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728요한계시록13장-(666의 의미)-19강a-(이 근호 목사) 제 19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13장 할 차례입니다. 13장에 보면 유명한 666이 나오죠? 666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오늘 공부의 핵심이 됩니다. 666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위하여 요한계시록 13장 1절부터 아주 괴상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는 말은 몸체에 뿔을 새로 장식한 것이 아니고 박혀있다는 뜻 이예요. 박혀있다는 말은 뿔 부분, 몸체부분이 따로 분리될 수가 없고 뿔 자체가 완전히 몸체에 박힌 채로 바다에서 올라오니까 짐승인데, 뿔이라는 것은 완전히 박혀 있으니까 이건 완료성입니다.
뿔이라는 완료성이 이렇게 제공해 버리면 이 악마는 성품을 고칠 수가 없어요. 뿔이 박혀있으니까 박혀 있다는 것은 뿔의 본성을 발휘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왔어요. 본인이 뿔을 뺀다든지 ‘나는 뿔이 싫어.’ 이럴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면류관이라는 자체가 그런 거예요. 자체가 완료 성을 갖고 있습니다.
악마라는 것은 영적 존재가 아닙니까? 성경에서 영적 존재가 들어왔다는 것은 항상 이걸 염려해 두세요. 그 자체가 이미 완료 성, 종결 성, 악의 존재가 이미 완료 적이라는 겁니다. 완료 적인 것이 등장할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쪽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잖아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악마가 완료 성을 가지고 부각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영적인 차원에서 같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완료 성이 돼요.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이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변경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든지 인간들의 목격담이 있을 거예요. 예수님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고 사도들이 어떻게 흩어졌고 사도들에게 어떻게 성경완성이...목격담이 있을 거예요. 그런 목격담은 마태, 마가, 루가,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서신도 마찬가지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런 목격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인간들이 어떤 사건을 보게 되면 여기 사건을 목격했다고 하면서 이걸 재구성을 하게 돼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봐도 열 명이 봐도 열 명이 다 각자 재구성을 하기 때문에 열 명의 목격담이 다 달라요. 똑같은 사건이 있더라도.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어려운 설교 하나 했는데, 태양으로부터 화상을 입은 사람은 태양의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사람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고통에 대한 나찌의 고통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했어요.
이건 우리의 상식을 말함이 아니라 직접 고통을 당하고 직접 수난을 당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고통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사도들이 부활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인데 그게 아니란 이야기예요. 왜냐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생을 했기 때문에 뭐가 발생되느냐하면 이게 ‘선입견’이 발생돼요. 선입견은 다른 게 아니고 뭐겠어요? 복수심이겠죠. 복수심을 가지고 ‘나한테 박해를 했던 내 청춘을 앗아갔던 그 인간들 이번에 죽었다.’라고 할 때 그게 과연 객관적으로 옳은 진리냐 이 말이죠. 진리일 수 없죠.
그러면 그 목격을 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볼 수 있나? 목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를 못하죠. 결국은 목격을 해도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 못해도 결국 안 봤으니 말을 못하고 결국 이것은 누구 몫으로 남느냐 하면, 완료 자가 누가 등장하느냐, 완료 자가 어떻게 등장하느냐 하는 문제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인간들이 모든 역사적인 목격담을 다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자체를 거부해요. 요한계시록 전체가. 인간의 역사자체를 거부해 버리고 역사에서 뭐를 빼버리느냐 하면, 역사에서 시간을 빼버려요.
역사에서 시간을 빼버리면 그게 묵시가 되는 겁니다. 공식 하나 써봅시다. 역사-시간=묵시 이 묵시에서 도로 뺀 역사를 이렇게 다시 빼진 묵시에서 역사로 가게 되면 역사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바뀌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바뀌어서 인간의 행함에서 시간을 빼면 묵시가 되는데 그 묵시는 인간의 행함을 또 다시 조명해 버리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완료 성’이 나옵니다. 묵시 자체가 완료 성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를 예수 십자가 사건을 봤다고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십자가 사건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나오거든요.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목격을 한다면 그 말을 믿지 말라 이 말이죠. 왜냐 하면 그건 역사적인 문제기 때문에.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누가 해석할 수 있다? 누가 재구성 할 수 있다? 십자가 지신 당사자가 묵시적인 입장에서 재구성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적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시간을 빼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이 남죠. 인간의 행함에서 뭐가 나온다? 역사가 나온다 말이죠. 그 다음에 또 다시 이 행함에 대해서 또 다시 묵시가 가해버리면 여기 완료성이 나옵니다. 어떤 완료 성 바탕 위에 있기 때문에 이런 행함이 나오느냐, 그 완료 성이 숨어있는 바다에서 온 악마가 되는 거예요.
