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421요한계시록10장-(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13강b-(이 근호 목사) 제 13강b
안에 쓰게 됐다는 이유가 8절 끝에 보면, 한 자로 돼 있죠. 왜 쓰냐? 뭘 했는데? 어떻게 씀바귀를 먹어서 쓴 겁니까? 뭘 먹어서 쓰죠? 뭘 먹었잖아요. 뭘 먹었습니까? 영어로 Book, 책, 책을 먹은 거예요. 캡슐, 제약회사에서 캡슐을 만들어 냅니다. 알약을 먹지만 이 안에 수많은 더 작은 알갱이, 365개의 알갱이, 감기약 같은 경우에, 이것이 위액에 녹으면 와르르 쏟아지죠.
책이라는 분명히 한권입니다. 한권이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내용들이 여기 막이 깨지기를 기다리면서 우리 속에서 터져버리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무빙 북(Moving Book), 움직이는 책이 되죠. 그것도 본인이 전혀 원치 않는, 본인이 원치 않으니까 내 안에서 말씀이 움직이는 것을 누가 제일 먼저 급 저지하겠습니까? ‘안 돼, 안 돼,’ 누가 저지하겠어요? 본인이 가장 저지하죠. ‘아니야, 내 비전은 따로 있어. 내 비전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부모의 뜻을 따라야 돼, 그래야 부모의 뜻을 완전히 꺾어버리지. 평생 동안 잔소리 했는데 그래야 보란 듯이 ’부모님, 보세요. 제가 부모님 생각이상으로 능가했잖아요. 이젠 부모님, 잔소리 하지 말란 말 이예요. 이건 프로이드가 잘 이야기했죠? 보모한테 잔소리를 듣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부모를 능가해도 부모의 품에서, 의식에서,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그런 신세가 되죠.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그 무덤가에 와서 절하면서 ‘어머님, 제 남자친구입니다. 이 친구 만나기를 어머니께서 그렇게 기도하더니만 이 친구가 거성그룹의 후계자, 이제 사 나는 구두 만드는 말단 사원에서 라이벌을 다 꺾고 온갖 모함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지금 하늘나라 어머니기도 덕분에 이렇게 컸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의 품을 못 벗어나니까, 제가 4번째 씁니다. 그걸 무슨 테두리라 했습니까? ‘혈육의 테두리’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는 천국 가는데 부모가 지옥 가면 어떡하지? 걱정들을 늘어지게 하셔요.ㅎ 이거는 입장 바꿔서 부모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교회 가서 구원 받았는데 자식이라는 게 교회도 안 나오고 지옥 가면 어떻게? 걱정들을 늘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그걸 흔히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 라는 관계 방정식,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사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순애보가 여자 쪽에서 많았잖아요? 요새는 순애보가 남자 쪽에서 등장해요. 여자가 돈 보니까, ㅎ 항상 돈 많이 버는 쪽이 가장 노릇을 하기 때문에 너가 없으면, 다른 말로 번역하면 ‘너 돈이 없으면 그 다음에 내 쓸 돈도 없다.’ 이런 관계식이죠.ㅎ 모든 것이 돈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뭐라 합니까? 이걸 ‘사랑’이라고 굉장히 귀한 용어를 씁니다. 뜯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림을 그리면 우리의 껍데기는 바로 돈에 중무장된 돈에 환장한 그것은 부모로부터 교육받았고 그것이 출세고 인생 성공이라고 주변에서 그렇게들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걸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쳤던 그 모든 인식 속에서 여기서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본의 아니게 말씀이 태동하고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좋아 했겠습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어 했겠습니까? 말도 안 되죠. 처녀가 아이를 낳으라 하니 할 말이 없어요. ‘안 잤다. 안 잤다.’ 해도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친자 확인 조사해 보세요. 예수님은 마리아와 같은 DNA인데, CIA에서 조사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럴 때 결국은 마리아가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자포자기하죠. 자포자기.
