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519요한계시록11장-(찬양 속의 주님)-15강a-(이 근호 목사) 제 15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11장 14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바로 셋째 화는 남아 있다고 했는데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라고 돼 있죠? 이렇게 일곱 개의 껍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껍질을 하나, 하나씩 벗길 때마다 속에 있는 내막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알맹이가 있는데 일곱 개 겹으로 뒤집어 씌어져 있다 말이죠. 그래서 이걸 하나씩 뗄 때마다 알맹이가 갖고 있던 원래의 내용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째 나팔을 분다는 것은 안쪽에 있는 알맹이가 바꿔지는 건 아니에요. 원래 있던 것이 일곱째 나팔을 계기로 해서 이게 표면화되고 바깥으로 구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째 나팔을 불기 전에도 이미 여기는 완료돼 있고 완성돼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질문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완성돼 있고 완료되었다면, 그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뭐냐, 증거를 대라,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이렇게 세상에서 어렵게 사는데, 뭘 자꾸 다 ‘완성되었다,’ ‘다 이루었다,’ ‘그런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보통 생각을 하겠죠. 우리 입장에서.
그런데 오늘 본문에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요 안에 일곱 나팔 보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
그렇다면 여기 ‘완료되었다. 완성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살기 편해서 완료되고 완성된 것하고는 관계가 없고요. 여기 언약궤가 원래 목적하던 것, 원래 목적했던 바가 다 이루어진 거예요. 만약에 우리 애가 시집을 안 갔다. 그러면 우리 소원은 빨리 내 딸이 20대 후반인데 시집갔으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잖아요.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내 딸이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해 달라.‘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성경을 펼치니까 ’다 이루었다.‘ 돼 있거든요. ’어~ 내 딸은 시집도 안 갔는데 다 이루었다는데, 뭘 두고 다 이루었다 하는가?‘
바로 일곱째 나팔을 불게 되면 여기서 화, 재앙, 징벌, 이런 게 주어지죠. 일곱째 나팔을 뜯어낸다는 것은 안쪽에 있는 내용물을 바깥으로 공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공개할 때 특징이 뭐냐 하면, ‘화’와 ‘재앙’으로 공개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렵죠?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내 딸이 아직 시집 안 가서 시집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이뤄져야 만족하고 다 이루어졌다고 치고 싶은데 하나님의 숨어있는 언약궤가 이걸 다 이루심이 바깥으로 나팔을 통해서 어떤 계기로 공개가 돼 버리면, 그건 내 딸 시집 문제가 아니고 화가 주어지고 재앙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다 이루었다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평소에 남편의 성질이 더럽고 불뚝 성질이고 조그만 일에도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 그런 아저씨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미국에 살던 손자가 그 사정도 모르고 할아버지하고 같이 술을 같이 먹게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죠. ‘저 할아버지가 언제쯤 성질이 나올까, 언제쯤 성질을 부릴까,’ 하고 있는데 그런데 미국의 손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할아버지 사람 참 좋은데, 이러면 최고지 뭐, 어때,’ ‘아니야, 아니야, 일이 있을 텐데,’ ‘할아버지, 우리 말 틀까요?’ 이런 식으로 상대방도 모르고 좋게, 좋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할아버지 성격을 건드렸는지 드디어 ‘이놈~’ 하고 술 먹은 지 두 시간 반 만에 터져 나온 거예요. 그게 일곱 나팔 이예요.
본색이 점잖은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에, ‘살만하다, 세상 아직 하나님, 예수님 안 믿어도 괜찮네,’ 라고 할 때는 아직까지 일곱 나팔이 아직 적용받지 않은 거예요. 그럼 일곱 나팔을 떼게 되면 이것이 ‘이놈!’ 하고 성질이 화로 재앙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게 본래 성격 이예요. 다 이루심의 본래 성격입니다.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부분에 서서히 들어갑니다.) 미리 말씀 드릴게요. 결론이 어려워서 미리 말씀 드리면,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이방 민족은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하고 저주 받게 돼 있습니다. 언약이 그러니까, 언약이 이루었다는 것은, 언약 안의 내용만 이루어지면 다 이룬 거예요. 우리 딸 시집가는 것은 언약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 담고 있는 그것만 이루어지면 우리가 죽던 말든 상관없이 지진이 일어나든, 집에 화재가 일어나든 상관없이 그건 무조건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하고는 엄청나게 본래의 성경의 의도하고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방민족은 일체 구원이 없다. 오직 언약된 사람만 구원이 주어지는 痼?언약이다.’라고 할 때,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주는 심판주다.’ 여기서 주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심판 주죠. 둘로 나눠지죠. 하나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과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 짓는 그 심판 주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드디어 구원 할 자만 건져내고 구원 절대 시켜주지 않을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이 돌아가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은 드디어 완전한 수준에서 그대로 적용시켜나가고 그대로 실시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면, 이 언약궤의 다 이루었다는 것이 찢어지는데, 세상의 모든 현실이 찢어지면서 거기에 일곱 나팔이 오게 되면 세상적인 가상적인 사고방식이 다 찢어지면서 언약궤를 바라보게 하는데, 19절 다시 보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성전 안에 뭐가 보인다 했습니까? 언약궤가 보이죠.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언약궤가 보여야 된다니까요.
