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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39강-거룩(슥14;16-21)이근호140518

아빠와 함께 2014. 5. 18. 19:37

거룩(스가랴 1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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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5-18 16:12 
거룩

2014년 5월 18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16-21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4: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4: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4: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투는 이러합니다. 이러이러한 자는 복 받지만 이러이러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의 작업에는 반드시 저주의 작업도 병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구원작업에 관해서 인간하고는 의논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원시켜주시고 저 사람은 지옥보내 주세요”라는 요구가 들어주지 않습니다.

구원 뿐만 아니라 지옥행도 우리가 요청한다고 성사되는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주신 겁니까? 우리의 의견이나 우리의 실천력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왜 주신 겁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만을 상대하심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인 ‘초막절 성취’ 차원에서 구원과 심판을 병행해서 내놓겠다는 겁니다.

즉 네 구원에 신경쓰지 말고 왜 하나님께서 초막절이라는 절기를 구태여 마련하신 그 취지나 받아들여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무대입니다. 마치수박 살 때에 잘 익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삼각형으로 일부 조각을 파서 그것으로 전체 수박품질을 가름하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농사에 관한 절기입니다. 심고 재배하고 거두고. 이 순환으로 인하여 땅에서 곡식의 결실물이 생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재배한 땅이 그냥 일반적인 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있는 약속의 땅이라는 고백을 요구당하게 됩니다. 즉 장차 천국은 흔한 땅처럼 사람의 능력으로 살아있는 생산물을 내놓은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일조라는 겁니다. 생산물 중, 제일 좋은 맏물을 하나님 몫으로 드리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은 결코 땅의 주인공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품꾼들입니다. 지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십일조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그 과정에 모두 관여해서 관통하고 있음을 보이는 원리를 그 약속의 땅에 남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맥추절→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1주간 계속되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마지막 절기입니다. 더 이상의 절기는 없습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가나안 땅’이라는 좁은 무대 위에 절기 형식으로 진행시켜서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절기가 보여주는 테마는 거룩입니다. 즉 거룩의 생산이요 의로움의 생산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땅에서는 ‘곡식의 생산’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이 곡식의 생산에 생존을 의존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존 이상의 것을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완전한 거룩입니다. 완전한 의입니다.

제가 방금 ‘완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절기를 잘 지킨다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맥추절 같은 경우에는 유월절 끝나고 49일 지난 절기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을 77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절기 안에서 ‘7’이라는 숫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7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걸까요? 창세기 1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7일 만에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창조 자체에 ‘7일만의 창조 취지’가 다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창조물 자체가 왜 꼭 7일만이 창조해야 하는가를 보여줄 이유를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은 반복적으로 주마다 돌아오는 7일을 안식일로 지킬 뿐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2:8에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하십니다. 즉 세상의 모든 창조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예수님과 자신을 연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의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7일 창조를 품고 있는 이 세 가지 절기 속으로 이미 예수님의 생애가 관통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의견하고 협상하지 않습니다.

의논하실 분이 따로 있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분의 사역을 근거로 구원 뿐만 아니라 심판마저도 나오도록 조처하십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완전한 거룩이 생산하는 곳에는 완전한 심판도 같이 이루어집니다. 거룩의 완벽과 미진의 차원이 아니라 완전한 거룩이 아니라면 조금의 미진한 거룩이라도 심판만 주어질 뿐입니다. 즉 인간이 절기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그런 미진한 거룩이 아니라 완전한 거룩이란 오직 예수님의 때에서 결판납니다.

