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에 대한 책망 2014년 6월 1일 본문 말씀: 말라기 1:6-8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종에게의 위대함이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과 합치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특히 제사장들을 종으로 상대하신답니다.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일방적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종의 관점에서 다루시겠답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종’이란 참으로 낯선 단어일 뿐만 아니라 종으로 처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기가 곤란합니다. 즉 어디까지 주인을 위해 양보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평소에 현대인들의 관계란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흥정과 협상의 정신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몽땅 다 가져가고, 혹은 몽땅 다 빼앗기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상상하기 힘듭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게 되면 항상 “나의 것은 지금 어느 정도일까?”라고 헤아릴 수 있는 여지가 계속 남게 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소유 안에서 자신이 존재를 다시금 정립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정도 되니 나는 이 정도로 행세하면 되겠다”는 자신의 철학이 정리가 되는 겁니다. 소유가 없이 주인에게 몽땅 다 빼앗겨 버리고 종으로 철저하게 인격이고 뭐고 부림을 당한다면 자연적으로 ‘나의 존재’라는 것도 무색해질 것이다. 말라기라는 선지서는 이미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이후에 나온 예언서입니다.
따라서 왜 이스라엘은 망했으며 어떤 점에서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안목과 일치되지 않느냐를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제사장들이 벌리는 제사의 비-정결함에 두고 있습니다. 이 ‘비-정결함’, 곧 ‘더러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는 식으로 나오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1:3에 보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대 원리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들이 나의 사랑을 알면 그것이 바로 종에 부합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준 명령에 대해서 필히 원래의 그 사랑에 부응해야 정답을 나타낸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나온다면 이건 취지 자체가 맞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래 사랑을 깨우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6절에 나와 있는 단어, ‘주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가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이름으로 벌리는 일과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일이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인간의 이름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이름을 삭제하고 제거하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름, 곧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취지로 붙임받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되었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경 마카베오 후 7:2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애야 내 부탁을 들어 다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 난 것도 마찬가지다.”(공동번역성경)
천주교는 기존의 기독교 철학에 준해서 ‘무에서 유’의 창조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복음적 창조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게’ 바로 창조입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으로서의 고백이 담겨 있지 않으면 비록 존재한다 할지라도 창조성에 부합되지 않기에 비-창조성으로 치닫는 중이랍니다. 만약에 무에서 유로의 창조성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놓기 때문에 비-복음적 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은, 인간의 실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범죄한 후에는 ‘이름을 붙여준 분’보다는 이미 자기 소유화된 그 이름 그 가치가 목적이 된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1:4에 보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즉 인간들의 이름은 자신들을 스스로 주인 행세하기 위한 구실인 동시에 존재의 이유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이 점을 겨냥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신을 ‘인간 세계의 이름 중의 하나’로 개입하게 됩니다. 고귀한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름 중의 하나로 섞여서 스스로 보편화하신 겁니다.
이러니 인간들은 그렇게 그런 신의 이름으로 간주하기에 그 이름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정할 하등의 이유를 찾지를 못하게 됩니다. 주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으로부터, 즉 주인이 도리어 종으로부터 핍박과 서러움과 무시를 당하는 이름으로 취급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름’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실체를 드러내므로서 인간들이 소유성 이름이 저지르는 범죄를 폭로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이름이란 그야말로 이름, 곧 소리 뿐임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유지할 몸이라는 실체를 갖고 있기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 몸체를 활용합니다. 이로서 주의 이름은 주인으로 합당한 대우나 대접을 받지를 못하고 기껏 주인이 종으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이름을 위한 주의 이름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망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인간에 대한 평가와 규정을 지적해주십니다. 즉 “너희들의 제사장은 더러운 것이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러한 단정은 법적으로 제대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지적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라 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이 사랑은 주의 이름이 붙이는 신체의 등장으로 그 사태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소유의 증강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희생을 품고 등장한 바로 그 분이 ‘주의 이름’의 구체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지적받은 그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이근호
|
14-06-08 22:55 |
2강-말라기 1장 6절-8절(제사장 언약)1406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6절에서 8절입니다. 구약성경 1327페이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 이니라 만군의 여호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은 우리 할아버지가 제사장 되구요. 평소에 할아버지의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별로 모범적인지 몰랐는데, 제삿날만 되면 제사상 똑바로 차리라고 그렇게 권위있게 해요.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죠. 그러면 다른 식구들, 식솔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본인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이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이렇게 잔소리하고 나가는 이유가 이거는 할아버지 본인의 권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나가니까 다른 식구들이나 저 뿐만 아니고 모든 식구들이 그거를 수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쫌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좀 이렇게 대자대비 했으면 좋겠다. 제사상 제대로 안 한다고 그걸 가지고 닦달내시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이런 거예요. 그러면 제사상 제대로 하면 복 주시겠네, 라는 어떤 흥정 원리가 갑자기 발동을 하는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 이래가지고 받겠느냐 치워라 한다면, 그러면 제사 똑바로 드리면 복 주실 겁니까? 라고 우리 쪽에서 나설 수가 있는 거예요.
