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2026년 2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57-60
3: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3: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3:59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3:60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끈, 특히 ‘끊어지지 않는 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되는 끈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끈에서부터 일어나는 효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끈의 주된 내용을 보호하고 그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 마치 전선의 구선을 둘둘 감고 나아가는 고무로 된 피복처럼 세상에 각가지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전기가 직접 통하는 구리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 피복 부위를 놓고 논쟁하고 시비걸고 있습니다. 무엇이 온전히 체계가 되냐고 따집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의 아픔과 원통함을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에게 언약이 직접 흐르는 구리선 같은 것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선 피복에 관심 두는 것을 중앙을 관통하는 구리선으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피복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걸까요? 선지자로 하여금 애통케 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대 민족이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 체제“로 다져진 국가입니다.
이들이 너무나 강대하게 발전하고 팽창되니 이스라엘도 국가 운영의 모델로 여겼습니다. 누가요? 이스라엘과 유대 국가 왕이 그러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국가 운영 정책에 전적으로 동조했습니다. 참된 선지자만 반대했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왜 반대하고 일반 백성들은 왜 동조했을까요?
이점을 알기 구약 요나 선지자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니느웨와 정반대의 길로 도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배에 타고 있는 선지자를 노리고 발췌하십니다. 선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에 얹혀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중요했던 겁니다.
선지자 생각은 이러합니다. 자신은 선지자라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이미 챙겼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명보다 자신의 존재가 우선적으로 소중했던 겁니다. 자신의 가치, 자신의 자존심에 대한 소중함을 그 어떤 경우에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의 모든 결정은 이러한 자기 소중함은 근거를 하고 나온 겁니다.
배 승선하고 난 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들키자 자진해서 쿨하게 자기가 바다의 제물이 되겠다고 했고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즉 실행에 옮겼습니다.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전하고 난 뒤에도 심판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자, 선지자로서의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그는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나 선지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이 소유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이고 자기만이 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278명은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 곧 ’로마에서 재판받아야 함‘으로 위하여 같이 구원받게 됩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3,38) 결국 구리선에 반대되는 피복의 성격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화하려는 겁니다.
즉 자신의 결심과 결정과 판단으로 인하여 은혜를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기 구원에 도움되겠다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런 차원에서 계속해서 다윗처럼 대단한 왕을 찾았고 하나님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보내셔어 친히 이 땅에 오신 이스라엘은 왕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왕이 오시기는 오셨지만 세상적으로 대단한 풍채의 왕이 아니라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초라한 왕이 오신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난처하고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할 왕의 풍채가 결코 나귀새끼가 적절치 않다고 그들은 믿고 있게 됩니다. 이 불신이 예수님을 대해서 잘못 생각하거나 의심하게 만든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끈, 곧 언약의 끈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바꾸는데 있어 예수님께서 친히 개입하십니다. 일단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판단, 자기 결심과 자기를 내어놓게 만드는 상황을 일이키게 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절망적인 사태에서 ’두려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라도 인간은 뭐라도 하게 됩니다. 그 예가 마가복음 5:25-28에 나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예수님의 옷을 손을 댐으로서 옷으로부터 능력이 임했다는 이론은 제자들에 의해서 반박됩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막 5:30-3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피흘리는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언약의 끈됨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증거하는 일에 합류시키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여인은 비록 자기 결심과 결정과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해석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바가 됩니다.
이 사실에 직면한 이 여인은 자기 소중함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돌려주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막 5:33) 즉 결코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두려워하며 떱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의 죄를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안에 들어있는 우상적인 요소가 늘 발각되는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예레미야애가 3장 57~60절(끈)2602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57~60절입니다. 구약성경 1148페이지입니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아멘.
"두려워 말라"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연약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지경으로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두 가지 예를 들면, 하나는 구약의 요나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보내는 그 장소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다 건너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도망하다가, 끝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찾아내어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요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에요. 요나의 개인적인 존재보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었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감찰하시는 거예요.
