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818요한계시록14장-(꽉찬 세상)-21강a-이 근호 목사 제 21강a
요한계시록 14장 뒤쪽으로 가면 갈수록 의미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게 됩니다. 넓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완전해 진다는 겁니다. 완전해 진다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으로 생각해서 점점 더 완전해진다 생각해서 선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한 알의 밀알이 점점 더 커진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자라난다.’ 하고 ‘팽창한다.’ 하고 의미가 다르겠죠. 자라난다는 것은 나무가 점점 더 자라나는 것이 자라나는 것이고, 팽창한다는 것은 같은 밀도가 적은 것이 안에 밀도가 커지면서 점점 더 확대 되는 것, 내용물이 점점 커져가는 것, 점점 더 상세한 것, 빈 칸은 보이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드러나는 것.
요한계시록의 해석에서 제일 쉬운 해석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텅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요한계시록이 점점 더 채워지는 겁니다. 이쪽은 1장, 이쪽은 7장, 이쪽은 15장, 이쪽은 22장, 여기는 8장, 이런 식으로 점점 더 세상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꽉 차 있을 때 이것이 완전의 모습이 구체화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적어볼게요. 세상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세상이 우리가 보는 현실이라면 세상은 많이 비어 있어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게 많고 아직 사람들이 도달하지 않은 것도 많고, 사람이 왜 늙어죽느냐 하는 것도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안드로메다 위성 구조 안에 생명체가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아직도 모르는 게 굉장히 많아요.
물로서 가는 자동차, 아직 안 나왔죠? 보세요. 사람들 못 하는 것 많잖아요. 플랑크톤 가지고 석유 에너지 대체한다. 이건 개발 중에 있든지 아직까지 시도해보는데 아직 경제성이 안 맞는지, 아직까지 할 게 굉장히 많은 거예요. 이렇게 의자에 오래 앉아도 이틀 앉아 있어도 안 아픈 의자, 당뇨 같은 경우에는 아예 한번 약을 먹으면 깨끗하게 낫는 것, 안 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럼 그건 미완성이고 미완료고 불완전하죠. 그런데 그것 가지고 ‘하나님, 지금 나는 부족한데 뭔가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습니까?’라고 찾아본다면 성경 자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성경 안에서 미완료도 없고 불완전도 없고 미흡함도 없어요. 처음부터 완전했고 계속 완전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걸로 채워진 게 아니고 사실은 주님께서 준비 된 것으로 꽉 차있었던 겁니다.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아버지가 깨끗하게 방에 도배지를 해 놨어요. 도배지를 해 놓으니까 딸애를 위해 침대도 놓고 애가 인형을 좋아하니까 인형도 사고 도배지에 지가 낙서도 그림을 그렸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가세가 어렵고 힘들어지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딸 방에 와서 침대를 다 치워버리고 도배지를 다 뜯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딸이 ‘아빠, 그건 내가 그림 그린거야. 안 돼, 인형도 버리면 안 돼.’이러거든요. 아버지는 정신없이 ‘치워라.’ 하고 도배지를 뜯어내는 겁니다. 도배지를 뜯어내는 이유가 그 도배지 뒤에 현찰로 돈을 숨겨놓은 거예요. 애 방은 돈으로 가득 차있는데 딸은 돈이 도배지 뒤에 모르고 자기 행한 것으로 차곡차곡 채우는 그것이 악마가 자기의 에덴동산 자기만의 아름다운 소박한 자기만의 공간으로 그렇게 가꾸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딸애가 인형 놓고 피아노 사고 이렇게 침대 꾸미고 책상 꾸미고 컴퓨터 놓고 이러는 것이 뭐냐 하면 인류의 문화 문명사예요.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배지처럼 처음부터 다 뜯어내는 것, 인간들은 뭡니까? 저기 별이 있다. 이제는 나사에서 미국 우주 항공부에서 달에다가, 목성에다가 올려볼까, 전부 다 인형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우주 끝까지 가본다.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있는 우주도 도배지 뜯어내듯이 확 뜯어내버립니다. 뜯어내면 거기에 누가 있어요? 짐승이 있어요. 이거는 사람이 상상도 못한 겁니다. 처음부터 꽉 차있어요. 아버지 보기에 그 방은 돈으로 꽉 차있는 거예요. 천장이고 바닥이고 벽이고 전부 다 돈으로 꽉 차있어서 위급할 때 쓰려고 비상금으로 둔 금고 같은 역할이고 딸애 입장에서는 텅텅 비어있어서 우리가 열심히 가꾸고 경작하고 여기서 수고로이 사업 벌이고 인간의 지혜를 동원하면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공간이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질문한 것처럼 인간이 하는 행함을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하고 주께서 창세전에 인간을 만들 때 숨겨 놓은 하나님의 약속을 비로소 공개하는 걸 가지고 묵시의 역사적인 구체적인 활동이 되는 거죠. 이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이 아주 쉽게 다가오죠.
