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고백이 안 나와요. 이게 바로 죽음을 근거로 한, 죽음부터 새로 시작한 기적의 흐름이 되는 거죠.

창조의 세계에서 죽음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주께서는 십자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에서 창조로 가 버려요. 창조에서 죽음으로 가고 죽음에서 창조로 가는 이 창조가 아니고,  죽음에서 창조로 가는 창조는 다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창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창조예요. ‘그 따위 식의 창조를 주장하니까 니는 마땅히 지옥 가야 돼,‘라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라고 여기게 한 모든 보이지 않는 매개물, 여기서 매개물을 짐승, 사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단에서 나온 것은 비 언약에서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기적입니다. 그 기적의 특징은 있는 것을 확대시키고 번창시키고 팽창시키고 양을 많게 하고 오래 살게 하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옵니다. 땅에 있는 짐승은, 영적 매개물은 바로 사단 매개물은 바다의 짐승을 숭배하게 만들어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찬미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거기에 몰아넣는 일을 했다 보는 겁니다.

여기 13장 14절에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이 우상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그건 상당히 위험한 질문이 돼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처음부터 매개물을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내가 나를 파악하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서 뭐도 파악했다? 영적인 존재도 파악에 나서겠다는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게 있으니까 우리가 납득이 되는 어떤 영적 매개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제시할 때 우리는 성경을 온전히 분석했다 이렇게 간주하고 싶은 거예요. 나에게 납득이 되는 내가 나에게 납득이 되듯이, 이처럼 납득이 되는 다른 우상, 생기 있게 말하는 그런 우상이 뭘까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주석이 다 그런 거예요. 여기서 여러 가지 후보감들이 등장하죠. 미스 서울, 미스 대구, 쭉 나오듯이 여기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교황, 누가 내세우는 후보감이겠어요? 루터, 칼빈,  로마 황제는 누가 정했겠습니까? 그것은 핍박받고 있던 카타콤 지하 동굴에 갇혀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이, 히틀러를 그렇게 본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유대인들이나 또는, 여러분, 아우슈비츠가 유대인들만 갇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 제일 먼저 갇힌 사람은 독일 노숙자들이었습니다. 독일 노숙자 장애자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증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많이 들어갔어요. 왜 들어갔겠습니까? 무정부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무정부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자들을 집어넣고 차후에 50년 뒤에 유대인들을 집어넣었어요. 처음에는 독일인, 그 다음에는 소련에 포로 된 사람들, 공산주의들을 그렇게 싫어해요. 그 다음에 유대인을 집어넣죠. 후에는 유대인이 제일 많았죠. 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집시들, 레갑 족속들을 집어넣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짐승은 누구겠습니까? 히틀러가 되겠죠.

