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707요한계시록12장-(용과 남자와 여자)-18강a-(이 근호 목사) 제 18강a
자,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3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이렇게 돼 있죠? 이 현실을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은 무의미합니다. 평소에 누구나 서울에 사는 사람이나 촌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은 의미가 없어요. 의미라 하는 것은 누가 자기한테 의미를 줄 때 그것을 본인이 평소에 듣고 싶었던 의미가 왔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송 재원씨보고 ‘당신은 훌륭한 인민군입니다.’ 하면 본인은 ‘내가 왜 북한 군사 인민군이야?’ 이러겠죠. 그런데 ‘송 재원씨는 정말 미남이다.’ 하면 ‘그야 뭐 내가 많이 듣던 소리다.’ 하죠.ㅎ
이거는 뭐냐 하면 평소에 듣던 이야기를 누가 남이 해줄 때 그때는 의미가 있지만 만약에 누가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한다면 이 현실 자체가 무의미한 현실 이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게. 짐승하고 살아가는 거, 우리가 짐승을 놀리지만 짐승은 우리를 보고 놀릴 거예요. 왜냐, 둘 다 똑같이 그저 자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죠. 자식 낳았으니까 키우는 거고 그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어쨌든 뭐냐 ‘무의미 함’ 이것을 두 자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병원에 환자가 이빨 고치기 위해 왔다. ‘아저씨, 세상이 뭡니까? 의미가 뭡니까?’ 물으면 ‘이빨이나 고쳐주세요.’ 아프니까 낫게 해달라는 것뿐이지, 이 세상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누가 외부에서 의미를 주면 의미가 있는 게 아니냐, 줘도 우리는 그걸 거부하죠. 내 맘에 안 들면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이 나오고 남자 나오고 여자 나오죠? 성경은 뭐냐 하면 우리가 모르는 이 무의미한 현실에 의미를 주는 거예요. 성경은 뭐냐, 우리가 사는 존재 이유, 의미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우리는 그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거부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이 여기서부터 어려운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용에게 쫓겨 다니는 남자가 되고 싶은 그런 포부가 있었습니까? 없죠. 우리가 평소에 북한의 인민군 되고 싶어서 환장하지 아니잖아요. 그런데 ‘니는 북한 인민군 같다.’ 하면 물론 거부하죠. 평소에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진짜 니가 존재하는 의미라고 줘버릴 때 우리는 그것을 수긍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용에게 쫓겨난 남자, 이거 우리가 언제 되고 싶어 했습니까? 갑자기 용, 드래곤은 왜 나왔는데요. 성경 어렵죠? 성경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 세상은 선택이 아니고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가지면서 거기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선택을 하죠.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 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해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 구원 받는 요소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내가 부처를 선택한 게 아니고 내가 공자를 선택한 게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했습니다.‘라는 자기 선택이 포함돼 버리면 이것은 천국은 주님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 세계냐 하면 천국에다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사적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게 돼요. 이런 천국은 애시당초 하나님께서 만들지를 안했어요.
그래서 진짜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늘 선택하면서 그 선택에 대해서 의미 없게 걷어 차버리죠.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겠습니다.‘라 하면 ’저리가, 나는 그런 식으로 널 구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안 믿어도 저는 믿습니다.‘ ’둘 다 똑같애.‘
막 살면 구원 받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죠. 구원 못 받죠. 막 안 살고 성실하게 살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 말을 행함 주의자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 받은 것이 나의 ‘막 살까? 아니야, 절제해서 살아야지.’ 이런 선택을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이란 당첨되는 겁니다.
로또 복권을 하나 샀다고 합시다. 번호가 마지막이 17번이라 합시다. 지금 기계가 돌아갑니다. 그런데 17번 갖고 들고 와서 ‘아저씨 잠깐만, 17번 나오도록 기계를 조정해 달라’ 이렇게 들이댈 수는 없죠? ‘주님, 잠깐만. 내가 예수 믿으니까 예수 믿는 것만 인정해 주세요.’라고 하면 주님은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돌리다 보니까, 17번 46번 32번 56번 로또 당첨, 당첨된 자만 천국 갑니다. 불가능이죠.