이런 완벽하고 완전한 거룩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21절에 보면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힘없다고 우리는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가나안 땅에서 기거했던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보다 실은 힘을 원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이방민족들이 생각하는 식의 신에 관한 속성입니다. 힘을 실어달라고 기도했던 그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해지고 말았습니다. 힘이 부러웠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힘 있는 이방민족에 둘러 쌓이게 하셔서 인간들의 속성이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거절하고 보다 힘 있는 나라이기에 관심 쏟아가 결국 심판 작업에 들려들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구원이란 완전한 거룩과 의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심판이란 이 조항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없이 가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막절, 곧 마지막 절기, 곧 최후의 심판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의만이 구원됨을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 생애였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 참된 맏물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근거만이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완전한 거룩이 없음이 곧 심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9강 슥14장 16-21(거룩)1405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4장 16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6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스가랴의 마지막 예언이 상당히 살벌하게 끝나버립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데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낼 때 하나님이 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병행하겠다는 겁니다. 뭘 병행하느냐 하면 구원과 더불어 심판을 병행하시겠다는 거예요. 구원과 더불어 심판을 병행하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심판에 문제 있어서 나 너하고 의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저 구원해 주세요.’ 손들어도 ‘손 내려.‘ ’저 사람 지옥 가게 해주세요.‘ ’저 사람 지옥 가라고 한 네 손부터 내려.‘ 저 사람이 천국 가는지, 지옥 가는지, 네가 개입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의논해서 일방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결정합니까? 초막절하고 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상당히 특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통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는 사람하고 이야기해서 ‘서류 통과 시킬까? 이 사람 말고 저 사람, 아, 그래?’ 이렇게 같이 의논할 대상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소위 경건한 사람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여, 제가 의대를 갈까요? 신학을 갈까요?’ 이렇게 할 때도 ‘신학을 가라.’ ‘알겠습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마치 우리와 하나님과 충실하게 의인이 의사소통이, 의견을 충분히 나누었다고 하고, 그 나눔 결과에 대해서는 이건 하나님의 뜻으로 빵빵빵 아예 확정을 져도 무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방금 그렇게 해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그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히 선지자뿐만 아니고 제사장들도 해야 되고 다윗 시대에는 왕이 그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하고 의논한 거 맞네. 선지자, 제사장, 왕. 공통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기름부음을 받은 그들과 한 것 맞네.‘라고 하실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기름 부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제사장을 보냈건만 이스라엘 내부에서 가짜 선지자, 가짜 제사장, 가짜 엉터리 왕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럴 때 백성들은 갑자기 어떤 직면에 도달되느냐 하면 같은 선지자,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고 같은 왕이라고 하면서도 ’가만히 있어봐 왜 말이 다 다르지? 틀리지?‘ 백성들 입장에서는 통로가 하나로 오게 되면 그냥 진리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쉬워요. 그런데 말하는 사람이 각자 달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본인들이 상당히 힘들어합니다. ’저게 맞을까?‘ 저게 맞다 생각해서 있다가 보면 구원이 안 되면 어떡하지? 그러면 저쪽은 맞을까? 저쪽은 모두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럼 이단 갔다가 괜히 심오하다고 빠졌다가 평범한 대다수의 진리성을 놓쳐 버리면 이건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알아서 판단했을 건데 내 판단이 맞다 우기다가 다수의 통하는 게 맞으면 나는 어떻게 돼요? 멸망하잖아요. 그런 헷갈림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서 선지자가 있고 기적 선지자가 있는데 기적 선지자는 문서 선지자 이전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엘리야, 엘리사, 문서 선지자가 아닌 사람들의 기적은 해석하기가 난해해요. 예를 들면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통 넷에 물을 채워서 세 번 부었는데 거기서 물이 불로 변했죠. 분명히 놀라운 기적입니다. 불과 물이 상극인데 상극된 요소를 집어넣고 불로 변하게 함으로써 이건 낮에 이야기한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예상 밖의 돌발적인 행동을 하나님께서 해버리는 겁니다.

