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505요한계시록11장-(두 증인의 죽음)-14강a-(이 근호 목사) 제 14강a
요한계시록 11장은 두 증인의 이야깁니다. 축구에서 two top 작전이라 하죠. 앞에 선두로 두 사람을 보내는 거예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스가랴 4장에 보면 나오는 이야긴데, 그 두 사람 이야기 이전에 먼저 10장에 지난 주제가 뭐냐,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했죠, 지난 시간에 뭐라 했죠?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고 뭔가 우리 안에 자리로 터 잡고 있는 ‘ 너 좀 사용해야 되겠어, 미안하다, 내가 너를 사용해서 이 쓰디 쓴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어.’ 잠시 ‘너’를 차압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방부에서 어떻게 합니까? 민간의 모든 자동차나 그걸 징발하죠. 징발하듯이 입에는 다나 속에는 쓰게 돼서 ‘존재 바꿈’,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있는데 우리 몸은, 나라는 것은 나라는 몸 이미지에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전쟁의 안쪽에다가 말씀이 들어가 버리면 껍데기는 우리의 몸인데 속에는 그 껍데기를 사용하시는 주도권은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데 우리 몸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입에는 다나 속에는 쓰다.‘ 쓰다는 말은 사람은 단 것만 원하는데 ’어, 내 몸에서 왜 쓰지? 하아, 내가 원해서 들어온 요소가 아니구나,‘ 하는 거예요. 내가 원래 원했던 바가 아니고 나를 쓰시고자 하는 그분이 원하는 바가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나를 징발하죠. 나를 그냥 차압해서 쓰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11장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속에 들어온 말씀이 뭘까? 어떤 용도로 성도가 쓰임을 받을까, 어떤 스케줄이 준비 돼 있는가? 주께서 나를 ‘쓰시겠다.’ 하니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하게 됩니다. ‘주께서 쓰시면 말씀 한번 전하면 수천 명이 몰려오고,’ 멋있는 그런 것들을 염두해 두는데, 그런 것은 입에는 달지만 속에 들어가면 뒤바뀌는 쓴 것을 느낄 것입니다.
쓴 것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이런 거죠.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泳汰? 우리는 껍데기다. 속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 했죠? 그래서 이질적이기 때문에 쓰다. 쓴데 여기에 말씀이 들어왔죠. 책을 먹어라 했으니까 말씀이 들어왔죠. 이 들어온 말씀이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펼쳐지느냐 이게 궁금한 거예요. 궁금한데 여기서 잘 알아야 돼요. 이것이 하나의 환등기의 필름이라면 이 필름이 영사되겠죠. 쭉 영사되게 되면 비취게 되면 여기에 말씀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몸은 껍질이기 때문에 이 말씀세계에서 어떠한 입장으로 말씀세계에 관여하고 있느냐, 를 봐야 해요. 이것은 바로 죄인의 역할을 하면서 이 말씀세계에 관여하게 돼 있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 이예요. 구원 받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안 순간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될 필요가 있다? 없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공포, 특히 두려움과 공포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내가 얼마나 훌륭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반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남들 보기에 좋다 할지라도 속지마라, 주님 보시기에 너는 껍데긴데 껍데기를 이 세상에서 펼쳐보니까 너는 이러이런 식이니까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여기에 스크린이 펼쳐지는 겁니다. 쓰여 지면 그만 이예요. 우리는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쓰여 진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는 그 능력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렇게 펼쳐질 때 말씀의 내용이 스가랴 3장, 4장의 내용을 가지고 또 여러 가지 내용을 가지고 펼쳐집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쭉 펼쳐지면서 우리 두 증인은 죄인의 역할로서 여기에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 말씀이 펼쳐지는 요것이 어디로 가느냐면,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세계로 요걸 고대로 들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11장에 보면, 지시가 있죠. 10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라고 돼 있죠? 이 예언대로 이방인의 세계에 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잠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방인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 세계와 차이점은? 항상 차이점이 중요해요. 차이점이라고 물으면 양쪽 다를 알아야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복음을 압니다.’라고 나오면 ‘복음 아닌 게 뭐죠?’라고 물어봐야 돼요. ‘이런 것이 복음 아니고 이런 것이 복음입니다.‘라고 차이점을 이야기 해주면 양쪽 다를 아는 사람이 되는데, 그건 모르고 ’ 저는 복음 압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라면 그럼 ’복음이 아닌 것은 뭡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쨌든 간에 자기의 수치와 자기 구원 받고자 하는 그 욕망, 그것에 허겁지겁 달려들다 보니까 좋다 싶은 것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것은 어제 수요일에 설교했습니다만, 창세기 3장에 아담이 죄 짓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뭡니까? 자기 수치를 가렸죠. 피 가지고 가리고, 십자가 가지고 가리고, 언약 가지고 가리고, 좋다는 걸로 다 가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그 가린 것을 벗기죠. 피, 언약, 십자가, 이것은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고 그걸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겨보면 더 이상 ‘내가 나를 거쳐서 나를 구원하는 그런 수단은 우리에?허용한 적이 없구나.’하는 겁니다. 내가 이걸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시도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 해준 적이 없어요.
