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602요한계시록11장-(아들 해산)-16강a-(이 근호 목사) 제 16강a
자, 요한계시록 12장을 보게 되면 초반부터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문장이 나오죠.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해는 영어로 Sun, 태양을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사람이죠? 여자는 사람인데 사람이 뭐하고 결합이 돼 있느냐 하면 해와 달과 별과 결합이 돼 있어요. 결합이 된 존재가 등장한 겁니다. 우리보고 어떻게 해석을 하란 말입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본래 사람하고 해, 달, 별하고는 결합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뭣과 대립관계에 있느냐 하면 자연과 대립관계에 있습니다.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사람이 자연을 지배하도록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과 자연이 뭔가 한 덩어리로, ‘발밑에는 달이 있고 위에는 해를 입고 머리에는 열 두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렇게 할 때, 이 자연이 사람과 결합이 된다는 것은, (잘 들어 보세요) 여기 사람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숨어있는 ‘제 3의 요소’가 있는 겁니다. 제 3의 요소가 사람과 자연을 결합 시킬 수 있는 공간을, 그 자리를 새롭게 형성하는 거예요. 그 제 3의 요소를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안 돼요.
그리고 사람과 자연을 결합시키는 여자와 해와 달과 별을 결합시키는 제 3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 뭐가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가 또 설명이 안 돼요.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게 적그리스도라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마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적인간이겠죠.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반대하는 거예요. 사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느냐하면 제3의 요소에 의하면, 제 3의 요소가 자연과 사람을 다 장악해야 되기 때문에, 제 3의 요소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자연을 필요로 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그냥 뿔 달려서 나타났습니까? 뭐로 나타났습니까? 사단이 뱀으로 나타났다는 말은 제3의 요소는 형체가 없는 거예요. 형체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이쪽에서 다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데서는 그냥 영물 이예요.
천사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천사는 그때, 그때 달라요. 어떤 때는 남자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중성의 모습으로, 그래서 제 3의 요소가 숨어있다는 것은, 곧 뭣을 뜻하느냐 하면 그동안 사람들이 자연 세계와 더불어서 살아왔던 이런 rule, 법칙, 규칙이 제 3요소에는 통한다? 안 통한다? 일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서 이 룰을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문법 이예요. 문법이고 이게 문자적 언어의 세계입니다. 이 언어의 세계로서는 영적 세계를 해석할 수가 없어요. 고로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은 인간의 나라의 확대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의 나라의 확대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의 나라를 멋있게 꾸며도 그것은 이름은 천국이라, 극락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뭐냐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이 분포돼 있는 거예요. 이건 천국이 아니고 그냥 인간의 세계입니다.
교회라 할 때, 교회를 설교할 때는 반드시 교회를 해체시키고 깨는 설교를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교회는 시작점이 아니고 결과물이거든요. 교회가 결과물로서 교회는 사람이 아니고 제 3의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제 3의 요소가 인간의 행함으로 가려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출발에서 다 알아버리면 여기서 천국의 내용이 전부 다 인간들이 익히 아는 내용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천국이라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인간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히 천국을 시도를 하다 보니까 여기에 뭐가 집결되느냐 하면, 행함이 집결돼요.
이걸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 예를 들게요. 여기 계란이 있는데 삶은 계란이라고 봅시다. 삶은 계란이니까 바깥에는 딱딱한 껍질로 돼 있죠? 안에는 삶았으니까 흰자, 노른자로 돼 있는데, 이걸 먹을 때 어떻게 먹어요? 이 껍질을 벗기고 먹어야 되겠죠? 마치 상처 났을 때 조금 지나면 딱지가 생기잖아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말랑말랑한 윤기 나는 속 달걀을 맛있게 먹잖아요.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의 결과물로 주어지고 이 교회에서 인간들이 뭐를 자꾸 밀어 펼치느냐 하면 자기 행함이 펼쳐지겠죠. 행함이 펼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 천국가고 스스로 구원을 기대하기 때문에 교회서 하는 자기 행함이 어디서 집결되느냐 하면, 제일 마지막에 껍데기를 장식을 해요. 지난주에 ‘하나님의 피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됐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라고 했던 고 생각이 일주일이 지나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것이 나의 지식 화 되어서 껍질을 장식하게 돼요.