그럴 때 우리는 로또를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는 불안정으로 보죠. 왜? 내가 뭐를 해도 무슨 번호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번호를 따져서 사도 딴 번호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정으로 보죠. ‘아! 로또는 확신이 없어. 어떻게 확률일 뿐이야, 불안정해.’
그런데 그 당첨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안정성’이라 해요.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무조건 모든 하나님의 변화가 불안정한데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안정됨이 비로소 지상에 펼쳐진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너무나 안정돼 있어요. 시간이 나면 글을 읽어보면 안정돼 있어요. 참, 보는 사람이 편해요. 앞과 뒤가 다 안정돼 있어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이 다 없어지고 예수님께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안정적인 하나님의 스케줄만 쫙 나와 있어요. 그걸 누가 안정적으로 믿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안정적으로 보게 돼 있습니다.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선택, 내 결단, 내 믿음, 내 믿음이야 아침저녁마다 다르니까, 아이,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어. 글쎄 주님께서 이렇게 안정적으로 하니까 그 안정적인 메시지로만 내 마음에 너무나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행함의 글을 보면 초반부터 불안정해요. 무척 불안정해요. 불안정을 보존하기 위해서 온간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보존해보고자 하지만 그 보존하는 받침이나 나사 몇 개 빠져버리면 무슨 고장 날지 모릅니다. 테크노빌딩 흔들리듯이 무너질지 몰라요.ㅎ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설교할 때 제일 설교를 평을 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안정적인가를 봅니다.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모순되는 게 없는가, 안정적인가를, 어느 성경 구절을 해도 안정적이냐를 보는 겁니다.
수학에 이런 말이 있어요. 유한집합은 무한집합을 커버할 수 없다. 유한집합, 10아래의 숫자 1,3,5,7 서수가 아닙니까? 자기와 1과 자기 외에는 분해되지 않는 거, 서수라 하거든요. 서수의 집합 그거는 내재돼 있죠. 그런데 자연수의 집합, 이거는 7656 다음에 7657나올 거고, 이거는 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한은 뭘 커버할 수 없습니까? 무한을 장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무한이 안정적 이예요? 유한이 안정적 이예요? 무한이 안정적이죠. 그래서 무한이 유한을 덮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유한도 자기 유한을 포기해도 됩니다. ‘나 유한의 시대는 끝났어. 나의 선택과 행함의 의미를 주던 시대는 떠났어. 내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것이 내가 의롭다 한 이것도 다 소용없는 거고, 내가 어디 구제하고 봉사하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된다한 발상도 덮쳐버린 예수님의 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김 샌 거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안정적으로 들려요. 뭔가 듬직한 항공모함 안에서, 크로즈, 수영장에서 뱃놀이할 때 배가 뒤집어져도 크로즈 큰 배는 안 뒤집어지잖아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해요. ‘그냥 즐겨라. 인생, 너무 착 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공부 많이 하려 하지 마라, 그냥 즐겨라.’ 누구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겨라. 왜?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즐겨라.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의미를 찾지 마라.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주의 말씀 이예요. 십자가에 담겨있는 십자가 안을 뜯어보면 전도서가 나와 있어요. 왜, 십자가는 전도서, 잠언서, 시편 다 완성한 거잖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 가보면 이것이 다 들어있어요.
