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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명령으로서의 구원a 1411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2. 9. 16:20

2014-12-08 23:40:15 조회 : 31         
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 (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5장 9절, 8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걸어 갈 때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느냐 하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잖아요? 걸어가라 하니까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그것이 인간들 보기에는 이상하지만 예수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이상한 게 없죠. 명령대로 되니까. 성도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의 명령대로 된 겁니다. 명령 받아서 자기가 실천에 옮기려고 뭔가 사전에 준비한 게 아니고 “너는 구원받아야 돼” 하는 즉시로 나음을 얻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본문 8절, 9절 이 말씀은 결국은 이 사람은 병든 자를 즉시로 일어나 걸어가게 한 걸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즉각적인 주의 명령에 의해서 그 자체로 구원이 이미 돼 버린 겁니다. 구원이 돼 버린 거예요.

요한복음의 특징들은 이렇게 한번 은혜를 받은 사람이 실패한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오히려 은혜 받은 사람은 실패 안 하고 누가 실패를 하느냐 하면 은혜 받은 것을 구경했던 사람들이 많이 실패합니다. 그중에 예를 들면 마르다 마리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물론 오병이어 같은 경우에는 은혜 받았다고 볼 수 없고 그냥 떡을 먹었고, 그들은 단체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봤는데 그 기적 자체가 그들을 고소한 셈이 돼 버렸죠.

기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떡을 좋아했던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자 되게 한다면 그 사람은 둘 중에 하나죠. 지옥 가거나, 아니면 천국 가거나, 뭐 모든 인간이 다 그러겠지만, 지옥 가거나 천국 가거나 둘 중에 하나겠죠. 하나님의 은혜로 갑자기 부자 되었으면 확률이 아무래도 지옥 갈 확률들이 많죠.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 하니까.

부자 되고 난 뒤에 ‘주여 제가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나오면 천국 가지만, ‘맞습니다. 제가 이런 걸 원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부자 된 채 지옥 가버리죠.

그래서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구원도 포함되지만 구원을 포함한 더 큰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구원 안 되는 일도 주께서는 일을 벌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구원되는 일과 병행해서 구원이 안 되는 일도 같이 병행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 사람이 구원이 안 되는 사람을 보고 어떻습니까? 마음이 굉장히 감격스럽겠죠. 그렇죠? 왜 같은 인간인데 나만 구원받고 저 사람은 구원 못 받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왜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 요렇게 이야기했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뭐 구원해줘도 문제라. ‘왜 저를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셨습니까? 안 오셔도 되는데 왜 저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데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은 ‘왜 저에게 병이 생기고 왜 저에게 가정에 우울한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나오겠죠.

자, 계속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보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부탁이다. 걸어가라.’ 이건 아니잖아요? ‘아휴,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이건 아니죠. “걸어가라” 한 순간에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게 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38년 된 병자는 사전에 “주님 판에 있다.‘라는 말이 증명이 된 거죠.

예를 들어서 이쪽에 지갑이 있거든요. ‘여기 지갑이 있습니다.’라고 툭 던지면 이 지갑을 내가 꺼내는 것을 못 본 사람은 지갑이 원래 여기 있었던 줄 알잖아요? 그런데 제가 뭐라 했습니까? ‘지갑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툭 던졌잖아요. 그러니까 지갑이 누구 품안에 있었어요? 처음부터 지갑이 누구 품안에? 내 품안에 있으면서 ‘자, 지갑 여기 있습니다.’ 할 때 이 지갑은 누구 소유입니까? 내 품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 소유잖아요.

그런데 38년 된 병자가 원래 누구 소유란 말입니까? 제가 이런 예를 든 이유가 뭡니까? 이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 품안에 있던 사람 이예요. 예수님이 거기 배치를 한 거예요. 38년 된 병자를. 그리고 병자한테 뭐라 합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니까 그냥 걸어간 거예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저 사람이 고집이 있지, 걸어가라 해서 왜 걸어가지?’ 안 가요, 하고 반항하지 않고 왜 이렇게 나오죠? 이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처음부터 구원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구원이 밖에 나왔다는 그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번 요걸 설명하게 되면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중심이잖아요? 만약에 여기 예수님이 있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야 내가 구원받는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내가 예수를 믿어야 내가 구원받는다. 적어볼게요. 내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지금 이 말이 다 틀렸어요. 구원받는다. 이 말도 틀리고 내가, 이것도 틀리고, 예수 틀리고 믿는 거 다 틀린 이야기거든요. 틀린 단어가 하나, 둘, 세 개, 네 개 나왔습니다. 네 개 틀린 단어 합치니까 플러스 해봐야 그 문장 자체가 이게 성경적이 아니고 다 틀린 문장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자, 어디서 틀렸는가, 하나, 하나 따져봅시다. 내가 예수를 믿어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알아듣지 못한다 말이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이 세상이 어두움이잖아요? 어두움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빛을 알아봐야 돼요? 못 알아봐요? 못 알아봐야 어두움 값을 한다고요. 빛 알아보면 그건 어두움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 아무도 자력으로 예수를 믿을 사람이 없는 방식으로 오셨어요. 오실 때.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를 배반했잖아요? 아무도 예수를 알아듣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처소문제 때문에 그래요. 처소문제.

