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17강-묵시의 그릇 1106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31. 08:06

가락교회110616요한계시록12장-(묵시의 그릇)-17강a-(이 근호 목사)
제 17강a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부터 7절부터이지만 12장 처음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용어들이 밑에 점선으로 된 구조에 감겨있다. 구조, 일종의 그릇인데 여기에 담겨있고 여기에 나오는 용어, 사건들은 이 그릇에서 나오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뱀 나오죠. 열 두별 나오죠. 이런 용어들이 여기에 개입됩니다. 원래 이 역사 자연세계에는 별이 있습니다. 별이 열 두 개만 되겠습니까? 수천 억 개가 더 되는데, 이 별이 이 구조상 감긴 묵시적 구조인데 역사를 초월한 어떤 체계에 어떤 시스템에 ?復다니?자연에 있는 별도 묵시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돼야 되는 겁니다.

항상 어떤 보이지 않는 구조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면, 담겨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뱀, 뱀이야 기다란 짐승 파충류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는 옛 뱀이라 돼 있다 말이죠. 그럼 늙은 뱀입니까? 이것을 살모사, 독사 그 정도라고 이해하신다면 이것은 묵시적 그릇에 안 담겨 있을 때, 우리가 나 여기 인간 있고 자연세계 나무 있고 산 있고 풀 있고, 이랬을 때는 ‘어, 저 뱀 가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 있고 뱀 있고 별 있고 자연 세계만 전부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묵시세계가(천국세계) 실제로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부터는 이 묵시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세계가 배치돼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 이제 약간 감이 오죠?

요한계시록에서 지금 설명을 해야 되니까 ‘여러분, 넘어갑시다. 넘어갑시다.’ 이러면 곤란하다 말이죠. 이 옛 뱀이 왜 등장하며 여자의 머리에 왜 열 두별이라 있는가, 별 하나 뒤집어 써 보세요. 얼마나 무거운지, 별 무겁습니다. 지구도 무거운데 별을 더 무겁죠. 태양이 얼마나 무겁다고요. 그 엄청난 무게를 어떻게 견딥니까? 이러한 보이지 않는 묵시라는 그릇을 배제해 버리면 설명이 될까요? 안 될까요? 설명이 되질 않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간, 아들 그리고 여자, 여자와 아들은 인간으로 등장하죠. 둘 다 인간이니까. 이것이 묵시라는 그릇이 없을 때에는 그냥 아들은 여자가 낳은 아들로 끝나는 겁니다. 저 구로구에 어떤 평범한 빌라에 사는 어떤 아줌마가 아들을 낳은, 그것도 여자가 아들 낳은 거죠. 하지만 묵시 그릇에 담긴 순간, 이 여자는 보이지 않는 복음적인 진수를 담아서 여인이 돼야 되고 이 아들은 그냥 보통 남자 아들이 아니고 묵시적인 사건을 흠뻑 담아서 아들이어야 되고 그리고 여기에 있는 뱀은 그냥 산에 기어가는 불쌍한 짐승이 아니라 이러한 세 각의 삼각구조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새로운 피조물인 거예요.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역할극, 하나의 배우고 사실 그 배후에 문자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존재하는, 문자적으로 표현이 안 되면서도 분명히 있는 그것을 알고 있는 자연세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세계의 문자로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 안에 담겨있는 자연세계, 우리가 사는 역사세계, 이것도 설명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 이것을 담는 보이지 않는 그릇이라는 묵시세계의 구조, 시스템, 이 체계, 이것도 이야기해야 되고,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해야 되는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해줘야 이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표현 하려는 의미를 다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아주 간편한 기초문제부터 출발해 들어가서 이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이니까 질문 답변하면서 해 봅시다. 아시는 이야기니까. ①번, 예수님은 누굴 소개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소개하고 인간을 소개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다. 맞죠? 중보자니까. 예수님께서 그냥 하나님만 소개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이유는 없죠.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죠? 알려 드릴게요. 받아 적으세요.’ 이러면 십자가 질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분, 산상 설교 해 드릴까요? 설교 합니다. 설교 끝났습니다. 난 하늘나라 갑니다.’ 이러면 십자가 질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누구를 상징해야 돼요? 인간을 상징해야 돼요. 하나님 쪽으로 소개하면서 그것이 인간을 소개되는 겁니다.

②번, 그러면 인간은 뭘 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 이야기하고 자기를 둘러 싼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살아야 되니까. 자연이라는 것은 주로 땅이 되겠죠. 땅에서 올라오는 어떤 시련, 이런 것도 되겠지만 인간은 창세기부터 보면 인간은 자연에서 땅에서 이 대지에서 ‘ 어떻게 살고’하고 그리고 가인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 뭘 드리죠? 창세기 4장에 보면 제사를 드리죠?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start,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 이야기하고 자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릿摸?①번하고 ②번하고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 인간 생각하는데 이 자리, 설명하는 이 자리에 누가 턱하니 들어앉아 있습니까? 인간이 들어앉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두 개를 인간 쪽에서 겹쳐버리면 ②면이 주가 되어서 ①번을 덮쳐버리면 어떤 현상이 보이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쪽에다 예수님을 이렇게 집어넣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다. 이렇게 집어넣어버리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수纛?평소에 지가 자연을 설명하고자 이해했던 동일한 이해로써 하나님과 예수님 쪽을 같이 더불어 설명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예수님을 ①로 보고, 인간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②로 본다면 이 ①과 ②가 같겠습니까? 틀리겠습니까? 틀리죠. ①번 여기는 예수님 중심이지만 ②번의 예수님은 누구 중심입니까?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하나님 상에 추가적으로 정보하나, 전에는 성부 하나님만 알았는데 성자 하나님까지 추가적으로 더 보탠다면 성령까지 추가적으로 보태는 거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봤던 인식의 틀, 이 틀에 대해서 변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변동이 없는 거예요.

평소에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께 빕니다. ‘하나님이여, 사는 게 힘드니까 좀 도와주소서. 축복을 주셔서 살기 더 편하게 해 달라.’ 라고 생각했던 틀에 만약에 여기 예수님이 등장해버리면 결국 그 예수님은 누굴 먹여 살리느냐 하면, 인간,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나의 추가된 정보, 추가된 하늘의 비밀이 하나 추가된 것  뿐이죠. 결국은 이것은 출발점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이 들어오든, 예수님이 들어오든, 마귀가 들어오든, 뭐가 들어와도 역시 돌아오는 것은 ‘나 이렇게 하면 잘살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이러면 난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저 나, 나, 자기밖에 모르는 그 틀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죠?

이게 ②번이 ①번을 겹쳤을 때 경우입니다. ②번이 ①번을 겹쳤을 경우를 잘 보여주는 경우가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예수 일어나, 당신 뭐야? 가만히 있어봐, 우리가 모세 율법을 연구하는데 당신은 우리가 가르치는 모세 율법대로 안 가르쳤으니까 당신은 되도 않은 인간이야. 저리가.’ 그게 바로 자기가 출발점으로 생각했던 그 틀을, 시스템을 절대로 손상이 가지 않고 유지하는 가운데 거기에 예수님이 보탬이 될까 했다가 안 되니까 빼버리는 겁니다. 그 틀은 유지되고 있죠.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③번 해 봅시다. 말, 말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말이 이야기할 때 말이 자체적으로 이야기할 때 여기에 사회가 있고 여기 개인이 있다 합시다. 이건 잘 못 듣던 이야기니까 그냥 묻지 말고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 가서 지우개를 달라고 하는 것을 한국말로 ‘지우개 주세요.’ 하면 못 알아듣죠? 그러면 중국말도 못하면 이걸 가져가야 하는데, ‘지우개, 지우개’ 아무리 비슷하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죠? 그러면 뭘 해야 되요? 지우개가 중국말로 뭐라 하는지 배워야겠죠. 그러면 결국 개인에게 자기가 우선이 아니고 이미 중국 사회가 통용되고 있는 말에 자기가 고개 숙이고 들어가야 될 게 아닙니까? 그래야 되겠죠.

부모가 애한테 말을 가르치는 이유는 애가 말을 못하면 남한테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아무리 개인이 우선이라 하지만 개인보다 그 사회가 만들어주는 말하는 질서,  그 말하는 질서에 태어나면서부터 종속돼야 됩니다. 이 ③번을 ②번에다 하나 겹쳐 보는 겁니다. 말을 집어넣어버려요.

그렇다면 아까 인간은 자연과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고 이미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하나님 앞에 자기도 고개 숙이고 ‘예~ 여호와 믿습니다.’ 하고 들어가야 된다 말이죠.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까? 어디 사적인 감정이 있습니까? 주님한테 돈 빌려주고 돈 떼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죠?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여호와, 여호와, 여호와에 누가 안 맞더라? 예수그리스도의 모세 율법 해석이 전혀 안 맞으니까 우리 사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신 죽어줘.‘ 라고 죽인 거예요.

