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22강-실체와 주체 1109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11. 07:26

2011-09-02 01:17:46 조회 : 1564         
실체와 주체 110901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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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10901요한계시록14장-(실체와 주체)-22강a-이 근호 목사
제 22강a

시간이 됐으므로 해 봅시다. 여기에 6절을 읽어보면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또 8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9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자, 방금 읽었던 3개의 문장을 읽으면서 여기서 우리가 당황스럽게 느끼는 것은 여기 나오는 표현들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가 손에 표를 받으면” 이 이야기가 우리 손에 뭔 표가 있고 우리 이마에 뭔 표가 있어요? 우리가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줘야 어떻게 반응을 나타나고 대처해야 될 텐데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이 다 그래요. 요한계시록의 용어들은 우리가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서울이나 한국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문지상이나 TV에서 나오는 용어 있잖아요. 그 용어와 다른 용어를 쓰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엮어야 되는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서 이것을 반겨야 되고 이걸 이해해야 되고 해석해야 되는지 우리로 하여금 난처하게 만드는 그러한 글귀들이 나와요.

그런데 이 문제를 어물쩍 그냥 넘어가버리면 ‘요한계시록에서 핵심만 빼내면 되지,’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넘어가버리면 하나님께서 핵심만 알기 쉽게 이야기하지 뭣 때문에 이렇게 귀신 나오는 그런 용어를 가지고 하시는 취지를 우리 쪽에서 삭제하는 식이 돼 버려요. 만약에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을 우리가 현대 용어로 바꾸어버리게 되면 뭐가 누락이 돼 버리느냐 하면 이 용어를 써야만 했던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이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쪽에서 그것이 날아가 버리게 되면 정말 하나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한테 전부가 와 닿지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말에 감을 잡은 사람 같으면 아시겠지만 그럼 문제는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 말 자체 용어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이걸 보면서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뜻에서 문제는 ‘우리한테는 문제가 없는데 괜히 복잡하게 어렵게 구조를 끌고 갔던 요한계시록이 뭐가 오류가 있다. 라는 식으로 밀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결국은 이걸 간편한 현대 용어로 바꿔야 이해하고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 용어자체가 우리를 암시해 주는 겁니다. ‘이해 안 되지?’ ‘예, 안 됩니다.’ ‘너한테 문제 있거든,’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ㅎ

그런데 문제 안 되는 걸 접선하려면 어떤 식으로 출발해야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에서 복잡한 과정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왜냐 복잡한 것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사람은 자기 몸이 있잖아요. 몸이 있으면 만질 수 있는데 이걸 ‘실체’라고 합니다. 귀신은 실체가 아니고 마귀도 실체가 아니고 몸이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덩어리가 있잖아요. 환상은 실체가 아니고 이렇게 실체가 있는데 이 실체에 환상적인 용어를 해버리면 실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로 바뀝니다. ‘이 몸은 곧 나다.’라고 바뀌어요. 여기 있는 이 몸은 ‘이 몸이 곧 나다.’라고 주체로 바뀌게 하게 하신 이유가 주체가 되어야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돌멩이 보고 하나님께서 뭔 이야기 안 하거든요. 코스모스 보고 이야기 안 한다고요. 해바라기보고 이야기 안 해요. 의자, 탁자보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탁자는 있는 것 자체가 실체입니다. 그런데 탁자가 어느 날 이 실체가 주체라고 이야기 안 해요. 심지어 강아지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의 뜻이 있어 실체가 주체가 바뀐 경우가 있어요. 민수기 22장인가에 나오죠. 당나귀가 뭐라 합니까? ‘왜 때립니까?’ 나오죠.ㅎ 원래 전에는 당나귀는 때리면 맞게 돼 있고 주인이 등에 타면 주인을 모시게 돼 있어요. 이것은 모든 당나귀의 주체는 누가 대행하느냐 하면 주인이 당나귀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나귀는 자기가 주체라고 내세우지 않아요. 그냥 그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실체 더 쉽게 말해서 하나의 생물학적인 기계라고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원숭이가 모여서 ‘우리는 죽으면 뭐가 될꼬.’ 가슴을 치고 울고 회개하지 않습니다.ㅎ 그렇죠? 고양이가 ‘우리는 이래 살다 죽으면 어찌 될까.’ 해서 고양이가 일기장 남기고 그러지 않죠? 그런 걱정하는 것은 누가 걱정합니까? 인간이 걱정 한다고요. 인간은 실체이면 되는데 실체를 뭐로 바꿉니까? 주체가 되니까 그때부터는 뭘 추구하느냐 하면 영원성을 추구해요. ‘이 몸이 이  실체가 늙으면 안 되는데 젊을 때는 예뻤는데 이 몸이 늙어간다. 이 몸이 죽으면 목사님, 어디로 갑니까?’ ‘천국 갑니다.’ 이렇게 자기가 실체를 뭐로 환원하느냐 하면 자꾸 주체로 바꿔서 주체로 바꾼 이상 주체는 실체로 되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이름 질 때 뭐라 했죠? 아담이라 했죠. 아담은 뭡니까? 흙이죠. 흙은 실체입니까? 주체입니까? 흙덩어리는 실제로 있는 물건, 사물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그건 실체가 실체로 드러나는 거예요. ‘따 먹지 마라. 니가 따먹지 않는 이상은 니가 인간이다. 그러나 따먹는 그 순간 니는 같은 이름인데 인간이라 할 수 없고 흙이 된다.’

‘따먹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할 때 이미 주체가 돼 버린 사람들은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흙인데요. 흙, 흙이 언제 다시 무덤 열고나옵니까? 또 궁금해 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전서에 그런 게 있다는 거예요. 무덤 열고나오니까, 예수님이 말하면 무덤을 열고 나오고,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그때는 죽은 자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하는 모든 작업은 우리가 요청한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해서 주께서 차후에 ‘그래, 그래 니가 흙으로 되니까 아쉽지? 그래, 내가 다시 인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줄게.’라고 차후에 마련한 작업이 아니고 인간을 처음으로 돌려버리면 주체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주체가 들어있는 그러한 실체로서 영원히 살게 하는 거예요. 한쪽은 예수님이 없는 실체로서 지옥에 살게 하고 그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속성이 들어있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인데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진노냐, 자비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재편성된다, 하면 정답 이예요. 모든 창조의 피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편성 된다면 그것이 종말이고 그것이 드라마의 최후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재편성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 결론을 방금 들었잖아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통일되며 재편성된다. 모든 것이 지옥 가든 천국 가든 전부 다 뭘 보고 있다? 예수님이 ‘주’시라는 것, 천국 가든 지옥 가든 그걸 증거 하게 돼 있다.‘라는 결론을 우리가 받는다면 그 주체는 주체로서 인정받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론을 소유할 자격이 못 돼요. 왜 그러느냐 인간은 과정 그 자체가 주님의 결론, 주님의 작품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방금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재편성 되는 그것이 결론이다.‘라는 것을 소지할 수 있는 스스로 자기를 위한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마을에 올라오는 반 십자가마을을 공격하는 모든 글들은 뭐냐 하면 결론을 쥐고자 하는 자들 이예요. 박 상호라는 사람이 마지막에 이런 글 썼어요. ’막사는 것이 결국 성도의 삶의 끝인가?‘라고 이야기해요. 진리를 소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소지해 버리면 그 사람은 문제점이 뭐냐 주체가 실체로 변하지 않고 계속 진리를 소유한 주체로서 계속 버티고 있는 셈이 되요. 이것은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대항하고 도전하는 마귀의 모습 이예요. 결론을 우리 자체가, 이렇게 물 마시는 이 자체도 결론 이예요. 그게 뭐냐, ’주의 은혜로 물 마셨다.’ 이러면 되는 겁니다.