언약 안에서 구원 받겠다는 그런 시도 자체가 엉터리예요.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우리의 수치를 그대로 노출해야 되죠. 있는 것도 벗겨내시는 주님, 그냥 수치스러움을 그대로 우리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딱 등장시킵니다. 등장 시키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이야기는 그거는 이미 옛날이야기 돼 버리고 ‘주께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너는 구원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고 구원에 쓰이기 위해서 찾아온 거예요.
여기서 사명이 소유보다 더 큰 겁니다. * 사명❱소유 * 소유가 되려면 내 뜻이 있어야 되고 내 뜻을 끌어 모으면 이것이 나의 힘이 되어서 이것으로 구원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고, 소유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사명 이예요.
10장 11절 또 다시 안 읽어도 알죠? “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증거 해야 한다. 사명이죠. 사명은 내 소유의 바탕이 아니고 내 존재의 바탕이 아니고 어린양의 바탕위에서 사명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체 그림을 가지고 어디에 간다? 누구와 마주친다? 이방인 세계에 나가는 겁니다. 이방인 세계에 나가버리면 여기서 그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곧 지진, 두 대륙판이 마주치면 지진이 나오죠? 두 대륙판이 마주치면 지진이 나듯이 이질적인 것이 마주치면 그 안에서 이미 세상에 숨어 있었던 악마가 고개를 쏘옥 내밀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마귀는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좋은 친구고 훌륭한 사람에 인격자이고 다정다감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도 복음 전하니까 그 틈 사이에서 마귀가 쏙 튀어나오는 거예요. 심지어 부모한테 복음 전해도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자식 키울 정도로 훌륭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 구원 하겠다고 주제파악도 못 하고 복음을 전했더니만, 그 어머니가 복음에 대해서 악랄하게 저항할 줄이야 감히 생각도 못했죠. 어느 자식이든 자기 어머니에게는 천심 이예요. 천심은 하늘에 의지했단 말이죠. 그 어질고 어진 어머니께서 딴 것은 다 모든 것이‘내 자식 내 새끼’ 하는 것을 딱 한 가지 복음만은 전하지 마라. 집사님도 그런 경험 많죠? 예, ‘딴 건 다 좋은데 복음만은 제발 나한테 전하지 마라.‘
두 대륙 간에 충동해서 찌지직~ 지진이 일어나죠. 그것이 왜 그러?하면 이 안에 있는 쓰디 쓴 것이 빠지고 말씀이 없이 껍데기만 가버리면 이방인들은 우리와 대화가 잘 돼요. 왜냐,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저쪽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 우리 껍데기는 별게 아니에요. 우리 껍데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저쪽 인간도 누구 출신 이예요? 아담 출신이잖아요. 아담 출신이 대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되죠. 다 자기 몸 위주니까, 편하면 진리고 불편하면 진리가 아니고. 이거는 모든 것이 대화가 안 될 수가 없죠. 나한테 베풀어주면 너에게 이득을 줄게, 오케이~ 뭐 성사 안 될 게 없어요.