그럼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남는 게 뭐냐 하면 악마라는 완료 성과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완료 성과의 대결이죠. 이게 지난 시간에 무슨 전쟁이라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최후의 전쟁, 짐승과 싸우는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 그것이 꼬리 있고 면류관 있고 괴물 나오고 이게 역사적 용어가 아니고 역사적 아닌 것도 아니고 분명히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사건인데 이걸 역사적으로 해석해서는 된다? 안 된다? 절대적으로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해석을 막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2절에 보면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에 뿔 나오고 표범 있고 용 나오죠? 이걸 제가 어제 수요설교 때 이걸 명사라고 했습니다. 명사!!
명사는 뭐와 대비될 때 명사라 하느냐 하면 동사가 아닌 명사라 했습니다. 그럼 동사가 뭐냐 하면 동사는 ‘내가 ~~을 한다.’가 동사가 돼요. 그런데 명사는 ‘이런 것을 너는 기어이 해야만 돼,’ 이런 것, 명사니까 ‘것’이 붙어요. 이러한 것, 이걸 ‘to 부정사’라고 해요. 영어에서 to+동사는 부정사 역할을 해요. 이건 명사, 형용사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러한 것은 너는 결코 벗어나지 않고 필히 할 수밖에 없어.’ 이걸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여, 오늘도 저는 비오는 날 서울에서 밥 먹고 살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살려고 ~~했습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너는 오늘도 살아있는 것이어야 해.‘ 명사 아닙니까? ’니가 살려고 애써서 산 게 아니고 오늘 하나님 보시기에 오늘 살아있어야 되는 존재야.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러면 거기서 뭐가 묵살돼요? 인간의 모든 행함은 묵살되는 거예요.
왜 인간의 행함, 인간의 동사를 왜 부정합니까? 부정해야 영적인 완료 성 같은 게 나오고 예수님의 하신 모든 것도 영적인 완료 성 바탕 위에 있어서 악한 완료 성과 선한 완료 성의 대결로 구조가 굳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사님 이제는 이해되십니까? 여러분들이 일단 윤곽을 잡았다 치고 다시 한 번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잖아요. 그때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하고 몇 명은 목격을 했잖아요. 이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때 있었잖아요. 옆에 다른 강도도 둘이 있었잖아요. 예수님 옆의 동그라미 안의 강도는 똑똑한 강도예요. 왜 똑똑하냐 하면 자기가 평소에 살아왔던 방식대로 예수는 구원을 제공 안 해주니까 자기에게 힘을 안 보태주니까 당신은 전혀 힘이 없어 보이니까 예수를 안 믿는 것이고, 여기 구원 받는 강도는 어리석은 강도죠. 예수님한테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데 구원 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건 바보도 아니고 병신도 아니고 돌은 인간도 아니고...ㅎ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은 보면 똑똑해지려고 해서 문제예요. 똑똑하면 안 되는데 지금까지 똑똑하다는 자기 살아온 패턴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패턴 다음에 이어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믿고 +행함, 예수 믿고 그 다음에 행하자 하는 이 노선이 바로 이 노선 이예요. 평소에 자기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주께서 해주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그것은 똑똑한 강도입니다. 지옥 갑니다. 뭔가 바보 등신 되든지 거머쥘 수 없는 갭이 놓여 있어야 돼요. 그건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거든요.
여기 목격담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목격담을 전부 다 주께서는 무시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목격담은 다 나의 선입감 속에서 나온 목격담이기 때문에 그걸 역사로 보는 겁니다. ‘내가 지난 5년 전에 예수님 십자가에 달렸어.’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 십자가가 어디에 포함됩니까? 자기가 여러 가지 있는 역사 가운데서 하나의 사건으로 삽입이 되잖아요. 그러면 삽입된 십자가도 역사고 그 전날 목욕탕에서 목욕한 것도 역사고 십자가하고 자기 역사하고 같이 막 노는 셈이 돼 버려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흘러간 역사죠. 마치 2천 년 전에 과거에 ‘한 때 그런 일이 있었지.’ 에피소드로 끝난다니까요.
사도바울이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뒤에 25년 후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죠?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지는 십자가 달릴 때 그 역사적 현장에 없었어요. 제자들도 없었고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만 있었다고요. 사도바울은 없었는데 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왜 그런 소리 합니까?