예수님이 베드로가 따라가고자 할 때 베드로가 오지 못한다 했습니다. 왜 못 옵니까? 하늘에 뭐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죠. 그러면 처소를 사전에 마련하면 되잖아? ‘왜 처소가 없느냐?‘라고 할 때 사람들이 복음 이야기하면서 내가 진짜 이런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가 이거에요.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있고 에덴동산에서 살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사는 그 한계가 어디입니까? 에덴동산 안이죠. 하늘나라 아니죠? 하늘나라는 구가 사는 동네냐 하면 그곳은 하나님이 사는 동네에요. 그러니까 건방지게 저쪽 동네 갈 이유도 없고 갈 필요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든 동산은 에덴동산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거기서 살고 실패하면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거예요.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될 사람이 만약에요, 천국 간다면 특혜에요? 특혜 아니에요? 이건 엄청난 특혜죠. 글자 그대로 무슨 나라입니까? 하나님 나라잖아요? 인간 나라는 아니에요. 인간 나라는 어디입니까? 에덴동산이고 그거 깨지면, 깨지면 깨지는 거죠. 그게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가서도 안 되고 갈 필요도 없고 가지고 못할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에 특혜를 베풀어서 가는 겁니다. 그 특혜를 베풀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분이 따로 인간 나라에 잠입을 했죠. 잠입!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올 때 인간들의 희망은 뭡니까? 하늘나라가 아니고 에덴동산의 회복이죠. 지금 통일교, 지방교회, 웟치만 리는 회복을 주장합니다. 통일교에서 회복을 주장하고 웟치만 리가 회복 주장한다는 말은 한국교회 전부 다 회복을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에덴동산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거 봐서 뭐하는데? 죄 지었기 때문에 에덴동산 쫓겨났기 때문에 의로우면 에덴동산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에덴동산 못 가요. 에덴동산 가면 큰일 납니다. 안 되죠. 에덴동산은 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이미 그건 깨진 상태에요. 요한계시록 22장 에덴동산 아닙니다. 그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 그걸 아들의 나라, 예수님 나라에요.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에요.

그래서 지금 인간들은 이미 추방되고 난 뒤에 갈 곳도 없어요. 그냥 흙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그걸 에스겔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뼈라고 해요. 뼈! 에스겔 37장에. 뼈, 해골이죠. 뼈인데 인자라고 호칭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인자라고 데려와주고 하나님의 성신을 가지고 하니까 거기에 삼위일체 다 모였죠? 하나님 아버지에다 인자이신 예수님에다 또 성신까지 있으니까. 합세해서 뭘 만들어 냅니까? 뼈를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 말은 기존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된다?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죽어 뼈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 뼈가 안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내 구원에 이만큼 기여했습니다.‘라고 외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내 인생은 평소에 내가 관리하는데 내 구원 문제도 내가 관리해 줘야 내가 구원되지, 만약 내가 내 구원에 내가 관리하지 않고 성의를 보이지 아니하면 난 아마 지옥 갈걸.’ 라는 사고방식이 평소에 버릇처럼 그만큼 계속 해온 거예요.

우리 일상생활이 뭡니까? 내 인생은 누가 해야 돼요? 내가 알아서 해야지 아무도 안 도와주잖아요? 그게 천국 가는 데까지 그 버릇이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목사님한테 하는 말이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말 자체가 지금 성립이 안 되는 말 이예요. ‘십일조 할까요? 예배 출석하고 뭘 하면 구원 받습니까?’ 구원이 뭔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에덴동산에 돌아가는 걸 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구원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고.