이 자포자기를 두자로 줄이면 이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렵지 않죠? 이제 알았으니까. 자포자기를 뭐라 한다? ‘신앙’이라. 반대로 ‘열심히 믿습니다.’라는 걸 신앙이라 하지 않고 ‘신념’ 이라 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네 자로 ‘하면 된다.’ 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게 신념이죠. 그리고 신념은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계산력이 포함돼 있어요. 확률, ‘나는 저분 믿어서 이번 비행기 탈 때 비행기 조종사가 실력이 어느 정도, 초보인지, 베테랑인지, 아! 베테랑 같으면 확률 상 나는 이 비행기를 탈만하다.’ 그걸 가지고 ‘나는 비행사를 믿습니다.’하죠. 이건 결국은 비행사를 믿는 게 아니고 뭘 믿어요? 비행사를 믿는 나의 계산력, ‘나에게서 나온 것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념은 항상 누구를 믿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그걸 경유해서 누굴 믿어요?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죠. 결국은 이것은 뭐냐, 자기가 우상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침투해야 신앙이 생기기 때문에 교회의 대부분은 신앙인이 아니고 무슨 인입니까? 신념 인이죠. 교회는 신념 인을 양산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교회 안 가서 지옥 가지만 이 사람들은 교회 가서 지옥 갑니다. 하하~~ 아주 재밌는 현상 이예요. 맨 날 구하러 오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맨 날 구하러 오는 거예요. 얼마나 안 믿어졌으면, 새삼스럽게 이렇게 신앙인척을 해야 덜 허전하잖아요. 이런 착한 일을 했으니까 이번 한 주는 재주 없는 일이 떨어져나가서 내가 원래 원했던 뭔가 기대했던 축복이 주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성경을 모르니까 내가 보는 나의 기준하고, 성경이 보는 기준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억지로 나의 기준에 하나님도 마치 동의하는 양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를 신념화 시키는 겁니다. 그걸 자아체면, 스스로 자기가 체면 거는 겁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빨리 해보세요. 방언하죠.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r~Ꭿ~&Ꮫ@Ꭿ~ 방언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계속 자포자기가 신앙이란 말은, 내 속에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누가 침투했다는 겁니다. 그 침투한 능력이 뭐냐, 신앙이라는 것은 ‘자포자기’ 그런데 신념은 스스로 자기를 격려해서 ‘너는 여기서 좌절하면 안 돼, 너는 그런 너가 아니었잖아. 이만한 일에 좌절하면 너답지 못해, 너 부모님이 그렇게 안 가르쳤어. 너가 나약한 인간이 아니잖아. 힘을 내, 힘을 내란 말이야. 너는 할 수 있어. 일어설 수 있어.’ 의인은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고 잠언 서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할 수 있어. 목사님 설교 안 들어봤어?’ 주께서 은혜주시면 뭐든지 니가 피할 길을 주신다. 그 피할 창문이 열린 거야. 니가 못 찾아서 그렇지, 니가 기도를 안 하고 교회를 안 나오니까 못 찾아서 그렇지 나오면 보게 돼 있어. 하면 되는 거야.‘ 이게 다 뭐예요? 전부 다 신념이죠.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놀고 있네, 에이고,‘ㅎ 참 웃기지도 않아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완전히 스스로 자아도취가 돼 버렸어요. 현실도 모르고 자기 망상, 망상 속에 자폐증처럼 갇힌 신세, 심하면 병원 가야 돼요. 정 답답하면 교회 안 가고 굿하고 다니지. 미래가 예측이 모호해서...
그런데 그것이 필요 없는 것이 2절에 보세요.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바다 밟고 땅을 밟았으면 뭐를 밟은 겁니까? 사실 전부를 다 밟은 거죠. 뭘 들고? 책을 들고. 그럼 책의 내용은 어디서 쏟아져야 된다? 책의 내용은 책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도, 땅도, 바다와 땅의 모든 미래에 전부 다 적용될 거죠? 그 중간의 매개체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침투했다? 바로 하나님의 성도 안에 입에는 달고 하지만 속에는 쓴, 성도 안에 일방적으로 하나의 매개체로서 사용한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택배회사 직원이죠. 그걸 ‘운반자.’ 그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의 증인‘ 또는 목격자, 전도자라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중요한 거 합니다. 지금까지도 중요했지만, 이 땅과 바다를 밟은 이 책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이 책을 이걸 ‘비밀(secret)’이라 해요. 여기서 우리가 교회 오래 다니고 신학을 하고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면서 늘 뭔가 풀리지 않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질문이 있어요. 무슨 질문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믿는 척이라도 하죠. 그렇잖아요. 다음주일이 무슨 주일이라 하던데...? 부활주일, 그거 다 돈 거두기 위한 명목입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다 목돈 내라는 거예요. 푼돈 내지 말고 목돈 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돈 내면 안 됩니다. 제가 설교에서 헌금 설교 했잖아요.
