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901요한계시록14장-(실체와 주체)-22강b-이 근호 목사 제 22강b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아까 질문을 이렇게 질문하면 알기 쉬워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본인들이 지상을 만들어놓고 하신 일이 무엇이냐? 거기에 대해서 여기 8절에 보면 “무너졌도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무너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해놓고 다 이루었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말아먹든 뭘 하든 다 이루었다 하면 될 텐데 그 후속 작업, 다 완성됐다 해놓고 왜 또 관여해서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하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노아한테 뚝딱 뚝딱 방주 만들라 하고 그 모든 작업을 안식이라면 쉬시면 되는데 왜 그 작업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보통 사랑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보세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돼 있고 갈라디아서 3장에는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나무에 달려서 뭘 받았다? 하나님의 저주 받았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다른 말로 하면 누가 이 세상에 더 살고자 꼬이더냐. 이야기예요. 이 세상이 좋다고, 이 세상에 성공하자고. 이 세상에서 실패하면 안 된다고. 누가 너를 꼬이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결국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무슨 마당으로 만듭니까? 진노의 마당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 진노의 마당을 버린 것이 나무 위에서 친히 저주 받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진노하기 위해서 온 폭격기가 있는데 그 폭격기가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이걸 뭐라 그러느냐 하면 율법이라 해요. 율법인데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선한 천사의 활약상, 또는 활동성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창세기부터 전체적으로 다 지배하거든요.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랑받는 여자는 시간이 끊어졌다.‘라는 말이 있어요. 진짜 그 말은 맞습니다. 보통은 하루하루 지나면 ’지난 하루가 아깝다.‘ 이렇게 되는데 사랑을 받게 되면 이건 하루가 지났는지 내일이 됐는지 지금 추석이 오는지 설인지 상관없어요. 사랑 앞에서는 묵시가 돼 버립니다.ㅎ 그저 사랑해서 잘해주는 남자만 있으면 세월 가는 줄을 몰라요. 바깥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지 병자호란이 일어나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저희끼리 사랑하는 게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간을 빼버리면, 적용을 해 봅시다. 저 혼자 재미있지만, 이게 지구라 합시다. 지구에 인간이 주체가 되면 이 주체 안에 신인이 되는데 모든 신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신인에서 시간이 나옵니다. 이 시간을 노끈의 뭉치로 보고 이 시간의 요소를 죽 잡아당기면 국수 가락 같이 잡아 당겨보세요. 잡아당기면 시간이 날아가겠죠. 시간이 날아가면 뭐가 남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요. 인간은 시간 가지고 진노를 계산하고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모면하기 위해서 대책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분노)를 해버렸어요. 이 분노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을 이제부터 설명에 들어갑니다. 선한 천사의 활동, 원래 율법은 누가 줬습니까? 성경에 보면 누가 율법을 줬다고 했습니까? 천사가 율법을 가지고 와서 줬다 돼 있죠. 기억 안 나요? 하나님께서 진노의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체, 주체만 있는 여기에 구멍을 파버려요. 주체에 구멍이 나버리면 그 주체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체로서의 자기 활동에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립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죠.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죠. 이걸 김형오 국회의장은 국회에서 성희롱사건에서 이 구절을 ....ㅎ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죄 없는 자가 주체의 기능을 다하라는 말 이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주체가 돼 버리면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진노, 심판, 저주는 다 밀치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뭡니까? 주체가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죠. 나라는 주체가 있고 저 밑바닥에 나한테 사기치고 해코지하는 놈들은 저주받아 심판받고 나는 똑똑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죄 없는 볼록한 봉우리가 죄 없는 봉우리면 이 간음한 여자 봉우리를 쳐 봐라.’ 이 말이죠. 칠 수가 없죠.
그러면 이 말씀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한 것은 예수님이 땅에서 뭘 썼죠? 글을 쓰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체로 등장했고, 예수님의 주체가 글로써 등장했고 현재 기존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뭘 드러내 사용했다? ‘나라는 주체는 주체답고 가치 있는 주체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들고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고 나는 간음을 안했다.’고 보는 거예요. 진짜 어려운 대목입니다.