요나 선지자가 자기가 결론에 참여하려 했어요.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이 어떻게 멸망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결론과 주님이 알고 있는 결론이 일치되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참관 관으로 참여하려 했는데 주님께서는 요나를 참관인으로 보는 게 아니고 요나 자체를 과정으로 봤어요. 어떤 과정? 니느웨 사람들의 멸망 과정 속에서 달라진 결과와 동일한 과정을 요나에게 그대로 이어져 버리죠.  그런데 요나가 삐져버렸어요. 왜, 왜 내가 생각했던 그 결과와 일치가 안 됩니까?‘ 하고 삐져서 죽는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뭐랍니까? ’니가 죽음을 알아? 모르지? 그래, 죽음을 알려줄게.‘ 그래서 뜨겁게 했다가 박 넝쿨 시원하게 했다가 박 넝쿨이 벌레 먹어 뜨겁게 했을 때, ’나 죽겠다.‘ 나올 때 바로 ’니가 전에 죽겠다는 것은 내가 주체이어야 되는데 방해했기 때문에 이 주체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살하겠다는 그 말 이예요. 나는 자살할지언정 내 주체됨을 기어이 포기 못하겠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마지막 한계입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주체를 버려서 예수님을 주체로 여기고 그렇게 믿을 위인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끝까지 예수하고 상대하려 하고 흥정하려고 합니다. 서로 동일한 계약자로 보려고 해요. ‘주님 뭘 원하십니까?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뭐 하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거예요. 왜냐, 우리가 주체로 돼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말고 빌립보서 같은 경우에 우리가 주체라고 간주해 주고 하나님께서 ‘얘야, 너는 범사에 감사해라.’ ‘알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우리는 뭐냐, 말씀의 대상으로 예수님도 주체고 우리도 같은 주체로서 서로 대화 되도록 그렇게 인내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사도바울에서 그렇게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게 주체를 죽이는 방법입니다. 그럼 죽여서 뭐가 되느냐,  그 유명한 말, 예수 안, 그 이름으로 된 교회도 있죠.ㅎ 예수 안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 바깥에서 얼쩡거리는 놈들 말씀으로 다 죽여 버려요. 십자가로 다 죽인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빌립보서, 에베소서. 이런 걸 보면서 마치 우리를 상대자로 여기는 것처럼 간주해서 그렇게 ‘이번에는 뭘 해드릴까요? 어떤 명령을 지켜드릴까요? 그래서 영광돌리겠다.’이렇게 나와요.

다시 이야기하면 전 우주는 실체입니다. 주체는 누구만 주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주체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뭐를 행사합니까? 그때부터 실체로 내려가면서도 기어이 고집을 부리면서 지금 늙어서 흙으로 내려가면서도 하나님의 방향은 흙이 되는 방식인데 인간은 흙이 안 되려고 버티는 쪽으로 계속해서 자기의 주체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인간의 고집도 하나님이 동원한 악마에 의해서 이게 허물어지죠. 이러한 외부적인 투쟁, 갈등이 욥에 나옵니다. 욥이 버티죠.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하지 왜 태어나게 했느냐, 차라리 엄마 뱃속에서 죽여 버리지, 왜 태어나게 해서 왜 나를 고생시킵니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욥기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바로 그 대목 이예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가 개인화 되느냐, 이 문제를 다룰 겁니다. 참, 이야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해야 되겠어요. 어떻게 우주적인 계시가, 우주를 지금 운영하고 있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지금도 장악하고 있는 그 모든 힘이 어떻게 개인문제로 쏠리느냐 말이죠. 왜 개인문제로 쏠려야 하느냐, 하는 이것도 어렵지만 왜 어떤 식으로 개인에게 집약이 되느냐, 그 과정도 어려워요. 안 어렵습니까?

제가 오늘 글 쓴걸 예로 들어볼게요. 새댁이 아기를 낳았어요. 너무 아이가 예뻐요. 조그만 아파트에서 신혼살림 차렸기 때문에 화초 키우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가 좋아서 아이 키우고 있을 때 그걸 제가 세자로 뭐라 했습니까? 막산다 했습니다. 그게 막사는 거예요. 그게 왜 막사는 거냐 하면 이라크 내전에 쫓기고 있는 카다피하고 관련성 없이 자기애만 지금 예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지금 애를 낳아서 자기애가 예쁜 그 새댁이 무슨 수로 카타피하고 전화 통화 합니까? 어디 무기대줄 일 있습니까? 어떻게 연관시키는데요? 그걸 설명을 하지를 못해요. 왜, 그 설명하려면 댓글이 길어져서 아예 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만 이야기했어요.

그 뒤에 제가 토를 달았죠. 뭐냐 하면 이 자본주이 사회에서 나만이 행복하고 나만이 즐겁고 나만이 복 받았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그것이 바로 전혀 주님의 실제적인 그 어떤 전체적인 움직임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는 막사는 거예요. 순박하게 촌에서 시금치 키우면서 행복은 느끼는 그게 막사는 거라니까요. 그게 죄라니까요.ㅎ

거기에 대한 정답은 간단하죠. 거기서 예수님은 그냥 방치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이라크 카다피 그냥 방치하지 않았을 거예요. ‘카다피는 즉시 항복하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ㅎ 집에 애 키우는 거하고 모든 게 연결 돼 있어요.

물침대에서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건 침대가 좋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게 같이 흔들리게 돼 있어요.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한쪽에 바람이 불면 저쪽에도 다 영향이 미치게 돼 있어요.

지구 안에는 철과 니켈로 된 내핵이 고체로 돼 있고 그 중간에 외핵은 액체로 돼 있고 그 다음에 마그마 있고 제일 끝은 지각이 있고 밑에 중간에 맨틀 층이 있어서 용융된 항상 에너지가 충만 돼 있어요. 여기서 저 필리핀에서 지진이 나면 P파와 S파가 두 개의 단층을 지나서 이쪽까지 전달됩니다. 지구가 그래요. 여기 내핵의 활동 때문에 처음에 시작한 P파와 S파가 이 지구에 모두 연쇄적으로 다 끌리게 돼 있어요. 일본에 쓰나미 밀려오면 그것이 즉시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남미에 있는 볼리비아, 페루, 칠레 해변 가에 해일이 납니다.

이걸 뭐라고요? 실체라 해요. 여기에 무슨 강아지 인격이 있고 고양이 인격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제가 묻는 게 이거예요. 세상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이러한 실체인데 거기에 왜 욥에게 하나님이 관여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이상하지 않느냐 이 말 이예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성경은 욥에게 하는 이야기지,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되도 않은 욥에게 왜 관여하고 그 아들 10명 죽이고 살리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있는 재산 날리고 왜 그런 일을 하시느냐 말이죠. 그것은 그런 일을 할 때 욥은 숨겨져 있던 욥의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주체로 살았던 욥의 주체가 등장하죠.

분명히 우리는 이론상은 ‘우리는 흙입니다.’ 개 코,ㅎ 흙인데 한번 차볼까? ‘우리는 흙입니다. 날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여, 되든지 말든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에이고, 말은 잘하지, 결론, 해답을 봤는지 성경에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대로 해볼까 어디?‘ㅎ 갑자기 주의 뜻대로 해도 우리는 그 다음에 왈칵 등장하죠. 뭡니까? 우리는 주의 뜻이 있는 그릇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내가 챙겨놓은 주체면서 내가 보는 실체란 몸은 주님의 주체에 종속되는 실체가 아니고 내가 따로 챙겨놓은 주체에 의한 실체로서 행세하는 이중인격자이죠. 이중 같으면 말도 안 해요 삼중, 사중.. , 그런 인격자를 말씀을 통해서 전부 다 P파 S파 다 지진을 일으켜요.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는 이단 되기 싫다는 거예요. 이단 되고 싫고, 말고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이단 이예요. 이거는 우리가 이단이 되련다. 말련다.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주체이기 때문에 이단 아닌 주체가 되려는 거예요. 이단 아닌 주체가 돼 버리면 결국은 누구 주체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주체는 어떻게 돼요? 우리 손에 의해서 살해당해야 돼요. 예수님은 우리 손에서 날마다 죽게 돼 있어요. ‘왜 나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예수님 당신은 인정하면서 예수님 지는 혼자 사랑하면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라고, 예수님 지는 자기 유익을 구해놓고 우리보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라고.’

요한계시록이 어떤 의미에서 정답 이예요. 주체로 이해되는 사람들은 도무지 해석을 못하게 돼 있어요. 그럼 뭐냐, 참 어려운데, 우리의 주체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아야 돼요.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려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를 알려면 우리의 주체가 나왔던 그 주체를 성경에 의해서 전부 다 실체로 다 바꿔야 됩니다. 악마, 악마라는 주체를 실체로 바꿨을 때 용어가 용, 뱀, 짐승, 이제 이해되십니까?