헌금은 우리가 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헌금 이예요. 사실은 우리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 보고 그리스도 일 하라고 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전달자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집에 콩나물 사고 침대 들이고 애들 피아노 가르치는 거, 다 헌금입니다. 그걸 왜 교회 냅니까? 미쳤어요?ㅎ 자기 몸이 하나님 몸 같으면 하나님 몸 간수하기 위해서 벌어먹는 것도 하나님의 돈 쓰는 겁니다. 내 돈 따로 있고 하나님 돈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돈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는 것은 하늘에 냅다 던지는 게 아니에요. 교회 갖다 바치는 것이 하늘에 쌓아두는 게 아닙니다. 그거 사기꾼들이 하는 짓 이예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자신보고 맛있는 거 사 잡숫는 거, 그게 바로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시장에 가서 옷 사 입고 .., 지금 반대로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예요. 노아 방주 크게 지었잖아요. 이거 몇 명쯤 들어가겠어요? 규모를 봐서 천명도 넘게 들어가요. 몇 명 들어갔습니까? 달랑 8명이예요. 주님께서 노아보고 ‘ 니같이 근무 태만한 너는 오지마라.’ 했습니까? 노아를 높이 추켜세웠습니다. 왜? 천국 갈 사람만 데려왔다고. ‘이 세상에서 제발 좀 못 올 사람을 교회 불러 모으지를 말라. 내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니가 알아서 왜 들어오느냐,’ 말이죠. 주께서 부르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요한복음 6장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자꾸 일반 종교성, 종교의 심리, 이런 것에 자극을 받고 하니까 이게 결국은 신앙이 안 되고, 신념이 되는 거예요.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내 입에는 달다. ‘아! 나 구원 받았구나!.’ 그런데 내 어머니는 교회 안 나온다. 그러면 뭐라 합니까? 내 배에는 쓰죠. 이것은 달고 씀에 쓰고 달음의 모순과 갈등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평생 있어야 돼요. 이게 만족스러운 상태가 돼 버리면 안 돼요. 만약에 우리는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복음을 못 전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이래도 나는 의인되고 싶고, 이렇게 상충되는 속성이 같이 늘 있어야 돼요. 말씀 보면 말씀 하나도 못 지키고 소위 교회 몇 년 다니고 목사가 이런 말하면 말씀 하나도 못 지키고 이런 느낌이 와 줘야 돼요.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 이라고. 입이 아니고 혓바닥이 아니고 상한 심령. 내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는 잘난 게 없습니다.‘ 하는 상한 심령을 주께서 유일한 제사로 받습니다. 다른 것은 돈이고 푼돈이고 안 받습니다. 오직 우리 몸 전체가 평생 사는 우리 몸 전제가 죄만 짓는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산제물이 되는 겁니다. 이걸 인간 만들어서 ’주님, 지금 담배 못 끊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급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가 알아서 인간 만들어서 가는 그런 것은 교회 가봤자 지옥 가는 겁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빛과 소금? 요즘 소금 값이 올랐지만... 빛과 소금이 되더라도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식사기도 할 때 감사기도 하죠? 그게 바로 금식이라는 거예요. 처음 알았죠? ㅎ그게 금식 이예요. 밥 안 먹는 게 금식이 아니고, 그게 금식이라니까요. 이게 주께서 주신 음식이라고 감사하는 게 금식 이예요.
그 책을 밟고 있을 때에 4절에 보면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우뢰 소리 들을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자, 지금부터 상당히 어려운데, 쉽게 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계시를 뭐라 했습니까? 비밀이라 했죠. 그런데 우리라 늘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부활 하셨잖아요. 부활 했으면 이왕이면 동네방네 다니면서 ‘봐라, 봐라 나 이렇게 너희들이 죽였는데 살아났잖아,’ 그것도 모자라 미국 NBC, KBS에서 카메라 들이대고 ‘예수님 부활 하셨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 맞구나. 성경 말씀이 거짓말 아니구나.’ 하고 전부 다 혹해서 우르르 올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이 악마가 쓰는 방법 이예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니 추종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전도하려면 그런 식으로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아이디어가 마귀한테서 나온 거뮈? 지금 한국 교회가 쓰고 있지만, 마귀에서 나온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전도하고 그런 식으로 비밀을 공개하지 않느냐 하면, 이거 진짜 어렵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닮고자 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밖에 등장해 버리면 인간이 원래 생각했던 하나님이 돼 버려요. 그럼 놀랍게도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이 돼요. 육신이 되면 로마서 8장에서는 그냥 육신이 아니고 앞에 뭐 형용사가 붙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와 버려요. 사람은 같은 인간도 죄 지으면 외면합니다. ‘어이구, 인간아 봐, 사형 당했잖아. 십자가 사형 당했잖아, 아이구, 저 낳은 엄마, 참 골치 아프겠다. 왜 가만있으면 존경 받을 텐데, 왜 공연히 까불다가 대들다가 죽을 걸, 왜 몰랐어? 세상 권력이 현실인 것을 왜 망상으로 살아가는 거야, 분명히 죽는다는 게 현실인데 왜 현실을 애써 피하려고 했어? 바보 같은 예수야, 어이구,’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옆에 있던 강도가 뭐라 한지 압니까? ‘어이, 지금 남을 구원 한다고 남 이야기 할 쨉이 못 됩니다. 