율법의 주체가 누굽니까? 원래 주인이 예수님인데 주체가 따로 있는데 볼록, 볼록, 볼록 해서 율법을 받아보니까 이게 모든 입을 틀어막고 모든 세상을 심판아래 두기 위해서 율법이란 폭격기가 왔는데 이 폭격기가 장난감인줄 아는 거예요.ㅎ 그래서 자기의 건전한 주체, 훌륭한 주체, 다른 말로 하면 저주가 더 이상 끓지 않는 저주가 다가오지 않도록 방위된 볼록 구원받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 주체를 위한 율법으로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글을 쓰시면서 이 글을 보고 아직도 자기가 돌을 던질만한 건전한 괜찮은 주체로 여기면 돌을 던져라‘ 이렇게 된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돌을 던지면 누가 심판주입니까? 예수님이 심판주가 아니고 누가 심판주예요? 그 사람이 심판주가 되는 거예요. 여기 간음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뭐로 구명됩니까? 죄 있는 주체가 되죠. 죄 있는 주체는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뭘 받게 돼 있다? 저주받게 돼 있죠. 지금 이 여자는 저주받게 돼 있기 때문에 여자보고 돌 던지라. 니가 니보고 돌을 던지라는 소리를 못하는 거예요. 왜, 지가 지보고 돌을 던지면 분류 돼 버리니까. ‘나 부족하다. 나 부족하다.’ 하면 팔을 부러뜨려야 돼요.ㅎ '니가 부족하다‘ 해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 못났습니다. 나 죄 졌습니다.‘ 그러면 구원해줍니까? 아니죠. 그건 아직도 이런 행동을 하므로 자기를 죄를 아는 건전한 주체로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는 거라 말이죠.
하여튼 죄 있는 자는 저주가 있고 문제는 율법에 대해서 저주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쓸게. 이 글을 보고 아직도 내가 저주 바깥에서 저 여자는 간음했지만 나는 간음 안했다? ‘나는 간음 안 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 나와, 나와.’ 이래 되는 거예요. 돌멩이 다 놔버리죠.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갑니까? 여자에게서 떠난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죠.
예수님이 유일한 봉우리 아닙니까? 예수님 곁은 떠나버린다는 말은 결국 그들은 자진해서 어느 자리로 갔다? 결국 예수님한테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와 저주의 자리로 스스로 옮겨간 거예요.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에 저주의 구멍을 뚫는 거예요. 여기서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게 있어요. 주님은 의로운 분이잖아요. 의로운 분이 오셔서 심판하면 되잖아요.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놈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걸로 됐잖아요. 그리고 여자보고 ‘ 누가 있나?’ ‘없습니다.’ ‘율법을 만든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면 그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잖아요. 아이, 그거 계속하면 안 됩니까? 십자가 지지 마시고 그거 계속 살아서 나이 50이고 60이고 하시면 되잖아요.
왜 십자가에 가느냐 말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성도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작품이죠. 천지를 창조해서 완성하셨잖아요. 그게 예수님의 완성된 작품은 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주되심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말이죠. 천지를 창조한 걸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대체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것은 좋으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드러내는 것은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반드시 뭐 해야 합니까? 자기 영광을 버리고 ‘무너졌도다.’ 자기가 증오해야 될 그 진노의 세상에서 거쳐 가야 주가 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진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같이 저주당해야 되고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면 저주당하고 저주받으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았네. ‘아버지 나 저주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됐습니다.’ 그럼 끝났잖아요. 그런데 왜 성령이 우리에게 왜 찾아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아이, 주님 혼자 잘 나시고 홀로 구원되시면 주님 끝났다면서? 그러면 더 이상 성도도 필요 없네, 혼자 구원받으면 그만이네.’
왜 찾아오셨는가? 여기 간음한 여인을 봅시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이 사실이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길을 재촉하게 만듭니다. 너무 어려워서 나도 말이 정리가 안 될 정도로 어렵지만 봅시다. 사후적이란 말, 인간은 자기의 과거의 경험한 것을 가지고 사후적으로 해석하므로 인간은 자기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후적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대로 가는 거예요. 그럼 예정됐다는 말은 뭐냐,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하사, 이 너희(우리)를 택하사 할 때 어디서 얻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합류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여기에 우리를 어디서 생산하느냐, 어디서 발생시키느냐 말입니다.