만날 성질 급한 사람은 저 같은 사람도 그렇지만 과자 같은 것을 주면 그 봉지를 뜯다가 급하게 뜯다보니 과자가 사방으로 다 튕겨나가요. 성경 십자가 뜯어보면 저쪽 편에는 창세기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잠언 시편이 다 떨어져 있어요. 처음부터 어디로 모아졌습니까? 모든 언약은 새 언약의 완성 속에 전부 다 해태 종합선물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뜯어보면 내용물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어디 안에서 해석이 돼야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이 돼야지 그 외 다른 해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불안정해져요. 잠언서 건드리면 전도서에서 반대로 이야기하고 전도서 건드리면 잠언서 반대로 이야기하고, 그걸 정리를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성경을 행하려고 하니까 인간은 유한집합 아닙니까? 인간이 지가 세상에 대해서 지금 우간다에서 뭐를 알며 기껏 알아야 평창에 대해서나 알지, 일주일 전에 평창 표가 몇 표가 나오는지 알 수 있겠어요? 아무도 모르죠. 주께서는 다 아시죠. 그러니까 유한집합이 되는 우리 인간은 그 안에 주의 무한한 말씀을 담을 수 있다? 못 담는다? 못 담죠. 못 담으면 담기라 말이죠. 본인이 담길 수 없고 주께서 덮쳐버리면 그 안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누룽지탕에 들어있는 하나의 누룽지라고 할까?ㅎ
지금까지 이야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큰 건물이나 빌딩에 보면 냉방기구가 있어요. 굉장히 기능이 좋은 큰 에어컨이 있으면 에어컨을 각 방마다 연결 통로를 만들어서 냉기를 공급합니다. 그러면 1호실 냉기하고 2호실 냉기하고 어느 것이 더 시원합니까? 똑같죠. 예수님의 십자가 의가 흑인이 더 착합니까? 백인이 더 착합니까? 그거 상관없죠. 어린애가 더 착합니까? 노인네가 더 착합니까? 상관없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하고 협상해서 맺은 게 아니고 사람이 노려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하나님이 완성시켜서 마련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십자가 의가 하나님의 의거든요. 로마서 1장에 나오죠. 이 복음은 곧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돼 있죠. 그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가 누구냐 물었는데...
그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질적으로 뭔가 하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여자가 줬다고 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남자라 해서 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목사에게 줬다고 의가 만개하는 것이 아니고 집사에게 줬다고 의가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는 어디가도 빛이 나게 돼 있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변화하는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안정성, 다른 말로 고정성을 집어넣어 버려요. 고정성!!!
그러면 우리는 늘 상 아침에 한 시간, 두 시간, 5분, 10분 전까지 머리가 왔다 갔다 하죠. 어떤 사람이 좋아졌다, 싫어졌다, 잘해주면 예뻐졌다가 싫어졌다가 만날 다른데 그거 말고 고정된 것이 우리 속에 있어야 돼요. 그 고정된 것이 뭔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어요. 그럴 때 말씀이 와서 그걸 확인시켜 줍니다. 확인시켜 주면 이제부터 어려운데, ‘용이 땅으로 쫓겨나서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니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봤잖아요. 이것이 하나의 고정성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성경 말씀은 뭐로 해석돼야 된다? 모든 말씀을 완성한 분이 따로 있죠. 그것은 뭐냐, 말씀을 줄 때 그냥 말씀만 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말씀을 준 거예요. 율법 안에는 율법의 완성 자가 계셔서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문이 이래 있는데 손만 내밀면 손은 따로 놀고 나는 따로 논다 말이죠. 바깥사람이 손을 보고 손의 몸체는 있을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레위기를 주고 민수기를 줬잖아요. 그러면 민수기, 레위기를 따라 더듬어 보자 말이죠. 마지막에 누가 나옵니까? 새 언약의 완성 자 누구예요? 예수그리스도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이다. 그걸 반대로 이야기하면 창세기 1장은 누구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 들어있는 거예요. 목회자는 설교자는 그걸 끄집어 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걸 끄집어내는데 있어서 그 강원도에서 감자 캐는 할머니가 조직신학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딱 그날 어떤 목사님한테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뭣까지 연결시켰다? 예수님 이야기, 그러니까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 맞습니다. 우리 죄 용서 받습니다.‘ 라고 한마디 하고 듣고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오늘 밤에 낙원에 가죠.
그러면 다른 목사님이 ‘할머니 지금 죽으면 안 돼요. 할머니 그건 1부 순서고 낼 살아야 2부 순서 들어야 되는데 지금 죽으면 지옥 갑니다.’ 이러면 안 되죠. 빌립 집사가 성령 받아서 이디오피아 내시 만났을 때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이사야부터 시작해서 성령이 충만하니까 성경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누굴 증거 했느냐,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입니다.‘라고 하니까 그 즉시로 가다가 물도 있고 하니까 세례 받았죠. 물론 성령 세례 받았죠.
다시 정리하면 성경은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 들어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몰랐다? 유대인이 몰랐다. 유대인이 왜 몰랐느냐 하면, 유대인의 구조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말씀 밑에 누가 있다? 우리 자신, 우리 인간이 있다. 우리 인간이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 영광 돌린다. 이런 구조로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서, 하나님 있고 여기에 인간이 있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 있고’가 무산돼 버려요. 자기가 인간이라 하지만 인간이란 없어요. 죄인밖에 없는데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죠. 인간이 인간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말도 안 돼요. 양쪽 다 엉터립니다. 둘 다 다 지어낸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이 스스로 활동해 버리면 말씀이 완성이 돼 버리죠. 완성이 돼 버리면 완성의 티를 내게 돼 있습니다. 완성 값을 하게 돼 있어요.
