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15강-찬양속의 주님 1105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26. 19:03

2011-05-20 10:46:28 조회 : 3072         
찬양 속의 주님 110519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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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10519요한계시록11장-(찬양 속의 주님)-15강a-(이 근호 목사)
제 15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11장 14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바로 셋째 화는 남아 있다고 했는데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라고 돼 있죠? 이렇게 일곱 개의 껍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껍질을 하나, 하나씩 벗길 때마다 속에 있는 내막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알맹이가 있는데 일곱 개 겹으로 뒤집어 씌어져 있다 말이죠. 그래서 이걸 하나씩 뗄 때마다 알맹이가 갖고 있던 원래의 내용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째 나팔을 분다는 것은 안쪽에 있는 알맹이가 바꿔지는 건 아니에요. 원래 있던 것이 일곱째 나팔을 계기로 해서 이게 표면화되고 바깥으로 구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째 나팔을 불기 전에도 이미 여기는 완료돼 있고 완성돼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질문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완성돼 있고 완료되었다면, 그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뭐냐, 증거를 대라,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이렇게 세상에서 어렵게 사는데, 뭘 자꾸 다 ‘완성되었다,’ ‘다 이루었다,’ ‘그런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보통 생각을 하겠죠. 우리 입장에서.

그런데 오늘 본문에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요 안에 일곱 나팔 보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

그렇다면 여기 ‘완료되었다. 완성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살기 편해서 완료되고 완성된 것하고는 관계가 없고요. 여기 언약궤가 원래 목적하던 것, 원래 목적했던 바가 다 이루어진 거예요. 만약에 우리 애가 시집을 안 갔다. 그러면 우리 소원은 빨리 내 딸이 20대 후반인데 시집갔으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잖아요.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내 딸이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해 달라.‘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성경을 펼치니까 ’다 이루었다.‘ 돼 있거든요. ’어~ 내 딸은 시집도 안 갔는데 다 이루었다는데, 뭘 두고 다 이루었다 하는가?‘

바로 일곱째 나팔을 불게 되면 여기서 화, 재앙, 징벌, 이런 게 주어지죠. 일곱째 나팔을 뜯어낸다는 것은 안쪽에 있는 내용물을 바깥으로 공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공개할 때 특징이 뭐냐 하면, ‘화’와 ‘재앙’으로 공개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렵죠?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내 딸이 아직 시집 안 가서 시집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이뤄져야 만족하고 다 이루어졌다고 치고 싶은데 하나님의 숨어있는 언약궤가 이걸 다 이루심이 바깥으로 나팔을 통해서 어떤 계기로 공개가 돼 버리면, 그건 내 딸 시집 문제가 아니고 화가 주어지고 재앙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다 이루었다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평소에 남편의 성질이 더럽고 불뚝 성질이고 조그만 일에도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 그런 아저씨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미국에 살던 손자가 그 사정도 모르고 할아버지하고 같이 술을 같이 먹게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죠. ‘저 할아버지가 언제쯤 성질이 나올까, 언제쯤 성질을 부릴까,’ 하고 있는데 그런데 미국의 손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할아버지 사람 참 좋은데, 이러면 최고지 뭐, 어때,’ ‘아니야, 아니야, 일이 있을 텐데,’ ‘할아버지, 우리 말 틀까요?’ 이런 식으로 상대방도 모르고 좋게, 좋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할아버지 성격을 건드렸는지 드디어 ‘이놈~’ 하고 술 먹은 지 두 시간 반 만에 터져 나온 거예요. 그게 일곱 나팔 이예요.

본색이 점잖은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에, ‘살만하다, 세상 아직 하나님, 예수님 안 믿어도 괜찮네,’ 라고 할 때는 아직까지 일곱 나팔이 아직 적용받지 않은 거예요. 그럼 일곱 나팔을 떼게 되면 이것이 ‘이놈!’ 하고 성질이 화로 재앙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게 본래 성격 이예요. 다 이루심의 본래 성격입니다.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부분에 서서히 들어갑니다.) 미리 말씀 드릴게요. 결론이 어려워서 미리 말씀 드리면,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이방 민족은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하고 저주 받게 돼 있습니다. 언약이 그러니까, 언약이 이루었다는 것은, 언약 안의 내용만 이루어지면 다 이룬 거예요. 우리 딸 시집가는 것은 언약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 담고 있는 그것만 이루어지면 우리가 죽던 말든 상관없이 지진이 일어나든, 집에 화재가 일어나든 상관없이 그건 무조건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하고는 엄청나게 본래의 성경의 의도하고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방민족은 일체 구원이 없다. 오직 언약된 사람만 구원이 주어지는 痼?언약이다.’라고 할 때,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주는 심판주다.’ 여기서 주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심판 주죠. 둘로 나눠지죠. 하나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과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 짓는 그 심판 주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드디어 구원 할 자만 건져내고 구원 절대 시켜주지 않을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이 돌아가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은 드디어 완전한 수준에서 그대로 적용시켜나가고 그대로 실시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면, 이 언약궤의 다 이루었다는 것이 찢어지는데, 세상의 모든 현실이 찢어지면서 거기에 일곱 나팔이 오게 되면 세상적인 가상적인 사고방식이 다 찢어지면서 언약궤를 바라보게 하는데, 19절 다시 보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성전 안에 뭐가 보인다 했습니까? 언약궤가 보이죠.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언약궤가 보여야 된다니까요.

남편이 국정원 직원이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 007에서 처럼 보안 국가 기밀을 수행하고 있는 이거는 진짜 아내한테도 자기 직업을 밝힐 수 없는 그러한 남편의 직업이 007, 국가 정보 비밀요원이라 합시다. 그런데 아내가 ‘이상하다, 남편이 출판사 다닌다는데 출판사하고 관계없는 것 같고, 아휴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자다 가만히 보니까 국정원 빼찌(배지 :표준 말)라. 이게 뭐냐, 본 거예요. 뭘 봤어요? 남편의 실체를 본 거예요. 국정원, 005정도. 그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남편을 아는 아내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부터 쭉 내려 보면 이거 하나에 종결 자예요. 이게 터미레이터, 이게 마지막 대목 이예요. 언약궤가 보인다면 너는 언약궤의 완성에 의해서 구원됐느니라.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종착점입니다. 도대체 나는 왜 구원 돼야 됩니까? ‘니 앞에 뭐가 보이지?’  ‘언약궤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약속이죠. ‘그 약속대로 넌 구원을 받은 거야.’ 라는 그것에 접촉되면 게임 끝난 거예요.

그것을 바로 일곱 나팔이라는 이 재앙, 세상의 징벌에 대한 재앙, 세상에 대한 재앙이 일어나게 되면, 그 재앙이 만약에 미사일이라면 미사일을 쏘는 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소망, 포부, 기대감, 우리 마음에 ‘이거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이것은 내 목숨보다도 귀한 겁니다.’라고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을 찢어놔 버려요. 전부 다 부숴놔 버려요. 언약궤에서 쏴버리죠.

그러면 우리가 저걸 믿고 이걸 믿고 믿는 것마다 폭탄이 나와서 부서지면 그것이 바로 다 이뤘기 때문에 우리에게 ‘쓸데없는 것 의지 말고 쓸데없는 것 믿지 마라, 너는 그런 걸 믿어야 될 입장이 아니야, 너는 다른 자격자야, 언약궤를 바라볼 그런 존재지, 니가 그동안 노동해서 얻은 그걸 계속 쥐고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인생은 ’다 이루었다‘에 해당되는 일곱 재앙의 혹독한 징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성경이 원래 그렇게 돼 있어요. 이야기 들어보면 굉장히 간단하죠.