사후적이란 말은 어려운 말인데, 사건이 나고 후에 보는 관점이라고 보는데 우리 인간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걸 다시 한 번 점검해서 자기를 ‘나는 나다.’라고 정립해 나가죠.
예수님의 주되심이라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주되심의 저주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주가 돼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에게 저주를 유발시킨 요인들에 의해서 사후적이 아니고 예정하사,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자기로 하여금 저주를 유발시킨 요인들 속에서 자기가 피어나 줘야 되는 겁니다.
마치 뽕나무 옮길 때 뿌리만 홀딱 옮기는 것이 아니고 뿌리 주위를 파서 묶어서 흙을 몰아줘서 심어야 나무가 살지 않습니까? 이렇게 뿌리주위에 붙은 흙에 속한 이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게 만드는, 예수님을 저주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죠. 여기에 합류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죄인이어 줘야 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라고 하고, 이걸 더 어려운 말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99마리 양이 있잖아요. 그 양은 안 돼요. 그리고 탕자 집에 원래 아버지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맏아들이죠. 맏아들이 되지 않아요. 어떤 아가씨가 동전 잃어버렸는데 찾고 나서 쓴 비용이 동전 잃어버린 것보다 많아요. 기분이 좋아서 잔치를 벌여서. 왜 그래야 됩니까? 99마리하고 1마리를 왜 대비해야 됩니까? 양적인 대비가 아니에요. 왜 대비를 합니까? 요 1에는 뭐가 있다? 잃어버림이 있다 말이죠.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모든 주체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지금 살아남았다는 쪽으로, 내가 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역사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주체답다.‘라고 사후적인 입장에 있지만 주님은 그 반대가 돼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잃어버릴 것인가, 이 땅에서 저주받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 관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숨어있는 천국을 주께서는 잃어버림 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그걸 새롭게 비춰내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사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기 주체성으로서는 들어올 수가 없는 나라예요. 부자가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어떤 인간도 못 들어오게 막는 나라, 생명나무를 못 먹도록 막듯이, 어떤 인간도 인간이라면 들어오지 마라. ‘니 사람이야?’ ‘예’ ‘들어오지 마라’ 어떻게 됩니까? ‘니는 잃어버려야 돼.’ ‘어떻게?’ ‘방법은 니가 못해.’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방법을 몰라요. 탕자가 그런 계산을 한 게 아니에요. ‘지금쯤 잃어버렸으니까 지금쯤 들어가면 반겨주겠지?’ 이런 계산이 탕자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에게 없는 것일수록 주님은 더욱 더 주되시거든요. 그래야 피조물과 창조주가 안 섞이게 되는 겁니다. 창조주는 창조주의 어떤 속성도 피조물에 담기지 않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은 몽땅 100% 주님의 창조의 속성으로만 만들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일체 모르게 돼 있어요. 구원받으면서도 구원받아가면서도 우리는 어느 것이 주님의 속성이고 어느 것이 내 속성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왜, 우리는 사후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 내가 말하지만 정말 어렵게 이야기한다.
‘내가 어느 날 성령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얼마든지 이것 옳은 소리죠. 사도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다메섹에 내려가는데 누가 왔다? 예수님이 와서 나를 건졌다.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사전에 ‘이쯤이면 예수님 오실 건데?’ 이렇게 예측했습니까? 예측 안 했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건이 일어나고 난 이후에 회상하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사도바울의 한계요. 우리 인간의 한계요. 성도의 한계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뭐로 이야기합니까? 항상 사후적으로 이야기한다고요. ‘내가 이렇게 구원받아 보니까 창세전에 예정됐다는 그 말이 이렇게 적용되는구나.’라는 말도 회상해서 아는 거예요.
