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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38강-역사구성(슥14;12-15)이근호140511

아빠와 함께 2014. 5. 14. 07:24


역사구성(스가랴 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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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5-11 15:41 
역사 구성 

2014년 5월 11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12-15 

(14: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14: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4:15)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보통 역사는 신이 주관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인간은 그 어떤 변화나 변혁을 일으켜도 역사를 달리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단체, 곧 기성 역사에서는 중세시대를 말하고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들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집은 다 성령받은 집안이기에 앞으로도 줄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고 장담했는데 자녀들이 성장해서 하나 둘 주님을 버리는 사태가 일어나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때는 무슨 이론으로 변명할 것입니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미워질 것입니다. 자녀를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오해를 그동안 이스라엘 나라가 해왔던 것입니다. 설마 이스라엘을 직접 세워주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잘 믿는 가정이라고 자부했던 그 가정이 대부분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돌릴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역사 학자들은 말합니다. 신과 연계된 역사관은 이제 접고, 역사란 너와 내가 계속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이해하자는 겁니다. 즉 국가의 역사란 신에게 기도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 모두고 지혜와 힘을 모아서 앞으로 전진시켜야 유지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다 정했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신약의 시대에서는 외칠 선언입니다. 그렇게 외치기 위해서 앞서 다음과 같이 말해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속한 질의 세력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질의 세력의 싸움으로 구성됩니다. 

미리 주어지고 우리는 그저 밖에서 고백하는 것이 대상이 현재 우리 자신이 직접 뛰어드는 조성되는 내용이 곧 역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제안은 거부당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계시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 시대의 방주와 같은 겁니다. 방주는 그 당시, 아무 쓸데없는 상품입니다. 방주가 쓸데있어야 할 조건이 이러합니다. 비가 오되 며칠 오다가 그치면 아니됩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비가 오되 산 높은 곳으로 피할 자가 발생되는 경우도 방주는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유일하게 방주의 가치가 드러나는 시점은 모든 인간이 다 홍수 속에 잠길 그 순간 뿐입니다. 따라서 방주를 만든 노아는 분명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바보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기다렸습니다. 방주보다 더 중요한 물건이 없는 그 시점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떠밀려 역사 구성에 나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 나서게 됩니다. 누가 구매하거나 호명하여 주지 아니하면 돈이 생기지 않기에 늘 돈이 되는 쪽으로 자신을 변신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고유 가치를 자신이 끄집어서 갖추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서 불려다니는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끄집어낸 가치를 시장에서 인기 없으면 쓰레기통으로 가야하기에 그런 점에서 인간은 고유 가치가 없는 유령같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어느 시대든 고유가치가 있는데 이는 계시나 사명으로 인하여 성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하여 질적으로 양편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이기에 나서서 예루살렘 편에 나설 자격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편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삼기 위한 최종 계시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입니다. 이 계시의 구체화는 구약과 같은 방식입니다. 