왜 제기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냈느냐 하면 바로 지금 용이라든지 여? 아들이 개인이 아니고 뭔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그런 특수한 묵시적 용어가 되는 겁니다. 뭐 아들에게 속 했니, 안 속 했니, 이걸 묻는 거지,  아들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어린양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항상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은 무가치한 겁니다. 개인은 무가치!! 개인의 행복 이런 건 무가치한 겁니다. 어디 종속돼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뱀은 뭡니까? 이런 말이 재밌어요. 인간은 무가치하죠. 성경에 보면 어디에 속했다? 하늘나라에 어린양 있으니까 인간이 있죠. 그런데 이 인간을 가운데 두고 ‘아니야, 못 가져가.’ 라고 하는 또 다른 어린양이 지배한다는 인간 말고 또 다른 비밀이 있어요. 비밀이 뭐냐 하면 뱀이 지배한다는 인간이 있는 겁니다. 뱀이 악마 아닙니까? 결국 인간은 어린양이나 뱀이나, 뱀이나 어린양이나 인간은 개인적인 가치는 찾을 수가 없어요. 뱀에게 속하든지 어린양에게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용어 하나, 하나가 사적인 표현으로 가치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고 이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어디에 갇혀있는 식인데 영적인 두 어른, 자기 영적인 두 어른의 싸움판에 인간이 말려든 거예요. 싸움판에 인간이 말려든 것인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②번을 책정해요. ②번에서는 뭐가 모순됩니까? ‘나는 나다. 누구야? 나를 지배하는 게. 없어. 대통령도 겁 안나. 나는 나뿐이야. 하고 싶으면 맘대로 해.’라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아까 현대사는 언어구조에 이거만 걸려들어도 이 사람은 ‘아, 사회라는 것이 만만치 않구나. 사회가 내가 착하고 싶어도 같이 집단적으로 악을 저지르게 되면 이것은 연약한 존재로서 휩쓸려서 같이 악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그게 바로 이 사회의 변화의 모습인 겁니다.

바르게 안 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바르게 살고 싶지만 처자식이 입을 벌리고 돈을 달라 할 때, 자기는 불의한 뇌물을 받아 챙겨서 자기애들 과외비라도 보태는 것이 가장된 도리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심중에 갈등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나의 양심은 집사로서 어떤 신앙적인...’ 이러다가 이것도 여러 번 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요.ㅎ 뭐 아마 탈이 없다 이 말이죠. 전세방이 갑자기 올랐는데 집은 비워 달라 하는데, 오도 갈 데가 없는데 갑자기 어디서 불의한 뇌물이 들어왔다.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께서 전세 옮기라고 이렇게 주셨구나.‘ 이렇게 어물쩍하게 해석하고 그 뇌물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피해본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버리죠. 이 말은 묵시의 그릇에 담겨버리면 인간은 뱀의 지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건 죄 짓는다 할 것도 없어요. 그걸 묻는 게 나빠요. 흐물흐물 지가 죄 짓고 안 짓고 하는 자유가 박탈됐는데, 자유가 박탈된 사람보고 ’ 바르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이렇게 묻는 그쪽이 나쁜 겁니다. 그건 우리에게 해당된 사항이 아니란 말이죠.

마치 유치원 애 보고 ‘성이 뭐야?’ ‘김 씨입니다.’ ‘박 씨로 바꿔.’ 그게 애한테 할 질문이 아니죠. 애는 뭐 김 씨가 좋아서 하겠어요. 박 씨가 싫고 김 씨가 좋다 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 소속돼 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냐 하면 바로 뱀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목사님, 왜 그게 뱀의 나라입니까? 그건 어린양 때문에 그래요. 이제부터 어려워요. 예수님이 아니고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앞에 뭐가 붙는다 했습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인간 속에 왔다는 것은 우리 위치가 뭐다? 예수님을 죽이겠다. 죽이겠다. 죽이겠다.‘ 하는 세력이 어느새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우리는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몰랐죠. 자기가 예수님한테 뭐 대접하고 잘하면 그걸로 구원 되는 줄 알았죠. 예수님한테 잘 대접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대접 해봤자 용에서, 뱀에서 그 권세에서 못 빠져 나가요. 이 전체 구조라는 그림을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 그림을 제가 그려보겠습니다.

굉장히 복잡한데, 나중에 ①, ②, ③번 다시 하겠습니다. 비슷한 이야긴데요. 어려워서 제가 물을게요. 첫 번째, 내가 여기 있다 인간이 여기 있다. 이것은 뱀이고 악마고 이것은 어린양, 예수님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판단하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싫어. 예수님은 좋아.’ 이렇게 선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두 번째 경우는 인간이 있? 뱀이 있다. 이건 어린양이다. 라고 한 이 전체가 뱀한테, 용한테 갇혀있는 경우, 우리가 뱀에게 갇혀 있는 가운데서 우리는 뱀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 선을 가지고 ‘나는 뱀이 싫어. 예수님이 좋아.’라고 했을 경우에 이것이 옳은 관점이냐 하는 이야깁니다. 이 안에 ①번 관점은 이것은 옳은 관점이 아니죠.

그러면 뭘 방해해야 되요? ‘나는 뱀이 싫어. 사단이 싫어. 예수님이 좋아.’라고 하는 그것조차도 어디에 갇혀 있다? 뱀이 시켜서 하는 경우를 생각해야 됩니다. 뱀이 시켜서 ‘나는 사단이 싫어. 예수님이 좋아’할 경우에 이게 뭐냐, ‘사적 구원 욕구’라 합니다. 이거 한국교회 아닙니까? ‘여러분, 사단 믿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게 뱀이 시켰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지금도 뱀이 시켜서 하고 있고,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자유의지를 제대로 활용하면 뱀을 선택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택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 악마가 뒤에서 사주하고 있다는 말이죠.

‘내가 선택할 거야.’라고 하는 것을 뱀이 둘러쳤다는 이것을 바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진 사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뱀이라는 정체도 모르게 돼 있고 뱀이라는 껍데기가 날아가 버리면 인간 남고 뱀 남고 예수님(메시야) 남아요. ‘그럼 나는 메시야 오면 메시야 선택하고 난 악마 선택 안 할 거야. 나는 구원 받을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말이죠. 이것이 옳은 줄 알았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올 때 ‘여러분, 나는 메시야인데 어린양입니다. 여러분, 저를 선택해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까? 아니면 ‘너희들이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이 뱀한테 묶여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해도 뱀한테 묶여 있다고 하니까 여기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진짜 뱀에게 묶여 있는 자기 본색을 드러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내가 누구한테, 마귀한테 갇힌 채 나는 종교 생활 하고 있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성령이 와야 내가 시도하는 모든 헌금 기도와 전도와 예배참석과 성경 공부와 어떤 짓을 해도 이것이 뱀의 사주에 의해서 뱀이 뒤에서 가르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몰라요.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뭡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날마다 우리를 책망하시는 겁니다. 날마다 책망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선택하고 선택하면 책망하고 그러면 그거 말고 딴 게 있습니까? 하고 딴 거 선택하면 또 책망하고 이래도 책망, 저래도 책망, 주일 낮 설교처럼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고 많이 아는 사람은 안다고 맞고 모른다 하면 모른다고 맞고, 이래도 얻어터지고 저래도 얻어터지고, 우리 인기는 날아가 버렸어요. 인기가 없어요.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이미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이미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러한 구조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성경 해석을 다시 하자 말이죠. 다시 하게 되면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의 대화 소통이 안 되는가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었을 때에 왜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핍박할 수밖에 없었는가도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고 난 뒤에 그 전체를 한자로 이야기 했어요. 우리말로 하면 ‘육’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육은 절대로 육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육은 육이요.’(요3:6) 육에서 난 것은 계속 육이어야 돼요. 아니 죽을 때까지 예수 믿고 성령 받아도 계속 육이어야 돼요. 어떤 사람은 성령 받으면 육이 영이 된다는데 영이 안 돼요. 계속 육으로 계속 가야 돼요. 성령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잡고 뒤흔들 수 있는 그런 자격자가 못 돼요.

주님께서는 이 구조 전체를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다뤄버립니다. 이걸 두자로 ‘승리’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집안 식구가 13명이었어요. 삼촌 고모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어릴 때 삼촌, 고모가 많으니까 뭐가 좋으냐 하면 아침에 일어나면 재미나게 놀았는데, 겨울에 누가 게을러서 안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장난치기 위해서 자는 위에 엎어 오르면 다른 삼촌이 또 그 위를 뛰어 와서 엎어 버리고 또 엎어버립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애는 죽겠다고 ‘아야’ 하죠. 이게 아주 재밌었어요. 원래 애들 놀 때 그러잖아요. 덮치고, 덮치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맨 위에 있는 것이 다 이루심 안에서 승리한 거예요. 승리가 승리로 보여주려면 여기 뭐가 있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는가? 증거로서  이것이 자료로 동원돼야 됩니다.