여기서 생기를 되찾은 짐승에게 우상을 달라 하는데 두 가지를 구분해 봅시다. 여기서 우상이라 뭐냐, 본인들은 우상이라 생각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생각하지 않고 신으로 생각하죠. 살아있는 신, 그러니까 손에 잡히는 하나님을 원하는 거예요. 마치 여기 내가 있음이 손에 잡히듯이 내가 가진다는 것이 날마다 확인되는 신, 확인될 수 있는 하나님을 그리워했던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우상을 이야기하면서 짐승을 뭐로 표기했느냐 하면 ‘히틀러다. 교황이다.’ 하지 않고 뭐로 표기했습니까? 666, 숫자로 표기했죠.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너무 어려우니까 다시 해 봅시다. 숫자로 표기한다는 것을 ‘숫자化’ 숫자로 변형시키는 거예요. 숫자로 변형시키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점이 편리하냐 하면 여기 숫자化시키게 되면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하면 이쪽의 숫자化와 연결 지을 수가 있어요. ‘666’이라 숫자를 표현한 것은 사실은 ‘144.000’이라는 숫자로 성도를 대변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제되는 모든 세력을 ‘666’이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논리가 어렵다고 하는데 ‘666’이라는 것은 무엇에 기준해서? ‘666‘이라는 것은 미완료성이라 했죠. 7은 뭐라 했습니까? 완료 성, 7인, 7나팔, 7대접이라는 이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에서 내려지는 심판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완료가 돼 버리면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완료되지 않은 것을 자기 세계 안에서 축출해서 뽑아내어서 배제시키는 그런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완료에 합하지 않은 모든 것은 분류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료와 미완료와 다른데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걸 해 볼게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1, 2, 3, 4, 5, 6, 이걸 다 통합한 이걸 7로 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룬다 할 때는 여기에 나쁜 것, 악마도 다 포함될 때 예수님의 완성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보지 않고 완료되었다 할 때는 완료된 것 외에는 바깥에서 전부 다 뽑아내는 그 작업에서 따로 모아놓은 이것을 완료라고 보는 겁니다. 나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내 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된 자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깥에 내차버리고 배제하는 그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완료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의 철학적인 논리에 의하면 선과 악도 아울러서 다 포함할 때 그게 완료고 완성으로 보잖아요. 그렇잖습니까? 흑과 백, 빛과 어둠, 전체를 포함할 때 이것이 선이 되고 이게 완성으로 보잖습니까? 그래야 미진한 게 남지 않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이 있지만 주님은 지옥에서도 주가 되고 천국에서도 주가 된다.’라는 것이 우리 인식이다 이 말이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틀린 게 아닌데, 주님의 관심 점은 이 전체를 합해서 주가 되는 관점이 아니고 천국 간 사람의 주가 되는 쪽으로 이쪽(지옥 가는 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666으로 따로 숫자를 표기한다는 것은 달리 완성된 딴 모습이 숫자로 표기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함되지 않는, 속하지 않은 배제된 딴 집단을 666이라고 이렇게 표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할 때 스가랴서나 에스겔서를 많이 인용해야 되는데 스가랴 내용을 잠간 언급하면 스가랴에 7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고 천사를 사방으로 내보내서 심판하는 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스가랴 전체를 내용으로 봐서는 현재 새로운 성전이 건립되면서 여기에 완료된 성전이 나옵니다. 그 성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기에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맹렬한 심판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시작이 되면서 여기 완료에서 심판이 시작되면서 여기 심판에서 나오는 반경. 이 모습이 예전에 세상을 해석했던 것이 해석이 안 되고, 묵시적인 용어가 동원돼야 해석이 될 정도로 그렇게 표현돼 있어요.

그러면 한번 물어 봅시다. 평소에 이렇게 물을 먹잖아요. 그럼 평소에 ‘나는 컵으로 물을 마셨다.’ 라는 표현을 ‘어떤 뿔 달린 짐승이 놀라운 생명수를 마셨다.’ 그걸 사진을 찍어보면 동영상으로 보면 똑같은 물이예요. 예전에 평소에 늘 해왔던 행동인데 새로운 표현이 가미돼 버리면, 묵시적 입장에서 표현해 버리면 마치 전혀 다른 물 마실 때 그냥 마시는 게 아니고 컵을 세 바퀴 돌리면서 마시는 그런 기적이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오해될 수밖에 없는 표현이 나와 버려요. 조용하게 해는 뜨고 달은 지는데 별도 뜨고 조용한데 ‘그때는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강물이 벌겋게 달궈지고’란 표현이 나와 버리면 옛날에 우리가 ‘강물은 푸르다. 푸르다.’ 하다가 ‘이번에 홍수 날 때 보니까 강물이 벌겋잖아요. 요한계시록에도’라고 마치 표현이 일치되는 현상이 따로 만들어져야 말씀이 완성된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가랴에 보면 오버도 그런 오버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데 표현들이 전부 다 난리도 아니에요. 중국 무협소설처럼 휙, 휙 날아다니고 뭐 뒤집어지고 놋을 지고 어떤 여자가 날아다니고...CF영화도 그런 영화가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 보면 그냥 조용해요. 가끔 주식이 떨어지니 문제지...ㅎ 조용해요. 소말리아 해적이 나타나서 문제고 우리나라 축구가 3대 0으로 져서 문제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조용히 돌아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냥 그대로 돌아가요. 그런데 이쪽에 영적으로 오버가 되니까 마치 큰 괴변이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유명한 바벨론이 무역하는 거 나오죠. 그 무역하는 거 옛날부터 해 왔어요. 이사야에는 시돈이 나와요. 시돈은 지중해 갈릴리 위쪽에 시돈을 시리아라 하는데 그냥 무역 했어요. 옛날부터 했어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바벨론, 시돈이 온갖 것 무역해서 망한다고 돼 있어요. 큰 성 바벨론아, 그걸 음녀라고 표현하죠.