노아의 경우 말고 또 다른 경우로 예를 들면, 창세기 24:59-60에 보면,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게 되면 리브가가 시집가자 마자 순풍순풍 자식들을 많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려 천만명이나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으로 밝혀집니다.  창세기 했습니다. 창세기 25:21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계시와 더불어 임신을 하게 됩니다. 즉 성도는 본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는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어떤 계시가 주어졌을까요? 요한복음 3:35-36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건을 통해서 유일한 기준을 역사 속에서 제시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도가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본인의 결정권이 이미 상실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사로잡힌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이 과연 진실 인지의 여부는 계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역사 전체는 이미 예수님 중심이요 성도는 그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는 고린도전서 6:6-7에 보면,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같은 형제에게 사기당해서 돈을 떼인 경우에, 세상 법정에다 그 사람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차라는 속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즉 자기가 사기꾼에 농락당한 상황이 곧 세상 전부가 예수님 중심으로 과연 돌아감을 우리가 믿는지 파악하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 아니면서 예수님 중심인 척하는 자들은 결국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진해서 나서지 않고 예수님의 호출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8강 슥14장 12-15(역사 구성)1405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4장 12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5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성경에 나오는 현실이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현실하고 너무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현실은 내가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고 내게 관계되어 있는 것만 뽑다 보니까 우리가 현실을 자꾸 왜곡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에 의해서 상대방이 당하는 결과는요 내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엮어져 있는, 관계되어져 있는 것들이 많이 내 행동으로 비로소 도출되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서 이해한다고 할 때는 이해한다가 돼요. 민들레 홀씨가 왜 바람에 날리는지 그것도 알고 지금 이 순간에 어느 도축장에서 양을 잡는 그 양 한 마리 값이 얼만지 그것도 알아야 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안 상태에서 이렇게 행동하니 내 행동은 정당합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기껏 코앞에 있는 것, 생존문제죠.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고 그걸 수집해가지고 현실이라고 딱 구축해놓고 자, 내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의 완벽하게 바르게 착한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의롭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상대방은 그건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상의 운행, 별들이 움직이고 파도가 치는 이유를 압니까? 이건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죠. 모든 것들이 내가 무지한 상태에서, 그것을 무지의 베일이라고 유명한 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무지한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최선이라고 하지만 상대방은 상대방 나름대로의 자기 공간이 따로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 보기에 최선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최악이요.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 서로가 완벽한 입장이라고 동의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은 주어진 가운데서 뽑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 현실이 뭐냐, 현재 있는 사람들끼리 구성해서 가는 겁니다. 기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가는 거예요. 어떻게 만드는가? 너와 내가 만든다는 것, 이것은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고. 너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너와 같은 질쪽에 있는 쪽과 나와 같은 질쪽에 있는 그 양대의 이질적인 두 가지의 질이 서로 만든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2절에 나오죠.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이 한 쪽의 질이 되고, 한 패가 되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 쪽이 한 패가 되어 가지고 예루살렘에 속한 쪽과 예루살렘을 치는 쪽과의 두 개의 서로 상반되고 이질적인 그것이 서로 대질되고, 서로 대립된 상태에서 역사는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여자의 후손, 남자의 후손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편에 속했으니까 나를 반대하면 다 하나님의 적이네. 라고 우리가 쉽게 육신적인 본능을 발휘하는데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예루살렘을 쳤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을 쳤다는 거예요. 나를 친게 아니고. 그러면 다시 정리해 봅시다. 설교 처음부터 하면 나는 내 중심으로 완벽하다.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름대로의 중심으로 완벽하다. 그러니까 나 빼놓고 나 외에 모든 것은 적이든지 아니면 내 편이 되어 나를 도와주면 동지가 되고. 동지와 적에 관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인간들의 역사고. 하나님 역사는 니 중심이 아니고 예루살렘 중심이다 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에 생각이 뭐냐 하면 내가 예루살렘에 속하면 되겠네 이렇게 하거든요. 그게 안 되게 돼있어요. 예루살렘에 속했다 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 소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 이제 예루살렘에 속했어.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어. 그래서 나를 친 사람들은 하나님께 벌 받게 하겠다 라는 아이디어를, 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왜냐? 이게 스가랴에 나왔어요. 스가랴. 스가랴에 나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스가랴는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나온 계시입니다.

이게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우리를 위해서 있었다고 여겼다가 폭삭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예요.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쳐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가지고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치게 하신 거예요. 바벨론이 너희들을 쳤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들을 친 거야. 너희들이 섬기는 하나님, 내가 섬기고 있다는 너희를 칠 거야 라는 것이 이스라엘 멸망의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 속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편이다는 그런 아이디어는 우리한테는 거부당합니다.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은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게 왜 중요합니까?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만 하나님편에 속한 사람이고 그 외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이 등장하기만 하면 나는 곧 그 사람과 한패가 되어 하나님 쪽에 속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나한테 유리하게 되죠. 이게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예루살렘에 속한 분이 딱 한 분 나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현실은 그 분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것이 확정되는 시대가 바로 신약시대입니다. 요한복음 3장 35-3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스가랴에서 말하는 예루살렘편, 이러한 예언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에게 순종하면 영생이 있고 순종치 아니하면 진노가 머문다 해서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내세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면 영생 얻고 안 속하면 저주 받는다면, 그러면 예수님께 속하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글쎄, 그게 가능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이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가. 제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거기에 리브가가 나오는데, 장차 이삭의 부인이 될 사람인데. 미리 아브라함의 종이 그를 며느리감 삼기 위해서 만나게 되는 겁니다. 리브가가 자기 고향을 떠나서 자기 남편 이삭을 만나러 가는 그 시점에 기해서 자기 오빠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50절에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니가 예루살렘 된다.