다시 한 번 보면, 세상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꽉꽉 차있는데 꽉 차있는 것이 무엇으로 꽉 차있는가를 우리가 보지를 못하고 있어요. 왜, 우리는 우리의 행함 결과물이 없으면 우리는 없다고 여기거든요. 행함 결과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말씀으로 꽉 차있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뜯어내는가, 뜯어내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강의가 중요합니다. 항상 잊지 마세요. 세상은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꽉 차있다. 이미 꽉 차있는 것이 몸에 버짐 생기듯이 안에 피가 나쁘면 피부에 뭐가 나잖아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의학에서는 ‘증상’이라고 해요. 아! 열이 많네요. 맥박이 뛰는 걸 보고, 증상을 보고, 내부에 요란스러운 걸 파악해내잖아요. 수 치 보고, 측정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기껏 증상밖에 못 보는데 그것도 증상도 성령을 받아서 보고, 아니면 증상이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뜻은 ‘말씀 구원’입니다. 말씀으로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건져 올리는 거예요. 도배지에 숨어있던 진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건져 올리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뜻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 구원’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심은 말씀에 와 있는데 목사가 목회하는 것은 말씀을 구원하는 건데 목사가 사람을 꼬여서 교회 한번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 건지려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건질만하다. 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쉽게 예를 들면, 도배지 뒤에 숨어있던 현찰, 모든 꽉 차있는 말씀을 내가 보기에 창세전부터 이미 담아놓은 것이고 그 말씀의 성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그로 인하여 다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이루어진 것이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 세상은 허물어져야 되는 거예요.
연극에 막이 두 개 있다고 합시다. 보통 세종문화회관 같은데 보면 무대가 여러 개 있잖아요. 그런데 달랑 두 개밖에 없다고 봅시다. 큰 천이 두 개 있어요. 첫 번째 천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별들, 동식물들, 사람들, 인간이 만들어 낸 도시, 전답, 기업체 빌eld, 이런 거죠. 그런데 그 막이 허물어지면 그 뒤 뭐가 나오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쫙 나오겠죠. 창세전에 영원히 쇠하지 않는 두 번 다시 망하지 않는 영원한 것들이 나오겠죠. 앞의 것은 뒤의 것의 성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임시적으로 있었던 칸막이에 불과한 겁니다. 그 감춘 것을 사전적 의미로 묵시라고 합니다. 또 묵시를 다른 말로 하면 계시, 요한계시록도 되고 요한묵시록도 되죠. 뒤에 감추어진 게 있는데 앞에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인데 그것이 주저앉으면서 비로소 등장하는 뒷모습.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가 뭘 봤겠습니까? 뒷모습 봤죠. 그걸 다른 어려운 말로 하면 창세전의 것을 봤다. 창세전의 아들과 아버지의 약속을 미리 당겨서 본 거예요. 그래서 약속을 믿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떤 철학자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독일에서 박사학위 받았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 ‘절에 가도 믿음이 있는데 왜 기독교에만 믿음이 있다고 하느냐.’라고 이야기하는데 제가 뭐라 했느냐 하면 ‘믿음은 내가 믿는다는 심리적인 행위가 믿음이라 하지 않고 내용이 믿음을 결정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이 철학박사예요. 하이데거 연구해서 철학박사 받은 사람 이예요. 그 사람 철학박사 뿐만 아니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목사예요. 그리고 한신 대학교. 그러니까 사람이 유학 가서 공부를 하니까 ’아, 사람들이 세상을 좁게 보지 않고 넓게 보니까 기독교만 믿음이 아니고 불교, 중들도 열심히 하는데 믿음 쳐주자.‘ 이런 조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본다는 것은 성경 모든 말씀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성경 모든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말로 들리는 겁니다. 뒤에 있는 말하기 전에 한군데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
질문입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할 때만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참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사람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고 일치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사람의 말 따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 따로 있습니다. 그럼 질문이 뭡니까? 어떤 것이 사람의 말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무지무지하게 어렵죠.ㅎ 사람의 말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따로 있다는 것이 어제 수요설교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어제 수요설교 보셨죠?