본인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당신 믿어줄게.’라고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고 싶어서 했던 말을 십자가에서 아마 우리 선배들이 다 했어요. ‘당신부터 내려 와 봐라, ’ 그러니까 옆에 있는 강도는 한 수 더 떴어요. ‘당신이 뭐 구원자라고? 뭐 우리를 살린다고? 당신부터 십자가 우두둑 분지르고 못 확 빼고 십자가로 로마 군병 찢고 십자가 들고 예루살렘 고소한 놈 다 멱살 쥐고 나귀 턱뼈로 3천명 죽이면서 ’봐, 누구야? 나보고 죄인이라고? 메시아 아니라고 한 자가 누구야?‘ 이렇게 혼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걸 누가 하려고 했어요. 누가 하려 한 줄 알아요? 베드로가 하려고 했어요. 뭘 들고? 칼 들고. 그때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성질이 얼마나 급했는지, 칼로 종의 귀를 벴죠. 그러니까 귀 바퀴가 떼르륵 굴렀잖아요. 얼른 주워서 딱 붙여줬는데, 본드도 없이 붙었잖아요. 창조주란 뜻입니다.
창조주가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오느냐 하면, 죄인의 육신의 몸으로 온 그 창조주 외에 다른 창조주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뭐냐? 인간이 전부 다 상상한 거죠. 지어낸 거예요.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그래서 비밀 이예요. 아버지는 육신의 예수님 안에만 아버지가 계시지, 그 바깥에는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성질 급해서 ‘아버지를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말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자꾸 그 당시에 남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하나님, 뭔가 멋지게 생기고 수염이 허옇고 그런 신선 같은 산타크로스 같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포이에르바하 철학자에 의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투사다.‘ 투사라 하는 것은 투영. 인간을 화면에 확대시켜 보면 그 하나님의 입, 코가 어디서 나왔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내 코, 내 눈이고 내 입이고 내 혈육이고, 하나님이 자비롭다 하는 것은 내 속에 자비롭고 싶은 그러한 품성을 크게 넓히는 거예요.
우리나라 100미터 달리기가 기록이 어떻게 되죠? 기록이 얼마 전에 깨졌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까지 외울 필요는 없고, 하여튼 10초 4라 합시다. 10초 4인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도 제목이 뭐겠습니까? 기록 깨면 1억 준다 했습니다. 우리나라 육상협회에서. 그러니까 ‘난 돈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육상 미래를 위해 한다.’는 거예요. 미래라도 돈 안 주면 안 하거든요. 자기 청춘을 바쳤는데, 뭐 자기 청춘을 한국의 육상을 위해 미래를 바치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님이여’ 뭐를 해 달라? ‘주여, 기록을 남들은 욕심을 내서 9초7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초1로만 땡겨 주세요.’ 어떤 마라톤 선수가 교회 오면 뭐라 기도하겠습니까? ‘올해는 그저 2시간 10분 내에 들게 해 주옵소서. 저 세리 같은 나쁜 인간은 2시간 3분을 하지만, 하나님, 저 양심 고운 것 알죠? 저는 소박하게 2시간 10분 정도,’ 그러면 개척교회 목사는 뭐라 기도하겠습니까? 새벽 강단에서 ‘어떤 사람은 수천명하지만, 저는 그런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260명 정도.’ 왜 260명이냐, 260명 정도가 돼야 생계가 보장되거든요. 그게 무슨 하나님이시며 지가 만들어 낸 우상이죠.
진짜 하나님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죠.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 바로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그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땅, 땅, 땅, 국회라면, 선포합니다. 그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나타난 하나님만이 하나님인데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날 하ご纛?될 때는 바로 반드시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언약 책이라 해요.
언약 책이라 하는 것은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뽑아 세워서 그 사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 사람을 저주하면 저주 받아서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을 전달자, 숨어있는 비밀을 간직한 한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가지고 결정짓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인자를 존경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너를 기억할 것이다. 허나 인자를 부정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나는 너를 모른다 할 것이다. 딱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
그러면 한 사람인지 아닌지 하도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한 사람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바로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이것이 일어난 유일한 사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주께서 실제로 보낸 분이예요. 죽은 척하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면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살아나면 고생이죠.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기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해서 백 날 우리가 만약에 죽었다고 살아나도 또 죽어버리면 소용없잖아요. 영원히 두 번 다시 이젠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부활의 힘’이라 해요.