그러니 처음부터 잘못 된 게, ‘내가 나에게 무엇을 가미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식이거든요. 내가 시작해서 내가 일을 벌여서 어떤 일을 벌이면 그것이 내 구원에 보탬이 되고 구원을 성사시킬 수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내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조건이니까 예수님이 찾아오겠죠. 요 예수님은 100% 뭐가 됩니까? 가짜죠.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여호와를 믿기에 망했죠. 여호와를 믿기는 믿었는데 누구 좋아라고 믿었습니까? 나의 행함을 인정해주는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을 존속케 해주는 하나님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뜻 이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로 하여금 내 생존과 존재를 책임지신다면 그분이 좋은 예수라고 인정하고 나는 믿겠습니다.’ 라는 거예요. 구약을 제대로 봐야 돼요. 구약 이스라엘 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본인이 우상 이예요. 본인이 우상이면서 여호와 이름 부른다고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믿는다고 그게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삼위일체가 우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삼위일체가 우상이고 예수고 성령이고 복음이 우상인 이유가 누가 우상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그 짓들은 전부 다 내 좋아라고 내가 나한테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한 그런 조치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의 그 예수님이 하는 것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 따라 가겠다 할 때 베드로가 그때 조치한 취향은 뭐냐, ‘내가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조치를 했다 말이죠. 주께서 반겼습니까? ‘아이쿠, 대견하구나.’ 하고 칭찬해줬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못 온다. 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처소는 너하고 의논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처소는 누구하고 하느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께서.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처소가 마련되고 난 뒤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처소를 마련해 놓고 나면 그 다음에 성령께서 ‘이미 마련했습니다.‘ 하고 성령께서 통보하라고 차후에 베드로에게 찾아오게 되면 오순절 오게 되면 ’아! 처소가 있구나. 처소가 만들어졌구나.‘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제는 처소가 보고 싶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하겠죠.

사도바울처럼 죽는 게, 내 몸을 떠나서 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을 내가 소망한다. 이 땅에서 나의 목표다. 나는 빨리 주와 거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그걸 거부해서 봉사하라고 제대 자꾸 늦추면서 말뚝 박는 식으로 이 땅에 봉사하라고 그렇게 자꾸 수명을 늦췄잖아요? 그러니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살만한 곳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즐감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재미있으면 안 돼요. 자칫하면 교회 녹는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별 재미가 없어줘야 돼요. 그래야 하늘나라 쳐다볼 게 아닙니까? 지금 이야기 안 되는 소리에요. 어떤 경우라도 주님은 예수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다 싫어해요. 어떤 경우라도. 교회라 할지라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걸 희미하게 만드는 어떤 중간에 끼는 모든 것들은 성령께서 그걸 다 찢어버립니다. 다 헤쳐 버려요. 다 헤쳐서 지금 주께서 오라 해도 금방 갈 마음으로만 유지되기를 성령께서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해 집착할 때 그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식일 수 있고 교회 부흥일 수도 있고, 그래서 사람이 자기 교회 부흥되기를 원하고 그게 주의 뜻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냐 하면 다른 교우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조건하에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설교 시간에 목사가 노골적으로 ‘김 집사 말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하고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돼요? 정이 뚝 끊어지고 에이 씨, 잘 먹고 잘 살아라. 돈이나 내 줘. 하고 다른 교회 가버리겠죠. 가면서 저 교회 이단이라고 소리하겠죠. 주님의 얼마나 좋은 조치십니까?

그동안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다는 것이 사실은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 교회 자기 자신의 자리가 있고 자기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얻을 건더기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봉사한 꽃꽂이들이 있고 내가 헌금한 피아노가 있기 때문에 그걸 감상하는 재미로 온 거죠.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애들이 있고 내가 봉사하는 성가대 소프라노 자리가 있고 이런 것들로 내가 아름답게 만들고 나를 참하게 만들고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부각시키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 교회를 사랑한다고 했죠. 사실은 그건 스스로 자기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를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뭘 교체하려고 합니까? 이 자리를, 우리를, 내가를 결과로 뒤로 보내버리고 이 앞의 자리를 예수님으로 두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믿게 한 자가 너라는 겁니다. 주체와 그 결과물을 위치를 바꿔놓는 겁니다. 위치를 바꾸려면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올라오다가 쭉떡 미끄러지고 올라오면 미끄러지고 하는 그런 게 있어야 되겠죠. 그 예가 뭐냐 하면 38년 동안 그 연못 가 있어도 그 누구도 나를 1등으로 물 움직일 때 넣어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그 사람은 38년 동안 실패한 자죠.

그 실패했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결여, 결핍이란 뜻입니다. 자기로서는 더 이상 자기가 자기한테 뭐를 가해서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끊어지고 희박하죠. 요런 38년 된 병자와 같은 차원에 있는 사람이 세리와 그리고 강도, 그리고 창녀, 이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구원받지 못한 강도 있죠? 그 사람 주장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항상 성경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뭐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그 심정 있잖아요? 그런 걸 놓치면 안 돼요. 그게 현재 우리 마음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동기 있잖아요? 그 동기를 항상 생각해줘야 돼요.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 팔아먹고 그 다음에 뉘우쳤잖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뉘우치면 어디 갑니까? 천국 가잖아요? 가룟 유다는 뉘우쳤잖아요?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갔죠. 무슨 뉘우쳐도 안 되는 일이 있네.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왜 뉘우쳐도 안 되죠?