수요설교 때 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사사기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천사를 봤잖아요. 천사 만나고 나서 삼손 임신 된 거거든요. 천사 봤을 때, 또는 소돔과 고모라에 롯에게 천사 나타났잖습니까? 그때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말이죠.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몽타주를 그려볼래?’ 라고 해서 천사를 그대로 그려봤다고 생각합시다. 봤으니까. 마노아도 천사를 봤고 롯도 천사를 봤잖아요. 봤으니까 기억이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려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면 그게 천사입니까? 아닙니까?’라고 그걸 제가 묻는 거예요. 그럼 괴물 그려놓은 거예요? 코끼리 그려놨나?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본다 말이죠. 분리시키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신자라 할지라도 안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누구에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이다.’ 라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티벳 불교에 빌어도 그 사람도 구원 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이고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바르게 살도록 마음을 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종교는 다르더라도 산으로 올라가는데 정상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니까 어디로 가도 결국은 그들에게 착하게 살도록 마음을 주신 분은 성령의 하나님이니까 결국은 천국에서 만난다.’라는 것이 자유주의에서도 이야기하고 천주교에서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가 불교하고 손을 잡고 하는 거예요. 개신교는 뭣도 모르고 무조건 반대하고. 뜻도 모르고 내막도 모르고 무조건 반대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사도바울이 너희가 내(사도)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능히 이건 사도의 개인적인 말이라고 능히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그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었다,‘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하게 된 이유와 그런 방법이 뭐냐 묻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한테. 아이, 답답해라.ㅎ 어떻게 해서, 사도가 이야기했는데 사도의 말이 아니고 왜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느냐 말이죠. 그러면 사도가 장난쳐서 ’에이,‘ 해도 하나님 말이 되겠네요. 그건 아니잖아요. 사도가 닦달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럼 같은 인간이 한 잠꼬대하고 하나는 주의 말을 하는데 어떤 것은 잠꼬대고 어떤 것은 주의 말씀이라는 걸 어떻게 그걸 째고 분류 시키는 방법이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뒤에 나오지만 사도가 누구한테 말할 때 ‘니는 니 선입감 가지고 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로 들을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말할 때 만약에 아무것도 없이 그냥 선입감으로 들을 때는 100%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게 아니고 사람의 말, 인간의 말로 들어요. ‘아, 사도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구나.’ 그렇게 해버려요. 아, 요새 교회 다 그렇잖아요. ‘사도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하나님의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사도의 말로 듣지, 하나님이 자기한테 말하는 걸로 안 들리고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서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걸로 듣잖아요. 단계가 한 단계 삽입되죠. 삽입되면 그것은 뭐냐 하면 결코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결국은 사도의 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렇게 하니까 그 센더스란 유명한 신학자부터 많은 신학자 하는 말이 ‘사도바울은 자기밖에 모른다고. 베드로, 요한 선배들은 무시하고 목회 윤리도 없어. 자기가 전한 복음은 최고고, 베드로, 요한복음은 복음도 아니란 말인가? 사도바울은 인간이 덜됐어. 사도 이전에 사람자체가 이건 안 됐어.’ 그런 식으로 모독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 반박할 여지가 없죠.