역사가 아니라니까요. 역사가 아니면 역사가 아니라는 부정당하는 경험이 있어야 돼요. 자기가 살아온 모든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게 만들고 그걸 못 믿게 만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완료 적인 악한 영적인 활동이 내 속에 이미 게재돼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고. 지가 나쁜 짓해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닙니다. 나쁜 짓 하는 게 아니라 태생 자체가, 토대 자체가, 모종 자체가 역사라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역사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악마는 역사로서 승부 걸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역사로서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착하잖아. 앞으로 천당 가려면 더 착해야 돼. 자꾸 역사를 포기하지 마. 역사를 포기하면 안 돼.’ 자꾸 역사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만큼 교회에 충성했으니까 조금만 더 보태면 복 받는다고.’
그러니 그게 누구와 상대하는 겁니까? 감히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을 감히 누가? 감히 역사적인 내가 상대해서 납득이 돼서 내가 해줘서 구원 받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예수 믿고 이런 식으로 피 믿고 언약 믿고 십자가 믿는 것은 전부 다 사깁니다. 거짓말 이예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마귀가 예수 못 믿게 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요. 내가 거했던 역사적인 완료 성, 역사적인 완료 성이라는 말이 어려운데, 역사에서 시간을 빼버리면 인간의 행함이 나오죠. 그 행함을 악마가 없으면 그냥 행함이 있죠. ’나는 모르고 행한다. 오늘도 열심히 행했다. 오늘도 열심히 행해서 이런 실적을 거뒀다.‘ 그 자체가 바로 역사가 되는 거예요. 행함이 있으면 항상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을 이렇게 보지 않고 움직이는 동사가 아니고 뭐다? 너는 마치 박스에 고정돼 있는 것처럼 너는 하나의 명사다. ‘~~것이다.’ 말이죠. ‘너는 기껏 해봤자 니 역사만 고집하는 십자가든 예수든 니 역사를 긍정하는 쪽으로 역사에다 가두려는 그러한 것이야.‘ ’~~ 것이기 때문에 사물이고 명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동사를 끄집어내봐야 그거는 니가 갖고 있는 명사의 성격과 질을 그냥 발휘하는 것뿐이지 새삼스럽게 역사라는 게 없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역사적 관점에서 십자가를 생각하는 그 자체도 이미 엉터리고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이예요. 요한계시록은 십자가가 갖고 있는 본래의 역사적인 것이 아닌 묵시적 것을 역사를 주장하는 인간들에게 들이부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인간이라 하지 말고 ‘나는 용이다. 나는 표범이다. 나는 곰이다.’ 그런 소리 하라 이 말이죠. 얼마나 놀라운 이야깁니다. 오늘 본문 13장에 나오잖아요. 동물 나오죠? 13장 봅시다. ‘나는 표범이다. 나는 곰이다. 나는 사자다. 나는 용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행했던 것은 뭐냐, 사자의 행동이고 표범의 행동이고 곰의 행동인 거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13장 해석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요한계시록 13장 1절의 곰, 표범, 그게 마치 악마에게나 해당되지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차단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13장 18절 봅시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그 수는 짐승의 수가 아니라 사람의 수에요.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면 이 세상에 짐승 하나에 사람 하나씩 붙어 있는 것 같아요.ㅎ 짐승 하나에 사람 하나씩 붙어 있는 거예요. 육적인 역사적 존재에 영적인 존재가 하나씩 다 붙어 있는 거예요. ‘니가 보기에는 사람 수로 보이나 내가 보기에는 짐승 숫자다.’ 이거예요.
이것이 총명인데 이것은 십자가를 역사적 십자가로 보지 않고 묵시적 십자가로 볼 때만 파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십자가의 사건을 볼 때에 그 짐승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그 짐승과 그 권세를 표범이고 곰이고 사자고 용으로 이렇게 표기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거 해석하고 싶거든 해 봐라‘ 이 말입니다. 해석을 가로막는 거예요. 인간의 역사적 해석을 가로막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적 해석을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자기의 행함이죠. 자기가 행할 때 자기를 뭐로 봅니까? 짐승으로 봅니까? 인간으로 봅니까? 나는 역사적 인간으로 봐요. ‘나 과거 역사가 이렇게 훌륭했던 인간, 지금 나라는 인간이 신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그런 인간이 신을 어떻게 보느냐 자체가 십자가에 의하면 그런 것은 허락될 수가 없는 사고방식 이예요.