그러니까 구원이 회개해도 안 돼요. 반성해도 안 되고 회개해도 안 돼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극도의 예민함,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찾아내려고 합니다. 뭘 하면 됩니까? 소위 큐티라는 걸해서 뭔가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뭘~ 해도 안 돼요. 뭘 해도 안 됩니다. 안 해도 안 돼요. 그리고 해도 안 돼요. ‘에이, 때려치워라, 나 아무것도 안 하련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안 돼요. 해도 안 되고. 왜냐 하면 특혜기 때문에! 특혜는 자격이 없어요. 하늘나라 들어갈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자격 없는 자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자체가 자기 주제 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오거든요.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내가 가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네가 원래 안 가도 되는 곳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언질을 주시면서 데려갑니다. 이 말은 네가 소원하고 소망했던 그 동네가 아니다. 네가 천국을 소망했어? 그러면 그 천국 하고 내가 보내준 천국하고는 완전히 딴판 이예요. 우리가 기대하고 소원하고 소망했던 그 동네는 무조건 아니에요. 우리가 소망했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던 아이디어가 집결된 거거든요. 아~주 좋은 것들, 그러니까 여호와증인의 ‘깨어라’ 보면 나오잖아요. 천국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잔디 쫙~ 깔렸죠? 잔디 관리 누가 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분수 있고, 이슬람 같으면 여자들이 비키니 옷 입은 모습으로 있고, 천국에 비키니 옷 입은 여자가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우리가 결핍했잖아요? 결핍했으니까 결핍을 채워주는 용도로 뭔가 고대하고 있잖아요.

자,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소원한 게 뭐였습니까? 병 낫게 하려고 소원한 게 아니고 ‘누군가 나를 데려다가 제 1번 타자로 연못가에 두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죠. 그런데 그 38년 된 병자의 소망이 들어줬어요? 안 들어줬어요? 들어줄 리가 있어요? 그거는 익히 인간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갇혀 있는 이 어두움에 갇혀 있는 그 동네나 소통되는 그러한 기대고 종교고 희망이고 오락이기 때문에 그거는 주께서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그러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게 되었습니까? 여기서 어떻게 건강하게 되었습니까? 여기서 문제가 된 거예요. ⓵번 예수님 때문에 건강하게 되었다. ⓶번 예수를 믿음으로 건강하게 되었다. 몇 번입니까? ⓵번이잖아요. 잘 아시네요. 잘 아시니까 내가 기분이 왜 좋은지 모르겠네요. ⓵번인데 꼭 ⓶번이고 싶어해. 왜? 저 인간은 안 믿어도 저는 믿었습니다. 꼭 자기가 하고 싶어. 주체가 되고 싶어. 또 어느새 저 밑에 있다가 기어올라 와서 주체 자리에 또 차지했어요.

그러면 또 발로 차버리는 거예요. 내려가. 너는 결과물이잖아. 결과물. 구원되어야하기에 구원된 거예요. 안 찾아오셔도 되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안 찾아와도 괜찮아요. 내 행세 하는 걸 봐서 안 찾아와도 괜찮은데 구원 안 해줘도 돼요. 그런데 구원해 주신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줘야 남들이 이야기할 때 ‘누가 구원 했노?’ 하면 ‘주님이 구원했지.’ ‘그건 아는 거고. 그건 네 겸손이고, 네가 기도원에서 며칠 기도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얼마나 봉사하고 선교 회비를 얼마나 내고 성경공부를 몇 일하니까 됐느냐? 그걸 묻는 거야.’ ‘그런 아닌데? 그런 거 없었어.’ ‘그런 거 없었어.’ 하면 질문한 사람이 굉장히 절망합니다. 왜, 구원받았다 하니까 자기도 구원받고 싶은데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어떤 행위가 있었을 건데, 그 행위를 사다리 치우듯이 치워버리니까 자기는 저 사람처럼 구원에 이르는 사다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근심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죠.

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이 오직 예수님으로 구원되었습니다. 또는 예수님이 피의 능력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할 때 교인들은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십자가 피 흘리는 것은 인정해 주겠는데 그 피가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알려 달라. 사람들은 그게 듣고 싶은 거예요. 어디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뭐 금식을 할까요? 그게 듣고 싶은 거예요.