남편이 국정원 직원이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 007에서 처럼 보안 국가 기밀을 수행하고 있는 이거는 진짜 아내한테도 자기 직업을 밝힐 수 없는 그러한 남편의 직업이 007, 국가 정보 비밀요원이라 합시다. 그런데 아내가 ‘이상하다, 남편이 출판사 다닌다는데 출판사하고 관계없는 것 같고, 아휴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자다 가만히 보니까 국정원 빼찌(배지 :표준 말)라. 이게 뭐냐, 본 거예요. 뭘 봤어요? 남편의 실체를 본 거예요. 국정원, 005정도. 그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남편을 아는 아내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부터 쭉 내려 보면 이거 하나에 종결 자예요. 이게 터미레이터, 이게 마지막 대목 이예요. 언약궤가 보인다면 너는 언약궤의 완성에 의해서 구원됐느니라.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종착점입니다. 도대체 나는 왜 구원 돼야 됩니까? ‘니 앞에 뭐가 보이지?’ ‘언약궤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약속이죠. ‘그 약속대로 넌 구원을 받은 거야.’ 라는 그것에 접촉되면 게임 끝난 거예요.
그것을 바로 일곱 나팔이라는 이 재앙, 세상의 징벌에 대한 재앙, 세상에 대한 재앙이 일어나게 되면, 그 재앙이 만약에 미사일이라면 미사일을 쏘는 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소망, 포부, 기대감, 우리 마음에 ‘이거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이것은 내 목숨보다도 귀한 겁니다.’라고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을 찢어놔 버려요. 전부 다 부숴놔 버려요. 언약궤에서 쏴버리죠.
그러면 우리가 저걸 믿고 이걸 믿고 믿는 것마다 폭탄이 나와서 부서지면 그것이 바로 다 이뤘기 때문에 우리에게 ‘쓸데없는 것 의지 말고 쓸데없는 것 믿지 마라, 너는 그런 걸 믿어야 될 입장이 아니야, 너는 다른 자격자야, 언약궤를 바라볼 그런 존재지, 니가 그동안 노동해서 얻은 그걸 계속 쥐고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인생은 ’다 이루었다‘에 해당되는 일곱 재앙의 혹독한 징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성경이 원래 그렇게 돼 있어요. 이야기 들어보면 굉장히 간단하죠.
이 언약궤에 다 이룰 때 ‘예수님은 심판주시다.’ 예수님은 심판 주라는 이 사실, 무슨 기준에 의해서? 언약 기준에 의해서. 언약 기준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행함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나이 80이 넘어도 가입할 수 있는 보험, 이 순재, 일체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고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이름이 개입되느냐 안 되느냐, 가담할 수 있느냐, 일체 가담을 못합니다. 가담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소곤소곤, ‘소곤소곤, 두 분이 이야기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애들은 가라, 어이 가, 어이 가 있어.‘ 그걸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우리의 원수,‘ 우리를 지옥 갈 수밖에 없게 만든 우리의 원수를 깨부수고 그 원수 안에 있는 자기 사람을 데려오는 그 모든 비밀 작업을 예수님 혼자서 다 해냅니다. 다 해내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게 되면 그 이룸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러한 언약의 방식이 되려면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 이 중요한 이 배경 이 바닥을 사람들은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에 신자가 거의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아까 언급을 했습니다만 한국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에게는 구원이 없게 돼 있어요. 왜? 언약의 결론이니까. 이 사실을 한국 사람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 빼놓고, 유대인들 빼놓고는 이걸 받아들일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안 됩니다. 구원 안 돼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을 자라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지도 않았습니다. 추방이라는 것은 ‘나가 있어.’ 이 뜻이거든요. ‘저리 가.’ 라 하고 딱 문 닫아 버리고 생명나무 과실을 닫아 버렸죠.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는 걸 가지고 두자로 뭐라 이야기하느냐 하면 ‘죽음’이라 해요. 죽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면접한다면 딴 것은 묻지를 않아요. ‘생명나무 과실 있나?’ ‘생명나무 과실 먹었어?’ 이것만 묻죠. ‘부모 효도했어?’ ‘이웃 사랑했어?’ 그거 안 묻습니다. ‘생명나무 과실 있어?’ 그걸 묻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과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없어서 텅텅 비어 있겠네요. 그러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거기 대한 해답이 구약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이 있다. 그 이야기 들으면 화가 나서 ‘이스라엘은 인간이고 우리는 인간 아닙니까?’ 이래 나오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어요. 우리 이방민족, 한국 사람이라든지 한민족 핀리핀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 하지 않습니까? BC2333년 고조선 세워서 현손이 BC108년 정도에 내부 분열로 망합니다. 망하고 난 뒤에 우리나라 지도에 보면 부여,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이런 식으로 돼 있었단 말이죠. 