집사님도 대전에 가서 배웠어요. 물건을 팔 때는 반드시 물건의 값어치를 ‘이 물건을 들이면 그만큼 이득이 남습니다.’ 라고 설득을 시키려면 이야기를 해야죠. 그게 얼마나 중요해요. 이 물건을 이걸 왜 들여야 되는가, ‘들여놓으시면 당신에게 이런 이득이 있습니다. 안 들이면 당장 손해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득을 하는 그것이 판촉의 기본이라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대화가 되는 거예요. 당신한테 이익이 되겠다는데 대화가 다 되죠. 그런데 무슨 지진이 일어납니까? 대화가 잘 통하는데,
문제는 이 껍데기 속에 뭐가 들어온다? 본인이 원치 않는 쓰디 쓴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니까 그때부터 이방 세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의 말은 다 되죠. ‘어머님, 천국 가시면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천국 믿을게.’ 다 이렇게 나오죠. ‘어머니 천국 가시면 이런 이득이 있고 영원히 죽지 않고 아픈 것도 없고 이런 소득이 있습니다.’ 그러면 ‘ 내가 한번 믿어 볼까?’ 이런 이야기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어머님은 예수님을 섬겨야 됩니다.’ 평생 동안 자기만 섬기는 것이 아담의 속성인데, ‘나 말고 누구를 또 섬겨? 난 나 섬기는 것도 못 섬겨서 힘든데 거기다 예수를 섬기라고? 내가 왜 섬겨야 하는데? ‘ 예수 섬기라는 것에는 딱 질색이죠. 왜냐,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는데 자기 말고 다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니 대화가 안 되죠.
자, 그렇다면 이 쓰디 쓴 말씀이 이방인의 세계로 갈 때는 결국은 대화해서 꼬시라고 간 것이 아니고 이건 심판용으로 이미 세상은 끝났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파견된 겁니다. 그러면 그 통보하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니까 어렵기 때문에 미리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속에 있는 뻬맛?아까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우리 안에 누가 들어온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죠.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죠. 예수님은 ‘죽음’을 말하는 겁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분이기 때문에 항상 시발점이 십자가 죽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자기가 여기 ‘있음’ 있다는 겁니다. 오늘도 어린이날이잖아요. 어린이날 애들 데리고 왜 놀러 갑니까? 애가 있잖아요. 내 자식이 없으면 못 가는데 애가 있다 말이죠. 그럼 내 부모가 여기 있고, 나는 부모고 너는 자식이고, 이 ‘있음’을 더 더욱 더 행복하게 ‘있음’을 하기 위해서 애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가고, 맛있는 저녁을 사 먹이고 하는 겁니다. ‘있음’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방인의 세계는 ‘있음’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예수님은 ‘있음’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 새로운 ‘있음’ 새로운 부활의 세계를 가지고 왔다 이 말이죠. 부활의 세계가 그냥 저 ‘있음’에서 이 ‘있음’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죽음’을 통해서 부활되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때에는 반드시 이 과정을 빼놓지 않고 필수 코스로 이걸 경과해서 저쪽(이방인의 세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였잖아’ 이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세상아, 너희들이 나를 공모해서 죽였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심판자 손에 죽어야 돼,’ 라는 소식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겁니다. 왜, 비로소 그게 내가 미처 몰랐던 내 본연의 모습, 우리 본성인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그 죄의 진의, 죄의 진짜 본질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주 되게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 빼고 내가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느냐, 그런 문제로 모든 것이 결말이 나버렸어요. 마귀, 귀신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야고보서에 나오죠?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두려워 떤다.’고 돼 있어요. 귀신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욥기에 보면 뭐가 나와요? 사단과 하나님이 대화하죠. 스가랴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 앞에 좌정해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악마로서 대하는 게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된다 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나사렛 예수한테 종속돼야 됩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nbsp;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는데, 왜, 우리가 엄연히 여기 ‘있음’인데 이 ‘있음’이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하고 악막 공모한 게 뭡니까? 이제는 우리가 종속되지 말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같이 맞먹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있음은 하나님이 있게 한 이 존재하는 걸 가지고 왜 이걸 나사렛 예수에게 종속돼야 되느냐 말입니다.