회상해서 아니까 회상해서 아는 것은 날마다 회고적으로 아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기를 재평가하는 것은 날마다 회고적이 아닌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는 능력으로서만 날마다 깨져야 되죠. 주님께서 주되시잖아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목소리 고함지른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니니까 살살 합시다. 잃어버린 탕자를 건졌죠? 탕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옛날에 탕자였는데 아버지가 반겨 주셨어.’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거 아버지 뜻 맞습니까? 그게 아버지 뜻이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내 중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 영광 드립니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해줘서.’ 맞는데 그것을 주님이 흠뻑 속아 넘어가지를 않아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잃어버린 너를 건졌어.’라고 하시거든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이 ‘ 그래,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 아닙니까? 참 주님도 답답하다. 주님 생각과 똑같이 생각한다니까요. 잃어버린 나를 건졌다니까요.’ 주님이 ‘그러니까 너는 왜 자꾸 주체로 변하느냐, 주체로!!!! 내가 잃어버린 너를 건졌거든,’ 우리가 그걸 이해를 못하고, 이해 못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항상 추후 적으로 생각하니까. ‘잃어버린 양인데 주께서 살려냈잖아요. 아싸! 기분 좋다.’ㅎ 이렇다 말이죠. 주님께서 ‘너 여전히 잃어버렸어. 너 여전히 이단이야. 너는 여전히 잃어버린 양이야.’ 그걸 성령께서 알아먹는 사람은 ‘아차, 또 실수했네.’ 이러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글쎄 그건 이미 익히 안다니까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물론 주님이 그런 사람은 구원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바로 바울되기 전 사울 당시에 자기가 정립했던 여호와 개념, 신의 개념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택하사 구원했다는, 무엇의 근거로?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작용에 의해서 구원했다는,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 사울이 누굴 핍박했다고요? 예수를 핍박했죠.
자, 사도바울이 예수를 핍박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죠? 자 문제 나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똑똑한 사람 이예요? 아니에요. 사울과 똑같은 인간 이예요. 다만 누가 관리하는 거예요? 성도는 성도 본인이 자기를 관리하는 게 아니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로 대신하는 겁니다.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을 왜 핍박하느냐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고 저 사람 핍박하는 것은 누굴 핍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거예요. 왜, 예수 믿는 사람이 워낙 철이 없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철이 없고 예수 믿는 인간도 철이 없는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의 해답으로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답으로서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실체로서 주님이 죽으신 실체로서 다루시니까 불신자가 성도를 핍박할 때 성도로서 반항하고 대처하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한 결론이 이거예요. 성도가 스스로 나는 성도니까 내가 힘주어서 반항하겠다고 나오면 안 돼요.
그게 오늘 본문 어디 나오느냐 하면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렇게 돼 있죠? 성도들은 뭔가 본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임무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주어져 있어요. 이것은 성도 본인이 지키고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누가 관리한다? 주님이 관리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도는 계속 잃어버린 자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말로 하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할 자가 주님이기 때문에 그런 주님으로 배치되려면 우리는 뭐가 돼야 돼요? 잃어버린 자가 돼 있어줘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해 주는 자로서의 주님의 면모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이 진노, 저주받을 세상에서 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필요한 하나의 모종이 되는 겁니다. 모종에 붙은 흙덩이가.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항상 자기를 생각할 때 사후적으로 역사적으로 자기를 회상하면서 자기를 정립한다. 그리고 성도라는 작자들도 똑같다. 자기밖에 모르고 이라크의 카다피가 어디로 도망가서 숨든지 자기는 자기애만 키우면 그것이 잘 사는 거고 행복하고 축복받은 거라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런 전체적인 것을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 로 규정하고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진노 받아 마땅한 자,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규정하는 거예요.