그러니까 지난주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어느새 내가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지?’ 라고 해서 자기만의 행함을 통해서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거야,’ 왜? ‘나는 주님의 피로 구원 받는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돼요. 이렇게 되면 뭐의 결과물 이예요? 한주 동안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교회가. 자기 자신의 작품이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본인도 본인의 작품이 되는 거예요. ‘한 주일동안 믿음 유지한다고 애 먹었다, 얘.’ 자기가 자기보고 칭찬을 늘어지게 하죠.ㅎ '한 주일동안 지난주에 은혜 받는다고 고생 많이 했지?‘ 자기가 자기를 자찬하면서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그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유명한 용어가 뭐냐 하면, ’행함은 있는데 성령으로 행하는 행함은 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성령은 누구로 통합니까?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로 통하는데 갑자기 성령 받았다고 우기면서 뭣과 끊어졌습니까? 십자가와 관계가 끊어진 채 성령 받은 ‘나’가 돼 버려요. ‘성령 받은 내가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 행함이라.’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하기를 성경을 보면, 우리의 보통 육적인 행함도 있지만 성령 받은 행함도 있는데 이걸 부정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와 성령이 어느새 끊어져 버렸어요.
그러면 이 성령안의 행함이니까, 결국은 성령 받은 행함을 주시하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본인 이예요. 본인, 본인이 ‘나는 성령 받은 행함을 할 자격이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죽어있던 표면이 살아서 톡톡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교회든 뭐든 간에 교회가 제 3의 요소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평소의 습관이 뭐냐 하면 ‘나 인간은 여기 있고 인간 주변엔 자연물이 있고 그 자연인 환경이 있고, 인간과 자연, 둘 다 눈에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잘 다독거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그게 하나님에 대해 영예가 된다고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제 3의 요소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과 자연, 인간과 자연이니까 이걸 가정이라 할 수 있고 사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 ‘내가 자연과 환경을 다스리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예수는,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 이렇게 바깥에 세워져 있죠. 점점 성경에서는 제3의 요소는 끊임없이 이러한 인간을 자연과 더불어서 이걸 결합시켜서 이 전체를 제3의 요소의 결과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방금 한 이야기가 상당히 어렵죠? 이걸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쉬운 말인지 모르지만 적어 볼게요. ‘인간은 더불어 변한다.’ 이게 굉장히 쉽죠?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누구든지 결혼할 때 내가 아내한테 잘해주겠다고 하잖아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이렇게 있잖아요. 남자가 말합니다. ‘나는 결혼하고 난 뒤에 저 여자를 손에 물도 안 묻히고 눈에서 눈물도 안 나오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겠다.’ 라고 할 때 그때 생각했던 그 여인은 모르고 지가 상상한 여자를 가지고 여기다 일방적으로 거기다 입힌 거예요. 내가 아는 여자는 이런 여잔데 그런 여자 같으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다. 이렇게 장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만나고 난 뒤에 남자의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변한다고요? 혼자 변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변합니까? 더불어 변하죠.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더불어 변하는 거예요. 인간은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저 여자는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장담하지만 ‘당신이 거기에 대해서 뭘 알기나 알아?’ 결국은 만나보면 나는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아내를 만나고 난 뒤에 그 마음 자체가 이게 수용당하는 입장에서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이게 어디까지 변하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변하는 겁니다. 계속 멈추지 않고 변동,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더불어 변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변한다 말이죠. 그럼 어디까지 변하는가? 그 종착점은 어디냐? 그건 성경에 나와 있죠. 바로 성경에서 묘사한 고 지점이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변화될 때 마지막 종착점이 그 지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너는 하늘의 해를 입고 발아래는 달이 있고 니는 열두 별을 쓸 면류관에 해당되는 사람이야.‘ 라는 그 지점까지 우리가 도착하겠죠. 어떻게? 변해가면서 그 지점까지 오는 거예요.
성경에 이런 말씀 있죠. ‘인간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 같다.’ 우리가 그걸 미리 안다 할지라도 우리는 머리 깎고 산에 가서 도 닦는다고 아는 게 아니고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처박혀서 부지런히 다투고 싸우고 경쟁하고 사기 당하고 사기치고 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역시 인간의 모든 영광은 풀이야.’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은 ‘말씀’이라는 제 3의 요소에 의해서 장차 딱 그 지점에 표적에 딱 들어맞는 겁니다.
총 쏠 때 이렇게 10점, 9점, 8점 있잖아요. 눈이 나쁜 사람은 과녁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또 술 한 잔 마시면 여기, 저기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면 10점 만점에 딱 고정되죠. 가늠 새가 딱 표적을 맞히잖아요. 말씀은 아무 변한 게 없는데, ‘우리가 괜히 오해했어. 우리가 괜히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고 주께서 짜 맞추는 그 짜 맞춤을 모르고 지는 안다고 하는데 막상 어떤 주변의 상황과 변화 속에서 우리가 알았다 하는 그것이 깰 때 우리는 낙담하고 절망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주께서 안 봐주고 안 받쳐준다’고 하는 거예요. 주께서 안도와 준다는 겁니다. 십자가 믿고 싶었는데 전혀 못 믿도록 주께서 했기 때문에 책임을 주님이 져야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 힘으로 못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은 인간은 육인데, 육이 자연이란 육을 만나서 영적 사람으로 정 조준되는 그 지점에 가게 하시는 것은 누구 몫이다? 우리의 몫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성령이 오시는 근거가 뭐냐, 바로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 십자가에서 나오는가 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말씀의 완성’이예요.