이 말라기에 들어와서 주님께서 제사상 더럽게 했다고 이렇게 나오시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요, 이것이 이스라엘 멸망과 관련되어 있는데 너희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할 때면, 자꾸 사람들이 이런 버릇이 있어요. “앞으로 잘할께요.” “앞으로 똑바로 하겠습니다.” “예,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하는 사이고, 당신 때문에 내가 있고 당신은 내 때문에 있다는, 서로가 하나라는 그런 인식 속에서 이야기 할 때는 법을 논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제일 이해하는 것이 힘든 것이 뭐냐 하면은 저는 분명히 사랑으로 이야기하는데 받는 쪽에서 법적으로, “앞으로는 잘할께요. 앞으로는 성실하게 하겠습니다.” 그런 쪽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이야기하는데, 지난번에 했잖아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야기한다는데. “사랑.” 사랑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법에 대해서 새삼 따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따지느냐 하면은 “니가 내 사랑하는 사람 맞기는 맞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니가 내 사랑하기는 하느냐?” 하는 사랑을 다시 요구하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걸 본문에서 깊이 들어가면 어렵지만 쉽게 가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제사상을 제대로 차려라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그거는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약을 지키는데 그것을 법으로 지키는 거예요. 법으로 지키면 어떤 오류가 생기느냐면, 법으로 지켜버리면 법을 지킨 우리가 잘난 사람이 돼버립니다. “아! 내가 법을 지키다니! 내가 이렇게 훌륭했나?”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러면 뭐가 날라가버리느냐 하면은 부부사이나 무슨 사이가 법을 잘 지킨 경우에만 유지되는 사이가 돼버려요. 그러나 언약이 뭐냐 하면은 언약은 법이 아닙니다. 법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너를 버린 적이 없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있는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추후로 너를 이 땅에 만들어 냈다는 거죠. 그런데 만들어 냈는데, 만들어진 우리는 뭐냐 하면은 창세전까지 인식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니까 코앞에 있는 것, 주의 말씀 제대로 지켜 버리면 주께서 설마 섭섭하다고 생각지는 않겠지, 하고 나는 법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법적으로 나오는 우리와, 사랑으로 마주서는 주님과 이게 맞지 않으니까 주님께서는 원천을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수병공원에 가면 60대 아주머니가 두 종류 사람이 있어요. 아침에 가면 쑥을 뜯고 있는 분이 계세요. 비닐봉지에. 쑥을 뜯고 있어요. 쑥을 뜯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가 이렇게 나오겠죠. “참 부지런하다.” 식구들 먹여 살릴려고 그렇게 아침부터 부지런 떨고. 쑥을 이만큼 모아요. 아래 가보니까 한 사람이 뜯고 있었는데 어제 가보니까 그걸 보고 다른 아주머니가 합세해서 두 명이 또 쑥을 뜯어요. 참 성실하고 부지런하죠. 그 정도만 되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참 훌륭한 쪽에 속합니다. 그런데 다른 아주머니는 뭐냐 하면 비닐봉지에다 쓰레기를 줍습니다. 자, 성실한 것과 쓰레기를 줍는 쪽이 객관적으로 봐서 누가 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겠습니까?