감찰을 하신다는 말은 지금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한테 짊어진 하나님의 일이 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만 없으면 그 일도 무효가 될 줄로 이렇게 잘못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일과 요나를 계속해서 일치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일치시키면서 요나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알려주시는 것은, ‘왜 요나가 도망갈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그 점입니다.
요나가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개인 중심으로, 자기 소유 중심으로 생각했던 게 문제였던 거예요. ‘나는 은혜를 받았다’라는 이거는 아니거든요. ‘은혜를 입었다’라는 그거는 맞는 겁니다. 은혜를 우산으로 봅시다. 우산인데 개인용 우산이 아니고 전체용 우산인데, 요나는 그걸 개인용 우산으로 여겨서, 혼자 우산을 쓰고 도망가면 될 줄 알았던 겁니다.
전체를 한꺼번에 다 덮어주는 은혜가 있는데, 그거는 성도에게만 전체를 덮어주는 거예요. 비 성도는 제외시키고. 근데 사람인지라, ‘나 구원받았으면 됐잖아’라는 생각을 하고 도망친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가 ‘나 선지자입니다. 나 구원받았습니다. 나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전체 은혜로 돌리기 위해서는, 요나로 하여금 두 개의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내가 자진해서 바닷물에 빠지는 거, ‘내가 자진해서 빠질게’라는 거. 두 번째는 ‘내가 받은 사명하고 틀어지니까, 차라리 내가 자살하는 게 낫습니다’라는 자살하겠다는 거. 두 개의 극단, 두 개의 극단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말리시고 실패하도록 하셨습니다. 요나는 끝까지 자기의 미래는 현재 자기 결단과 결정에 달렸다고 생각하는데, 내 결정과 결단이라는 그 손모가지를 비틀어 뭉개버려야 해요.
‘내가 결정했습니다. 내가 결심했습니다. 내가 정했습니다’라는 그 손모가지를, 이 손모가지가 이게 표준말은 아니고, 이 손목을, 그걸 못 쓰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내가 어떤 결정하는 것은 ‘이게 장애구나. 이게 고장 난 결정이고, 내가 고장 났구나’라는 그걸 깨닫는 식으로 자기 결정과 결심을 하게 하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건 아닌데,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그 이야기가 사도바울이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데,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로마에 가서 재판받기로 돼 있는데, 지중해를 지나면서 배가 풍랑 만나서 다 죽게 되어 있어요. 다 죽게 되었는데, 밤에 꿈에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서야 하고 너와 같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안 죽는다”(행27:24)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우리의 고집스러운 내 결정이라는 그 손모가지를 어떻게 꺾느냐 하면,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을 줘요. 우리 힘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 ‘나는 이거 낭패다. 나는 끝났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다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 교체돼야 되하고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내가 아는 믿음, 내가 얻는 사랑, 내가 받은 은혜’가 다가 아니라는 쪽으로 어떻게 바뀌느냐, 이렇게 바뀝니다. 간단합니다. 전선을 보면 그 안에 구리 선이 들어 있죠. 구리 선이 들어 있는데 그 구리 선이 절연체로 피복(被覆) 되어 있어요. 고무 같은 걸 팽팽 감아서 전기가 잘 통하는 구리를, 전기가 바깥으로 누전되지 않고 누가 다치지 않도록 고무 선으로 팽팽 돌려서 감아 놨잖아요.
그게 전선이잖아요. 인류의 역사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쭉 갑니다. 가는데 언약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에 감아놓은 것이 뭐냐 하면은 역사입니다. 정치사, 사회사, 우리 가정의 인생사, 그 모든 것이 감아놓은 거예요. 하여튼 이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늘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 영천에 미나리 보러 가는 거예요. 미나리 먹으러 가는데, 요즘 안 가지만, 옛날에 자주 갔거든요.