완성 값,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어려운 것 아니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십자가는 세상 인간의 죄, 자기 택한 백성이지만 십자가는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거 아시죠? 그럼 십자가 졌잖아요. 그 다음에 그러면 다 이루었으면 가만히 있을까요? 아까 멘트가 뭡니까? 갈라디아서 1장 4절, ‘세상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한다면 그 다음에 무슨 작업을 하겠습니까? 세상 죄를 본격적으로 알려주는 작업이 미완성 상태가 아니고, 완성상태에서 죄를 알려주기 때문에 ‘야! 내가 죄인 맞구나.’ 아는 것은 그 배경이 뭐가 있습니까? 이미 나는 구원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는데 하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 죄를 알아가는 작업을 성령께서 실시시키는 거예요. 적용시키는 겁니다. 세상 죄를 알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 뭐냐 하면, ‘야, 바로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
‘죄인이니까 구원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래 주장하거든요. 내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영광 돌리는 것까지 다 포함된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죄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영광이 더 되는 게 아니고 이미 영광되었기 때문에, 아까 냉방기 다시 그려볼까요? 이미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각 호실에 냉기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런 죄를 통해서 자기십자가를 봤고, 이 사람은 이런 죄를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예요.
공 은주 집사님은 안경 꼈다고 그것 때문에 불평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알고, 이 한례 집사님은 눈썹 사이가 떨어졌다고 그것 때문에 불평해서 하나님께 대한 죄를 알고,ㅎ사람마다 다 틀린 거예요. 어떤 사람은 키가 작다고 불평해서 ‘이게 죄구나.’ 어떤 죄를 하든 간에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된 관계성 안에서 주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믿었으니까 이제부터 영광 돌리고 행함을 하자고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안 남아있다니까요. 그게 영광 이예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영광 돌리는 방법은 뭐냐 하면 완전히 정강이를 군에 가면 군화발로 정강이를 차잖아요. 훈련할 때 고참이 쫄병한테, 그러면 정강이 맞으면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죠. 그런 식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겁니다. ‘이게 어디서? 내 앞에 무릎을 꿇어.’ 하고 발길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욱’ 하고 무릎을 꿇죠.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그 다음에 뭡니까? 꿇어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걸 경상도 말로 초때 비깐다. 해요. 그런데 그렇게 까일 때 깐다는 것이 구원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되는 거예요. ‘너 구원 받은 거 맞잖아. 왜 몰랐어.’ 행함 없이 이미 까인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 안 받으면 안 까입니다. 한번 만져보세요. 벌겋죠. 얼마나 무릎 꿇는다고 애 먹었어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십자가 마을 글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디까지 되느냐 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영향력 있을 때까지만 우리가 죄가 된다 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영향력이라는 것은 선악과나무가 없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어디예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천국에는 선악과가 없습니다.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선악과가 영향력 없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어딥니까? 지옥이고 또 여기겠죠. 그 동안에는 우리가 우리 행함으로서는 의가 나올 수 없어요. 왜? 선악과 영향이 계속되기 때문에.
옛날에 보건소에서 모기를 없애기 위해 모기 차에서 뿌려주는데, 그 안개 같은 연기가 남아있는 한 모기는 없겠죠. 그런데 바람 불어서 날아가면 모기가 ‘엥~’ 하고 돌아다니잖아요. 그 선악과가 있는 이상은 선악과 앞에서 율법 앞에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라는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 영향력이기 때문에. 모기가 있으니까 모기약을 치잖아요. 지금 선악과가 모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악과에 율법의 저주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성경의 율법적 기능을 늘 봐야 되죠. 그러니까 늘 무릎을 까여야 되죠.ㅎ
그렇게 되면 결국 남는 게 뭐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은혜만 남죠. 우리 사람은 빠지고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아들만 의논해서 ‘주께서 내 주에게’ 시편 110편에 아버지께서 내 주에게, 성부 아버지께서 성자 아들과 의논한대로 창세전에 선택한 것, 그 선택된 자에게 해당됨을 보여주는 그러한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우리 안에 안정성으로, 고정성으로 오는 거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한번 적어 볼게요. 제가 적어보고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①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요 문장이 좋습니까? 아니면 ②평창 63표 따서 2018년도에 동계 올림픽 한다.‘ 우리 말고 강원도 평창 올림픽 추진하는 위원장에게,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까? ②번이겠죠. 자기가 본업이 그거니까. 그런데 이것이 불안정하다니까요. 우리에게 허탈과 허무를 가져다 줘요.