말씀의 완성에서 성령이 나왔으니까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성령께서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는데 성령께서는 우리의 빌 바를 알잖아요.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는데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면서 ‘아이쿠, 답답아. 이 답답아,’ 하면서 우리 대신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작 있어야 될 그 자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게 니 자리야.’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쏠리게 하고 십자가에 막상 들어가 보니까 거기는 말씀 완성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우리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성경 해석이 그 십자가 안에는 이미 그 안에는 정답들이 다 나와 있어요.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게 정답 이예요. 그 정답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느니라.‘가 정답 이예요. ’다 이루었다‘ 우리는 뭘 이루었는지 몰라요. 아직까지. 몇 개는 꼽을 수 있는데 몇 문제인지 몰라요. 우리는 그저 개념상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용서했다는 건데, 실제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평생을 지내야 됩니다. 평생을 지내면서 우리 나름대로 육적인 오기와 고집 같은 것을 부리다가 그게 깨지면서, ’이거는 죄가 아닐 거야.’라고 우기는 그것까지 죄라고 깨지고 ‘이거는 의로운 행동일 거야.’ 이건 아마 성령에 의해서 나온 행함이라고 우겼던 그것도 결국은 그것도 하나의 교만이라고 드러나는 거죠.
어떤 것도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 행함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있다면 성령의 행함밖에 없는데 성령의 행함이라는 것도 우리의 행함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오히려 성령의 행함으로만 계속해서 넘겨지는 그런 자기 부인의 행함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 니 한번 두고 봐, 니?지키나, 예수님 내가 지키나.‘ 누가 지키나 보자 이 말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프로그램이 있는데, ‘나는 목사다.’라는 프로그램처럼 ‘나는 성도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합시다. 그래서 한주마다 성도답지 못하면 탈락하는 쪽이 있다고 봅시다. 7등하는 성도는 탈락하는 게임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나는 가수다.’ 할 때 6등까지는 괜찮아요. 7등하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가수들이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긴장돼서 노래하겠어요? 안 떨어지려고 창피 안 당하려고. 만약에 ‘나는 성도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나는 성도다’라는 프로그램에 스트레스나 긴장감을 가지고 여기 참여한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 사람 탈락자입니다. 그게 바로 육적으로 할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과 오늘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극대 극의 차이가 나는 점이 거기 있어요.
가장 못한 자가 세리와 창기죠. 세리와 창기가 항상 합격 이예요. 그런데 거기서 잘 난체 하면 ‘나는 성도다.’ 게임에서 탈락 이예요. 평소에 얼마나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세리와 창기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행세, 그런 일한다고 얼마나 놀렸겠습니까, 예수 믿었으면 그런 직업을 포기해야지,’ 얼마나 놀렸겠어요? 그럼 본인은 뭡니까? 본인은 그만큼 창녀 짓 안 하더라고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고 정말 어려워도 딴 직업은 가지되 매춘부는 안한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본인들은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주여 부도나도 매춘부는 안 되게 하옵소서.’ 얼마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천국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죠. 긴장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누굴 믿는다? 말은 예수를 믿죠. 누굴 믿어요? 자기 행함을 믿는 거예요. 뭔가 성도다운 행함이 나올 수 있다. 나도 있습니다. 나도 성도라는 티를 낼 수 있는 행함이 있습니다.‘ 라고 계속 그걸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떨어지지 않도록. 자기 행함을 보고 확인하는 거예요. 자기 행함을 보고 ’나는 성도 맞아.‘라고 확인한다는 그것은 바로 제3의 요소가 아니고 육이 뭘 만났다? 육이 자연, 환경을 만나서 만들어 낸 거예요. 만들어 낸 가짜 천국이고 가짜 구원이죠. 가짜 신앙인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이런 표현 하나가 여자에게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별이 있다는 표현 하나가 결국 뭐냐, ‘ 어이, 성도 이리 와봐. 니 성도 되고 싶어? 그럼 하늘에 해 지고 와. 저 하늘에 12개 별로 관 만들어서 쓰고 와. 니가 달로 신 만들어서 신발처럼 걸어 와봐. 그럼 성도라고 쳐줄게. 할 수 있는지 해봐라.’ 못해요. 가만히 하늘에 있는 해를 별을 어떻게 따요. 딸 수가 없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이, 이 해석이 굉장히 어려운 해석 이예요. 예를 들면 중풍병자가 자기 병 고치려고 친구들이 지붕 뚫고 들어왔잖아요.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기대한 거예요. ‘니 병이 나았다.’ 그 말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중풍 병이 나았다 했을 때는 무엇이 유리하냐 하면 그들이 평소에 예수님을 상대했던 예수님의 상이 진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된다는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 주님이 그럴 줄 알았어. 병 고치는 분인 줄 알았어.’ 다 같이 자기가 평소에 생각했던 내가 선입감에서 출발했던 선입감이 주님 말씀과 통한다는 사실을 보고 얼마나 그들이 기뻐하겠어요? 딱 기다렸는데 주님 하시는 말씀이 뭐였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아라.’ 아~무도 예상 못한, 이것은 병 고치러 온 사람도 예상 못한 거예요. ‘네 죄 사람을 받아라.’ 할 때 다들 놀랐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죠.