지난 주 낮에 제가 설교 했습니다. 중국집 배달부를 손님이 기다리지 않는다고요. 손님이 기다리는 것은 철가방에 든 짜장면을 기다리지 배달부를 기다리지 않죠. 짜장면을 기다리는 거예요. 국물 흘리지 않은 짬뽕을 기다리고. 주께서는 우리를 배달부로 사용하는 겁니다. 배달부로. 우리한테 손에 뭘 쥐어 줘요.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주님 주시는 그런 사명도 없이 맹탕으로 들어갈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사양합니다. 주께서 안 받아 줘요. 주께서 먼저 던져 주신 그 사명에 이끌리다 보니까 어느새 천국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소위 믿음의 조상들인 겁니다. 그 믿음의 조상들 중에 두 번째 나오는 조상이 노아거든요. 

여러분 노아 이야기 보면 우습지 않습니까? 저는 자꾸 웃음이 나요. 왜냐하면 여러분 노아 방주가 아무 쓸데없는 물건입니다.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 했어요. 시장에서는 상품화되지 않으면 쓸데없다고 했어요. 인기고 뭐고 믿음이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상품화되어야 돼요.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 상품이 되냐 안 되냐는 축적된 돈, 자본에서 나오고. 따라서 축적된 자본에 의하면 모든 상품은 돈에 따라서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이건 인간의 영혼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유령이다. 떠돌아 다니니까. 오늘은 어디 가서 값을 쳐 받는가? 더 쳐 받는가? 어디 가야 나를 호명해 주고 나를 호출해 줄 곳이 어디냐? 아가씨들 많아요. 지금 호명되기만을 원합니다. 총각들 많습니다. 호출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도대체 이 사회가 여러분 정상입니까? 이미 마르크스는 눈치챘어요. 완전히 유령들이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다가 죽어버려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돌아다니다 보니까 상품화 돼서 나를 살릴 사람 누구인가 찿다 보니까 결국은 자신을 스스로 자기가 알아서 저 이런 상품입니다 라고 시장에서 원하는 가치를 덧입혀야 되죠. 그리고 무서운 것은 오직 그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삭제시켜야 된다는 것. 교회 다니는 것, 믿음 좋은 것 다 없애버리고 오직 상품화 된 그것만 남기도록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고 양육을 시키는 그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명요? 타인이 주는 거예요. 내가 뭘 하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뭘 하나 줘야 나한테 돈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숱한 발명가들이 발명해가지고 쓰레기통으로 다 들어가 버려요. 왜? 이 시대에 부합되지 않는 상품을 개발했기 때문에. 그래서 남이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모방해가지고 그걸 흉내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돈 되는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항상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없이는 이래사나 저래사나 교회나오나 안 나오나 똑같아요. 그냥 교회 나가서 복 받아가지고 시장에 나가서 상품가치 올려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손 내민 것밖에 더 됩니까? 그런 시장 말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꽂혀서 살아가는 사람, 그건 주님이 던진 낚싯대에 걸려서 주님의 품으로 가까이 접근해 가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만 영생이 있고 그것 없이는 저주가 되기 때문에.

노아가 우습다는 것은 뭐냐 하면 노아의 방주는 아무 쓸데없는 것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노아가 있음이 판정나는 것은, 그 땅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노아 방주하고 관계없습니다. 단지 비가 와야 되고, 비가 그냥 이틀 오다가 그만두면 안됩니다. 쏟아져야 되고, 그냥 쏟아지다 중간에 그치면 안돼요. 쏟아지되 산을 덮을만큼 쏟아지는 조건하에만 노아가 상품가치가 있습니다. 참,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명을 주는 거예요. 남이 안 알아주는 사명을 주셨다 그 말이예요.