또 예를 들면 어떤 집사님은 자랑하다 시피 ‘일 년 전에는 나만 교회 와서 예수 믿었는데 지난주부터 우리 남편도 교회 나와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소리 듣고 혼자 교회 나온 사람들은 뭘 듣고 싶냐 하면 도대체 남편을 어떻게 꼬셨으면 예수를 믿고 나왔습니까? 꼬시는 방법, 또는 협상책? 타협책을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묻는 거예요. 등산을 이번에 한번 가준다든지 이런 식으로. 안 그러면 남편이 좋아하는 차를 바꿔주는 그런 식으로. 하여튼 어떻게 했기에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 방법을 듣고 싶은데 정작 진짜 성령 받아서 온 그 남편과 부부는 ’그런 거 없었는데요.‘ 이러면 듣는 사람이 화가 나죠. 왜, 자기 남편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이렇게 해서 교회오시고 말씀 듣게 하시고,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남편 오게 된 것도 주께서 뒤에서 떠밀어서 왔습니다.’라고 자꾸 주체를 주님으로 집어넣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주체가 된 입장에서는 주님의 주체에 대해서는 그걸 납득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럼 이상한 교회다 하고 다 가버리죠. 두 번 다시 함께 하지 않더란 말이죠. 나중에 하나 둘 다 가버리고 별로 남지도 않죠. 그러면 사모님이 뭐라 하겠습니까? ‘너도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라’ 그렇게 나오겠죠.

요한복음 5장에서 제가 첫째 시간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중심은 없다.‘입니다. 제가 서울에 오면 어디서 왔습니까? 대구서 왔죠. 그러면 후딱 대구로 내려가잖아요. 후딱. 그러면 남들 보기에 중심이 어디가 있습니까? 대구하고 했죠. 사실은 대구가 중심이 아니에요. 대구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그거는 안 됩니다. 그저 자주 중심이 되었던 곳이지, 중심이라고는 이 땅에 없어요. 중심이란 걸 하나님이 이 땅에 용납을 하지 않았어요. 돌아갈 곳이 없어요. 히브리서 11장 말씀처럼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만약에 그래도 중심이 있으면 좋지 않으냐? 중심이 있어 버리면 어떤 점에서 좋지 않으냐 하면 중심이 있어버리면 심리적 안정이 돼요. 심리적 안정이 되면 이 세상에 눌러 앉고 싶어 하고 그 심리적 안정이 되는 그 자리를 중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식이나 또는 모든 가족들에게 내 중심의 자리를 자주전화하고 자주 돌아보라고 요청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딸아 너 시집가서 자주 나한테 친정엄마 잊지 말고 자주 전화해라. 자꾸 이렇게 묻고 한번 씩 서울 오거든 들여다봐라. 대전에서 살지 말고 자주 와라.’ 자꾸 이렇게 하는 버릇이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은 중심이 있는 셈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 중심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중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중심이 돼 버리면 그 사람은 스스로 우상을 지금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중심이 없는 이유가 예수님만이 중심 이예요. 38년 된 자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어디가 계십니까? 이 땅에서 정처 없죠. 정처 없고 예수님이 가신 일하는 중심은 어디입니까? 하나님 우편에 계시잖아요. 그러면 주님 계신 곳이 중심이 위에 있죠. 골로새서 3장 3절에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어디 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생명이 거기 간직돼 있다 했죠.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중심은 위에 있기 때문에 시계추처럼 위에 있고 밑에서는 진 자의 추처럼 흔들리고 있는 거죠. 여기 갔다가 오늘은 내려갔다가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로 그냥 그저 다니는 거예요. 정처 없이 거처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중심이 없을 때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중심 없을 때만 우리는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증거가 될 수 있어요. 중심이 예수님 계신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야 환란 날에 우리가 버텨낼 수가 있습니다. 환란 날에.

여러분, 사도바울이 중심이 어디입니까? 지리상, 없잖아요? 예루살렘도 아니고 다소 사람으로 젊을 때 있었지만 그 뒤부터는 중심이 있었어요? 없었습니까? 오늘은 이 길, 내일을 저 길, 정처 없이 그냥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저도 성령께서 대구에 오랫동안 인도하시는데, 목사님은 서울 어디입니까? 구파발에서 오랫동안 있는데,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구파발 못 떠납니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 이예요. 미국으로 가라 하면 가야 되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 중심이 원래 없는데, 중심이 없다는 말은 ‘주께서 저를 구원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고백이 그 고백 이예요.