선지자에서 엘리야, 엘리사는 항상 기적적 이예요. 그런데 단점이 있어요. 뭐냐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과부에게 떡을 줬으면 모든 과부에게 떡을 줘야 되는데 어떤 특정 과부에게만 주고 참기름 나오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과부라고 찾아가지를 않았어요. 그러면 하나님께 참 섭섭하죠. 왜 저 사람은 찾아가고 이 사람은 왜 안 찾아가느냐? 어떻게 보편화 시킬 수 없을까? 보편화 시켜줍니다. 그 보편화 시켜주는데 그게 혜택이 보편화가 아니고 심판의 보편화를 만들어 버리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한테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부럽잖아요. 진짜 성령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한테 ‘부럽지?’ 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차라리 이런 복 안 받고 그냥 회개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충고할 거예요. 뭔가 하나님께 받아 챙겼다는 말은 그만큼 엉뚱한 것에 눈독 들였다는 것이 티가 나버린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죽여서 살리는 방법이 마지막 최종적인 요나의 표적인데 우리는 죽어서 살리는 건 싫고 살아있는 내가 더 잘살기를 바라는 그런 입장에서 기도를 하다 보니까 주께서는 그 응답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응답과 동시에 지적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응답받고 후회되는 겁니다. ‘주님을 이따위 식으로 밖에 이용한 내가 참 나쁘다.’ 만약에 목회자 같으면 ‘하나님이여 3년 됐습니다. 교인 수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교인수가 5명 남았습니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습니다. 어떻게든 50명은 돼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갑자기 어디서 50명이 한꺼번에 오는 수가 많아요. 왜냐 하면 근처에 아파트 공사한다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소장이 기독교 신자가 돼서 교회 안 가면 보너스 안 준다 해서 몽땅 오는 수가 있어요.

그럴 때 막상 왔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기껏 이거 하려고 왔느냐,  이 얼마나 허탈하고 허무한지 몰라요. ‘하나님 부자 되게 해 달라.’고 했는데 부자 돼 보세요. 기가 찹니다. 특히 남자들은 차 바꿔 달라. 좋은 차 한번 타보세요. 내가 보기는 리오나 벤츠나 한 가지에요. 주면 얼른 받겠지만. 일본 차 타나 BMW 타나 그거 타고 싸우고 그거 안타고 티코 타고 서로 정답게 가고 어느 게 낫습니까? 어떤 분은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은 폭풍 속에 걸린 무지개‘라 했어요. 바이런이란 시인이 그런 이야기했답니다. 상당히 아름답지만 바깥에는 요란스러워요.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초막절과 이야기합니다. 왜냐 하면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밀어붙일 거니까 너는 입 떼라. 너는 거기서 손 떼라.’ 이 말입니다. 처음부터도 그랬고 나중에도 그러세요. 항상 말씀대로 밀어붙인 것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거기는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항상 내 문제 가지고 마중 나오다 보니까 주께서는 말씀대로 움직이고 나는 내 문제 답답해서 응답받으러 나오고 그러니까 이 아귀가 맞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수원에서 강의할 때 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말이죠.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하니까 한번 따져 봅시다. 왜 8일은 왜 안 되고 9일은 왜 안 되고 왜 6일은 안 됩니까? 하필 왜 7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왜 알 수가 없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창조된 내가 어떻게 행복할까를 가지고 성경을 들추고 있고, 성경은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겨냥해서 책을 쓰고 있거든요. 예수님을 향하여 했는데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을 보면서 ‘하나님, 내가 7일 만에 창조할 걸 제가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복을 주시옵소서.’라는 반대급부를 항상 생각하기 마련 이예요. 남들은 그것도 모르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아니까 특별대우 해달라는 그런 소망이 있어요.

그랬던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창세기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하고 흥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깁니다. 7일 창조의 완성은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7일 동안 만든 것은 그리스도로 건너가기 위한, 아버지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아버지 아들로 인정받는 그 건너가는 과정에서 창세기 이야기와 성경 모든 이야기가 거기에 삽입이 돼 있습니다.

제가 왜 천지 창조 7일 만에 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초막절이 그거에요. 7×7=49, 자, 7×7=49 맥추절, 유월절 지나고 7×7=49 맥추절이거든요. 77절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맥추절→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1주간 계속되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초막절을 이야기한다는 게 이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라는 겁니다. 여기 초막절이 3번이나 나와 있어요. 오늘 내용이 이런 거예요. 초막절 안 지키면 내가 작살낸다. 그 이야깁니다. ‘나 너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 안 할게, 내가 제시한 건 초막절이니까, 초막절에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러 오면 살고 초막절에 참석 안 하면 너 죽는다.’ 그런 뜻 이예요.