자,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음녀라 해서 갑자기 말을 타고 등장하는 게 아니고 그냥 일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똑같이 하는데, 관점이 뭐로 바뀝니까? 관점이 평범하게 나 중심으로 직장 생활하는, 그냥 정상으로 농사짓는, 그냥 보통의 관점에서 뭐로 바뀐다? 이게 숫자화 되면 뭐로 바뀌어요?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폭발하는 그러한 존재로 달라지죠.

그러면 ‘나는 나의 것에서 주의 것’이 되죠. 그런데 이게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주의 것으로 된 나가 매일같이 새롭게 창조되죠. 어디서? 죽음에서.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거예요. 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뭐로 삽니까? 매일같이 나의 것으로 죽고 매일같이 주의 것으로 나예요. 중간에 나는 주의 것이라는 이러한 흐름을 거치면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주의 것이 나다. 이것도 설명해야 되는데, 이건 수련회에서 설명한 건데, ‘나는~~ 행한다. 나는 밥 먹는다. 밥 먹는 행동 주체가 나죠. 뭘 하고 있습니까? 밥 먹고 있죠. 그런데 밥 먹는 것은 나다. 하면 밥 먹는 주체는 누굽니까? 누가 밥 먹게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밥 먹게 하신 거예요. 이게 스가랴의 복음입니다.

스가랴는 성전이 완성되고 난 뒤에 왜 완성된 성전만 남고 왜 나머지는 완성된 성전에서 전부 다 심판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보세요. 성전이 완성됐죠? 끝났잖아요. 우리는 끝났잖아요. 그런데 무슨 기능? 배제 기능이 있죠. 그럼 뭘 해야 됩니까? 완성된 성전 빼놓고 나머지 뭐해야 돼요? 발로 다 차버리고 부숴버리고 박살내야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그냥 비오고 그냥 해 뜨고 별 아름답고 지금도 남산 공원에 가면 둘이 데이트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스가랴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게 뭐라고요? 주님에 의해서 맹렬하게 심판받는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상은 뭐냐,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게 뭐냐, 바로 생기 있는 살아있는 우상이 되는 거예요. 666, 그걸 포함해서 뭐로 표현한다? 숫자로 표현한다? 666, 그 짐승이 뭐라고요? 666, 사람의 숫자라. 사람=짐승, 짐승=사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적 입장에서는 그게 분간이 됩니까? 분간이 안 됩니다. 언제 임할 때? 주님이 임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주의 것이 될 때, 주의 것으로 쓰여 질 때, 우리가 말씀으로 쓰여 질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창세전에 명단이 기록된 자라는 말도 안 되는, 내가 창세전에 내 이름이 명단에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은 뭡니까? 모든 것이 666이고, 그들 인간들은 살아있는 생기들이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해를 할 때 나부터 성경말씀대로 말도 안 되는 내가 144.000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어디 주소가 144.000인가? 144.000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여호와 증인처럼 되고 그건 천지도 이런 천지가 없어요. 신천지,ㅎ 들어보셨습니까? 신천지,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나는 뭐가 돼요? 144.000 자신이 돼요. 이건 144.000을 지가 쥐고 있는 셈이 된다니까요. 144.000되기 위해서 나는 144.000으로 돼야 될 사람인데 자기가 144.000이 돼 있으니까 이건 자기가 우상 이예요. 자기가 666이예요.ㅎ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스가랴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은 성전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아요. 찬찬히 봅시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한다. 무슨 뜻입니까? ‘너는 죽었다.‘라는 거예요. 밥 먹고 있는 너는 죽었다. 직장 생활하는 너는 죽었다. 지금 애 돌보고 있는 너는 죽었다. 항상 죽었다가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한다. 죽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데서,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인간이 구원되는 걸 하나님이 원해요. 그런데 죽은 자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 뭐든 손을 쓸 수가 있다? 없다? 손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내 이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바깥의 기적 이예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고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기적을 주신 거예요. 그게 뭐냐, 말씀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말씀으로 찾아와 버리면 이 말씀이 되기 위해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주께서 아예 기대를 안 해요. ‘이 말씀대로 니가 해봐라.’ 기대를 안 해요. 왜냐, 우리가 행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이미 완료 성 가지고 이미 해주신 거예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오직 나의 신, 여호와의 신, 주의 신, 성령으로 했다. 그럼 이미 완료된 거죠. 이게 믿어지십니까? 이미 완료된 거죠. 완료됐으면 이제 완료가 된 그 파편이 뭔가, 완료된 것은 하나죠. 거기 1에서 나온 7, 완료된 7에서 뭐가 나오느냐,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그게 7임이 믿어져요. 어떻게? 몰라요. 그건 제가 설명 못합니다. 말씀이 믿어진다니까요.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 받았네.’라는 말씀이 믿어져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믿었습니까? 한다면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나는 죽어 있었는데 주께서 이 말씀으로 ’너는 피로써 살아야 돼.‘라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반대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 피로 살고 싶어서 믿는 게 아니냐.’고 묻죠. 그러면 우리는 ‘No, 노, 절대로 그게 아니야, 옛날에는 그랬었는데 그게 신앙이 아닌 걸 이제 알았어. 그게 아니고 ’요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저러면 천국 갑니까?‘라고 시도한 적이 있었었는데 그게 신앙이 아니고 사단의 역사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말씀으로 주께서는 자기 피로 우리로 하여금 피를 믿는 사람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미친다. 정말.ㅎ