‘미나리 먹으러 갑시다’라는 게 내 손모가지죠. 내 결정이에요. 내가 늘 해 왔던 거니까. 뭐를 빼먹었느냐 하면 ‘내가 삼겹살에 미나리 먹었다’가 돼버려요. 이거는 구리 선이 아니에요. 이게 피복인데, 이게 바깥에 있는 전선인데, 우리는 무엇을 놓쳤느냐 하면, 안에 언약이 통과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미나리하고 삼겹살을 먹게 했다는 이 연관성, 관련성을 우리가 놓쳐버리는 겁니다.
중요한 것을 빼먹고, 나는 이렇게 먹고, 나는 3월에 뭘 하고, 4월에 뭘 하고, 이렇게 자기 계획만 수두룩 내놓는 거예요. 얼마나 좁은 안목이고 좁은 식견입니까? 그러면 제가 이걸 언약이라 했는데, 언약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면 쉽게 고치겠습니다. 언약이라 하지 말고, 끈, 끈이에요. 예수님과 나하고 맺은 끈, 예수님과 맺은 끈은 우리가 가위로 자르려고 해도, 가위로 자르려고 하는 그 손모가지가 날아갑니다.
이미 그 끈은 우리 쪽에서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 끈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또 예레미야한테 주께서 감찰하셨는데,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시고 그다음에 뭐냐. 주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셨다는 거예요.
내 쪽에서, 내 결정과 내 관심사로 보지 말고, 안쪽에 구리 선에서, 하나님이 이미 통과시킨 끈 쪽에서, 이 끈을 끈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끈의 의미를 위해서, 나로 하여금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게 조합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두려울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평소에는 ‘이런 것이 두렵다. 저런 것이 두렵다’라고 하는데, 그거는 다 소용없고요. 막상 하나님께서 두려운 상황을 줘버릴 때, ‘아, 이게 진짜 두려운 거구나’라고 그때 서야 비로소 알고 우리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떻게 조치할 건 없구나’라고 해놓고는, ‘어떻게 하면 좋지?’ 이렇게 하거든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는 질문은 잘못된 겁니다.
그 질문을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소중하거든요. 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라는 그런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럼, 질문 자체를 바로 돌리기 위해서 구리 선, 하나님의 끈으로 이 시간에 접근을 한번 해 봅시다.
지금 우리는 내가 소중해요. 내 결정이 소중하고, 내가 선택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거, 악착같이 살아왔다는 이러한 자신의 품위와 의미가 굉장히 우리는 굳어져 있습니다. 경직되어 있어요. 이래서는 구리 선이 안 보여요. 끈이 안 보입니다. 자꾸 소유성만 있어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의 가치를 나는 꼭 쥐어야 한다. 그 소유성만 주장합니다.
이걸 어떻게 교체하느냐? 어떻게 교체하느냐보다 교체한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체한 결과가 마가복음 5장 28절에 보면 나옵니다. 먼저 25~26절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절망이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절망이란 말이죠.
그 뒤에 27~28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여자의 이런 행동은 자기 위주입니다. 잘 들으셔야 해요. 여자의 이 행동은 자기입장입니다. 병에서 낫겠다는 의지가 강해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는 안 아프고 싶어요.
나는 멀쩡하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건강하고 멀쩡할 때만, 내가 남들 앞에서, ‘나 잘났지? 그렇지?’라고 내세울 것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삶의 전부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자가 옷을 만지면 낫겠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여자는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내게서 구원이 나갔다”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체가 소중하다고 본 거예요.
여자는 ‘내가 구원받아야 하겠다’라는 나부터 스타트, 나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돌아오는지가 되는데, 주님은 그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나에게서 출발한 것에 네가 얻어걸렸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하냐면,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옷 만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기서 밀고, 저기서 밀고, 방탄소년단 저리 가라죠.
막 밀었다는 거죠. 막 밀었다. 따라서 옷에 어떤 능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옷을 안 만졌겠어요? 이렇게 하다 보면 만질 수 있고, 스칠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이 만졌잖아요. 여자 아니라도 많이 만졌는데, 능력이 나간 것은 이 여자뿐인 거예요. 여자뿐인 거예요. 12년 동안 앓은. 그러니까 이 장면을 보고, 33절에 보면 참 성경 해석이 어려워요.