결국은 뭡니까?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볼 때 니도 우리하고 똑 같은 인간 중에서 괜찮은 인간, 경건한 인간, 아주 뛰어난 인간, 하나님이 능력을 좀 많이 받은 인간에 불과하지 인간은 역시 우리하고 동일한 인간이란 뜻이거든요. 그 말은 니가 인간이기 때문에 나 인간, 너 인간, 이해할 수 있을 때 뿐 이거든요. 그게 오늘날 교회 목회 방침 이예요. ’여러분, 교회 오셨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교회 오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해될 수 있는 예수를 전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구제하고 봉사하고 노인들 밥 해주고 봉투에 용돈 넣어서 주일 날 교회 왔다고 5만원씩 주고, 이게 이해된다 말이죠. ’주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왜? 봉투에 돈 받았잖아요. ’여기 예수님 때문에 병 나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손 바짝 한번 들어 보세요. ‘예.’ 주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목회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부교역자가 들어 왔는데 복음을 안다. 부교역자를 오후에, 수요일 날 설교를 한번 시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교역자가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 종용히 부르죠. 끝나고 난 뒤에 ’당신의 말은 성경적으로 옳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래서 목회가 되겠느냐?‘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교회를 해체시켜 줘야 돼요. 교회를 해체시켜줘야 진짜 해체되고 난 뒤에 남아있는 그야말로 진짜 제 3의 요소, 하나님의 피로 남아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게 아니냐 말이죠.
만약에 인간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버리면, 누가 가려집니까? 진짜 성도가 이단 돼 버려요. 노아 방주에서 노아가 외친 것은 유다서에 나옵니다.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 뭐해요? 먹습니다. 뭐해요? 팝니다. 뭐합니까? 삽니다. 뭐합니까? 시집갑니다. 뭐합니까? 장가갑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렇게 하는 인간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에서 완전히 구분하고 ’백날 해봤자 당신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이런 얘기할 때 노아방주가 사람 꼬이기 용입니까? 뭐예요? 결국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것을 제일 우선으로 삶의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일체 노아방주에 들어온다? 못 들어온다? 노아방주에 못 들어온다. 언약이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그 언약과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가 새 언약이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교회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걸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그 사람들에게 천국 못 간다고 선언 해줘야 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복 말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말고, ‘나는 이런 것, 먹고 마시고 이런 것 때문에 지옥 갈 놈입니다.‘라고 그걸 자백하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내가 평생에 먹고 마시고 잘 사는 이런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나쁜 놈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목회 아닙니까?
그럼 누가 누구 목회를 방해한 거예요? 바로 악마가 사단의 일꾼이 주님의 하시는 일을 훼방했으니까 그것은 자기도 천국 못가고 천국 가는 사람도 못 가게 하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주님 말씀대로 맞잖아요.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목사에게 쫓겨난 부교역자는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자기가 말한 복음은 결국은 어느 자리?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가 수단으로 쓰여진 거니까 너무 안 알아줘도 섭섭해 하지 마세요. 한 윤범 목사님도 섭섭해 하지 마세요.