그러면 거기서 쓰여 지는 게 뭐냐 하면, 이렇게 창세전에 이미 이름이 기록된 것을 믿어지는 순간부터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전에는 사단으로부터 왜곡된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 중심이었잖아요. 지금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중심, 또는 예수님 죽으심 중심으로 보니까 ‘아! 나는 구원받았는데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구나.’가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은 ‘나는 요렇게 해서 구원받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안 할까?’라는 식은 절대로 이다? 아니다? 절대로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께서 주의 다 이루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를 창세전에 택하여 이제 나타나게 했고 저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구나.’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 하면서, ‘나는 그럼 누구란 말인가?’ ‘666이십니다.’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나는 144.000입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144.000이라는 게 성경 어디 있느냐?’라고 묻겠죠. ‘그건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기 때문에 내가 어디 있다고 말할 수가 없죠.’ 왜, 나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예는 이 예입니다. 참, 이런 예까지 꼭 동원돼야 하는가, 문제가 됩니다만, 이런 예까지 그림을 그려 설명합니다. 어느 별장에 휴가 갔습니다. 별장에 창이 크게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마루에 거기에 누워있습니다. 보름달이 떴는데 보름달이 창가를 통해서 마루에 영창이 비칩니다. 달이 이동하면 영창이 같이 이동하면서 누운 자리에 비치죠. 이 영창이 ‘말씀’이죠. 나는 죽어있었는데 뭔가 144.000이 걸치는 거예요. 죽었는데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된 거예요. 이것이 우리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뭐로 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되게 바빠요. 우리는 예수님보다 아무 할 것이 없어요. 녹취 해봐야 끝나고 나면 할 게 없는데...ㅎ 우리는 할 게 없어요. 그냥 돈만 벌면 돼요. 돈만 벌고 주님하고 싸우고 가위질 하다가 손도 자르고..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은 되게 바빠요. 뭘 드러내시기 위해서? 666을 드러내기 위해서, 144,000으로 하여금 감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분주하게 온 천지를 다 동원시켜서 분주하게 날씨까지 더웠다가 비가 500미리 왔다가 굉장히 바빠요. 축구는 3대0으로 지게 만들었다가 온갖 것으로 분주하게 바빠요. 말씀의 그림자가 이렇게 비취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능으로 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신으로 된 거잖아요.

그래서 스가랴에 보면 완성된 성전이 있으면 나머지는 뭘 한다고요? 하나님, 예수님 바깥의 것들, 예수 안에서 예수 속성이 없는 것들은 다 내쫓는 그 작업을 필연적으로 말씀이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발주하고 선점하고 다 해요. 다 하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 음란한 바벨론아,’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그 듣는 사람은 황당하죠.  나쁜 짓한 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해온 무역인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있는 666입장, 144.000입장에서는 그게 뭐라고요? 이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음란한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성경 해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성경대로만 적용돼야 돼요. 그걸 일치시키려고 우리가 노력하면 이것은 안 돼요. 왜냐 하면 그럼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뭡니까? 살아있는 내가 납득이 되는 해석을 내가 갖고 싶어서 그걸 갖고 마치 구원된 거라고 확인에 나서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어떤 특별한 해석을 쥐고 있음으로써 그 쥐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원받게 되면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나는 팔팔 살아있는 셈이 돼요. 그것은 내가 이해해서 구원받는 식이 돼요. 사람들은 자꾸 이해를 하려고하면 그것도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보통 땅에 있는 짐승을 뭐라 하느냐 하면 어린양의 짐승, 종교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맞죠. 그 말이 맞는 이유가 현재 입장에서 맞는 게 아니고 구약입장에서 맞아요. 구약에 있는 여호와 믿는 모든 종교는 멸망당했으니까 뭡니까? 바로 여호와를 흉내 내는, 멸망당한 유대와 이스라엘이 땅에서 선지자를 동원시켜서, 바알만 우상이 아닙니다. 여호와 믿는 그것도 우상이었습니다.ㅎ 그래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있어 온 겁니다. 그들은 창조, 또는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나선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을 공격하던 누구였습니까? 사울 왕이 이 짓했잖아요. 땅에 있는 여호와 섬긴다고 하다가 여호와께 당했잖아요. 이상하게 그 사람은 다윗을 미워한 것뿐인데 성경은 오버되게 해석을 해 버립니다. 악신이 임해서 사울은 다윗을 창으로 박으려 했다. 그러면 사울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왜 던지려 했어요?’ ‘아, 던지고 싶데요.’ 그걸 뭐와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악신과 연결 안 시킨다 말이죠.

