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18강-용과 남자와 여자 1107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1. 07:19

2011-07-09 01:36:38 조회 : 2868         
용과 남자와 여자 110707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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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10707요한계시록12장-(용과 남자와 여자)-18강a-(이 근호 목사)
제 18강a

자,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3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이렇게 돼 있죠? 이 현실을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은 무의미합니다. 평소에 누구나 서울에 사는 사람이나 촌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은 의미가 없어요. 의미라 하는 것은 누가 자기한테 의미를 줄 때 그것을 본인이 평소에 듣고 싶었던 의미가 왔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송 재원씨보고 ‘당신은 훌륭한 인민군입니다.’ 하면 본인은 ‘내가 왜 북한 군사 인민군이야?’ 이러겠죠. 그런데 ‘송 재원씨는 정말 미남이다.’ 하면 ‘그야 뭐 내가 많이 듣던 소리다.’ 하죠.ㅎ

이거는 뭐냐 하면 평소에 듣던 이야기를 누가 남이 해줄 때 그때는 의미가 있지만 만약에 누가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한다면 이 현실 자체가 무의미한 현실 이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게. 짐승하고 살아가는 거, 우리가 짐승을 놀리지만 짐승은 우리를 보고 놀릴 거예요. 왜냐, 둘 다 똑같이 그저 자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죠. 자식 낳았으니까 키우는 거고 그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어쨌든 뭐냐 ‘무의미 함’ 이것을 두 자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병원에 환자가 이빨 고치기 위해 왔다. ‘아저씨, 세상이 뭡니까? 의미가 뭡니까?’ 물으면 ‘이빨이나 고쳐주세요.’ 아프니까 낫게 해달라는 것뿐이지, 이 세상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누가 외부에서 의미를 주면 의미가 있는 게 아니냐, 줘도 우리는 그걸 거부하죠. 내 맘에 안 들면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용이 나오고 남자 나오고 여자 나오죠? 성경은 뭐냐 하면 우리가 모르는 이 무의미한 현실에 의미를 주는 거예요. 성경은 뭐냐, 우리가 사는 존재 이유, 의미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우리는 그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거부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이 여기서부터 어려운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용에게 쫓겨 다니는 남자가 되고 싶은 그런 포부가 있었습니까? 없죠. 우리가 평소에 북한의 인민군 되고 싶어서 환장하지 아니잖아요. 그런데 ‘니는 북한 인민군 같다.’ 하면 물론 거부하죠. 평소에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진짜 니가 존재하는 의미라고 줘버릴 때 우리는 그것을 수긍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용에게 쫓겨난 남자, 이거 우리가 언제 되고 싶어 했습니까? 갑자기 용, 드래곤은 왜 나왔는데요. 성경 어렵죠? 성경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 세상은 선택이 아니고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가지면서 거기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선택을 하죠.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 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해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 구원 받는 요소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내가 부처를 선택한 게 아니고 내가 공자를 선택한 게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했습니다.‘라는 자기 선택이 포함돼 버리면 이것은 천국은 주님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 세계냐 하면 천국에다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사적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게 돼요. 이런 천국은 애시당초 하나님께서 만들지를 안했어요.

그래서 진짜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늘 선택하면서 그 선택에 대해서 의미 없게 걷어 차버리죠.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겠습니다.‘라 하면 ’저리가, 나는 그런 식으로 널 구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안 믿어도 저는 믿습니다.‘ ’둘 다 똑같애.‘

막 살면 구원 받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죠. 구원 못 받죠. 막 안 살고 성실하게 살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 말을 행함 주의자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 받은 것이 나의 ‘막 살까? 아니야, 절제해서 살아야지.’ 이런 선택을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이란 당첨되는 겁니다.

로또 복권을 하나 샀다고 합시다. 번호가 마지막이 17번이라 합시다. 지금 기계가 돌아갑니다. 그런데 17번 갖고 들고 와서 ‘아저씨 잠깐만, 17번 나오도록 기계를 조정해 달라’ 이렇게 들이댈 수는 없죠? ‘주님, 잠깐만. 내가 예수 믿으니까 예수 믿는 것만 인정해 주세요.’라고 하면 주님은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돌리다 보니까, 17번 46번 32번 56번 로또 당첨, 당첨된 자만 천국 갑니다. 불가능이죠.

그럴 때 우리는 로또를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는 불안정으로 보죠. 왜? 내가 뭐를 해도 무슨 번호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번호를 따져서 사도 딴 번호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정으로 보죠. ‘아! 로또는 확신이 없어. 어떻게 확률일 뿐이야, 불안정해.’

그런데 그 당첨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안정성’이라 해요.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무조건 모든 하나님의 변화가 불안정한데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안정됨이 비로소 지상에 펼쳐진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너무나 안정돼 있어요. 시간이 나면 글을 읽어보면 안정돼 있어요. 참, 보는 사람이 편해요. 앞과 뒤가 다 안정돼 있어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이 다 없어지고 예수님께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안정적인 하나님의 스케줄만 쫙 나와 있어요. 그걸 누가 안정적으로 믿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안정적으로 보게 돼 있습니다.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선택, 내 결단, 내 믿음, 내 믿음이야 아침저녁마다 다르니까, 아이,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어. 글쎄 주님께서 이렇게 안정적으로 하니까 그 안정적인 메시지로만 내 마음에 너무나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행함의 글을 보면 초반부터 불안정해요. 무척 불안정해요. 불안정을 보존하기 위해서 온간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보존해보고자 하지만 그 보존하는 받침이나 나사 몇 개 빠져버리면 무슨 고장 날지 모릅니다. 테크노빌딩 흔들리듯이 무너질지 몰라요.ㅎ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설교할 때 제일 설교를 평을 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안정적인가를 봅니다.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모순되는 게 없는가, 안정적인가를, 어느 성경 구절을 해도 안정적이냐를 보는 겁니다.

수학에 이런 말이 있어요. 유한집합은 무한집합을 커버할 수 없다. 유한집합, 10아래의 숫자 1,3,5,7 서수가 아닙니까? 자기와 1과 자기 외에는 분해되지 않는 거, 서수라 하거든요. 서수의 집합 그거는 내재돼 있죠. 그런데 자연수의 집합, 이거는 7656 다음에 7657나올 거고, 이거는 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한은 뭘 커버할 수 없습니까? 무한을 장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무한이 안정적 이예요? 유한이 안정적 이예요? 무한이 안정적이죠. 그래서 무한이 유한을 덮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유한도 자기 유한을 포기해도 됩니다. ‘나 유한의 시대는 끝났어. 나의 선택과 행함의 의미를 주던 시대는 떠났어. 내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것이 내가 의롭다 한 이것도 다 소용없는 거고, 내가 어디 구제하고 봉사하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된다한 발상도 덮쳐버린 예수님의 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김 샌 거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안정적으로 들려요. 뭔가 듬직한 항공모함 안에서, 크로즈, 수영장에서  뱃놀이할 때 배가 뒤집어져도 크로즈  큰 배는 안 뒤집어지잖아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해요. ‘그냥 즐겨라. 인생, 너무 착 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공부 많이 하려 하지 마라, 그냥 즐겨라.’ 누구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겨라. 왜?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즐겨라.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의미를 찾지 마라.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주의 말씀 이예요. 십자가에 담겨있는 십자가 안을 뜯어보면 전도서가 나와 있어요. 왜, 십자가는 전도서, 잠언서, 시편 다 완성한 거잖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 가보면 이것이 다 들어있어요.

만날 성질 급한 사람은 저 같은 사람도 그렇지만 과자 같은 것을 주면 그 봉지를 뜯다가 급하게 뜯다보니 과자가 사방으로 다 튕겨나가요. 성경 십자가  뜯어보면 저쪽 편에는 창세기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잠언 시편이 다 떨어져 있어요. 처음부터 어디로 모아졌습니까? 모든 언약은 새 언약의 완성 속에 전부 다 해태 종합선물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뜯어보면 내용물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어디 안에서 해석이 돼야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이 돼야지 그 외 다른 해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불안정해져요. 잠언서 건드리면 전도서에서 반대로 이야기하고 전도서 건드리면 잠언서 반대로 이야기하고, 그걸 정리를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성경을 행하려고 하니까 인간은 유한집합 아닙니까? 인간이 지가 세상에 대해서 지금 우간다에서 뭐를 알며 기껏 알아야 평창에 대해서나 알지, 일주일 전에 평창 표가 몇 표가 나오는지 알 수 있겠어요? 아무도 모르죠. 주께서는 다 아시죠. 그러니까 유한집합이 되는 우리 인간은 그 안에 주의 무한한 말씀을 담을 수 있다? 못 담는다? 못 담죠. 못 담으면 담기라 말이죠. 본인이 담길 수 없고 주께서 덮쳐버리면 그 안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누룽지탕에 들어있는 하나의 누룽지라고 할까?ㅎ

지금까지 이야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큰 건물이나 빌딩에 보면 냉방기구가 있어요. 굉장히 기능이 좋은 큰 에어컨이 있으면 에어컨을 각 방마다 연결 통로를 만들어서 냉기를 공급합니다. 그러면 1호실 냉기하고 2호실 냉기하고 어느 것이 더 시원합니까? 똑같죠. 예수님의 십자가 의가 흑인이 더 착합니까? 백인이 더 착합니까? 그거 상관없죠. 어린애가 더 착합니까? 노인네가 더 착합니까? 상관없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하고 협상해서 맺은 게 아니고 사람이 노려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하나님이 완성시켜서 마련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십자가 의가 하나님의 의거든요. 로마서 1장에 나오죠. 이 복음은 곧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돼 있죠. 그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가 누구냐 물었는데...