이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들이 이해되십니까?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그 세계, 그 공간 자체가 우리가 주체로서 생각하는 공간하고는 전혀 이해를 못하게 만들어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것을 실천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제가 여기 요한계시록에 있는 짐승이라든지 용이 하는 모든 인 받겠다는 모든 용어는 주체는 반드시 따로 계시다는 걸 염두에 둔 실체입니다. 어느 앞에서 누구 앞에서 실체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 앞에서 모든 것은 뭐가 된다? 그리스도 영광을 위한 뭐가 된다? 피조물이고 진짜 악마도 피조물이고 실체로서 행동해야 된다. 주체는 될 수 없다. 주체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실체로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기서 우리의 긍정적이고 개인적인 밝은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악마는 주체로서의 행동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실체로서의 행동이기 때문에 악마가 아무리 설쳐도 그것은 이미 결정 난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 난 주체자의 힘에 의해서 악마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하나의 동작 기계, 기계 작동 같은 것, 지금 여기 카메라에 있는 모든 부속품이 전기 에너지 때문에 돌아가고 있거든요. 돌아갈 때 전기 에너지가 ‘이 이미지는 내 때문에 찍힌다.’ ‘ 아니야, 내 때문이야.’ 하고 저 안에서 싸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부속품이 각각 뭐를 주장하기 때문에? 주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주체와 주체가 충돌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계가 보면 씩 웃죠. ‘웃기고 있네, 너도 실체에 불과해. 이 안에서 누구 때문에 찍혔다는 말을 할 자격조차 이 카메라 안의 기계 부속품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계시록에 짐승이고 심판이고 천사들이 동원하고 요한계시록은 천사에 의해서 천사를 공격하는 거예요. 주님이 부리신 천사에 의해서 마귀라는 천사, 악한 천사를 공격하는 그들의 구조와 세력을 그 주체성에 의한 그 제국을 공격하는 거예요. 제국 이름이 오늘 본문에는 뭐라 돼 있습니까? 8절 나오죠. 그 성 이름이 뭐죠? 큰 성 바벨론이죠. 역시 이거는 주체가 아니고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실체적 용어 차원에서 이 부속품이 들어있는 실체에 불과한 것들이 어떻게 이게 주체적으로 행세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안에서 발작들을 일으키게 하는데 그런데 그 발작들을 일으키게 하는 이유는 그걸 덩달아 평소에 우리들이 실체가 아니고 우리가 주체로서 평소에 발작을 일으키는 풍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요 말 어렵죠? 그걸 줄 알고 쉽게 갑니다.

자, 계시가 왜 욥에게 찾아왔습니까? 그와 똑같은 질문, 우주를 다루시는 주님께서 왜 하찮은 욥이라는 어떤 사람에게 왜 일부러 찾아왔느냐 하면, 욥 안에 들어있는 보편적인 주체성이 결국은 욥 안에서나 밖에서나 확대되는 이 욥을 이 모든 세상에 악마 성과 비 복음 성이 이 욥 안에도 포함이 돼 있다는 겁니다.

전체의 주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인의 주체성을 가져와 보면 거기에 집약돼 있는 거예요. 욥의 하는 행세가 바벨론에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죠.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주체고 모든 것은 실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말씀이 작업을 해버리면 우리 안에 요한계시록이 들어있고 우리 안에 내가 주체이기 위해서 어떠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봤는가, 그것은 바로 나한테 해를 끼치는 놈은 전부 다 악마고, 나에게 손해 끼치는 놈은 전부 다 벌 받아서 유황불에 다 들어가고 항상 주체도 아닌 게, 주체는 예수님인데 우리는 항상 내가 심판주요. 내가 구세주요, 내가 주님으로서 행세하고 있는이 악마 성을 바깥의 악마성과 같이 결부 시켜서 거기서 고통 받고 우리가 거기서 당황하게 만들고 우리가 성경을 봐도 해독이 안 되는 방식으로 우리 한계를 드러내는 그런 방식을 요한계시록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맘대로 기쁘게 맘껏 봐야 되죠. 맘껏 때려주시고 맘껏 박살내 주시고 아예 매일같이 말씀을 통해서 주체에서 뭐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의 흙으로 실체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시는 그 당사자가 유일한 우주의 주체이십니다.

제가 주일날 이런 설교 했죠.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자, 병신 되게 하시는 그 능력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병신 된 자, 저는 자, 가난한 자, 만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그런 사람들과 엮이게 하는 그런 거, 그게 동일성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 말씀을 순종해서 그렇게 초청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예수님, 주체 자 입에서 말씀이 나오고 그걸 누가 성사시킨다? 예수님만이 자기 입에서 나오신 말씀을 다시 거두어서 완성된 형태로 거두면서 나오는 과정 속에서 되도 않은 저는 자, 병신 같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작품이요. 완성된 작품이요. 주님의 결론이요.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우리가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해답 이예요. 우리가 해답을 쥘 필요 없어요. 그냥 물마시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그게 주님이 원하시는 해답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감격스럽게도 코스모스에게 찾아가지 아니하고 당나귀에게 찾아가지 아니하고 알래스카 눈 덮인 산에 찾아가지 아니하고 어떤 특정 인간을 성도라 하시면서 찾아오실 때 그때를 뭐라 하죠? 육이죠. 이 말은 우리는 실체죠. 흙이라 말이죠. 인간이 아니고 그냥 아담이고 그리고 에스겔을 부를 때 뭐라 했습니까? 인자야, 다니엘을 부를 때 뭐라 했습니까? 인자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를 때는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 어디에 쓰임 받을 것인가, 어디에 쓰일 것인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인가에 필요한 용어들을 우리에게 박아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름 받을 때 ‘저 구원 받게 해줘요.’ 이러고 오면 안 되죠.ㅎ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무슨 역할을 해야 됩니까? 물어봐야 되죠. 그건 바로 공통적으로 막사는 역할, 또는 죄인의 역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 하는 역할, 실체가 진짜 주체 자를 증거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죠.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용어들을 이제 하나의 우주를 구성하는 부속품, 그래서 이들은 배치돼 있고 이 배치는 고정된 배치가 아니고 때에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 우주를 구성하는 부속품이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6절 끝에 나오죠.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또 보니 다는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영원한 복음을 전하죠. 이렇게 보니까 여기에 나오는 공중에 날아가는, 땅에 거하는 자들, 이것은 모두 주체가 아니고 카메라처럼 모두 다 부속품이죠. 부속품이 작동을 해서 무엇을 생산한다? 영원한 복음을 생산하게 되죠. 요한계시록 굉장히 쉽죠?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따위 식으로 질문하는 그런 자에게는 전혀 성경을 접근조차 금지 당해 버려요. ‘요한계시록 무슨 말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종말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666피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래 나오면 전혀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666이 네로입니까? 뭡니까? 네로 피하면 그만인데.’ 이거는 우리가 주체로서 어떻게 구원받자는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장차 될 일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

그것은 우리가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들이 있어줘야 같이 필요한 부속이 하나, 하나 있어줘야 영원한 복음이 거기에서 생성이 되는 겁니다. 두 증인이 복음 전하다가 죽은 장소가 나오죠? 십자가라고 나오죠. 전에 있던 실체가 나오죠. 그 다음에 애굽 나오죠. 전에 있던 실체들, 또 소돔 나오죠. 전에 있던 실체들. 그런 관계들이 나오죠. 그럼 두 증인은 누굴 이야기합니까? 바로 오늘날 현재 우리가 해야 될 역할을 그런 식으로 묘사한 겁니다. 모두 우리가 할 역할을, 우리가 뭘 따로 되겠다.‘가 아니라 이미 그러한 역할이 우리의 배치 자리에서 이미 주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복음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서 실체가 복음 때문에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느냐 하면 주체로 계시 전달받은 주체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체가 아닌데 주체 역할을 해야 하니까, 결국 이렇게 되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의 실수가 아니고 주님께서 원래 짜놓은 이게 각본이었어요. 각본!!! ‘인간이 주체로 변할 때 누가 맘대로 주체로 변하게 하며 주체로 변한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악마와 짝짜꿍 돼서 결국은 그들이 메시야마저 창으로 찔러서 죽게 하고 못을 박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라는 드라마를 각본하기 위해서 주체로 바뀌도록 허용을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리는 실체의 자리가 알아서 하면 안 되고 주체의 자리에서 어디로 가야 되요? 실체의 자리로 가는데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영원한 복음을 팍팍 내비추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 주체의 자리에서 본래의 자리, 주님을 증거 하는 실체의 자리로 드디어 바뀌는 과정을 요한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24장로들은 천국 가서 면류관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이 주체에서 실체로 바뀌면서 이 실체는 옛날 그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새로운 피조물에 합당한 그러한 주체로서 우리가 주님이 준 사랑이라는 주체로서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죠. 전체적으로 봐서는 실체지만 새로운 예수님의 영이 들어오고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새로운 놀라운 주체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사도요한에게 천사가 절을 하니까 누가 말립니까? ‘아이고, 아저씨가 왜 이러십니까?’ㅎ 쉽게 말해서 우리 예수님이 이 천사보고 죽은 것이 아니고 아저씨 당신보고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천사가 하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 천사가 절을 해야 될 입장이라는 거예요. 천사는 오직 천사기 때문에 누구한테 절합니까? 주체한테만 절하게 돼 있어요.