결국은 말씀이 숨어있지만 아직도 말씀은 항상 생생하게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한 복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증거 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교인들을 보고,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야기 했어요. ‘세상 부러워 말라.’ 이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말은 복잡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인간은 세상과 더불어 변하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믿음 좋다 하지만 갑자기 라이벌 되는 자기 동창생이라든지 혹시 자기가 미워했던 사람이 자기보다 더 큰 사업체 더 행복한 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든지 자기 애는 대학 삼수하고 있는데, 경찰대학 수석 졸업 이래 나오면 갑자기 속에서 부아가 나죠. 그럴 때는 새벽기도 나와서 ‘주여, 그래도 저한테 믿음 줬잖아요. 감사합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멘트 뉘앙스가 약간 화난 느낌 ‘주여, 저한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들으시고 ‘그런데 와 이렇게 화를 내죠?ㅎ 감사하다고 하면서 억지로 기뻐하는 것 같애,‘
저는 목회를 했지만 어제도 그런 설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교회 와서 강단에 봉투 하나 안 올라왔다고 했죠,ㅎ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몇 개 올라왔어요. 올라온 봉투에 오기 성 감사헌금을 많이 봤어요. ‘주여, 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을 하는데, 이거는 뭐 주님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뜻인지, 주님 처신이 옳았는지 내 믿음이 돈독한지 한번 해보겠다는 그런 뜻 같아서 굉장히 그때는 말을 안 하고 제가 목회의 요령을 부려서 말을 안 하고 ‘예, 어느 집사님 감사헌금 했습니다.’라고 했죠. 그런데 발표할 때는 새로 약국을 개업한다든지 할 때는 발표를 해야 되죠. 이거 안 하면 문제 생기죠. ‘어느 집사님, 요 앞에 약국 개업했습니다.’ ‘치과 개업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ㅎ
'세상을 부러워 말라.‘ 이것은 기존 세상은 안 부러워해요. 우리는 이미 극복했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 세상에 다양한 새로운 면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 부러워한다고 우겼던 그것이 다시 ’아이, 부러워라,‘ 새로운 부러움이 와요.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같이 기다려도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몇 십 분을 기다려도 안 오는데, 금방 오자마자 버스를 타는 옆의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해요? ’아이 부러워라, 아침에 기도를 얼마나 했으면, 일찍 타고 가는데, ご?아침에 기도를 했는데도 불과하고 왜 차가 안 오지?‘
세상 부러워 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통과했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통과할 때 예수님 혼자 통과한 것 같지만 뭔가 그물을 던져놓고 잡아당길 때는 처음에 그물 칠 때는 빈 그물이었지만 나중에 며칠 지나서 당길 때는 무겁잖아요. 왜? 많은 고기가 거기에 잡혀서 같이 무겁게 나오죠. 그게 바로 하늘의 해와 달과 그리고 열두 별의 모습으로 우리 주님께서 ‘영치기 영차’ 하고 고기를 낚은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가 마리아냐?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로 보겠죠. 그런데 여기에 봅시다. 2절에 보면,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죠. 그러면 이 여자가 아이를 밴 게 결국 뭣과 연관돼 있습니까? 해와 달과 열두 별개의 별을 지닌 요소 때문에 난데없이 원치 않은 아기를 갖고 또 해산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마리아도 포함되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물론 포함돼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12장 끝에 보면 이 여자가 뭐냐 하면, 이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싸우게 돼요.
이 여자라 하는 것은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는 것은 여자의 남은 자손이 아니고, 여자의 기능을 갖고 있는 자의 모든 집합이 되죠. 여성의 기능!! 여자에게 일어난 이적(기적)이니까 그 기적에 합류된 모든 자, 그러니까 이 여자가 여자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냥 여자처럼 생겨서 여자가 아니라 어떤 기능을 해야 될 임무가 주어져 있어요. 그 기능이 뭡니까? 아들을 잉태하여 아들을 해산해야 될 그런 기능을 가진 여자거든요. 여자라서 아기를 낳아서 여자라서 예수님을 배었고 그래서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낳기 위하다 보니까 여자이어야 하고, 그 여자의 기능은 예수님과 관련된 기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기능은 장차 올 교회의 기능을 다 같이 먼저 더불어서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이 무슨 해석이냐 하면 이걸 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무슨 해석이 되겠어요? 묵시적 해석이 됩니다. 하나의 개념 속에서!! 하나의 단어 속에서!! 다 담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십자가 안에 모든 말씀을 다 이뤘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서 끊어져 나간, 십자가에서 파생된 십자가에서 흘러내려가는 그 흔한 물, 핏물 속에 전부 다 모든 개념들이 하나의 갈래, 갈래가 갈라져야 돼요. 백두산 물이 있을 때 그 물이 갈래갈래 갈라질 때 한쪽은 구원개념, 율법개념, 천국개념, 교회개념, 성령개념 전부 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개념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 여자도 나오고 남자개념도 나오고 악마개념도 나오고 다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이 하나의 여자의 주름치마처럼 쭈~욱 갈라지듯이 차마 폭처럼 갈라져서 전부 다 흩어져서 역사를 장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의 의미는 어디서 풀리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음에서, 예수님의 존재에서 모든 해석이 다 풀리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고 본격적으로 12장에 들어가 봅시다.