그런데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이것은 안정돼 있는 겁니다. ②, 이것은 행사 잘못 치르고 행사 할 때 북한에서 테러 있고 하면 엉망진창이 돼 버려요. 그러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이거는 누가 이걸 바꿔요?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뭡니까? 권세 자, 악마, 천사, 어떤 것이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것을 알아버리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별 문제가 안 돼요. 이 기쁨을 누가 뺏습니까? 이게 바로 성령이 주신 기쁨 아닙니까? 여기에 무슨 행함이 들어가요? 성령 안 받아서 이게 안 되니까 자기 행함으로 뭔가 기쁨을 얻으려고 하니까 ‘이번에 평창 때문에 내가 얼마나 기도했다고, 역시 기도응답 받았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기쁨 거리가 없으니까 자기 행함이라도 집어넣는 거예요.
엄마 위해서 기도했더니 이제 엄마가 교회 나와서 기쁘다.‘ 기쁘겠죠. 하지만 그 기쁨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의 기쁨과 대신할 수 있습니까?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엄마 교회 나왔다가 한 달 나오다 도로 나가버리는데.
오늘 이 본문에서 이렇게 서론이 긴가 하는데 지금 이 대목이 성경책에만 문자로 박혀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이 현실이 되어서 우리 속에 고정성으로 심처럼 열심히 들어와야 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밥 먹고 사는데 신경 써서 용에게 쫓겨 가고 남자를 낳은 여자가 쫓겨 간다 하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평창하고 상관없는 여기서 무슨 기쁨을 얻으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기 십상이란 말이죠. 지금 이걸 이 고정성을 집어넣어야 돼요. 그러면 그 다음이 문제라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이 우리 속에 하나의 고정성으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아까 현실은 의미 있다? 의미 없다? 현실은 무의미한 현실이죠. 무의미한 현실에 외부에서 의미를 주는 겁니다. 용, 남자, 여자, 또 중요한 거, 독수리, 광야, 이런 용어 나오잖아요. 한번 읽어봅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우리는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그냥 사니가 사는 거죠. 의미도 없어요. 배고프니까 밥 먹고 잠 오니까 잠자는 겁니다. 별거 아닌데 의미 찾지 마세요. 이빨 아프니까 치과 가는 거고, 그런 거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부에서 의미를 줘요. 용, 남자, 여자, 독수리, 광야, 이걸 뭉쳐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 봐라 말이죠. 마치 우리에게 낸 숙제 같아요. 유치부 애들한테 용, 남자, 여자, 이거로 하나의 문장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그러면, 아니요, 그러나, 집어넣어서 문장을 만들어 보라는 말이죠.ㅎ그 문장 가운데서 누가 나와야 돼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나오면 그게 성공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뤘으니까. 십자가라는 과자 봉지를 째버리면 요한계시록 12장 이것도 13장도 거기서 팝콘처럼 섞여서 팝콘처럼 튀겨져서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걸 다 다시 담아버리면 어디에 담긴다? 십자가에 담기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인간이 지혜로 알 수 있어요? 없어요? 모르죠. 그래서 비밀, 감추어진 비밀, 또는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 그러면 그 비밀이라는 콘칩이라는 과자, 여기 과자 봉지 안에 과자가 있는 것처럼 과자 하나, 하나가 결국 십자가 안에 들어있죠.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은 믿는 겁니다. 아! 이거 좋은 말인데 내가 해놓고 좋다 하는데, 십자가의 모든 말씀을 하나, 하나를 ‘믿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줄로 믿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돈을 사랑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줄로 믿는 겁니다. 왜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함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가거라. 불가능한테 불가능하니까 ’에이, 안 되는 거야‘가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게 되게 돼 있어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게 지켜지는 거고, 우리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걸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이건 주님이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을 가지고 지가 지키려고 나서기 때문에 출발 자체가 엉터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렇다면 그 좁은 길도 하나의 비밀이 되겠죠? 좁은 길을 가는 게 비밀이 아니고 좁은 길 안에 누가 들어있다? 그리스도가 동행한다는 게, 그리스도가 비밀이 되겠죠. 그리스도가 항상 비밀로 존재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 말씀에.