성도는 하늘나라의 보석이 됩니다. 보석은 꾸미는 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보석이 돼요. 보석은 뭐예요? 보석은 실체죠. 흙에서 뭐로 변합니까? 흙에서 보석으로 변해요. 뭐가 입혀졌기 때문에? 뭐가 보석으로 영광으로, 영광으로 빛나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들어가니까 흙이, 흙 중에서 가장 귀한 흙이 보석이잖아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 창세기 2장 같아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 자체가 뭐로 입혀져 있습니까? 보석으로 장식돼 있어요. 보석으로 장식된 낙원에 인간을 거기에 딱 살게 했다는 말은 인간은 결국 내 앞에서 보석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단, 니가 건드리지 말아야 될 주체를 안 건드리는 조건 하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아야 보석 같은 존재, 보석과 더불어 살고 영원한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라 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마를 겨냥한 마귀를 겨냥한 그러한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심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유혹케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악마나 천사 같은 경우는 그 자체가 영원한 실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죠. 인간에게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 이것을 따먹지 말라고 가는 길을 차단해 버렸어요. 인간은 영원한 것을 따먹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이 영원한 자리는 이것은 주님과 하나님과 악마, 천사에게만 해당되는 그러한 속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래서 따먹으면 안 돼요. 그래서 생명나무 따먹고 영생할까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차단시켜 버린 겁니다.

이 세상 우주의 판도는 결국 영원한 존재들끼리의 싸움 이예요. 인간은 그냥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그러한 소멸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인간을 세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죽은 자를 다시 불러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이 주체를 어떻게 영원한 불멸 속으로 살릴 것이냐 하는 그런 인식 같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렇게 생각 될 수 없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은 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자체가 인간이 주체인데 이 주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중요한 주제나 테마는 인간이 관여 못 합니다. 인간은 그냥 당하기만 하고 만날 인간은 얻어터지고 하늘에서 3분의 1, 해를 떨어지게 하고 별을 떨어지게 하고 3분의 1, 강물이 쓰게 하는, 인간은 진탕 고생하고 인간이 어떻게 손쓸 수가 없어요. 손쓸 수 없는 세상,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너는 주체로서 하등 하는 일이 있다? 없다? 전혀 이 땅에서 니 주체로서 할 것은 전혀 없다. 손 떼라. 니는 주체가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상대할 소위 상대할 객체는 따로 있어. 너를 지배하고 있는 악마가 그게 영원한 내가 상대할 하나의 신종 주체로 등장한 거죠.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주체로서 행사하려 하는 그 인간, 그 존재 악마, 그 악마의 싸움에서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 입장에서는 영원한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기 바라는 겁니다.

7절 봅시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이 부분에서 심판 주는 적어도 어떤 권한을 가져야 심판주가 될 수 있습니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에 한해서 심판이 효력을 행사하죠. 다시 말해서 판사가 피고보고 ‘ 이 사람은 10년이다. 땅, 땅. 당장 넣어라’ 하는데 법원 직원들이 파업을 하며 ‘나 집에 갈래. 수갑 안 채울래. 월급도 별로 안 주고 집에 갈래.’ 경찰도 ‘나도 퇴근시간 돼서 나도 안 갈래.’ 다 가버리면 남는 건 누굽니까? ‘나도 집에 갈래.’ 결국 심판한다는 것은 이미 묶였다(옥 쪼였다).

모든 바다와 땅과 하늘의 근원, 이 근원은 무슨 근원이죠? 모든 실체를 실체로서. 모든 피조물을 그동안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했던 모든 분이 뭘 한다? 모든 피조물을 심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을 왜 하시는 겁니까? 이 우주에서 심판할 권한이 없는 놈이 심판하는 그 존재는 내가 분류시켜서 그건 따로 니는 심판 할 존재가 아니라 심판을 영원한 유황불에서 심판받을 존재를 떼 내고 분류하는 작업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심판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동안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해온 겁니다. 꼭 오늘날 교회 목사 같아요. 자기가 심판할 자격이 없잖아요. 그렇죠? 목사가 십자가 안 졌잖아요. 그리고 그동안 악마가 심판 자격도 없는 악마가 계속 인간 세계를 협박을 해왔다 이 말 아닙니까? 아무 권한도 없는데. 효과도 없는데. 그러면 심판이 효과 없다는 걸 뭐로 증명합니까? 주님이 마귀한테 심판을 받아보는 거예요. ‘자, 죽여라, 죽여라.’ 했잖아요. 그래서 마귀가 죽였잖아요.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베드로도 벌벌벌벌, 요한도 벌벌벌, 제자들도 이제는 죽었다 하고 문 닫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때 주님 나타나서 ‘봐라. 나 살아났잖아.’ 결국 무슨 이야기예요? 모든 이세상의 죽음을 무기 삼아 그 죽음이 저주고 끝이라고 여겼던 그 무기는 이제는 어떻게 됐다? 그게 말짱 사기였고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왜 예수님께서 문 닫고 있는 11제자에게 왜 찾아오느냐, 이 문제 제가 아직 안 건드렸어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왜 우주를 만드신 분이 욥에게 왜 찾아오셨느냐, 그 문제를 제가 터치를 못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할 게 있어서.

11제자가 문 닫고 있을 때 그냥 하늘나라 가시면 되지, 왜 찾아옵니까? 찾아온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냥 가셔도 괜찮은데 왜 찾아오시느냐는 거죠. 성령을 왜 주시느냐는 거죠. 예수님이 심판 주잖아요. 심판주면 판사가 ‘심판한다.’ 하고 판사는 자기 집으로 퇴근하고 피고는 교도소 가면 되는데, 왜 해놓고 찾아와서 ‘너 죄인 맞지?’ ‘죄인 맞습니다.’ ‘내가 니 대신 용서해 줄게.’ 왜 심판주가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 왜 하찮은 흙덩어리 같은 우리한테 왜 찾아오시느냐 말이죠. 찾아오시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요한계시록 1장에 사도요한에게 왜 찾아와서 밧모 섬에서 왜 계시를 주느냐 말이죠. 그 취지를 알아야 돼요. 왜, 우리는 그 과정이기 때문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우리가 예수님의 결론이고 하나의 정답이라 그랬죠. 정답을 한번 이렇게 펼쳐 봅시다. 몸을 카펫에 펼쳐 봅시다. 펼쳐보면 계시라는 것이 지상에서는 하나의 몸을 통해서 계시를 주었죠. 모든 성경 말씀은 누굴 위해서 계시한 것이다? 예수님이죠. 예수님하고 옆집 아저씨하고 차이나죠? 모든 계시는 어디에 뭉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뭉쳐있죠. 그게 어느 차원에서? 세상 차원이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모든 계시가 육이라는 거, 몸이라는 거, 육의 몸을 영의 몸으로 바꾸는 것에 지상에 있는 모든 계시를 여기다 집약을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핵심적인 뜻이 돼요.