그러면 초막절이 무슨 날인데 그날을 왜 그리 신경 쓰시는가? 여기에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초막절 그 날에는, 배설물로 더러운 말방울도 사실은 하나님께 거룩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중간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지향점은 거룩이다. 이렇게 임시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거룩이다. 본인이 살고 싶으면 거룩하면 되고 ‘거룩 안 하고 싶어?’ 그러면 너라도 특별대우 해준다는 법은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거룩해지면 되는데 왜 거룩과 초막절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초막절 그날에는 말방울도 성결하고 거룩해지거든요. 도대체 초막절이 무슨 날이기에, 초막절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 더러운 가축에 달린 말방울도 이렇게 거룩하게 되느냐, 요게 핵심이 되겠죠. 요거 핵심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 말씀드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들에게 과한 공격과 미움을 해놓고 돌아서서 잘못 했다고 용서해줘, 하면 우리가 용서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용서가 안 되죠. 베드로가 7번 용서하겠다는데 그건 베드로가 과한 욕심이고 70번의 7정도가 아니고 인간은 7번도 안 됩니다. 같은 사람 7번 용서하려고 하면 그걸 장난으로 여기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겠어요? 남편이 술 먹고 아내 때려놓고 ‘미안하다.’ 돌아서면 또 술 먹고 때리고 ‘미안하다.’ 여자가 천사가 아닌 이상 7번 하면 대번 남편을 폭력으로 강남경찰서에 신고해버리죠.

용서가 왜 안 될까요? 우리가 용서가 ‘안 됩니다.’라는 말 하지 말고 왜 용서가 알 될까요? 용서란 내 쪽에서 기대하는 부응에 그 위치에 도달할 때 용서가 돼요. 남편이 무슨 짓을 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줘.’ 할 때 그 짓에 대해서만 아내가 닦달 내는 게 아니고 또 다음에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그건 수용이 안 돼요. 어느 정도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이건 누가 봐도 아무리 생각해도 또 다시 그런 짓을 안 할 위치에 도달할 때만 그게 용서가 되는 거예요.

주님도 마찬가지에요. 죄 짓고 용서하고 죄 짓고 용서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수 없는 그 수준에 도달될 때 그게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걸 인간에게 하소연한다고 그걸 인간이 성사시킵니까? 인간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돌아서면 똑같은 짓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미래를 예측 못하고 오직 과거만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과거에 자기가 잘못했잖아요. 그 다음에는 과거를 참작해서 교묘하게 죄 지을 경우에는 이거는 죄 안 진 셈이 돼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의 대책은 이겁니다. 뭐냐 하면 인간보고 ‘너 용서할래?’ 그걸 묻는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인간은 돌아서면 마찬가지로 죄를 반복하기 때문에 태생이 그렇다고 아침에 그랬듯이 타고난 성품이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미래에 이미 용서가 된 상태를 선물로 나누어주는 날을 만들어버리면 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최후의 날을 그에게 알려주면 되는 거예요. 미래를 알려주면 되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쉽게 예를 들면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불바다고 지옥이라고 봅시다. 다 지옥 왔는데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해서 천국 가신다 합시다. 다 지옥 왔을 때 주님께서 이미 지옥을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에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다른 이름은 없고 오직 주의 이름만 구원 받습니다.

주님께서 ‘유 재성 집사님 올라오세요.’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 ‘아! 좋겠다.’ 얼마나 부러워하겠어요? ‘아! 나는 언제 뽑히노? 축하합니다.’ 박수치면서 ‘아이쿠, 부러워라 뽑혀서.’ 전에 군대 있을 때 전부 다 좋은데 빠지고, 카츄샤로 빠지고 의병으로 빠질 때 자기는 전방 갔을 때 같은 훈련 동기들이 좋은데 가면 부러워죽어요. ‘너는 좋겠다. 나는 이제 전방 가서 죽었다. 빡빡 기고.’

지금 지옥이라고 봅시다. 이 본문하고 무관한 게 아닙니다. 지옥이라고 보고 ‘유 재성 천국 와.’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아우, 부러워죽겠다. 야, 로또 탔다. 부러워 죽겠다.’ 하겠죠. 오직 주님으로만 그걸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게 마지막 모습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마지막 모습의 정황이 어떠냐 하면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의가 있고? 없고? 전혀 없고 나는 스스로 거룩할 모습이 있고 없고? 전혀 없고 오직 못함을 익히 아시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룬 공로를, 공로에 자기 이름에 근거해서 이제는 너 이름 버리고 내 이름으로 건져 낼 때,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게 되겠죠.