이게 청동기 시대예요. 그 전시대는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BC10세기 정도부터 12세기 정도고 철기 시대는 5세기 정도부터고,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신석기 구석기 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너무나 잘 배웠기 때문에 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부족 국가라든지 국가가 청동기시대부터 이러한 마을이 생기고 철기시대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혈육에 의해서 혈통에 의해서, 쉽게 말해서 가족에 의해서, 아버지가 아들 낳고, 아들이 어른 돼서 아이를 낳고, 씨족과 씨족에 의해서 맺어진 그러한 민족과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족과 피는 아담의 죄가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아담의 피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절대로 따먹을 수 없는 자격자야, 생명나무는 따먹을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거야,‘ 그 대대로 아담에게 주어진 그 제한이 그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겁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야, 5대손, 10대손, 너도 마찬가지야,‘ 너의 조상에게 생명나무 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고 그 죽은 자식에게서 태어난 자식도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은 이상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해서 죽은 것이다. 그 증거 대라면 증거 댈게요. ’봐라. 니 죽잖아. 늙어 죽잖아.‘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계속 자식을 낳아도 계속 죽잖아요. 계속 자식을 낳아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본인도 죽고 자식은 계속 죽고 그 자식은 또 죽고, 그래서 사람에게는 안 죽는 자식이 필요한 거예요. 그 안 죽는 자식을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 했으니까. 그래서 거꾸로 보는 거예요. 거꾸로! 아담으로부터는 다 죽었다가 되니까, 아담 속에 섞여 내려오는 안 죽는 자손은 다윗의 자손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소급해서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족보입니다.
어떤 인간도 20대든, 30대든 죽으면 죽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말하지만 죽는 것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잖아요. 약을 먹고 죽든지 미리 당겨서 죽으면 그만이지만, 기분 나쁘거나 분하면 니 죽고 나죽자 하고 미리 당겨서 죽으면 그만이고 별 의미 없는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으리라‘ 해서 이것이 피조물의 죽음마저도 주께서는 이것마저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원래 돼지 죽으면 하さ?버릴 게 없다고 하잖아요. 돼지인지 소인지 모르지만, 다 쓸모 있다고 해요. 소 혓바닥까지 다 쓸모 있답니다. 사람은 태어났으면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다 쓰여 집니다. 죄도 필요하고 죽음도 필요하고, 문제는 인간이 안 죽는다는 데에 있어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이거. 차라리 죽어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슬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사람은 이슬처럼 사라진다, 먼지로 사라진다는 이론을 내세운 종교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불교 아닙니까. 불교, 인간은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 5가지 재료로 돼 있어요. 훅 불어보면 흩어지니까 죽음의 대상자체가 날아가니까 ‘죽음을 두려워 마세요.’ 이게 해탈 경지예요. 여러분들 해탈 다 됐어요.ㅎ
그런데 세상에, 그 흩어졌던 것이 다시 구성돼서 주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줄이야, 상상이야 했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을 만드신 분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아요. 낭비되는 것이 없고 그 만들은 인간이 지옥가고 또는 마지막에 저주를 받을 때, 그렇게 심판할 수 있는 권리는 처음 만드신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끝까지 활용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보잖아요. 우리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텍사스 전기톱 가지?산산조각을 내더라도 흩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한번 태어났으면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인간의 아이디어라면 이러한 계시가 없다고 한다면 이방민족이라면 불교정도가 되겠죠. 그러면 유대인 빼고 다 불교냐? 천만의 말씀, 이러한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너무 흥행해서 그래도 인간의 가치를 누릴 대로 누려보자는 종교가 이슬람교예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하는데 이슬람 종교의 특징은 신이 있어요. 신의 절대주권 이예요. 신이 뭘 원 하느냐 절대적으로 원하는 게 있어요. AD 6세기경에 모하메드라는 사람에게 보름달 뜨는 날에 그날에 계시 받았어요. 그날에 계시 받은 것과 뒤에 여러 가지 자기 경험을 모아서 해석붙인 것이 코란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슬람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보상, 다른 말로 하면 보너스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그 종교의 모든 예배와 모든 의식은 재앙을 제거하는 방식의 의식이 된다 말이죠. 