선악을 알면 우리가 알아서 자립적으로 자존할 수 있는데, 결국은 모든 귀신과 악마는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에 되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죠. 그건 마귀 종교죠. ‘나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항상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요. 자기(예수님)를 우회해서 자기를 비껴서 하나님께 갈 수가 없어요.(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내가 예수님 가시는 그 나라에 가겠다.’ 하니까 가지를 못해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지, 인간은 상대를 안 하시니까, 그게 피조물로서 그게 싫은 거예요. 악마도 싫고 인간도 싫어서 둘이 합작해서 저것만 먹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따먹지 마라’한 것은 하나님이 신에 대한 하나님 스스로 자기 허점을 드러낸 거라고 본 겁니다. ‘너가 따먹지 마, 너가 만약에 따먹으면 신처럼 될 까봐 겁나서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거야,’ 라고 누가 해석했습니까? 마귀, 뱀이 그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숨어있는 내막을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약점을 노출시켰으니까 이참에 우리가 거기에 구애받지 말고 이참에 저걸 따먹어서 우리고 같은 하나님이 돼 버리자.‘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뭉개버리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 그걸로 만족하는 상태로 들어가?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 교회 같은 경우는 기독교가 아니고 하나님 교예요. ‘하나님 아십니까? 아이쿠, 아세요? 구원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죽어서 천국 갑니다. 죽어서 하늘나라 갑니다.’ 지금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이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만 씻어주고 빠져버린 사람 이예요. 죄 씻음 받았으니까 예수님을 상대하지 말고 직접 하나님을 상대 하세요. 이게 악마의 품성에 아주 딱 들어맞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이방 세계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무슨 사건을 부각시키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부각시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 하나 더 첨가하면 문경 채석장 이예요. 문경 채석장에서 어떤 분이 십자가 진 것 알죠. 참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을 쓰디 쓴 말씀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 잘 전하면서 자기 팬들 많이 확보해서 유명인사 돼서 유명한 단상에서 ‘이렇게 돌에 맞았어.’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죽게 하시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반복성’ ‘예수그리스도가 너희 죄로 인하여 죽었다.‘ 그때 인간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죽고 난 뒤에 태어났습니다.‘ 이럴 수도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방인과 성도의 만남의 틈새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그 이방인 세계에 뭐가 이미 작용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어두운 악마가 이미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관할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니까 진짜 예수님의 쓰디 쓴 말씀이 있는 사람을 그들과 마주치게 해서 또 다시 십자가 사건을 벌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봐, 니 의지가 아니지, 니 맘이 니 맘이 아니야, 니 영혼이 니 영혼 아니야. 누구한테 예속돼 있어. 아주 장악돼 있어 어두운 세계에.’ 어둡다는 것은 기존의 악하다는 의미, 악하다 선하다는 기준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에 대漫?인정치 않는 악함이죠. 예수님이 등장 안 하면 전혀 악하지 않아요. 다 점잖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교양적이고 경건하고 착하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 그런데 그 사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잖아요. 한둘이 아닙니다. 살인자예요. 그래서 ‘살인자요 폭행자요. 그런 나를 창세전에 예정하사 하나님의 사도로 세웠다.’ 그것은 본인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역할, 자기가 구원 받아도 주께서 다뤄야 될 사명!! 죄인 중에 괴수를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죄를 더 지은 게 아니에요. 왜냐, 다 같이 악마의 공중권세 잡은 자에 속해서 진노의 자녀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등 없이 니나 나나 다 똑같은 뱀 이예요. 뱀!! 지난 수요일 어제 이야기 했듯이 동창회 한 100명 모였으면 뱀 100마리 모였다고 생각하면 돼요.ㅎ 다 같이 뱀 이예요. 그 중에는 순한 뱀 있고 이쁜 뱀 있을 거예요. 자기 잘 닦는 이쁜 뱀, 착한 뱀도 있는데, 본인이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 아느냐, 본인에게 들어온 쓰디 쓴 이질적인 말씀 때문에 복음을 전했더니만 졸지에 완전히 싫어버린 바 되었다. 또 다시 십자가의 설움 받는 그런 슬픔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단순히 생각하면 편안히 생각하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참된 의인이고, 참된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하게 성령 받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소위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들과 지진 판이 마주치는 가운데서 숨어있던 인간을 지배했던 악마가 그 모든 정체를 드러낸 거죠. 그 십자가 사건을 항아리에 담았다고 칩시다. 항아리에 담았는데 이걸 봉인해 놨어요. 봉인(도장)을 딱 떼는 게 7째 인이고, 떼면서 통보하는 것이 7나팔이고 요걸 갖다 부는 것이 7대접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항상 십자가 사건을 딱 저지르면 ‘됐어, 하고 봉인하는 거예요. 그게 펴지지 않아서 사도요한이 우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왜 우느냐 하면요, 본인이 밧모 섬에 귀양 온 것이 자기 속에 든 쓰디 쓴 말?때문인데 이 말씀이 활짝 펴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앞에 봉인된 책자가 오니까 이걸 자기 역할대로 펴서 공개해야 되는데 이걸 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의 자손이 되는 예수님이 와서 봉인을 뗀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데 이걸 11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 대신에 ’성전‘이라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성전 이야기 하겠습니다.