그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질적으로 뭔가 하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여자가 줬다고 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남자라 해서 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목사에게 줬다고 의가 만개하는 것이 아니고 집사에게 줬다고 의가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는 어디가도 빛이 나게 돼 있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변화하는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안정성, 다른 말로 고정성을 집어넣어 버려요. 고정성!!!

그러면 우리는 늘 상 아침에 한 시간, 두 시간, 5분, 10분 전까지 머리가 왔다 갔다 하죠. 어떤 사람이 좋아졌다, 싫어졌다, 잘해주면 예뻐졌다가 싫어졌다가 만날 다른데 그거 말고 고정된 것이 우리 속에 있어야 돼요. 그 고정된 것이 뭔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어요. 그럴 때 말씀이 와서 그걸 확인시켜 줍니다. 확인시켜 주면 이제부터 어려운데, ‘용이 땅으로 쫓겨나서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니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봤잖아요. 이것이 하나의 고정성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성경 말씀은 뭐로 해석돼야 된다? 모든 말씀을 완성한 분이 따로 있죠. 그것은 뭐냐, 말씀을 줄 때 그냥 말씀만 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말씀을 준 거예요. 율법 안에는 율법의 완성 자가 계셔서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문이 이래 있는데 손만 내밀면 손은 따로 놀고 나는 따로 논다 말이죠. 바깥사람이 손을 보고 손의 몸체는 있을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레위기를 주고 민수기를 줬잖아요. 그러면 민수기, 레위기를 따라 더듬어 보자 말이죠. 마지막에 누가 나옵니까? 새 언약의 완성 자 누구예요? 예수그리스도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이다. 그걸 반대로 이야기하면 창세기 1장은 누구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 들어있는 거예요. 목회자는 설교자는 그걸 끄집어 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걸 끄집어내는데 있어서 그 강원도에서 감자 캐는 할머니가 조직신학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딱 그날 어떤 목사님한테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뭣까지 연결시켰다? 예수님 이야기, 그러니까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 맞습니다. 우리 죄 용서 받습니다.‘ 라고 한마디 하고 듣고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오늘 밤에 낙원에 가죠.

그러면 다른 목사님이 ‘할머니 지금 죽으면 안 돼요. 할머니 그건 1부 순서고 낼 살아야 2부 순서 들어야 되는데 지금 죽으면 지옥 갑니다.’ 이러면 안 되죠. 빌립 집사가 성령 받아서 이디오피아 내시 만났을 때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이사야부터 시작해서 성령이 충만하니까 성경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누굴 증거 했느냐,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입니다.‘라고 하니까 그 즉시로 가다가 물도 있고 하니까 세례 받았죠. 물론 성령 세례 받았죠.

다시 정리하면 성경은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 들어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몰랐다? 유대인이 몰랐다. 유대인이 왜 몰랐느냐 하면, 유대인의 구조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말씀 밑에 누가 있다? 우리 자신, 우리 인간이 있다. 우리 인간이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 영광 돌린다. 이런 구조로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서, 하나님 있고 여기에 인간이 있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 있고’가 무산돼 버려요. 자기가 인간이라 하지만 인간이란 없어요. 죄인밖에 없는데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죠. 인간이 인간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말도 안 돼요. 양쪽 다 엉터립니다. 둘 다 다 지어낸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이 스스로 활동해 버리면 말씀이 완성이 돼 버리죠. 완성이 돼 버리면 완성의 티를 내게 돼 있습니다. 완성 값을 하게 돼 있어요.

완성 값,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어려운 것 아니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십자가는 세상 인간의 죄, 자기 택한 백성이지만 십자가는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거 아시죠? 그럼 십자가 졌잖아요. 그 다음에 그러면 다 이루었으면 가만히 있을까요? 아까 멘트가 뭡니까? 갈라디아서 1장 4절, ‘세상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한다면 그 다음에 무슨 작업을 하겠습니까? 세상 죄를 본격적으로 알려주는 작업이 미완성 상태가 아니고, 완성상태에서 죄를 알려주기 때문에 ‘야! 내가 죄인 맞구나.’ 아는 것은 그 배경이 뭐가 있습니까? 이미 나는 구원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는데 하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 죄를 알아가는 작업을 성령께서 실시시키는 거예요. 적용시키는 겁니다. 세상 죄를 알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 뭐냐 하면, ‘야, 바로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

‘죄인이니까 구원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래 주장하거든요. 내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영광 돌리는 것까지 다 포함된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죄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영광이 더 되는 게 아니고 이미 영광되었기 때문에, 아까 냉방기 다시 그려볼까요? 이미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각 호실에 냉기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런 죄를 통해서 자기십자가를 봤고, 이 사람은 이런 죄를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예요.

공 은주 집사님은 안경 꼈다고 그것 때문에 불평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알고, 이 한례 집사님은 눈썹 사이가 떨어졌다고 그것 때문에 불평해서 하나님께 대한 죄를 알고,ㅎ사람마다 다 틀린 거예요. 어떤 사람은 키가 작다고 불평해서 ‘이게 죄구나.’ 어떤 죄를 하든 간에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된 관계성 안에서 주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믿었으니까 이제부터 영광 돌리고 행함을 하자고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안 남아있다니까요. 그게 영광 이예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영광 돌리는 방법은 뭐냐 하면 완전히 정강이를 군에 가면 군화발로 정강이를 차잖아요. 훈련할 때  고참이 쫄병한테, 그러면 정강이 맞으면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죠. 그런 식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겁니다. ‘이게 어디서? 내 앞에 무릎을 꿇어.’ 하고 발길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욱’ 하고 무릎을 꿇죠.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그 다음에 뭡니까? 꿇어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걸 경상도 말로 초때 비깐다. 해요. 그런데 그렇게 까일 때 깐다는 것이 구원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되는 거예요. ‘너 구원 받은 거 맞잖아. 왜 몰랐어.’ 행함 없이 이미 까인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 안 받으면 안 까입니다. 한번 만져보세요. 벌겋죠. 얼마나 무릎 꿇는다고 애 먹었어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십자가 마을 글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디까지 되느냐 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영향력 있을 때까지만 우리가 죄가 된다 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영향력이라는 것은 선악과나무가 없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어디예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천국에는 선악과가 없습니다.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선악과가 영향력 없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어딥니까? 지옥이고 또 여기겠죠. 그 동안에는 우리가 우리 행함으로서는 의가 나올 수 없어요. 왜? 선악과 영향이 계속되기 때문에.

옛날에 보건소에서 모기를 없애기 위해 모기 차에서 뿌려주는데, 그 안개 같은 연기가  남아있는 한 모기는 없겠죠. 그런데 바람 불어서 날아가면 모기가 ‘엥~’ 하고 돌아다니잖아요. 그 선악과가 있는 이상은 선악과 앞에서 율법 앞에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라는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 영향력이기 때문에. 모기가 있으니까 모기약을 치잖아요. 지금 선악과가 모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악과에 율법의 저주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성경의 율법적 기능을 늘 봐야 되죠. 그러니까 늘 무릎을 까여야 되죠.ㅎ

그렇게 되면 결국 남는 게 뭐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은혜만 남죠. 우리 사람은 빠지고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아들만 의논해서 ‘주께서 내 주에게’ 시편 110편에 아버지께서 내 주에게, 성부 아버지께서 성자 아들과 의논한대로 창세전에 선택한 것, 그 선택된 자에게 해당됨을 보여주는 그러한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우리 안에 안정성으로, 고정성으로 오는 거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한번 적어 볼게요. 제가 적어보고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①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요 문장이 좋습니까? 아니면 ②평창 63표 따서 2018년도에 동계 올림픽 한다.‘ 우리 말고 강원도 평창 올림픽 추진하는 위원장에게,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까? ②번이겠죠. 자기가 본업이 그거니까. 그런데 이것이 불안정하다니까요. 우리에게 허탈과 허무를 가져다 줘요.