왜 예수님만 승리해야 되고 왜 그것이 내 행함으로 왜 승리가 안 되느냐를 우리는 여기에 주님의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패배자로 여기에 자료로 동원돼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깔려있는 얘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동시에 자기 처지에 있는 제일 위에 있는 형, 제일 위에 삼촌을 바라보겠죠.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은 어디에 깔려 있으면 자기를 깔고 뭉개는 그 올라온 세력을 누가 깔고 뭉갠다? 주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이겼느니라.’ 주의 승리를 여기서 또 다시 발견하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 다음에 뭘 봅니까? ‘찬송하리로다.’ 누구 때문에?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의인은 정죄함이 없나니,’

이런 구조가 되려면 간단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런 구조가 되려면 순서가 있어야 돼요. ①번 ‘인간은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결정한다.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것을 어렵지만 다시 살펴봅시다. 인간은 ‘난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거야.‘ 할 때 인간에게 두 가지가 동원 되는데 하나는 자연을 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본다 했죠. 여기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율법, 선지서 신약, 신구약 전체. 인간은 신구약 전체, 또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잘 맞춰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시키는 대로 하박국에 나오는 ’성전에서는 잠잠할 지어다.‘하면 교회 가서 까불다가도 파이프오르간 치면 조용한 것처럼, 흉내를 내는 거예요. 

‘나는 기어이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거야,’ 라고 시도를 하겠죠. 그런데 아까 제가 첫 번째 했던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도 생각하고 자연도 생각한다 했죠. 그러면 자연은 뭡니까? 자연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자기의 양심 같은 것, 자기 집에 개한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료를 빠지지 않고 주는 착한 것,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의인이 되기 위해서 주변의 자연을 통해서 내가 착한 것을 다하고 또는 불교에서는 물고기를 방생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떡을 나눠 주는 것, 하여튼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착한 일을 해 나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면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실천력을 다 동원시키는 거예요. ‘주여 이 정도하면 근처에 갔습니까? 이 정도 하면 됐습니까?’ 기도하라니까 ‘ 두시간요? 안돼요? 세 시간 해 볼까요?’ 자꾸 그 말씀에 맞춰 가려고 하는 거예요. 사랑하라 하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게 뭘까요? 내가 그 집 이사 올 때 도와준 그 정도? 그러면 그 이웃집 아저씨가 간 안 좋으면 내가 간 이식? 아니, 그거 말고 또 뭐?’ 자꾸 임의로 맞춰가려는 거예요.

출발점이 뭡니까? 나죠.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라 말이죠. 이 본성을 그대로 어디다 집어넣는다? 여기 ①번에다 집어넣는다 말입니다.

두 번째 여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했죠. 그 예수님을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죠? 이 하나님의 계시가 전체에 담겨버리면 예수님이 보는 인간과 하나님이 고대로 오면,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걸 곡해하고 왜곡 하겠죠. 그럼 여기서 뭐가 일어납니까? 대 충돌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그 충돌이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보면 이게 하늘의 전쟁에 연장되는 전쟁이 되는 거예요. 충돌이 일어나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말하기를 ‘인간아, 지금 영적 전쟁한다.’ 하니까 인간들을 그걸 못 알아듣고, ‘내가 예수님을 잘 섬긴다 이 말입니다.’ ‘아니야 니 배후에는 악마가 있기 때문에 니가 그런 식으로 니 행함으로써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려도 한다.’ 그럼 인간은 ‘내 배후에는 없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자꾸 내 배후에 악마가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까?’ 그건 영, 지, 주, 의, 자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그렇게 나오겠죠.ㅎ

그러한 마주침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통해서 이미 실시를 했었어요. 오늘도 글을 올렸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이단의 무리라고 단정 지은 이유가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그것 때문이죠? 한번 봅시다. 여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했죠. 이 기준에 누가 걸려들었어요? 예수님이 걸려들었죠.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으로 봤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율법의 저촉을 받는 걸로 봤죠. 그런데 예수님은 나름대로 인간과 하나님을 보는 게 있죠. 예수님 자신이 율법이죠.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만드신 분이고 율법을 줬고 율법을 완성한 분이 본인 자신인데 이미 인간들이 율법은 이러이러 해야 율법이라고 나름대로 확정된 것이 있다 말이죠. 그 확정된 해석법이 뭐냐 하면 내가 행복하고 내가 결정 내려서 나는 지옥은 안 가고 나는 천국 가겠다.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겠다.‘라는 게 이미 확정이 돼 있는 겁니다.

그게 바리새인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라 말이죠. 교회 나오는데 남의 집 아저씨가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옵니까? 누구 구원 받으려고 교회 나옵니까? 나 자신이잖아요. 그런데 나 하나 등장하면 바리새인 등장한 거예요. ‘주여 지키겠습니다. 말씀만 주시면 지키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니까요. ‘목사님, 말씀 하시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십일조, 안식일, 주일성수, 지킨다 말이죠. 그런데 안식일 개념, 십일조 개념, 주인공이 누굽니까? 우리가 거기에 예수님이 안 말려 들어가는 거예요. 안 말려 들어가니까 같은 말씀을 봐도 해석 차이가 달라지죠. 모든 말씀에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노아언약은 무지개 언약이죠. 무지개 때문에 노아 가족이 새 땅을 얻었습니까? 아니면 정결한 짐승을 잡아 피를 내어서 그래서 그들이 용서받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하늘에 무지개 떠서 구원 받은 게 아니죠. 무지개는 어떤 결과를 이야기하죠. 노아방주에서 건너 온 정결한 짐승이 너희들이 어릴 때부터 악했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묻지 않고 너희들 죄를 대신 씻어줬기 때문에 평화의 무지개가 피어난 거예요. 무지개 언약이란 것은 노아언약이지만 사실은 노아 속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 영(성령)이 들어 있죠. 그 예수님이 뭐 했습니까? 십자가 지신 거죠. 창세기 8장, 9장에 나오는 모든 말씀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들어있는 거예요.

그럼 바리새인들이 창세기 8장, 9장을 할 때 뭐를 끄집어 낼 수 있어야 됩니까? 거기서 십자가를 끄집어내야 바른 해석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해석은 누가 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 보기를 기다렸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죠. 그리고 변화 산에서 엘리야, 모세가 나타났죠.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이야기한 내용이 뭡니까? ‘주님이여, 말씀대로 언제 별세 하십니까?’ 지금 죽으심을 이야기 했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엘리야와 모세가 그런 식으로 율법을 해석할 때는 모세 행함, 엘리야 행함, 아브라함의 행함은 거기서 구원의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치가 없잖아요. 아브라함이 ‘제가 이렇게 행했습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믿었으니까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죠? 그렇잖아요.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야가 그 죄 씻어주려고 처참하게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 피 앞에서 감히 ‘나는 예수 믿었습니다.’ 차마 그 말을 끄집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 고유 권한이지,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믿어지는 게 믿음 아닙니까? 그러니까 믿음이란 안 믿어지니까 행함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노아언약이란 예수님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 잡아 피를 내었다. 그렇다면 노아언약에 무지개 핀 것은 결과에 불과하고 땅 밑에서 피 흘림이 있었다.  이미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노아언약이라는 율법, 그 말씀의 완성은 그것이 말씀을 구체화 시키는 실제 구체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주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시면서 엉터리 율법 해석을 갖고 있는 그 인간들 속에서 완성을 해내죠.

왜 그렇게 하느냐, 그냥 한 수 가르치면 되는데, ‘사람들 이리 오너라. 너희들 해석 잘못 됐어. 내가 해석 해줄게. 내가 율법의 완성자야.’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그들 손에 죽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깨달아?‘아, 알았습니다.’ 해서 구원 받는 문제가 아니고 인간으로 구원 못 받게 만드는 또 다른 예수님과 반대되는 세력이 있더란 말이죠. 그걸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늘에 전쟁이라고 한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전쟁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고 뱀이었다 말이죠. 옛 뱀이고 용이었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살든지, 브라질에 가든 필리핀에 가든 어느 장소에 가든 한 번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벗어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 뱀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그리고 뱀을 저주하는 주님의 말씀의 지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거예요.

한 번 물어 봅시다. ‘아버지’하고 ‘아버지 자리’하고 차이가 나요. 어떤 애가 ‘나 아빠 사랑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아빠는 자기 사랑하는 줄 알고 ‘허허, 지 엄마가 애는 잘 키워놨어. 역시 당신 훌륭해.’ 했는데 아빠가 술을 잡숫고 왔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 애가 ‘나 아빠 싫어.’ 그러면 그 애가 아빠를 사랑한 거예요? 아빠의 자리를 사랑한 거예요? 아빠의  자리를 사랑한 거예요. 아빠가 아빠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이야기하면 곤란한데...ㅎ 남편 구실을 못하면 그건 남편이 아니고 남자입니다. 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는 남자에 불과 합니다. 항상 아내는 남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남편 구실을 하는 그런 남자를 원해요. 그럼 그 아내는 남편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남편의 자리를 사랑한 거예요. 그렇다면 남편의 자리를 누가 일방적으로 정했어요? 여자가 지가 정한 거예요. 아휴, 답답해라. 여자 본인이 정한 거라니까요.