어디? 인간이 어디 있는데? 누가 인간인데? 인간이 없어요. 인간이 없는데 인간이 자기가 인간이라 여기고 인간이라 여기는 상태에서 ‘하나님, 저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을 내가 섬기고자 합니다.’ 자기가 인간인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하는 상태에서 인간이라 여기고 자기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자기한테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을 설정해 놓으니까 그 관계 자체가 십자가를 또 다시 모독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훼방하는 그런 관계가 돼 버려요. 그런 구조가 돼 버려요. 그래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용, 표범, 곰, 이렇게 짐승의 수를 헤아려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마 너는 총명 있는가,’ 총명 있는 자라면 이 수를 헤아려보라 말이죠.
자, 그러면 아직 본격적인 것은 아니고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한데 본격적인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진짜 어렵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짐승의 숫자가 666이라 나오죠. 짐승의 숫자인데 ‘666 =짐승의 수= 인간의 수‘ 그런데 이 짐승의 수 666이라는 숫자에서 여기에서 지워봅시다. 짐승의 수를 지워버리고 인간의 수를 지워버리면 남는 게 뭐가 남아요? 숫자만 남죠. 하나의 피조물인데 하나의 존재를 수로 다루겠다는 거예요. ’수‘로 다루어버리면 그 사람의 취미나 개성이나 직업 같은 것은 여기서 어떻게 인정받아요? 인정 못 받습니까? 인정을 못 받죠.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인정 못 받죠. 인정 못 받으면 다른 걸로 평가받고 비판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럼 뭐로 평가받고 비판받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코도 없고 눈도 없고 뭐만 있다? 숫자로만 다루어지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666이라는 숫자가 7나팔 때 나와요.
7나팔이 되게 되면, 다시 말해서 7인, 7나팔, 7대접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심판이죠. 심판할 때 뭐로 심판하느냐 하면 ‘창조의 원리’로 심판합니다. 제가 지금 하나, 하나 거론하는 논리가 중요한 논리기 때문에 제가 빠뜨릴 수가 없어요.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심판합니다.
창조의 원리라 하는 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 몇 일간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때 심판 기준이 천지를 창조했던 그 기준에 준해서 심판한다고 해서 7로 완료 성을 보여줍니다. 1, 2, 3, 4, 5, 6, 왜 8이 아니고 9가 아니고 왜 7로 마감됩니까? 7은 7일 만에 완료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아까 처음부터 뭐라 했습니까? 완료 성, 완료 성, 완료 성, 완료 성,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그 완료 성으로 심판을 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심판 받을 만해서 심판하죠. 뭐로? 완료 성에 의해서. 그걸 숫자로 표기하면 7에 대해서 미완료가 되죠. 1, 2, 3, 4, 5, 6, 이게 완료입니까? 아니죠. 뭐가 빠졌어요? 7이 없죠. 만약에 7이 등장하면 앞의 1, 2, 3, 4, 5, 6, 은 7로부터 전부 다 심판을 받게 돼 있어요. 심판이란 말은 평가를 받는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안식일에 1, 2, 3, 4, 5, 6, 언제 안식합니까? 6일 날 합니까? 언제 해요? 7일 날 안식하죠. 안식할 때 1, 2, 3, 4, 5, 6, 이렇게 수평으로 돼 있어요. 7은 그 다음에 7입니까? 7은 그 다음에 7이 아니에요. 7이 위로 올라가야 이 전체를 심판할 수가 있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숫자를 셀 때 1, 2, 3, 4, 5, 6, 1+1=2되고 2+1=3되잖아요. 그럼 6+1 더하면 뭐가 됩니까? 6에다 하나 더하면 6된다니까요. 왜, 미완료니까.
예수님께서 뭐라 하시느냐 하면 용서하라 할 때 베드로에게 몇 번 용서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라 했죠. 일곱 번 하지 말고 몇 번해라? 일흔 번에 일곱 번, 이걸 490번으로 풀면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것은 니가 1, 2, 3, 4, 5, 6, 차원에서의 용서는 용서도 아니고 어느 차원에서? 완료 차원에서의 용서만이 용서가 되는 거라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베드로의 용서는 누구한테 심판 받아야 돼요? 주님의 용서에 베드로가 남을 용서한 용서의 행위는 누구의 의해서? 자기가 용서해 놓고 지가 지 평가하면 안 돼요. 왜냐, 육이 육을 평가한 거다 말이죠. 인간이 인간을 평가가 안 되니까 누가 평가해야 돼요? 누가 심판해야 돼요? 7, 예수님이 베드로의 용서는 ‘그건 용서가 아니야, 그 용서는 내 용서에 비하면 그건 쨉도 안 돼,’ 왜, 그 용서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는 다 뭐로 드러난다? 미완료고 죄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죄로 드러난다.’ 그걸로 그치면 안 되고 왜 인간의 행함은 죄가 될 수밖에 없는가, 그 배후까지 살펴야 되죠.