부활의 힘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아까 신앙이란 뭐라 했습니까? 또 잊어버렸죠? 신앙은 뭐다? 자포자기!! 그 신앙의 힘이 우리 속에 와 버리면 이질적인 것, 내가 원하는 상상의 하나님과 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진짜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는 ‘너는 죽어도 괜찮아.’라는 그것과 너무나 차별되는 이 다툼, 이 갈등이 내 속에서 쓴 약처럼 이제 시작이 된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다? 사람은 신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된 정도가 아니고, 아예 누구나 기피하는 인간, 누굽니까? 바로 죄 있는 인간, 같은 죄인이라도 죄인을 무시하게 돼 있죠? 사람들이 무시하는 무시당할 만한 그러한 죄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많은 기적을 원했고 많은 기대를 했건만 예수님이 허약하게 그저 별 볼일 없이 체포되자 사람들은 그 기대한 만큼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라는 재판관이 ‘여기에 흉악무도한 바라바라는 살인강도가 있는데, 명절날, 기쁜 날에 한 사람을 풀어주게 돼 있는데,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바라바를 풀어줄까요? 아니면 여러분이 구원자라고 자칭하는 예수를 풀어줄까요?’ 사람들은 누굴 풀어주기를 바랐을까요? 바라바,
그만큼 예수님을 의식한 거예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풀어주면 또 잔소리 할 거잖아요. 그러나 바라바를 풀어주면 바라바를 볼 때마다 인간은 얼마나 자만심을 느끼겠습니까? ‘나는 아무리 망가져도 저 인간보다 낫다.’ 얼마나 사람 사는 보람을 느끼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흉악한 강도 나오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한진 그룹 콘테이너 배가 해적한테 잡혔을 때에 다른 사람은 안타깝지만 같은 경쟁 업체는 기분 좋은 겁니다. ‘자식, 까불 때 돈 빌려달라더니...’ㅎ 사람은 누가 이렇게 당해줘야 우리는 사는 즐거움을 느껴요. 누가 이렇게 망해줘야 됩니다. 꼭 연애 인들이 이혼을 해줘야 돼요.ㅎ 그래야 찜질방에서 밤새도록 이야기 할 거리가 생깁니다.
드라마라는 것이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 뭔데요? 드라마에 보면 곧 망할 자들이 자꾸 등장하는 거예요. 그럴 때 몰입될 수가 있는 겁니다. 정신없이 애 우유도 안 먹이고, 정신없이 빠져버리죠. 그만큼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남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있는 영 내 맘에 안 드는 이 자아를 이 손으로 죽이고 싶은데 차마 나를 죽여 버리면 모든 게 무의미해지니까 나를 죽이는 대신 남을 대신 죽임으로써 내 죽음을 지연시키는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남한테 미룰 수 없는 사람 같으면, 큰 일 나요. 정신 병 걸려요. 자살하든지, 우울증 걸린다든지, 뭔가 괴로울 때는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돼요. 풀어준다는 말은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자꾸 나중으로 미뤄주고 그 문제 해결의 대체물로서 두더지 게임을 한다든지 회사 사장을 욕한다든지 목사를 씹는다든지 하여튼 뭔가 풀어줄 때, 그럴 때 잠시 자아를 잊으니까 자아를 잊어버리면 이것은 일종의 자살효과죠. 자살효과가 뭘 느끼게 합니까? 내가 없으면 내가 품고 있는 뭐도 없어진다? 고통도 없어질 거니까 고통을 철회하지 말고 아예 고통을 갖고 있는 나를 몽땅 한 통에 집어넣으면 깨끗이 끝날 문제인 것을, 왜 그렇게 고민을, 그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바보같이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살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우리는 이미 자살이 돼 있어요. 내 안에 원치 않는 것이 있어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쓴 물이 자꾸 올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는 거죠. 여기 6절에 보면, ‘창조하신 이’가 나옵니다. 창조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한자로 無에서 창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 누가 왔다?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가 말씀으로 우리 안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내 안에 창조했다는 말은 결국 나의 껍데기, 나의 세상적인 시선으로 쏴대는 남들에게 부응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는 나는 뭡니까? 한자로, 없는 자죠. 이걸 없는 자라 하지 말고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이미 날마다 죽는 자.’가 되죠. 없는 것하고는 달라요. 없는 것은 아예 흔적도 없이 없는 것이고, 죽는 자는 시체라도 있잖아요.