지금 안 믿는 사람 대다수를 보면 사단과 연결시키지 않아요. 왜, 사단과 연결시키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모두가 사단이기 때문에 연결 안 시켜도 가만 놔둬도 모두가 사단의 일 이예요. 왜, 사단은 영적 매개물이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늘 함께 있는 거예요. 평소에 다만 우리가 사단이라 아는 것은 바로 성령이 역사할 때 내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구원받은 것을 알 때 뭔가 행하려고 시도한 모든 것이 뭐가 돼요? 바로 내 행위를 내가 안 죽는 존재로 내가 펄펄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 순간 그것은 사단의 유혹이 되고 사단의 역사가 되는 거죠.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그리고 베드로가 방금 신앙생활 고백해 놓고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럴 때 누가 오버했습니까? 베드로가 오버했습니까? 예수님이 오버했습니까? 예수님이 오버한 거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누가 놀랐겠어요? 베드로가 놀라서 ‘주여, 왜 이러십니까? 뭐 잘못 잡쉈습니까? 저 보세요. 저 베드로예요.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왜 오버하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 이루어졌기에 주께서는 우리보고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보다 더 바빠요. 왜, 우리를 가지고 매개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같은 죄인의 괴수도 봐라, 이렇게 구원 되잖아.‘라고 것을 누구 앞에서? 사단의 종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서 우리를 144,000으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세상의 666없이는 우리는 밥도 못 먹고 살죠.ㅎ 우리는 불신자 아니면 밥도 못 먹습니다. 불신자 아니면 우리는 어디 택시도 못 잡아요. 운영도 안 됩니다. 전부 다 666이 도와줘서 이만큼 밥 먹고 사는 겁니다. 다 마귀가 도와줘서 사는 거예요. 우리는 널름널름 주의 주신 은혜로 알고 늘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이기려고 한다는 자체가 문제죠. 이미 자체가 완성인데, 죄인 중에 괴수된 자체가 완성이라니까요. 죄인 된 괴수 된 그 자체가 우리 몸을 덮고 있는 영창 이예요. 이것이 하나의 달빛 이예요. 말씀의 그림자라니까요. ‘니는 죄인이야.’ 엑스레이 안 찍어 봐도 알아요. 신나게 죄인 되고 신나게 구원되고 누가 부지런 떨어서? 우리는 모르는데 우리는 게으른데 누가 부지런 떱니까? 주님이 쉬지 않고 죄인 되게 만들어서 저 같은 골 때리는 인간도 내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죠.