그런데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이것은 안정돼 있는 겁니다. ②, 이것은 행사 잘못 치르고 행사 할 때 북한에서 테러 있고 하면 엉망진창이 돼 버려요. 그러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이거는 누가 이걸 바꿔요?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뭡니까? 권세 자, 악마, 천사, 어떤 것이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것을 알아버리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별 문제가 안 돼요. 이 기쁨을 누가 뺏습니까? 이게 바로 성령이 주신 기쁨 아닙니까? 여기에 무슨 행함이 들어가요? 성령 안 받아서 이게 안 되니까 자기 행함으로 뭔가 기쁨을 얻으려고 하니까 ‘이번에 평창 때문에 내가 얼마나 기도했다고, 역시 기도응답 받았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기쁨 거리가 없으니까 자기 행함이라도 집어넣는 거예요.

엄마 위해서 기도했더니 이제 엄마가 교회 나와서 기쁘다.‘ 기쁘겠죠. 하지만 그 기쁨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의 기쁨과 대신할 수 있습니까?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엄마 교회 나왔다가 한 달 나오다 도로 나가버리는데.

오늘 이 본문에서 이렇게 서론이 긴가 하는데 지금 이 대목이 성경책에만 문자로 박혀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이 현실이 되어서 우리 속에 고정성으로 심처럼 열심히 들어와야 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밥 먹고 사는데 신경 써서 용에게 쫓겨 가고 남자를 낳은 여자가 쫓겨 간다 하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평창하고 상관없는 여기서 무슨 기쁨을 얻으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기 십상이란 말이죠. 지금 이걸 이 고정성을 집어넣어야 돼요. 그러면 그 다음이 문제라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이 우리 속에 하나의 고정성으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아까 현실은 의미 있다? 의미 없다? 현실은 무의미한 현실이죠. 무의미한 현실에 외부에서 의미를 주는 겁니다. 용, 남자, 여자, 또 중요한 거, 독수리, 광야, 이런 용어 나오잖아요. 한번 읽어봅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우리는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그냥 사니가 사는 거죠. 의미도 없어요. 배고프니까 밥 먹고 잠 오니까 잠자는 겁니다. 별거 아닌데 의미 찾지 마세요. 이빨 아프니까 치과 가는 거고, 그런 거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부에서 의미를 줘요. 용, 남자, 여자, 독수리, 광야, 이걸 뭉쳐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 봐라 말이죠. 마치 우리에게 낸 숙제 같아요. 유치부 애들한테 용, 남자, 여자, 이거로 하나의 문장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그러면, 아니요, 그러나, 집어넣어서 문장을 만들어 보라는 말이죠.ㅎ그 문장 가운데서 누가 나와야 돼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나오면 그게 성공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뤘으니까. 십자가라는 과자 봉지를 째버리면 요한계시록 12장 이것도 13장도 거기서 팝콘처럼 섞여서 팝콘처럼 튀겨져서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걸 다 다시 담아버리면 어디에 담긴다? 십자가에 담기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인간이 지혜로 알 수 있어요? 없어요? 모르죠. 그래서 비밀, 감추어진 비밀, 또는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 그러면 그 비밀이라는 콘칩이라는 과자, 여기 과자 봉지 안에 과자가 있는 것처럼 과자 하나, 하나가 결국 십자가 안에 들어있죠.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은 믿는 겁니다. 아! 이거 좋은 말인데 내가 해놓고 좋다 하는데, 십자가의 모든 말씀을 하나, 하나를 ‘믿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줄로 믿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돈을 사랑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줄로 믿는 겁니다. 왜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함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가거라. 불가능한테 불가능하니까 ’에이, 안 되는 거야‘가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게 되게 돼 있어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게 지켜지는 거고, 우리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걸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이건 주님이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을 가지고 지가 지키려고 나서기 때문에 출발 자체가 엉터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렇다면 그 좁은 길도 하나의 비밀이 되겠죠? 좁은 길을 가는 게 비밀이 아니고 좁은 길 안에 누가 들어있다? 그리스도가 동행한다는 게, 그리스도가 비밀이 되겠죠. 그리스도가 항상 비밀로 존재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 말씀에.

그럼 용, 남자, 여자, 독수리, 광야, 이걸 한데 묶어 버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여기서 어떻게 해서 도출 되는가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ㅎ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의 의미죠. 현실이 있는 이유이고 사는 목적이고 우리가 사는 이유가 되는 거죠. 이게 없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지금 괴로우면 자살하면 돼요. 왜, 자기가 의미이니까.

자, 한번 봅시다. 용은 어디서 관련돼요? 창세가 3장 첫 번째 약속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러면 용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그 대체 말로 약속을 끄집어냅니다. 그것도 창세기 3장 15절, 그 다음에 남자, 여자, 이것도 전부 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거예요. 이것도 약속 이예요. 독수리 날개는 출애굽기 19장 4절애 나오죠. 홍해에서 건너올 때 걸어서 건너왔는데, ‘내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시내 산까지 데려왔다.‘ 독수리 날개로 업을 때, 이런 말을 제가 하면서도 어려운데, 여러분, 머리가 좋으니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광야’라는 것은 사실은 없어요. 없는데 독수리 등장하면 땅이 광야가 돼 버립니다. 이게 성경 해석의 아주 놀라운 점이예요. 앞에 있는 언약 사건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냥 평범했던 모든 움직임도 그게 언약 적 의미로 탈바꿈 되게 돼 있습니다. 내 이해 안 될 줄 알았어요. ‘이집트의 신화는 그 당시 그들에게도 비밀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집트의 신화나 이집트의 말은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할거야,‘라고 생각하시는 것, 그거 완전히 오류입니다.

‘춘향전‘ ’우리는 지금은 춘향전 의미를 모르지만 춘향전 유행했던 그 영, 정조 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거야.’ 그거 오산입니다. 그들에게도 비밀이었습니다. ‘70이레’에서 7+62+1, 7이레 사건에서 성전 중건 하는 거 나오죠? 성전 중건 하는 그 계시 받을 때 그 당시 그들은 알았을 거다. 천만의 말씀, 그 당시에도 비밀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제단 쌓을 때 물을 부었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죠. 엘리야는 그 아이디어를 다 알았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 엘리야보고 또 하라면 못 합니다. 또 해보세요. 불 안 붙습니다.

왜 비밀이냐 하면, 여기 물이 있고 컵이 있잖아요. ‘이게 뭡니까?’ 물으면 이건 물이고 이건 물 컵입니다. 그러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건 비밀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이게 물이고 물 컵인데...

용이라는 용어는 이 자체가 약속을 위한 하나의 아바타가 되는 겁니다. 아바타라 하는 것은 역할, 또는 기능자 역할, 그러면 용은 단독 자 용이 아니고 용과 싸워야 될 어떤 남자, 어떤 여자, 이렇게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서 약속이라는 것을 구체화 시킬 때, 그 한자리를 차지할 때만 용은, 용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겁니다.

어떤 여자가 갑니다. 그럴 때 어떤 남자가 ‘형수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면 이 여자 이름이 김 형수씨 입니까? 아니죠. 김 말자도 될 수 있고 김 춘자도 될 수 있죠. 그런데 왜 이 사람이  형수님이라고 불렀습니까? 이 사람이 시동생이거든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부르면 되요? 안 돼요? 다른 사람이 부르면 안 되죠. 다른 사람이 부르면 수상하죠.

가족이라는 패밀리(family), 자기 가족이라는 구성 내에서만 형수의 자리가 의미 있게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수만 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시동생 없는 형수는 없죠. 남동생이 없는데 어떻게 형수가 있습니까? 제가 지금 요상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야, 선풍기 치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에어컨이 있을 경우에 에어컨을 안 켜고 왜 선풍기를 켜느냐 이 말이거든요. 만약에 에어컨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선풍기 꺼, 에어컨 켜.’ 이러면 이 사람은 이쪽 사정을 모르는 사람 이예요.

지금 용이라는 말, 사정을 누가 알아요?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그러니까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보고, ‘당신은 용이죠? 당신은 용의 존재가 남자입니까?’ 하면 무슨 소린지 몰라요. 왜, 자기는 지금 경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경리 보는 일에 용이나 남자, 여자가 안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시는 그 의미를 난데없이 용, 남자, 여자, 이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들었다가 던지는 거예요. 우리는 경리 보고 있는데, 우리 속에는 용이라는 단어가 없는데, 그걸 임의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니까 우리는 뭐해야 돼요? 용에게 쫓겨 가는 남자 노릇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한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미체계에서 자신의 하는 행동을 다시 대조해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남자고 이게 바로 여자고, 이게 용이라는 거구나.‘ 라고 성경을 통해서 새롭게 비밀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맛을 들여가는 겁니다. 와! 어렵죠?  이 어려운 걸 하려면, ’여러분, 용에게 쫓겨 갑시다.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이러면 쉬울 텐데.