이걸 무슨 취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몰트만 불트만 이런 학자들이 계속 고민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신약에 와서 분명히 예수님이 우주론적 그리스도가 됐거든요. 이 말 들어봤습니까? 신약학에서는 유명한 말 이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온 우주의 하나님으로 달라졌다고 하는데 초점을 둔다면 그것이 온 우주 같으면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되돌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끝, 그러면 그걸로 이미 하나님이 창조의 완성이 됐잖아요. 완성이 됐는데 아브라함은 왜 필요하고 이삭은 왜 필요하고 이스라엘은 왜 필요하고 오늘날 교회, 성도는 왜 필요 하느냐 말입니다. 그 문제가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결론에서 도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신학자들이 고민을 한 거예요. 가지 않아도 될 개인에게 왜 찾아오느냐 하는 그 문제와 똑같은 문제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 (IP:203.♡.47.76) 11-09-05 10:39 

가락교회110901요한계시록14장-(실체와 주체)-22강b-이 근호 목사
제 22강b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아까 질문을 이렇게 질문하면 알기 쉬워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본인들이 지상을 만들어놓고 하신 일이 무엇이냐? 거기에 대해서 여기 8절에 보면 “무너졌도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무너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해놓고 다 이루었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말아먹든 뭘 하든 다 이루었다 하면 될 텐데 그 후속 작업, 다 완성됐다 해놓고 왜 또 관여해서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하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노아한테 뚝딱 뚝딱 방주 만들라 하고 그 모든 작업을 안식이라면 쉬시면 되는데 왜 그 작업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보통 사랑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보세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돼 있고 갈라디아서 3장에는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나무에 달려서 뭘 받았다? 하나님의 저주 받았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다른 말로 하면 누가 이 세상에 더 살고자 꼬이더냐. 이야기예요. 이 세상이 좋다고, 이 세상에 성공하자고. 이 세상에서 실패하면 안 된다고. 누가 너를 꼬이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결국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무슨 마당으로 만듭니까? 진노의 마당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 진노의 마당을 버린 것이 나무 위에서 친히 저주 받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진노하기 위해서 온 폭격기가 있는데 그 폭격기가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이걸 뭐라 그러느냐 하면 율법이라 해요.  율법인데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선한 천사의 활약상, 또는 활동성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창세기부터 전체적으로 다 지배하거든요.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랑받는 여자는 시간이 끊어졌다.‘라는 말이 있어요. 진짜 그 말은 맞습니다. 보통은 하루하루 지나면 ’지난 하루가 아깝다.‘ 이렇게 되는데 사랑을 받게 되면 이건 하루가 지났는지 내일이 됐는지 지금 추석이 오는지 설인지 상관없어요. 사랑 앞에서는 묵시가 돼 버립니다.ㅎ 그저 사랑해서 잘해주는 남자만 있으면 세월 가는 줄을 몰라요. 바깥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지 병자호란이 일어나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저희끼리 사랑하는 게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간을 빼버리면, 적용을 해 봅시다. 저 혼자 재미있지만, 이게 지구라 합시다. 지구에 인간이 주체가 되면 이 주체 안에 신인이 되는데 모든 신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신인에서 시간이 나옵니다. 이 시간을 노끈의 뭉치로 보고 이 시간의 요소를 죽 잡아당기면 국수 가락 같이 잡아 당겨보세요. 잡아당기면 시간이 날아가겠죠. 시간이 날아가면 뭐가 남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요. 인간은 시간 가지고 진노를 계산하고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모면하기 위해서 대책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분노)를 해버렸어요. 이 분노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을 이제부터 설명에 들어갑니다. 선한 천사의 활동, 원래 율법은 누가 줬습니까? 성경에 보면 누가 율법을 줬다고 했습니까? 천사가 율법을 가지고 와서 줬다 돼 있죠. 기억 안 나요? 하나님께서 진노의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체, 주체만 있는 여기에 구멍을 파버려요. 주체에 구멍이 나버리면 그 주체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체로서의 자기 활동에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립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죠.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죠. 이걸 김형오 국회의장은 국회에서 성희롱사건에서 이 구절을 ....ㅎ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죄 없는 자가 주체의 기능을 다하라는 말 이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주체가 돼 버리면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진노, 심판, 저주는 다 밀치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뭡니까? 주체가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죠. 나라는 주체가 있고 저 밑바닥에 나한테 사기치고 해코지하는 놈들은 저주받아 심판받고 나는 똑똑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죄 없는 볼록한 봉우리가 죄 없는 봉우리면 이 간음한 여자 봉우리를 쳐 봐라.’ 이 말이죠. 칠 수가 없죠.

그러면 이 말씀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한 것은 예수님이 땅에서 뭘 썼죠? 글을 쓰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체로 등장했고, 예수님의 주체가 글로써 등장했고 현재 기존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뭘 드러내 사용했다? ‘나라는 주체는 주체답고 가치 있는 주체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들고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고 나는 간음을 안했다.’고 보는 거예요. 진짜 어려운 대목입니다.

율법의 주체가 누굽니까? 원래 주인이 예수님인데 주체가 따로 있는데 볼록, 볼록, 볼록 해서 율법을 받아보니까 이게 모든 입을 틀어막고 모든 세상을 심판아래 두기 위해서 율법이란 폭격기가 왔는데 이 폭격기가 장난감인줄 아는 거예요.ㅎ 그래서 자기의 건전한 주체, 훌륭한 주체, 다른 말로 하면 저주가 더 이상 끓지 않는 저주가 다가오지 않도록 방위된 볼록 구원받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 주체를 위한 율법으로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글을 쓰시면서 이 글을 보고 아직도 자기가 돌을 던질만한 건전한 괜찮은 주체로 여기면 돌을 던져라‘ 이렇게 된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돌을 던지면 누가 심판주입니까? 예수님이 심판주가 아니고 누가 심판주예요? 그 사람이 심판주가 되는 거예요. 여기 간음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뭐로 구명됩니까? 죄 있는 주체가 되죠. 죄 있는 주체는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뭘 받게 돼 있다? 저주받게 돼 있죠. 지금 이 여자는 저주받게 돼 있기 때문에 여자보고 돌 던지라. 니가 니보고 돌을 던지라는 소리를 못하는 거예요. 왜, 지가 지보고 돌을 던지면 분류 돼 버리니까. ‘나 부족하다. 나 부족하다.’ 하면 팔을 부러뜨려야 돼요.ㅎ '니가 부족하다‘ 해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 못났습니다. 나 죄 졌습니다.‘ 그러면 구원해줍니까? 아니죠. 그건 아직도 이런 행동을 하므로 자기를 죄를 아는 건전한 주체로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는 거라 말이죠.

하여튼 죄 있는 자는 저주가 있고 문제는 율법에 대해서 저주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쓸게. 이 글을 보고 아직도 내가 저주 바깥에서 저 여자는 간음했지만 나는 간음 안했다? ‘나는 간음 안 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 나와, 나와.’ 이래 되는 거예요. 돌멩이 다 놔버리죠.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갑니까? 여자에게서 떠난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죠.

예수님이 유일한 봉우리 아닙니까? 예수님 곁은 떠나버린다는 말은 결국 그들은 자진해서 어느 자리로 갔다? 결국 예수님한테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와 저주의 자리로 스스로 옮겨간 거예요.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에 저주의 구멍을 뚫는 거예요. 여기서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게 있어요. 주님은 의로운 분이잖아요. 의로운 분이 오셔서 심판하면 되잖아요.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놈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걸로 됐잖아요. 그리고 여자보고 ‘ 누가 있나?’ ‘없습니다.’ ‘율법을 만든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면 그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잖아요. 아이, 그거 계속하면 안 됩니까? 십자가 지지 마시고 그거 계속 살아서 나이 50이고 60이고 하시면 되잖아요.

왜 십자가에 가느냐 말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성도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작품이죠. 천지를 창조해서 완성하셨잖아요. 그게 예수님의 완성된 작품은 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주되심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말이죠. 천지를 창조한 걸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대체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것은 좋으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드러내는 것은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반드시 뭐 해야 합니까? 자기 영광을 버리고 ‘무너졌도다.’ 자기가 증오해야 될 그 진노의 세상에서 거쳐 가야 주가 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진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같이 저주당해야 되고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면 저주당하고 저주받으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았네. ‘아버지 나 저주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됐습니다.’ 그럼 끝났잖아요. 그런데 왜 성령이 우리에게 왜 찾아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아이, 주님 혼자 잘 나시고 홀로 구원되시면 주님 끝났다면서? 그러면 더 이상 성도도 필요 없네, 혼자 구원받으면 그만이네.’

왜 찾아오셨는가? 여기 간음한 여인을 봅시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이 사실이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길을 재촉하게 만듭니다. 너무 어려워서 나도 말이 정리가 안 될 정도로 어렵지만 봅시다. 사후적이란 말, 인간은 자기의 과거의 경험한 것을 가지고 사후적으로 해석하므로 인간은 자기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후적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대로 가는 거예요. 그럼 예정됐다는 말은 뭐냐,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하사, 이 너희(우리)를 택하사 할 때 어디서 얻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합류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여기에 우리를 어디서 생산하느냐, 어디서 발생시키느냐 말입니다.