또 해 봅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연을 생각한다 했죠. 중심이 인간이죠? 그럼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뭡니까?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다울 때만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이 보기에 자연이 나에게 유익하고 자연이 옥토가 되고 자연이 비가 잘 내리고, 그럴 경우에만 복된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그 속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리와 자연의 자리에 전혀 엉뚱하게 주님께서 멀찍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 파고들어왔다는 말은 뭐가 틀렸다? 니가 생각하는 하나님 자리는 사실은 마귀의 자리를 하나님이라?생각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단으로 오신 거예요. 이단으로 왔고 멸망당했어요. 결국 예수님이 멸망당했다는 것은 멸망의 자리가 진짜 하나님의 자리인 겁니다. 멸망의 자리가!! 우리 손에 멸망당한 그 자리가 진짜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예요.  이걸 히브리서 13장에서 성문 밖에 나가서 만나라. 성문 밖에서 인간들이 ‘이 따위가 무슨 메시야야?’ 라고 메시야를 처단해버린 아예 쓰레기처럼 치워버린 그 자리가 진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계시의 자리고 기적의 자립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주여, 나는 십자가 앞에서 멸망 받아도 마땅한 인간이군요.’ 그걸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성령이 오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인간의 죄, 인간의 의, 인간의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자리고 그 인간의 자리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곡해된 자리, 주님에 대해서 곡해하고 메시야에 대해서 곡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하고 대자연에 대해서 곡해했던 이 모든 것을 곡해했던 자리, 우리는 대자연을 볼 때에 대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대자연은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몽둥이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힘들게 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빡빡한 살기 힘들게 하는 고문적인 기구에 해당하는 게 대자연인데 우리는 대자연을 통해서 자기의 유익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게 모든 것이 오해고 곡해인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뭐겠습니까? 한국교회 자체가 ‘여러분, 같이 멸망합시다.’ 이게 아니고 멸망의 자리가 십자가 죽는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라는 말을 안 하죠? 아니 어느 사람이 교회 오면서 ‘주여, 제가 왜 멸망해야 됩니까? 제가 멸망할 자리가 어딥니까?’ 그걸 찾아오는 사람 아니에요. ‘내가 평소에 아는 하나님은 착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착한 하나님을 본받아 나도 착해지면 나는 지옥 선택하지 않고 나는 분명히 천국 가는 사람으로 채택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시 주시면 그 계시는 나보고 더 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중요합니다. 줄 그어놔야 돼요.)주신 성경 말씀이다. 그렇다. 교회 와서 술 끊고 담배 끊어서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 돼 보겠다. 되었어. 그럼 주께서는 섭섭지 않게 천국 보내 줄 거야.’라는 그 일념으로 온 거예요. 목사님 시키시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목사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더욱 더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훌륭한 ‘나’가 되기 위해서 지금 내 상황보다도 더 훌륭해진 나를 사랑하고 싶어서 교회 온 거예요.

그렇다면 점점 더 뭐가 없습니까? 차이점, 진짜 율법의 정신과 진짜 하나님의 구원의 정신과 점점 멀어지죠. 그러면 결국 교회는 악의 전당이 되죠. 사람을 구원 시키는 곳이 아니고 교회 가도 구원 못 받고 구원 받고자 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행하세요. 행하시면 지금보다 더 나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악마의 소리라니까요.

우린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해도 그건 오히려 더 죄로 드러날 뿐입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니까. 에덴동산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혔으니까. 그게 왜 그렇게 믿기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바로 바리새인처럼 용, 또는 옛 뱀이 같이 있기 때문에. 같이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구원은 은혜로 구원 받고 영광은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 이 바리새인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울이란 사람에게 스데반 집사가 걸려들었고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걸려들어서 전부 다 작살났습니다.

사도바울되기 전에 사울이 하는 말이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 고 했어요. 얼마나 착했으면 율법에 흠이 없겠습니까? 부자 청년 못지않아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다고 했는데, 사울이란 사람은 더 심합니다. 율법에 흠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졸지에 뭡니까? 죄인 중에 괴수죠.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마귀가 자기를 그렇도록 만들고 그 만든 마귀 품에서 자기는 어떤 노력을 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자가 바로 납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어떤 노력을 해도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믿고 언약 믿고 십자가 운운하고 뭘 해도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부산강의에서 이런 이야기 했어요. 성도는 어떻게 자리를 표현하느냐 하면, 전에는 이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 자리로 왔습니다. 자리라는 말은 아까 해 드렸죠?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리를 보죠. 사실은 더 성경적으로 하면 이게 뱀의 자린데 우리는 그걸 몰라요. 나만 잘하고 나만 바르게 살면 되는 줄 알고 있楮? 자리가 문젠데. 자리에서 못 벗어나는데 주님 보기에 우리의 자리가 죄인의 자리고 마귀의 자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나 혼자 잘 하면 뭔가 좋게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서 구원을 받아버리면 자리로 판단돼요. 옛날 구약에는 애굽이라는 자리에서 천국으로, 지금은 애굽 적인데 지금은 약속의 땅으로, 이래 된다 말이죠. 그 옛 자리가 여기 새롭게 구원 받을 자리는 천국은 생명나무가 있다 말이죠. 천국에 생명나무가 있다는 말은 천국 온 사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생명나무 때문에 구원 받은 거죠. 거긴 선악과가 없으니까.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고 그러면 이 자리는 무슨 자리겠어요? 선악과 따먹은 사람만 있죠? 그러면 여기서 모든 동원되는 구원의 방법, 거듭나는 비결, 기껏 새로운 기술 새로운 수단이 뭐밖에 없겠어요? 선악 가지고 조절을 하죠. ‘이런 건 나쁘니까 하지 말고 이런 건 좋으니까 행하란 말이야.‘라고 선약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정말 성령이 와서 구원 받은 사람은 저렇게 나쁘고 좋고, 좋고 나쁘고 하는 그 자체가 지옥 갈 악마의 술책이라는 것을 발견하죠. 구원 받은 사람에 한해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자리가 문제예요.

찬찬히 다시 한 번 복습해보겠습니다. 자, 내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 봤습니다. 하늘에 뭐가 있었다? 전쟁이 있었다. 여기 전쟁에 나온 걸 보니까 용, 옛 뱀이 있더라. 그런데 여기에 맞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쉽게 생각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뭘 생각해야 됩니까? 용을 버리고 아들을 선택하면 구원 받는다. 얼마나 쉽습니까? 참 쉽죠.~ 정말 쉽죠. 이게 바로 악마가 노린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나름대로 하나님 계시 해석하고 있고 대자연에 대해서도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해석해 온 해석 틀에다가 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그런데 성경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었다? 십자가가 들었죠.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십자가를 끄집어내야 되는데 이렇게 보면 십자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내가 선택하겠어. 지옥은 나 선택 안 해. 잘했지? 잘했지?’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게 무슨 십자가가 나오는 겁니까? 그게 어디 십자가가 나와요? 나올 수가 없죠. 인간은. 십자가는 어리석고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깊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안 오고서야 그것을 밝혀낼 수가 없거든요. 성령이 없이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요한계시록 12장을 보고 ‘나는 뱀을 거부하고 아들 선택했습니다. 이러면 구원 받은 거 맞죠?’ 만날 자기 행동 ‘내가 뭘 믿습니다.’ 하는 행동, ‘소망 망했습니다.’ 행동, ‘사랑했습니다.’ 행동 ‘성경말씀을 공부했습니다.’ 한 행동만 내 안에 남게 되는 겁니다. 그 안에서 ‘뭘 해도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안 나오죠.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미흡함’을 느낍니다. 이 미흡함. 이건 갖춰졌는데 이건 미흡하고. 이 미흡한 것을 가지고 사람은 자기가 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고 ‘아, 간음죄구나. 아 내가 죄인이구나. ’ 돈을 보고 ‘아 내가 도둑놈이구나.’ 죄를 느끼게 됩니다. 죄를 느끼고 문제는 남아있는 이 죄를 씻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 피로서 여기에 마저 채우면 나는 죄인이란 역할을 다했고 예수님이 피 흘렸다는 그 지식마저 채우면 나는 온전히 구원된다.‘라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이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가 이야기한 지옥 가게 만드는 그러한 사고방식이라 말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생각했던 죄를 그냥 되풀이해서 확인할 뿐인 거예요.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은 ‘니 행동 똑바로 못해.’가 아니라 성경에 ‘간음하지 마. 했는데 왜 간음했어?‘ 이게 아니라 왜 예수님부터 출발하지 않고 왜 너부터 출발했어.’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항상 출발점이 누구다? 나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뭘 해도 죄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안 되는 걸, 주께서 요구하시는 거예요. 안 되는 걸 요구하시고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집사님, 한번 물어봅시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근호, 니 믿음 있나?’ ‘믿음 있습니다.’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 하면 집사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못합니다.’ ‘이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는 인간아.’ 하신다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 그것도 큰 믿음도 아니에요.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고 최소 단위의 믿음도 안 된다고 왜 그렇게 질책하는 겁니까? 믿음 자체가 선물로 와야지, 그것도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로 와야지 나에게 출발하면 뭐든지 舅습犬?뭐든지 행함이 돼요. 나에게서 출발하면 믿음이라도 그게 행함이 된다니까요.ㅎ 아, 그럼 누가 구원 받습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구원하는 거예요. 구원도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애쓴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보면, 믿음 있기를 애써라. 믿음 있는 자를 돌아보라. 확신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 이야기는 뭐냐, 그것은 주께서 오셔서 우리 나름대로 죽도록 충성한 거 있잖아요. 나름대로 애쓴 거 있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주께서 하는 그 시도가 바로 구원 이예요.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모든 말씀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십자가 들어있다.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라’ 말씀 속에 뭐가 들어있다? 십자가 들어있다.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렸다. 우리는 우리가 육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한다 말이죠. ‘주여 이 정도면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까?’ 한다 말이죠. 그럼 주님께서 팔짱 끼면서 ‘그 때문에 내가 십자가 죽었다.’ 라고 십자가 이야기를 담으면서 ‘죽도록 충성하라’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뭐냐, 십자가 믿고 뷔페에서 스테이크 썰고 있어도 그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거예요. 왜? 계속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ㅎ 순교한답시고 굶고 어디 선교가고 하는 것이 순교가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모든 것이 드러누?잠을 자면서 ‘아, 좋다.’ 해도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라니까요.