재앙이 이쪽 어깨에서 이쪽 어깨로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렇게 고개를 좌에서 우로, 드디어 네 죄는 여기서 사라졌다. 그리고 장례식 할 때도 마지막으로 여자들은 참석 못하고 남자들은 ‘혹시 여기 죽은 사람에게 원한이나 감정이나 돈을 떼먹어서 기분 나쁜 것 있으면 이 자리에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십니까?’ ‘용서하십니까?’ ‘용서하십니까?’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여기 죽은 자가 신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소위 탄원서가 효력이 있다는 거예요. 재판할 때 가족들이 ’판사님, 좀 봐 주소.‘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걸 우리가 용서했기 때문에 ‘나 그 사람한테 감정 없습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어, 그래? 봐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니보고 감정 없대. 니가 죄진 것 많다마는 사람들이 감정 없다는데 나 니 용서 할게.’ 라고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을 때는 그 사람하고 모든 감정을 다 풀어주면 그 사람이 좋은 나라에서 혜택을 입을 수 있는 효력을 준다는 겁니다. 얼마나 세상 적입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 없어요. 평소에 우리가 가정생활 하고 살아왔던 것, 그대로 그게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슬람을 믿는 나라에서는 이슬람교 인이 몇 퍼센트인가 하면 99퍼센트가 이슬람 종교고 이란 같은 곳은 90퍼센트고, 왜 이렇게 퍼센트가 많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령 받을 필요가 없어요. 뭐냐 하면 육적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식대로 하나님이 별겁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본인의 이성과 양심이 신의 계시라 말이죠. 자기가 선하게 행동하면 그게 신의 계시고 악하면 악하다고 반성하면 그게 신의 계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벌은 지가 알아서 내가 나쁜 짓 많이 했다 싶으면 죽기 전에 50일 남겨놓고 바짝 그때부터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계시가 필요해요? 코란이라는 게 뭐냐 하면 정성이 지극하면 신도 감동한다는 그 이야깁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를 드릴 때 ‘예배드리는 시간 ’을 ‘아잔’이라 하는데 이렇게 기준이 있어요. ‘알라는 위대하다, 다른 신?섬기지 말라. 나는 예배를 원하다,’ 이런 게 있어요. 구약시대처럼 그 앞에서 궁둥이 쳐들고 전부 다 엎드려서 궁둥이를 바짝 들어야 돼요. 일하다가도 이렇게 5번 하다 보면, 이러한 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은 참 불편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번 해 보세요. 그것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행함이 얼마나 편합니까? 믿으라 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요. 차라리 믿으려 하지 말고 5번씩 궁둥이 쳐들고 엎드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참 쉽죠?~ 이게 훨씬 편한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징크스 이런 게 있어서 시험 치러 갈 때 학생들이 ‘난 전봇대를 그냥 지나가지 말고 다섯 번 터치하면 오늘 시험 잘 되겠다.’ 하면 일부러 가서 전봇대에 1번, 2번, ..다섯 번, 이게 더 쉬워요. 한번 씩 규칙을 세우고 규칙대로 행했을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다 이루었다’는 어떤 포만감, 안도감, 그게 있다 말이죠. 그걸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에게 그게 있다는 걸 알고 경상도 남자처럼 일체 무뚝뚝하게 안 봅니다. ‘니가 궁둥이를 쳐들고 하던 안 들고 하든, 전봇대를 몇 번 치든 간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구원을 하는데 문제는 언약을 받을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가운데 내가 너희 민족을 새롭게 만들어요. 만드는데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의 언약과 야곱의 언약에 기준해서 없는 나라를 새롭게 만듭니다. 청동기, 구석기 아무 상관없어요. 없는 나라를 새로 만들어요. 이걸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몰라요. 있는 사람 꼬시려고( 꼬이려고: 표준말) 償? 없는 사람 새로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히 하지를 못합니다. 만약 없는 사람 만들어서 교인 채우려고 하면 어느 교인도 한명도 안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 교회 건물만 번듯하고 교인 한 사람도 없어 텅텅 비어 장사 안 되어 문 닫아야 되죠. 그래서 장사 안 되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준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있는 사람에다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이런 알라신의 이슬람교의 그 규칙, 행위, 그건 사람들이 같은 육이니까 알아듣잖아요.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행함을 잔뜩 부여해서 ‘목사님 숙제 다 했어요.’라는 사람만 불러 모아서 교회라는 걸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숙제 두 가지가 있어요. 십일조와 주일 성수,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반드시 해 와야 돼요. 숙제 안 하면 승진 안 돼요. 집사로.