만약에 애를 낳았는데 주님께서 애 죽여 버리면 대번에 화낸다 말이죠. ‘왜 내 애를 죽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 자기 아들을 갖다 바치라 했죠? 차라리 아브라함을 죽으라 했으면 대번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너 말고 니 아들 갖다 니 손으로 죽여라.‘ 이것은 무슨 구조를 다 깨버리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틀을 요구하는 것 같은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 모든 참혹한 이 집구석 개판 같은 이 자체를 주님께서 주되심의 지상에 하나의 요소로서 속성으로서 이걸 담겠다는 겁니다. 그게 산 하나님이 아니고 죽는 하나님 이예요. 어떻게 죽음을 품어야 하나님이 되느냐, 하나님이시니까 안 죽는다는 것은 상식적인 생각인 거예요. 왜, 인간은 사후적으로 살아있으니까. 이 말은 어려운데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가 산 쪽으로 해석을 다 해버려요. 이러 이러해서 나는 살만해서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걸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이것과 정 반대가 돼 줘야 이런 인간들은 잃어버린 양이 되고 주님께서는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어떻게 돼요? ‘나는 살아있는 이유는 이러이러해서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는 이러 이러해서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고 진노 받아야 마땅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는 다 가짜 하나님 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만날 부끄럽죠. 왜, 늘 살려고 하니까. 늘 사후적으로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돼. 에베소 1장 4절을 봐, 창세전에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 받아야 돼.’ 만날 지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에베소 1장 4절에 ‘창세전에 예정됐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그 생각은 다른 표현으로 말해서 사울이란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여호와에 대해서 자기 가운데 정리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단체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입니다. 그런 지식의 논쟁, 지식의 우열 가지고 신자 불신자를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야 말이죠. 그런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야 돼요. 주님은 사후적이 아니고 애초부터 죽는 하나님만이 주가 되셔요. 죽는 하나님!!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 이예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거, 그 잃어버린 자리를 우리 자리로 만드시면서 ‘인내하라. 끝까지 믿어라.’ 왜, 예수 안이잖아.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냐, ‘일찍 죽임을 당하여, 이 땅에서 죽어야 하나님이 주가 되신다는 그 안에 니가 놓여 있잖아.‘ 하나의 모종을 품는 흙더미로서 이렇게 둘러싸여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주님 죽으실 때 이 땅에서 내가 이래서, 이래서 살아 마땅하다 하지 말고, 이래서 내가 진노 받아 마땅하고 이렇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양 맞구나.’라는 생각.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죠. 앞으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야기했죠? 무엇이 무가치한가를 평생 동안 즐거이 그걸 경험하는 여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 된 자를 주께서 초청하신다면 주께서 병신 된 자, 가난한 자 저는 자를 초청한다는 말은 초청한 자와 초청자가 뭐해야 된다? 일치성을 갖출 때 잔치가 되거든요. ‘어이, 병신 된 자, 저는 자 올라와. 니 내 신세와 똑같네.’ 이럴 때 그 잔치가 초청이라는 게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그 이후는 어떻게 돼요? 우리는 병신 된 게 달라지지 않아요. 병신 같은 놈이 뭘 그렇게 좋아하지? 이걸 찾으면서 평생을 살란 말이죠. 골프를 치든지 뭘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뭣이 병신 같은 짓인지 찾으란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의 인내고 믿음인 거예요. 혼자 교회 바닥에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아니고 그냥 우리 행세대로 살면서 만날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는 지 잘난 척 하면서 ‘아! 내가 이래서 구원받을 만하구나.’ 이렇게 지 변명하고 지 옹호하면서 그렇게 사시란 말이죠. 그것이 무슨 모습이다? 잃어버린 탕자의 모습으로 계속 꾸준히 가줘야 돼요.
그래서 신앙인이라는 것이 이게 기적입니다. 신앙인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차라리 동아일보에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져서 독도가 되었다는 전설, 그게 훨씬 더 이야기가 쉬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이것은 신문에 날 일이예요. 정말 기적 이예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계속 탕자 맞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이 주체인데 주로 선악과 따먹고 악마가 악마 자체가 주체니까 악마는 자기가 신이라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주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야곱에게 찾아와서 다른 신과 참 신을 언약을 통해서 최초로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신이 높은 엘엘로이 높으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고 다 그 하나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다리 타고 천사 내려와서 언약을 줘 버리니까 비로소 자기는 뭡니까? 참된 신과 거짓 신이 있죠. 그 과정 속에서 야곱은 뭘 이용합니까? 주님한테 죽임을 당하죠. 죽임을 당한 야곱 자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게 정답이 되고 해답이 돼요. 다른 사람은 문제는 몰라요. 해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 그 사람들은 정답은 몰라요. 가룟 유다도 정답은 모르는데 해답은 있죠. 십자가 죽었다는 사실, 그런데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문제와 연결시킨 강도는 구원을 받고 해답은 있는데 자기가 저주받아야 될 자인 것을 인정 안 한 강도는 구원 못 받았죠.