그래서 죽는 자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뭘 해도 의미 없는, 뭘 해도 현실성 없는 존재들이죠. 우리는 눈 만 뜨면 뭘 해요. 하는데 그것이 입에 단 것만 골라서 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가 뭐예요? ‘오늘도 좋은 일만 생기기를~~’ 가게 들어가 보세요. 천주교 가게에 가보면, ‘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평화를,’ 그게 뭔 뜻입니까? ‘주의 평화를.’ 좋은 것만, 이게 우리 껍데기는 항상 입에 단 것, 좋다는 기준이 어디서 들어오는 기준입니까? 과거에 누적된 것 중에서 좋은 거예요. 과거에 누적된 것 중에서 자기가 놓친 것, 아까운 것, 하여튼 명품 들은 것, 좋은 것이라는 것은 내 몸에 좋은 거죠. 내 몸에 좋다는 말은 그동안 좋다는 것이 이 몸에 정해졌다는 거예요. 정해진 것이 좋은 것이죠.
하여튼 부부를 만나보면 각자 처녀 총각 때 좋은 것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부부가 같이 만나서 만날 때는 사랑으로 만났지만 막상 살아보면 서로가 좋은 것을 포기를 안 해요. 서로 좋대요. 개고기 먹으면 좋다고 먹으라 하고, 그렇게 몸에 좋다고, 음식을 약으로 먹습니까? 차라리 약이라면 즙으로 짜지, 하여튼 개고기 좋다. 또 이거는 정력에 좋다. 이상한 거, 뱀등..., 본인이 입이 짧아서 김밥이나 라면 좋아하는데, 여기다 개고기 푹 고은 거, 푹 고은 말말 들어도 싫은데, 서양 음식 좋아하는데, 한식 푹 고은 것은 싫고, 저는 뭘 못 먹느냐 하면 미나리를 못 먹어요. 제사 음식에 미나리가 들어가는데 제사 음식에 들어가지만 못 먹어요. 그런데 제 아내는 미나리가 맛있다고 뜯어 와서 해주는데 냄새도 싫어요. 좋다는 거예요.
서로가 좋아야 좋은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1번, 아내가 남편에게 양보한다. 2번, 남편이 아내에게 양보한다. 3번, 서로 양보 안 한다. 몇 번입니까? 서로 양보하지 마세요. 양보하지 말고 각자 속에 쓰신 분이 뭔가 인도하실 거예요. 서로 양보 한다는 말은 양보함으로써 효과를, 양보함으로써 부부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그런 기대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 있는 게 돼요. 그런 의미 있는 계략을 우리는 할 자격이 있다? 없다?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전에도 나왔으니까 이번에도 나올 거야, 확률 상 이번에도 나올 가능성이 많아, 그래서 실제로 나왔든지 안 나왔든지 그건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새로운 허무와 허탈을 반드시 가져다줍니다.
못 먹는다던 남편에게 개고기를 줬는데 남편이 성령을 받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개고기를 좋아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잔소리 사항에서 하나가 빠지는 허탈함을 느끼죠. 잔소리 할 게 없어서 미치겠어. 뭔 잔소리를 해야 하는데 완벽해, 사람이 잔소리를 하게 틈을 줘야지, 부모가 자식한테 잔소리 할 때도 뭔가 잔소리 할 것을 찾죠. 신발을 던지지나 않나, 뭐가 있을 건데..? 그래서 그걸 가지고 생활의 발견이라 해요. 드라마를 볼 때, 줄거리를 안 보고 꼭 엔지 난 거, 핀 비뚤게 한 거, 화장 잘 안 된 거, 기미 낀 거에 주목하고...‘생활의 발견‘ 삼겹살 먹으면서 엉뚱한 소리 하는 거, 무슨 소린지 알아야지...ㅎ
여기 6절에 봅시다.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책대로 실행해 옮기는데 그것이 항상 비밀로 주어진다. 왜 비밀이라 했습니까? 모든 인간이 이미 분위기가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계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일 하셔야 좋으신, 좋다는 이야기 했죠? 이렇게 해야 진짜 우리 인간의 맘에 쏙 드는, 정말 존경해서 자진해서 헌금을 갖다 바치는 ‘하나님답습니다.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똑바로, 하나님이 똑바로 행동하면 우리가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 준 게 없으니까 내가 안 바치잖아, 똑바로 하세요.‘ 라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밀스럽게 십자가 자체가 비밀스럽다는 거죠. 그것을 지체하지 않고 이룬다 말이죠.