덮쳐야 된다고 말했죠. 장마에 비오면 갑자기 비오면 그때 우산을 쓰면 그때 우산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우산? 이건 말이 안 되죠. 비 안 온지 10년도 넘었는데 무슨 우산이 필요합니까? 우산은 비가 올 때만 그 관계성에서 각자의 의미가 새롭게 비춰오는 거예요. ‘당신 누구요?’ ‘나 죄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 져서 죄란 말이 아니고 누굴 의미하고 있는 거예요? 의인은 누구밖에 없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죠.

‘당신 어떻게 살아?’ ‘막 삽니다.’ 뭔 뜻입니까? 예수님만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분, 그 뜻대로 사신 분의 효과와 그 완성으로 말미암아 막 사는 내?이렇게 염치불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위로 앞에 있는 말을 일부러 자른다니까요. 본인이 그게 안 믿어지니까, 본인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니까 나머지는 자르는 거예요. ’난 아무리 구원 받아도 행해야 됩니다.’라고 할 때 이 말은 뭔 뜻입니까? 구원이라는 의미를 구원받아 본적이 없으니까 구원받고 행하지 아니하면 안 받은 걸로 여기는 새로운 구원의 의미를 자기가 또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말이 뭐예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행함을 하는 거죠. 예수 믿는 행함에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사람답게 바르게 살고 교회 봉사하는 행함을 추가할 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비밀에 붙인 게 아니고 인간이 평소에 육으로 살던 그 지식에서 추가만 하면 돼요.

국밥을 시킬 때 ‘아줌마, 여기 밥 한 그릇 추가.’ 이건 추가가 되죠. 그런데 파스타를 시키는데 ‘아줌마, 여기 보리밥 하나’ 하면 파스타하고 보리밥하고는 안 맞죠. 추가할 것 같으면 주께서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 ‘내가 반만 이루었으니까 니가 반을 이뤄라.’ 이런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말이 뭐예요? 이제부터 왜 예수님 내가 홀로 다 이루어야 됐는가? 니는 처음부터 뭐를 해도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다 이룸으로 오시는 거예요. 뭘 해도!!! 예수 믿고 난 뒤에 행해도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죄는 선택이 아니고 죄는 인간에게 운명이다.’ 이것이 뭐냐, 용과 남자, 여자, 이게 창세기 몇 장이라고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결정난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남자, 여자 전부 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자이크 퍼즐의 하나의 조각 같은 거예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역할 담당, 남자는 남자 역할, 여자는 여자 역할 담당,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역할은 나와 만나는 게 아니고 (진짜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하나님이 주신 역할, 용, 남자, 여자 역할이 있잖아요. 남자는 남자에게 주는 역할이고 용은, 용에게 주는 역할.

 나라는 것은 아바타이기 때문에 나는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으면 행함도 없는 겁니다. 주체는 요런 역할들이 모여서 적당하게 생산되는 겁니다. 이런 겁니다. 군에 갈 때 장병들을 논산 훈련소에 모아놓고 ‘자, 여기 대령 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 ‘어, 대령 한 사람.’ ‘대위 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ㅎ 본인의 의사 물어보지 않고 논산에서 훈련 마치면 이등병이라는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을 일률적으로 다 주죠.

어떤 애가 만약에 이등병 달 것을 이등병 되기 싫다고 일등병을 달면, 그것은 맞죠.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등병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이등병을 합니까? 아니죠.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이제부터 군대에서는 그를 뭐로 다룹니까? 대령도 아니고 소위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고 이등병으로 다루는 거예요. ‘어이, 이등병’ 이등병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 이예요. 본래의 자립니다. 남자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남자 돼야 되고, 여자 돼야 돼요. 왜냐, 역할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용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 날 설교할 때 했죠. 사람은 지옥을 못 간다 했습니다. 아무리 살아도 지옥을 못 가요. 지옥을 갈 수 없고 지옥에서 누가 와야 돼요? 지옥의 사자가 와서 데리고 가야 돼요. 자석이 S극과 N극이 있잖아요. 쇠붙이가 있다가 ‘나 S극 할래요.’하면서  지 맘대로 못 가요. 당기는 대로 가야 돼요. 지금 사자가 와서 행함을 이야기하면 행하는 것이 좋다고 따라가면 지옥이고, 성령이 오셔서 천국에서 오셔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이 좋다고 가면 천국 가는 거고, 그게 바로 약속으로 굳혀진 세계의 특징입니다. 이게 의미 있는 현실 이예요.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세계는 우리 가족과 부모와 자식과 내가 태어난 환경 내가 살았던 인생 그 세월, 그거밖에 모르지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모든 걸 다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 하나, 하나를 우리하고 타협하거나 흥정하거나 부탁하거나 특히 구걸하지 않습니다. 특히 구원을 구걸하지 않아요. ‘제발 좀 예수 믿어 달라.‘고 구걸 않습니다. 본성이 S극인가? S극으로, 본성이 N극이면 N극으로.

모든 인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다? 고정적인 것이 들어 있어요. 지옥 갈 고정적인 것은 지옥 가야 되고, 천국 가는 것도 정해진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자기가 선택해서 천국을 선택해서 천국 간다는 거예요. 자기가 그런 천국 선택 안 하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어느 바보가 죽을 때 돼서 지옥 갈사람 손들라 하면 손드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ㅎ 지옥 무서운 건 알아가지고.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 죽어서 편해 살래’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예수를 믿는 것은요. 여기 나오는지 한번 봅시다.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4절 보니까 광야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양육 받죠? 한 때 두 때 반 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남자의 특징이고 그 남자의 특징은(진짜 강의 어렵다.) 남자의 특징이 정답이면 그 남자에 대한 여자의 특징으로 전환되게 돼 있어요. 여자는 뭡니까? 교회 아닙니까? 남자는 죽고 난 뒤에 부활 하는 사이가 사흘이죠? 한 때 두 때 반 때잖아요.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남자의 운명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들어가면 남자를 낳은 여자가 교회되잖아요. 그러면 교회도 어떻게 됩니까? 한 때 두 때 반 때의 수모를 광야에서 받는 겁니다. 그것이 13장 5절, 짐승이 마흔 두 달 나오죠. 어디에서는 1260일 나오고, 삼년 반 나오죠.

이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이 세상의 무의미한 세계에서 어떤 언약 적 의미가 주어져 버리면 그 언약 적 의미는 모든 출발이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만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사흘이라는 그 간격, 무엇과 무엇의 간격? 천국과 지옥의 간격, 육과 영의 간격, 그 간격을 지상에 확~ 뿌려버리니까 지상에서는 구원받을 자와 구원 못 받을 자의 그 모든 모습들은 숫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마흔 두 달 이예요. 광야에서 핍박 받는. 그 이야기는 십분 쉬고 하겠습니다마는 지금 어디까지 했는지는 아셔야 되니까, 지금 용, 남자, 여자까지는 했고 독수리, 광야 이야기도 광야가, 광야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들어가야 땅이 광야로 변하고 뭐가 들어가야 언약 적 모습으로 변하고 다 변해요. 항상 십자가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되돌려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느냐? 우리 안에 십자가 영이 있으면, 이미 고정적인 심이 박혀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에서 이야기를 할 때 십자가의 예수님 이야기로 들어버리면 이쪽 십자가가 소통이 되게 돼 있어요. 이것을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알아듣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게 돼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제 18강b

용과 남자, 여자가 단독적으로 있을 때는 이게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는데 이걸 세팅 하게 되면 의미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용과 남자, 여자가 중요합니까? 세팅 하는 게 중요합니까? 세팅 하는 그 주도권자, 주도권이 더 중요하겠죠. 그림 그린 그림보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중요하듯이 ‘아, 나는 이거 필요해. 요거 필요해.’ 해서 세팅하는 그 작업을 친히 하시는 그분이 더 중요하다 말이죠.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 되느냐 하면, 그런데 인간들의 신앙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지 알 수 있죠. 창세기 1장에 창조했잖아요. 창조 끝났잖아요. 창세기 3장에 가면 창조가 끝났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모든 지금까지 이천년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다 그래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약속아래 창세기 1장의 그 창조가 새롭게 세팅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창조를 언제? 지금 현재 창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시간관을 가지고 ‘옛날에 창조했는데 몇 년 지났다.’ 이렇게 아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지금 창조할 때 창조의 능력으로 창조하는 거예요.