이 언약궤에 다 이룰 때 ‘예수님은 심판주시다.’ 예수님은 심판 주라는 이 사실, 무슨 기준에 의해서? 언약 기준에 의해서. 언약 기준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행함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나이 80이 넘어도 가입할 수 있는 보험, 이 순재, 일체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고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이름이 개입되느냐 안 되느냐, 가담할 수 있느냐, 일체 가담을 못합니다. 가담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소곤소곤, ‘소곤소곤, 두 분이 이야기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애들은 가라, 어이 가, 어이 가 있어.‘ 그걸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우리의 원수,‘ 우리를 지옥 갈 수밖에 없게 만든 우리의 원수를 깨부수고 그 원수 안에 있는 자기 사람을 데려오는 그 모든 비밀 작업을 예수님 혼자서 다 해냅니다. 다 해내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게 되면 그 이룸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러한 언약의 방식이 되려면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 이 중요한 이 배경 이 바닥을 사람들은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에 신자가 거의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아까 언급을 했습니다만 한국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에게는 구원이 없게 돼 있어요. 왜? 언약의 결론이니까. 이 사실을 한국 사람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 빼놓고, 유대인들 빼놓고는 이걸 받아들일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안 됩니다. 구원 안 돼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을 자라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지도 않았습니다. 추방이라는 것은 ‘나가 있어.’ 이 뜻이거든요. ‘저리 가.’ 라 하고 딱 문 닫아 버리고 생명나무 과실을 닫아 버렸죠.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는 걸 가지고 두자로 뭐라 이야기하느냐 하면 ‘죽음’이라 해요. 죽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면접한다면 딴 것은 묻지를 않아요. ‘생명나무 과실 있나?’ ‘생명나무 과실 먹었어?’ 이것만 묻죠. ‘부모 효도했어?’ ‘이웃 사랑했어?’ 그거 안 묻습니다. ‘생명나무 과실 있어?’ 그걸 묻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과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없어서 텅텅 비어 있겠네요. 그러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거기 대한 해답이 구약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이 있다. 그 이야기 들으면 화가 나서 ‘이스라엘은 인간이고 우리는 인간 아닙니까?’ 이래 나오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어요. 우리 이방민족, 한국 사람이라든지 한민족 핀리핀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 하지 않습니까? BC2333년 고조선 세워서 현손이 BC108년 정도에 내부 분열로 망합니다. 망하고 난 뒤에 우리나라 지도에 보면 부여,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이런 식으로 돼 있었단 말이죠. 이게 청동기 시대예요. 그 전시대는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BC10세기 정도부터 12세기 정도고 철기 시대는 5세기 정도부터고,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신석기 구석기 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너무나 잘 배웠기 때문에 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부족 국가라든지 국가가 청동기시대부터 이러한 마을이 생기고 철기시대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혈육에 의해서 혈통에 의해서, 쉽게 말해서 가족에 의해서, 아버지가 아들 낳고, 아들이 어른 돼서 아이를 낳고, 씨족과 씨족에 의해서 맺어진 그러한 민족과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족과 피는 아담의 죄가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아담의 피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절대로 따먹을 수 없는 자격자야, 생명나무는 따먹을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거야,‘ 그 대대로 아담에게 주어진 그 제한이 그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겁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야, 5대손, 10대손, 너도 마찬가지야,‘ 너의 조상에게 생명나무 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고 그 죽은 자식에게서 태어난 자식도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은 이상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해서 죽은 것이다. 그 증거 대라면 증거 댈게요. ’봐라. 니 죽잖아. 늙어 죽잖아.‘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계속 자식을 낳아도 계속 죽잖아요. 계속 자식을 낳아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본인도 죽고 자식은 계속 죽고 그 자식은 또 죽고, 그래서 사람에게는 안 죽는 자식이 필요한 거예요. 그 안 죽는 자식을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 했으니까. 그래서 거꾸로 보는 거예요. 거꾸로! 아담으로부터는 다 죽었다가 되니까, 아담 속에 섞여 내려오는 안 죽는 자손은 다윗의 자손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소급해서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족보입니다.

어떤 인간도 20대든, 30대든 죽으면 죽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말하지만 죽는 것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잖아요. 약을 먹고 죽든지 미리 당겨서 죽으면 그만이지만, 기분 나쁘거나 분하면 니 죽고 나죽자 하고 미리 당겨서 죽으면 그만이고 별 의미 없는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으리라‘ 해서 이것이 피조물의 죽음마저도 주께서는 이것마저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원래 돼지 죽으면 하さ?버릴 게 없다고 하잖아요. 돼지인지 소인지 모르지만, 다 쓸모 있다고 해요. 소 혓바닥까지 다 쓸모 있답니다. 사람은 태어났으면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다 쓰여 집니다. 죄도 필요하고 죽음도 필요하고, 문제는 인간이 안 죽는다는 데에 있어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이거. 차라리 죽어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슬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사람은 이슬처럼 사라진다, 먼지로 사라진다는 이론을 내세운 종교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불교 아닙니까. 불교, 인간은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 5가지 재료로 돼 있어요. 훅 불어보면 흩어지니까 죽음의 대상자체가 날아가니까 ‘죽음을 두려워 마세요.’ 이게 해탈 경지예요. 여러분들 해탈 다 됐어요.ㅎ

그런데 세상에, 그 흩어졌던 것이 다시 구성돼서 주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줄이야, 상상이야 했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을 만드신 분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아요. 낭비되는 것이 없고 그 만들은 인간이 지옥가고 또는 마지막에 저주를 받을 때, 그렇게 심판할 수 있는 권리는 처음 만드신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끝까지 활용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보잖아요. 우리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텍사스 전기톱 가지?산산조각을 내더라도 흩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한번 태어났으면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인간의 아이디어라면 이러한 계시가 없다고 한다면 이방민족이라면 불교정도가 되겠죠. 그러면 유대인 빼고 다 불교냐? 천만의 말씀, 이러한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너무 흥행해서 그래도 인간의 가치를 누릴 대로 누려보자는 종교가 이슬람교예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하는데 이슬람 종교의 특징은 신이 있어요. 신의 절대주권 이예요. 신이 뭘  원 하느냐 절대적으로 원하는 게 있어요. AD 6세기경에 모하메드라는 사람에게 보름달 뜨는 날에 그날에 계시 받았어요. 그날에 계시 받은 것과 뒤에 여러 가지 자기 경험을 모아서 해석붙인 것이 코란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슬람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보상, 다른 말로 하면 보너스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그 종교의 모든 예배와 모든 의식은 재앙을 제거하는 방식의 의식이 된다 말이죠. 재앙이 이쪽 어깨에서 이쪽 어깨로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렇게 고개를 좌에서 우로, 드디어 네 죄는 여기서 사라졌다. 그리고 장례식 할 때도 마지막으로 여자들은 참석 못하고 남자들은 ‘혹시 여기 죽은 사람에게 원한이나 감정이나 돈을 떼먹어서 기분 나쁜 것 있으면 이 자리에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십니까?’ ‘용서하십니까?’ ‘용서하십니까?’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여기 죽은 자가 신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소위 탄원서가 효력이 있다는 거예요. 재판할 때 가족들이 ’판사님, 좀 봐 주소.‘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걸 우리가 용서했기 때문에 ‘나 그 사람한테 감정 없습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어, 그래? 봐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니보고 감정 없대. 니가 죄진 것 많다마는 사람들이 감정 없다는데 나 니 용서 할게.’ 라고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을 때는 그 사람하고 모든 감정을 다 풀어주면 그 사람이 좋은 나라에서 혜택을 입을 수 있는 효력을 준다는 겁니다. 얼마나 세상 적입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 없어요. 평소에 우리가 가정생활 하고 살아왔던 것, 그대로 그게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슬람을 믿는 나라에서는 이슬람교 인이 몇 퍼센트인가 하면 99퍼센트가 이슬람 종교고 이란 같은 곳은 90퍼센트고, 왜 이렇게 퍼센트가 많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령 받을 필요가 없어요. 뭐냐 하면 육적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식대로 하나님이 별겁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본인의 이성과 양심이 신의 계시라 말이죠. 자기가 선하게 행동하면 그게 신의 계시고 악하면 악하다고 반성하면 그게 신의 계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벌은 지가 알아서 내가 나쁜 짓 많이 했다 싶으면 죽기 전에 50일 남겨놓고 바짝 그때부터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계시가 필요해요? 코란이라는 게 뭐냐 하면 정성이 지극하면 신도 감동한다는 그 이야깁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를 드릴 때 ‘예배드리는 시간 ’을 ‘아잔’이라 하는데 이렇게 기준이 있어요. ‘알라는 위대하다, 다른 신?섬기지 말라. 나는 예배를 원하다,’ 이런 게 있어요. 구약시대처럼 그 앞에서 궁둥이 쳐들고 전부 다 엎드려서 궁둥이를 바짝 들어야 돼요. 일하다가도 이렇게 5번 하다 보면, 이러한 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은 참 불편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번 해 보세요. 그것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행함이 얼마나 편합니까? 믿으라 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요. 차라리 믿으려 하지 말고 5번씩 궁둥이 쳐들고 엎드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참 쉽죠?~ 이게 훨씬 편한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징크스 이런 게 있어서 시험 치러 갈 때 학생들이 ‘난 전봇대를 그냥 지나가지 말고 다섯 번 터치하면 오늘 시험 잘 되겠다.’ 하면 일부러 가서 전봇대에 1번, 2번, ..다섯 번, 이게 더 쉬워요. 한번 씩 규칙을 세우고 규칙대로 행했을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다 이루었다’는 어떤 포만감, 안도감, 그게 있다 말이죠. 그걸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에게 그게 있다는 걸 알고 경상도 남자처럼 일체 무뚝뚝하게 안 봅니다. ‘니가 궁둥이를 쳐들고 하던 안 들고 하든, 전봇대를 몇 번 치든 간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구원을 하는데 문제는 언약을 받을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가운데 내가 너희 민족을 새롭게 만들어요. 만드는데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의 언약과 야곱의 언약에 기준해서 없는 나라를 새롭게 만듭니다. 청동기, 구석기 아무 상관없어요. 없는 나라를 새로 만들어요. 이걸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몰라요. 있는 사람 꼬시려고( 꼬이려고: 표준말) 償? 없는 사람 새로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히 하지를 못합니다. 만약 없는 사람 만들어서 교인 채우려고 하면 어느 교인도 한명도 안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 교회 건물만 번듯하고 교인 한 사람도 없어 텅텅 비어 장사 안 되어 문 닫아야 되죠. 그래서 장사 안 되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준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있는 사람에다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이런 알라신의 이슬람교의 그 규칙, 행위, 그건 사람들이 같은 육이니까 알아듣잖아요.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행함을 잔뜩 부여해서 ‘목사님 숙제 다 했어요.’라는 사람만 불러 모아서 교회라는 걸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숙제 두 가지가 있어요. 십일조와 주일 성수,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반드시 해 와야 돼요. 숙제 안 하면 승진 안 돼요. 집사로.

