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41028-마17장7절(신앙의 허상)57강 - 이 근호 목사
믿음이 뭐냐 할 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음으로서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 말로 설명해 달라고 한다는 자체가 본인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뭔가 저 사람은 갖고 있는데 나한테는 없다. 그러면 그걸 설명해 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설명해 주게 되면 그대로 흉내 내거나 상상하거나 모방할 용의가 돼 있다는 뜻인데, 그 자체가 이것은 가짜 구라입니다. 거짓말이거든요. 없으면, 없으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썼던 소리의 철학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보통 어려워서 결론부터 보잖아요. 결론부분에 이런 글을 썼지요. 예수 믿다가 시들해가지고 안 믿어진다. 전에는 주님 사랑했는데 지금은 사랑한다는 게 어느새 나한테는 벌써 빠져나간 것 같고 지금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아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이런 종류 같으면 그건 애초부터 선물로 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17장이 중요한 겁니다. 그게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분명히 그들은 봤지요. 변화산을 봤어요. 본 건 믿음이 아니에요. 아, 이게 어려운 거예요. 본 것은 내 믿음을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짜 믿음을 강화시키지요. 가짜 믿음을.
봤다. 그러면 봤기 때문에 믿는다면 그것이 두 번 다시 안 나타나고 안 보인다면 어떻게 하느냐, 믿음도 없어지지요. 보고 믿는 믿음이 이런 문제가 생겨버려요. 계속 보여주면 괜찮은데 보일 때는 믿는 것 같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보이니까 안 보임과 동시에 믿음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원래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잖아요. 누가? 본인이. 본인 자체가 무얼 새롭게 믿음을 플러스할 게 아니고 본인 자체가 믿음의 결실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나를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위하여 내가 필요로 하는 거죠. 그리스도의 세상, 천국이라는 세상을 위하여 내가 필요로 한 것이 있다는 거예요. 처음 믿을 때부터 나는 무엇을 봤으니까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되고 뭔가 필요에 따라서 내가 부름을 받았다, 이렇게 믿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 믿음이 유지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래, 나 잘되기 위해서 저렇게 일했어.” 이래 버리면 이건 계속 자기가 그것을 유지해야 될 그런 부담을 느끼는데 “주여, 왜 불러줬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되어버리면 내 필요에 의해서 주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주님 필요에 의해서 내가 초청받은 셈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끝까지 가는 겁니다. 빼도 박도 못 하지요.
그러니까 “안 찾아오셔도 되는데 왜 찾아오셨습니까?” 이리 되어야 돼요. “그냥 내버려 두시지요. 지옥 가도록. 그냥 놔두시지 왜 자꾸 와가지고 강제로 천국으로 몰아넣으십니까? 그렇게 하신 것은 분명 제가 아닙니다. 주여, 저 아니거든요. 저 구원받는 거 제 노력 아닙니다.” “니 지금 혼자서 뭐하고 있노? 니 몰라도 돼! 니 빠져나가.” 그러니까 남한테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남한테 설명 해줘버리면 그 다음 그들이 흉내 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아주 오묘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변화산 보여주고 탈락시키는 방법, 마음껏 보여주고 세 제자에게 변화산 다 이야기해주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가지고 다 믿는 사람 되게 해놓고 땡! 탈락 완전히. 보고 믿는 게 의미 없게. 그러면서도 나중에 성령 받으니까 비로소 성령 받고 난 뒤에 변화산 이야기를 베드로후서에서 새롭게 또 이야기하지요. 내가 그 때 주께서, 변화산 이야기를 뒤늦게 다시 생각해서 하는 겁니다. 그건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이삭이 야곱한테 속아가지고 엉뚱한 자에게 축복을 하고 정말 축복을 노렸던 자에게 저주가 가도록 하잖아요. 그래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을 소급해서 압니다. 그래서 내가 계획한 내 인생은요, 이것은 찢어버려야 되고 뒤늦게 주님께서 조성한 인생을 내 인생으로 받아들일 때 그게 믿음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이미 노아가족만 구원되기로 작정하고 방주 만들었어요. 그건 노아의 개인적인 의견은 전혀 무시되는 겁니다. 노아의 인생은 노아가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외부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주일날 설교할 때 그랬잖아요. 노아방주에서 두 종류의 짐승이 나오지요. 하나는 까마귀 나오고 하나는 비둘기 나오지요. 까마귀, 비둘기가 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중보자에요. 왜냐, 그들은 심판 가운데서 심판의 경험을 품고 방주에서 나왔던 자들입니다. 심판이에요.