수요 설교를 잠간 언급하면, 인간이 이렇게 있다. 제사는 영원하다. 인간이 죄를 갖고 오면 죄를 용서하면 죄가 어디로 가버리죠? 죄 용서하면 죄를 분리수거해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까? 우리 죄는 어디로 가져가죠? 그 생각 안 해봤죠? 죄 용서 받았다고 까불기는 까불지만, 우리가 지은 죄는 어떻게 처리되고 어디서 어떻게 관리되는지 이야기 안 하죠?ㅎ

우리의 죄는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닙니다. 죄가 지은 죄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는 기계로서 우리에게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죄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죄가 필요해서 죄가 모아져야 여기서 성전 안에서 작품 하나 나옵니다. 무슨 작품? 이 죄가 의로 바뀌는 작품이 나와야 됩니다. 이것이 창조가 더 깊어지는 거예요. 이것도 창조예요. 그래서 이사야 45장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창조했고 어둠도 창조하고’ 뭐든지 창조하지는 않아요. 세팅된 것만 창조해요. 남자를 여자로, 이런 건 안 해요. 뭐든지 하지는 않지만 언약에 대해서는 뭐든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뭐가 의인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뭐든지 의가 되게 돼 있어요. 내 쪽에서 ‘이것은 나쁜 짓이야,’라 이렇게 스스로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창조된 자이지,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창조자가 보는 나쁜 짓과 창조된 자가 보는 나쁜 짓이 달라요.

성경 말씀보고 이렇게 임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돌아온 탕자가 의인이고 집에 한 번도 가출한 적이 없는 맏아들은 이게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사장 돈 횡령한 사람은 지혜로운 자고 그걸 나쁜 짓이라고 추궁하는 바리새인들은 지옥 갈사람 이예요.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럼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의미의 창조가 안 나오면 어떤 것도 다 죄가 돼요. 저주 받게 돼요. 창조가 안 돼요. 주께서 새로운 창조를 해서 세팅 들어가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진짜 소는 버릴 게 없다는데 주님도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떤 마귀도 악한 천사든 뭐든지 다 주워 모으면 거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나옵니다.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세팅이 돼 버리면 여기에 세팅되는 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 하고 그 언약 안에 창조의 능력이 나오는데 그 창조의 능력은 그때, 그때마다 달라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사라의 태를 죽여 놓고 그 죽은 태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도록 나올 때 새 생명이 나오는 게 아니고 ‘약속’이 나와요.

그러면 언약에서는 뭐를 창조하는 겁니까? 바로 약속된 무엇, 그것을 뽑아내면 되는 겁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보통 사람들은 ‘아이쿠, 내 새끼, 내 아기, 내 자식’ 이러잖아요. 그 아기가 그냥 나와 버리면 그 자기 새끼 저주 받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들을 낳았습니까? 딸을 낳았습니까? 그렇다면 정결한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정결한 제사는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의 법, 모세 언약이 거기에 가미돼 버리면 그 애는 주님의 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애가 돼요. 비록 내가 낳았어도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창조예요.

주님께서는 ‘수리, 수리 마수리 애 하나 생겨라 뚝딱.’ 이게 아니고 분명히 인간의 여자의 몸을 사용하되 거기다가 뭐가 가미되면? 언약이 가미되면 언약의 자녀가 되고 언약의 백성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뭘 하든지 우리는 다 주의 것이 돼야 돼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술을 쳐 잡숫든지 뭘 하든지 다 주의 일이 돼 버려요. 언약이 가미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백성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독수리 나오죠. 독수리는 광야와 짝을 이뤄요. 독수리로 이동해서 광야로 자기 백성을 이동한 겁니다. 그러면 이거 어렵습니다. 땅과 광야의 차이점은 뭐냐? 광야는 언약 안에 세팅된 땅을 광야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말씀에 의해서 낮추기 위해서 새롭게 조성된 그 땅을 광야라고 합니다. 땅은 그냥 땅이죠. 애굽도 땅이고 우리가 평소에 밥 먹고 살려고 일하는 땅이죠.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렇게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언약이 가미된 새로운 땅, 이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하늘나라‘라고 해요.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완성되신 분이 가 계신 곳이 하늘나라예요. 내가 가는 곳이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치고 어디 가려고 했습니까? 천국 가려고 했죠. 베드로는 천국 자체를 몰라요.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지,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는 땅입니다. 왜, 언약이 빠져있기 때문에.

우리가 언약에 세팅돼야 언약 사람 되지, 나 혼자 버티고 있으면 언약 사람 아닙니다. 언약에 세팅된다는 말은 우리 곁에 누가 계시다? 언약의 완성 자되신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는 언약에 세팅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주와 함께 동행이 되는 거예요. 동행하면 생각나는 게 최성수의 동행. 누가 나와 함께. 광야가 특징이 뭐냐, 동행하는 거예요. 동행하지 아니하면 그곳이 애굽이 돼 버려요. 동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과 애굽 사이에 약속의 땅의 선취로서, 약속의 땅의 긴 그림자가 광야죠. 약속의 땅은 가나안도 약속이 땅이 아닙니다. 언약으로 세팅돼 있는데 세팅되기 위해서 조건이 있어요. 광야, 독수리, 그리고 사람들, 그런데 사람은 장차 남자를 낳을 여자의 모습으로 동행하는, 이 자체가 뭉쳐서 강강수월래처럼 뭉쳐지면 이게 언약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그 안에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 역할들에 붙여지는 용어가 바로 용, 남자, 여자, 독수리, 광야가 되는 거죠. 독수리란 의미가 광야와 관련돼 있는 것은 독수리라 하는 것은 땅에서 걸어 다니는 짐승이 아니고 하늘로 날아서 공간이동을 하는 짐승이죠. 그 독수리가 제일 높을 곳을 날기 때문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하죠.

그렇다면 땅에서 하늘로 날지 못하는 인간 입장에서 독수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원해서 우리가 택배회사 보낸 독수리는 아니죠? 우리가 원해서 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편에? 이 독수리가 온다는 것은 우리가 원한 게 아니고 독수리를 보낸 분의 요청에 의해서 그분의 소원에 의해서 우리를 강제 이동시키는 수단으로서 독수리가 동원됐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럴 경우에 그들은 땅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광야라는 특수한 의미의 터널 속을 지나가고 있는 겁니다. 광야를 터널이라 했는데 터널이 특징이 뭐냐, 갇혀있다는 겁니다. 터널 안에 갇혀 있으면 하늘도 안 보이고 땅도 안 보이고 보이는 것이 전부죠.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있죠. 그러면 출애굽기 19장에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광야로 보냈다 할 때에 이 광야에서는 무슨 원칙만 유효합니까? 계속해서 독수리 원칙만 유효하죠. 이런 말도 어려워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으니까 십자가가 터널에 들어와 버리면 이 터널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 무슨 적용을 받습니까? 십자가 적용을 받는 거예요. 이걸 십자가 안, ‘또는 내가 예수의 십자가 흔적을 가졌노라.‘ 또는 예수 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갇혀 있는 것을 setting, 언약 적 세팅, 언약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왜 그러면 자기 백성을 가두는가? 상당히 분통터지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원래 갇혀 있어요. 누구한테? 마귀한테 갇혀 있는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안 갇혀 있는 자가 없어요. 마귀한테 갇혀있는 인간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갇혀있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ㅎ 주님 보시기에 가관이죠. ‘아이쿠, 이렇게 모르고.’ 아니 죄에 갇혀있지 않은 인간이 주님께서 글 쓰시면서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하니까 이 말은 죄의 터널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돌을 치라는 말이거든요. 만약에 그 여자한테 돌을 쳐버리면 그 돌이 여자 맞고 튕겨서 어디를 때립니까? 자기를 때려요. 다같이 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두었으니,‘ 모든 것을 일부러 가두어 둔 거예요. 공항에 보면 가방이 있잖아요. 예쁘죠. 그런데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공기도 안통하고 숨도 막히고, 우리가 그 입장 이예요. 악마가 짜 맞춘 가방 안에 우리가 가둬진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가둔 그 가방을 율법이 와서 또 가둬버렸어요. 재밌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는 악마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죠. 가구 주인이 따로 있다 말이죠. 세간 살이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악마에 갇혀 있는데 이 악마를 가두기 위해 선한 율법이 주어졌거든요. 이 선한 율법이 주어지면 악마를 가두는 용도가 되면서 인간도 가두어지죠. 악마도 율법에 갇혀있고 인간도 가두어져 있고 놀라운 사실은 이 가두어짐에 누가 가두어지려 오십니까? 예수님이 들어와 버려요. 예수님도 율법에 의해서 가두어져 버리죠. 그럼 누가 이 죄에서 건져냅니까? 3일 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이 악마를 뚫고 십자가로 승리했다. 이걸 뚫고 나오니까 그 동안에 있던 우리 몸은 육의 몸이라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왔는데 뚫고 나오면서 이 육의 몸의 허물을 벗겨 버리고 영의 몸을 입어버리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대상자에서 우리가 누락이 돼 버려요.