그럼 뭐가 문제냐, 사도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역사하는 사람에게 내 말은 사도의 말이 아니고 뭐로 들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하나님께서 따로 심어줬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뒤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아서 작동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전도자가 사람 꼬여서 구원한다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에서 말 전해서 성령 만들어서 믿게 하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목회자로 하여금 아무리 목회해도 단 한명도 구원시킬 수 없는 일을 목회자한테 맡긴 겁니다. 구원이 안 되는 일을,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일을 주께서 맡겨서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제일 실패하고 실수하는 대목이 이거예요. ‘그렇게 공들였는데 왜 이제 와서 배신 때리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목회할 때 이만큼 공들이고 그만큼 말씀 했으면 얼추 믿게 될 것이라고 목회의 어떤 성공의 열쇠가 있는 것처럼 그 목사는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되는 일은 끝까지 안 돼야 돼요. ‘안 된다 하는데 되더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요. 자기는 끝까지 계속해서 안 돼야 돼요. 끝까지 안 되는 일을 주께선 끝까지 시킵니다.ㅎ그래야 주님의 택한 백성, 주님께서 지정해 놓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약속된 자만 구원받죠.
만일에 그렇지 않고 목회자가 자신의 애정을 다 쏟아서 누굴 사랑하고 목회를 해버리면 특별히 자기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를 더 해줄 수가 있어요. 기도를 더 해주면 거기는 일종의 빽 쓰는 셈이 돼요. ‘하나님, 저 사람만큼은 한번 봐 주소.’ 이래 됩니다.ㅎ 그럼 주님이 뭐라 그러시겠습니까? ‘원래부터 니가 안 되는 일을 시켰는데 왜 너는 되는 쪽으로, 긍정적으로 니는 생각하느냐, 니가 더 문제다.’
어떤 목사도 단 한명도 사람을 구원하는 목사는, 사도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 없는 목사는 위로를 받아야 되죠.ㅎ 천명을 모으고 만 명을 모아도 그 중에 단 한명도 자기 힘으로 구원시킨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천명이 다 가짜일 수도 있고 다 진짜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사가 관여할 몫은 안 돼요. 처음부터 목사의 교인은 단 한명도 있다? 없다? 단 한명도 교인이 없어요.
그러면 목사는 뭐하느냐, 말씀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미 세상에는 이미 도배돼 있는데 그 도배지 안에 뭐가 들었다? ‘말씀 들었다.‘ 요거 증거 하는 겁니다.
자, 아버지가 딸 방에 왔습니다. 아버지는 시선을 도배지 뒤에 있는 돈을 꺼내려 하는데 딸이 ‘미쳤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가만히 있는 침대를 왜 치우는데요?’ 여기서 바로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 충돌이 벌어지는 거예요. ‘니 미쳤구나, 세상이 내가 보기에는 텅텅 비어있는데 너는 가득 차있다고 설치느냐,’ 이는 가정에서부터 분란이 일어나고 직장에서 교회 다니면서 분란이 일어나고 심지어 자기 내부에서도 매일같이 싸우고 있습니다. 성경을 안 봤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봐서 내가 특별난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도 생각이 들 거예요.
왜 말씀을 증거 하는 것보다도 왜 인간 구원에 신경을 쓰느냐 하면, 바로 이것은 어려운 상식인데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신을 목적으로 보고 있어요. 나의 목적은 남이 아니고 나 자신이 목적이 돼 버립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나 잘되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나의 목적이 돼요. 그런데 나는 나의 목적이기 때문에 요것이 하나가 되어서 자기를 뭐로?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럼 사람이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면 사장님이 허드렛일을 시킬 때 아무소리 하지 않고 허드렛일에 순종하고 순복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유가 뭐겠어요? 내가 나에게 목적이 되기 때문에 어떠한 수난과 어려움도 이겨내거든요. 그런데 사장님 보기에는 이 직원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죠. 사장님의 목적은 뭡니까? 사장 본인이죠. 나는 내가 목적이 되는데 이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직원을 뽑은 거잖아요. 이 사람은 수단으로 보지만 수단으로 보든 말든 직원은 목적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어떤 직원도 사장님과 생각이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절대로 되지가 않는 거예요.ㅎ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 달성한 인간과 현재의 인간과 대립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 목적이 완성된 나 앞에서 현재의 나는 수단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금만 참아, 이번 일만 견디면 내가 원하는 목적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눈 꼭 감고 고추처럼 시집살이가 맵다 해도 인생살이가 힘들다 해도 조금만 참으면 이룰 수 있다.’라고 자기를 다스리면서 견디는 겁니다.