성도 자체가 결국 뭡니까? 왜 계시가 집중해서 욥에게 찾아왔는가, 성도 자체가 주님이 해답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 계시가 되기 위해서. 죽는 하나님만이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 열매가 되기 위해서 성도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질문 자체가 잘못됐죠.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느냐, 이 질문 자체가 사실은 성립이 안 되는 질문 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탕자를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없는 양을 만들어 내시고,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 내셔서 그 양이 본인이고 그 본인을 그 양을 통해서 본인을 증거 하죠.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누굴 핍박하는 것이다?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이 에베소서 1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모든 만물을 교회가 머리가 되셔서 모든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돼 있어요. 에베소 1장 끝에 봅시다.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은 교회가 곧 누구라 말이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모든 구석구석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한테는 이해가 안 될까요? 세상이 이렇게 있는데 이 중에 교회 따로 있고 세상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이 이해가 안 되죠. ‘아! 세상사람 중에 지옥에 가는 사람 따로 있고 교회 가는 사람만 모아서 그리스도 몸이구나.‘ 그런데 이러면 충만한 게 아니죠. 충만의 일부죠. 어떻게 이게 충만이 되겠어요. 이게 넘친다 하는데 충만이 안 되죠. 그걸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걸 설명을 해야 본문이 이해가 돼요.
여러분, 냄비에다 라면 끓이기 위해서 물을 넣고 라면을 끓였습니다. 라면 면 따로 있고 물 따로 있죠. 요새 정신없는 사람이 다른 일 하다가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가보니까 가스불이 훨훨 타는데 냄비가 시커멓게 돼 버렸어요. 뭐가 없습니까? 물이 없죠. 그러면 냄비 안은 면의, 면의 충만이 되겠죠. 누가 다 소비했어요? 면이 뭘 소비했습니까? 면이 있기 위해서 주변의 물을 핥아서 다 소비하죠. 마치 엘리야가 제단에 물을 부었는데 불이 오니까 물이 어디로 갔습니까? 성경 보면 뭐로 돼 있어요? 불이 뭐를 핥았다? 불이 물을 핥아서 그 온천지가 무슨 바다가 되었다? 불바다가 되었죠. 물이 없어요. 이게 불의 충만이죠. 남는 게 없다 이렇게 되죠.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것은 인간을 주체로 여기고 자기가 어떻게 교회 될까 어떻게 예수 믿을까 하는 모든 관계를 에베소서 1장 4절부터 전부 그 근원을 끊어버리죠. 그러면 에베소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부터 출발하면 되죠. 예수 그리스도부터 출발하게 되면 예수님의 출발을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통일이죠.
냄비에 물이 있었는데 나중에 끓어서 면만 남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처음에 물과 면, 이렇게 출발하잖아요. 이렇게 하지 말자는 거예요. 처음에 물+면=면, 이라 하자 말이죠.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물 따로 있고 면 따로 있잖아요. 이건 우리 생각이고 그래서 나중에는 물이 없고 면만 남았다는 것은 에베소서 1장 24절인데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처음부터 물과 면을 처음부터 이걸 면으로 보자 말이죠. 그럼 여기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마귀도 포함돼 있고 당나귀, 코스모스, 해, 달, 다 처음부터 포함돼 있죠. 처음부터 포함돼 있는데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죠. 그런데 이게 육으로 안 드러날 때는 아까 카메라 안의 부속 저희끼리 ‘내가 중요하다. 발이 중요하지. 눈이 중요하지, 아니 손이 중요하지,’ 싸우는 거예요.
그렇게 싸우다가 십자가 지면서 전부 다 뭐가 돼요? 전부 다 저주 받았죠. 몽땅 저주 받고 난 뒤에 이게 중요합니다. 누가 무엇을 위하여 저주케 되었느냐가 이유가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죠.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이렇게 돼 있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저주받을 악마, 지옥 갈 사람까지 뭐가 돼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소모될 물이고 스프고 양파고 고추고 그런 양념 종류였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승천하고 난 뒤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전부 다 온 천지에 그리스도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 있다? 없다? 전부 다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나머지 그리스도의 몸에 해당되지 않은 예수 안에 있지 않은 나머지 악마, 지옥 갈 사람들은 뭐냐, 이건 여기에 해당이 안 돼요. 이야기 초점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우리’ ‘우리’거든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거든요. 그러면 저쪽이 지옥 가든 뭘 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면 그건 얼마든지 만물 안에 그리스도로 만물 안에 충만케 된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좋은 예로 여러분 다 앉아 있잖아요. 지금 바깥의 사람들이 목소리 들으면 누구 목소리만 들립니까? 지금 제 목소리만 들리잖아요. 뭐라 하느냐, ‘내 목소리로 충만하다.’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만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 열어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거든요. 조용히 앉아있는 것은 치지 말자 이 말입니다.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초점이 있는 이상은 내 목소리만 크면 이 강의는 유지되고 있다고 치자 이 말입니다. 만약에 시끄럽게 하면 강의 자체가 안 되니까.