한쪽은 쑥을 뜯으니까 이건 소유죠. 내 것을 더 잘 키워서 식구 먹이겠다는 그 성실함. 자기 소유를 증강하기 위한 성실함이죠. 그런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그 쓰레기 주워서 국 끓입니까? 팔아 먹습니까? 그거는 남이 버려놓은 것을 그냥 자기가 희생해서 하는 거죠. 한쪽은 자기의 소유의 증강이고 한쪽은 소유의 반대로 소멸이죠. 자기가 갖고 있는 땀과 노력을 허비해서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한쪽은 희생이고 한쪽을 소유가 더 증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장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본문이 제사장 언약인데, 어느 쪽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을 기뻐하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주인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종이 종 나름대로 성실하면 안돼요.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경우는 딱 하나입니다. 주인의 마음에 부합되면 기쁘게 해요. 주인의 마음에 부합되면.
선생님이 시험문제 낼 때, 학생이 시험문제 낸 그 범위내에서 답을 해야 성적이 나오죠. 선생님이 요구한 문제는 이건데 자기가 안다고 해서 엉뚱한데서 답을 내면 점수가 안 나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를 냈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성실로 답변해 버리면 그거는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왜 나름대로 성실할려고 하냐면은 쑥을 뜯는 아주머니의 마음입니다. 내 것 내가 지키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어쨌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고 내가 지켜야 하지 다른 사람이 지킬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인생 소비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 인생을 희생하면 안 되겠습니까? 방금 이야기 했습니다. 종은요, 주인의 마음만 알면 돼요.
그런데 주인이 어떤 주인이냐 하면 바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주인입니다. 한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참 그 말이 무섭거든요. 그대로 있는 것은 밀알답지가 못한 거예요. 쑥을 뜯는 아줌마는 그대로 있어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쑥으로 쑥국 끓이고 있겠죠. 자기는 손톱만큼도 손해 본 것이 없어요. 그러나 쓰레기를 줍는 아주머니는, 매일 보는 것은 아니고 가끔 나와요. 그 분은 항상 쓰레기 줍는 자기희생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쓰레기가 있는 이상은. 어느 쪽이 주인의 출제 문제에 부합되는 답을 한 사람입니까?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 희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쪼다’라고 이야기 하고 ‘바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리고 자식 교육시키는 주변에서는 쪼다나 바보는 외면하고 자기 소유나, 자기 능력을 증강시키는 사람을 출세했다, 성공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제사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예요. 이건 마카오베 후 제 7장 28절에 보면 마카오베라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천주교 성경책에 나오는 거예요. 외경입니다. 거기에 처음 나와요.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만들었다. 뭘 가지고 만든 게 아니다.” 라는 대목이 나와요. 공동번역 두꺼운 책 그 뒤에 보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이 먼저 있었고 혼돈에서 빛이 창조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라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고 하는가? 그거는 자기존재 자체, 내가 여기 있음 자체를, 천주교입니다. 내가 있음 자체를 선하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거스틴부터 시작해서 토마스아퀴나스 신학에 보면 뭐가 있냐면은 사람의 선이 뭐냐? 있음 자체가 선인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낙태를 못하게 했습니다. 왜? 있는 애를 왜 죽이냐 말이죠.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했는데.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데서 있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거기에 담으면 그게 창조예요. 만약에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이 빠져버리면 그거는 창조가 다시 원래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아담이름이 아담이죠. 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먼저 생겨놓고 이름을 나중에 짓거든요. 먼저 존재하고 난 뒤에 이름을 명명, 명명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지어버리면 이것은 존재가 없어져 버리면 이름도 같이 날라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나중에 생긴 그 이름을 위해서, 그 이름의 명예와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자기 몸은 죄로 인해 없어져 가도 기어히 고집을 부리는 경향이 있어요. “주여, 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몸체도 없이 먼저 이름부터 먼저 나와요. 실체가 없는데 이름부터 먼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할 때는 하나님의 키가 몇 센티다 하는 거 없어요. 그냥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행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때 그들은 굉장히 당황했고 난처했어요. 모세가 바로 앞에 섰습니다. 바로가 하는 말이 “누가 당신 보냈느냐?” 누가 당신 보냈느냐고 이야기해요.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이름이 어딨습니까? 우리가 아는 이름은 시간과 어떤 특정 장소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여호와 이름은 공간이고 시간이고 없습니다. 그냥 사건이 되는 거예요. 떨기나무에 나타나면 나타난 순간 그게, 나타난 순간이기 때문에 이건 인간의 이름으로 소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주님이 붙잡아 줘야 되지 내가 붙잡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우리한테 붙잡히지 않느냐. 우리를 없애 버릴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제사장 언약을 통해서, 제사상 가지고 잔소리 하시면서 니는 니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겁니다. 앞으로 내가 잘할께요. 제사장 법대로 할께요. 내가 상을 깨끗한 것을 드릴께요.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를 없애는데, 없애는 방법이 뭐냐, 이름부터 없애요. 이름부터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그냥 없애면 안 되거든요. 이름을 바꾸어 주면서 기존 이름을 없애 버립니다. 없어지면서 그 이름은 기억을 해야 돼요. 우리가 아브라함은 아브람 할 때를 기억해야 되고 이스라엘 할 때 야곱은 기억이 되야 돼요.