심판이란 말은 뭐냐 내 의견, 내 의사를 완전히 심판해버린다는 뜻이거든요.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의사 자체가 심판당할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럴 때 나는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중보자에 의해서 나는 구원되었다, 하는 겁니다. 주일날 설교가 뭐냐 하면, 바로 ‘중보자가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로 구분된다.’ 그게 요지거든요. 왜 중보자를 놓쳐버려요. 중보자를.
왜 자꾸 “내가 구원 받았다.”를 결과적으로 나오느냐 말이죠. “중보자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다.” 해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중보자 덕분에 하기 전에 우리는 왜 중보자가 필요한지를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변화산에서 보이게 하는 거예요. 보니까 자기들은 마치 어떤 착각에 빠지느냐 하면, 봤으니까 이제는 누가 뭐래도 믿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해놓고 그 믿음이 나중에는 십자가 앞에서는 전부 다 무용지물이 되는 그러한 체험으로 드러나 버리죠. 그게 십자가의 위력이에요. 십자가는 본 것, 들은 것, 다 너를 구원하는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봤어도 구원 안 돼, 느껴도 구원 안 돼, 물위를 걸었잖아요. 그 기분 여러분 아세요? 모르지요. 안 해봤으니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계속해서 떡 광주리에서 나오니까 5천명 먹이니까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그런데 그런 체험이 전혀 내 구원에 나의 신상에 어떤 조금이라도 변화를 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죽했으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했겠습니까. 전혀 그건 믿음이 아니었지요. 그냥 허황된 체험을 한 거죠. 성령에 의해서 어떤 체험을 본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피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내가 믿어도 구원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그 믿음입니다. 참, 어려운 말이지요. 내가 믿는다는 내 믿음이 내 결심이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나를 구원한다,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죄가 나를 구원한다. 버지니아 뉴저지 강의할 때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한 거예요. “목사님, 죄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의가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해서 의로워지려고 했는데 죄가 있는 그곳에 가야 내가 비로소 구원된 자로 확인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수고한 무거운 짐이 그 순간 그 분은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로 하여금 보게 하셔서 그것이 오히려 교만케 했지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에 지금 사도들이 놓여있습니다.
마태복음17장6절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요. 아! 예수 외에, 뭔가 외에, 뭔가 제외하고, 그러니까 예수 제외하고 아무것도 안 보였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구원 받을 사람이냐, 안 받을 사람이냐 하는 것은 저 예수님을 니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부로서 결정나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그 분을 나의 중보자로 보게 되면 구원받고 내가 상대할 사람으로 본다면 지옥 가는 겁니다. 중보자라는 말은 내가 얼마나 엉터리이고 얼마나 무능력하면 대신 나타나신 분이거든요. 대신 나타나신 분 앞에서 누굴 포기해야 돼요? 나는 나를 포기해야 돼요. 불교가 벽을 보고서 겨울에 도를 닦는 것, 수양하고 정진하는 것, 이런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앞이 아니고 자기가 상상한 부처 앞에다가 하잖아요. 그것은 땡! 탈락이 되는 겁니다.
중보자 앞에서 자기 자신은 헌금, 전도 뭘 해도 이건 땡! 탈락이 된다는 것을 이건 아주 아낌없이 여유만만하게 조금도 실패가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했지요. 탕감 받은 자는 더 이상 실패나 실패감이 없다고요. 탕감을 해줬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탕감을 했다는 말은 우리는 어떤 탕감 받은 결과물이 되지요. 그럼 탕감 받은 자의 모습으로 평안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실패가 있어요? 인생 실패가 왜 있습니까? 탕감 받은 것 만해도 넉넉한데 더 이상 그 앞에 무슨 실패가 있습니까?