지난주일 아침에 어느 낯선 50대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이상하다. 여기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새로운 교인이 온다는 것은 이상한데,’ 저는 설교 하다가 발견했어요. 우리 교회에 누가 먼저 이야기 걸 사람도 없었고요. 오면 오고 가면 갈 사람이고, 도대체 저 분이 누구지? 궁금했었어요. 그런데 설교 시간에 잘 듣는 것 같은데 약간은 조는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잘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제 아내가 졸더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이야기 해본 사람 있습니까? 했더니 이 윤자 권사님이 이야기를 해봤다는 거예요.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고 친척 방문 하러 왔다가 아차, 주일 성수 지키기 위해서 우리 교회 왔다가 주일성수 안하고 주무시다 가신 거예요.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복음 들으려고 온 사람인줄 알고 초반부터 조지기 시작했죠. 교회 나온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라고 시작해서..ㅎ법 있는 구원은 없습니다. 법이 없는 구원밖에 없습니다. 법이 들어간 구원은 인간에게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지...그래서 축도하기 전에 벌써 나가버렸어요. 많이 힘들었겠다. 생각이 드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 나 이거 해냈다.’ 하잖아요. 할 수 있는 것을 주께서는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 놓고, ‘니 그거 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니 귤 깔 수 있어?’ ‘귤 많이 까 봐서 잘 깔 수 있습니다. 한번 까볼까요?’ ‘고게 바로 죄야, 바로 그 행함 때문에 니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 거야.’ 사람들은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여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행동은 생명나무 못 따먹는 이유들로 연결된 거예요. 여기에는 귤 까는 거, 오줌 누는 거, 전부 다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생명나무 못 따먹는 이유들로 차곡차곡 누적이 된다니까요. 그러니 이거는 ‘잘못하면 생명나무 못 먹어,’ 이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한 거야.’ 계속해서 소급해서 뭘 해도 울면 운다고 니는 죽은 놈이라 하고 웃지도 못하고 웃어라 해서 웃으면 지옥 갈 거야, 울까요? 울면 지옥 가는 거야,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니는 원래 쫓겨나게 돼 있어.‘
사람이 구원을 받겠다. 천국을 가겠다. 이 자체가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죄목에 이런 게 있어요. 천국에는 원래 하나님이 사시는 데지 인간은 어디 그걸 넘봐, 인간이 넘볼 걸 넘봐야지, 왜 넘봅니까? 인간은 이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살다가 자기 조상 잘못 만나, 조상이나 우리나 같은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 마귀 영광을 더 좋아하면서 살다가 죽어서는 하나 버릴 것 없이 지옥 가서는 영원히 ‘주님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나님 조치가 합당하구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잘 쫓겨냈어. 맞아 난 쫓겨난 것이 당연해,’ 그걸 영원토록 외치면서 그렇게 해야 될 인간 이예요. 거기서 조금도 딴 생각을 먹지 마세요. 그뿐입니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 이슬람이나 불교가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만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그들 종교의 사람 꼬이는 핵심은 뭐냐 하면, 경험담 이예요. 체험담,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용들, 경험이 안 된 내용을 안 하는 게 아니고 할 수만 있으면 열심히만 하면, 용을 쓰고 기도하게 되면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 그들의 종교교리로 제한이 됩니다. ‘날 따라해 봐라 요렇게. 그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게 이쪽 불교나 이슬람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똑같지만, 복음은 뭐냐 하면 육으로서는 할 수 없느니라. 오늘 강의에서 그 내막을 언약까지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까지 본론 안 들어갔어요. 절대로 인간은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할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하여 주일 성수, 십일조를 왜 외칩니까? 사기꾼이죠. 십일조 하고 지옥 가나 안 하고 지옥 가나 마찬가지예요. 주일성수하고 지옥 가나 안 하고 지옥 가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누구나 지옥 갑니다. 왜 이런 확실한 말을 안 하는 겁니까? 성경에 보면 나오는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요한복음 3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이 이야기를 안 하느냐 말이죠. 돈이 안 되니까 그러죠. 다시 말해서 이슬람처럼 불교처럼 사람 꼬일 수 있는 그 미끼의 연결점이 접촉점이 스스로 이쪽에서 못 끄집어내니까. 이런 소리 해 보세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교인들이 ‘ 목사님, 당신 잘났어요. 나 성령 못 받았어요. 내일부터 교회 나오나 봐.’ 이렇게 세게 나오면 어이합니까?ㅎ 세게 나오나 안 세게 나오나 관계없이 지금 하나님 뜻은 그렇다 이 말이죠. 그들이 삐져서 안 나오나 오던 안 나오던 간에 하나님 뜻이 그래요.