십자가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버리면 ‘니 십자가 믿나?’ ‘예’ ‘언제?’ ‘이천 년 전에.’ ‘믿으라.’ ‘믿습니다.’ ‘구원 받았다.’ 이래 돼요. 하나의 역사적 사건 속에 포함된 사건 중에 하나가 십자가 사건이 되니까 그것은 1, 2, 3, 4, 5, 6, 중에서 6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는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가 묵시적으로 도약해 버리면, 인간은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고 역사적 선입감 가지고 묵시적 십자가를 알 수가 없고 단지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는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왜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는가? 이유가 영적인 다른 쪽의 묵시적인 차원에서 그게 규명이 돼야 된다니까요. 아휴, 말도 참 어렵지만 하여튼 이럴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니 인간의 배후에는 누구 있다? 짐승 있고 악마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배후에 누가 있는 건 생각 안 하고 ‘십자가 믿지 뭐, 이천 년 전에 주께서 살아나셨다는 거 믿습니다.’ 그 ‘믿습니다.’ 하는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자기 존재, 나는 ~~을 믿는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이게 명사가 아니고 동사가 돼 버린다 말입니다. 동사가 돼 버리면 동사의 주체인 나는 귀한 존재가 돼 버려요. 죄인이 아니라니까요. 아! 내가 이렇게 훌륭한데 예수까지 믿는데 얼마나 훌륭하냐 말이죠.
다시 할게요. 십자가 3개 있었죠. 옆에 똑똑한 강도 구원 못 받았잖아요. 똑똑한 강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평가 안 했습니까? 평가 했어요. ‘저 인간은 나를 구원하지 못해, 왜, 내가 납득이 안 되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 인간을 내가 안 믿을 거야.’ 이것을 뭐를 규제한다?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역사적인 관행과 내성과 그런 모든 것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일하고, 일하고 일하여 왔던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나는 때려죽어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에 예수가 더 보태 준다면 예수 믿어줄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 십자가 달리다가 갑자가 우두두둑, 우두두둑 십자가 못을 다 빼버리고 강도에게 와서 강도 못도 다 빼버리면 그때는 예수를 인정하죠. 왜 내가 예상하고 있던 내가 알고 있던 권력의 힘이나 구원의 힘이라는 것을 고 정도니까 거기에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구원의 힘에 메시야가 도와주니까 뭐가 긍정됩니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죄가 아니고 정당한 것으로 긍정이 되니까 나 긍정, 긍정된 내가 예수님을 긍정하니까 둘이는 동업자 되고 짝꿍이 잘 맞다 이 말이죠.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예수 믿기 아닙니까?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단이라니까요. 한국교회가 이단인 걸 왜 그리 몰라요? 인간들 자기 긍정하러 교회에 옵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수요 설교에서 인간이 자기한테 너무 동정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진노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 같은 불쌍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이러면서 교회 나온다고요.ㅎ 갑자기 표정들이 왜 그래요? ‘주여, 저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가 너무 불쌍해. 그 불쌍한데다가 주께서 자기가 불쌍히 여기는 거기다가 조금만 보태서 같이 불쌍히 여기면 얼마든지 예수 잘 믿을 용의가 돼 있는 사람이 한국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니 죽을래?’ 이래 된 거예요. ‘누가 불쌍한데?’ 누가 불쌍합니까? 우리가 불쌍합니까? 우리대신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쌍해요? 누가 고통이 심한 겁니까? 예수님 고통이 더 심한 거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음 있을 때 착하다 했습니까? 뭘 바칠 때 믿음이 있다 했습니까?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을 누구 손으로? 번개 쳐서? 남의 강도한테 죽어서? 아니에요. 사랑하는 자를 자기 손으로 죽이잖아요.
사랑하는 자를 죽이는 그것만이 유일한 사랑입니다. 죽이는 게 사랑 이예요. 살리는 게 사랑이 아니고. 그런데 한국교회는 살려고 교회 온다니까요. 얼~마나 정 반대입니까? 하나님, 괜찮은 인간 더 살려달라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니까 삯꾼 목자들이 악마의 종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동정하십니다.’ 하면서 계속 긍휼이고 사랑이고 막 쓰잖아요.