성전이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11장 2절에 나오죠. 성전에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반복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보통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반드시 세상에 있는 인간들, 이방인들에게 다가갈 때는 그냥 부활하신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뭘 앞장세운다? 자기가 통과했던 이걸 통과해 줘야 이쪽 이방인들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하는데, 앞장세우는 여기의 역할을 자기가 성령 받은 성도에게 two top 처럼, 두 증인에게 시키는 거예요.
두 증인!! 그럼 세 증인이 아니고 네 증인이 아닌가? 두 증인은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라 했죠? 스가랴에 나오는 두 증인을 세움으로써 이 증인들이 뭐를 실패하느냐 하면, 모든 말씀을 지금부터 말씀이 증인들이 있음을 말씀으로서 대변해주기 위해서 스가랴를 동원한 겁니다. 꼭 두 사람이여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성도를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두 사람이냐? 이것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이 대표로 해서 보여줘서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같은 말씀 구조아래 있는 사람도 이 두 증인의 신세와 똑같은 운명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수제비 덩어리를 다 떼면 떼서 넣은 수제비나 남아 있는 수제비나 질이 같잖아요. 그걸 딱 떼는데 그걸 스가랴를 가지고 인용하신 겁니다. 자, 여기서 성전 이야기 나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구조가 이렇게 돼 있어요.(동영상으로 그림 참조하시면 좋을듯합니다.) 성전 구조가 여기는 요렇게 되고 요렇게 됐는데 요게 100미터가 안 돼요. 그런데 제단까지 합하면 100미터가 됩니다. 이쪽은 50미터가 되는데, 요 성전 제단에 뜰이 있어요. 요 뜰이 제사장의 뜰입니다. 여기는 회람들이 있어서 작은 방들이 3층으로 돼 있고, 이 주변을 넓혀서 이만큼 뜰이 있어요. 이것이 이스라엘 남자들 뜰이 있어요. 뜰이라 하는 것은 한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요기까지 들어올 수 있고 제사장 뜰에는 못 들어가는 거예요. 또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여인의 뜰입니다. 여자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동쪽에 문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거보다 훨씬 넓은 뜰이 있습니다. 이 넓은 뜰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 자체가 결국은 뭣을 보여주느냐 하면, 요 뜰에서 요 뜰로 넘어가지를 못하죠. 못 넘어간다는 것은 그 경계선 하나마다 척량이란 말은 더 이상 설계할 때 설계 자체에서 극복될 수 없는 턱, (문지방, threshold) 을 하나님께서 턱을 준비한 거예요.
여인의 뜰, 이스라엘 뜰, 제사장 뜰은 구분하지 않고, 여기서 1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방인의 뜰을 강조했죠? 결국 성전에서 이렇게 구분한다는 것은, 여인, 이스라엘, 제사장, 고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요거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요걸 ‘거룩’이라 보고, 이 바깥 전체를 비 거룩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것을 신약 성경에 와서 설명을 하면 이런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 볼게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어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라 했습니다. 다른 예수가 있을 것 같으면 여기 참 예수가 있을 것이고, 다른 복음이 있으면 참 복음이 있고, 다른 성령이 있으면 진짜 성령이 있을 것 아닙니까? 요 차이점을 알아야 된다 말이죠. 요 차이점 할 때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 보면 여기에 사단이란 용어가 나와요. “사단의 일군이라” 지금 이것이 그냥 예수 전하고 그냥 복음 전하고 그냥 성령 전하면 이것은 뭐가 빠진 상태입니까? ‘사단이 누굽니까? 악마는 어떤 존재입니까?’ 라는 게 빠지죠.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럼 알 필요 없이 내가 전한 복음만 받으면 어디에 간다? 구원 받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고게 바로 가짜 복음이라는 겁니다.
사단?악마로 언급하지 않고 악마를 집어넣지 않고 인간에게 어떤 유리한 거, ‘당신 이리하면 유익입니다.’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전부 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설교자, 요새 말로 당회장이죠. 당회장을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악마의 사단이라 봤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사도바울이 증거 한 교회에 왜, 당회장, 설교자가 악마의 일군, 악마의 하수인이 왜 들어갔느냐? 그게 들어가 줘야 참 예수, 참 복음, 참 성령이 오히려 부각이 되는 겁니다.