이 여자가 ‘그렇죠! 제 믿음입니다!’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실상이 들켜서, 떨면서 두려워하고 죄송하다고 엎드렸습니까? 어느 쪽이었습니까? 바로 주님 앞에 엎드렸어요. 내 해석, 내 손모가지 자체, 내가 소중하니까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그 생각 자체를, 주님이 찾아와서 스타트가 되지 아니하면, 출발이 되지 않으면, 이걸 꺾을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병 낫고 안 낫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내가 생각한 예수님이 아니고, 거꾸로 오셨다는 것, 내 죄를 지적하러 오셨다는 것, 그 죄를 지적했다는 그 문장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우리는 우리 죄에 관심 없고, 죄 씻음을 받으면 구원받겠다는 나한테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하죠. 나는 소중하니까 소중한 내가 구원받는데 정신이 팔려서, 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차근차근히 죄부터 지적합니다. 죄란 뭐냐? 네가 소중하지 않다는 사실을 네가 감추고 있다는 거. 네가 전혀 소중하지 않다는 겁니다. 전혀 소중하지 않은 것을 동원해서 진짜로 소중한 예수님의 그 구리 선을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감으면서, 세상은 진행되고, 진행되고, 진행되고, 나중에는 그 최종적인 목적에 도달되는 겁니다.
어떻게 바뀌는지 스가랴 9장 9절에 나옵니다. 역시 9장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여기까지 한번 봅시다. “네 왕이 임했다” 지금 시온의 딸, 이스라엘은 핍박받고 있고 나라는 빼앗겼습니다. 바사 나라에 완전히 종이 되어 있어요.
애굽의 히브리인들이 종이 된 것 같이, 이스라엘은 깨지고 노예 생활을 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왕이 오면 돼요.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왕을 기다렸습니다.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소중합니까? 왕이 소중합니까?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이 소중했던 거예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소중했던 거예요. 문둥병 10명이 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라고 할 때 누가 소중합니까?
예수님이 소중합니까? 아니면 문둥병 걸린 자기가 멀쩡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자기가 소중한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가 손댈 수 없는 죄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왕이 임한다” 왕이 오신데. 여기 어떻게 오는데?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거는 이 사실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까불고 잘난 체할 때, 그들은 왕이, 다윗왕과 솔로몬왕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게 죄였던 거예요. 인간의 왕은 우상이었습니다. 인간이 개를 키우지요. 인간이 개를 키웁니다. 그런데 토끼하고 인간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현대 생물학에서는 차이점이 없어요. 토끼하고 인간하고 차이점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요. 인간도 진화한 거고 토끼도 진화한 거예요. 진화의 가지치기 중 하나로 분류된 것이 인간이고, 토끼고, 원숭이고, 개미고, 코끼리고, 그런 겁니다. 차이점 없습니다. 다 같은 동물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그러면 이걸 바꾸겠습니다.
개가 짐승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짐승이 짐승을 키우는 거예요. 그게 구약 이스라엘에 보면 많이 나와요. 뭔가 먹을 거 있을 때는 사람 같아도, 먹을 게 없으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요. 이거는 원숭이나 호랑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약간의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풍족하게 사니까, ‘우리는 짐승하고 달라. 고상하기 짝이 없어. 참된 것과 진리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해야 해’라고 하지만 막상 그 바닥, 그 바탕 되는 양식이 떨어지게 되면 짐승 됩니다. 근데 성경은 더 정확하게 합니다. 짐승보다 더 못하다.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7장 9절에 나와요. 인간은 짐승보다 더 못합니다. 짐승이 짐승을 키웁니다.