이렇게 목적이 돼 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 이 목적을 키우기 위해 환상이 되고 환상은 뭐가 되느냐 하면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아무리 써져 있을지라도 아까 천사 그리면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죠.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봐도 내가 나의 목적이 돼 버리면 내가 원하는 현실이라는 환상 속에서 나를 스스로 가두어지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접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럼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현실 속에서 나는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인간은 있어요?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라는 게 없어요. 그냥 아담이고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뭐가 돼요? 죄인 되죠.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선악과 열매로 본다니까요. 완전히 우리를 하나의 과일로 봐요. 사과 복숭아 수박으로 봐요. 그리고 하나님은 말합니다. ‘내놔라. 내놔.' 빨리 선악과 내놓으라는 거예요. 내놓을 때 그냥 못 내놔요. 죽어야 내놓을 수 있다니까요. 그냥 내가 자살해서는 안 돼요.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자살하는 걸로 해소될 범죄가 아닙니다. 이것은 천 번을 죽어도 선악과 따먹은 그 징벌에 대한 죄 값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럼 뭐해야 되는가? 저주 받아야 돼요. 영원한 저주!!! 왜 저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겁니다.) 왜 인간이 선악과 따먹으면 저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구출하기 위해서, 말씀을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 피조물들은 말씀의 수단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말씀에 가 있어요. 말씀에 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내 놔야 돼요.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토해놔야 돼요.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토해낼 때 뭐가 같이 나오느냐 하면 ”따 먹지 말라“ 다름에 뭐가 나오죠? ”정녕 죽으리라“ 정녕 저주 받으리라.‘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하나의 세팅이 되어 완성되니까. 그래서 지옥이 있는 거예요. 영원히 저주 받아줘야 말씀이 이걸 따 먹으면 ”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살아나니까 주님께서 팔짱 끼고 ’ 속이 시원한 거예요.
속이 시원한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에스겔에 나옵니다. ‘나는 너희들이 벌 받는 모습 보니까 내 속이 와 이렇게 시원 하느냐.’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줄을 그들이 알리라”(겔5:13)
참, 하나님 웃기죠? 하나님은 인간은 안중에도 없어요. 오직 관심은 뭐냐 하면 말씀에 관심이 있어요. 내가 한 말은 조금도 성취 없이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나에게서 나온 말은 반드시 성취를 거두어 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 ‘저 여기 있습니다.’ 하면 ‘니 말고 말씀’ 이죠.
탕자가 오니까 아버지가 탕자를 기다린 게 아니고 탕자가 돌아오게 되면 거기에 뭐가 포함됩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결합되어서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창세전에 진짜배기 하나님의 맏아들의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탕자 돼서 돌아오라 이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맏아들은 안 돼요. 왜, 탕자 된 적이 없어요.ㅎ 이쪽에서는 탕자가 돼 줘야 아버지가 준비한 가락지와 고급 옷과 소 잡는 것, 잔치 이것이 결합이 될 때 하늘나라에서 잔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창세전부터 이미 다 기획하고 다 설정한 거예요. 작가가 그거 다 예상하고 다 쓴 겁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하는 배우가 하기 싫다고 미국으로 도망가면 어이 됩니까?ㅎ 안 되죠. 이건 한 예슬은 미국으로 도망간 줄 모르지만 여기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미 우주가 말씀으로 꽉 차있어요. 이제 남은 건 도배지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누가 말립니까? 말씀이 공개돼 버리면 누가 쪽 나는 거예요? 악마가 난리 나죠. 악마는 마지막 일곱 대접이 주신 징벌에 의하면 악마는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야 돼요. 이걸 누가 알아요? 악마가 알았어요. 악마가 아니까 예수님 나타났을 때 뭐라 했습니까? ‘예수여, 아직 때가 안 됐는데 왜 일찍 오셨습니까?’ 이랬다고요. 이 이야기를 인간들은 몰라요. 오히려 악마는 알아요. 언젠가는 악마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 망하기 전에 할 수만 있다면 택한 백성도 꼬여서 인간도 꼬여서 같이 들어가서 같이 하나님 영광을 훼손해 보자, 목적이 그겁니다.