지난주일 아침에 어느 낯선 50대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이상하다. 여기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새로운 교인이 온다는 것은 이상한데,’ 저는 설교 하다가 발견했어요. 우리 교회에 누가 먼저 이야기 걸 사람도 없었고요. 오면 오고 가면 갈 사람이고, 도대체 저 분이 누구지? 궁금했었어요. 그런데 설교 시간에 잘 듣는 것 같은데 약간은 조는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잘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제 아내가 졸더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이야기 해본 사람 있습니까? 했더니 이 윤자 권사님이 이야기를 해봤다는 거예요.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고 친척 방문 하러 왔다가 아차, 주일 성수 지키기 위해서 우리 교회 왔다가 주일성수 안하고 주무시다 가신 거예요.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복음 들으려고 온 사람인줄 알고 초반부터 조지기 시작했죠. 교회 나온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라고 시작해서..ㅎ법 있는 구원은 없습니다. 법이 없는 구원밖에 없습니다. 법이 들어간 구원은 인간에게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지...그래서 축도하기 전에 벌써 나가버렸어요. 많이 힘들었겠다. 생각이 드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 나 이거 해냈다.’ 하잖아요. 할 수 있는 것을 주께서는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 놓고, ‘니 그거 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니 귤 깔 수 있어?’ ‘귤 많이 까 봐서 잘 깔 수 있습니다. 한번 까볼까요?’ ‘고게 바로 죄야, 바로 그 행함 때문에 니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 거야.’ 사람들은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여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행동은 생명나무 못 따먹는 이유들로 연결된 거예요. 여기에는 귤 까는 거, 오줌 누는 거, 전부 다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생명나무 못 따먹는 이유들로 차곡차곡 누적이 된다니까요. 그러니 이거는 ‘잘못하면 생명나무 못 먹어,’ 이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한 거야.’ 계속해서 소급해서 뭘 해도 울면 운다고 니는 죽은 놈이라 하고 웃지도 못하고 웃어라 해서 웃으면 지옥 갈 거야, 울까요? 울면 지옥 가는 거야,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니는 원래 쫓겨나게 돼 있어.‘

사람이 구원을 받겠다. 천국을 가겠다. 이 자체가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죄목에 이런 게 있어요. 천국에는 원래 하나님이 사시는 데지 인간은 어디 그걸 넘봐, 인간이 넘볼 걸 넘봐야지, 왜 넘봅니까? 인간은 이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살다가 자기 조상 잘못 만나, 조상이나 우리나 같은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 마귀 영광을 더 좋아하면서 살다가 죽어서는 하나 버릴 것 없이 지옥 가서는 영원히 ‘주님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나님 조치가 합당하구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잘 쫓겨냈어. 맞아 난 쫓겨난 것이 당연해,’ 그걸 영원토록 외치면서 그렇게 해야 될 인간 이예요. 거기서 조금도 딴 생각을 먹지 마세요. 그뿐입니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 이슬람이나 불교가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만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그들 종교의 사람 꼬이는 핵심은 뭐냐 하면, 경험담 이예요. 체험담,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용들, 경험이 안 된 내용을 안 하는 게 아니고 할 수만 있으면 열심히만 하면, 용을 쓰고 기도하게 되면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 그들의 종교교리로 제한이 됩니다. ‘날 따라해 봐라 요렇게. 그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게 이쪽 불교나 이슬람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똑같지만, 복음은 뭐냐 하면 육으로서는 할 수 없느니라. 오늘 강의에서 그 내막을 언약까지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까지  본론 안 들어갔어요. 절대로 인간은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할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하여 주일 성수, 십일조를 왜 외칩니까? 사기꾼이죠. 십일조 하고 지옥 가나 안 하고 지옥 가나 마찬가지예요. 주일성수하고 지옥 가나 안 하고 지옥 가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누구나 지옥 갑니다. 왜 이런 확실한 말을 안 하는 겁니까? 성경에 보면 나오는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요한복음 3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이 이야기를 안 하느냐 말이죠. 돈이 안 되니까 그러죠. 다시 말해서 이슬람처럼 불교처럼 사람 꼬일 수 있는 그 미끼의 연결점이 접촉점이 스스로 이쪽에서 못 끄집어내니까. 이런 소리 해 보세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교인들이 ‘ 목사님, 당신 잘났어요. 나 성령 못 받았어요. 내일부터 교회 나오나 봐.’ 이렇게 세게 나오면 어이합니까?ㅎ 세게 나오나 안 세게 나오나 관계없이 지금 하나님 뜻은 그렇다 이 말이죠. 그들이 삐져서 안 나오나 오던 안 나오던 간에 하나님 뜻이 그래요.

정 답답하면 내 논 돈 가지고 벽돌 뜯어내서 자기 집에 가져가서 개집 짓든가 알아서 하라 말이죠. 예배당 질 때 벽돌에 자기 이름 새긴 것 빼서 가져가란 말이죠. 피아노 낸 사람은 피아노 들고 가든지 꽃꽂이 한 사람은 꽃을 거둬가고 강대상 뒤에 커튼 한 사람은 커튼 뜯어가든지 하라 말이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구원은 언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구원은 새 언약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비밀로 감춰져 있어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안에 곱게 감춰져 있어요. 이게 미완료, 미완성이 아닙니다. 싹을 키우는 게 아니에요. 이미 가득 찼어요. 완성돼 있어요. 마치 북한에 있는 핵폭탄처럼 어디 묻혀있는지 모르지만 있어요. 언젠가 성질나면 끄집어내서 개발한 미사일에다 쏘면 일본을 치든지 미국을 치든지 한국을 치든지 칠겁니다. 이미 김정일은 ‘다 이루었다.’예요. 그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연평도 폭격이고 이렇다 말이죠. 우리는 핵폭탄 있다 이 말이거든요. 금강산도 그것은 우리는 겁 낼 것 없다. 우리는 핵폭탄 있다 그 뜻이다 말이죠.

바깥으로 나올 때는 화, 재앙으로 나오는데 그 목표점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식대로 구원을 달성하고자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그것이 공격 표적이 됩니다. 왜 쓸데없는 짓들을 하십니까? 왜, 아이, 그냥 사시면 되는데, 꼭 거기다가 뭘 하느냐 하면, 의미를 붙이는 게 문제예요. ‘배고프다. 밥 먹었다.’ 거기서 그치면 되는데, ‘배고프다, 밥 먹었다. 하나님, 저 잘했죠?’ 인간은 잘한 게 없어요. 배고파서 밥 먹더라고 그것은 잘한 게 아니고 본능이고, 그건 개도 알아요. 개도 밥 먹을 때 발길로 차면 갼楮?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준 것은 ‘니는 바로 개’라는 겁니다. 개이면서도 그들은 언약 받았다고 ‘아이고, 주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우기니까 참 하나님 보시기에 가관 이예요. 가관, 물론 멸망시켜 버리지만 이스라엘, 이스라엘 멸망됐다하면 어떤 인간도 물론 이건 이스라엘은 대표인데 대표자가 멸망해버리면,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은 못하지만 한 민족은 잘 합니다.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인간도 아담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 되면 다 안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구원 받고자 나온다는 그 자체가 그게 죕니다. 이게 성령을 받아보면 알아요. ‘아하, 내 식으로 딴 사람은 지옥가도 난 구원 돼서 천당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나오는 자체가 너무나 일방적인 언약이 아니고 내 위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 위주로 왜곡되게 엉터리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성령 받아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걸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구원 될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구원은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이 되기 때문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 구원이 안 됐다고 믿으시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ㅎ 아니, 이 말이 이상한 말이 되네, 믿음으로 구원 받거든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선물로 오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뭐냐,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교회 20년 다니고, 십일조 꼬박꼬박 적금 붓듯이 했는데, 그것도 복리계산하면 엄청난데, 난 그런 걸로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왜? 나는 처음부터 구원 될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언약이 있는 민족도 망했는데, 하물며 언약이 없는 민족은 구원은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소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려워요. 그렇다면 우리 이방민족, 한국 사람에게 그게 왔다면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하는데, 성령이 왔다면 성령이 우리 구원하기 위한 성령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으며 일곱 나팔이 무엇이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우리 내 구원만 챙기면 되는 줄 아는데 우리 안의 성령을 뜯어보니까 전체가 다 들어 있어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어서 KTX여자 직원들이 구조조정 한다니까 데모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여자 동료들은 겁이 나서 ‘사장님 말 잘 들을게요.’ 하고 그냥 다니고 오빠나 이런 아버지 쪽에서 정의가 강렬한 이런 집안 출신의 여성들은 ‘그래, 다 싫으면 나 혼자 하겠다.’ 하면서 서너 명이 시위를 했다 말이죠. 그래서 그걸 보고 국민 여론이 들끓어서 ‘그래 구조조정 하지 마라.’(실제가 아니고 예를 든 거예요. 혼자 소설 쓴 겁니다.) 전부 복직해라.‘ 그렇게 됐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복직을 데모한 4사람만 복직을 해주면 될 텐데, 비겁하게 ’사장님 잘 봐주세요.‘ 한 사람들까지 다 혜택이 주어졌네, 이걸 시편에서는 이걸 ’우리‘라 해요. 그리고 그 죄악 때문에 이 세상의 자기 백성의 죄악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예요. 시편에서는 두 종류의 시가 나옵니다. 찬양 시에서 두 가지예요.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계시는데 왜냐하면 왜 찬양 가운데 계시느냐 하면 찬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래요. 사람이 찬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찬양할 수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성령을 주시게 되면 찬양이 나오는데, 이 찬양이 나올 때 주체가 ‘우리’가 나오고 ‘나’가 나오는데, 나를 통해서 우리가 나오게 돼 있어요. 아! 어렵죠? 요 말은 네모 했던 4사람, KTX인원이 250명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벌벌벌 떨면서 ‘아이, 우린 마귀님이 시키는 대로 잘 할게요.’ 그런데 ‘아니야,’ 하고 4사람, 시편에서는 한 사람이지만, 여기 ‘나’라고 하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죄악을 인하여 언약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죄에 대한 안타까운 징벌, 이 모든 것을 홀로 다 받아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22편에 나온 말이죠. 그 나의 희생 덕분에 거기 ’나‘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새로운 ’우리‘가 발생 돼요. 우리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 앞에 있는 데모했던 사람들의 그 가치와 공로를 찬양하는 사람들이예요. ’아이고, 언니 덕분에 우린 다시 일하게 됐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어떤 원인은, 데모든 시위든 어떤 노동조합이든 항상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한다는 것은 회사 사정에 대해서 넓게 아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남 들러리 하다가 경찰이 오면 도망가기 바빠요.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 윤 집사님도 마찬가지지만 거의 4분의 3은 놀았죠. 데모하느라. 책 쥐고 나와야 소용없어요. 벌써 결정돼 버렸는데. 교문에 다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학생회에서 나와서 데모하자 하거든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데모에 들어갑니다. 그러다 경찰이 오면 우리는 다 도망가 버리죠. 그런 쪽이 노.. 쪽인데..