마치 불도저가 다 밀어놓고 자기는 그 옆에 새로 지은 넓은 아파트 25층에 떡하니 살면서 자기가 가끔은 재개발하는 자기 옛날자리 보면서 실패를 느낍니까? “아이고, 내가 여기 살았는데. 어릴 때 벽지에 낙서한 것이 안 뜯기고 그대로 있네.” 그게 실패입니까? 그게 넉넉함이죠. 그렇잖아요? 마음 놓고 우리는 재방송보자는 말이죠. 마음 놓고. 녹화방송 보는 거예요. 무서운 영화 처음 볼 때는 무섭지만, 보고 난 뒤에는 안 무서워요. 드라마도 왔다, 장 보리 볼 때는 아슬아슬하지만, 보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결국은 장보리가 승리하게 돼 있어요.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더라는 말은 모든 기독교는 다 마귀가 만든 종교라는 뜻이에요.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는. 예수 믿으면 되지 종교는 왜 만들어요. 교회를 왜 만들어요. 예수 믿으면 되지. 예수 외에는 그 외 밖에는 교회도 포함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그다지 애착을 집착을 안 갖지만, 목사는요, 여기에 왔던 어떤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는 이거해서 교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뉴저지 목사님께서 오기 전에 목사님 친구가 LA로 넘어가는데 LA로 와가지고 당신교회에 모셔가지고 설교 들어봐라 했더니만 그 친구 목사가 감당이 안 된답니다.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은 그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내 교회에 유리할 것인지 불리할 것인지를 따지는 거예요. 도대체 예수 외에 교회만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만약에 예수 말고 예수 외에 다른 이야기하면 절대로 나 같은 인간 초청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만 이야기하면 초청해도 되는데 본인이 예수 외에 다른 것을 믿고 있어요. 그 말은 예수를 안 믿는다는 뜻이에요. 안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예수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은 개판이죠. 이건 큰일 날 이야기이죠.
그래서 그 말을 간단히 해서 감당이 안 됩니다. 이런 말을 한 거예요. 세상 구조 간단합니다. 예수 외이냐, 예수뿐이냐, 두 종류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오지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성경은 지금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1장, 2장이야기가 뭐라고요?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를 창조했다, 가 창세기1장, 2장입니다. 그걸 창세기 그냥 보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창세기를 달달 외웠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잖아요. 거기서 뭘 못 끄집어냈어요? 창세기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끄집어낼 수 없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못 끄집어내고 이삭도 못 끄집어내고 야곱도 못 끄집어냈어요. 못 끄집어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께서 언약이 임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장차 올 무려 2000년 후에 올 사람을 미리 당겨서 생각한다면 가능한 겁니까? 우리가 명량이나 영화를 통해서 이순신장군을 생각할 수 있어요. 왜, 이미 과거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부터 1000년 후 3014년 일을 미리 당겨서 본다? 우리 봐야 됩니다. 제가 알려드려요? 3014년에 그 때에 주께서 일하십니다. 재림 이후나 재림이 오나 관계없이 천국에서 일하면 천국에서 일하시고 지옥에서도 주께서 일하십니다.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뜻이 있어서 이 대전 땅을 만든 거예요. 우리의 부동산, 애들 결혼문제, 모든 문제가 예수님이 관여해서 한 겁니다.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는 말은 신은 곧 마귀라는 말이에요. 인간이 만든 하나님, 여호와 있잖아요. 삼위일체가 마귀라는 거예요. 왜 마귀냐 하면, 예수 외라는 것은 예수 앞에서 모든 것이, 왜 마귀냐 하면, 예수님을 통과하면 하나님 계시잖아요. 문제는 예수님 앞에 통과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고 튕겨 나오기 때문에 튕겨 나와서 따로 그들은 하나님을 만들어요. 예수한테 튕겨 나와서 삼위일체를 만드는 게 인간이라니까요.
삼위일체는 뭐냐 하면, 성부중심이에요. 역시 아버지가 최고다. 아들은 2인자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예수 외에요. 예수님일부인 겁니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만 그 뒤에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못 만나 보니까 예수님 일변도가 되지 못하고 자기가 머리속에서 삼위일체라는 이성적 논리로 신을 구체화시키고 합리화시킨 거예요. 왜, 이것가지고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려고.
전도는 누가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전도하지 우리가 전도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주님이 하셔요. 전도에 우리가 끼어들면 주님이 불쾌하고 아주 싫어합니다. 니는 빠져! 전도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요. 전도하기 싫다고요. 아닙니다. 주께서 전도하게 하시면 하는 거고 전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게 하면 못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선교라는 개념은 없어요. 성경에는 오직 전도밖에 없는데 전도는 주님이 하시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선교, 전도 없습니다. 참, 선교단체에서 이런 걸 이야기해줘야 되는데.