그럼 용, 남자, 여자, 독수리, 광야, 이걸 한데 묶어 버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여기서 어떻게 해서 도출 되는가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ㅎ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의 의미죠. 현실이 있는 이유이고 사는 목적이고 우리가 사는 이유가 되는 거죠. 이게 없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지금 괴로우면 자살하면 돼요. 왜, 자기가 의미이니까.
자, 한번 봅시다. 용은 어디서 관련돼요? 창세가 3장 첫 번째 약속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러면 용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그 대체 말로 약속을 끄집어냅니다. 그것도 창세기 3장 15절, 그 다음에 남자, 여자, 이것도 전부 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거예요. 이것도 약속 이예요. 독수리 날개는 출애굽기 19장 4절애 나오죠. 홍해에서 건너올 때 걸어서 건너왔는데, ‘내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시내 산까지 데려왔다.‘ 독수리 날개로 업을 때, 이런 말을 제가 하면서도 어려운데, 여러분, 머리가 좋으니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광야’라는 것은 사실은 없어요. 없는데 독수리 등장하면 땅이 광야가 돼 버립니다. 이게 성경 해석의 아주 놀라운 점이예요. 앞에 있는 언약 사건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냥 평범했던 모든 움직임도 그게 언약 적 의미로 탈바꿈 되게 돼 있습니다. 내 이해 안 될 줄 알았어요. ‘이집트의 신화는 그 당시 그들에게도 비밀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집트의 신화나 이집트의 말은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할거야,‘라고 생각하시는 것, 그거 완전히 오류입니다.
‘춘향전‘ ’우리는 지금은 춘향전 의미를 모르지만 춘향전 유행했던 그 영, 정조 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거야.’ 그거 오산입니다. 그들에게도 비밀이었습니다. ‘70이레’에서 7+62+1, 7이레 사건에서 성전 중건 하는 거 나오죠? 성전 중건 하는 그 계시 받을 때 그 당시 그들은 알았을 거다. 천만의 말씀, 그 당시에도 비밀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제단 쌓을 때 물을 부었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죠. 엘리야는 그 아이디어를 다 알았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 엘리야보고 또 하라면 못 합니다. 또 해보세요. 불 안 붙습니다.
왜 비밀이냐 하면, 여기 물이 있고 컵이 있잖아요. ‘이게 뭡니까?’ 물으면 이건 물이고 이건 물 컵입니다. 그러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건 비밀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이게 물이고 물 컵인데...
용이라는 용어는 이 자체가 약속을 위한 하나의 아바타가 되는 겁니다. 아바타라 하는 것은 역할, 또는 기능자 역할, 그러면 용은 단독 자 용이 아니고 용과 싸워야 될 어떤 남자, 어떤 여자, 이렇게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서 약속이라는 것을 구체화 시킬 때, 그 한자리를 차지할 때만 용은, 용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겁니다.
어떤 여자가 갑니다. 그럴 때 어떤 남자가 ‘형수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면 이 여자 이름이 김 형수씨 입니까? 아니죠. 김 말자도 될 수 있고 김 춘자도 될 수 있죠. 그런데 왜 이 사람이 형수님이라고 불렀습니까? 이 사람이 시동생이거든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부르면 되요? 안 돼요? 다른 사람이 부르면 안 되죠. 다른 사람이 부르면 수상하죠.
가족이라는 패밀리(family), 자기 가족이라는 구성 내에서만 형수의 자리가 의미 있게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수만 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시동생 없는 형수는 없죠. 남동생이 없는데 어떻게 형수가 있습니까? 제가 지금 요상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야, 선풍기 치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에어컨이 있을 경우에 에어컨을 안 켜고 왜 선풍기를 켜느냐 이 말이거든요. 만약에 에어컨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선풍기 꺼, 에어컨 켜.’ 이러면 이 사람은 이쪽 사정을 모르는 사람 이예요.