그리고 7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이것은 일곱째 나팔이죠. 나팔을 제가 뭐라 했습니까? 잊어버렸죠? 나팔은 뭐라고? ‘소집명령’이죠. 빰빠라 바 빰~ 빠라빠~ 소집명령, 소집명령이라 하는 것은, 계획 잡힌 스케줄이 실행에 옮기는 거예요. 자~ 실행 시작, 큐~. 감독이 각본대로 Q~, 하세요.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하게 되면 내 속에 씀이 개시되는 거예요. 개시가 되면서 우리가 계획 했던 거, 간절히 10년 동안 계속 기도했던 그런 것이 하나도 응답이 안 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응답이 안 되는 즐거움!!! 응답 돼 버리면 뭐가 생긴다 했어요? 허무와 허탈로 주어져요. 하나님이 만약에 내 기도에 응답하면 하나님은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신이예요.
옛날에 제가 몸이 아파서 기도를 하니까 곧 잘 나았어요. 얼마나 신기한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한번 했을 때는 ‘요행이겠지, 소 뒤 뒷다리 치다가 게 잡을 식이겠지, 그런데 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때는 아, 요건 고정된 규칙이 요 안에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때 내가 응답 받을 때 폼은 어땠었고 시간은 언제고 날씨는 어땠을까, 그때 마음가짐을 어땠을까, 그때 행동은 나쁜 짓을 안 한 상태이지, 참, 나쁜 짓을 했을 경우 손이 더러우면 기도를 안 받는다 했으니까 그때 응답 받을 때 내 손에 좌우로 이틀 동안은 나쁜 짓을 안 했을 거라는 계획 속에서 그러면 똑같이 나쁜 짓을 일 주일동안 안 하면, 일주일이 끝나는 그 시점이 기도에 응답 될 가능성이 많은 마일리지가 많이 쌓였겠죠. 마일리지 아시죠? 아시아나, KTX마일리지 쌓이듯이.
요대로 마일리지를 많이 품으면 쿠폰이라도 하나 더 생기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그런 계획 하에 있었는데, 그게 십자가 앞에서 바로 그것이 반드시 불의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본질, 순수한 죄에 접근 돼 있다는 겁니다. 아! 죄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라가 아니라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내가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따먹지 말라는 나무를 따먹은 그 내림, 혈육적인 내림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이미 따먹을 걸 어떡합니까? 토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죄의 상태로 계속 어디까지 갑니까? 죽을 때까지 가야 되죠. 가면 가는 그 안에 누가 승선했죠?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승선해서 그 죄가 어떻게 십자가의 용서로서, 그 의로 바뀌는 작업을 죄 짓는 현장 가운데서 그때마다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새롭게 그 차이성을 느끼는 기회를 허락해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비밀이죠. 그런데 남들은 몰라요. 이야기해도 ‘나 니 말에 설득 당하기 싫거든,’ 하고 떠나 버려요. ‘ 나 니한테 꼬시킴 당하기 싫거든,’ 그런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에, ‘그건 누굴 꼬시란 말이 아니고 난 그렇단 말이야, 그게 성경에 나와‘ 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굴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현상을 같이 고백할 수 있느냐를 찾는 사람 이예요. 이것이 원체 분류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 봅시다. 10절,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어, 우리는 책을 양식처럼 먹었을 때는 내 사적인 구원 농도로 주신 구원의 능력이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얼래, 그게 아니죠. 택배회사 직원이죠. 택배회사 직원한테 물건 주니까 크리스마스 선물인 줄 알고 자기 집에 갖다 놓으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러니 택배회사 직원들 보증금 받아 나야죠. 도중에 소포 얻어 챙길 지 모르니까.
그러니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 말씀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고정될 문제가 아니고 이게 ‘이동성’이 돼야 돼요. 이걸 영어로 Movement라 해요. Movement란 개념과 이동하는 개념이 다른데요. Movement란 개념을 그림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광장에 사람들이 있다 합시다. 무작위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 전부 다 서 있는데, 어느 한 구석에 이상한 유형의 그림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 있는데 이 안에서는 뭐가 움직이죠? 소용돌이? 사람들의 일단의 움직임이 있을 때 이걸 Movement라고 합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차이 나게 ‘어, 그쪽에 뭐 웅성웅성하는데 시끄러운데, 일단의 움직임이 있을 때 15층 건물 위에서 보면, ’어, 다른 사람은 안 움직이는데 이쪽에만 뭔가 움직임이 생길 때, 그 움직임을 Movement라 한다 이 말이죠.