그들은 왜 그걸 못하느냐, 예수 외에 선교단체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예수 외에. 참, 젊은 애들 모아놓고 복음학교 뭐 여러 가지 만들어서 그런 거 하는데 복음학교 만드는 건 좋아요. 그런데 복음학교가 이 복음학교가 망해야 됩니다, 이런 소리하고 복음학교라면 인정하겠어요. 십자가마을 만드는 건 좋아요. 십자가마을 이건 무너져도 괜찮아요. 주님만 믿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십자가마을 만들어놓고 십자가마을 이것은 전부 다 괜찮고 나머지는 틀렸다, 이리되면 그건 없어져야 돼요.
십자가마을이라 하는 것은 항상 후차적으로 열매로 나와야 되지 그걸 붙들고 있으면 안돼요. 교회나 우리 자신이나 붙들고 있으면 안돼요. 붙들고 있다고 주께서 같이 붙어 주는 게 아니거든요. 그것 붙드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놓친 게 되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꼭 저기서 비꼬는 사람이 있어요. “니가 언제까지 그런 소리하는가 보자.” 언제까지가 20년 넘습니다. 제가 20년 전에 했거든요. 니 말은 맞는데 니가 나중에 교회되어 봐라. 그런 소리 안 나온다는 거예요.
주일 낮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도 뭔지 모르지만 녹취 보니까 나오데요. 사도의 말은 모든 것은 헛것이고 주님이 살아서 일하신다. 그러면 제 설교도 헛것입니까? 헛것이지요. 녹취되어 나오데요. 목사님 말도 헛것이지요. 이게 무슨 주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이지.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믿으라고 한 말이 아니고 너희들은 결코 이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믿지 말라. 내가 믿게 한다. 그렇게 해서 오직 주님의 공로만 면류관 받아서 드려주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은 다 사기입니다. 흉내 낸 거예요. 모방이에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부터 시작되잖아요. 주를 모방한 거예요.
예수님 모델이 신앙의 모델이 아닙니다. 아, 이거 중요한 말인데,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 모델이 안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 부활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어요. 이것은 인간이 보이는 것을 모델로 삼는 한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 존재가. 뭔가 근사하잖아요. 모델로 삼은 거예요. 왜 아가씨들이 왜 여고생들이 수능만 끝나면 전부 다 성형외과에 가가지고 뜯고 견적내고 왜 난리칩니까? 그동안 참았어. 수능 점수 잘 나오면 우리 엄마한테 시켜가지고 요새는 딸이 그러는 게 아니고 엄마가 아예 시켜. 니 이렇게는 시집 못 간다, 해가지고 엄마가 나서서 빼고 꽂고 다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세상이 자기보다 못난 거 같으면 절대 안 해.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나 탤런트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전 지현이가 별에서 온 그대에서 나왔던 핀하고 머플러, 가방 전부 다 중국에서는 대유행이 되잖아요. 뭘 본 거예요. 시각적으로 뭘 봤습니다. 본 게 문제라. 봤으니까 하나의 희망이 생긴 거예요. 사는 보람을 느끼면서. 꼭 홈쇼핑에 가면 20만원짜리도 199,000원, 이번 방송된 시간 아니면 뭐 하나 + 하나 안 드립니다. 이리 한다 말이죠. 제일 잘 팔릴 때가 꼭 드라마 끝난 시간에 11시대, 드라마 끝났을 때 작전을 그렇게 짜요. 홈쇼핑 하듯이 여러분 이제 드라마 끝났지요. 이제부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해가지고 파는 거예요.
보고 하는 인간, 그 인간의 한계를 주께서는 완전히 다 삽으로 파냅니다. 삽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흙을 파내요. 완전히 우리를 주님의 토굴로 만들어요. 토굴은 파내야 돼요. 파내는 것은 전부다 집어던지니까 집어던진 그것이 전부다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먹는 양식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퍼내요. 요한복음4장에 나옵니다. “나, 오늘 밥 먹었다.” “제가 빵 사러 간 사이에 언제 밥 먹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내 밥이야. 내 양식이다. 나는 그걸 먹고 사는 거야. 날마다.” 마지막 때 추수하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전도를 하시는 이유가 자기 백성을 입으로 퍼먹는 그게 일이에요.
그 다음에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아무도 자력으로 예수 믿는 사람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 누구도 천국 안가도 왜 안 가게 해주십니까, 라는 말을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천국 가는 것은 주님의 자애적인 죄의 권세의 발휘이지 우리가 요청한다고 결재에 사인한다고 해서 우리의 요청대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하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애초에 인간은 출입금지가 돼있어요.