우리라는 것은 ‘나’ 하나가 등장하지 않으면 거기서 우리라는 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시고,’ 우리라는 개념은 특수한 한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언약의 완성에 대한 혜택을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얻어 걸려서 ‘누구십니까? 어르신, 고생하신 분이’ 라고 새삼스럽게 찾아나가는 그러한 관계로 엮여진 사이, 그게 바로 구약 시편에 그렇게 돼 있어요.

이렇게 봅시다. 우리 인간은 절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천국이란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런데 언약 속에 하나님 앞에 또 한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주’가 되시는 분인데 ;주‘가 되신 분이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이 땅에서 작업을 해 놓으신 거예요. 그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맨,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의 특징이 그래요.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반드시 (    ) 언약이 붙어요. 아브라함, 노아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새 언약, 전부 다 언약이 붙죠.

이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것은 처음부터 완성 자는 따로 있고 그 실시하는 모든 과정에도 사람은 배제시키고 하나님, 자기가 나서서 하는 거예요. 7살 먹은 어린 애가 엄마 설거지 도와준다고 옆에 서서 하면 엄마가 보면 같잖죠. ‘공주님, 숙제나 하세요.’ ‘엄마, 내가 할게, 내가.’ 오히려 설거지 해놓으면 두 번 세 번 또 일을 만들어 놓죠. 옷 세탁한 거 다 버리고, ‘그만 손 터시고 TV에 뽀뽀뽀나 보세요.’ 이렇게 밀어내는 작업, 이 밀어내는 작업도 그냥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 우리 공주님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면 안 됩니다.’ 밀어내는 작업, 그걸 ‘신부’라 하고 그걸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겁니다.

그럼 밀어내는 작업을 할 때, 중간에 어떤 사건은 지들이 행하겠다고 나온 사건이 아이 성 사건이었어요.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여리고 성 무너지니까 지가 한 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할게, 우리가 할게.’ 하다가 개떡 됐습니다. 지가 무슨 수로 태양을 멈춥니까? 어떤 철딱서니 없는 아들은 아들도 별수 없죠.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언약궤 앞장 세워서 여리고성 무너지니까 지가 언약궤 들고 와서 ‘ 내가 언약궤 들고 승리할게.’ 하다가 언약궤만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은 죽고 그 집안의 가문은 완전히 작살난 가문이 됐죠.

언약궤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해요. 그래서 언약궤 위에는 다른 이름은 들어가면 안돼요. 언약궤 위에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실체가 사람에게서 나오면 안 됩니다. 이름은 있는데 그 형식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에게서 나오죠.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관련된 사람은 없단 말이냐? 이거 설명하고 아브라함, 이삭언약 해봅시다. 요거 먼저 할게요. 아까 노아 뒤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노아 언약이죠. 그럼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이 있죠. 자, 왜? 노아 언약으로 바로 구원하지 않고 뒤에 추가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이 있느냐는 이런 문제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일곱 나팔 벗기는 것처럼 더 세밀해지는 거예요.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었으면 다 같이 은혜로이 감사해야 될 텐데, 노아 언약을 받아놓고 노아 가정에서도, 구원 받은 가정에서도 함과 가나안, 야벳과 셈,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언약을 무지개 언약으로 해서 온 대자연 세계에서 선인이나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런 언약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딱 집어서 ‘니가 구원 받았어. 다른 사람은 구원이 안 돼.’ 이렇게 딱 집는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할례언약이라는 겁니다. 할례언약! 할례언약은 일종의 문신 같은 건데 뭔가 새겨놓는 거예요. 조폭 같은 경우에는 이쪽에는 호랑이, 이쪽에는 독수리, 등에는 용, 배에는 하면 된다. 이렇게 문신하잖아요. 왜 그걸 글씨로 안 쓰고 문신으로 만듭니까? 안 지워지라고. 그걸 ‘영원성’이라고 하는데 언약의 영원함.

할례언약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겠다는 거, 그러면 그 장소가 어디냐 하면, 남자의 생식기 끝에다 문신을 시켜버리면 ‘니 핏줄은 영원히 구원되리라.’ ‘왜요?’ ‘내가 찜했으니까.’ 그거예요. ‘내가!! 내가 찜했다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행함 없이 주께서 찜했으니까 믿은 거예요. 뭘 통해서? 증거를 대라 하면, 할례언약 이예요.

하나님께서 몸에 문신 새기듯이 ‘내가 아브라함 자손을 영원히 구원하리라.’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명도 없었죠. 이삭 나오기 전에 어떻습니까? 세상에 아브라함에게 니 자손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 나이가 늙어서 자기 부인도 태가 끝나 자궁 경부 암인가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기를 못 낳아요. 요새말로 자궁 들어낸 것과 똑같아요. 애기를 못 낳는 거예요. 그래 이게 뭡니까? 無子, 없을 無자 아닙니까? 자식이 없는 거예요. 없는 자식에다가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 ‘니 없는 자식을 영원히 구원 되리라.’이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그게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멜기세덱과 똑같은 거예요.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뭔가 없는 게 있어요. 뭐가 있겠습니까? 언약이 등장하니까 생긴 거예요.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을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있음으로써 십자가란 새 언약 때문에 십자가가 문신처럼 십자가 문신 달고 다니라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가졌노라.’ 라는 십자가 흔적.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위해서 이 땅에 등장해야 될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나 있고 십자가 있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라는 것은 없는 인간인데 ‘봐, 생겼잖아.’ 그 모든 능력이 구원의 능력, ‘오직 십자가 피 은혜로 살았잖아.‘라고 그걸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등장한 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하나님의 피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이슬람교고 불교입니다. 육으로 할 수 있는 행함 끌어 모아서 적당하게 해서 천국 간다고 치자는, 모태신앙. 무슨 모태신앙이 있습니까? 신앙은 없어요. 인간은 신앙 자체가 없다니까요. 진짜 믿음이 있을 것 같으면 주의 말씀대로 해야 돼요.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도 옮길 것이요. 저 관악산, 청계산 저 멀리 있잖아요. 실시하면, ’산아, 내 뒤로 가 줄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부릉 부릉 시동 걸어서 산이 벌떡 일어나서 내 뒤로 척 가는 거예요. ’아, 오늘도 재밌는 일 했네, 이번에는 뭘 할까? 주께서 나무가 뽑힌다 했으니까‘ ’니가 조그만 믿음만 있으면, 나무가 뽑힐 것이다.‘

토지공사에서 주택단지 개발할 때, 크레인, 포크레인 아무 소용없습니다. 저 믿는 사람, 소망교회에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이 줄서서 ‘하나, 둘,... 열 나무씩 맡으면 돼요. ’나무야 뽑혀라.‘하면 쑥 뽑히고 심겨라 하면 심겨서 깨끗하게 택지개발 되는 거예요. 믿음하면 그런 믿음 이야기지, ’믿으면 병이 물러갑니다.’ 그런 것 말고 더 화끈한 거. 얼마나 화끈합니까?