정 답답하면 내 논 돈 가지고 벽돌 뜯어내서 자기 집에 가져가서 개집 짓든가 알아서 하라 말이죠. 예배당 질 때 벽돌에 자기 이름 새긴 것 빼서 가져가란 말이죠. 피아노 낸 사람은 피아노 들고 가든지 꽃꽂이 한 사람은 꽃을 거둬가고 강대상 뒤에 커튼 한 사람은 커튼 뜯어가든지 하라 말이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구원은 언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구원은 새 언약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비밀로 감춰져 있어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안에 곱게 감춰져 있어요. 이게 미완료, 미완성이 아닙니다. 싹을 키우는 게 아니에요. 이미 가득 찼어요. 완성돼 있어요. 마치 북한에 있는 핵폭탄처럼 어디 묻혀있는지 모르지만 있어요. 언젠가 성질나면 끄집어내서 개발한 미사일에다 쏘면 일본을 치든지 미국을 치든지 한국을 치든지 칠겁니다. 이미 김정일은 ‘다 이루었다.’예요. 그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연평도 폭격이고 이렇다 말이죠. 우리는 핵폭탄 있다 이 말이거든요. 금강산도 그것은 우리는 겁 낼 것 없다. 우리는 핵폭탄 있다 그 뜻이다 말이죠.
바깥으로 나올 때는 화, 재앙으로 나오는데 그 목표점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식대로 구원을 달성하고자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그것이 공격 표적이 됩니다. 왜 쓸데없는 짓들을 하십니까? 왜, 아이, 그냥 사시면 되는데, 꼭 거기다가 뭘 하느냐 하면, 의미를 붙이는 게 문제예요. ‘배고프다. 밥 먹었다.’ 거기서 그치면 되는데, ‘배고프다, 밥 먹었다. 하나님, 저 잘했죠?’ 인간은 잘한 게 없어요. 배고파서 밥 먹더라고 그것은 잘한 게 아니고 본능이고, 그건 개도 알아요. 개도 밥 먹을 때 발길로 차면 갼楮?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준 것은 ‘니는 바로 개’라는 겁니다. 개이면서도 그들은 언약 받았다고 ‘아이고, 주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우기니까 참 하나님 보시기에 가관 이예요. 가관, 물론 멸망시켜 버리지만 이스라엘, 이스라엘 멸망됐다하면 어떤 인간도 물론 이건 이스라엘은 대표인데 대표자가 멸망해버리면,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은 못하지만 한 민족은 잘 합니다.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인간도 아담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 되면 다 안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구원 받고자 나온다는 그 자체가 그게 죕니다. 이게 성령을 받아보면 알아요. ‘아하, 내 식으로 딴 사람은 지옥가도 난 구원 돼서 천당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나오는 자체가 너무나 일방적인 언약이 아니고 내 위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 위주로 왜곡되게 엉터리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성령 받아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걸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구원 될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구원은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이 되기 때문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 구원이 안 됐다고 믿으시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ㅎ 아니, 이 말이 이상한 말이 되네, 믿음으로 구원 받거든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선물로 오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뭐냐,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교회 20년 다니고, 십일조 꼬박꼬박 적금 붓듯이 했는데, 그것도 복리계산하면 엄청난데, 난 그런 걸로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왜? 나는 처음부터 구원 될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언약이 있는 민족도 망했는데, 하물며 언약이 없는 민족은 구원은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소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려워요. 그렇다면 우리 이방민족, 한국 사람에게 그게 왔다면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하는데, 성령이 왔다면 성령이 우리 구원하기 위한 성령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으며 일곱 나팔이 무엇이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우리 내 구원만 챙기면 되는 줄 아는데 우리 안의 성령을 뜯어보니까 전체가 다 들어 있어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어서 KTX여자 직원들이 구조조정 한다니까 데모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여자 동료들은 겁이 나서 ‘사장님 말 잘 들을게요.’ 하고 그냥 다니고 오빠나 이런 아버지 쪽에서 정의가 강렬한 이런 집안 출신의 여성들은 ‘그래, 다 싫으면 나 혼자 하겠다.’ 하면서 서너 명이 시위를 했다 말이죠. 그래서 그걸 보고 국민 여론이 들끓어서 ‘그래 구조조정 하지 마라.’(실제가 아니고 예를 든 거예요. 혼자 소설 쓴 겁니다.) 전부 복직해라.‘ 그렇게 됐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복직을 데모한 4사람만 복직을 해주면 될 텐데, 비겁하게 ’사장님 잘 봐주세요.