자, 창세기 24장에서 시집가는 리브가에게 오빠가 하는 이야기가 “너가 천만인의 어미가 되며” 그 다음 말씀이 “너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원수, 전쟁할 때 발생 되잖아요. 너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원수의 성문을 활짝 열어제치는 그런 어미가 될 것이다. 완전히 기왕후같아요. 원수의 성문을 여는. 완전히 원수의 성문을 연다니까 이게 시집갈 누이동생보고 할 소리입니까? 아예 시집갈 누이동생한테 갑옷을 입히지. 이게 어디에 써먹을 이야기입니까? “가거든 남편 말 잘 듣고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잘 보이면 너는 행복해” 이렇게 덕담을 해줘야, 덕담하면서 밤이나 대추 한 열댓개를 던져줘야 이게 시집가는 것이지. “힘내! 니가 이번 원수의 성문을 열 것이다.” 이게 뭐예요? 여전사도 아니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노아 홍수가 온 지구를 덮을 때까지 방주의 가치는 지연되고 유보되는 겁니다. 노아는 거기에 대해서 믿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이게 지금 이런 거예요. 노아보고 방주 만들라고 해놓고, 노아는 분명히 알았어요. 방주는 자기 눈에 볼 때 쓸데없습니다. 하지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그 말씀을 주신 분이 나중에 어떤 사건을 벌리게 되면 그제야 왜 방주뿐이냐 왜 방주뿐이냐를 드러내는 사태가 반드시 온다는 거예요. 왜 방주뿐이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오직 예수뿐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은, 예수만이 영생 준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태가 니한테 찾아온다는 겁니다. 너 잘되려고 하지 말고 하여튼 계시가 계시대로 성취될 그날을 위하여 미리 내게 던져주니까. 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가 배달하는 짜장면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니까. 가만있어 보세요. 인구 천만인이면 어느 나라가 됩니까? 제법 큰 나라이잖아요. 어느 나라의 왕후가 된다는 이야기예요. 창세기 한 장만 넘겨버리면 그 계시는 완전히 개꿈처럼 되어 버렸어요. 뭐냐 하면, 리브가가 임신을 못해요. 분명히 약속은 천만인예요. 그런데 지금 리브가 입장에서는 천만인은 고사하고 딸 하나만 있어도 좋겠어요. 자식을 못 낳아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이거는 사라보고 한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라가 임신하기도 전에 아버지 이름을 너가 많은 숫자의 아버지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자식은 한 명도 없어요. 왜 하나님의 일에 이런 조치를 개입시킵니까? 우리보고 믿지말라는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니 믿을만 하나?” “아니요.” “믿지마.” “니 믿을만 해?” “믿지 못합니다.” “기다려봐~”