우리 장 근식 목사님 설교대로 노래방에 노래 부르는 것도 예배라니까요.ㅎ 주께서 다 해주신다니까. 하이카가 다 해준다니까요. 지가 엔진 만져서 더 고장 내고 하이카가 다 해 준다는데 지가 타이어 뺏다가 박았다가...우리가 뭘 압니까? 우리는 뱀이 누군지도 모르고 몰라요. 묵시세계도 몰라요. 주께서 오셔서 다 해줘요.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 이예요. 자기 아내 태는 죽었죠. 자식은 준다 했죠. 그 대책이 없어요. 이것은 주께서 ‘이건 내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하실 분이 바로 장차 누가 오셔서 한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을 때 자기 아내 안에 임신이 돼서 이삭을 태어났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의인될 자격도 없고 의인을 구경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의인이 되고 싶어 해서도 안 돼요. 왜?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피 때문에 우리가 의인돼 버렸어요. 의인이라는데 우리가 할 말이 있어야지요.ㅎ 예수 믿는 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할 말이 있습니까?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을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데 우리가 왜 말려요. 그냥 얻어먹기만 하면 돼요.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39.20) 11-06-26 18:33 
가락교회110616요한계시록12장-(묵시의 그릇)-17강b-(이 근호 목사)
제 17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서 세상을 보는데 그것이 빙글빙글 돈다면,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뭐가 움직여요? 달과 해와 별이 움직이죠.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어’라 하고 움직이는 것을 ‘술어’라 하는데 나는 항상 어디서나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오셔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너가 움직인다고 이야기 해버려요. 그러니 우리는 멀미나죠. 내가 종잡을 수 없죠. 내 해석도 아무리 해석을 잘 해봐야 주님 앞에서는 ‘놀고 있네.’ 이러신다 말이죠. 같은 움직임 속에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차원이 낮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예요.

개미가 있는데 큰 개미가 작은 개미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예요. ‘야, 해.’ 그런데 이걸 누가 보느냐 하면 인간이 보면서 ‘아이쿠, 놀고 있네.’ 한다 말이죠. 같이 이걸 들어서 엎어버린다 말이죠. 자기(큰 개미)는 움직이지 않고 이것(작은 개미)만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걸 엎어버리니까 둘 다 움직이죠. 자기가 움직인다는 것을 큰 개미는 모르는 거예요.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졌죠? 말씀 안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인간도 포함돼 있는데 감히 인간이 뭐를 해석한다? 말씀을 해석한다 하니까 모든 해석이 다 어지러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누구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움직이지 않는 그 분이 말씀의 해석자요. 완성 자가 되고 나머지는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살해할 수밖에 없는 악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세상은 뭐다? 빛이 아니고 처음부터 전체적으로 어두움이죠. 국회의원, 교수, 전부 다 목사나 집사나 다 어두움 이예요. 이 어두움을 어두움이라고 파악한 사람은 빛이 온 사람에게만 바로 어두움, 누가 말해도 어두움이라는 걸 아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그래서 어두움이라고 아는 이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 이 세상이 예수님과 똑같이 어두움이고 예수님만이 빛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단 자기를 빛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 맘에 안 들면 어두움으로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출발점이 문제가 되는데 여기서 말씀에서 하나님도 나오고 인간도 나온다. 그런데 말씀에서 나온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묵시로 본다는 근거는 바로 자연물을 가지고 역사를 통제하니까 자연물 속에 있는 뱀이나 여자, 아들, 이런 용어를 끄집어내어서 도리어 역사 전체를 담아버리죠. 여기 묵시가 있죠. 묵시는 그릇이다. 여기에 역사를 담으면 묻습니다. 역사는 흐릅니까? 흐르지 않습니까? 흐르지 않죠. 어떻게 해도 어디에 들어가 있다? 묵시 그릇에 담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시간적 의미가 흘러가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고 뭔가 사건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을 숫자로 표기하기 위해서 나타난 시간 숫자예요. 666도 그렇고 144,000도 그렇고 한때 두 때 반 때도 그렇고 이것은 이 세상은 현재 가마솥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밑에서는  불을 때죠. 부글부글 끓죠. 끓어버리면 그동안 안보이던 불순물들이 같이 섞여서 올라오는데 그게 뭐냐, 실은 이 세상은 점잖은 인간들 세상이 아니라 뱀의 지배를 받고 있는 퓔떠?설치고 이단들이 설치고 그리고 어린양이라고 위장은 했지만 보니까 적그리스도들이 어린양으로 위장해서 양의 탈을 쓴 사단의 일꾼들이 설친다는 것을 밑에서 가마솥에 불을 때니까 이것들이 가만있지 못하고 벌벌 끓는 거예요. 그 가마솥이라는 그 환경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은 자연세계를 가지고 사용합니다.

하늘의 별 3분의 1이 떨어지고 바다가 쑥이 되고 이 모든 것은 진짜 태평양에 떨어져서 3분의 일이 날라 가는 게 아니라 이 자연물 전체가 뭔가 새로운 해석, 요한계시록에 입각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묵시 말씀에 입각해서 다시 한 번 역사를 해석해 버리면 이 세상 우리 눈에 자연세계가 요한계시록의 구체화로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우리 안에서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절절하게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신나죠.

요한계시록을 느껴 버리면 요한계시록 3장, 4장, 5장에 나오는 그 대자연의 붕괴도 느끼지만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나오는 천국의 삶도 우리가 미리 맛보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에 바벨론이 나오잖아요. 그 바벨론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세상이 곧 바벨론이라고 이미 일방적인 해석을 지신만만하게 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자, 세상은 바벨론이다.’ ‘어째서 바벨론이냐?’ 새삼스럽게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이 세상이 왜 바벨론이냐고 따지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건 말씀에 의해서 바벨론이야,‘ 왜? 묵시의 그릇에 담겼으니까. 묵시라는 그릇이 이 세상을 뭐로 본다? 바벨론으로 보더란 말이죠. 이미 봤기 때문에 우리가 그다음부터는 바벨론을 확인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감사원에서 토지공사를 감사한다 할 때, ’여기는 감사해보고 비리가 나오면 너희들 징계한다.‘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토지공사는 썩었어.’ 하고 감사해보세요. 감사 굉장히 쉽습니다. 하나, 하나 쉽게 다 밝혀지죠. 봐주는 것 없이 처음부터 결론이 났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야로 왔지만 이 세상은 합세해서 주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이 세상을 보는 해석은 아주 간편한 해석이고 그 해석을 우리 성도가 받아야 마땅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죽였던 세상은 그 어떤 세상이든 심판의 이유가 담겨있는 세상이다. 그걸 묵시적으로 풀어보자.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발전의 기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요한계시록대로 멸망의 또 하나의 징조의 징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벌써 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천국에 가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밑에서 찾아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귀납적 방법으로 밑에서 증거 찾아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결론이 난 입장에서 거기에 맞춰서 해석해 나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시간이 없다 했어요. 이것은 지금 강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묵시에서는 시간 자체가 없어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없어지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쉽게 설명하면 이해되실 겁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를 현재라고 봅니다. 현재가 고정되고 난 뒤부터는 지난 것을 과거가 되고 점선으로 해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로 간주합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관이었죠. 그런데 인간자체가 묵시에 휘둘린다고 봅시다. 그러면 시간이 없는 것은 묵시가 맞는데 시간이 있는 것은 아까 말씀한 대로 우리 안에는 역사가 있고 시간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묵시 안에서 나만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도 시간이 있고 이 사람도 시간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보는 시간이 묵시의 역할에 따라서 다 다르게 돼 있어요. 아! 어렵다, 어렵다. 정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할 때는 커피숍에 앉아 두 연인은 ‘자기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 그러고 있고, 이 안에 팔십 노인은 심심해가지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고 있고, 같은 장소에 있어도 시간이 다 다르죠. 역할이 다 다르니까. 여기서 현재, 과거, 미래가 돼 있는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사람이 현재일 때 다른 사람은 과거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미래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각자, 각자의 시간이 뭉쳐서 전체가 하나의 시간관을 드러내게 돼 있어요. 일체 인간의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그러면 하나의 시간관이 뭐냐 하면 이 전체를 미래고 보고 과거로 보고 현재로 보고 이걸 묶어버립니다.