그럴 때,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 주어지는 혜택은 뭐냐, 그렇게 될 때, 우리 몸은 주님의 언약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자리가 되고 그 작용은 뭐냐 하면 사건의 연속이면서 여호와 이름으로 생긴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여호와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은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없는 분이 우리 이름을 바꾸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체, 우리의 몸체 자체가 주님의 이름이 작용하는 그 본부가 되는 겁니다. 그 센터가 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못난 우리, 주님의 의해서 붙잡히게 된 우리가 어디에 합류가 되느냐 하면 이 제사장 언약에 끄트머리에 완성된 노선에 드디어 우리가 끼어들게 되고 동행하게 되고 합석하게 되었다는 것이 티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죠. 우리가 실수함으로써 진리를 안다고요. 우리의 오류가 발견됨으로서 비로소 그 계기를 통해서 진리 전체가 드러난다고 했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늘 실수와 오류가 무엇인지를 우리한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이미 너는 하나님의 구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봅시다. 그동안 우리가 실수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름이 있고 우리는 여기 존재가 있다. 나 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지. 어떻게? 법으로 믿은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존재가 되게 되면 내가 잘되기 위해서 법으로 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법이 하나님의 법과 일치되느냐? 일치가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법을 지킬 때, 그냥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노림수가 있어요. 항상 노림수가 문제라. 뭔가 이걸 지키면 나에게 어떤 혜택이 올까를 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림수는 말라기 1장에 보면 사랑이거든요. 하나님의 목적은 사랑이란 말이죠.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법을 가지고 상대를 하질 않아요.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너가 어떻게 되도 나는 너를 구원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게 아가서에 보면 나옵니다. 아가서의 특징이 여자는 자꾸 뺄려고 하고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 가서 기어히 여자의 손목을 잡고 여자가 그 손목 잡은 것을 쳐내기 위해서 문을 닫으니까 그 문에 끼어 가면서도 이거 먹고 감기 나으라고 마지막 손에 쥔 알약을 쥐어 주고요.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가”거든요. 아가서의 주제 아닙니까?
참, 그런 사랑이 있고 그런 사랑을 골라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놓지 않겠다는 것이 아가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증거 했거든요. 사랑이란 사랑으로 리액션 보내야 돼요. 사랑으로 반응을 보내야지 이쪽에선 사랑으로 나오는데 법으로 나와 버리면 상당히 상대방이 당황하게 됩니다. 내가 준 게 니하고 지금 흥정하자고 준 게 아닌데. 왜 니가 법적으로 나오느냐 말이죠. 이거 지켰습니다. 이거 안 지켰습니다. 왜 이렇게 나오느냐 말이죠.