하나님이 아들을 죽였으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만 죽이면 안 되고 하나님이 나도 같이 죽으라고 해줘야 그게 믿음에 합한 겁니다. ‘하나님이여, 날마다 죽이옵소서. 비가 오든지 죽이옵소서.’ ‘가만히 있어봐, 안 그래도 죽이고 있다. 니가 백날 살아야 백 살을 살겠어. 이백 살을 살겠어. 차분하게 죽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성도가 감사하고 놀라울 것은 하나님이 나를 죽인다는 것을 즐겁게 반길 수 있는 믿음을 받았다는 것, 그 성령,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그러한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에 본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감격하는 것이 그게 할렐루야고 아멘입니다.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는 완료 성에서 미완료 성을 심판한다. 완료 성을 숫자로 표현하면 7로서 포함되고 7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것은 뭐냐, 7이 아닌 것, 7이 아닌 것의 마감, 7이 아닌 숫자의 최종적인 마감, 무슨 자가 되겠어요? 6이 되죠. 6이라는 숫자에서 666이 나오기 위해서는 7이라는 심판 것이 등장해야 비로소 인간의 숫자와 짐승의 숫자가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그래서 666은 요한계시록 13장에 기록돼 있어요. 초반부터 나오는 게 아니고. 그 전에 기준이 뭡니까? 심판 완료 성에 의한 7나팔이라는 심판이 계속 이루어져야 되는 겁니다. 뭘 규명할 때까지? 인간의 숫자가 될 때까지. 그리고 짐승도 숫자가 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은 숫자로서 이 7이라는 숫자가 나타날 그때까지. 꾸준히 가야 되는 거예요.
이 관계에서 핵심적인 것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해요. 그 심판 받아야 될 짐승은, 계속 반복합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3장에 “뿔이 열이요” 짐승의 뿔이 나오는데 뿔이라는 것은 뭔 뜻이라고 했습니까? 뿔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걸쳐 놓은 것이 아니고 그거는 자기의 빼도 박도 못하는 자기의 본성이라고 했죠. 악마의 본성이라 이 말이죠. 뿔이 열이요. 그 말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이건 뭐냐 강하다는 것에서 악마가 ‘나는 강하지만 겸손하겠습니다.’이런 악마는 없다 말이죠. 왜냐 하면 인간은 뿔의 본성을 본인이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뿔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이 됩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하는데 미워할 수 있어요? 자기는 뿔이 있는데. 짐승이 박아놓은 뿔이 있는데.ㅎ 그리고 그 뿔에는 노림수가 있어요. 그 뿔에다 면류관 쓰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런 본성을 지가 뿔을 뽑지 못하듯이 그 본성이 바뀌지 않아요.
그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표범과 같고 사자 같고 곰 같고 용 같죠? 용, 사자, 표범, 곰,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행함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곰이면 곰, 표범이면 표범, 용이면 용, 여러분, 사자가 착한 일 한다고 사람 되는 것 봤습니까? 없죠. 하나의 곰이고 어떤 짐승으로 표현했다는 말은 그 본성은 본인이 이미 어떤 착한 행동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행함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자체가 동사가 아니고 이미 굳어진 명사, ~~ 것이라는 것으로 ‘너는 짐승이야.’ 짐승이니까 결코 짐승 아닌 행동을 나올라야 나올 수가 없다고 확정짓는 겁니다.
이미 ~~것이라는 이것이 짐승과 같이 영적 존재, 묵시적 존재에게 했다면 묵시적 바탕위에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란 아무리 날고뛰고 깝죽대고 촐랑대봐야 어디 묶여있다? 짐승이라고 규정된 짐승이라는 이런 속성에서 빠져 나올라야 빠져나올 수 없는 같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봅시다.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이게 어디서 왔습니까? 바다에서 올라와요. 자,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이 뭔 뜻인가를 이사야 54장 9절인데 너무나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찾아보겠습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여기서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뭔 뜻이냐 하면, 바다가 뭐를 범람치 않게 한다? 땅을 범람치 않게 돼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바다가 범람하지 않고 하나님이 바다를 땅을 범람하지 않게 제쳐놓고 땅과 상대했던 그 땅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나누어 갖죠? 그러면 유다 땅은 누구지파입니까? 에브라임 땅은 에브라임지파지만 유다 땅은 유다 족속 땅이죠? 그것은 유다 족속 땅이 지가 농사지었기 때문에 땅을 준 겁니까? 뭣 때문에 유다 족속 땅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약속)에 의해서 분배받은 거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분배받았다는 말은 그 땅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죠. 땅을 얻기 위해 애쓰고 공로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주인이 되셔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물리치시고 하나님이 전리품으로 얻었던 그 땅을 공짜로 누구한테? 자기 언약 백성에게 공짜로 인구수에 따라서 나누어 준 것이 땅 분배의 언약 적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유다 땅은 누구 족속 땅이죠? 유다 족속이죠. 그럼 예루살렘은 누구 땅이죠? 예루살렘이 유다 족속이어야 되잖아요. 왜, 예루살렘이 유다 땅에 있으니까. 그게 다윗 언약으로 누구 땅으로 바뀌느냐 하면 다윗 왕의 땅으로 바뀌어요. 요게 아주 신비로워요. 12지파가 골고루 땅을 분배했으면 수평적인, 평균적인 환경입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에 와서 유다 자손의 땅이면서 유다 자손을 위한 게 아니라 유다 자손 위에 12지파에서 유다자손에서 또 뭐가 떠오느냐 하면 레위 족보에서 멜기세덱 족보에 따르는 다윗의 자손에 올라버려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수평적으로 12개의 땅이 있을 때는 하나님은 수직적으로 위에서 골고루 바라보는데 이제는 12개의 땅이 하나의 중심으로 응축이 된 겁니다. 어렵다.