사후적이란 말은 어려운 말인데, 사건이 나고 후에 보는 관점이라고 보는데 우리 인간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걸 다시 한 번 점검해서 자기를 ‘나는 나다.’라고 정립해 나가죠.

예수님의 주되심이라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주되심의 저주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주가 돼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에게 저주를 유발시킨 요인들에 의해서 사후적이 아니고 예정하사,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자기로 하여금 저주를 유발시킨 요인들 속에서 자기가 피어나 줘야 되는 겁니다.

마치 뽕나무 옮길 때 뿌리만 홀딱 옮기는 것이 아니고 뿌리 주위를 파서 묶어서 흙을 몰아줘서 심어야 나무가 살지 않습니까? 이렇게 뿌리주위에 붙은 흙에 속한 이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게 만드는, 예수님을 저주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죠. 여기에 합류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죄인이어 줘야 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라고 하고, 이걸 더 어려운 말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99마리 양이 있잖아요. 그 양은 안 돼요. 그리고 탕자 집에 원래 아버지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맏아들이죠. 맏아들이 되지 않아요. 어떤 아가씨가 동전 잃어버렸는데 찾고 나서 쓴 비용이 동전 잃어버린 것보다 많아요. 기분이 좋아서 잔치를 벌여서. 왜 그래야 됩니까? 99마리하고 1마리를 왜 대비해야 됩니까? 양적인 대비가 아니에요. 왜 대비를 합니까? 요 1에는 뭐가 있다? 잃어버림이 있다 말이죠.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모든 주체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지금 살아남았다는 쪽으로, 내가 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역사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주체답다.‘라고 사후적인 입장에 있지만 주님은 그 반대가 돼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잃어버릴 것인가, 이 땅에서 저주받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 관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숨어있는 천국을 주께서는 잃어버림 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그걸 새롭게 비춰내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사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기 주체성으로서는 들어올 수가 없는 나라예요. 부자가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어떤 인간도 못 들어오게 막는 나라, 생명나무를 못 먹도록 막듯이, 어떤 인간도 인간이라면 들어오지 마라. ‘니 사람이야?’ ‘예’ ‘들어오지 마라’ 어떻게 됩니까? ‘니는 잃어버려야 돼.’ ‘어떻게?’ ‘방법은 니가 못해.’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방법을 몰라요. 탕자가 그런 계산을 한 게 아니에요. ‘지금쯤 잃어버렸으니까 지금쯤 들어가면 반겨주겠지?’ 이런 계산이 탕자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에게 없는 것일수록 주님은 더욱 더 주되시거든요. 그래야 피조물과 창조주가 안 섞이게 되는 겁니다. 창조주는 창조주의 어떤 속성도 피조물에 담기지 않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은 몽땅 100% 주님의 창조의 속성으로만 만들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일체 모르게 돼 있어요. 구원받으면서도 구원받아가면서도 우리는 어느 것이 주님의 속성이고 어느 것이 내 속성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왜, 우리는 사후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 내가 말하지만 정말 어렵게 이야기한다.

‘내가 어느 날 성령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얼마든지 이것 옳은 소리죠. 사도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다메섹에 내려가는데 누가 왔다? 예수님이 와서 나를 건졌다.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사전에 ‘이쯤이면 예수님 오실 건데?’ 이렇게 예측했습니까? 예측 안 했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건이 일어나고 난 이후에 회상하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사도바울의 한계요. 우리 인간의 한계요. 성도의 한계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뭐로 이야기합니까? 항상 사후적으로 이야기한다고요. ‘내가 이렇게 구원받아 보니까 창세전에 예정됐다는 그 말이 이렇게 적용되는구나.’라는 말도 회상해서 아는 거예요.

회상해서 아니까 회상해서 아는 것은 날마다 회고적으로 아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기를 재평가하는 것은 날마다 회고적이 아닌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는 능력으로서만 날마다 깨져야 되죠. 주님께서 주되시잖아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목소리 고함지른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니니까 살살 합시다. 잃어버린 탕자를 건졌죠? 탕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옛날에 탕자였는데 아버지가 반겨 주셨어.’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거 아버지 뜻 맞습니까? 그게 아버지 뜻이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내 중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 영광 드립니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해줘서.’ 맞는데 그것을 주님이 흠뻑 속아 넘어가지를 않아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잃어버린 너를 건졌어.’라고 하시거든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이 ‘ 그래,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 아닙니까? 참 주님도 답답하다. 주님 생각과 똑같이 생각한다니까요. 잃어버린 나를 건졌다니까요.’ 주님이 ‘그러니까 너는 왜 자꾸 주체로 변하느냐, 주체로!!!! 내가 잃어버린 너를 건졌거든,’ 우리가 그걸 이해를 못하고, 이해 못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항상 추후 적으로 생각하니까. ‘잃어버린 양인데 주께서 살려냈잖아요. 아싸! 기분 좋다.’ㅎ 이렇다 말이죠. 주님께서 ‘너 여전히 잃어버렸어. 너 여전히 이단이야. 너는 여전히 잃어버린 양이야.’ 그걸 성령께서 알아먹는 사람은 ‘아차, 또 실수했네.’ 이러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글쎄 그건 이미 익히 안다니까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물론 주님이 그런 사람은 구원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바로 바울되기 전 사울 당시에 자기가 정립했던 여호와 개념, 신의 개념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택하사 구원했다는, 무엇의 근거로?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작용에 의해서 구원했다는,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 사울이 누굴 핍박했다고요? 예수를 핍박했죠.

자, 사도바울이 예수를 핍박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죠? 자 문제 나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똑똑한 사람 이예요? 아니에요. 사울과 똑같은 인간 이예요. 다만 누가 관리하는 거예요? 성도는 성도 본인이 자기를 관리하는 게 아니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로 대신하는 겁니다.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을 왜 핍박하느냐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고 저 사람 핍박하는 것은 누굴 핍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거예요. 왜, 예수 믿는 사람이 워낙 철이 없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철이 없고 예수 믿는 인간도 철이 없는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의 해답으로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답으로서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실체로서 주님이 죽으신 실체로서 다루시니까 불신자가 성도를 핍박할 때 성도로서 반항하고 대처하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한 결론이 이거예요. 성도가 스스로 나는 성도니까 내가 힘주어서 반항하겠다고 나오면 안 돼요.

그게 오늘 본문 어디 나오느냐 하면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렇게 돼 있죠? 성도들은 뭔가 본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임무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주어져 있어요. 이것은 성도 본인이 지키고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누가 관리한다? 주님이 관리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도는 계속 잃어버린 자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말로 하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할 자가 주님이기 때문에 그런 주님으로 배치되려면 우리는 뭐가 돼야 돼요? 잃어버린 자가 돼 있어줘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해 주는 자로서의 주님의 면모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이 진노, 저주받을 세상에서 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필요한 하나의 모종이 되는 겁니다. 모종에 붙은 흙덩이가.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항상 자기를 생각할 때 사후적으로 역사적으로 자기를 회상하면서 자기를 정립한다. 그리고 성도라는 작자들도 똑같다. 자기밖에 모르고 이라크의 카다피가 어디로 도망가서 숨든지 자기는 자기애만 키우면 그것이 잘 사는 거고 행복하고 축복받은 거라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런 전체적인 것을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 로 규정하고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진노 받아 마땅한 자,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규정하는 거예요.