원래 인간 나라는 뭐냐 하면, 에덴동산이 끝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살지 에덴동산 하늘나라 아니거든요. 에덴동산에서 살아야지 에덴동산에 살 인간이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이것은 남의 동네에 들어가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여기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못 들어갈 곳을 넣어주니까 얼마나 특혜도 이런 특혜가 없어요. 세상에. 일감 몰아주기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보통 특혜가 아니에요. 이건 봐줘도 너무 봐줘.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아이고, 안 넣어주셔도 되는데.” 이러면서 가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여자는 시집가려고 모은 향수를 다 뿌려가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울면서 주님 발 앞에 향수를 다 던지잖아요. 이미 탕감 받았다, 이거거든요.
그러니 아담이 죄 짓기 전에는 무죄상태지 의인상태가 아니에요. 무죄 상태가 되면 항상 불안해. 언제 또 마귀가 와서 쑤실지. 마귀가 165번을 유혹했는데 이겨냈잖아요. 그래도 불안해. 166번째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예 탕감이 되어야 되는데 그것도 매일같이 탕감되어야 돼요. 매일같이 탕감해주는 중보자가 있어야 되지 자력으로 “이제 예수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것은요 마귀가 얼씨구나 잘됐다, 하고 잡아먹어버려요.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하나님은 잊어라. 나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 믿지 나를 믿지 않는 자는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나만 믿어야 돼요.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는 하나님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하나님이 왜 엉터리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한테 부딪혀 튕겨 나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짜 하나님으로 이미 들통나버린 상태거든요.
진짜 하나님을 안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안다고 하면서도 못 믿는 걸 봐서는 이 하나님은 100%가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지, 우리는 안 받습니다. 우리는 퇴짜당합니다. 퇴짜 당해놓고 억울해가지고 자기끼리 성경가지고 하나님 만들어놓고 교회 만들고 그게 오늘날 실정이에요. 그 교회 누가 인정해요? 주님 인정 안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만들지 말고 나를 믿으면 되는 거예요. 주일 오후 설교가 그거잖아요. 이스라엘도 망하고 누구도 망한다? 교회도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지 말자, 가 아니라 다녀야 망할 때 왜 망하는지를 다녀보고 믿어야 돼요. 다녀보고 알아야 돼요. 망하게 되면 결국은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자, 9절에 봅시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어떻습니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은 결국은 너희들의 기능과 역할이 나 예수님이 하는 일을 담아야 될 역할이지 니가 단독적으로 예수의 일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직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다시 할게요. 니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너는 내가 하는 일에 보조를 맞춰야 될 보조원이지 우리가 봤으니까 우리 단독으로 예수를 증거 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 예수라고 그렇게 우길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의사한테 10년간 간호사로 일했다. 했으니까 이제는 알추 어지간한 일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나와 버리면 나오는 순간 돌팔이 되어버리죠. 그러니까 니가 배운 기술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니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미완성 정도가 아니지요. 사실은 주님하고 대립이 되지요. 니가 본 것이 니 안에 들어가면 니는 왜곡된 예수 상을 전파할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아직 예수님의 자신의 사역은 요걸로 완료가 되는 게 아니고 또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마귀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마귀한테도 니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입 다물어라, 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마귀한테 한 것은 제가 광주강의 때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제자들과 품고자 하는 거고 마귀한테 이야기하지 말라 한 것은 니가 백날해도 너의 운명은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건데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 온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었는데 우리가 고 정도까지는 압니다. 엘리야가 오신다. 그러면 여기서 제자들이 중요한 의문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임금님이고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변화산에서 봤잖아요. 봤으면 예수님이 주인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엘리야가 안온 상태에서 자기가 미리 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필요 없어요? 엘리야가 굳이 사전에 올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엘리야 온다는 것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다이렉트로 예수님이 변화산의 주인인 것을, 천국의 주인인 것을 알았으니까 성경이 뭔가 빠졌다. “성경의 절차 가운데 절차 하나가 빠졌는데 그러면 성경의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불필요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러나 이 질문은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가 하면, 메시아는 반드시 뭐가 따라 온다? 성경에 나오는 절차들을 따라야 그게 메시아로 증명이 된다, 라는 그 논리지요. 그 논리는 제자들의 논리인 동시에 그 당시 예수님을 주의 깊게 보고 있고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 이미 공통적으로 퍼져있는 확정된 논리지요. 확정된 진리처럼 그렇게 활용된 겁니다.