그러니 악마의 일이 뭡니까? 물으면 간단해요. 하나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이 악마의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간단하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면 그만이죠.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이 아닙니까?ㅎ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하옵시며‘ 이미 주기도문 초반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만 기도할 수 있다? 아들에 해당되는 사람만 할 수 있고 아들이 아닌 사람들은 그걸 훼방하겠죠.
이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전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냐, 나의 영광이냐, 하나님 사랑이냐, 내 사랑이냐, 그것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내려지는 모든 징벌이 곧 문화가 되겠죠.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무너져 내려야 될 것을 인간들은 악을 쓰고 지금도 빌딩을 올리고 있고 지금도 열심히 사업을 벌이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단어 하나 더 외우고 토익 시험 치면서.
지금도 문화 활동을 하게 하신 그것이 뭐다? 그게 바로 징벌이 되는 거예요. 거기서 뭐를 끄집어냅니까? 환상이 나오고 이 문화 활동에서 누가 목적이 됩니까? ‘나는 인간이다. 나는 가수다.’ 인간으로서의 목적은 누가 목적이 돼요? 인간이 목적이죠. 나는 내가 인간되는 거예요. 내가 인간만 되면 돼요.
사람이 인간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신이다.’라는 말과 같은데 신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걸 안다는 뜻에서 신이 아니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일을 끝까지 나의 자유에 의해서 시행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들은 신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는 것, 저 신랑감 고르는 것은 내 자의에 의한 선택에 의해서 할 때 그 선택하는 그 행위, 그 자유, 그것이 남아 있을 때 누구의 예속도 받지 않고 어떤 신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내가 곧 신이기 때문에 내가 자유롭게 나는 선택한다. 바로 여기에 자기의 환상과 현실로 보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보게 되면 여기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 144,000 들어가기 전에 창세기 17장 1절을 봅시다. 창세기 17장 1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여기 뭐가 나옵니까? 완전, 완전이란 말은 세상이 말씀으로 꽉 차있다는 뜻 이예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들어올 때? 2절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죠.
성경 말씀 해석 간단합니다.
①아브라함이란 인간이 있었다. 그 다음에 뭐가 들어왔다?
②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왔다. 그 다음에 뭐가 생겼다?
③완전해졌다. 간단하죠?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새 언약 집어넣었다. 제자들 완전해졌다.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이 완전을 내가 평소에 나는 내가 누구의 목적이다? 내가 나의 목적이 되면? 언약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는 거죠. 그러면 목적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나는 뭐가 된다? 언약을 이루는 수단이 될 때 이건 언약 맨, 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아브라함은 수단이 돼요. 무슨 수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 언약은 완전한 언약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무슨 짓을 해도 아브라함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 되는 거예요. 아! 이건 진짜 어려워요. 정말.
아무리 사람이 죄를 져도 진짜 죄는 모르게 돼 있고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인간은 의를 모르게 돼 있어요. 그런데 뭐가 주어질 때만? 언약을 이루는 수단으로 우리가 부름을 받을 때 초빙될 때 비로소 그 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 의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완전히 딴 동네 이야기예요. 그리고 죄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에서 말하는 죄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하고 완전히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를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거기 144.000 나오죠? 144.000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숫자예요. 그러니까 뭐냐 144.000이 모여서 144.000이 아니고 그 한사람, 한사람 속에 144.000의 전체적인 목적이 다 한사람, 한사람마다 다 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지난 시간에 참 어렵게 했다고 했죠.