여러분, 이방 민족의 문제점이 사다리가 없다는 걸, 아십니까? 여러분, 사다리가 어디 나와요? 창세기 28장에 나오죠. 야곱이 밤에 가다가 사다리 있죠.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차이점은 한쪽은 사다리 위에서 천사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건 언약 민족 이스라엘이고, 저쪽은 사다리가 없어요. 사다리가 없다는 것은 백날 빌어봐야 가짜고 헛짓이라 말이죠.
그러면 그 사다리를 받으면 될 게 아니냐? 사다리는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생성시키는 겁니다. 게임에 두더쥐 게임 알죠? 두더쥐 게임에서 여기 두더쥐가 나올 줄 알고 기다리가 딱 치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두더쥐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옆에서 구경을 해보니까 어디서 나올 줄을 모르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사다리가 다윗을 통해서 나오는데 다윗이 기대했던 다윗이 아니고 핍박받는 다윗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핍박받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12지파의 평등한 민주적 제도를 누가 반대한다? 다윗이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 받으면서 그 고난의 현장에서 숨어있던 하나님의 사자들이 거기서 주어지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 역사적으로 ‘이게 이스라엘이야’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것에 반대했다가 반대했다고 핍박받다가 쫓겨나고 고난 받는 그 현장에서 뭐가 존재합니까? 하나님의 숨겨놓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다리가 거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죽음을 당할 때, 그 죽은 자리가 유일하게 하나님과 세상이 통하는 사다리 같은 언약의 완성의 자리가 거기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땅이라 하는 것은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있는 땅에서는 하나님이 땅과 상대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 많은 민족 가운데서 누구만 알았나니, 내가 이스라엘만 알았고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의 씨와 땅과 거래해서 상대했어요. 그러면 그 가운데 바다는 어디 있어요? 바다는 넘실대지 못하도록 바다는 그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언제까지? 바로 예수님 십자가, 메시야가 이스라엘한테 버림받기 전까지 그렇게 했죠.
자, 이게 땅입니다. 이게 바다인데, 땅의 중심은 뭐라 했습니까? 성전 있는 곳, 사다리가 있는 곳, 언약이 있는 곳, 이게 땅에서 중심이 되는데 이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전을 세우고 모든 것이 성전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요나가 배 밑에서 걸렸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호출했습니까? 호출해서 배에서 벗어나게 했죠. 이 요나가 두 번 갇히게 돼요. 한 번은 배에 갇히는데 이것은 갇힌 게 아니고 지가 스스로 숨어서 배타고 도망치려고 한 거고 주께서는 요나를 끄집어내서 어디데 갇힙니까? 큰 물고기에 가두게 되죠. 그 가두어진 그것이 뭐냐,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성전이 있는 물고기 속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능을 하라고 큰 물고기가 토해서 원래 성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스라엘이 원했던 기능을 다 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 요나가 가는 그곳이 니느웨 성인데 니느웨 성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자격으로 가는 겁니다. 왜, 자기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겁 없이 가는 거예요. 여러분도 예수 믿고 겁내지 마세요.ㅎ 여러분도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요나예요. 내가 지금 취미로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취미로 예수 믿는 게 아니잖아요. 취미로 예수 믿을 거 같으면 반드시 여러분, 역사적 존재로서 나중에는 역사적 존재로 가짜라는 게 들통 나요.