그럼 이걸 끄집어 내봅시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이 과거에 행동을 했으면 묵시안의 그릇 속에서는 과거에 자기가 한 행동이지만 주님 보시기는 미래에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행동을 미리 과거에 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람한테는 미래의 행동이 어떤 사람한테는 과거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어떤 사람한테는 자가가 미래에 일어날 행동을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이미 한 게 되죠.

바로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보기는 나만의 과거, 현재, 미래가 구축돼 있지만, 이게 묵시세계에서는 이건 인정해 준다?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그렇게 본다면 요한계시록에 둘째 나팔을 불 때의 일이 내년에 일어나도 묵시 안에서는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 가능한 거예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우리는 과거 이야기죠. 그런데 15년 후에 스데반 집사와 똑같은 일이 중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요한계시록이 우리가 알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가고 두 번 다시 안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남아 있는 그런 일만 있어 그것만 소망한다고 믿었는데 그럼 그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에요. 묵시 안에서는 과거, 미래, 현재가 섞여 있어서 어떤 구역에는 이미 터진 일이 아마 과거가 돼 버리고 어떤 곳은 과거가 안 되고 현재가 되고 어느 곳에는 미래가 되고 이게 뒤섞여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고 요한계시록 주석하는 학자들은 666을 로마라 하고 로마 네로황제라 해요. 로마 네로황제, 666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간 계산에서 지나갔고 나머지는 7년 대 환란만 남았다고 하는 겁니다.ㅎ 7년 대 환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7년 대 환란입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도 이미 과거의 한 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홍해 사건이 또 일어나요. 유리바다 건너는 홍해사건이. 이제 요한계시록에 시간관이 없는 이유를 아시겠죠? 이게 한 그릇에 담겼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과거가 어떤 사람에게는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같은 묵시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 같이 계속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시간 속으로 남아있다는 소리를 안 하고 그냥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랑을 맞이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해석이 됩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푹 자면서, ‘주께서 언제와도 괜찮습니다.’ 왜? ‘약속대로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늘 기름 준비하면서.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는 ‘아직 안 왔어. 오면 기름 준비하지,’ 이렇게 되죠. 결국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무슨 시간을 믿습니까? 묵시적 시간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의 느끼는 시간을 쥐면서 그 시간 스케줄에 주께서 어느 시점에 올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 장림처럼 1998년 10월 18일에 온다고, 안 오니까 계산 잘못 했다고 집어 치우고, 얼마 전에 미국 어느 이단도 그렇게 돼 있죠.

다시 정리하면 묵시세계에서 인간의 시간관을 이용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시간관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시간관을 충분히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 어떤 사람은 과거, 어떤 사람은 현재를 생각할 거예요. 충분히 생각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관에 합당한 사건을 일으켜 버려요. 어떤 사람한테는 이미 예수님이 심판을 받은 사람이 돼 버리고 어떤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돼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 이 사람에게도 아직 묵시에 남아있는 사건이 터진다? 안 터진다? 터질 수가 있는 겁니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 안 된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지금 요한계시록 12장을 한번 봅시다. 23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으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곧 오신다? 안 오신다? 곧 오죠. 그러나 오늘날 이것을 보면 먼 과거의 일이 되겠죠. 당시 그 사람들한테는 곧 예수님 재림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죠? ‘주께서 곧 오십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오십니다.’ 라고 말했다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죽은 지 몇 년 됐어요? 거의 이천 년이나 가까이 됐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아직 안 왔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이야기 했죠? 그 말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 하니까, 이천 년이니까 이틀 됐다고 해요. 그렇게 이틀 됐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번역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이 생각하는, 여기 순교하는 그 사람들의 마지막은 뭡니까? 지가 죽은 그 순간이 자기 시간관에 의하면 그게 자기 마지막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마지막 때 환란이 심하니까 내가 죽는 동시에 내가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주께서 재림 한다 생각하잖아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묵시 안에서 사건의 전부는 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바로 고러한 경험이 우리 과거에 둠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의 현재로 똑같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생각했던 마지막 종말이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틀린 게 아니에요. 그들은 그들 시간 나름대로의 주께서 곧 오시고, 우리는 우리 시간대로의 주께서 내일 올지 몰라요. 곧 오시고, 이것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겁니다. 뭐냐,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주의 약속은 누가 이야기 하듯이 더디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룬다.’(벧후 3:9)는 것을 그 시간대에 그 시대별 모든 성도에게는 동일하게 똑같이 적용하는 거예요.

그걸 전체로 모아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의미 없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아이, 어려워라, 참 어렵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인간들이 나름대로 수평적인 시간관을 유지하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게 언어기 때문에 그래요. 단어고. 인간이 갖고 있는 사적인 시간관의 단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걸 한 가마솥에다가 집어넣어놓고 ‘그래, 니 말이 틀린 게 아니야, 주께서 오시는 거 맞아.’ 하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천년이 지나도 안 왔어요. ‘에~에, 구라, 구라, 구라,’ㅎ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그쪽 시간 따로 있고 나는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시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 시간, 그 역사와 역사가 하나로 뭉쳐버리면 뭐가 된다? 묵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묵시에서는 개인적인 시간관은 의미가 있다? 없다? 없는데 주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의미 있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때다‘ 만날 마지막 때라는 거예요. 만날, 벌써 마지막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만날 마지막 때라. 그래서 자기 시간대를 유지하는 사람은 ’에이, 어디서? 안 온다, 안 온다.‘ 하고 드러누워 자버릴 때 오시잖아요.ㅎ

이것을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을 해요. 원거리, 근거리로 해석을 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깨어지는 것은 근거리, 가까운 거리의 종말이고 원거리, 멀리 있는 종말은 이렇게 돼요. 그 말이 맞는지, 거짓말 이예요. 잘못된 거예요. 산을 보게 되면 앞에서 보게 되면 산 있고 산 있고 점점 뒤쪽 산은 짙어지죠. 앞의 산은 옅어지고. 그래서 원근감이 생기면서 짙은 색의 산은 멀리 있는 산이고, 이 산과 이 산 거리는 2키로 미터인데 이쪽에서 보면 딱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래서 요 고개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마지막 최후의 멸망이 저 끝에 있는 산이라면 현재 예루살렘 성전은 요걸(제일 앞산)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해요.

이 설명이 잘못된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럼 예수살렘 성전이 끝나버리면 어쨌든 간에 멀리 남아있든지 간에 이 사건은 이미 과거가 돼 버렸죠. 그럼 예루살렘 성전이 깨졌다는 것은 성경에서 신경 써도 됩니까? 안 됩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죠. 과거 이야기니까. 그때는 안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이야기 우리한테 소용없죠. 그럼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말씀 속에서 십자가를 끄집어 낼 필요가 없죠. 아, 이건 과거 이야기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고, 치워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렇지 않죠. 분명히 지나간 과거를 다 끄집어 동원해서 전부 다 그 사건들이 지금의 사건, 또 미래의 사건,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이 되면 우리가 미래라고 했던 것이 이미 과거에 버려졌을까요? 안 버려졌을까요? 버려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미래에 남아있다고 한 사건이 이미 우리 과거에 일어나버린 겁니다. 그거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합리적으로. 그들은 돌아버립니다. 그들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거짓말 한 거예요. 왜 거짓말 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간관이 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거기에 맞춰서 요한계시록에 필요한 것을 마작 하는 것처럼 딱딱 집어넣어서 종말 프로그램 스케줄이 짜있으면 그것대로 하면 구원 받는다고 그렇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어서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바로 개미가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개미가 인간이 개미집마저 흔들어버리면 같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말씀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말씀 속에 있는 우리 인간들은 마구잡이로 계속해서 흔들림을 당해야 그게 말씀에 안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풀이나 꽃처럼 사라져줘야 그게 확실히 말씀이 말씀다운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주여, 작년에 하나님 복음 때문에 많이 애 썼습니다. 골치 아팠습니다. 아휴, 이제 지나갔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요거 무슨 스케줄입니까? 과탓?환란 있었으니까 ‘올해는 평안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죠. 주님께서는 ‘아직 안 왔는데?ㅎ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니가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더 심한 게 옵니까?‘ ’작년에 일어났던 것은 평안에 해당 돼.‘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던 시간관을 주께서 다 생각해 놓고 그걸 용납하지 않고 그걸 뒤집는 식으로 우리 중심이 아니고 구원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신실한 분, 내가 신실하게 믿는 내 중심의 신실함이 아니라 우리는 만날 부실하고(신실의 반대)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이 항상 예수 안에서 ’예‘가 되고 ’아니오‘가 없음을 늘 깨닫게 하는 식으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들을 묵시적으로 종합한 것이 요한계시록 이예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내용은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때까지 전부 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1260일이라는 이 기간이 주석에 보면 예수님 죽으시고 재림할 때까지라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를 포함하는 겁니다. 괜히 인간의 시간 론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1260일이라는 것은 결국 뭐하는 시간입니까?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예수님)에 속한 사람들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전쟁의 이유와 어떻게 진척되었으며 어떻게 결말이 나느냐, 거기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기 무대가 있는데 관객이 앉아있고 위에 무대 막이 있는데 지금 배우가 무대 앞에 나오기 전에 뒤쪽에 있는 배우는 뭐로 보이겠습니까? 그림자로 보이겠죠. 무대 뒤에 보이는 그림자로 우리가 바라보면서 위에 전개되는 일에 우리는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안 움직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근본적인 오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무대 커튼을 벗겨 버려요. 벗겨버리면 뒤의 그림자가 무대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은 가만히 있고 무대만 움직이는데, 이미 우리 자신이 무대 전체가 전쟁터로 돌변돼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유라는 것, 우리의 권리라 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없고 우리는 전쟁 통에 말려든 그런 입장에 돌입이 되죠.