요새 예능 프로그램에서 손 병호 게임이라는 게 있나 봐요. 누구 해당되는 사람 손가락 접는 게임인데, 전부 빨강 옷을 입었는데 ‘빨강 옷 입은 사람 손가락 접어.‘하면 다 접어야 되죠. 그런데 ’육의 몸 입은 사람 접어.‘하면 접어야 돼요. 그게 뭐냐 율법의 저주입니다. ’누구든지 율법대로 살면 저주를 받는데 해당되는 사람 접어.‘ 하면 다 접어야 돼요.

그런데 성령이 와 버리면 우리는 육에 속하지 않고, 전에 있던 육의 몸을 벗어버렸으니까 성령에 속한 거죠. 그럼 ‘저주 받은 사람 접어’ 해도 우리는 안 접어도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라 합니까? ‘니 육의 몸은 어딨어?’ 육의 몸은 찾아보면 어디 있습니까? 이미 율법이라는 화살이(우리나라는 양궁을 잘해요.), 율법이 쏘는 것이 죄 아닙니까? 온 저주의 저주를 더한 그 율법이 쏴버리니까 그 쏜 것이 뱀 허물 벗듯이 허물로 벗어놓은 그 허물에 온 저주의 화살이 꽂힌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돼 보면, ‘사망아, 니가 쏘려는 표적지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쏠게 없잖아요.




십일조?, 뭐 십일조~ 뭐 안식일?~ 그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뭐 도덕법? 제사법? 율법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들 이예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언약의 세팅이 우리 존재의미라 했죠? 이 언약을 대신해서 교회가 등장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교회가 큰 것이 존재 의미가 되겠죠. 그것이 바로 목사들이 노리는 겁니다. 그 양의 탈을 쓰고 마귀의 자식들을 노리는 게 그거예요. 교회를 키우고 봉사하라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진짜 교회 불 질러 버려야 돼요. 수십 년 동안 십일조 바치고 목돈 바친 거 싸질러 버려야 돼요. 그럴 때 믿음 등장합니다.

만약에 우리교회서 우리 교인들에게 ‘여러분, 중직들 천만 원 내시고 할머니들 5백만 원 내셔서 교회 하나 집시다. 그래서 교회 지어 놨다 칩시다. 이것이 본인들은 헌금 할 때 상상하지 못했던 현상들이 벌어져요. 뭡니까? 그때부터 목사 입에서 어떤 복음을 이야기해도 안 듣습니다. 뭘 듣느냐, 내가 돈 바쳐서 세운 교회가 몇 명을 더해서 채울 것이며 이교회가 얼마나 유명한 교회가 되며 이교회가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모든 초점이 거기에 있어서 목사가 거기에 대해서 설교해줘야 아멘 소리 나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 잘 져놨죠? 낼 휘발유, 신나 가지고 와서 불 질러 버립시다.‘ 이러면 그 소리 안 듣습니다. 이게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뭣에? 내가 전에 육으로 살던 그 내성, 내성 알아요? 육으로 살던 그 습관 버릇이 내 자존심을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돈을 내 보니까 돈이 아깝고 그리고 같은 교인들이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누구 말씀처럼 혼담이 오고 가는 사이처럼. 또 어떤 사람은 바로 앞에 약국을 낸다면 감사헌금으로 선전용으로 해서 냈는데, 그 교회 나와 버리면 감사헌금 낸 거 날리잖아요. 감사헌금 광고 해줘야 교인들이 약국에 찾아올 게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내성, 누구 중심?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는 거예요. 누구 초청해서? 예수 초청하고 성부 성자 다 초청해서 자기 세계 만드는 거예요. 자기 세계는 부자가 갔던 세계,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아예 지옥을 만들어요. 누구의 지도하에? 누구의 세심한 배려 하에? 악마의 배려와 악마의 가르침, 악마의 종들의 가르침, 행함을 주장하는 악마의 가르침에 따라서 충실하게 그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여자는 오직 남자를 임신해야 여자예요. 남자가 없는 여자는 여자가 아닙니다. 아들, 그냥 아들이 아니고 세팅된 약속의 아들이죠. 예수그리스도를 임신하지 않으면 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를 공경하는 것은 용이 아니에요. 나를 공경하는 것은 나한테 미움 받는 사람들입니다. 내 속에 있는 십자가를 공경하는 그들이 용의 자식 이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외쳐야지 ‘내가 뭐 잘못했어?’ 이러면 안 됩니다. ‘ 나 착하다,’이러면 안 돼요. 복음을 전하면 오지 말라고 해도 뱀은 에~ 하고 오게 돼 있습니다. 이무기가 올라오게 돼 있어요. 뱀은 십자가 전하?오게 돼 있어요. 우리가 십자가 포기하면 뱀도 우리를 상대 안 합니다. 용도 마귀도 상대 안 해요. 원래 좋아하는데 상대할 게 뭐 있어요? ‘잘한다, 잘한다.‘ 하면 되지.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아! 이것이 주께서 주신 역할이구나. 이것이 하나의 세팅된 안에서의 기능이구나. 내가 그렇게 여자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여자 되게 하시는구나.’ 어떻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남자를 내 속에 집어넣어서 동행시켜서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여자의 역할을 하게 하시는구나.’ 그 찬양과 공로를 누구한테 돌려야 돼요? 스스로 활동하시는 살아계신 말씀에 영광을 돌려야 되죠. 그래야 됩니다. 아휴, 이제 쉽다.ㅎ 이제 쉬운 거예요.

이 많은 이야기가. 처음에 뭐라 했죠? 이 세상은 의미 없다.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매일 밥 먹고 사는 외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의미를 누가 줍니까? 성경 말씀이 주죠. 어떻게? 창조의 능력으로. 어디 안에 담겨서? 언약 안에 담겨서. 어떻게? 세팅해서 그러면 나만? 아니요. 뱀이 와야죠. 누가? 아니 여자가 와야죠. 누가? 남자가 와야죠. 그러니 같은 신자끼리, 니, 내할 것 없이 다 같은 여자라는 한 단어에 속하니까 우리의 주체는 한 여자라는 주체의 아바타가 되는 거죠. 교회라는 주체의 아바타가 되는 겁니다. 너는 발이고 너는 눈인데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 못합니다. 한 성령 받으면 다 같이 하나의 주체,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여자를 드러내야 남자가 남자로서 드러내니까, 예수님이 드러나니까.

이러한 구조를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용어들을 통해서 또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독수리 이야기를 하면서 실시되는 겁니다. 지금 뭐를 이야기 하려고 하느냐 하면 광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아까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습니까? 광야에서 터널 속에 갇혀 있다 했죠? 갇혀 있는데 여자들 자외선인가 선팅 할 때 어떻게 하죠? 저는 못 봤습니다만 영화에 보니까 여자가 비키니 옷 입고 뭐를 덮어씌우데요. 그러면 자외선인가 돈 주고 선팅 하는 것처럼.

광야가 그런 겁니다. 광야에 인간들 눕혀 놓고 40만 대군, 한 사람입니다. 누구예요? 요한계시록에 여자죠. 여자를 눕혀 놓고 여기서 선팅을 합니다. 뭐로 선팅 하느냐, 어려우니까 잘 들어 보세요. 천천히 하겠습니다. 모든 세팅된 언약의 핵심은 뭐가 있다? 새 언약이 있죠. 완성이죠. 그게 십자가죠. 그럼 십자가를 이 안에서 되풀이해서 십자가의 기능이 계속 유지되겠죠. 왜냐하면 창조의 완성이니까. 우리는 창조의 완성용의 하나의 일부로 포함돼 있으니까. 계속해서 창조가 일어나야 되겠죠. 햇빛 주고 공기주는 창조 말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죄 있는 자가 의인이 되는 창조가 일어나야겠죠. 왜? 우리의 모든 본질을 십자가니까.

변화 산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이야기할 때 주로 이야기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별세하십니까? 주로 그 이야기였죠. 왜 그 이야기합니까? 자기가 착실해서 구원 받으면 됐지 엘리야 같으면 불 수레 타고 올라갔으면 구원이잖아요. 왜 또 남았습니까? 아니에요. 불 수레 타는 것이 창조의 마지막 코스가 아니죠. 죄인 된 엘리야가 의인으로 바꿔지기 위해서 고정된 것이 심어져야 되죠. 아까 이야기 계속 나옵니다. 고정된 것이 심어져야 되죠.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고정된 것이 있어야지 한 여자가 되죠.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멱살 잡고 ’형님 내가 잘났나, 형님이 잘났나.‘ 이러면 안 되잖아요. 서로 다양한 것 말고 고정된 것, 고정된 것은 완성된 것이 미리 당겨서 왔어야 되겠죠.