그러나 중심이 있어버리면 나를 위해서 주님이 뭘 해줬습니까? 라는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나 자신이 우상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중심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로 하여금 낫게 함으로써 말미암아 사람들은 누굴 주목하겠어요?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겠죠. 그러면 38년 된 병자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그래, 내가 예수 믿어서 나았다.’ 이러면 안 되죠. 어떻게? ‘나 말고, 나는 그냥 당했어. 당했어. 당한 거야. 내 뜻은 이거였어. 누가 먼저 나를 연못가에 두는 그것이 나였지. 내가 이렇게 명령함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세상에 이런 일은 없었어. 나보고 닦달내지 마. 나보고 믿은 것에 대해 나한테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마. 내가 증거 할 것은 오직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했다는 그 소리뿐이야.’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 바로 구원의 모습 이예요. 2000년 교회 역사에서 구원의 모습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라를 이야기하는지, 구원의 모습은 딴 게 아닙니다. 주께서 자기 숙제 풀듯이 주께서 하신 일이 결과가 뭐다? 구원 이예요. 여기에 뭐가 끼어들면 안 됩니까? 교회 끼어들면 안 되죠. 왜 교회는 행사를 벌이기 때문에. 추수 감사절, 온갖 절기, 제직회, 장로 뽑기, 권사 두 사람 더 뽑기, 그거 해서 뭐하는데? 그거 왜 하는데요? 2/3가 맞느냐? 제직회 과반수가 맞느냐? 그게 성경 어디 나옵니까? 2/3가 예레미야에 나오던가요? 그게 어디 나옵니까? 그래도 목사님, 교회가 있음으로써 유익된 게 많지 않습니까? 뭐요? 교회에 주일학교 애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공부하고 그러니까 교회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린애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이것이 이렇게 되면 중심이 어떻게 돼요? 바로 내가 중심이 되겠죠.

그러면 결국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얼마나 예수님을 이용해 먹었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되겠죠. 내가 어떤 식으로 재롱을 부리고 아부를 부리면, 뇌물을 바치면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소망을, 원하는 소망은 딴 게 아니고 내 자식 공부 잘하고 국가와 교회와 민족을 위한 일꾼 되는 거, 그거잖아요? 물론 크다는 의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은 내가 중심이 따로 차고 있는 이상은 이것은 중심이 주님 가 계신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는 글렀죠. 그런 마음 들기는 글렀죠. 그렇잖아요?

한번 물어봅시다. 사도바울의 교인 수가 몇 명이었습니까? 사도바울의 교인 수는 한명도 없어요. 왜냐, 전부 다 누구 교인입니까? 주님의 교인이지 자기 백성 한명도 없죠. 그래도 목회자는 양들이, 그 양이 누구 양입니까? 주님 양이거든요. 내가 양이 목자도 알고 목자는 내 양을 알고, 주님의 양입니다. 내가 내 양을 악한 세계에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때 사도바울이 애써서 안 빼앗겼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장악하기에 안 빼앗겼습니까? 예수님께서 장악했기 때문에 어떤 권세에도 자기 양을 빼앗기지 않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걱정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자기 일이 아닌데 왜 자기가 걱정하죠? 자기 걱정 하는 자체가 굉장히 수상해. 너무너무 수상하지 않습니까? 제 말이 지금 논리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예요? 맞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죠? 그러면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이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를 증거 하면 되죠. 이게 걱정할 사항입니까? 본인이. ‘주여 제가 설교를 잘못해서 두 명 놓쳤습니다.’ 이런 말이 이게 정당한 말 이예요? 가당치 않은 말 이예요? 이게 가능한 말입니까? 가당치 않은 말이죠.

아니 예수님이 얼마나 능력이 없었으면 사도한테 맡겨서 ‘아이쿠, 이놈아 그걸 놓치다니, 아이쿠, 클 났다.’ 세상에 주님이 그런 주님이십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주님은 모든 일에 차질이 없는 걸로 돼 있어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는 일체 없어요. 심지어 주님이 어느 정도로 일이 차질 없느냐 하면 곳곳에 마귀를 가지고 사용을 합니다.

마귀를 왜 사용하느냐 하면 못 올 놈은 가라고 배제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아! 미치겠다. 오지 말라 했잖아. 좀 교회 오지 말라 했잖아. 좀 가줘. 너는 가면 안 돼, 갈사람 아니야.’ 이걸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마귀를 풀어서, 마귀 푼다 하니까 주님이 마귀 대장 같은데, 마귀 대장을 사용하셔서 귀신들을 풀어서 절대로 구원 안 될 사람이 천국 오는 것을 저지합니다. 왜냐 하면 천국은 누구의 나라기 때문에? 본인의 나라기 때문에, 본인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본인이 넣어주고 안 기뻐하면 안 넣어줍니다. 사랑하면 넣어주고 미워하면 안 넣어줘요. 사람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고 미워하기 위해서 미워할 자를 일부러 주께서 만들어 내버려요. 아유, 주님의 집념도 대단하죠.

미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미워할 자를 따로 만드는 거예요. 왜 미움과 사랑은 주님 본인의 속성이기 때문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죠. 그러면 야곱 에서가 태어났습니까? 안 태어났습니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야곱을 만들어놓고 미움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만들고? 에서를 만든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참 이 대목은 충격적인 대목인데요. 창세기 27장 38절에 에서가 뒤늦게 한탄하면서 하는 말이 이겁니다. 아버지 이삭이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다 줬잖아요? 그것도 속여서 리브가에게 속임을 당해서 줬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속여서 했기 때문에 그걸 취소시키고 정작 밀어주려한 큰 아들에게 밀어주면 되는데, 이삭은 왜 그렇게 하지 않죠? 이삭이 뭘 알았느냐 하면 이삭이 지금 실수한 거죠? 본의 아니게. 속아 넘어가잖아요? 야곱한테, 리브가한테 속아 넘어갔죠.