근데 그 짐승이 만든 짐승이 있어요. 그게 국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 집대성한 게 국가예요. 인간 각자 속에 들어 있는 짐승 성, 짐승적인 성격을 끌어당기면 마귀가 되는데, 그 마귀가 이념으로 하나의 종교처럼, 이념 이데올로기를 사상의 체계로 만든 게 국가라는 사상 체계예요. 거기서 동계올림픽하고, 금메달 지금 3개 따고 있습니다.
전부 다, 사고방식 자체가 짐승의 사고방식이에요. 모든 게.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더 큰 짐승에게 잡아먹힌 거예요. 왜? 그들은 여호와를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저쪽 더 큰 짐승을 소망했고, 그 심성을 부러워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 바벨론처럼 되느냐’라고, 요새는 ‘우리는 언제 미국처럼 되느냐’라는 식으로 그들을 부러워해서 그들이 섬겼던 종교를 그대로 수입했어요.
이 종교 섬겨서 저 나라가 큰 나라, 선진국이 되었다면, 우리도 이 종교를 바탕으로 하면 크게 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한 유튜브에서 이런 이야기 했어요. 한국교회가 문제 있다고 하는데, 한국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그게 문제지, 교인 수가 2명이냐 3명이냐는 전혀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본질을 잃어버린 겁니다. 진짜 왕을 가짜 왕이 이렇게 커버(Cover)한 거예요. 가리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부에 있는 악마성, 짐승 성을, 약속의 땅 주위에 있는 강대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그것이 들춰진 겁니다. 주께서 그걸 감찰하신 거예요. 예레미야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거예요. 아니까 주변에서 예레미야에게 구박을 많이 했어요.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네가 당한 거 다 알고, 내가 너 당한 것만큼 내가 복수해 줄게”라고 예레미야가 메시아적인 발언을 늘어놓고 있고, 그것이 오늘 본문 대목입니다. 이제 끝으로 그러면 짐승이 아니고, 진짜 끈, 진짜로 오신 그 메시아는 어떤 모습인가?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다음에 누가복음 9장 59절에 어떤 제자가 가로되, “내가 주님 따라는 가는데,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할 때, 따라간다고 하니까, 어지간하면 주께서 다녀오라고 허락하면 될 텐데, 주님께서 이것조차도 구리 선이 안에 있는 피복이에요. 너의 아버지가 죽는 것이 이 끈, 끈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은 아버지 죽을 때, 이 손모가지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주님을 찾고,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막상 상 당하니까 자기 결정과 결단이 먼저 앞서서 자기 가치, 수치스럽지 않게 하는 소중함을 더 발휘하는 거예요.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라고 자기 결정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냥 봐주지 않고 이렇게 합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서는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누가복음 9장 6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가버려라!”
이건 방향이 잘못된 겁니다. 하늘나라라는 것이 너의 죄를 모르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누가복음 17장 27절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라고 하시면서, 롯의 때와도 마찬가지라고 하시고, 32절에 중요한 말씀 나오죠.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것을 인간의 손모가지 결정으로는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데, 못 지키는 그 이유를 알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임한 것이 됩니다. ‘내 결정, 내 결심, 내 결단은 하늘나라에서 안 받는구나. 이걸 왜 안 받느냐. 이게 죄이기 때문에 안 받는구나’라고 아는 사람은 주님의 끈에서 나오는 능력이 이미 피복 되어서 그 구리 선, 끈이 자기 안에서 관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나아가서,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정치와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하나님 영생의 근거가 확고히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으로 요나같은 사람, 예수님 옷을 만진 사람, 그런 필요한 사람을 모집해서, 인간의 어떤 결정에도 구애받지 않고, 주님의 결정에 의해서 이미 구원되었음을 보여주는 그 일이 우리 현실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두려워 마시고, ‘또 내가 모르는 어떤 죄를 지었구나. 또 나를 소중히 여겼구나’라고 허허 웃으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 철이 날지. 믿는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어찌할까 하고 탄식하고 낙담하는 우리의 반복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끈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기에, 다시 관통하는 사랑의 끈을 보기 위한 하나의 기회인 것을, 하나의 계기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