그럼 십자가는 무엇인가,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거잖아요. 그럼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기 위해서 여기 누가 동원 돼야 하느냐 하면 악마의 활동과 악마 졸개 귀신들의 활동이 필요하겠죠. 이게 필요하기 위해서 지상에 땅이라는 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건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13장에 보면 엄청나요. 온간 귀신이 다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아있는 인간을 통해서 새롭게 정립 하겠다 하는 겁니다. 죽음의 의미라 해서 숨 헐떡이다 숨 끊어져 죽는 게 아닙니다. 제가 주일 날 설교 했는가요? 어디서 강의했더라. 울산서 강의했죠. 주께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노끈 들고 오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누구 하나 걸려라, 목 졸라 줄게.’ 이런 게 아니고 ‘십자가’로 죽인다니까요.

십자가로 죽이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 뭐가 됩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가 됩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된다니까요. 여러분이 안다고 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팅 하는 여자가 비키니 입고 누워 있으면 여기에 태양광선이 오잖아요. 이게 선팅이 아니고 세팅을 하는 거예요. 세팅할 때 규정이 뭡니까? 십자가를 여기에 적용시키?겁니다. 그러면 여기 광야에 있는 사람은 뭐가 돼요? 죽어야 되죠.

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어렵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기 힘든데, 죽어 가는 것과 죽어야 될 것과 같은 말입니까? 다른 말입니까? 다른 말 이예요. 죽어 가는 것은 지금은 살아있는데 언젠가는 죽는다는 뜻이죠.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  성도나 비 성도나 다 같이 사용하는 말 이예요. 그러나 이미 죽어 있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성도만 아는 겁니다. 이미 죽어있는데 광야 속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죽어있는 걸로 보는 거예요. 왜 죽은 자로 봅니까? 세팅됐기 때문에. 누굴 위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니요. 우리 구원을 위해서? 아니요. 누굴 증거 하라고? 자기 대신 죽은 새 언약의 완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죽은 자가 되어서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에 바를 때 이미 죽은 자예요. 죽은 자를 독수리로 업어서 광야로 온 겁니다. 땅으로 온 게 아니고 메마른 땅이 아니고 광야라는 새로운 의미를 주고 온 겁니다.

광야는 약속의 땅과 연관돼 있고 땅은 땅과 연관돼 있어요. 땅과 연관된 것은 소용없습니다. 교회도 교회만 다니면 지옥가요. 언약 속에 들어가야  천국 가죠. 언약은 천국과 연관돼 있고 교회는 그냥 세상의 시공간과 연관돼 있습니다. 친목계예요.ㅎ 그거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죽어 있는데 그들은 자기가 애굽 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에 살았다고 여기죠. 그래서 뭘 달라 합니까? ‘물 달라, 양식 달라.’ 하죠. 왜 달라고 합니까? 아직 살아있는데 이거 없으면 내가 뭐 하겠다? 죽겠다는 거예요.ㅎ 주님께서 기가차고 코가 찬 거예요. 아직도 어린양의 십자가의 의미를, 문설주에 바른 피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그들은 피라는 것을 페인트칠하면 가는 줄 아는 거예요. 그 피가 ‘니는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어.’ 어린양과 더불어 죽었다고 보는 관점인데 그 관점은 모르고 자기는 피만 바르면 부적 붙이듯이, 한번 그려 볼까요? 벌겋게 돈 20만원 주고 사는 거, 피 붙이면 사는 줄로 여긴 겁니다. 살만한 인간이 살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아닌데. 우리는 이미 죽은 자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14절, 참, 이래 말씀 드려도 우리가 언제 성경 구절 하나 제대로 아는 적 없죠. 그냥 읽었잖아요. 그냥 큐티 했지, 성경 말씀 전혀 이해를 못하잖아요. 한마디, 한마디가.

‘쌀 달라, 물 달라.‘ 안 줍니다. 왜 안 줍니까? 주면 세팅이 안 돼요. 이미 죽은 자는 달라는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이미 죽었으면 종결 된 건데 뭘 달라 해요, 이미 게임 끝났는데, 야구 하면서 9회 말에 10:0으로 이겼는데 이긴 팀 보고 동네 야구도 아니고 ’한판 더 붙자. 1회만 더 뛰자.‘ 프로팀이 이러면 되겠어요? 다음에 잘 하면 되지, ’한번만 더 붙자.‘ 이런 프로팀은 없죠. 이미 끝났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물을 안 줍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줘요. 누구 말 듣고 줍니까? 모세 말 듣고 물을 주되 그 물이 어디서 나와요? 반석에서 나오죠. 반석에서 나온 물은 무엇이 섞였습니까? 지하 2천 미터 심층수? 아닙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미움이 들어있는 물, 이것이 십자가 물이라면 우리는 십자가 물을 마실 때마다 누구 죄를 알아요? ’내가 이렇게 원망했고 이렇게 죄인입니다.‘ 하면서 매일같이 십자가를 보는 거예요. 무슨 십자가 알고 이제는 잊어버리고 부활만 생각하고 새 생명의 삶만 생각한다? 그거 엉터리예요.

우리는 이 물을 먹을 때 마실 때마다 ‘내가 바로 이 물을 마실 자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물을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 물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끝없는 십자가 물이 나오는 그것이 바로 남자 여섯 명하고 결혼해도 괜찮아요.ㅎ 어느 산에서 예배드리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거예요.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로 발걸음 움직이는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못 움직입니다.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산 것이 은혜가 아니라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시는 것이 은혜예요. 그 십자가 때문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평창, 이거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평창 백날 열어봐야 날 지옥에서 못 끄집어냅니다. 나 평창 할 때 프리젠테이션 했습니다. 소용없어요. 지옥 가서 그런 소리해도 천국 안 열어줍니다. ‘아이쿠, 평창에서 일했구나,’ 천국 안 열어줍니다. 세팅돼야 됩니다.

광야라 하는 것은 바로 계속해서 너희는 죽었고 누구만 살아있다? 동행하시는 어린양밖에 없다. 그래서 양식과 물은 누가 선물로 주는 겁니까? 누구 이름으로? 그 동행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공짜로 주는 것이 만나요. 그래서 아무리 인간들이 원망해도 만나는 40년동안 계속해서 주어測?겁니다.

그러면 장차 오실 세팅된 동행하시는 분은 언제 나타나는가? 광야에서는 안식일에 주인님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만나가 언제 곱빼기로 와요? 그래서 만나가 안식일이 되기 전에는 곱빼기로 오죠. 그러나 안식일에 새벽에 나가봤자 이상스럽게 그날은 만나가 오지 않아요. 이건 기후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연으로 소개하는 장차 올 율례와 율법은 너희들로 광야를 가게 한 것은 너희들의 뜻에 복종하지 말고 내 율례와 내 법도에 따라서 마음을 낮추기 위함이다. 바로 초때를 늘 까이면서 신명기 8장에 보면 ‘니가 약속의 땅에 가거든 절대로 내 능과 내 힘으로 이런 재물과 집과 과수원을 얻었다 소리하지 마라. 만약에 그러면 내가 이방 나라처럼 너희를 버리겠다.’ 왜? 뭐가 빠져서? 언약 세팅에 있어서 빠진 사람이 되기 때문에 너희들을 저주할 것이다.

그럼 언약이 뭐라고요? 언약은 이미 주께서 다 이뤄놓고 자기 필요한 사람을 당첨시켜서 그냥 ‘니는 내 사람이다.’ 해서 세팅하는 구조로 함께 갇혀있는 세상에서 함께 돋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그때 나오면 숨어있던 용들이 드디어 자기 정체를 들킨 것이 화가 나서 자기 정체를 모가지를 빼면서 악마의 자기 소리를 하게 되죠.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에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자, 여기에 세팅된 무대구조를 봅시다. 12장 마지막에 나오죠. 여기 세팅된 구조를 보게 되면 바다 나오죠. 배수진이라 하죠. 모래 있죠. 이쪽에 뭐가 있습니까? 아들은 하늘로 가버렸으니까 여기에 아들을 낳은 여자의 자손,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서 싸우기 위해서 용이, 뱀이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전쟁을 하려고 하죠. 마지막 전쟁이죠. 요것이 요걸(지구)로 바꿀 수 있습니까? 해, 달, 별, 지구 이것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 말이죠. 이건 자연과학적이고 천문학적이죠. 인간들이 납득이 되잖아요.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중심으로 도니까.