모든 움직임이 말씀대로 움직인다. 앞에 붙이면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세상은 움직인다. 더 구체적으로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대로 이 세상은 전개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대로 될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세상 살기에 마음이 편합니까? 편하지 않습니까? 되게 편하죠. 그동안 우리는 행동을 해도 ‘왜 나에게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주어졌는지, 내 몸이 왜 아픈지, 우리는 이유를 몰랐잖아요. 아무 원인도 없이 이유도 모르고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지, 우리는 지쳐버렸어요. 또 내일 되면 주식 값이 오를지, 땅값이 오를지, 내일 되면 장사가 덜 될지, 알지 못했잖아요.

그 이유가 그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뭐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자신이. ‘누가 감히 나를 움직여? 나는 내가 움직여도 내가 알아서 움직일 거야.’ 우리는 나는 고정돼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뭐로 만든다? 이걸 자리로 만들어요. 무슨 자리? 전쟁터, 우리가 이건 우리 인간만의 세계고 이것은 따뜻한 내 가정이고 이것은 조용한 내 회사고, 이처럼 모든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내가 움직이지 않듯이 고정된 내 자리라고 우기는 이 자리를 허락도 없이 주께서 뭐로 사용합니까? 영적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로,  임대차 계약도 없어요. 그냥 사용해 버리는 거예요.ㅎ

그러면 우리 회사에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은 영적 전쟁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스파크의 결실들이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TV나 냉장고 가스레인지, 김치냉장고, 전부 다 그냥 이유 없이 된 것이 아니고 영적 전쟁을 하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시험 문제를 낸다면 김치 냉장고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뭡니까? 목사 시험에, 여러분 집에 김치 냉장고가 있는 이유는? 그걸 영적으로 쓰면? 야~! 문제 어렵다. 정말 문제 어려워요.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오늘 아침에 SBS뉴스에 이게 나왔어요. 다단계 판매해서 사무직 뽑아놓고는 막상 찾아오면 보증금 2500만원을 받고 영업직원을 시키는 사기로 십 몇 억이나 챙긴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방금 뉴스가 끝나고 그 뒤에 이어서 ‘이번에 서울시에서는 반딧불을 양성해서 서울시를 반딧불로 아름답게 합니다.’라고 했다 말이죠.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 일이고 어느 것이 나쁜 일입니까? 바로 다단계 사기 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반딧불로 좋게 하는 것은 좋은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럼 SBS 같은 세상은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SBS가 보는 오늘날 세계예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인식, 반딧불을 양성하는 좋은 일만 해버리면 좋은 나라로 발전할 것이고 사기꾼이 많아지면 나쁜 나라가 된다는 거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지평이죠.

역사적 지평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나라, 우리나라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영원토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움직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에 김치 냉장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역사적 이유에서 보는 해석과 그것이 잘못이라고 보는 영적 해석, 두 가지 해석이 나와 줘야 ‘딩동댕’ 정답이 되는 거예요. 우선 역사적 해석, 김치 냉장고 있음으로써 오랫동안 시원한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면 이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게 만드는 그래서 좋은 김치 냉장고라서 그런 의미에서 돈을 들여서 김치 냉장고를 들여왔다. 이게 역사적 해석이었습니다.

묵시적 해석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생각이다.ㅎ 그게 바로 마귀의 생각이었다. 왜? 누가 존재해야 되요? 요한계시록이 살아있어야 될 때에 누가 살아있어요? 김치 맛있게 먹은 내가 살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출발점이 나에서 나와서 도로 어디로 갑니까? 나에게 귀향하는 그러한 악마의 편에 속한 그 오는 과정에서 어떤 것도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삽입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가 교인을 신방한다. 왜 신방하느냐, 그 교인을 신방해서 잘 관리하면 그 사람이 나중에 내 교인이 된다. ‘딩동댕.’ 이게 뭡니까? 이건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되는 자기의 지평 안에서 해석하는 거죠. 묵시적 해석을 하면 간단하죠.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였습니다.

그럼 묵시적 해석에서는 어떤 해석을 하면 되요? 누구는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님만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돼 있죠. 그럼 요한계시록 12장의 전쟁에서 이미 전쟁의 의미는 돼 있죠? 아들과 여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또는 패배하지 않는다. 또는 마지막에 승리한다.  이미 결론이 나 버렸죠? 오늘 강의 끝나버렸어요. 왜, 이미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에 의하면 그 말씀 현실을 보면 누가 결국 승리하게 돼 있어요? 우리는 나이가 백 살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는 여든 살까지도 안 살아봤어요. 안 살아봤지만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현재 속에 과거도 포함돼 있고 미래도 다 포함되고 다 포함돼 있죠? 공존, 혼재.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 뜻이 뭐냐, 공존, 혼재돼 있죠. 우리는 나는 과거는 아는데 뭐는 모른다? 미래는 모른다. 이것밖에 모르죠. 그러면 안 돼요. 미래 사건이 이미 우리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잖아요.

왜 우리 안에 과거, 현재, 미래를 쑤셔 넣느냐 하면 결국은 새로운 과거, 현재 미래에 위반되는 완전한 해답은 뭐냐, 아들과 그 여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 정답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삽입시키는 거예요. 삽입시키면 결국은 김치 냉장고가 집에 있는 이유는 뭐냐, 그것은 우리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샀는데 성령이 오고 보니까 이 김치 냉장고는 내가 얼마나 내 힘으로는 악마를 이길 수 없고 뱀을 이길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저 우리는 김치 맛있는 거만 정신 빠져서 또 딴 거 살 거 없나 정신 팔려서 예수, 십자가는 다 잊어버리고 나 영원토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와 내 가족만 번창하도록 평소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내뱉어지는 모든 행동들이 이것은 패배당해야 마땅한 내 바탕에, 세상에 그러한 우리 바탕에 우리를 대신해서 아들이 죽으심으로써 이걸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여자의 남은 자 되게 하신 이 은혜를 김치 냉장고 바라볼 때마다 찬미하는 그것이 영적으로 승리한 가정입니다. 그러니 김치 꺼내면 맛있게 잡수시기 바랍니다.ㅎㅎ

어차피 그거 안 먹어도 죄고 먹어도 그거 상관없이 구원은 이미 요한계시록 12장에 우리는 구원 받기로 됐기 때문에, 왜? 구원 됐기 때문에, 구원자기 때문에 승리자인 사실을 주께서 김치 냉장고와 더불어 알려 줬잖아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만 성경책이 아니고 우리 가정이 그 순간 뭐가 됩니까? 요한계시록 12장의 덩어리인 채 가정의 아파트가 되는 겁니다. 저기는 빌라. 살아있는 우리가 말씀의 구체화 현실화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문제 어렵죠? 문제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집에 있는 김치 냉장고를 영적으로 해석하라. 묵시적으로 해석하라.

그렇다면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 “여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이끼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자기가 살고자 하는 그것이 마귀가 한 짓이기 때문에 주께서 승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죽이겠다는데 그냥 죽죠. 왜냐하?이미 우리는 승리자가 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사흘 만에 살아 부활한 증거로 인하여 이미 살았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난다면, 주께서 그렇게 쓰시겠다는 데 누가 그걸 거부해요. 구차히 살고자 할 이유가 없죠. 내 임무가 그 순간 죽는 역할이라면, 죽는 역할은 죽어야 그게 영화가 되기 때문에, 드라마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믿고 잘 죽었다고 해서 그걸 대단한 걸로 여기지 마라.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이걸 흉내 내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밥 많이 먹고 죽읍시다. 그것도 순교예요. 이미 예수님이 승리한 걸 믿으면 밥을 먹고 사우나에 가든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볶든지 말든지 그게 순교하니까요. 참 쉽다 그렇죠?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이 성령이 와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좁은 우리 안에 요한계시록 12장이 다 담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뭐가 펼쳐지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의 내용이 다 펼쳐져요. 우리는 만날 ‘경험하지 말자. 경험하지 말자.’하는데 우리는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경험케 하실 겁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강의한 핵심이 이겁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행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게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게 하실 겁니다. 간음하지 않게 하실 겁니다. 술 취하지 않고 성령에 취하게 하실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해야 된다는 거예요.ㅎ 그 차이예요. 그 차이!!!!