여자라는 개념은 여기에 사람이 있고 플러스 뭐가 있다 했습니까? 사람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 있다 했죠? 왜 있어야 됩니까? 더불어 변화돼야 돼요. 이 변화는 숨어있는 제 3의 요소의 의해서 매개가 되어 결합이 됩니다. 숨어있는 제 3의 요소에 의해서 여기에 여자라는 개념이 있는 거예요. 그 개념이 인간을 통해서 드러날 때에 역사적 해석이라면, 여자는 누굽니까? 마리아 혼자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교회라 하면 난처하죠.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는 뭡니까? 그 역사적 개념을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매체로 사용해서 예수님만 섬기지 말고 ‘마리아도 섬기자.’ 해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호칭하면서 그렇게 섬기는 거예요.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왜 안 섬기는 겁니까? 기독교에서 마리아를 안 섬기는 이유가 뭐죠? 이런 질문 처음 받아봤어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죠? 기독교는 천주교에서 나온 사생자입니다. 천주교에 있을 때 기독교라는 게 없어요. 천주교가 기독교를 대표하기 때문에 루터, 칼빈이 뭐에서 갈라져 나온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온 게 아니고 천주교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섬기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에 있어서 삼위일체만이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에 플러스 제 4의 인물, 여자 마리아가 포함될 때에 무슨 개념이 깨집니까? 삼위일체 교리 중심이 이게 혼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살려줘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살려두기 위해서 마리아를 뭐로 격하시키느냐 하면, 마리아를 신앙의 모범 자, 신앙적으로 산 사람이라고 이걸 격하시키는, 낮추는 거예요. 낮춤으로써 뭐를 참여시킬 수 있느냐 하면 간편한 진리답게 보이고 간편하게 들려지는 간편한 진리교정을 통해서 이 개신교가 참신하고 새롭고 바르고 성경적이라는 티를 낼 수 있는 하나의 증거물로 삼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루터나 칼빈이나 왜 마리아가 해산하는지 성경적인 복음적인 논리는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으니까 그런 질문을 목사들이 못하는 거예요. 정치적인 요령을 부린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마리아가 죄인이라는 말을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할 수가 없어요. 분명히 이야기해서. 그럼 너무 한다고 숫자가 안 올 수가 있어요. 너무 심하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이런 식이죠. 신앙의 모범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제대로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역사적 해석은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묵시적 해석으로 바뀌어야 돼요. 여자라는 것은 차후에 역사적으로 등장한 인물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지만, 그 전에 여자라는 개념은 이미 묵시적으로 있었던 거예요. 여자의 개념은 뭐냐 하면 아기를 낳아야 되는 기능인데 그것이 혼자 같으면 뭐가 문제냐 하면 마리아의 몸과 해가 있었습니까? 별과 발밑에 달이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촌에 촌 처녀예요. 무슨 해를 지고 다닙니까? 이런 구절이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우상시하는 기적으로 볼 거예요. 마리아 떴다. 마리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기도하면 안 되지만 마리아에게 도움을 받으면 기도가 들어준다. 천주교가 그 정도까지 간 거예요.
그 정도까지 가니까 개신교는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마리아는 안 섬긴다.’ 마리아는 안 섬긴다 하면 안 되죠. 마리아는 죄인이라 해야죠.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은 뭐가 됩니까? 죄인이니까 누구도 죄인 이예요? 마리아도 죄인이어야 돼요. 마리아도 죄인이니까 개신교가 기독교 처음 나올 때 마리아가 죄인이라는 말을 못한 이유가 있었어요. 논쟁이 있었는데, 마리아가 죄인 돼 버리면 예수님이 누구한테 태어나요? 죄인에게 태어나죠. 죄인에게 태어났으면 예수님은 신성도 있었지만 뭐도 있습니까? 인성도 있죠. 인성이 완벽한 인간이 되려면 인간의 모든 것은 물려받아야 돼요. 물려받을 때 마리아의 인성을 그대로 예수님이 물려받아야 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의인이 아니고 뭐가 돼 버려요? 죄인이죠. 그런 난점을 해결을 못하는 거예요. 그 당시 논쟁을 보면.