그런데 이것은(요한계시록12장 마지막 장면) 성경 말씀 속에 들어가야 우리 역할 하나를 맡죠. 나는 이 역할, 너는 이 역할,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구조에서 예수님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예수님은 어느 위치에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여자의 남은 자손을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여기서 증거를 빼버리면, 결국 누구 싸움이라는 겁니까? 우리와 마귀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과 용의 싸움이죠. 결국은 용을 치기 위해서 주님께서 누구를 동원시킨 거예요? 예수의 증인 역할을 할 우리를 하나의 역할로서 삼아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용과 계속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 싸움은 우리가 싸움이 취미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계시면 필히 용과 더불어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도망쳐도 안돼요. 회사 그만둬도 안 되고 직업을 바꿔도 안 되고 교회 사표내도 안 되고 십자가 마을에 안 들어가도 괜찮고, 10년 동안 안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이건 주께서 그렇게 시키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싸움이 용과 싸울 때, 예수님과 남은 자손 사이가 원활하겠습니까? 원활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이도 같은 편이지만 원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꾸 육적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구조보다 여기 지구가 있다, 여기 평창이 있다. 이런 걸 좋아하잖아요. 내가 만약 전라도 사람이라면 기아타이거즈가 이겨야 좋아하고 박 지성이 어떻고 이런 거를 더 좋아해요. 여기 땅 샀더니 땅 값 올랐다. 이런 거를 좋아한다니까요. 내 땅 값 오른 거하고 예수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묻습니다. ‘땅 값 올랐나?’ ‘올랐습니다.’ ‘그게 나의 증거가?’ 이렇게 묻습니다.ㅎ 예수님이 은혜 줘서 땅 값 오를 수도 있는데 그 땅 값 오른 것 때문에 기뻐하지 마시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이런 말씀 자체, 약속 자체를 기뻐할 때 그 앞에 우리 앞에 용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예, 그렇군요.’ 하면서 있을 때 벌써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니까요. 예수님 말씀 쪽으로 감사하고 있는데 용이 찾아온다니까요. 용을 우리가 언제 얼굴 보고 싶다 해서 찾아옵니까? 온다니까요. 그럴 때 우리는 뭐냐 예수의 증인을 가진 자와 용과의 마주침은 주께서 하나님께서 주선하신 거예요. 왜 그러는가,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계시록대로 돼야지, 스케줄대로 돼야지, 그것만이 존재의 의미고 의미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그냥 여러분들이 사시면 말씀대로 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처럼 일이 그렇게 돼 가요. 내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적이 없어요. 다 친하게 지내고 이야기 잘 되고 낚시도 같이 가고 아무 탈 없습니다. 어느 날 슬며시 눈치코치?없이 ‘예수님께서 장차 구름타고 오신다는데.’ 이런 소리하고 나서부터는 두 번 다시 얼굴 안 봅니다.ㅎ

그 다음에 한 가지만 더하고 13장으로 넘어갑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예수 증인만 되면 되는데 왜 하나님의 계명이란 말이 왜 들어갔는가? 예수만 믿으면 안 되고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겁니까? 이게 안식일 교인이 주장하는 겁니다. 안식 교인들은 영원한 계명은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도 안식일 지켜야 되고 우리고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터무니없다는 건 여러분도 아시니까 그 말 말고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도 말하는 것은 예수만 믿으면 안 되고 주의 말씀대로 행해야 이 복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야 한다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은 뭣을 의미하느냐 하면, 용들, 용의 하수인들, 귀신들 또는 악마 같은 사람들이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뭘 이야기했습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론하면서 거기에 완전히 매료된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요한복음 7장에 보면 그들은 모세밖에 몰라요. 예수님 비판할 때도 ‘모세의 법이 이러니까 당신은 이단이요.’ 이랬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계명, 계명 하는데 진짜 계명은 계명의 완성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의 생산, 나타남,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의 전부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산출된 사람, 하나님의 계명이 성취되면서 등장된 사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거를 받은 사람, 그들이 곧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계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 이예요.

그래서 이 복음이 있는 것은 뭐냐, 소위 하나님의 계명,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두고 그거 말고 따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자’ 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그런 소리는 다 마귀들이 하는 헛된 소리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넣은 거예요.

예수님의 증거라 하는 것이 계명 말고 새롭게 주어진 거라는 그런 오해는 하지 말고, 모든 계명의 완성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예요.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이예요. 이게 요한복음에 이게 나와요. 오직 한 가지 계명밖에 없어요. 그게 뭡니까? ‘사랑’이죠. 그러면 기존 계명은 사랑이 빠져있습니까? 아닙니다. 기존 모든 계명의 완성을 곧 집합시키고 결합시키고 통합시키면 그게 하나의 계명, 사랑의 계명으로 묶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나 요한이 하는 이야기나 똑같은 이야깁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이 다 이루었느니라. 같은 이야기예요. 요한복음에서는 그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분명히 못을 박았어요. 사랑이라고.

13장 봅시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방향성이 이렇게 돼요. 구조가 바다 있고 용이 있고 땅이 있고 광야 있고 예수의 증인이 있고, 이쪽의 방향성이 자꾸 용은 자기 배후의 세력을 어디서 얻습니까? 바다에서 얻어오죠. 바다에서 얻는다는 말은 뭐냐, 그 뒤에 바다의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의 짐승 볼까요?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이게 다 어디서 나온 거냐 하면 다니엘서에 나오죠. 다니엘서에 사자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하여튼 맹렬한 거, 사나운 거, 성질 더러운 거, 통합체로 그걸 하이브리드라 하죠.

통합적으로 나온 모든 것이 다니엘서에 어디서 나온다 했어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씀이니 잘 들어보세요. 다니엘서에 해괴망측한 짐승들이 어디서 나온다 했어요? 어디서 기어 나온다 했어요? 바다에서 나오죠. 바다에서 나온다는 말은, 요거는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다니엘에 들어가 보면 땅과 바다가 통합이 됩니다. 다니엘 이전에는 뭐냐, 중심이 뭐냐? 가나안이나 약속의 땅이 중심 이예요.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바벨론에 갔더니만 바벨론에서 무슨 짐승 만났다? 바다에서 기어 나온 짐승을 만났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포로 잡혀가는 자기 백성 다니엘 일행과 함께 감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적용 대상을 약속의 땅에서 뭐로 적용시켰다? 자기 백성을 포로라는 형식으로 이방나라에 심기는 형식으로 이방 나라 전체가 사실은 바다에서 온 악마의 산물인 것을 통합하는 거죠.

이제는 악마고 바다고 땅이고 전부 다 작살나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최후 마지막으로 엎어치기를 할 때가 이 마지막 때라는 거예요. 다니엘을 사용하시고 그 다니엘 속에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바다의 짐승까지 어떤 계기로 바다의 짐승이 자기 정체를 먼저 드러냈다? 유다 나라가 어디에 포로 잡혀 가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가면서 슬금슬금 바다에서 뭐가 기어 올라온다? 온갖 흉측한 바다짐승이 나왔는데 ?짐승이 노리는 바는 바로 언약의 백성, 다니엘과 함께 있는 계시가 모아진, 계시가 집대성되는, 계시를 품고 계시를 갖게 되는 다니엘과 세 친구죠. 그 언약 백성을 향하여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죠.

그러면 그 이방나라에서 노리는 바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진짜 남은 자, 진짜 이스라엘을 마지막 공격하기 위해서 그들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바다에서, 바다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기어 올라오는 겁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겁나지 않습니까? 이건 겁낼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이것이 현실의 의미입니다. 이미 일은 벌어진 거예요. 우리가 예수 안 믿어도 돼요. 겁 안 나요. 예수만 안 믿으면 everybody 어깨에 손을 얹고 평창 하면서 어깨동무 하면 되는 겁니다. 아무 일 없어요.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실 때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세상을 따라가도록 그렇게 용납 안하고 성령이 와서 ‘십자가의 피’만 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일가친척, 자식, 부모, 남편 전부 다 뭐로 변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변합니다. 그들에게 세팅된 거예요. 바다에서 올라와야 마지막 종말에 세팅이 돼요. 노란색 페인트 하다가 꺼먼 색 가지고 마지막 그림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검은색 크레파스가 등장해서 그림을 그린다 말이죠. 온 그림이 검고 노랗고 희고 엉망진창이지만 그러한 마음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고정성’ 하나 들어있습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 놀라지 않는 사람, 그 안에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다룬다는 겁니다. 하나의 세팅됐기 때문에 언약 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자체가 ‘니 구원 받았지? 맞지? 구원 받았으면 슬슬 구경해야지, 마귀한번 보고 싶지? 니 주변에서 마귀 나오게 해 줄게,’라는 글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구원 받아놓고 우리가 뭘 걱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당첨되어서 세팅되어서 우리가 예수님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전경과 광경이 우리 중심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