‘ 한 사람들까지 다 혜택이 주어졌네, 이걸 시편에서는 이걸 ’우리‘라 해요. 그리고 그 죄악 때문에 이 세상의 자기 백성의 죄악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예요. 시편에서는 두 종류의 시가 나옵니다. 찬양 시에서 두 가지예요.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계시는데 왜냐하면 왜 찬양 가운데 계시느냐 하면 찬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래요. 사람이 찬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찬양할 수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성령을 주시게 되면 찬양이 나오는데, 이 찬양이 나올 때 주체가 ‘우리’가 나오고 ‘나’가 나오는데, 나를 통해서 우리가 나오게 돼 있어요. 아! 어렵죠? 요 말은 네모 했던 4사람, KTX인원이 250명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벌벌벌 떨면서 ‘아이, 우린 마귀님이 시키는 대로 잘 할게요.’ 그런데 ‘아니야,’ 하고 4사람, 시편에서는 한 사람이지만, 여기 ‘나’라고 하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죄악을 인하여 언약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죄에 대한 안타까운 징벌, 이 모든 것을 홀로 다 받아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22편에 나온 말이죠. 그 나의 희생 덕분에 거기 ’나‘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새로운 ’우리‘가 발생 돼요. 우리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 앞에 있는 데모했던 사람들의 그 가치와 공로를 찬양하는 사람들이예요. ’아이고, 언니 덕분에 우린 다시 일하게 됐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어떤 원인은, 데모든 시위든 어떤 노동조합이든 항상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한다는 것은 회사 사정에 대해서 넓게 아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남 들러리 하다가 경찰이 오면 도망가기 바빠요.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 윤 집사님도 마찬가지지만 거의 4분의 3은 놀았죠. 데모하느라. 책 쥐고 나와야 소용없어요. 벌써 결정돼 버렸는데. 교문에 다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학생회에서 나와서 데모하자 하거든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데모에 들어갑니다. 그러다 경찰이 오면 우리는 다 도망가 버리죠. 그런 쪽이 노.. 쪽인데..
우리라는 것은 ‘나’ 하나가 등장하지 않으면 거기서 우리라는 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시고,’ 우리라는 개념은 특수한 한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언약의 완성에 대한 혜택을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얻어 걸려서 ‘누구십니까? 어르신, 고생하신 분이’ 라고 새삼스럽게 찾아나가는 그러한 관계로 엮여진 사이, 그게 바로 구약 시편에 그렇게 돼 있어요.
이렇게 봅시다. 우리 인간은 절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천국이란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런데 언약 속에 하나님 앞에 또 한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주’가 되시는 분인데 ;주‘가 되신 분이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이 땅에서 작업을 해 놓으신 거예요. 그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맨,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의 특징이 그래요. 작업에 얻어 걸린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반드시 ( ) 언약이 붙어요. 아브라함, 노아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새 언약, 전부 다 언약이 붙죠.
이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것은 처음부터 완성 자는 따로 있고 그 실시하는 모든 과정에도 사람은 배제시키고 하나님, 자기가 나서서 하는 거예요. 7살 먹은 어린 애가 엄마 설거지 도와준다고 옆에 서서 하면 엄마가 보면 같잖죠. ‘공주님, 숙제나 하세요.’ ‘엄마, 내가 할게, 내가.’ 오히려 설거지 해놓으면 두 번 세 번 또 일을 만들어 놓죠. 옷 세탁한 거 다 버리고, ‘그만 손 터시고 TV에 뽀뽀뽀나 보세요.’ 이렇게 밀어내는 작업, 이 밀어내는 작업도 그냥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 우리 공주님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면 안 됩니다.’ 밀어내는 작업, 그걸 ‘신부’라 하고 그걸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겁니다.
그럼 밀어내는 작업을 할 때, 중간에 어떤 사건은 지들이 행하겠다고 나온 사건이 아이 성 사건이었어요.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여리고 성 무너지니까 지가 한 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할게, 우리가 할게.’ 하다가 개떡 됐습니다. 지가 무슨 수로 태양을 멈춥니까? 어떤 철딱서니 없는 아들은 아들도 별수 없죠.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언약궤 앞장 세워서 여리고성 무너지니까 지가 언약궤 들고 와서 ‘ 내가 언약궤 들고 승리할게.’ 하다가 언약궤만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은 죽고 그 집안의 가문은 완전히 작살난 가문이 됐죠.