지금 용이라는 말, 사정을 누가 알아요?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그러니까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보고, ‘당신은 용이죠? 당신은 용의 존재가 남자입니까?’ 하면 무슨 소린지 몰라요. 왜, 자기는 지금 경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경리 보는 일에 용이나 남자, 여자가 안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시는 그 의미를 난데없이 용, 남자, 여자, 이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들었다가 던지는 거예요. 우리는 경리 보고 있는데, 우리 속에는 용이라는 단어가 없는데, 그걸 임의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니까 우리는 뭐해야 돼요? 용에게 쫓겨 가는 남자 노릇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한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미체계에서 자신의 하는 행동을 다시 대조해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남자고 이게 바로 여자고, 이게 용이라는 거구나.‘ 라고 성경을 통해서 새롭게 비밀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맛을 들여가는 겁니다. 와! 어렵죠? 이 어려운 걸 하려면, ’여러분, 용에게 쫓겨 갑시다.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이러면 쉬울 텐데.
덮쳐야 된다고 말했죠. 장마에 비오면 갑자기 비오면 그때 우산을 쓰면 그때 우산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우산? 이건 말이 안 되죠. 비 안 온지 10년도 넘었는데 무슨 우산이 필요합니까? 우산은 비가 올 때만 그 관계성에서 각자의 의미가 새롭게 비춰오는 거예요. ‘당신 누구요?’ ‘나 죄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 져서 죄란 말이 아니고 누굴 의미하고 있는 거예요? 의인은 누구밖에 없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죠.
‘당신 어떻게 살아?’ ‘막 삽니다.’ 뭔 뜻입니까? 예수님만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분, 그 뜻대로 사신 분의 효과와 그 완성으로 말미암아 막 사는 내?이렇게 염치불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위로 앞에 있는 말을 일부러 자른다니까요. 본인이 그게 안 믿어지니까, 본인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니까 나머지는 자르는 거예요. ’난 아무리 구원 받아도 행해야 됩니다.’라고 할 때 이 말은 뭔 뜻입니까? 구원이라는 의미를 구원받아 본적이 없으니까 구원받고 행하지 아니하면 안 받은 걸로 여기는 새로운 구원의 의미를 자기가 또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말이 뭐예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행함을 하는 거죠. 예수 믿는 행함에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사람답게 바르게 살고 교회 봉사하는 행함을 추가할 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비밀에 붙인 게 아니고 인간이 평소에 육으로 살던 그 지식에서 추가만 하면 돼요.
국밥을 시킬 때 ‘아줌마, 여기 밥 한 그릇 추가.’ 이건 추가가 되죠. 그런데 파스타를 시키는데 ‘아줌마, 여기 보리밥 하나’ 하면 파스타하고 보리밥하고는 안 맞죠. 추가할 것 같으면 주께서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 ‘내가 반만 이루었으니까 니가 반을 이뤄라.’ 이런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말이 뭐예요? 이제부터 왜 예수님 내가 홀로 다 이루어야 됐는가? 니는 처음부터 뭐를 해도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다 이룸으로 오시는 거예요. 뭘 해도!!! 예수 믿고 난 뒤에 행해도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죄는 선택이 아니고 죄는 인간에게 운명이다.’ 이것이 뭐냐, 용과 남자, 여자, 이게 창세기 몇 장이라고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결정난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남자, 여자 전부 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자이크 퍼즐의 하나의 조각 같은 거예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역할 담당, 남자는 남자 역할, 여자는 여자 역할 담당,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역할은 나와 만나는 게 아니고 (진짜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하나님이 주신 역할, 용, 남자, 여자 역할이 있잖아요. 남자는 남자에게 주는 역할이고 용은, 용에게 주는 역할.
나라는 것은 아바타이기 때문에 나는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으면 행함도 없는 겁니다. 주체는 요런 역할들이 모여서 적당하게 생산되는 겁니다. 이런 겁니다. 군에 갈 때 장병들을 논산 훈련소에 모아놓고 ‘자, 여기 대령 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 ‘어, 대령 한 사람.’ ‘대위 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ㅎ 본인의 의사 물어보지 않고 논산에서 훈련 마치면 이등병이라는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을 일률적으로 다 주죠.