마귀가 이야기하죠. ‘당신이 만약에 뛰어내리고 천사가 당신 발을 붙들면 사람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줄 것이다. 화끈하게 한번 기적을 보여 달라.’ 그때 주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예상 못한 없는데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있는 것에 대한 기적이 아니고 이 땅에 없는 것을 없는 것에 대해서 기적을 내리라. 그래서 생겨버리면 그것이 주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자신이어야 돼요. 우리자신!!! 내가 나는 평범한 척, 나는 청순 함 이런 것은 되지, ‘내가 하늘나라 사람, 이거는 말 안됩니다. 비록 모태신앙이고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뭐가 되도 그건 교회 직분일 뿐이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이한례 (IP:203.♡.39.20) 11-05-24 12:41 
가락교회110519요한계시록11장-(찬양 속의 주님)-15강b-(이 근호 목사)
제 15강b

지난 시간에 언약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이 없는 사람을, 모든 인간은 지옥갈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의 자신의 공로에 근거해서 천국에서 같이 살 멤버들, 멤버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그 작업을 해왔다고 했죠. 그런데 그 작업을 할 때 반드시 붙는 게 있다고 했죠. 뒤에 ‘누구, 누구 언약,’ 이라고 붙였죠? 아까 했던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남성의 생식기에 문신같이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그 핏줄은 구원을 받는데, 문제는 백날 할례, 할례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사람이 없고 자식이 없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 저 이스마엘은 안 되겠습니까? 이스마엘을 어떻게,’ ‘이스마엘은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자식이 아닌데, 핏줄에 의해서 생긴 자식은 구원 받지 못한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생물학적 핏줄, 혈육이니까 혈 자를 빼면 육이죠. 인간의 핏줄과 혈육에서 나온 자식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텅텅 비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게 아니고 아브라함은 하나의 빈 그릇이 돼요. 빈 그릇!!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누구냐 하면, 언약을 주신 분이 오셔서 이걸 채웁니다. 인원수를, 숫자를 채워 나갑니다. 요 숫자 채우는 숫자를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같이 숫자를 채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게 야곱의 실력입니까? 아니면 이삭의 아브라함의 축복입니까?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걸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로 맹세를 하지만 우리 몸은 워낙 죄가 많고 이기주의고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 이건 내 자식입니다.’ 만날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도  만날 내 자식이라고 붙들고 있다가 얍복 강에서 깨지고 난 뒤에는 ‘아이고, 내 자식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자식이군요.’ 하고 자기로부터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손을 놓게 되죠. 고 손을 놓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은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식이 있고 내 몸이 이렇게 성하고 아픔 몸이나 건강한 몸이 있다는 것은 전부 다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해석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은 돌에 맞아 죽죠. 그런데 자기 몸이 돌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의 몸이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돌 던지는 사람을 만나게 해줘서 돌이 날아오고 자기는 그 자리에서 ’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돌 맞은 본인 스데반 집사도 용서를 해주죠.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성령 충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럼 성령 충만은 스데반 집사가 조작해 낸 겁니까? 열심히 기도하니까 성령 충만을 받은 거예요? 아니죠. 성령은 주님의 기도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돼 있어요. 우리기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사님,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 로마서 8장에 나오죠.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자기의 빌 내용을 누구한테 지시를 받느냐 하면, 우리 주님한테 지시를 받아요. 그것을 신학적으로 뭐냐 하면 성령은(신학적이 아니고 성경에 나와요. 고린도후서 3장) 그리스도의 영으로 돼 있어요. 성령인데 성경의 모든 내용은 모든 지시와 명령은 누구한테 받는다? 그리스도에게 받아서 움직이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성령은 자기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의 堧?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성령에다가, 이 예수님의 자리에다가 나의 영이라고 집어넣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나의 영혼, 내 영혼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지 영혼이 알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성령에 의해서 안다고 할 때, 그때 내 영혼이 내 영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의 영이 오게 되면 주님의 영하고 내 영하고 어떻게 됩니까? 충돌을 일으키죠. 그동안 내 영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내 영이 아니고 마귀 영이죠. 줄 창 나만 고집하고 뭐 하나도 ‘내 겁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전에 강의 했죠? 성경에 분명히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한번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뭐가 나와야 합니까?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둬 가시는 자도 하나님이요.’가 나와야 할 텐데, 거둬가는 하나님이 없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또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왜 뺏어갑니까? 내 건데’ㅎ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상 이예요. 평소에 우리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나쁜 영의 성격이 원래 그래요. 우리가 우리의 성격대로 우리가 성격을 고치겠습니다. 그거는 거짓말 이예요. 그것은 성사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해도 우리 성격을 못 고칩니다. 고친다 하는 그것이 또 자기 자랑이 되니까, ‘나 고쳤습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도 백화점에 옷 사러 나갔다가 아니야, 이건 너무 사치야, 꾹 참았으니까 절제의 영을 발휘해서 절제하니까 드디어 나는 옷을 안 사게 되었습니다.’ 옷 안 산 대신 돈 주세요.ㅎ 실컷 이야기 해놓고 ‘그러니까 돈 달란 말이야.’ 꼭 자식들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놓고 후에 뭐 달라 합니까? 심부름 값이 더 드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런데 부모들은 그게 이쁘다고 ‘그래 내 새끼야 줄게.’ 하며 주죠.ㅎ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러면서 주잖아요.

그리스도의 영이 왜 우리의 본성을 거부할 수밖에 없느냐, 그리스도께서 그냥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고 이 땅에서 뭘 졌습니까? 십자가를 졌거든요. 십자가가 왜 생겼습니까? 누구 때문에 생긴 거예요?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악한 악마 때문에 생긴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지신 그 자리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부활이라는 의미가 십자가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 영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게 돼 있어요.

영이 육을 책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자신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아는 것이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내 행위로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십일조 드릴가요? 말까요?‘ 또 십일조 이야기 나오고 또 주일성수 이야기 나오고, 그대신 ’찬양을 드릴까요? 말까요?‘ 또 찬양 이야기 나오고.

사람의 행함, 또는 인간의 육의 행함이라는 것은, 행함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행했다. 다른 말로 하면 실적 달성했다. ‘했다.’과거, 행함은 행했다. 그러면 만약에 십일조를 했다. 100만원 수입인데 10만원 십일조를 했다. 여기서 자기는 10만원을 했다가 되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십일조라는 것은 98000도 아니고 105000도 아니고 딱 10만원이 됐을 때 십일조가 된다는 것이고, 99900원을 하면 십일조가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한계만 목표로서 선을 그었다는 자체가 이게 뭐가 되냐 하면 이게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너가 이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한정 너를 용서하고 죄를 의로 바꾸겠다.‘라고 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을 받아놓고 우리가 십일조로 보답해 버리면 무한 된 사랑을 받아놓고 우리는 뭐로 갚습니까? 유한으로 우리는 갚아놓고 행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행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행했습니다. 쟤는 안했는데 저는 행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십일조라 하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십일조가 율법에 있잖아요. 말라기에도 율법이 나오고 출애굽기에도 십일조가 나오잖아요. 율법을 다 이룸은 어디서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를 이해하고 알아듣는 그것이 십일조, 이건 10만 원정도가 아니고 15만 원정도가 아니라 십일조 다한 겁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 십일조 안 했다고 비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 믿는 걸로 십일조 아니라 십의 구조 아니라 100퍼센트 다 드린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 됐는데, 100만원 중에서 십일조로 10만원 드리면 90만원은 누구 것이 되요? 여전히 90만원이 남아 있잖아요. 90퍼센트가. 그런데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인데, 그만큼 십일조 많이 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다줬는데. ‘마음대로 하이소. 주님 것이니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까지 살아 온 거, 키워주신 것도 은혠데, 앞으로도 주의 처분대로 주의 뜻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이만한 십일조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없어요. 최고 십일조입니다. 그걸 가지고 ‘의’‘신’ ‘인’,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왔을 때는 행함으로 보답하면 안 돼요. 남편이 ‘여보, 당신 사랑해,’ 하면 ‘오뎅 국(어묵 국) 해줄까?’ㅎ결국에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워낙 속아 넘어가니까 이젠 소망해도 안 믿어. 안 믿기 때문에 ‘그래, 그래, 오늘은 오뎅 국으로 때우자. 두 번 다시 나한테 그런 소리 하면 나한테 맞는다.’ 이래 나오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다 줬어요. 이미!! 십자가로서 이미 어떤 니 행위도 이미 다 안다는 거예요. 지난여름에 한 말을 다 알거든요. 니 어떤 행동도 다 알기 때문에 니가 미처 니 죄도 모르는 앞으로 지을 죄, 아직까지 덜 지은 죄까지 미리 다 했기 때문에 이 십자가 피는 어디에도 유효해요. 앞으로 50년을 살든 70년을 살아도 십자가 피는 유효합니다. 십자가 피가 그냥 지나간 것만 하게 되면 나중에 주님께서 ‘아! 미안하다. 난 이런 죄 지을 줄 몰랐다. 내가 십자가 한 번 더 질게.’ 이래 나온다는 그런 주님은 없어요.