언약궤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해요. 그래서 언약궤 위에는 다른 이름은 들어가면 안돼요. 언약궤 위에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실체가 사람에게서 나오면 안 됩니다. 이름은 있는데 그 형식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에게서 나오죠.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관련된 사람은 없단 말이냐? 이거 설명하고 아브라함, 이삭언약 해봅시다. 요거 먼저 할게요. 아까 노아 뒤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노아 언약이죠. 그럼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이 있죠. 자, 왜? 노아 언약으로 바로 구원하지 않고 뒤에 추가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이 있느냐는 이런 문제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일곱 나팔 벗기는 것처럼 더 세밀해지는 거예요.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었으면 다 같이 은혜로이 감사해야 될 텐데, 노아 언약을 받아놓고 노아 가정에서도, 구원 받은 가정에서도 함과 가나안, 야벳과 셈,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언약을 무지개 언약으로 해서 온 대자연 세계에서 선인이나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런 언약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딱 집어서 ‘니가 구원 받았어. 다른 사람은 구원이 안 돼.’ 이렇게 딱 집는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할례언약이라는 겁니다. 할례언약! 할례언약은 일종의 문신 같은 건데 뭔가 새겨놓는 거예요. 조폭 같은 경우에는 이쪽에는 호랑이, 이쪽에는 독수리, 등에는 용, 배에는 하면 된다. 이렇게 문신하잖아요. 왜 그걸 글씨로 안 쓰고 문신으로 만듭니까? 안 지워지라고. 그걸 ‘영원성’이라고 하는데 언약의 영원함.
할례언약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겠다는 거, 그러면 그 장소가 어디냐 하면, 남자의 생식기 끝에다 문신을 시켜버리면 ‘니 핏줄은 영원히 구원되리라.’ ‘왜요?’ ‘내가 찜했으니까.’ 그거예요. ‘내가!! 내가 찜했다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행함 없이 주께서 찜했으니까 믿은 거예요. 뭘 통해서? 증거를 대라 하면, 할례언약 이예요.
하나님께서 몸에 문신 새기듯이 ‘내가 아브라함 자손을 영원히 구원하리라.’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명도 없었죠. 이삭 나오기 전에 어떻습니까? 세상에 아브라함에게 니 자손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 나이가 늙어서 자기 부인도 태가 끝나 자궁 경부 암인가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기를 못 낳아요. 요새말로 자궁 들어낸 것과 똑같아요. 애기를 못 낳는 거예요. 그래 이게 뭡니까? 無子, 없을 無자 아닙니까? 자식이 없는 거예요. 없는 자식에다가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 ‘니 없는 자식을 영원히 구원 되리라.’이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그게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멜기세덱과 똑같은 거예요.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뭔가 없는 게 있어요. 뭐가 있겠습니까? 언약이 등장하니까 생긴 거예요.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을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있음으로써 십자가란 새 언약 때문에 십자가가 문신처럼 십자가 문신 달고 다니라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가졌노라.’ 라는 십자가 흔적.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위해서 이 땅에 등장해야 될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나 있고 십자가 있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라는 것은 없는 인간인데 ‘봐, 생겼잖아.’ 그 모든 능력이 구원의 능력, ‘오직 십자가 피 은혜로 살았잖아.‘라고 그걸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등장한 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하나님의 피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이슬람교고 불교입니다. 육으로 할 수 있는 행함 끌어 모아서 적당하게 해서 천국 간다고 치자는, 모태신앙. 무슨 모태신앙이 있습니까? 신앙은 없어요. 인간은 신앙 자체가 없다니까요. 진짜 믿음이 있을 것 같으면 주의 말씀대로 해야 돼요.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도 옮길 것이요. 저 관악산, 청계산 저 멀리 있잖아요. 실시하면, ’산아, 내 뒤로 가 줄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부릉 부릉 시동 걸어서 산이 벌떡 일어나서 내 뒤로 척 가는 거예요. ’아, 오늘도 재밌는 일 했네, 이번에는 뭘 할까? 주께서 나무가 뽑힌다 했으니까‘ ’니가 조그만 믿음만 있으면, 나무가 뽑힐 것이다.‘
토지공사에서 주택단지 개발할 때, 크레인, 포크레인 아무 소용없습니다. 저 믿는 사람, 소망교회에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이 줄서서 ‘하나, 둘,... 열 나무씩 맡으면 돼요. ’나무야 뽑혀라.‘하면 쑥 뽑히고 심겨라 하면 심겨서 깨끗하게 택지개발 되는 거예요. 믿음하면 그런 믿음 이야기지, ’믿으면 병이 물러갑니다.’ 그런 것 말고 더 화끈한 거. 얼마나 화끈합니까?
마귀가 이야기하죠. ‘당신이 만약에 뛰어내리고 천사가 당신 발을 붙들면 사람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줄 것이다. 화끈하게 한번 기적을 보여 달라.’ 그때 주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예상 못한 없는데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있는 것에 대한 기적이 아니고 이 땅에 없는 것을 없는 것에 대해서 기적을 내리라. 그래서 생겨버리면 그것이 주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자신이어야 돼요. 우리자신!!! 내가 나는 평범한 척, 나는 청순 함 이런 것은 되지, ‘내가 하늘나라 사람, 이거는 말 안됩니다. 비록 모태신앙이고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뭐가 되도 그건 교회 직분일 뿐이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