한정된 숫자 안에서 무한정의 개수가 나온다고 했죠? 원래 수라는 것이 지상에서는 체리가 다섯 개 있으면 5라 했죠? 그런데 성경에서의 숫자는 그게 아니고 예수님 한분에서 나온 거죠. 144.000 위에는 뭐가 있다? 1이 있죠. 1이 144.000이 되는 거예요. 그만큼 기능의 폭이 넓어지는 겁니다. 요 기능의 폭이 넓어질 때 넓어지게 들어가는 그 매개체가 뭐냐 하면 아까 아브라함처럼 ‘언약’이 되는 겁니다.
자, 아브라함에게 뭘 약속했습니까? 니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같이 많죠? 숫자가 많잖아요. 숫자가 많은데 그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그들은 어디에 예속됩니까? 아브라함 하나의 언약에 예속 되겠죠. 이건 어렵지 않죠. 이건 야곱 언약도 마찬가지예요. 야곱 언약에 자식이 몇 명입니까? 12명의 자식이 있죠. 천대까지 내려오면 144.000, 12X12X 1.000=144.000, 이것은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그것들을 전부 다 모아놓으면 144.000이 되고 그들을 하나로 모아보면 1된다. 결국 그들은 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한 사람 붙들고 ‘니 뭐 할 거야?’ 라고 물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을 물으면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어야지 ‘너 뭐해서 구원받을래?’ ‘뭔 구원?’ 왜 우리가 구원받아야 될 이유가 뭐야? ‘너 뭐해서 구원 받을래?’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기능을 하죠.
다시 말해서 질문을 너 여기 있는데 너 지옥 갈 인간이 니 목적이 천국 가는 거잖아. 그래서 너는 너 자신이 목적이니까 너의 목적 뭐를 해서 니가 원하는 목적, 천국 가는 것을 이룰 것이냐,‘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성경에서는 통한다? 안 통한다? 안 통하죠. 왜냐, 우리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주께서 구원하신 것 속에 이미 포함이 됐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이 개인한테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니가 뭐냐고 물으면 우리는 144.000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144,000의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144.000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 뒤에 나옵니다. 4절 봅시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이렇게 돼 있죠? 골치 아픕니다. 왜냐 하면 어린양이 가는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린양은 우리가 알기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이 되신 것은 이 세상을 거치면서 어린양이 되셨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든 걸 다 버린 모습으로 가셨죠? 올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시지 않았고 갈 때도 아무것도 이 땅의 것은 손 하나 안 댔어요. 왜냐, 죽을 때도 옷 다 벗고 죽으셨잖아요. 어떤 것도 이 땅의 것이 걸친 적이 없죠. 못도 나중에 빠질 것이고 창도 나중에 빠질 것이고 오히려 이 땅에서는 가진 것이 아니고 뭘 주러왔죠. 뭡니까? 세상 것이 바뀔 때 거기서 피가 나왔고 살이 찢어졌잖아요.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고 그 살과 피가 없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없는 세상에서 영생과 접촉하기 위해서 유일한 자기 몸을 살과 피로 제공하는 그 일을 하신 거예요. 이것은 오직 그 일을 말씀으로 다 이루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 있었던 것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가져 온 아버지의 뜻, 말씀만 있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육체도 말씀을 위한 수단으로 돼 버렸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게 어린양인데 어린양을 따른다는 자는 뭐와 같은 자예요? 똑같은 자예요. 똑같은 자니까 이걸 재산 바치고 뭘 버리고 그런 뜻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간단하게 ‘내가 나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서 졸졸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뭘 바치고 뭐 어떻고 교회 바치고 그게 아니고 집에 뭐가 있든지 간에 나를 위한 목적은 사는 목적은 그쪽은 아니다 이 말이죠. 뭘 따라가면 됩니까? 졸졸졸 어린양만 따라가는 자를 숫자로 뭐라고요? 144.000, 그걸 풀이하면 언약이 개입돼서 완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일꾼들, 그렇게 보죠. 아브라함처럼. 언약이 개입되면 완전해져 버립니다.