만약에 애를 낳았는데 주님께서 애 죽여 버리면 대번에 화낸다 말이죠. ‘왜 내 애를 죽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 자기 아들을 갖다 바치라 했죠? 차라리 아브라함을 죽으라 했으면 대번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너 말고 니 아들 갖다 니 손으로 죽여라.‘ 이것은 무슨 구조를 다 깨버리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틀을 요구하는 것 같은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 모든 참혹한 이 집구석 개판 같은 이 자체를 주님께서 주되심의 지상에 하나의 요소로서 속성으로서 이걸 담겠다는 겁니다. 그게 산 하나님이 아니고 죽는 하나님 이예요. 어떻게 죽음을 품어야 하나님이 되느냐, 하나님이시니까 안 죽는다는 것은 상식적인 생각인 거예요. 왜, 인간은 사후적으로 살아있으니까. 이 말은 어려운데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가 산 쪽으로 해석을 다 해버려요. 이러 이러해서 나는 살만해서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걸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이것과 정 반대가 돼 줘야 이런 인간들은 잃어버린 양이 되고 주님께서는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어떻게 돼요? ‘나는 살아있는 이유는 이러이러해서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는 이러 이러해서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고 진노 받아야 마땅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는 다 가짜 하나님 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만날 부끄럽죠. 왜, 늘 살려고 하니까. 늘 사후적으로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돼. 에베소 1장 4절을 봐, 창세전에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 받아야 돼.’ 만날 지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에베소 1장 4절에 ‘창세전에 예정됐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그 생각은 다른 표현으로 말해서 사울이란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여호와에 대해서 자기 가운데 정리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단체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입니다. 그런 지식의 논쟁, 지식의 우열 가지고 신자 불신자를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야 말이죠. 그런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야 돼요. 주님은 사후적이 아니고 애초부터 죽는 하나님만이 주가 되셔요. 죽는 하나님!!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 이예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거, 그 잃어버린 자리를 우리 자리로 만드시면서 ‘인내하라. 끝까지 믿어라.’ 왜, 예수 안이잖아.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냐, ‘일찍 죽임을 당하여, 이 땅에서 죽어야 하나님이 주가 되신다는 그 안에 니가 놓여 있잖아.‘ 하나의 모종을 품는 흙더미로서 이렇게 둘러싸여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주님 죽으실 때 이 땅에서 내가 이래서, 이래서 살아 마땅하다 하지 말고, 이래서 내가 진노 받아 마땅하고 이렇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양 맞구나.’라는 생각.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죠. 앞으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야기했죠? 무엇이 무가치한가를 평생 동안 즐거이 그걸 경험하는 여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 된 자를 주께서 초청하신다면 주께서 병신 된 자, 가난한 자 저는 자를 초청한다는 말은 초청한 자와 초청자가 뭐해야 된다? 일치성을 갖출 때 잔치가 되거든요. ‘어이, 병신 된 자, 저는 자 올라와. 니 내 신세와 똑같네.’ 이럴 때 그 잔치가 초청이라는 게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그 이후는 어떻게 돼요? 우리는 병신 된 게 달라지지 않아요. 병신 같은 놈이 뭘 그렇게 좋아하지? 이걸 찾으면서 평생을 살란 말이죠. 골프를 치든지 뭘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뭣이 병신 같은 짓인지 찾으란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의 인내고 믿음인 거예요. 혼자 교회 바닥에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아니고 그냥 우리 행세대로 살면서 만날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는 지 잘난 척 하면서 ‘아! 내가 이래서 구원받을 만하구나.’ 이렇게 지 변명하고 지 옹호하면서 그렇게 사시란 말이죠. 그것이 무슨 모습이다? 잃어버린 탕자의 모습으로 계속 꾸준히 가줘야 돼요.

그래서 신앙인이라는 것이 이게 기적입니다. 신앙인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차라리 동아일보에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져서 독도가 되었다는 전설, 그게 훨씬 더 이야기가 쉬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이것은 신문에 날 일이예요. 정말 기적 이예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계속 탕자 맞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이 주체인데 주로 선악과 따먹고 악마가 악마 자체가 주체니까 악마는 자기가 신이라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주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야곱에게 찾아와서 다른 신과 참 신을 언약을 통해서 최초로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신이 높은 엘엘로이 높으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고 다 그 하나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다리 타고 천사 내려와서 언약을 줘 버리니까 비로소 자기는 뭡니까? 참된 신과 거짓 신이 있죠. 그 과정 속에서 야곱은 뭘 이용합니까? 주님한테 죽임을 당하죠. 죽임을 당한 야곱 자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게 정답이 되고 해답이 돼요. 다른 사람은 문제는 몰라요. 해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 그 사람들은 정답은 몰라요. 가룟 유다도 정답은 모르는데 해답은 있죠. 십자가 죽었다는 사실, 그런데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문제와 연결시킨 강도는 구원을 받고 해답은 있는데 자기가 저주받아야 될 자인 것을 인정 안 한 강도는 구원 못 받았죠.

성도 자체가 결국 뭡니까? 왜 계시가 집중해서 욥에게 찾아왔는가, 성도 자체가 주님이 해답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 계시가 되기 위해서. 죽는 하나님만이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 열매가 되기 위해서 성도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질문 자체가 잘못됐죠.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느냐, 이 질문 자체가 사실은 성립이 안 되는 질문 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탕자를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없는 양을 만들어 내시고,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 내셔서 그 양이 본인이고 그 본인을 그 양을 통해서 본인을 증거 하죠.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누굴 핍박하는 것이다?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이 에베소서 1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모든 만물을 교회가 머리가 되셔서 모든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돼 있어요. 에베소 1장 끝에 봅시다.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은 교회가 곧 누구라 말이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모든 구석구석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한테는 이해가 안 될까요? 세상이 이렇게 있는데 이 중에 교회 따로 있고 세상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이 이해가 안 되죠. ‘아! 세상사람 중에 지옥에 가는 사람 따로 있고 교회 가는 사람만 모아서 그리스도 몸이구나.‘ 그런데 이러면 충만한 게 아니죠. 충만의 일부죠. 어떻게 이게 충만이 되겠어요. 이게 넘친다 하는데 충만이 안 되죠. 그걸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걸 설명을 해야 본문이 이해가 돼요.

여러분, 냄비에다 라면 끓이기 위해서 물을 넣고 라면을 끓였습니다. 라면 면 따로 있고 물 따로 있죠. 요새 정신없는 사람이 다른 일 하다가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가보니까 가스불이 훨훨 타는데 냄비가 시커멓게 돼 버렸어요. 뭐가 없습니까? 물이 없죠. 그러면 냄비 안은 면의, 면의 충만이 되겠죠. 누가 다 소비했어요? 면이 뭘 소비했습니까? 면이 있기 위해서 주변의 물을 핥아서 다 소비하죠. 마치 엘리야가 제단에 물을 부었는데 불이 오니까 물이 어디로 갔습니까? 성경 보면 뭐로 돼 있어요? 불이 뭐를 핥았다? 불이 물을 핥아서 그 온천지가 무슨 바다가 되었다? 불바다가 되었죠. 물이 없어요. 이게 불의 충만이죠. 남는 게 없다 이렇게 되죠.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것은 인간을 주체로 여기고 자기가 어떻게 교회 될까 어떻게 예수 믿을까 하는 모든 관계를 에베소서 1장 4절부터 전부 그 근원을 끊어버리죠. 그러면 에베소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부터 출발하면 되죠. 예수 그리스도부터 출발하게 되면 예수님의 출발을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통일이죠.

냄비에 물이 있었는데 나중에 끓어서 면만 남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처음에 물과 면, 이렇게 출발하잖아요. 이렇게 하지 말자는 거예요. 처음에 물+면=면, 이라 하자 말이죠.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물 따로 있고 면 따로 있잖아요. 이건 우리 생각이고 그래서 나중에는 물이 없고 면만 남았다는 것은 에베소서 1장 24절인데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처음부터 물과 면을 처음부터 이걸 면으로 보자 말이죠. 그럼 여기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마귀도 포함돼 있고 당나귀, 코스모스, 해, 달, 다 처음부터 포함돼 있죠. 처음부터 포함돼 있는데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죠. 그런데 이게 육으로 안 드러날 때는 아까 카메라 안의 부속 저희끼리 ‘내가 중요하다. 발이 중요하지. 눈이 중요하지, 아니 손이 중요하지,’ 싸우는 거예요.

그렇게 싸우다가 십자가 지면서 전부 다 뭐가 돼요? 전부 다 저주 받았죠. 몽땅 저주 받고 난 뒤에 이게 중요합니다. 누가 무엇을 위하여 저주케 되었느냐가 이유가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죠.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이렇게 돼 있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저주받을 악마, 지옥 갈 사람까지 뭐가 돼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소모될 물이고 스프고 양파고 고추고 그런 양념 종류였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승천하고 난 뒤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전부 다 온 천지에 그리스도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 있다? 없다? 전부 다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나머지 그리스도의 몸에 해당되지 않은  예수 안에 있지 않은 나머지 악마, 지옥 갈 사람들은 뭐냐, 이건 여기에 해당이 안 돼요. 이야기 초점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우리’ ‘우리’거든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거든요. 그러면 저쪽이 지옥 가든 뭘 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면 그건 얼마든지 만물 안에 그리스도로 만물 안에 충만케 된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좋은 예로 여러분 다 앉아 있잖아요. 지금 바깥의 사람들이 목소리 들으면 누구 목소리만 들립니까? 지금 제 목소리만 들리잖아요. 뭐라 하느냐, ‘내 목소리로 충만하다.’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만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 열어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거든요. 조용히 앉아있는 것은 치지 말자 이 말입니다.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초점이 있는 이상은 내 목소리만 크면 이 강의는 유지되고 있다고 치자 이 말입니다. 만약에 시끄럽게 하면 강의 자체가 안 되니까.