'악하기 때문에 세우신다.’ 이겁니다. 악하기 때문에!! 악마기 때문에 목사로 세운 거예요. 이런 소리가 얼마나 시원하게 들립니까? 이게 사실 이예요. 목사 시험 볼 때, ‘복음을 왜 전하겠어요?’ 이런 사람 절대 안 세우거든요. ‘1년 만에 300명 모으겠습니다.’ 이러면 세운다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기 때문에 그 목사가 세워져야 돼요. 악마기 때문에 그 대다수가 부흥돼야 돼요. 악하기 때문에 번창시켜 줘야 됩니다. 호세아 보면 나오죠. 무성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죠. 번성할수록 더 악을 저지른鳴?나오죠. 번성할수록 악을 저지르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그들이 번성하고 축복 받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손쉽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혜택이 있습니다. 이 혜택이란 말을 해야 되는가 모르겠습니다.ㅎ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 주님이 당했던 수모가 처처에 곳곳에 자주 일어나는 결과를 낳게 되죠.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밖에 모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무슨 수를 다 쓰죠. 그 수가 뭐냐 하면, 악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교회는 부흥돼야 되고 번창돼야 됩니다.
이번에 문경에서 50대 남자가 십자가 달려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첫 번 느낀 것은, ‘저것이 행함이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느냐 말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여의도에 4중 복음이 뭔지 알아요? ‘여러분, 이런 거 이런 거 있으면 믿음 있습니다.‘라고 확인시켜 주는 게 4중 복음 이예요. 방언하고 병고치고 복 받고 장사 잘 되는 것, 이런 사람이 복 받음 사람이라고,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기 몸을 동원해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이방적인 욕망, 그 욕망을 들어줄 때 그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쓰디 쓴 말씀을 먹고 들어간 사람 같으면 어떻게 돼요? 튕겨 나오겠죠. 그 튕겨 나온 그 사이에서 성경대로 사단의 일군이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대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사단의 일군이 들어있죠. 사단의 일군이 누군지를 확인하는 차에 우리를 주께서 보내는 겁니다. 보내서 복음을 전하면 튕겨 나오죠. 사단의 일군인지를 안다 말이죠. 튕겨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공간, 지점이라고 본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합니다. 지금까지도 어려웠지만 쉽다 치고 좀 더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어려운 거 해야 돼요. 원치 않는데 할 수 없어요. 한번 봅시다.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그 다름에 십자가죠. 그런데 이 세 군데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공간, 한 장소로 봤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특히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 이 한 장소 한 공간을 ‘한 순간’으로 본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려요.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고 계기를 ‘사건’이라고 봅니다. 쉽게 말해서 블랙홀이라 할 때, 처음에 빅뱅, 우주가 폭발할 때,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는데 그 입자들이 터져 나오는 입자들이 퍼지면 그게 공간이고 그 입자들이 날아다니면 그것이 시간이 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먼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데 시간과 공간이 없죠. 먼저 시간과 공간? 먼저도 있어야 하는데 먼저도 없을 때는 없어요. 서울 이예요? 송파구예요?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없는 게 없으니까.
없다는 게 뭐냐 하면 현재 이방 세계를 이해를 해야 제 말을 어렵다 하지 않아요. 이방 세계는 전부 다 ‘있음’의 세계예요. 있음의 세계에서는 시간은 맨 처음부터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있음과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이것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철칙이고 진리입니다. 남자 50 같으면 49없는 50이 어디 있습니까? 해마다 난 50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왜 그래요? 40대가 없으면 50대가 없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그 있음이 계속 있음으로 가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 수련회에 디모데 하지만, 디모데전서에 보면, 아주 어려운 대목이 나와요.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이 나와요. 아~ 학자들이 그거 푼다고 바빠요.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지, 어떻게 애 낳는다고 구원 받느냐“?? ’그럼 산부인과 가서 애 낳는 사람은 다 천당 갈 건데?’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걸 설명해 드릴게요. 여인이 하나잖아요. 하나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다른 존재가 나왔죠. 아기라는 다른 존재가 나왔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여자가 하나였는데 여자한테 또 하나의 인간이 있죠. 그러면 몇 명이죠? 두 명 되죠. 그러면 새로 생긴 아기는 어디서 생긴 거예요? 우리는 여자 몸에서 나왔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이걸 가지고 뭐로 보느냐 하면,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항상 하나님의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하면, ‘실례하지만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구원 파에서 하는 거죠.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날짜를 대야 돼요. 1985년 7월 6일 오후 2시 40분에 구원 받았습니다. 