반드시 말라기에 엘리야가 온다고 했으니까 엘리야가 오고 난 뒤에 메시야가 오는데 ‘엘리야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메시아라 하는 그 예수는 100% 가짜다.’ 라는 풍토가 이미 성경 연구한 유대인 사회에서 이미 그것이 제대로 정통된 진리처럼 그렇게 활용되고 있었던 겁니다. 정설로 이미 굳혀져 있어요.
그런데 그걸 지금 제자들도 짜서 맞추는 거예요. 유대인이라는 틀에다가 프레임 틀에다가 예수님이 하시는 그 보여주는 기적과 이게 아귀가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지금 묻는 겁니다. 자기로서는 상당히 진지한 진정한 중요한 질문이지요. 그러면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가 할까요? 안 할까요? 우리가 할 수가 있지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기도하고 로또를 샀더니만 1등이 되었다. 그러면 누구 기도를 누가 응답했다? 내 기도를 주께서 응답했지요. 그러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 맞지요. 왜? 1등 되게 해 달라 했는데 1등이 되었으니까. 그야말로 말로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 신앙을 했잖아요.
그런데 아내가 그 때부터 위암에 걸렸다. 그러면 전에 내 기도 응답했잖아요. 그러면 내 중보기도가 먹혀들어가서 내 아내가 병에서 날거라고 했는데 아내가 안 낫고 죽었을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떤 딜레마에 빠집니까? 결국 아내 죽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본인이 과연 신자 맞는지, 안 맞는지 그 정체성이 불안정하지요. 그런 경우 굉장히 많아요.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군에 가가지고 후방으로 빠질 때, “주여, 감사합니다.” 하는 동시에 “역시 내가 신자 맞군요.” 확인되다가 뭔가 지가 차사고 나가지고 어떻게 하게 되면 “주여, 그럼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럼 주님께서 “어쩔? 그래서 뭐 어떻게 됐는데?” 이래요. 왜 내 시나리오대로 내 소설대로 안 해줍니까? 라는 반발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묻는 물음은 굉장히 중요한 물음이에요. 만약에 납득이 되도록 예수님이 답변을 하게 되면 유대인 말도 맞고 예수님 말도 맞고, 동시에 둘 다를 알고 있는 본인도 하나님 백성 맞고, 결국은 진짜 노리는 것은 내가 신자 맞다, 에 마지막에 점수를 주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가 왔다는 거예요. 언제? 어디에? 언제 왔는데? 자, 말라기 한 번 봅시다. 말라기4장 5~6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에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서 엘리야가 분명히 온다고 했다 말이죠. 그러면 유대인들은 누구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와가지고 아비의 마음을 돌이키게 되면 자기는 이미 돌이켰으니까 가고 그 다음에 뭐만 박수치면 돼요? 자기 나라 빼놓고 모든 세상나라 불 심판 받는 광경 보면서 쌍안경으로 보면서 환호성 올리면 되는 겁니다. 잘 망했다. 마침 니느웨 성이 망하는 것을 요나가 보는 심정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야가 왔다는 거예요. 왔다는 말은 결국은 왔는데 자기 마음이 안 돌이켰잖아요. 왔는데 자기 마음은 여전하다. 뭔가 어떤 틀은 안 맞는다? 예수님의 틀과 기존의 유대인의 틀과 맞다? 안 맞다? 아귀가 안 맞는 거예요. 둘 다 거짓말인지 아니면 어느 한 쪽이 맞는 것인지? 그럴 때 제자들은 엘리야가 누구십니까? 당연한 의문점이지요.
12절에 엘리야가 이미 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알지 못했으니까 임의로 대우할 수밖에. 이미 왔다. 그렇게 할 때 제자들은 뭐냐 하면, 자기들이 아직도 인정하고 있는 유대인 전체 신앙이 안 맞는 거다. 이게 성경해석 잘못 한 거라는 거예요. 그러면 말라기 4장을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유대인들은. 말라기4장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 거 그 자체가 말라기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그걸 해석 해내는 인간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왜 성경해석을 잘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심보와 동일한 심보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스라엘 살려주옵소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인데, 이스라엘은 이들이 생기고 난 뒤부터 이제는 자기 나라 잘 보호해줘야 진짜백이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그걸 점검하고 그 점검을 찾아보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속에 보냈던 자들은 선지자고 그 선지자는 고난 받았지요. 마지막 선지자는 누구죠? 세례요한,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엘리사가 온다는 말은 왜 안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여호수아가 일을 할 때 여호수아 개인의 일은 하지 않아요. 누구 일을 하느냐, 죽은 모세에게 준 나머지 일을 뒤치다꺼리 한 게 여호수아입니다.