이게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이 초막절이 마지막 절기에요. 마지막 절기라 하는 것은 모든 게 들통 나는 절기를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가나안 땅에 농사 잘 짓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나안 땅에 결실물 얻기에요. 가나안 땅!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됐음을 증거 하는 땅이고, 그 땅에서 나오는 모든 이삭과 모든 생산물은 이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기 때문에 제일 튼실하고 제일 좋은 것, 1/10로 십일조로 하나님께 바치게 돼 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비가 오고 안 오고도 누가 결정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하냐에 따라서 비가 오게 돼 있어요. 오늘 본문 17절에 봅시다.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지금 스가랴에 나오는 이 예언이, 그 연극 무대가 신약의 범우주적이 아니고 고 이스라엘 땅이라는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을 좁은 연극 무대를 가지고 신약에서는 그걸 전우주로 확대시키는 거예요. 수박이 잘 익었나, 쪼개볼 때 다 쪼개는 게 아니잖아요. 삼각형 그려서 그것만 잘라서 일부를 뽑아서 전체를 파악하잖아요. 그 일부가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과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요거 그대로 나중에 하나님께서 전체로 적용시킬 거예요.

이걸 뽑아서 하는데 그걸 뽑을 때 결실이 잘 나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의 의미를 제대로 살렸을 경우에는 곡식이 잘 되고 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의 의미를 못 지키면 그거는 결실이 살지 못하는 거예요.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생애라 하는 건 딴 게 아닙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을 융합시킨다는 게 예수님의 한평생 이예요.

이리 이야기하나 저리 이야기하나 못 알아듣는 건 할 수 없다마는 그러면 더 어려운 거 이야기할게요. 우리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어요. 생각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은혜가 안 돼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의 기대나 소망도 우리의 구원에 보탬이 안 돼요. 소망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데 그냥 찾아오시는 거예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다윗이 양 치러 갈 때에 그때 하필 양 치러 가서 현장에 없는데 사무엘이 와서 ‘장차 왕이 될 사람이 여기 이 집에 있다는데 계시 받고 왔습니다. 아들 다 집합시키세요. 번호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그럼 아들 다인 줄 알고 그럼 사무엘이 기름 붓습니다. 1번 아니다. 2번, 오, 잘 생겼네. 하나님 잘 생겼네요. 아니래. 3번, 4번, 그러니까 여섯 명 떨어지고 마지막 한 명 남았을 때 한 명은 완전히 100%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자기밖에 없잖아요. 일곱 형제도 인정하고 본인도 인정하고 아버지도 인정하고,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 했죠? 우리가 생각한 곳에는 그게 진리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한 예수님이 아니고 생각지도 않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평소에 우리는 내 생각밖에 안 하기 때문에 그걸 비껴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들 다입니까?’ 하니까 ‘아들 하나 있는데 그 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들 있으나 마나인데.’ ‘그래도 지금 분명히 기름 부을 애가 없으니까 데려와라.’ 딱 데려오니까 하나님께서 ‘그 애다.’ 라는 거예요.

사무엘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다가 우리의 구원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서 구원되는 게 아님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돼요.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나란 인생은 내 소관이 아니고 내 관리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 인정해줘야 됩니다.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건 천 번도 더 묻는 질문인데 본인이 본인 관리 하지 마세요. 따로 주님이 말씀대로 관리 하십니다. 당신이 초막절 되게 하시고 당신이 유월절 되게 하시고 당신이 맥추절 되게 하십니다. 당신의 말방울까지, 당신의 손수건까지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손수건, 죽은 자까지 낫게 했잖아요. 이게 사도바울의 소망이었습니까? 기대였습니까? 지금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는데 자꾸 우리는 우기기를 주께서 우리를 버렸다는 거예요. 사용 안 한다는 거예요. 너무 심심하다는 겁니다. 왜 기도에 응답 안 한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우리기도 응답하게. 주님 기도 있는데 우리기도 왜 응답해야 됩니까? 우리가 이만큼 살고 이만큼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 다 주님의 솜씨지 우리 솜씨 아니거든요.