하나님께서는 가짜인지 아닌지 들통 내기 위해서 자꾸 역사적 사건을 일으켜서 ‘니가 믿는 것이 과거에 잘 믿던 그걸 쥐고 있느냐, 니 행함을 쥐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죽어 마땅하다’는 그걸 쥐고 있느냐 그걸 아느냐를 보시는 거예요. 어쨌든 요나가 거기에 갔을 때 요나는 계속해서 갇혀 있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전중심으로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요나시대에는 요나가 중심이고 다윗시대는 다윗이 중심인데 항상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불타버려요. 그럼 성전이 어디 갔습니까? 성전이 불타 버렸다 말이죠. 성전을 누가 불태웠습니까? 이스라엘이 휘발유 붓고 라이터로 성전 불태웠습니까? 성전을 누가 불태웁니까? 이방 민족들이 불태운 걸 가지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불태운다고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땅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 땅의 인간은 뭐냐 하면 이걸 +로 본다, 이게 중요한데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데, 이 +가 뭐와 만나야 묵시가 되느냐 하면, -, 아까 이사야에 하나님의 노아 언약에 의하면 땅은 땅이고 바다는 바다로서 바다가 땅을 넘친다? 안 넘친다? 분류를 시켜놨어요.
땅은 이것만으로 하나님은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성전이 불타면서 - 가 +땅을 결합시키면 이것이 바로 역사적 시점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해석을 해야 될 필요성을 주는 겁니다. +가 -를 만날 때, 악마와 만날 때, 이게 왜 이스라엘 땅이 이방나라한테, 아까 다시 이야기하면 지들이 스스로 해결한다고 스스로 휘발유 부어서 성전 불 지른 게 아니죠.
언약이 없는 하나님께 저주 받아야 될 그 민족을 향하여 자기 백성이 저주받게 하죠. 그렇게 하려면 그 동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서 ‘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니 힘껏 보존하자’ 역사적 이스라엘을 쥐려고 그것이 구원의 자세인지 알고 오해했던 그들이 그러한 생각 자체가 뭐였다?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방나라한테 불태워 버리죠. 이걸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 보죠. 다니엘서에 나오잖아요. 곰 같은 사자 같은 표범 같은 짐승이 날아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한다. 그때가 온다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을, 이제 다니엘이 이해되겠죠.
아! 가만히 있던 바다가 이것이 발작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땅에 있는 이스라엘, 한국나라 이런 건 다윗언약과 상관없습니다. 오직 성전이 있는 곳을 치는구나. 그러면 +와 -만나는 여기서 묵시가 나오죠.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읽지 말고 악마와 메시야가 만나는 영적 사건으로 해석을 하라는 뜻 이예요. 그 해석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었던 것이고 그 해석을 위해서 이방 나라가 있었던 겁니다.
십자가를 영적인 해석으로 하고 역사적으로 ‘옛날에 있었었지.’라고 하지 말고 지금 역사에서 시간 빼버리면 뭐가 되요? 묵시가 되죠. 예수님의 행함을 빼버리면 예수님이 지금 살아 움직이는 예수님 행함이 나와요. ‘그때 가룟 유다가 팔아먹었기 때문에 예수 죽었어.’ 아니에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고소해서 예수 죽었어.’ 아니라니까요. ‘그때 가야바하고 빌라도하고 핍박해서, 빌라도가 정신 똑바로 차려서 해야 했는데....‘ 아니에요.
뭡니까? 예수님 스스로, 누가 날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 거예요. 스스로 죽는 하나님 이외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뿐 이예요. 살아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귀가 만들어 내요. 마귀가 그렇게 부추겨서 그래요. 사람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지가 살고 싶어서 그래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가 죽고 싶어서 믿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걸 하려면 우리는 사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해석은 결국은‘ 누가 666이냐, 누가 짐승이냐,’라고 묻지 마시고 ‘누가 666이라고 칭하느냐.’ 가 중요해요. 누가 666이라고 칭하고 누가 짐승이라고 언급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묵시적으로, 영적인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 타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666이죠.
아이, 목사님, 모든 게 짐승이라고 하면 안 되죠. 모든 게 짐승이라고 보면 안 되죠. 성도도 있잖아요.’ 하면 이게 그 다음시간에 할 건데요. 미리 이야기하면, 성도는 여분의 것이고 안 나와야 될 존재입니다. 나오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성도라는 게 나오면 안 돼요. 이것은 인류의 역사적 문제에 있어서 성도라는 것은 존재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도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인간이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이 자체가 반칙 이예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다 죽어야지 자기 혼자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면 안 돼요. 그럼 그 반칙을 누가 먼저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했어요. 예수님이 분명히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면서 요셉과는 무관하게 태어났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반칙이고 그 다음 줄줄이 반칙이 누구냐 하면 두자로 성도라는 사람, 그 존재, 그것이 어째서 그런가, 그건 다음시간에.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