이삭의 일을 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언약을 이룬 게 이삭이고 야곱은 야곱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이삭의 일을 맡아서 하고 야곱의 일은 또 요셉이 했어요. 지난 시간에 주일에 했지요. 야곱은 요셉을 죽은 자로 간주했는데 죽은 자로부터 수레가 오다니. 그게 요셉의 수레였잖아요. 창세기45장 27절. 그걸 제가 예로 들기를 죽은 아버지로부터 메일이 날아온다는 기적. “사랑하는 딸아, 그동안 니가 많이 컸는지 참 궁금하구나! 나는 미국에서 살아있다.” 그럴 때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라고 했지요.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믿는 사람한테는 메일을 받은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나, 예수 죽었다가 살아나서 너희에게 이렇게 성령이란 이름으로 메일을 보낸다. 오깽끼데스까? 잘 있었느냐, 내가 다시 올게.” 그 사랑의 편지 말고 다른 게 뭐가 필요합니까? 예수의 메일 이외에는 예수의 편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게 바로 교회에요. 교회는 오직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아니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것!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게 교회잖아요. 그게 왜 감당이 안 돼? 그게 왜 감당이 안 되는데요?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데? 왜 감당이 안 되는데요? 그 목사가 자기 재산을 넣었는가. 제가 설교할 때 흥분을 안 하는데 지난주에 나도 모르게 마구 흥분했어요. 성령의 역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직도 속아 넘어가고 있다니?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지.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만 흥분해 버렸어요. 너무 안타까워가지고.
성경은 너무나 간단해요. 그 66권이 왜 그리 간단한지 모르겠어요. 사랑의 메일만 받아놓으니까. 문제될 게 없는데. 이 본문의 제자들은 아직도 그래도 기존의 똑똑한 박사들인데. 그래도. 나는 박사교회에 당회장도 11년 동안 해본 사람이에요. 박사들이고 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는 해석가인데 그것도 자기 해석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능한 해석만 집대성해서 우리한테 가르치고자 애쓰는 그러한 아주 훌륭한 스승들인데 틀리리가 있나. 다 틀려요. 다 틀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틀렸는데 들으면 뭐 합니까? 다 틀렸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세례요한이 온다는 엘리야의 기능이 없어지지 않았어요.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엘리야는 모든 선지자의 시작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심판가운데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까 방주 이야기에서 방주에서 까마귀와 비둘기가 “나, 구원받았어요.” 이게 관심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 심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야 될 짐승이었습니다. 심판은 분명히 있다! 그걸 외치기 위해서 나왔던 거예요.
그래서 중보자는 반드시 심판을 마음껏 발휘하고 온몸으로 배어내야 돼요. 바깥으로 스며나오도록 해줘야 돼요. 주의 모습만 나온다. 이러면 안돼요. 그냥 세상은 심판이다! 라는 소식이 나와야 돼요. 심판이 나와 줘야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 안 됨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변화산 봤고 제자들은 아주 좋아했어요. 이만하면 됐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어요. 뭐가 기다렸습니까?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이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입 다물라. 아직 다 안 끝났어. 미생이야. 미완성이야. 끝 안 났어. 이제는 고난이 기다린다. 고난인데, 아무도 심지어 너희들조차도 나의 고난을 이해못할거야.” 그 시대가 남아있습니다.
이 선지자의 엘리야의 고난인데, 엘리야의 고난이 엘리야만 오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를 둘러싼 그 모든 고난도 악함도 엘리야와 더불어 같이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제가 언젠가 주일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나무 옮길 때 나무만 달랑 흙 다 털고 가는 게 아니라 나무에다가 새끼줄로 배 통통이처럼 해가지고 뿌리 부분을 통통히 해가지고 트럭에 실어서 가지요. 그 주위 부분을 모아서 같이 가듯이 엘리야의 고난은 왜 고난을 받아야 되느냐를 보여줄 악한 그 성장도 같이 새기로 묶어서 나타납니다.