바로 이삭은 거기서 뭘 알았냐 하면 내가 좋은 쪽으로, 같은 쪽으로 하나님이 내 뜻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의 뜻은 날 사용해서 내 원대로 되지 않는 방식으로 주께서 일이 되도록 주께서 날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삭이. 주께서 날 사용하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신 거예요. 왜, 그래야만 모든 구원이 누구 뜻이다? 사람의 뜻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 실수를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하게 모든 게 주의 뜻대로만 되는데 나는 다만 거기에 도구로 휘말려갔다는 사실,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삭은 동감합니다. 동감하면서 하는 말이, 에서가 하는 말이 아버지여 그러면 나한테 올 복이 이거뿐입니까? 하나뿐입니까? 이야기했어요. 그게 정~말 중요한 말 이예요. ‘하나뿐입니까?’라는 말은 뭔 뜻입니까? 축복이 몽땅 저쪽으로 다 넘어갔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을 둘로 나눠서 형제간이 있으니까 사이좋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고, 복의 속성 자체가 반드시 복이 지나간 자리에 반드시 복이 없는 자리가 등장해야 돼요. 그게 뭐냐 저주의 자리고 그게 지옥의 자리에요. 지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잠시 복이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완전히 복이 이렇게 밀려나와서 ‘실은 여기 있었지롱.’ 해서 지옥이 있음을 보여줘야 된다니까요. 모든 인간은 죄를 지었으매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잠시 복이 있다가 복이 치워지면서 모든 인간은 지옥 가야 마땅하다는 게 드러나죠. 그 사실을 특혜 받아서 이미 천국 간 사람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을 가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야곱의 자리에요.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야곱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38년 된 병자가 알게 된 건 뭡니까? 내가 받은 복은 내가 원해서 받은 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고난이 있다는 거, 일방적인 선택의 고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나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냥 찾아와서 나를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38년 동안 병들은 것은 뭐에요? 그거 누구 뜻입니까? 자기 죄 지어서 병들은 거예요? 어떻게 해서 병들은 겁니까?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38년 동안 병드는 그런 기간을 반드시 보내야 되는 겁니다. 그거 기간 제에요. 기간 제. 정식 교사가 되는. 반드시 그 기간을 거쳐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38년 된 병자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이 은혜다. 그동안 38년 동안 병들은 것도 돌아보니까 그게 은혜의 자국인 것을 주님 만나니까 소급해서 몽땅 이제야 눈에 보입니다. 하죠. 그게 바로 구원 이예요.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과거에 교도소 몇 번 갔다 왔습니까? 들락날락 하죠. 강도가 강도질했죠. 그런데 예수 믿고 보니까 그것이 뭐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반드시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강아지가 아픕니까? 반드시 아파야 되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우리의 주체의 자리를 빼고 주님의 주체의 자리를 우리 주체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뒤돌아보면서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맨날 뒤돌아본다 하는데 앞은 왜 보면 안 됩니까? 앞을 봐야 이건 몽땅 거짓말 이예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왜, 인간은 내일 일을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겁니다. 내일 일 하는 것은 사실은 과거에 근거한 피어나는 여분의 망상에 불과하거든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땅겨서 자꾸 상상해서 소설 쓰는 이유가 지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내일까지 그걸 연장시키려는, 갑자기 은혜 받은 순간부터 없는 내 주체 자리에 내가 없다가 갑자기 내가 구원받은 순간 저 말석에 있던 내가 쫓아와서 그 구원의 주체 자리에 내가 어느새 덜렁 의자에 앉아 버렸어요.

그래서 내일 이처럼 은혜 주시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이렇게 앉아서 흔들흔들 까불고 있다 말이죠. 촐랑대고 있는 거예요. 이제 은혜 받았으니까 내일도 은혜 주시겠지? 주께서 뭐라 하십니까? “빨리 그 자리에서 나와. 빨리 그 자리에서 나오란 말이야.‘ 그렇게 되면 누굴 증거 하겠어요? 내 믿음 좋다는 걸 증거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간증 집회잖아요. 내 믿음 좋다는 것을 증거 할 수밖에 없다고요. 이거는 주님 앉아 있는데 자기가 와서 거기 앉아 보니까 주님이 눌려 가지고 ’아이쿠, 이게 안 비키나?‘ 어디 남 앉았는데 앉아버리면 이게 뭐에요? ”비켜라“ 이러는 거죠. 성령께서는 일을 그렇게 합니다. 주님 가리지 말고 비켜. 네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주체는 너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주께서 만들어 준 하루 일과였다. 저녁 때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그걸 생각해봐야 됩니다.