세상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내가 중심이 돼서 누가 명령을 해야 움직이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嚥荑?이 사람들을 움직이라고 명령을 했습니까? 명령을 안 했습니까? 명령 안했죠. 자기는 자기 식대로 사는데 이쪽에 하니까 이 사람의 존재는 뭐냐, 이쪽 움직임에 종속되는 관계에 돌입되는 거죠. ‘나도 한번 저기 가볼까, 저기 마술하나? 서커스 왔어? 가볼까?’ 갑자기 이런 움직임이 없을 때는 ‘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랬는데, 움직임이 있고 보니까 여기에 관심사를 보이면서 접근 하게 되겠죠. 그래서 이 사람이 본래의 자리를 떠나서 이 Movement에 합세 하고 관심을 갖고 그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 방식을 쓰게 되죠. 이 Movement를 움직임을 원동력을 모른다는 점에서 이게 뭐냐 하면, 비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진짜 교회, 지상 교회 말고, 진짜 교회에서의 Movement는 뭡니까? 바로 먼저 된 자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겠어요? 나중 된 자겠죠. 그렇죠? ‘나는 복음 안다. 신앙 많이 했다. 나는 목사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그게 과거사에서 근거된 지금의 토대가 과거의 Movement, 과거의 어떤 움직임 때문에 됐지만, 지금 계속해서 ‘에헴, 나는 목사다. 나도 과거에는 잘 나갔어. 옛날에 병 많이 고쳤어. 수만을 전도했단 말이야,’ 하고 있는데 주께서 현 움직임은 그쪽이 아니고 어느 쪽입니까? 일반 교인들의 어떤 움직임인데 그 주동자가 없어, 뭐가 있어, 뭐 있는데, 그게 뭐겠어요? 바로 어떤 뱃속에 말씀이 Movement를 주니까 ‘나도 그래, 나도 그래,’ 라고 일단의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거예요.
그럼 이 움직임이 있으면 이 사람은 계속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움직이다가 ‘휙, 휙, 휙 돌다가 피이~~ㅎ 휙, 성경 공부 좋다고 모였다가 2개월도 안 되어 피~이 하고 가면 딴 데서 뭡니까? 또 딴 데서 휙, 하고 움직이지만 모르죠.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 나중 된 자로 하여금 먼저 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먼저 된 자가 우쭐되지 말라는 거죠. 한 때 니가 그런데 있더라도 그것이 너의 권력의 기초로 내가 허락한 적이 없다. 옛날에 전도 많이 하고 옛날에 목사 하고 설교 많이 하고 강의하러 많이 돌아다니면서 강의 한 것을 절대 너의 advantage(유리, 장점)로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어요. 언제 여기서 움직이다가 다른 사람으로 움직일지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지, 우리가 거기서 ’주여, 계속 움직이게 ..‘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움직임으로 가면 되지, 지가 주인공 될 필요는 없잖아요. 이게 바로 어떤 움직임이든 이것은 우리 영적인 세계와 세상 이치도 그래요. 한 때 잘나갔던 조 용필, 지금은 조 용팔이가 더 잘 나가요. 한 때 잘 나가던 인기 배우들, 모델들, 연애 인들도 그렇고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 한 때 잘 나가던 그것이 마치 원래 지가 잘 나가야 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만 떠는 사람들, 오만 떠나 안 떠나 관계없이 떠나 버리면 흡수 되는 것이지, 항상 새로운 움직임 속에 우리는 일단 낮아져야 되는 겁니다. 항상 어떻게 되요? 이 Movement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니까, 어떻게 해야 되요? 우리는 항상 나중 돼야죠.
늘 나는 ’처음 사랑,‘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이렇게 말씀을 심어준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그것이 또 새로운 Movement를 누가 중심 할 것 없이 중심은 주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그 Movement에 가담되자는 말이지, 내가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메시야도 교주도 아니고 그런 것은 없고, 다만 말씀에 대해 서 어떤 즐거움과 깊이에 대한 기쁨은 항상 유지돼야 되죠. 말씀 좋아하다 나중에 조직 좋아하고 말씀 좋아하다 나중에 교회 부흥되는 것을 좋아해 버리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손밖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처음도 말씀으로, 쓰지만 말씀으로서 지금도 그것보다 더 쓴 말씀이 우리 속에 늘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쓰기 때문에 그래서 비밀이죠. 끝으로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같은 신세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잘 난체 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사오니 그 말씀이 남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매일같이 우리보고 자책하고 책망하는 그런 말씀인 줄 압니다. 그 쓰디 쓴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