지금도 총신에 찾아보면 그런 책들이 있어요. 그런 책들을 공부해보면, ‘야, 꼼수 쓴다. 꼼수 쓴다.’ 그런 게 보인다니까요. 불리한 것은 싹 없애 버리고 유리한 것만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예수님은 신성+인성, 이 자체가 문제예요. 이 자체가. 왜 신성+인성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건 육적인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신성과 인성의 문제는 이게 기독교적이 아니고 이게 헬라 적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독교가 오기 전에 모든 인간의 철학적인 기본 사유구조 체계 속에 이게 고안돼 있어요. ‘나 같은 부족한 연약한 썩어빠진 죄 같은 인간 죽으면 그만인 우리를 어떻게 신을 다스릴까, 하나님께서 누가 신성이 오셔서 하나님의 신성이 이 죄 많은 인성과 결합해서 중간 매개 역할을 해주시면 그 안에서’ 일본 말로 도란스, 영어로는 트랜스, 우리말로 번역하면 변압기, 그처럼 누가 주님 안에서 이 더러운 인생이 신성으로 달라지게 한다면 진짜 하나님은 자비롭다.‘라는 개념을 모든 인간은 종교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가 설교하다 보니까 그것이 교회가 되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그것이 마치 진리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분명히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결합된 게 예수님이다.’라는 자가 지옥 간다. 왜? 육으로 납득이 되니까. 육으로 납득이 된다면 성령 안 받아도 이해가 된다면 그건 애초부터 종교성이었지, 그건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언약의 모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신성+인성이 아니에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죽은 것도 아니고(몰트만) 인간이 죽은 것도 아니고, 오직 인자가 돌아가신 겁니다. 그럼 인자와 인간의 차이점은? 인자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언약을 품고 있어요.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거기에 존재론 적으로 인성+신성, 영혼+ 육체, 이런 게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납득시켜서 신앙도 없으면서도 마치 복음을 이해한 것처럼 우길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을 그렇게 우길 수가 있어요.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을 한 것은 그 인생 완전히 버려놓은 거예요. 지가 자충수를 둔 겁니다.ㅎ신학을 모8?그만인데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복음을 안다면서 개혁주의 안 배우면 되는데 괜히 개혁주의 배워서 복음을 거기서 거부하게 만들었어요.
여자가 뭐냐, 여자는 기능적으로 봐야 됩니다. 어떤 기능? 묵시적 기능적으로 봐야 됩니다.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여자가 여자 되게 하는 것은 배후에 여자가 여자 되게 하는 기초가 들어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온 우주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뭐를 만들었느냐 하면, 해와 달과 별이 전부 다 누굴 위해서 봉사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거예요. 이게 묵시적으로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깥에 하나의 백두산 밑으로 강이 흘러내려가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이러한 모든 창조물들이,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그 중에서 여자라는 모습으로 파생돼 나오면 그게 여자예요. 그래서 그 여자는 뭐를 뒤집어썼다? 해와 달과 별을 완전히 뒤집어 쓰고 온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고 예수님과 관련된 여자가 된 겁니다. 여자 본인이 뛰어나고 우수하다는 말이 아니고 안에 들어있는 누구 때문에? 해와 달과 별로부터 경배를 받아 합당한 주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그 여자는 여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럼 여자의 반대는 남자가 아니에요. 인간의 언어체계에서는 인간의 언어체계를 전부 다 완전히 규정을 한 그레마스의 사각형 의미론이 있는데, 드디어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언어 의미의 종결 자예요. 어떻게 종결 시켰느냐 하면 이것은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해보겠습니다. 그레마스의 의미론인데 사각형에서, 예를 들어서 남자의 반대가 뭐죠? 여자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남자 일 때 여기는 여자는 있다? 없다? 없다는 말 이예요. 의미는 뭐냐 하면 모든 걸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것이 매직이잖아요. 약간 바보한테 ‘이게 뭐지?’ ‘미로’ ‘그럼 저건(의자) 뭐지?’ ‘미로’ 그 바보는 어디서 ‘미로’라는 단어하나를 알아듣는지 그 단어 가지고 ‘미로’ ‘미로’ 모든 걸 다 써먹는 거예요. 그러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다는 것은 단독적인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때 변별적으로 차이가 나면서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주변상황, 주변과 더불어 변화 되니까 주변과 더불어서 어떻게 되느냐 할 때, 남자는 뭐가 없으면 의미가 없느냐 하면, 반대되는 여자가 없으면 남자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레마스는 이야기 합니다. 항상 이게 무슨 뜻이냐 할 때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가져와. 그리스도가 뭐냐? 적그리스도. 성령으로 해석할 때는 누굴 동원해야 된다? 악령이 동원돼야 되죠. 그런데 모든 것에서 보면 성령을 말할 때 상황을 대요. 성령 있을 때와 없을 때. 아니에요. 악령을 들고 와야 돼요. 우리가 악령에 속한 사람일 때 거기서 이탈 될 때 우리는 뭐가 됩니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고 악령이 있느냐, 아니면 성령이 있느냐, 그 뿐이지, 이것도 아니고 중간에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복음적으로 모르는 사람 이예요. 청와대 있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사람이 몇 명 있다 하지 악령에 속한 사람 몇 명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악령의 의미는 뭐냐, 반대 개념이 김 정일하고 김 정은, 카다피 그런 사람, 리비아 사람들한테는 누가 악마입니까? 반란군 입장에서. 사람은 자기 삶을 편하게 해주면 친구고, 거기서 쉬미트란 학자가 이야기 했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은 ‘적과 동지’로 나눠지는 정치적 의미다. 모든 걸 판단할 때 적과 동지로 판단하는 거예요. 누구 만날 때, ‘ 적이십니까? 동지이십니까?’ 먼저 물어본다는 거예요. 커서 성인이 되면 남자 여자가 구분이 있지만 어린애일 때는 구분이 없잖아요. 항상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저게 적이냐? 동지냐?’ 동화 적으로 하면 ‘우리 양의 엄마냐? 늑대냐?’ 그런 것이죠. 그게 어른이 되고 어린아이의 품성이 남아 있잖아요.