그래서 이 일곱 나팔 안에 깊숙이 들어있는, 마지막에 뭐가 보인다고요? 언약궤가 보이면, 언약 안에서는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나의 시간과 나의 공간이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한국에서는 신학생활 잘하는데 미국 가서는 못 하겠다? 그런 것은 없어요. 미국에도 언약궤 보이면 되고 한국에서도 언약궤 보이면 되는 거예요. 자꾸 우리 행한 것, 교회 다닌 것, 출석부 체크한 것, 이런 것만 보니까 미완료가 되고 미완성이 되는데, 언약궤를 바라보면, 그 언약궤 십자가를 바라보면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곳에 다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게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감사하옵나니, 찬양 합니다. 찬양은 지 생각처럼 되지 않는데 그 희생은 우리의 행함을 부정한 거죠. “옛적에도 계셨고” 그 다음에 뭡니까?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시방이라 하는 것은 현재죠. 옛적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신 하나님, 이 말은 지금 이루어지는 모든 효과가 옛날부터 이미 적용되어 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약궤에서 효과가 이미 나오셨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을 떼지 않으셨으니까 그 효과가 구체적인 완성이 지상에 아직 펼쳐지지가 않은 겁니다. 다만 그 흔적과 그 자국과 그림자만 구약에 있었죠.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런 거, 조건이 있죠. 정결한 짐승을 잡았을 경우에만, 정결한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정결한 짐승이 춤춘다? 아니요. 정결한 짐승이 노래 부른다? 아니에요. 정결한 짐승이 예배를 마친다? 아니요. 정결한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는다? ‘오케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되고 반드시 어떤 것을 거쳐서 하나님을 섬겨야 돼요? 내 대신 피 흘리신 정결한 짐승을 거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앞에서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확인 될 때 우리라는 죄인과 희생한 희생이 결합해서 뭐가 구현되느냐 하면, 언약이 구현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구원 받을까, 내 이기적인 욕심에서 내 구원 받아보자고 나오다가 바로 그런 욕심과 상관없이 창세전에 일방적으로 구원했던 것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구원 됐구나, 내가 구원 되고자, 안 되고자, 구원 될래, 안 될래, 하는 것은 소용없고,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죄인을 건졌을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나 위주가 아니고 모든 하나님의 뜻이 언약위주로 돼 가는 걸 이렇게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적용은 간단해요. 왜 우리는 음료수를 마십니까? 복음을 위해서. 나는 왜 숨을 쉽니까? 복음 때문에 지금까지 숨을 쉬라고 만들어 져서 끌고 온 거예요. 왜 사채놀이 해서 돈 2천만 원 떼먹었느냐? 복음을 위해서.ㅎㅎ 왜 과속해서 음주운전해서 차 박아서 남의 가정을 다 파괴 시켰느냐? 복음을 위해서. 왜 강도질을 해서 예수님 옆에 십자가 달렸습니까? 그 강도는 누구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평생 동안 강도짓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 행동에 정당함을 주장할  게 아니냐? 뭐든지 복음을 위해서 내가 했다. 복음을 위해서라는 말은, 뒤에 붙는 게 있어요. 그만큼 나는 무가치하다. 사람에게 천만의 말씀!! 복음을 위해서기 때문에 나는 누구에게만 범죄 했다?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겁니다. ‘나는 하나님께 앞에만 범죄 했기 때문에 무가치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동안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아니면 다른 가치는 없습니다.‘를 고백하게 됩니다. 주께만 범죄 한 거예요. 왜 사람에게 범죄 하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은 내가 범죄 했다는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것은,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성령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를 받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을 건드리면 주께서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니라.’ 라고 했거든요. 문제는 소자가 반드시 ‘나 건드리지 마라.’가 아니라 ‘나는 누가 와서 건드려도 나는 주님 앞에 응답할 수가 없다. 왜? 누가 와서 건드리고 힘들게 해도 나는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런 입장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았죠. 뺨을 쳐도 그냥 맞았고 옷을 벗김을 당해더 그냥 맞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평소에 ‘나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했잖아요. 옷을 벗기고 인간으로서 말 종,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스럽게 만들어 줄게’ 이거다 말이죠. 그런데 이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뭐라 합니까? ‘주여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해서 자기 아버지 앞에서 ,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았으면, 다른 인간이 옷을 벗기고 뺨을 때려도 그건 의미 없는 겁니다. 주께 버림받은 것에 비하면 그건 버림받은 게 아니에요. 사람이 아무리 자식에게 버림받고 남에게 버림받아도 주님한테 버림받아 지옥가면 그런 인간적인 버림받은 것은, 그거 버림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괜히 귀때기 맞아요. 그런 팔자 더러운 것도 아니에요.

진짜 팔자 더러운 것은 세상에서 축복받아 지옥 간 사람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선수들, 올림픽에서 뛰는 선수들, 그렇게 뛰어놓고 지옥가고, 삼성그룹을 지어놓고 지옥가고. 세상에 그런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 영광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꼴로 수직으로 내려가면 그 수치는 말도 못하죠. 두로 지방이 얼마나 잘 살았습니까? 무역으로, 오파 상으로, 그렇게 잘 살았던 두로, 바벨론이 얼마나 높았습니까? 그 두로 지방에다 하나님께서 무슨 별명을 붙였느냐 하면, 이 빛난 새벽 별아, 계명성아, 니가 하늘같이 높아지려고, 아이고, 잘했네, 잘했어요. 땅 끝까지.‘

그래서 지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지향하는 우리가 바라보는 저 하늘 높은 저 천국이 바로 지옥인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는가? 바로 나, 너나 가기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수치스럽다고 하기 싫은 그 십자가 묻힌 갈릴리 언덕이 바로 천국으로 통하는 비밀 문, 그 숨어있는 문 이예요. 그건 전투경찰 풀어도 못 찾습니다. 성령께서 열어줘야 그 안에 언약궤가 보이죠.

그럼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 비밀 문은 뭡니까? 그걸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피곤하시겠지만 잘 들어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찬양 있잖아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것이 구약에 어디에 나오는 찬양이냐 하면, 시편에 성전에 올라갈 때 나오는 추임새 같은 겁니다. 성전 올라갈 때 뭘 앞장 세워서 올라가요. 뭘 앞장세울까요? 언약궤죠. 다윗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서 이제 하나님의 만들어진 성전, 솔로몬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나라가 평정되고 난 뒤에 언약궤를 다윗성에 모셨거든요. 그 언약궤를 앞장세울 때 나오는 그 노래, 그 노래가 ‘시편’입니다.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무엇이 있어야 된다고요? 언약궤가 있어야 되죠. 언약궤가 성전에 안치될 때, 성전은 완성이 되는데,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다시 말해서 ‘언약을 주신 당사자시여! 이 언약궤 중심으로 우리가 모였사오니 우리에게 언약 적으로 실시하여 주시옵소서.’ 이겁니다. 언약에다 새 언약, 새 언약을 한 자로 말하면 뭐죠? ‘피’ ‘하나님, 하나님께서 피로 죄를 용서해서 거룩하게 해서 천국 갔다고 했사오니 주께서 피를 믿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사오니 이 피의 주는 구원을 이루어주옵소서.’ 모인 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언약궤에는 피만 묻히는데 이 피는 오직 누구의 피 입니까? RH+A형 이런 것 필요 없어요. 누구의 피 입니까? 오직 우리 피가 아니고 흠 없는 분인데 이 세상에서 흠 없는 분이라는 것은 누구를 배척한다? ‘흠 있는 인간들은 다 꺼져.‘ 이 말 이예요. 흠 있는 인간들의 땀과 피와 노력과 헌신과 기도는 다 꺼지라 이 말이죠. 누구 앞에서? 언약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 오직 피를 흘린 이름의 이름만 필요하지, 남은 다 가라 말이죠.

이것은 두 가지의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찬양과, 하나님께서 부재하실 때의 찬양, 두 종류의 찬양이 나옵니다. 이건 무슨 게임이냐 하면, 바로 ‘까꿍 게임‘ 이예요. ’맹구 없다.‘ ㅎ 엄마가 아주 어린 유아를 다루는 방법은 말을 안 들으면 뭐라 합니까? ’엄마, 그러면 딴 데 간다.‘ ’그러면 애가 ‘에에,’ 하고 우는 척 하죠. 심한 엄마는 ‘ 엄마 그러면 약 먹고 죽는다.’ 그러고 소화제 들고 그러고 있지만, 그건 극할 때, 이거는 도저히 말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는, ‘그래, 니 죽고 내 죽자,’ 하면서 소화제나 건강식품을 약이라 하죠. ‘야, 이게 독약이다.’ 하면 애는 기겁을 하고,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다음 3살 네 살 될 때는 까불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못 오게 한다. 굴뚝을 막아버린다.‘하죠. ’엄마, 잘못 했어요.‘ 특히 12월 달에 효과가 있죠. 산타크로스 와야 하니까, 까꿍 게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룰 때 ’까꿍‘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다가도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변에 있던 적들이 와르르 몰려드는 거예요. ’ 하나님 없다고? 우리 밥이다.‘ 몰려 드는 겁니다. 그때는 사색이 돼서 부르짖죠.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옵소서.‘ 살살 비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 했던 까꿍 게임을 믿는 자들이 이스라엘에 거의 없다는 사실!! 놀라운 사실은 믿는 것은 성령을 받은 소수의 선지자나 신을 믿는 사람들만 이 사실을 믿지, 대다수는 ’아이고, 우리가 여호와한테 제사는 꼬박꼬박 돈은 나갔는데 주께로 돌아온 축복은 꼴랑 이것밖에 안 되나, 그래서, 여호와 없는 이방나라는 더 잘 살고 이거 뭐야, 남는 장사도 아니고 말야. 치우자, 치워, 여호와께 제사는 드리되 사실은 우리는 이방 나라 풍습을 받아들이자.‘ 그래서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어요.