그 다음에 14장 봅시다. 제가 강의해도 정말 어려워요.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있는데” 왜 표현을 예수님이라 안하고 어린양이라 했습니까? 어린양이라는 것이 뭐와 관련돼 있느냐 하면 출애굽기와 관련돼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출애굽기를 뭐로 봤느냐 하면 잡아 당겨서 역사 속에 발생된 묵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온 사람들이 홍해 건너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건널 수 없는 것을 어린양을 앞장세워서 노래를 부르면서 건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홍해에서는 애굽 땅에서 광야로 수평적으로 건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디로 건넙니까? 지상에서 어디로 건너요? 지상에서 천상으로 건너가죠? 지상은 무슨 세계고? 죽음의 세계죠. 그래서 홍해바다를 죽음의 바다인 것처럼 요한계시록에선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는 걸 뭘 보고 압니까? 사람들은 바쁘게 차 몰고 있는데, 죽기는 왜 죽어요? 다 숨 쉬고 있는데, 이게 죽음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바로 어린양 되시는 분이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 이 땅을 거쳐 지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역사적 세계지만 묵시적 해석 안에 포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역사적 해석으로 방치하지 않고 그걸 놔두지 않고 그걸 뭐로 흡수 통합했다? 묵시적 안목으로 통합시켜 버렸는데 묵시적 안목에 통합된 자를,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뭐다? 성령 받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144.000할 때는 반드시 뭡니까? 어린양을 앞에 둬야 돼요. 어린양을 따르는 144.000, 그럼 어린양을 따른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뭐다? 바로 애굽 땅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평소에 뭔가 인지하는 그 사람이 144.000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 아니고 666이 되는 거죠. 666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왜, 그거밖에 모르니까. 세상밖에 모르니까.

그래서 666 안에는 종교가 발달돼 있어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거기서 그들은 ‘내가 죽지 않고 더 살 수 있는 비법들을 교회에서 목사한테 배우고 있는 중이예요. '내가 죽으면 안 돼, 너는 벌 받으면 안 돼,  너는 지옥 가면 안 돼,’ 이것을 교회 와서 배운 자들 이예요. 이건 누구중심? 자기중심이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 예수님이 나를 앞장 세워서 일하고 있다는 완전히 주객이 전도돼 있어요. 주님의 것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성경 말씀이 그렇다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어제 축구 하는데 한국 팀이 3대0으로 졌잖아요. 지금 뒤늦게 기도하면 5대 3으로 뒤바뀝니까? 안 달라지죠. 성경 말씀이 그런 거예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기도한다고 내가 지옥 가지는 않잖아요.

사도바울이 믿은 게 뭐예요? 내가 지옥 갈지라도 유대인을 대신 하겠다는 말은 무슨 자신감에서 나온 겁니까? 구원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구원받고 지옥 가는 것이. 주께서 결정한 그것을 우리 유대인들도 우리 같은 동족도 같이 가기를 원해서 뭐라고 옹호하느냐 하면, ‘그래 내 지옥 가 줄게, 내가 지옥 가는 대신 너 천국 가라.’ 그만한 자신감으로 나온 겁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그렇게 하세요. ‘나 지옥 간다.ㅎ 나 지옥 갈 테니까 너 천국 가라.’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천국의 무늬, 팬티에 꽃무늬 팬티 있죠? 우리는 하나의 천이라면 거기에 아롱 새겨진 천국의 무늬예요. 죽은 숫자화 돼서 죽은 어린양을 따르는 144.000으로 말씀으로 무늬가 돼서 숫자화 된.

다시 해 봅시다. 숫자라 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숫자는 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숫자는 그리스도의 기능만 인정하고 숫자화 된 우리를 뭐로 본다? 죽음으로 간주해서 하나의 1로 간주할 때는 0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뭐가 됐습니까? 1이 아니고 죽었으니까 없어졌으니까 0으로 보죠. 0이니까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돼요? 다 0이 돼요. 0이 되는데 묵시적으로 144.000이라는 기능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144.000으로 살게 되죠. 동시에 세상 사람들은 뭐가 돼요? 그들은 666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모든 것은 성경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했던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으로 구원받는데도 불구하고 왜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믿지 않는 자, 간음한 자, 살인한 자, 그런 자들은 유황불에 들어간다고 왜 그렇게 유교적인 면을 언급하는 말이 구태여 들어갔느냐,’ 라고 제가 질문을 했죠? 그것을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는 일치하기가 불가능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방금 0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면 설명이 돼요. 뭐냐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다시 말해서 지옥 가는 사람들은 믿고 싶어도 믿지 않는 자 되게 하시는 그 영창에 달그림자가 거기에 비췰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께서 그러니까 홍수 나서 물이 벌건 게 아니라 푸른 바다에 가도 물이 벌건 물이 되는 것처럼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들은 믿지 않는 자, 두려워하는 자, 간음한 자, 살인한 자가 되게 만들어버리는 주님의 놀라운 솜씨다 이 말이죠. 왜,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완료기 때문에, 그 완료에서 비켜 갈 피조물은 없습니다. ‘너는 마귀 돼’ 하면 마귀 돼야 돼요. ‘너는 구원 받아.’ 하면 구원 돼야 돼요. ‘너는 나에게 물 떠준 소자야.’ 하면 소자인줄 알아야 되고,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물 주지 않았다.’ 하시면 물주지 않는 사람 만들어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그것이 감사함으로 받아져야 돼요. 집사님처럼. 이러한 생각이 늘 감사함으로,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안 믿어지죠. 왜, 나한테 행함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 이 말이죠.