남자의 의미는 여자가 있어야 안다. 여자 없는데서 남자는 의미가 없어요. 전부 다 남자만 있으면 사람이라 하지 뭣 때문에 남자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창세기 2장에 보면 누가 등장할 때 아담이 남자가 되죠? 바로 아담을 지었지만 아담이 남자 되는 순간 누가 등장할 때? 여자가 등장할 때 아담은 남자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사람은 환경과 더불어 변하죠. 새로운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여자 없을 때 아담은 그 생각했던 본인의 또 다른 아담이 되는 겁니다. 여자가 있을 때 달랐고 또 여자가 선악과 따먹고 또 자기에게 선악과 권해서 따먹고 난 뒤에 또 다른 남자가 돼 버린 거예요. 자기의 잘못을 여자한테 미루는 비겁한 남자가 변하죠. 그리고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고생스러운 남자로 또 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은 여자의 후손이 뱀을 친다 할 때, 그 뱀과 여자, 후손, 모든 개념은 앞으로 역사가 진행되면서 복음이 달라져요. 달라지면서 어디서 종결됩니까? 예수그리스도에서 종결되면서 뱀, 여자, 남자, 개념이 전부 다 달라져요. 남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고 여자는 누구예요? 여자는 예수님이 잉태했던 교회를 말하고 마리아를 말하고 뱀은 악마를 말하는데 뱀이 뭐를 꼬였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라 했죠? 선약과 개념도 바뀌죠. 선약과 생명나무 합쳐서 예수님을 이야기 합니다. 이게 바로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 해석이 되는 겁니다.
남자의 반대는 여자, 이거 하고 10분 쉽시다. 모든 게 여자가 아니잖아요. 이거는 카메라고 이거는 의자죠. 고런 관계를 ‘비 여자’라 합니다. 여자라 하는 것은 여자의 몸이 갖고 있는 게 여자고 그 밑에 있는 강아지는 강아지고 여자가 아니잖아요. 남자가 볼 때, ‘저건 여자가 아니네.’ 한다 말이죠. 고런 관계, 그런 관계를 모순관계가 돼요. 모순관계라 하는 것은 뭔가 누락된 빠져 있는 거예요. 여자가 니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란 뜻 이예요. 더 나아가서 무슨 뜻이냐 하면 여자가 삐졌다. 그러면 뭐라 합니까? ‘여자여, 세상이 어떻게 다 니 맘대로 되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청와대에 있는 일이 여자가 운다고 청와대가 바뀝니까? 아니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일 때문에 울고 있지만 실제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기는 조그만 전체 의미 중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하죠. 세상 전부를 모르기 때문에 낙망하거나 절망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니잖아요. 한강 철교에서 뛰어내리고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왜냐하면 나는 극히 일부의 나니까. 세상 전부를 모르잖아요. 지금 실패가 전화위복이 될 줄 아무도 모른단 말이죠. 더 살아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의미라 하는 것은 결국은 미지의 남아있는 여분이 많다 말이죠. 모를 때 이런 관계를 가지고 '모순관계‘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관계다. ’이상하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면 나쁜 것은 뭐지? 이건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많은 의미로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자의 모순관계는 뭡니까? 비 남자죠. 세상이 지 맘대로 남자 중심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것은 바로 결국 비 남자에서 관계가 뭐냐 하면 긍정관계, 긍정되고 여기는 부정되겠죠. 그러니까 의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부정적인 게 많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뭐로 남아있다? 얼마든지 부정이 긍정으로 바뀔 수 있는 의미로 남아있다. ‘이거 말고 이 세상에 어떤 의미도 없다‘고 이야기 할 때 의미 종결 자예요. 의미 찾아보세요. 여기 컵 있다. 컵의 반대는? 쟁반이죠. 그렇잖아요. ’컵 가져와.’ 하면 그 짝인 ‘쟁반 가져와.’ 짝을 찾아야 돼요. 하지만 안경집은 컵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언젠가는 컵이 있는데, 안경집으로 위를 덮으면, ‘아하 이렇게 써먹네.’ 새로운 관계를 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의미의 바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이런 것이 육적인 의미가 된다 말이죠. 이런 구조를 죄라고 공개하는 거예요.
세상에는 의미가 많다 하는 것도 잘못이고, 의미가 이렇게 짝이 있는 것도 잘못이고 모든 의미는 하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십자가, 예수님의 주되심, 이외는 없는 겁니다. 그 외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마귀의 활동도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