이게 마지막 때 지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혜택이 보통 혜택이 아닙니다. 진짜 누구 말대로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주의 사랑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닙니다.

초막절에서 마지막 제사가 끝! 끝나요. 더 이상 제사 없는 날이 초막절입니다. 오늘로 끝! 하고 손 터는 것, 이게 초막절 이예요. 그 초막절에서 “다 이루었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죠. 요한복음 19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하시는 말이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르는 자기만의 스케줄이 있었던 겁니다. 스가랴 이 말씀이 그대로 돼야 돼요.

자, 끝으로 그렇다면 이 초막절이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와야 되는가? 여기 20절에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요 말씀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요 말씀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은 힘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일찍 죽었다고, 젊은 나이 17살 나이에 수학여행 가서 죽었다고 주께서는 비난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애타게 찾고 애타게 애곡하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그 애를 비난하지 않아요. 그것 때문에 비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공했다고 그거 때문에 미워하지도 않아요. 주님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거룩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도 그냥 어설픈 거룩 말고, 완벽한 거룩!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뤘던 그 의! 하나님의 의! 로마서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알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고, 그거 모르면 그거는 지옥 가는 것이고, 괜히 우리하고 거기에 대해서 이의 있습니다. 손들어서 주님 앞에서 대화 시도하지 마세요. 접견 안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스가랴가 다 담겨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주는 게 구원이 아니고, 오병이어 주는 게 구원이 아니고,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게 구원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게 구원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이루었다.“는 산상설교 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물 위를 걷게 한다고 구원이 아니에요. 사단이 떨어지는 능력 줬다고 구원이 아니에요. 힘없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나한테 비난하지, ‘너는 이 나이에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지, 주님은 자책하지 않는 자책을 우리가 스스로 하고 있어요.

주님은 이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의로서 알게 되면 그것이 네 솜씨가 아니고 주님 자신의 말씀 스스로 이뤘던 주님의 자기 솜씨에요.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는데 우리가 주님을 우습게 봐버리면 그럼 이래가지고 어떻게 돼요? 21절 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거룩한 물건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힘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이미 거룩으로 접수가 됐다는 거예요. 지옥에 있는 우리를 건져낼 때 우리를 건져 데려가는데 ‘네 귀는 놔두고 오너라. 네 코는 놔두고 오너라. 네 코는 풀어서 더럽더라. 코 떼고 코 없이 오세요. 네 이빨은 하나 썩어서 병원에 가서 퉁퉁 부어도 모르고 이빨 빼고 치료해서 오너라.’ 이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썩었기 때문에 데려가는 거예요. 왜, 썩으면 썩을수록 주님의 공로가 더욱 더 부각되기 때문에.

마귀는 바로 힘을 원합니다. 네가 그래 가지고 성도냐? 네가 그래 가지고 신자냐? 마귀는 매일같이 우리한테 자체적인 어떤 능력, 거룩 없다고 맨날 다그치고 닦달내고 우리는 거기 편승해서 ‘나도 그거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주님이 빛이라면 우리가 빛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주님이 촛불이라면 촛불을 나눠줄 때는 촛불 나눠줬다고 나눠준 촛불이 사그러지는 법은 없어요. 촛불은 나눠줘도 맨 그 에너지 유지합니다. 주님의 거룩은 모자라고 그런 거 없어요. 어떤 사람이 이래요.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이 바쁘겠다. 이 기도 들어주고 저 기도 들어주고, 안 바빠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 굉장히 바쁘시겠죠. 주님의 하신 일은 바로 이 스가랴에 있는 모든 제단의 솥도 거룩하다는 이것을 그냥 그대로 신약에 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는 자기가 부른 사람에게 능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가 기어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안 믿고 있다는 게 문제죠. 이미 주어진 현실은 그건데, 다 이루었다가 날마다 잊혀지지 않고 늘 생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 번 다시 죄 짓고 싶어도 이제는 죄질 수 없는 거룩 상태에 그리스도의 의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로가 있기에 말씀대로 진행되었기에 우리가 탐색한 죄와 의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의는 흠도 없고 티도 없고 변질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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