우상이 뭔지 설명을 해야겠죠. 제일먼저 우리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우상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우상은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신만 있어요. 자기가 믿는 신을 우상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신을 안 믿죠. ‘난 우상을 섬겨요.’ 이런 사람 없습니다.  ‘나의 참된 신이시여, 나의 주재이시여,’ 이렇게 믿지, 나는 이제 우상 섬기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우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신인데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언약이 없는 신, 이거 줄그어 놔야 해요. 시험에 나옵니다.ㅎ 예수를 이야기 하는데 그 안에 새 언약을 빠뜨린 예수를 이야기하면 그거 우상입니다. 탐욕 이예요. ‘예수님이여, 좋게 해 달라. 내용에 언약이 빠져 있으면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들은 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삼위일체 백날 불러봐라. 그 안에 언약이 빠져버리면 이게 우상이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언약이 빠져버리면 언약 안에 뭐를 채우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한 맺힘으로 채우겠죠.

한 맺힘, 인간은 에덴동산 쫓겨난 뒤에 인간의 속성이, 마음 씀씀이가 전부 다 한으로, 한 맺힘, 원한으로 가득가득 채워 있어요. 사람은 한번 당하면 잊을 수가 없어요. 용서는 하되 그걸 잊을 수는 없습니다. ‘내 니 잘못은 용서해 줄게.’ 하지만 잊지는 못해요. 이러한 사실은 부부 싸움할 때 나오죠. ‘용서했다. 니 과거 이야기해라 용서해 줄게’ 믿지 마세요.ㅎ 저녁 때 술 마시면 다 튀어나오는데. 특히 남자들도 여자한테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그거에 대해서 언급 안 할게.’ 웬걸, 나중에 3년 뒤에 일 있으면, 그때 처음에 연애할 때 일부터 다 끄집어내서 결국은 다 니가 그런 것은 다 시집, 시어머니 시아버지까지 다 거론해서 폭격을 해버리죠. 그러면 남자들을 그러죠. ‘왜 이야기를 우리 집과 저쪽과 연결시키느냐,’ ‘그럼 니 집안이 그 집안 아니냐?’ 맞긴 맞지만...

언약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 언약이 없어지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역사가 들어와요. ‘우리 교회역사는 100년, 축하 예배,’ 역사는 이미 죽어버렸을 때만 역사가 의미가 있어요. 아! 이게 어려운 말인데 한마디 해야겠다. 여러분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주지 마세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은 현재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자체가 선물인데 새삼스럽게 선물을 줘버리면 이건 우리가 이제는 헤어지자는 뜻과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니는 헤어져도 선물은 남아있으니까. 선물 줘버리면 선물 준 그 시점이 시점 중심으로 시간이 더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이 되니까. 루이비통인가 가방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남대문에 가서 5천 원짜리 사줘도 싫어요. 그때부터 루이비통인가 사준 게 기억나서 ‘그때는 생일선물로 루이비통 사줬는데 이제는 개통도 아니고 왜 사주느냐,’ 선물을 줘버리면 그 선물을 준 기점으로 계속해서 진전이 안 나가요. 계속 스톱이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먼저 준 선물 루이비통보다 더 좋은 걸 해줘야 그때부터 새로 시작돼요. 선물을 주면 선물 준 사람은 잊어버리고 선물만 쥐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헤어질 때는 선물도 돌려줘야 됩니다. 목걸이도 돌려줘야 돼요. 이 손수건도 ‘니가 사준 거 다 가져가라.’ 그럴 때 선물 주는 것이 바로 헛수고라는 것을 느끼죠.

선물은 ‘현재 니하고 같이 있다.’는 자체가 선물 이예요. 내일되면 또 선물이 있는 거예요. 내일되면 저녁에 라면 먹어서 퉁퉁 분 얼굴, 이것도 하나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내일되면 머리가 허옇게 된 선물, 날마다 늙어가고 못생겨가는 선물,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물질적인 선물이 되는 겁니다. ‘봐라, 인간은 죽잖아. 내 언약대로, 말씀대로 안개 맞잖아.’ 말씀이 현실화 된 그 자체가 된 선물이란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죽는 것이 선물인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이미 고정돼 있어요. 뭐냐 하면 예언한 ‘십자가’가 선물로 돼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늙어 죽어서 마지막 지옥까지 가는 걸 알고 지옥까지 가 있는 인간까지 빼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지옥까지 따라오는 거예요. 지옥까지!!! 그래서 옛날 사도신경 보면, ‘주께서 죽으사’ 어디? ‘음부에 까지 내려 가사.’ 지옥까지 내려 가사 지옥에 있는 인간까지 데려온 거예요. 지옥에서 데려온다는 것은 바로 베드로전서 3:19~20(노아 방주 8명 구원)에 나와요.

지옥에 있는 우리를 데려올 정도의 위력이 바로 주님은 지옥마저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 물로 사용하는 겁니다. 악마는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약을 올리면 돼요. ‘악마야, 나 피 믿는다. 피 믿게 되었어.’ 악마는 입맛이 없어가지고. ‘그래도 세상에서 출세해야지.’ ‘출세하면 뭐 하노, 죽으면 다 놓고 갈 건데.’

제가 지난주에 설교 하면서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몰라요. 큰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쥐새끼도 못 들어오는 곡식 가득 찬 창고를 놔두고, 지가 죽잖아요. 차라리 그게 불나면 좋겠는데, 그건 지가 그렇게 원하는 창고에 곡식 가득함, 행함, 자기기대와 소망, 소망이 소망대로 됐는데, 죽기는 자기 영혼을 그날 밤 데려가니까 결국 자기 소망이 아니었어요. 결국 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우리는 그렇게 평생 동안 그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매진해요. 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좀 쓰고 살아라.‘ 라는 거예요. 아내와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재미나게 살다 가라.’(전9:8~9) 왜? 모든 게 헛되기 때문에. 한번 찾아 봐 드릴까요? 집에 가서 찾아보세요.ㅎ 전도서 9장 8절에 보면,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옷 입고 다녀라. 개량 한복 같은 거 입지 말고, 환경 공부 할 것도 아니고, ‘네 마음에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고급 음료를 마시라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네 머리에 향 기름 바르고’ 무스 바르고 깔끔하게 돌아다니라는 거죠. 왜 그렇게 하느냐, ‘네 헛된 평생에 하나님이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라.’ 헛된 날에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분복이라. 네 몫의 복이다 말이죠. 헛된 날. 그렇다고 아내하고 만날 돌아다니고 그러면 안 되고...ㅎ

언약이라는 것은 이렇게 모든 움직이는 것이 다 언약에서 배치 물로 짜인 거예요. 거미집에 거미 하나만 있어도 거미줄은 가득 차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미줄 연결고리예요. 거미줄의 그물망처럼. 그런데 그 주인공은 뭐냐, 언약궤가 중앙에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니까요. 이 언약궤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성전에서.

시편에 보면 두 가지를 찬양하거든요. 하나는 축복 주신 것을 찬양하고, 또 저주하게 하신 것을 찬양해요. 이 언약의 성전에서 나온,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있음으로서, 다윗의 언약이 있음으로서 언약의 나라, 축복의 나라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나라 중심은 ‘성전중심’이다. 그 중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혜택을 이스라엘이 받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는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축복에 관한 일이 나오고, 그 다음에 ‘언약을 모르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어주소서.’ 시편 90편에 나와요.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 주의 진노를 퍼 부소서. 언약을 모르는 이방 나라에게 진노를 퍼부어 주소서.’ 이스라엘 빼놓고 나머지 이방 나라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부어주신다면 우리나라에 필히 누가 계시다? ‘진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대로  계시임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하는 거예요. 제발 적도 우리에게 붙여줘서 적들이 맥없이 물러가고 패배당할 때, 우리는 우리 힘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있음을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축복과 저주가 저주는 이방나라에게, 언약이니까, 축복은 이스라엘에게, 오게 되는데, 이게 바뀌는 경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저주하는 경우예요. 하나님이 안 계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까꿍 하신 경우예요. 까꿍 할 때, ‘엄마 없다.‘한 순간 이예요. 그때 이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누가 알아차리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성신을 받은 선지자들이 알아차리죠. 그렇게 이야기가 되고 하나님께서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일부러 성신을 줘서 그 일에서 나오게 하죠. 뭐라 하느냐 하면, ’화로다. 이 나라여, 유다나라여,  망하게 되었구나. 정신 차려라.‘ ’뭐, 뭐, 뭐, 너만 신학교 나왔느냐, 나도 신학교 나왔다.‘ 다른 거짓 선지자가 우르르 나와서 왕따 시키는 거예요. ’뭐야? 너 예레미야 뭐야, 너 에스겔 뭐야, 니만 성령 받았어?‘ 미가 같은 경우에 자기만 성령 받았다 하니까 ’그럼 우리는 거짓말쟁이야?, ‘그래, 이 나쁜 놈아.‘ 이래 된다고요. 혼자 답답해하는 거예요. 혼자 답답해하는 그 모습이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양 같아서 다 제갈 길로 가는데, 우리의 무리의 무지함과 무지몽매한 죄를 한 분에게 다 뒤집어씌워서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얻었다.‘ 한 분에게 모든 걸 다 줘버린 거예요. ’이스라엘의 죄를 다 주신 겁니까?’ 라고 여러분이 저에게 물으신다면, ‘맞습니다.’ 그럼 그게 육적 이스라엘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주님한테 몽땅 다 맡겼는데, 그 이스라엘이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육적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그럼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입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이제 새로 만들 거예요.