끝으로 어려운 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유가 뭐냐 하면 선택한 것을 선택하는 행위가 자유예요. 분명히 이거는 자유가 아니죠? 이건,ㅎ그렇죠? '너 뭐든지 먹어라.‘ 하고 3가지 내놓고 ’뭐든지 먹어라‘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결국 3가지 중에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선택된 것을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해 버려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뭡니까? 자기 자유의지예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죽일 수밖에 없는 성질이 들어있어서 이건 자기가 사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단이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성질이 들어와서 결국 선택한 폭이 예수를 죽이는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한다? 그것은 니가 자유의지를 맘껏 행사한 걸로 본 겁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죠. 자유의지가 있죠. 선택된 것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하고 이해가 안 되잖아요. 왜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나는 행할 수 있다.’라는 이 전체가 방금 ‘선택된 자만 구원받는다.‘라는 앞에서 이 전체가 뭐가 돼요? 이것이 죄가 되고 죽음이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모든 인간을 뭐로 죽인다? 다 죽음 속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죽음 속에다 집어넣으려면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죽음 속에 집어넣어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처음 이 땅을 시작한 것이 죽음부터 시작했다는 거예요. ‘아니 처음에는 천지 창조가 나오잖아요?’ 아니에요. 묵시적 세계에서는 창세전에 이미 죽기로 작정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처음 이예요. 천지 창조는 거기서부터 시작 이예요. 죽음에 다 집어넣기 위해서 죽음에다 다 집어넣고 거기서 피어나오는 죄일 수밖에 없는 개념들이 튀어나오게 된 겁니다. 사단의 도움으로. 마귀의 도움으로 튀어나와서 그 모든 것을 다시 뭐로 집어넣는다? 죽음에서 다시 죽음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죽음에서 뭐가 나왔다? 창조가 나와서 그걸 다시 죽음으로 집어넣죠. 그러면 이 노선은 역사적 노선이잖아요. 그러면 묵시 노선은 뭡니까? 죽음에서 창조가 되죠. 요 창조하고 요 창조하고 다르죠. 요 창조는 어디 안에서? 천국을 이야기하고, 죽음에서 죽음이 나오는 이건 뭐가 됩니까? 이건 지옥이 되는 겁니다. 죽은 데서 창조가 되고, 죽은데서 죽음이 되고.

그렇다면 주님께서 모든 무덤에 있는 자를 다 살려내고 그 다음에 악을 행한 자는 악의 심판을 또 선한 자는 천국의 보상을, 생명을 주는 식으로 심판을 해버리는 것은 바로 주님이 생각하는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뭐한다? 전부 다 발로 차버리고 배제하는 식으로 창조를 이뤄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이 이게 중심이 돼 버려요. 그럼 바깥에 뭐가 있습니까? 예수 바깥에는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이 둘을 합해서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해주시면 되겠다는 게 주님의 생각입니다. 왜, 주님의 관심사는 예수 안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제발 예수 바깥에서 따로 모아서 ‘하나 되겠다.’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 돼서 나오는 철학적인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주님께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복음에 도움이 안 돼요.

사도바울이 철학자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 한 사람이죠. 제발 고 한계점, 고 한계에서 머물러 줘야 돼요. 자꾸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 예수님은 누가 만들었나,‘ 이런 식이 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성경 전체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지 예수 바깥에까지 다 합쳐서 하나님 중심이라고 마치 통합시켜서 보는 것이 세상을 넓게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뭐냐 하면 마귀가 그것을 희석시켜요. 뭘 희석시키기 위해서, 뭘 삭제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예수 중심으로 보는 그것을 삭제시켜서 신 중심으로, 처음에 원했던 내가 여기 있음에서의 신, 자꾸 신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예수님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악마의 본성이 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스톱!!! 해서 우리는 예수님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되지, 더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새롭게 창세전에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니 우리는 그냥 놀랄 뿐입니다. 내가 구원 받고 싶어서 구원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와 주셔서 천지 만물의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라는 걸 알려주셨사오니 이러한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주께서 예수님의 피를 흘려주심을 우리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