그러면 이 에베소서 1장 말씀은 어떤 인식을 줍니까? 악마까지 계산하는 우리의 버릇, 같은 동료들, 같은 엄마, 아빠, 지옥 갈 사람들, 그들까지 고려하는 그런 인식으로 출발하자? 하지말자?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주되심에서 누가 구원받은 저희들끼리 이미 미완료가 아니고 그 자체로 충만한 완료적인 완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라 말이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세상 사람들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1장은 우리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우리의 인식을 또 다시 한 번 주의를 요하는 말씀이죠. 니가 세상 보는 관점에서 너무 해답을 주체로서 소유하려하는 그 오류를 또 다시 범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지옥 가는 사람은요.’ 우리끼리만 통하는 것 같으면 지옥 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들어와야 충만이지 그 사람들이 빼고 충만일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어떤 해답을 우리가 소지함으로써 모든 구원을 받은 것처럼 행세하려는 그 의도의 잘못을 지적하는 거죠.
그런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제 생각에는 너무너무 잘 돼요. 자 13절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주 안에 죽는 자가 복되죠? 그런데 자기는 구원받았는데 엄마는 구원 안 받으면 복된 인간입니까? 지는 천당 가 있는데 지 딸은 지옥 가 있으면 복되고 기쁩니까? 굉장히 마음이 섭섭하겠죠. 섭섭하다는 것은 성경 보는 인식 자체가 누가 주체란 말입니까? 내가 이미 주체로 돼 있어서 그것을 뭔가 성경을 통해서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꿔진 채 해답을 주체가 지식으로 확보할 경우에는 천국 가도 편치가 못하죠. ‘아이쿠, 내 새끼야, 내 새끼 지옥 가는 걸 못 보겠네.’
그러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복수 이런 것이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구원 받아서 부자 보고 ‘얼레리 꼴레리,’ 부자를 놀릴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왜냐 하면 천국의 자리는 잃어버린 양으로서 갔기 때문에 읽어버린 양이 마치 맏아들 자리에 올라가면 안 돼요. ‘형님, 형님 오늘 가출 안 했으니까 구원 못 받았지,’ 라고 잃어버린 양이 형님을 놀리면 안 돼요. 죄인은 부끄러워야 돼요. 그것이 바로 야곱이 에서를 만날 때 7번 절하고 부를 때 명칭이 뭐라 했습니까? ‘주’라고 한 거예요.
우리들의 인식 가지고 성경 해석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주체 의식을 가지고 성경 보면 안 돼요. 그러면 자기는 구원을 소유한 게 된다고요. ‘얼레리 꼴레리,’ 이러면 잃어버린 모습이 아니죠. 잃어버릴 뻔한 양이죠. 잃어버릴 뻔한 놈은 지옥 갑니다. 잃어버려야 되죠. 잃어버릴 뻔 했는데 주께서 구원해줬지, 이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주님 찾아오면 특징이 뭐냐 ‘낙담’ 이거뿐입니다. 완전히 낙담케 해야 돼요. ‘나 이제 조졌다. 천국이고 지옥이고 나 지옥갈래.’ 낙담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내 주체 중심이 아니라 찾아오신 예수님이 누구냐,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십니까’ 그런 질문으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 하죠.