이들이 정절이 있다는 말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앞에 나오죠.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간음이 뭐냐, 간음 또는 음행이라는 것은 이미 목적이 확립돼 있는 상태에서 수단에 해당되는 사람이 따로 목적을 만들어버리면 간음과 음행이 돼 버려요. 어떤 여자가 남편과 결혼할 때는 저 남자를 자기 남편으로 삼고 자기는 그 남자에 속한 여자.
이거 설명하면 좀 길지만 설명해야 되겠어요. 여자라 하는 것은 원래 없고요. -(마이너스)남자를 여자라 해요. 제일 먼저 남자를 만들어놨거든요. 남자 만들고 또 남자 만든 거예요. 두 번째 남자를 남자라 하지 않고 -(마이너스)남자라 해서 남자와 결합될 때만 하나의 사람이 되는 조건하에 만들은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말하기를 ‘내게서 나갔으니 니는 여자’가 된 거예요. 자기와 관련 없으면 그건 여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모든 성도를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신부’라 하죠? 그것은 본인이 신부되려고 애쓴 게 아니고 처음 성령을 받을 때부터 이미 신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미 부름을 받은 거예요. 이건 본인이 원해서 신부된 게 아니라 부참 없이 신부될 수밖에 없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부기 때문에 신부에 합당한 조치가 내려져요. 그건 뭐냐 하면 신부가 아닐 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간음이라 합니다. 쉽게 할게요.
예수님의 신부가 아닌 자는 전부다 간음한 자예요.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예수님의 신부가 아닌 자는 다 음행하고 간음한 자예요. 그럼 누구하고? 바로 세상과 더불어 한 거예요. 아니 이런 일방적인 해석이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도배지 뒤에 이런 해석이, 도배지 뜯어보니까 이런 해석이 나왔어요.
그럼 도배지를 안 뜯어버리면 뭐가 됩니까? 바람피우는 게 간음 이예요. 무엇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뭐가 된다? 목적이 되기 때문에 그건 시작부터가 하나님이 한 쳐줍니다. ‘에이~ 게임 셑, 게임 아니다.’ 처음부터 게임 무료로 봐주는 거예요.
모든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음행한 것이라 이야기한 것은,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어느 인간치고 마음으로 간음안 할 사람 없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네 힘으로 말씀 지켜서 신부 될 수 있다? 없다? 없고 항상 나는 음행하고 간음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 자체가 그런 위치다 이 말이죠.
니 개인에게 문제 있다는 말이 아니고 니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자체가 음행한 세상이고 간음한 세상에서 출생하고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간음한 여자를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불러서 ‘니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야,’ 이렇게 한 거예요.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는 어떤 성경적, 언약 적 개념도 집어넣으면 안 돼요. 똑같은 인간인데 서로가 잡아먹고 서로 이용하려 하는데, 어디 거룩한 말씀이 왜 끼어들어갑니까? 목사가 교인들에게 서로 이용하고 빼먹으려고 하는데 거기 왜 끼어들어요. 어떤 의사가 교회 등록했습니다. 왜 등록했습니까? 개업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목사 입장에서는 의사가 등록했으니까 돈푼이나 안 주겠나, 이용하고 의사 입장에서는 큰 교회니까 큰 교회 등록하고 감사헌금하면 우리교회는 내과의사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목사가 전부 다 우~~ 해서 오지 않겠나, 이용하고, 요새 의사들 개업하기 힘들죠? 거의 아슬아슬하잖아요. 은행에 이자도 못 내고. 그저 큰 교회 가야 우~루르 다 모아주니까. 이게 뭡니까, 처음에 일이 있을 때, 힘들어 있을 때, 나중에 그 교회 안 다니면 되니까.
모든 인간들의 관계가 그렇게 서로서로가 목적이지 자기 자신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디서도 ‘나는 당신이 있어야 돼.’ 희생 하는 게 아니에요. 직원이 사장한테 희생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괴롭지만 참고 자기가 자기 목적이지만 가끔은 힘들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자체가 이게 바로 간음이고 음행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목적에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서 자기가 벗어난다? 인간이 자기에서 자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벗어날 수 없어요. 안 되는 걸, 주께서는 되게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그건 10분 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