우리는 묵시의 그릇에 들어가는 종이에 불과해요. 그런데 누가 빡빡 버티느냐, 내가 버텨요. ‘주여, 좀 있다가 죽겠습니다. 요것만 봐 주세요.’ 주께서 싱긋이 웃죠. ‘니가 전에는 행동 잘했는지 아는가봐. 니는 행동 잘 한 적이 없어.’ 왜, 악마와 싸웠기 때문에. 악마와 싸운다는 것은, 악마 편이 아닌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악마와 싸운 겁니다. 예수님을 배태한 여자는 뭡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겨버린 교회, 여자죠.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생겼다고 믿는 단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교회가 있는데 뭘 교회를 만들어요? 뭐 예배당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간판을 세운다 해도 교회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만들어요.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만들 수가 없는 교회를 유지할 수도 없는 교회를 유지 하겠다 만들겠다는 자체가 가짜 교회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12장 7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여기 미가엘이라는 천사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합니까?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하죠. 그럼 지시자가 누굽니까? 놀랍게도 땅에 있는 아들로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게 이상하죠. 하늘에 전쟁이 있는데 미가엘과 전쟁하는 전쟁 통에서 ‘누가 뱀을 이기고 누가 뱀을 추방시켜 놨지?’라는 정체가 땅에 있는 교회 안에서 누군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아요. 그런데 하늘에서 주인공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뱀이 하늘에 있다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지상에서 기이한 현상을 여기서는 이적이라 했죠. 이상한 이적이 있으니, 그 이적이 뭡니까? 여자가 아들을 배태해서 낳더라는 일이죠.

예수님이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게 왜 이적이죠? 오히려 갓난아이가 태어난 걸 이적으로 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들의 출현을 단지 예수라는 사람의 아들이 태어난 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기 출현과 동시에 현재 지상에 있는 모든 체제자체가 모조리 무너지고 붕괴한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아기 하나가 태어났는데 온 우주의 영과 기가 다 동원시켜서 그 아들의 출현을 출생을 저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헤롯왕이..., 그게 참 신기한 거예요. 거기에 다 말려든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이 예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런 거예요. 아들이 뭐길래, 결국은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에, 진짜 하늘에서 영적 전쟁이 있었고 뱀이 쫓겨났다는 그 증거는 하늘에서 찾는 게 아니고 어디서 삐져나온다? 지상의 약하디 약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주 연약한 아기 하나 출생이 사실은 양파처럼 뜯어보면 그 안에 하늘의 영적 전쟁의 내용이 다 포함돼 있는 겁니다.

그걸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12장5절에는 이렇게 돼 있죠.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이래 돼 있죠? 이게 시편 2편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맞죠? 그렇다면 아기 예수 태어나는데 시편 2편까지 동원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누구 하나, 우리나라 나라 호 발사할 때 온 국민의 시선이 나라 호에 쏠리듯이, 아기 예수 하나 태어나서 솟아올라오는데 온 성경이고 온 우주가 다 집약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어디에 말려들었습니까? 그 집약하는 그 사건에 우리 성도가 말려든 거예요. 성도의 존재 이유, 살아가는 이유는 이미 판가름 나버린 겁니다. 뭡니까? 아들을 낳은 여자라는 자리가 누구자리다? 우리의 자리기 때문에 그 여자라는 자리에 주어지는 구원의 승리, 구원의 최종 확정이 바로 누구 자리다? 이제는 우리가 소속돼 있는 우리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중요합니까? ‘아버지 자리’가 중요합니까? 아버지 자리가 중요하죠. 우리가 전에는 무슨 자리였습니까? 육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육의 자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천국 갈지, 지옥 갈지, 내가 결정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고 난 뒤에 육의 자리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영의 자리로 바뀌었죠. 바뀌니까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결정을 다  했다고 믿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가 승리한 것이 곧 누구 승리다? 우리 승리가 다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고 주님의 기업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뤄놓고는 기업을 우리가 누리는 겁니다. 주님이 만든 천국을 우리가 누리는 거예요. 이것은 이 자리를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보면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생명책’이라 돼 있고 여기에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인, 그리스도로부터 도장을 이마에 받은 사람만 여기에 하늘나라에 입성이 됩니다. 이마에 도장 맞은 사람!!

그러니까 이 자리가 우리 행함으로 얻은 자리입니까? 아니죠. 이 자리는 처음부터 창세전에,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리거든요. 그 자리가 이제 사 우리가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겁니다.ㅎ 창세의 자리를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우리 있는 자리가 1평이라 합시다. 33밀리미터, 33밀리미터, 맞습니까? 이 자리를 연장해 보니까 창세전까지 이어졌어요. 결국 이 자리가 천국이나 다름없어요. 우리는 1평짜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 안에 있는 거예요. 이미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천국 안에 있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이제 주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자리를 누가 마련했어요? 내가 행함으로 마련했어요? 이 자리를 내 행함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냥 주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나온 행함이 뭐냐, 절대로 이 자리는 내가 한 게 아닙니다.‘라는 자기 행함을 부정한 자리죠. 그게 교회 아닙니까? 무슨 교회서 행함을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 왜 합니까? 뭐 새로 자리 마련하겠다고? 아예 돗자리를 짜지. 짤 것도 없어요.

오늘 강의를 정리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어요. 내가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사랑하려고 왔는데 나는 내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죠. 내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면, 주님은 오실 때 절대로 흠모할 모양도 없고 사랑할 만하게 오지도 않았죠?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랑 행위에 주님이 개입돼요? 개입되지 않아요? 오히려 배척받죠. 배척받은 주님께서 사랑한다면 이 처음의 사랑은 지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를 사랑했죠. 그러면 나온 결론은 뭡니까?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사랑해도 절대로 내 힘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날 사랑하시고 왜? 주님은 사랑으로 온 것이 아니고 사랑의 자리, 아예 주님이 만드신 돗자리, 손수 짠 십자가 피가 담긴 자리를 깔아버리니까 사랑 안 받으려 해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니 창녀가?’ ‘창녀입니다.’ ‘니 세리인가?’ ‘세립니다.’ ‘니 깡패인가?’ ‘깡팹니다.’ ‘니 강도야?’ ‘강돕니다.’ ‘니 죄 다 사해줄게, 니 이제부터 내 아내다.’

그렇다면 그걸 익히 아시고 남편으로서 사랑해줬으면 ‘니 왜 강도야? 니 강도 같으면 사랑 안 할 거야.’ 이런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그걸 알고 사도바울은 만날 하는 소리가 ‘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께서 ‘안다.’ ‘죄인입니다.’ ‘안다니까.’ ‘난 죄인입니다.’ ‘안다니까.’ 만날 이러는 거예요. ‘나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안다니까.’ㅎ

이미 그 자리가 우리로 하여금 곤고한 사람 만들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정죄함이 없는 자리가 우리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우리 밑에 깔아놓은 자리예요. 그걸 바탕 바꾸기. 성령을 통해서 바탕을 바꿔 버리는 거예요. 그 바탕 안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오늘과 같은 미가엘 전쟁이 깔려있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슨 역할? 여자의 역할, 어떤 역할? 교회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예수님을 임신해서 해산시키는 그 역할을 매일같이 하는 겁니다. 이거 지난 거 아니에요? 지난 거 아니에요. 이건 2008년도? 아니에요. 2012년도에 우리는 또 예수님을 배태할 거예요. 그 자리가 요한계시록 12장의 자리기 때문에, 내가 12장을 쥘 수 있는 게 아니고 12장이 나를 쥐어 버렸어요. 12장이 12장의 내용이 나오도록 나를 계속 이용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복습을 해야 돼요. 말씀이 인간을 이야기하고 말씀이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이 말씀 자리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예수님이 들어갔죠. 인간의 말씀은 말씀 같지도 않죠. 인간의 말씀은 사회에서 구성된 것이고, 주의 말씀은 숨어있는 묵시세계의 천국에서 통하는 말씀이죠. 그 말씀이 와 버리니까 우리는 어둠이 돼 버렸죠. 그렇다면 말씀이 있는 곳에 항상 우리는 어둠이 되는 거예요. 어둠이 되도 괜찮아요. 왜냐, 우리가 어둠인 줄 아는 것은 이미 말씀이 들어왔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너는 나의 신부, 또는 사랑, 또는 천국의 유산.’ 하나님에게는 ‘주여 다 이루었나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말씀되신 주님이 있던 그 관계, 이것이 무슨 자리? 말씀의 자리 속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님이 생각하는 참된 인간으로서 이미 우리가 새겨져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이마에는 요한계시록 12장이 새겨져 버렸어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속한 말씀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말씀의 종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의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악마를 이길 수 없었다. 우리는 악마에게 지배받았다. 그런데 우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여자에게서 나온 아들이 기어이 마귀를 이겨서 우리로 하여금 여자를 여자 되게 하는 자리를 안에다 우리를 데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요한계시록 12장이 되는 겁니다. 다음에는 요한계시록 13장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사랑이 저희들을 찾아왔을 때 우리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냥 나만 사랑한 그런 인간임이 다 들통 났습니다. 이 들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가서 오직 주의 사랑만 찬미하고 공로를 영광으로 돌리고 모든 공로를 주께만 돌릴 수 있는 살아있는 그런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