날짜를 대는 구원은 그 바탕이 뭡니까? 역사라는 바탕 위에서 나온 거죠. 있는데서 있음이 나왔죠. 구원 받은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그거는 가야산 두 번째 강의할 때, 그때, 이미 가야산이라는 게 있잖아요. 있는데서 있다고요. 그러면 못 가면 기도원 쫓아간다고요. 가서 그때 그 감회를 다시 한 번 맛보기 위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시 그때의 은혜로 다운 되어 있는 신앙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런데 그러한 행위 자체가 결국은 나라는 있음을 더 있게 하기 위한 이방적인 사고방식에 해당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있음에서는 있음만 나오지, 아무것도 없는데서 나올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데서 둘이 나왔다는 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자체를 태어난 아이를 여자를 통해서 없음이 비로소 있음으로 새롭게 등장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구원이란 개념은 마치 애가 태어난 해산과 같은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애를 해산함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은 그 여자가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됐다는 이 말입니다. ‘아~ 이거구나, 내가 애 낳다고 애가 내 소유가 아니고 주께서 주셨구나.~! 마치 내가 저처럼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구원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아는 계기를 주신 것처럼 고렇게 할 때 여자가 앞에 비록 그 주변의 이야기는 뭐냐,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고 남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남자한테 말 듣는다고 해서 전적으로 남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여자는 여자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여자 특유의 구원의 징표를 갖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그 주도권에 너무 부러워하거나 탐내지 말라고 오늘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다면, 그렇다면 뭐가 어려우냐 하면,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잠식되어서 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사건으로 인하여 이것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너는 왜, 시간과 공간밖에 몰라, 부정당하는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할게요. 만약에 ‘내가 어제 십자가 은혜를 받았다. 이제는 내가 죄를 안 지으면 의인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또 할 수 있죠. ‘나는 처음부터 원래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의인되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다. 은혜 받았으니까.‘라고 했다 말이죠. 했는데, 오늘이 되었어요. 오늘 누구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갑자기 ’어제 나는 은혜 받았으니까 오늘도 은혜 받은 사람 맞다.‘는 있음에서 있음을 끌어 모으는 본성을 또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그것을 벗기고 새롭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약에 ‘어제 뵉?받았는데, 오늘도 은혜 받았으니 구원 받은 사람 맞다.‘ 할 때에 갑자기 가정에 우환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 하나님이여, 제가 은혜 받은 사람 맞는데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주님의 은혜가 있어도 갑자기 있음에서 지키려고 이것을 사수하려고 할 거다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있음에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부활薩?때문에 반드시 부활은 뭘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 죽음을 앞장 세워서 그걸 통과해서 일이 벌어지듯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현재 이방적인 그런 우리 껍데기와(우린 아무리 구원 받았어도 껍데기는 이방 적 이예요.) 이방적인 사고방식, 돌아서면 내 것이고 돌아서면 내 소유고, ’나 은혜 받았단 말이야. 나한테 함부로 까불지 마, 나 은혜 받았어.‘ 라고 또 자기주장을 되풀이해요.
은혜 받으면 ’나는 그래.‘ 라고 죄인이면서 나를 근사하게 여기는 우리의 껍데기의 본성은 계속돼요.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서 시간과 공간을 추월해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내죠. ’아! 어제 은혜를 받았는데 몰랐던 은혜를 오늘 새로 받네.‘ 어제는 몰랐던 은혜를 오늘 새로 받는 거예요. 그럼 오늘 은혜 받는 것은 뭐가 돼요? 껍데기가 돼 버리고 말죠. 말씀이 우선이지, 너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너는 계속해서 껍데기로 쓰여 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 속에 포함이 돼 있는 사명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아까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 하는 그 십자가를 미리 알면 겁나서 우리는 못 갑니다. ’아이쿠, 주여, 왜 이러십니까? 가만히 있으렵니다. 괜히 나대다가 죽는다.‘ 고 겁내는데 이건 하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이건 겁을 내는 자체가 뭐가 됩니까? 또 다시 이방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회수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주여, 저 오늘 은혜 받았으니까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전도한다든지 이따위 소리 하지 마시고 나한테는 믿음도 없습니다.‘라고 빼죠. 그러다가 소 뒷발질 하다가 쥐 잡듯이 그러다가 여러 사람 전도하고 그래요.ㅎ 여러 사람 전도하고 본인은 욕을 먹고, 이와 같이 시공간 문제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다음시간에 계속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