그럴 때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 우리가 고소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 큰 성 바벨론은 사실은 우리를 그동안 즐겁게 했고 나로 하여금 인간답게 만들어줬고 나를 사람 사는 것 같게 만들어준 그 환경이 큰 성 바벨론이죠.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는 말은 누가 무너져야 마땅하다? 그걸 좋아했고 그걸 원했고 그걸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내가 같이 무너지는 것, 그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할 때 ’주여, 무너질 것은 제가 마땅히 무너져야 됩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성도의 인내고 성도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도는 우리의 작품이 아니고 성도는 본인의 작품이 아니라 간음한 여인이 지가 알아서 용서받은 게 아니고 주님의 정답으로서 십자가 죽는 이유를 보여주는 정답으로서 간음한 여인은 용서받아야 돼요. 지가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해준 것이 아니고 용서받아야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인데 잃어버린 양이 항상 용서받아야 주님이 자신의 일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의 몸은 온 만물의 충만함이 우리 안에 축약되어서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바깥의 세계가 우리 안의 세계보다 좁아요. 왜, 우리 안에는 만물이 충만 돼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충만 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 풍선을 봅시다. 개업할 때 춤추는 키다리 아저씨 봤죠? 머리, 팔 기다란 풍선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는 그런 키다리 아저씨. 이 풍선 팔 지점(A지점)과 다른 팔(C지점) 지점에 있는 사람이 지 자랑 할 수 있습니까? 바람이 어디서 옵니까? 바람이 밑에서 공급하기 때문에 지들끼리는 안 되죠? 이게 바로 충만, 만물이 이 안에 들어있다니까요. 주님이 생각하는 만물이 이 만물 이예요. 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지옥 가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만물에 해당되지 않아요. 교회가 만물의 충만 이예요. ‘이 풍선 밖에 있는 지옥 가는 사람들, 악마, 이 모든 걸 전체를 합해서 이 종합적이 만물이 되지 않습니까?’라는 것은 주체적인 사고방식이고 주님의 주되심은 주님 있으면 그걸로 충만한 거예요. 주님의 주되심 안에 모든 만물이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만물로 인하여 풍선 바깥의 모든 것들은 지옥에 갈 지옥이라면 이 새로운 나라(풍선 안) 천국의 충만함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득하게 하나님이 영광이 주님의 영광이 그득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저주받으시고 진노 받으시는 어떤 아저씨, 33살 먹은 아저씨로서 하나님이 등장했습니다. 끝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33살 먹은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그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도 평범한 이름이죠. 박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내가 그것도 2천년 후에 그것도 거리도 수만리 떨어진 내가 그 십자가 아저씨를 ‘나의 구세주요. 주여.’라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옆집 아저씨한테 ‘주여, 하는데 왜 믿으려 합니까?
이것은 어떤 경우에만 ‘주’가 되느냐 하면 그분이 심판주요. 나는 그분에 비해서 살고자 함이요. 그분은 죽으려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새로운 그분의 입장에서 그분이 죽었다는 입장에서 새롭게 아프리카나 나이지리아나 육상대회, 이 모든 것, 카다피가 쫓기는 것들, 새댁이 갓난 애 보고 웃고 울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죽음으로 전부 다 물 흐르듯이 보는 거예요. 보게 되면 주체는 누구밖에 없다? 볼록 봉우리 올라온 주체는 예수님밖에 없고 나머지는 주체인 척 하다가 저주받아야 될 율법의 폭격기에서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만 있다는 이러한 의식, 그런데 여기에 주체가 등장하는 그 뿌리에 우리를 하나의 모종의 흙으로서 새로운 실체로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택했다는 것은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니고 택한 자가 우리에 해당되는 거예요. 말도 참 어렵게 해요. 주께서 택한 자를 가지고 우리라 하는 거예요. 그거 보고 ‘나도 택함 받고 싶다’라고 나오면 안 되죠.
예수 그리스도만 주체가 되고 거기에서 우리는 전부 다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죠. 요나처럼 박 넝쿨의 그늘도 나중에 감사해야 되죠. 손톱이 뾰족한 것도 감사해야 되고 모든 구석구석이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충만한데,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작품이고 내가 어디가도 주님의 정답이 되고 하나의 이름을 한번 쓰세요. 이 탕자,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면 나의 모든 행동은 잃어버려도 마땅한 행동들을 평생 동안 같이 더불어 합시다. 잃어버려도 마땅한 돌아서면 사후적으로 ‘역시 나는 훌륭해, 나는 구원 받을 만 해.’ 만날 자기변명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우리는 항상 회상 적으로 자기 주체를 추구하는 이 잃어버린 습성을 평생 동안 탕자가 돼서 주님 앞에 부름 받으며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무너져가는 이 바벨론과 함께 더불어서 양생되고 그것이 도리어 드러나고 노출된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상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지금도 벌어지고 이루어지고 있는 일인 줄을 우리가 믿어지니, 주여, 그 예수님의 사랑을 항상 증거 하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