어떤 애가 만약에 이등병 달 것을 이등병 되기 싫다고 일등병을 달면, 그것은 맞죠.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등병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이등병을 합니까? 아니죠.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이제부터 군대에서는 그를 뭐로 다룹니까? 대령도 아니고 소위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고 이등병으로 다루는 거예요. ‘어이, 이등병’ 이등병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 이예요. 본래의 자립니다. 남자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남자 돼야 되고, 여자 돼야 돼요. 왜냐, 역할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용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 날 설교할 때 했죠. 사람은 지옥을 못 간다 했습니다. 아무리 살아도 지옥을 못 가요. 지옥을 갈 수 없고 지옥에서 누가 와야 돼요? 지옥의 사자가 와서 데리고 가야 돼요. 자석이 S극과 N극이 있잖아요. 쇠붙이가 있다가 ‘나 S극 할래요.’하면서 지 맘대로 못 가요. 당기는 대로 가야 돼요. 지금 사자가 와서 행함을 이야기하면 행하는 것이 좋다고 따라가면 지옥이고, 성령이 오셔서 천국에서 오셔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이 좋다고 가면 천국 가는 거고, 그게 바로 약속으로 굳혀진 세계의 특징입니다. 이게 의미 있는 현실 이예요.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세계는 우리 가족과 부모와 자식과 내가 태어난 환경 내가 살았던 인생 그 세월, 그거밖에 모르지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모든 걸 다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 하나, 하나를 우리하고 타협하거나 흥정하거나 부탁하거나 특히 구걸하지 않습니다. 특히 구원을 구걸하지 않아요. ‘제발 좀 예수 믿어 달라.‘고 구걸 않습니다. 본성이 S극인가? S극으로, 본성이 N극이면 N극으로.
모든 인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다? 고정적인 것이 들어 있어요. 지옥 갈 고정적인 것은 지옥 가야 되고, 천국 가는 것도 정해진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자기가 선택해서 천국을 선택해서 천국 간다는 거예요. 자기가 그런 천국 선택 안 하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어느 바보가 죽을 때 돼서 지옥 갈사람 손들라 하면 손드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ㅎ 지옥 무서운 건 알아가지고.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 죽어서 편해 살래’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예수를 믿는 것은요. 여기 나오는지 한번 봅시다.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4절 보니까 광야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양육 받죠? 한 때 두 때 반 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남자의 특징이고 그 남자의 특징은(진짜 강의 어렵다.) 남자의 특징이 정답이면 그 남자에 대한 여자의 특징으로 전환되게 돼 있어요. 여자는 뭡니까? 교회 아닙니까? 남자는 죽고 난 뒤에 부활 하는 사이가 사흘이죠? 한 때 두 때 반 때잖아요.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남자의 운명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들어가면 남자를 낳은 여자가 교회되잖아요. 그러면 교회도 어떻게 됩니까? 한 때 두 때 반 때의 수모를 광야에서 받는 겁니다. 그것이 13장 5절, 짐승이 마흔 두 달 나오죠. 어디에서는 1260일 나오고, 삼년 반 나오죠.
이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이 세상의 무의미한 세계에서 어떤 언약 적 의미가 주어져 버리면 그 언약 적 의미는 모든 출발이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만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사흘이라는 그 간격, 무엇과 무엇의 간격? 천국과 지옥의 간격, 육과 영의 간격, 그 간격을 지상에 확~ 뿌려버리니까 지상에서는 구원받을 자와 구원 못 받을 자의 그 모든 모습들은 숫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마흔 두 달 이예요. 광야에서 핍박 받는. 그 이야기는 십분 쉬고 하겠습니다마는 지금 어디까지 했는지는 아셔야 되니까, 지금 용, 남자, 여자까지는 했고 독수리, 광야 이야기도 광야가, 광야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들어가야 땅이 광야로 변하고 뭐가 들어가야 언약 적 모습으로 변하고 다 변해요. 항상 십자가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되돌려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느냐? 우리 안에 십자가 영이 있으면, 이미 고정적인 심이 박혀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에서 이야기를 할 때 십자가의 예수님 이야기로 들어버리면 이쪽 십자가가 소통이 되게 돼 있어요. 이것을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알아듣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게 돼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