주님께서 주의 종이 되어서 고난을 받아놓고 고난당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내놓고 그 선지자의 말을 성령을 통해서 알아먹는 사람만이 그 혜택을 입는, 대신 십자가의 혜택을 입는 사람으로 연결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이 마지막 때에 주께서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서 모든 증거를 보여줘서 이제는 마지막 심판됨을 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의미와 이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묻는 식으로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 봅시다. 제가 사실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인데, 성경을 다 좋아해야 되겠지만 사도행전 17장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이죠. 이는 마호메트도 아니에요. 마호메트는 부활하지 못했으니까. 부처도 아닙니다. 부처도 부활하지 못했으니까. 정하신 사람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믿을만한 증거를 준 거예요. 이것은 병 고치는 것도 아니고 나무뿌리 뽑는 것도 아니고 산 옮기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부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 위를 걸은 거예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 살은 자가 천당 간다는 보장 없어요. 병이 낫다고 해도 천당 가는 것도 안 됩니다.

천국 가는 마지막 증거는 병 낫는 것도 아니고 암에서 낫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뭐냐 하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이예요. 십자가와 부활!! 이걸 유일한 증거로 준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오죽했으면 이렇게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모든 곁가지를 다 잘라버립니까? 로마서 10장에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무슨 십계명이, 거기 무슨 십일조가 있고 무슨 주일성수가 왜 들어갑니까?

사람들이 현재 교회, 교회하는데, 그게 기존의 사람들이 만나는 교회가 역사와 전통을 따라서 이게 자꾸 세뇌가 되니까 그게 교회가 아닌데도 뾰족 하면 무조건 교회래요. 십자가 있으면, 사람들의 선입감이 그래요. 왜, 사회가 다 그러니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하니까.

저는 중한테 진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원래 내가 공부한 불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다 헛되고,(공이고) 부처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다 버리라는 그거거든요. 그게 내가 아는 불교인데, 뭐냐 하면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 뭐 없어요. 자기만 버리면 해탈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머리 깎고 한복 입고 다니는가?’ 왜 그리요? 머리 깎고 한복 입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게 아니죠. normal(평범한) 상태가 아니죠? 특별한 상태, 왜 특별한 복장을 하고 왜 특별한 스타일을 합니까? 도인이기 때문에. 법정 스님이 한복입고 머리 깎고 했으니까 ‘무소유’라 했지, 보통 그냥 가다마이(양복)입고 머리 기르고 하면 무소유라 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안 알아줘요. 그걸 ‘권력’이라 해요. 왜 신부는 로먼카라에 자기들만의 특수한 복장의 유니폼이 왜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인간은 뭐니, 뭐니 해도 진리가 우선이 아니고 성스러운 권력이 먹여주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통하니까 오늘날 목사가 가운을 입고 목사 복이 따로 있어요. 감리교에는 목사 복이 따로 있어요. 돈 된다 그거예요.ㅎ ‘나나 하나님 건드리지 너희들이 감히 이런 복장 아니면 너희 장로 이런 것들이 나 건드리지 마라. 나 건드리는 분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건드린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건드리지 마라.’ 권력자예요. 권력자!!!권력의 표징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증거는 뭐로 하느냐 하면 바로 아까 불교에서 이야기 했죠. 체험될 수 있는 것, 이슬람교,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 ‘다섯 번 절하라. 나도 다섯 번 절하면 천당 갈 수 있다면 다섯 번 절합니다. 천당 간다는데 뭐는 못해. 어떤 것도 하지 말라 하는 것도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원래부터 이미 에덴에서 쫓아낸 이상은 구원받을 자격조차 안 되는 거예요. 해도 안 되는걸 왜 하느냐 말 이예요. 해도 안 되는걸, 하지 말라며? 하지 않아도 소용없고, 해도 소용없고,ㅎ

성경은 문자로 푸는 게 아니고 영으로 풉니다. 모세가 수건을 덮었을 때 시내 산에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과 지상의 영광과 너무 차이가 나서 수건을 덮었잖아요. 수건을 덮은 모세만 십계명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언약에 완전히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을 지키겠다고 하면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언약이 나 존재보다도 나를 덮치는 거예요. 세상에 얼마 전에 서울 살면서 황사 피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하루 종일 찜질방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황사 못 피하죠. 황사가 어디 우리가 오라 해서 옵니까? 지 맘대로 오지, 오면 맞을 수밖에 없죠.

성령은 창세전에 ‘쟤 구원해,’라는 언약의 언질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기 싫다고 안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성령이 와 버려요. 와 버리면, 나는 주께만, 다른 말로 하면 ‘주 앞에서만, 나는 죄인 맞습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를 떠나서 ’모태로부터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고 헌물도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 이 고물 어떻게 하면 해보시려고 주시라고 하는데 이 고물 여기 앉았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물, 내가 어찌 처리할 수 없는 중고, 하지만 이 중고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니 이 중고를 드려야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는데, 죄인을 불러서 고치겠다는 것이 마치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방식이거든요.

옛 부대는 뭔지 압니까? 이 착한 내가 말씀 지켜서 더 착해지는 것이 옛 부대 옛 술이라면, 새 술에 새 부대는 뭐냐 하면 신랑 되시는 주님 오셔서 망측하기 짝이 없는 인간도 아닌 우리를 주께서 자기 정결한 신부로 만들어내는 솜씨를 부리겠다는데, 솜씨 부린다고 지가 솜씨 부리면 안 되죠. 주께서 마음껏 솜씨를 부리도록 좀 드리세요. 하루 종일 주께서 솜씨 부리도록!! 나의 하루 종일 하는 것이 모두 죄가 되는데 그 모든 것이 은혜가 돼요.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이게 은혜가 된다니까요. 죄가 되기 때문에 의가 되는 게 아니고, 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알 수 있는 그 기회가 된다니까요. 모든 것이 죈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걸 보니까 내가 받고 있군요. 선물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용서를 그냥 받고 있습니다. 그걸 다시 느끼는 매일매일 하루 일과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을 봅시다. 11장 17절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여기 이방인 나오죠? 여기 이방인들은 바로 시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기 때문에 시편 입장에서 이방인이라 하는 것은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주변의 이방인이라면, 여기 이방인은 언약이 무슨 언약입니까? 시편에서는 모세언약이지만 여기서는 새 언약이기 때문에 여기 이방인은 결국 속에 언약이 없고 자기 잘난 역사만 있는 이런 것, 툭 건드리면 자기 역사가 나와요. 그 유명한 게, ‘왕년에’ 아닙니까? 왕년에 지가 어마어마했다는 거예요. 뭐가 어마어마했는데?? 왕년에. 과거에만 있었고 과거에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뭡니까? 과거에도 있었고 시방도 있고.ㅎ 지금도 왕 노릇하고. 우리는 옛날 5년 전에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우린 5년 전에만 은혜 받으면 안 돼요. 지금도 계신 주님이 계시다면 매일같이 은혜 받아요. 우리의 과거는 과거로 돌려보내세요. 바이, 바이 과거.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이 몸이 육신의 몸, 죄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거치는 시공간의 환상에 매료될 때가 많아요.

흘러가는 7080노래 부르면서 ‘그때 그랬었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내가 여자 꼬일 때 저거 써먹었었는데, 이렇게 노래 소리들을 때 그때가 좋았다’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음악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옛날 과거로 되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는 그것이 죄라는 것이 사라져버리고 아름답고 고상하다는 의식이 남아 있어요. ‘참 아름다웠었어. 그때, 옛날 그 첫사랑이 아름다운데 지금은 보아야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때 첫사랑은 천사 같았는데..’ 지금 50년 지나 첫사랑 만나면 뭐라 합니까? ‘아줌마, 천원자리 끊어주세요.’ 할 건데. 완전히 생활 발견이라, 아주 세속적이라. 쿠폰 됩니까? 그때 첫사랑의 모습이 아니고 너무나 실생활적인.. ‘천박해, 천박해,’ 할 정도로 왜 이렇게 현실적으로 돈 밖에 모르는, 도대체 천사 구석이 없어. 블랙 사람 같아, 얼굴이 시커매, 그때는 우리는 탄식하죠. ‘옥경아, 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아이쿠, 희미한 등불 밑에서.‘ ’이 잔주름, 얼굴은 왜 이리 늙었노? 남편 만나 고생은 했고?‘ 으하하하~~

그럴 때 저 일곱 나팔 안에 있는 언약궤가 뭐라 하십니까? 웃습니다.^_^ 니가 늙어도 괜찮고 니가 젊었으면 니가 그게 잘난 것인 줄 아느냐, 아름다움은 천국의 삼층 천 아름다움에 비하면, 그 천국 가서 아름답다고 말하지 마라. 그 하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 한쪽은 말할 수 없는 영원한 지옥 고통이 있지만 이쪽은 말할 수 없는 은총을, 하나님만이 누리시고 천사만 누리던 그 영광을 그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거저 줬다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감사하옵고 찬양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소리가 절로 나오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나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기대하지도 상상도 못했던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축복,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영광을 우리의 유산으로 우리의 나라로 이렇게 삼아주시니 이 모든 공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신 구원의 능력으로 오는 줄 압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행함을 능력이라고 내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