그러면 이 에베소서 1장 말씀은 어떤 인식을 줍니까? 악마까지 계산하는 우리의 버릇, 같은 동료들, 같은 엄마, 아빠, 지옥 갈 사람들, 그들까지 고려하는 그런 인식으로 출발하자? 하지말자?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주되심에서 누가 구원받은 저희들끼리 이미 미완료가 아니고 그 자체로 충만한 완료적인 완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라 말이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세상 사람들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1장은 우리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우리의 인식을 또 다시 한 번 주의를 요하는 말씀이죠. 니가 세상 보는 관점에서 너무 해답을 주체로서 소유하려하는 그 오류를 또 다시 범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지옥 가는 사람은요.’ 우리끼리만 통하는 것 같으면 지옥 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들어와야 충만이지 그 사람들이 빼고 충만일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어떤 해답을 우리가 소지함으로써 모든 구원을 받은 것처럼 행세하려는 그 의도의 잘못을 지적하는 거죠.

그런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제 생각에는 너무너무 잘 돼요. 자 13절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주 안에 죽는 자가 복되죠? 그런데 자기는 구원받았는데 엄마는 구원 안 받으면 복된 인간입니까? 지는 천당 가 있는데 지 딸은 지옥 가 있으면 복되고 기쁩니까? 굉장히 마음이 섭섭하겠죠. 섭섭하다는 것은 성경 보는 인식 자체가 누가 주체란 말입니까? 내가 이미 주체로 돼 있어서 그것을 뭔가 성경을 통해서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꿔진 채 해답을 주체가 지식으로 확보할 경우에는 천국 가도 편치가 못하죠. ‘아이쿠, 내 새끼야, 내 새끼 지옥 가는 걸 못 보겠네.’

그러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복수 이런 것이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구원 받아서 부자 보고 ‘얼레리 꼴레리,’ 부자를 놀릴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왜냐 하면 천국의 자리는 잃어버린 양으로서 갔기 때문에 읽어버린 양이 마치 맏아들 자리에 올라가면 안 돼요. ‘형님, 형님 오늘 가출 안 했으니까 구원 못 받았지,’ 라고 잃어버린 양이 형님을 놀리면 안 돼요. 죄인은 부끄러워야 돼요. 그것이 바로 야곱이 에서를 만날 때 7번 절하고 부를 때 명칭이 뭐라 했습니까? ‘주’라고 한 거예요.

우리들의 인식 가지고 성경 해석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주체 의식을 가지고 성경 보면 안 돼요. 그러면 자기는 구원을 소유한 게 된다고요. ‘얼레리 꼴레리,’ 이러면 잃어버린 모습이 아니죠. 잃어버릴 뻔한 양이죠. 잃어버릴 뻔한 놈은 지옥 갑니다. 잃어버려야 되죠. 잃어버릴 뻔 했는데 주께서 구원해줬지, 이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주님 찾아오면 특징이 뭐냐 ‘낙담’ 이거뿐입니다. 완전히 낙담케 해야 돼요. ‘나 이제 조졌다. 천국이고 지옥이고 나 지옥갈래.’ 낙담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내 주체 중심이 아니라 찾아오신 예수님이 누구냐,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십니까’ 그런 질문으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 하죠.

그럴 때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 우리가 고소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 큰 성 바벨론은 사실은 우리를 그동안 즐겁게 했고 나로 하여금 인간답게 만들어줬고 나를 사람 사는 것 같게 만들어준 그 환경이 큰 성 바벨론이죠.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는 말은 누가 무너져야 마땅하다? 그걸 좋아했고 그걸 원했고 그걸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내가 같이 무너지는 것, 그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할 때 ’주여, 무너질 것은 제가 마땅히 무너져야 됩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성도의 인내고 성도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도는 우리의 작품이 아니고 성도는 본인의 작품이 아니라 간음한 여인이 지가 알아서 용서받은 게 아니고 주님의 정답으로서 십자가 죽는 이유를 보여주는 정답으로서 간음한 여인은 용서받아야 돼요. 지가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해준 것이 아니고 용서받아야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인데 잃어버린 양이 항상 용서받아야 주님이 자신의 일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의 몸은 온 만물의 충만함이 우리 안에 축약되어서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바깥의 세계가 우리 안의 세계보다 좁아요. 왜, 우리 안에는 만물이 충만 돼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충만 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 풍선을 봅시다. 개업할 때 춤추는 키다리 아저씨 봤죠? 머리, 팔 기다란 풍선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는 그런 키다리 아저씨. 이 풍선 팔 지점(A지점)과 다른 팔(C지점) 지점에 있는 사람이 지 자랑 할 수 있습니까? 바람이 어디서 옵니까? 바람이 밑에서 공급하기 때문에 지들끼리는 안 되죠?  이게 바로 충만, 만물이 이 안에 들어있다니까요. 주님이 생각하는 만물이 이 만물 이예요. 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지옥 가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만물에 해당되지 않아요. 교회가 만물의 충만 이예요. ‘이 풍선 밖에 있는 지옥 가는 사람들, 악마, 이 모든 걸 전체를 합해서 이 종합적이 만물이 되지 않습니까?’라는 것은 주체적인 사고방식이고 주님의 주되심은 주님 있으면 그걸로 충만한 거예요. 주님의 주되심 안에 모든 만물이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만물로 인하여 풍선 바깥의 모든 것들은 지옥에 갈 지옥이라면 이 새로운 나라(풍선 안) 천국의 충만함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득하게 하나님이 영광이 주님의 영광이 그득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저주받으시고 진노 받으시는 어떤 아저씨, 33살 먹은 아저씨로서 하나님이 등장했습니다. 끝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33살 먹은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그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도 평범한 이름이죠. 박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내가 그것도 2천년 후에 그것도 거리도 수만리 떨어진 내가 그 십자가 아저씨를 ‘나의 구세주요. 주여.’라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옆집 아저씨한테 ‘주여, 하는데 왜 믿으려 합니까?

이것은 어떤 경우에만 ‘주’가 되느냐 하면 그분이 심판주요. 나는 그분에 비해서 살고자 함이요. 그분은 죽으려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새로운 그분의 입장에서 그분이 죽었다는 입장에서 새롭게 아프리카나 나이지리아나 육상대회, 이 모든 것, 카다피가 쫓기는 것들, 새댁이 갓난 애 보고 웃고 울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죽음으로 전부 다 물 흐르듯이 보는 거예요. 보게 되면 주체는 누구밖에 없다? 볼록 봉우리 올라온 주체는 예수님밖에 없고 나머지는 주체인 척 하다가 저주받아야 될 율법의 폭격기에서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만 있다는 이러한 의식, 그런데 여기에 주체가 등장하는 그 뿌리에 우리를 하나의 모종의 흙으로서 새로운 실체로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택했다는 것은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니고 택한 자가 우리에 해당되는 거예요. 말도 참 어렵게 해요. 주께서 택한 자를 가지고 우리라 하는 거예요. 그거 보고 ‘나도 택함 받고 싶다’라고 나오면 안 되죠.

예수 그리스도만 주체가 되고 거기에서 우리는 전부 다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죠. 요나처럼 박 넝쿨의 그늘도 나중에 감사해야 되죠. 손톱이 뾰족한 것도 감사해야 되고 모든 구석구석이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충만한데,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작품이고 내가 어디가도 주님의 정답이 되고 하나의 이름을 한번 쓰세요. 이 탕자,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면 나의  모든 행동은 잃어버려도 마땅한 행동들을 평생 동안 같이 더불어 합시다. 잃어버려도 마땅한 돌아서면 사후적으로 ‘역시 나는 훌륭해, 나는 구원 받을 만 해.’ 만날 자기변명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우리는 항상 회상 적으로 자기 주체를 추구하는 이 잃어버린 습성을 평생 동안 탕자가 돼서 주님 앞에 부름 받으며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무너져가는 이 바벨론과 함께 더불어서 양생되고 그것이 도리어 드러나고 노출된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상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지금도 벌어지고 이루어지고 있는 일인 줄을 우리가 믿어지니, 주여, 그 예수님의 사랑을 항상 증거 하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