자, 이제 문제가 요한복음 5장 돌아봅시다. 38년 된 병자가 이제 주님의 일을 하잖아요? 그런데 첫 번째 받은 사명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그 사명도 주께서 주신 겁니다. 뭐냐, 안식일에 걸어가는 거. 안식일에! 야! 9절에 보세요.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니라” 이 날은 무슨 날이다? “이 날은 안식일이라“ 이 타이밍은 그 38년 된 병자가 정한 거예요? 병자를 낫게 한 주님이 정하신 겁니까? 주님이 정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38년 된 병자는 본인의 사명도 본인이 결정한 것도 아니고, 주께서 구원할 때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그 재료가 계속 그 인생에 개입되고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구원받은 사람은 막 살아야 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막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계획이 있다? 없다? 내 계획이 일체 없다. 더 나아가서 아예 없어야 돼. 왜, 매일같이 누구 계획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주님의 계획들이 계속 쳐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막 살지 않고 내가 따로 어떤 계획을 잡아버리면 이거는 주체가 이미 자기가 주체가 돼서 건전하고 고상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그 노선을 누가 소설을 쓰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돼서 내가 소설을 쓰는 거예요.

나는 드디어 어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나는 앞으로 선교 회비를 올릴 것이고 교회 봉사 이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자기가 미리 해놓고 ‘아이구, 내가 너무 귀여워.’ 자기가 생각해도 김 지민이가 개콘에서 하는 거 있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내가 믿음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이거는 칭찬 받아도 교회 어느 집사 권사보다 칭찬받고, 내가 새벽기도 나와서 새벽기도 하는 모습을 옆에서 카메라 찍는다면 얼마나 근사해 보일까, 저 인간은 술만 쳐 먹다가 이제는 새벽기도 나오는구나. 하고 칭찬하게 되면 야, 그야말로 이건 하나님 영광 막 되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건 누가 누구한테 짊어진 사명입니까? 자기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조작한 사명인데 그 조작된 사명 어디서 나온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들었던 풍월이잖아요. 테레사 수녀, 주 기철 목사, 이런 거 해서 짜깁기해서 또 뭐 어떤 봉사를 했더니만 갑자기 사업이 잘 되는 이런 들었던 거 있잖아요. 그 짜깁기 하면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빠져요. 성경이 빠집니다. 간증이 들어온 순간 성경의 진리는 다 나가버립니다. 성경 안에서 모델을 찾아야 되는데 성경 안의 모델은 지지리 궁상이라. 엘리야, 엘리사, 거지 나사로, 그리고 스데반집사, 주일학교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스데반집사 본받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손들면 그 애는 이상한 아이에요. 죽을 때 돌에 맞아 죽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냥 편안히 가는 잠에 죽고 싶지 돌에 맞아서 울퉁불퉁 튀어나와서 죽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평소에 구원받았다 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육은 개시가 발작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은밀하게 육속에 있던 그 나의 욕망이 소위 신앙, 이제는 구원받았다는 그걸 빌미로 그게 정당화 된 채 이제는 욕심도 챙기고 주님께 영광도 돌린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수작으로 소설이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번에 애만 서울대학에 붙는다면 제가 2000만원 바치겠습니다. 라는 그러한 새벽제단에 자기가 알아서 돈 계산해서 하고.

시간이 약간 됐습니다만 요거 이야기하고 쉽시다. 아나니아 삽비라 있죠? 사도행전 5장에. 그 사람들 돈 다 내도 죽었어요. 돈 반 내서 죽은 게 아니고 그 사람 돈 다 내도 죽을 사람 이예요. 왜냐 그 사람들 부부는 돈 내나 안 내나 돈 한 푼 안 내도 죽었어요.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은 성령을 속였어요. 성령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 이예요. 사도만 보이고, 베드로만 보이고, 평소에 살아가는 그거에요. 물론 지옥 갔다는 걸 단정하기는 곤란하지만 어쨌든 죽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죠. 왜 그렇게 아나니라 삽비라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오늘날 똑같아요. 그들하고 우리나 똑같다는 겁니다. 구원받았어요? 그 다음부터 소설 쓰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주인공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주어진 사명이 어디서 흘러나와야 돼요? 성경에서 나와야 될 걸, 성경은 빼고 교회에서 유명인사 된 사람, 환영 받고 인기 있는 사람, 그걸 모델로 삼아서 그것이 자신의 제2의 모델이 돼 버리는 식으로 기도제목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나온, 성경 압축해서 있는 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안식일, 요건 10분 쉬고 이제 성경 안에서 어떻게 뽑아서 이 38년 된 병자에게 주어지는지, 그건 10분 쉬고 이야기해봅시다.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 5장9(명령으로서의 구원)141106a-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