우리가 변액보험이라든지 암보험 들 때에 이게 문제가 있어요. 암보험이나 변액보험을 든다는 것은 내가 예상한 그 파멸의 순간을, 이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내가 암에서 걸려서 파멸하기 이전에 그것을 미리 예상해 가지고, 그 예상을 미리 대처하기 위해서 보험에 드는 겁니다. 보험하는 분이 있으면 기분나쁘겠는데. 그렇게 되면은 그때 보험든 순간부터 우리는 내가 예상한 것에 내가 예속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보험금을 타먹으려면 암이 걸려야 돼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가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보험 들지 말까요? 그러면 보험을 안 들어 버리면 개뿔도 믿음도 없으면서 보험 안 들은 믿음 있다고 자랑질하기 때문에 그런 오바는 하지 마세요. 그냥 믿음 없으면 믿음 없이 삽시다. 그냥 보험 드세요. 물론 서너개 드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냥 드시고 믿음 없습니다. 하면 될 문제를 괜히 주님을 상대로 시험한다고 “주여 세상은 다 보험 들어도 저는 안 듭니다.” 이게 무슨 객기입니까? 그렇게 오바하지 마시고 드시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은 보험 들어라는 계시 가지고 우리를 잡아당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바로 리브가는 임신을 못합니다. 임신을 못하는데 천만인이 나오느냐. 원인과 결과가 안 맞거든요. 그때 어떻게 합니까? 결과를 가지고 우리가 모르는 결과가 미리 있고 우리로 하여금 원인을 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루살렘에 등장했던 그 적들은 누구냐? 우리는 모르죠. 스가랴의 예언이니까. 우리는 신약이니까. 그러면 결과에서 미리 스가랴를 보게 되면 우리는 믿음 없어요. 믿음 없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 사명이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사명을 부여했단 말이죠. 우리는 그 사명을 듣는 순간, 예수 믿는데 취직 되거나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거 숨길까?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드디어 결정적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데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그런 현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현실 중의 하나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 예를 들으면 우리가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나오는 예인데요,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누가 교회에서 돈을 사기를 쳤나 봅니다. 믿는 집사고 해서 돈 빌려 줬는데 이게 수법이 한두 수법이 아니라 돈이 다 날라가 버렸어요. 요앞에 지묘동 버스타는 곳에 뭐 붙었어요. 울산에서 돈 떼어 먹고 가정 버린 여자를 찾습니다. 대구로 도피했습니다. 보시는 분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붙어있다 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같은 집사 믿고 돈 빌려 줬는데 돈 떼어 먹고 달아나도록 그런 조치를 하십니까? 바로 그게 예수님만을 보여주는 사태가 들이닥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오직 예수! “니가 예루살렘 편이었다고?” “니가 예수 내 편이었나?” “아이구 내 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돈 편이었잖아?” 그걸 부자 청년이 와서 부자된 입장에서 예수님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 할 때 결국은 부자 청년이 돌아갔거든요. 어디로 돌아갔느냐를 봐야 됩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돌아갔어요? 결국 돈 있는 자아로 돌아간 거예요. 돈 없는 자아로 영생 얻을 거냐? 아니면 예수 없어도 돈 있는 내 쪽을 선택할 것인가? 보다가 나는 예수편 보다도 내편이다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어떤 누구도 자진해서 예루살렘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국은 내쪽으로, 나한테 안심이 되는 쪽으로 돌아서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내가 짐작하거나 내가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그런 상황과 사태를 만들어주죠. 그러면 그 상황속에서 “주여 제가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믿음 없는 저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이런 몰골로, 이런 꼬라지로 주님의 용서받고 갑니다.” “바로 니가 내편이다.” 말이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하는 바리새인은 짤려 버리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그 세리는, 엎드려서 얼굴도 못 드는 그 세리는 즉결심판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너가 바로 의인이다 했습니다. 분명히 입으로는 죄인을 토했는데 주님의 판결재판은 땅땅 의인으로 판결되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는 건강한 사람은 나한테 필요없다. 나는 병든 자라고 아는 사람만 나한테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스가랴의 말씀이 저한테 된통으로 치고 들어 왔군요. 제 마음속에. 제 속에.

스가랴 14장, 오늘 본문 어딥니까? 스가랴 14장 15절의 말씀이 저한테 치고 들어왔군요. 그래서 내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내가 재생산 되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되겠습니까? 결국 교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 이야기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괴로울 때 이 생각하시고 탁 치시면 끝. 여름은 덥게 되어 있고 겨울은 춥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울 때는 옷 벗으면 되고 추울 때는 옷 꺼내 입으면 되는 거예요. 늘 겨울이 아니예요. 봄 되고 여름 되고 또 여름 되고 겨울 지나면 또 겨울이 옵니다.

바깥에 있는 현실은 내가 따져서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알아서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우리는 그 현실의 일부로서 나의 있는 자리에서 “주님 덕분에 용서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스가랴서에서 말하는 예루살렘편이 되고 나머지기 것들은 저주받는, 저주받는 모습의 내용이 아주 흉악해요. 눈이 파지고 하는데 그런 저주받는 쪽은 예루살렘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봄 여름 가을 겨울 내가 주관할려고 했고 세상 몽땅 돌아가는 것이 내 이익쪽으로 돌아가야 좋은 하나님처럼 여겼던 이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주께서 주신 그 방주, 예수 있으면 영생이고 없으면 저주라는 이것이 이 시대에 왜 꼭 필요했던가를 저희들을 통해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