지금 제사장 언약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제사장 언약은 희생입니다. 그 사랑을 제사장 언약을 통해서 희생을 한 거예요. 여기 7절에 보면, 앞에 이야기 했거든요. 종과 주인의 이야기는 했으니까 넘어가고요. 6절 끝에 봅시다. 참 중요한 건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이렇게 나오죠. 이게 본심이예요. 알면서 일부러 한 게 아니고 정말 몰라요. 왜냐하면은 7절에 주의 단에 드리는 떡을, 너가 더러운 떡을 드렸다고 할 때에.....,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 같으면 “맞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렸습니다.” 하면 게임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규정을 내가 하면 안 돼요.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저쪽에서 어떤 규정을 내리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수용을 해줘야 됩니다. 제가 설거지 하게 되면 나름대로 깨끗이 했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보고 “하여튼 설거지 해놓으면 내가 또 해야 돼. 이것 봐 설거지.”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이만하면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아내는 그게 아니고 그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두 번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 규정을 누가 하느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쪽 주인이 한다는 거예요. 지금 제사장 하면 자꾸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 규정에 대해서 이게 사랑의 규정이거든요.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나한테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수긍을 해주면 끝. 당황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면 끝. 뭐든지 끝나버리는 겁니다. 내 생각이 거기서 왜 발휘가 되어야 합니까?
떡을 더러운 떡을 드렸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헌금할 때 다리미질 합니까? 십일조 한다고 다리미질 하다가 돈도 좀 태우고 이랬습니까? 십일조는 깨끗해야 한다고. 교회 올 때 깨끗한 옷 입고 와야 한다고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까요? 도대체 인간이 깨끗한 떡을 드릴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말한 깨끗한 떡은 뭐냐 하면 ??사랑이 없는 모든 떡은 다 깨끗한 거예요. 지가 깨끗한 체 하면서 드리면서 그 안에서 나도 깨끗했다는 자기 공로가 첨가 되어 있으면 이거는 쑥을 뜯는 아줌마 심정이라니깐요. “좀 더 많이 뜯어야지. 좀 더 복을 따내야지.” 이거는 쑥 뜯는 거고. 소유의 증강, 증강시키는 거고. 쓰레기를 줍는 아줌마는 그냥 그 희생에 참여하는 거예요. 어떻게? “나, 내 이름 포기했습니다. 나, 자존심 포기했습니다. 주께서 뭐라고 해도, 창녀라 해도 깡패, 강도, 세리라 할지라도 저는 주님의 말이라면 저는 수긍하겠습니다. 예, 옳습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말라기는 모든 예언서의 마지막 종합적으로 총정리하는 겁니다. 모든 예언서는 전에 이야기 했지만, 다시 반복을 해야 돼요. 예언서에 두 가지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언, 이것은 다음에 기회를 줘요.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하란 말이야.” 기회를 주지만 문서로 된 예언은 기회가 없어요. 이미 끝난 거예요. 끝나 버리고 나중에 너희들 신약 때 보자. 나중에 메시야 오거든 그 때 되돌아 보게 되면 “니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그 사랑은 변치 않는구나” 이것을 차후에 소급해서 깨닫는 식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거든요.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걸어 왔던, 망가지고 실수하고 오류를 범했던 그 대목을 이제와서 우리에게 인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말씀대로 주어지는 거예요. 니가 교회와서 무슨 짓을 하고 평소에 어떤 짓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니 능력으로 주의 법을 준수하고 완성시킨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그렇게 잔소리하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영원한 사랑, 어떤 경우라도 에서는 미워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한 닦달을 내는 거라는 것을 니가 인정하느냐? 인정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인정한 것이 되는 거예요. “앞으로 잘할께요.” 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은 주께서 사랑으로, 아까 뭐 사랑은 연필로 쓴다고 했잖아요? 연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쓰는 거예요. 그 주님의 희생으로 쓰시는 겁니다. 그 수병공원에서 쓰레기 줍던 아줌마가 그 쓰레기 봉지 들고 와서 만약에 우리집에 확 부어 놓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거예요. 십자가 지시고 그 피를 우리집에 확 부어 놓는 거예요. 니 때문에 이렇게 피 흘렸다고. 확 놓을 때, 우리는 “잘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해도 쌉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게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모습, 희생,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버티고 버티고 내가 알아서 잘할테니까 주님 들어오지 마세요. 강렬하게 버텨봤자 사랑은 그것까지 허물어트리고 주님의 희생정신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오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내 이름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그 인생은 이제는 접어 버리고 주님 사랑하는 맛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