결국 예수님 오셨다는 것은 심판 받아야 될 이유도 예수님과 동반해서 같이 덮쳤다 이리 보시면 돼요.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더 이상은 안 참는다. 말라기에 보면 마지막에 심판의 때가 온다 하지요. 심판의 때에 엘리야를 보낸다는 말은 엘리야 옴과 동시에 뭐도 같이 왔다? 심판 작살나는 그러한 이유 덩어리도 같이 꽁꽁 묶여가지고 같이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 이야기하나 듣고 엘리야인 줄 알아야지. 소위 우리만 구원받고 이방민족 저주 받는다는, 그게 아니고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저주받을 상황인 것을 눈치 채야 되는데 눈치 못 챘어요. 오신 엘리야,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을 함부로 대해서 조기 퇴출시켰습니다. 그러면 엘리야의 실패는 실패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그 엘리야의 실패의 자리에 진짜 엘리야, 엘리야 모습의 껍데기 외투를 벗으니까 거기에 진짜 알맹이 되는 엘리야 누굽니까?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실패한 그 기능을 예수님 홀로 다 담당하는 거예요. 이 모습이 아브라함이 이삭 바쳤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고 수양 하는 그 과정 속에 그러한 외투 껍데기 속에서 그 당시 그리스도가 또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장차 올 예수님을 본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이사야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잖아요. “아, 싫어요. 나 이 일 안해요. 뭐 이야기하면 욕한데. 나 욕 얻어먹고 이 짓하기 싫어요. 그러나 주께서 하게 하시니까 내 입에 말씀을 담아주니까 안하면 내가 터질 것 같아. 터질 거예요.” 폭발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 바울도 마찬가지고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전도하지 마세요. 전도하지 마시고 막 사시면 주께서 막사시는 그걸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엘리야 노릇하도록 그렇게 할 때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다 일 저질러놨잖아요.” 라고 고백하시면 딩동댕! 되는 겁니다. 용서하지 마세요. 그게 용서가 되고 구제하지 마세요. 그게 구제가 되는 겁니다. 말을 한 번에 알아먹어야지.
임의로 대우하였듯이 이와 같이 인자도 고난 받고 임의로 사람에게 받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도 아들마음을 아버지에게로 이건 엘리야의 몫이 아니고 엘리야를 지나는 그 자켓을 벗고 엘리야 속에서 그 당시 엘리야를 되게 했던 진짜 주인공, 그 분은 바로 나, 예수님입니다.
그 고난 받는 그 기능이 남아있다. “너희들 변화산 봤나? 좋았나?” “좋았습니다.” “신났나?” “신났습니다.” “어때?” “여기가 좋사오니.” “그게 끝이 아니다.” “그게 끝이 아니고 이제 니가 본 것으로 인하여 나를 버릴 것이다.” 봤는데, 이제는 그게 믿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 믿음은 뭐냐, 바로 베드로에게 닭이 울지요. 닭이 울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닭은 예수님의 말씀에 추동되어, 추동이라는 것은 말씀에 힘을 가했다는 뜻이에요. 힘이 가하는 거예요. 닭소리는 주님께서 힘을 가한 노선이죠. 베드로는 어두움 세계 속이었지요. 그래서 베드로의 모든 장담은 마귀가 한 장담이지요. 요것이 베드로는 그 순간 끊어졌다가 말씀에 의해서 다시 합체가 돼요. 세상의 노선에다가 바로 닭의 노선으로 가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대성통곡을 하지요. 대성통곡을 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에요.
대성통곡을 하면 주께서는 “아이고, 니가 우는구나!” 이럴 줄 알아요? “울기는 왜 울어? 내가 이야기했잖아. 울지 말고 약속 믿어. 마귀가 너를 찾으러오는데 나는 마귀한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내가 너를 도로 찾는다. 내가 그럴 줄 알고 닭 대기해서 닭 울음 듣고 닭 노선이 이 쪽 세상 마귀 노선이 아니고 내 노선이라는 것을 내가 확인시켜 줬다.” 는 거죠. “내가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나중에 제자들이 같이 모여 있고 그들이 고기 잡으러 갔을 때 주께서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왔지요. 그리고 그것이 주께서는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오십니까? 심심하면 찾아오십니까? 아니에요. 성령을 보내 놓으면 오시는 차원이 아니고 함께 사는 차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이제는 찾아올 것도 없어요. 같이 살아서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오늘 본 제자들이나 그들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 이 악한 세대 이 세상이 심판받을 세상인 것을 수시로 이렇게 털어내어 놓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인생사시면서 알다시피 여러분이 사니까 재미나던가요? 어디 더 살고 싶어요? 빨리 딸 치우고 내년에 아들 치우고요, 대충 정리하고 대충 살다가 치매 안 걸리고 그냥 자는 잠에 그냥 가고 싶지요. 왜? 가야 될 곳이 있거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가야 될 곳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주의원대로 쓰여 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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