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활용성
2026년 2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3-9
3:3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3: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3:5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3:6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3:7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3: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3: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선지자는 매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의 삶 고통의 원인이 자아의 무게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누르는 고통은 본인이 기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자기를 치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당하는 고통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우상 섬김으로 인하여 율법에 따른 저주의 무게를 선지자쪽으로 집중해서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고통이 도달되는 지점을 오늘 본문 4절에는 ‘뼈’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이 뼈가 나오기 전까지 이 뼈를 덮은 ‘살’이라는 가죽을 거두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외형은 날아가고 뼈만 남게 됩니다. 뼈란 본질 중의 본질, 마지막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은 선지자에게 죽음으로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적 기능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욥 7:15) 뼈만 남아 있다는 것이 곧 죽음 직전이기는 하지만 죽음으로 반드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고통은 일반인들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 코스로 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무게가 선지자를 짓눌렸고 그로 인해 선지자는 고통을 당하지만 이 고통은 곧장 일반적으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특별한 죽음으로 통하는 그런 고통이어만 해야 합니다.
이런 고통은 곧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통과 연결될 경우에만 성립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일반인들과는 달리 메시아의 연관성을 가지고 다루십니다. 이는 인간은 처음 만들 때부터 내재되어 있는 원리입니다. 창세기 2:23에서 아담은 여자를 보고 이런 탄성을 발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뼈’라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자기 존재의 기반구조라는 겁니다. 자기 안에 여자가 들어 있는 데 이 여자는 자기 속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대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미래가 열립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여자라는 이름은 아담이 지었지만 아담이 짓지 못한, 그리고 아담이 알지도 못할 미래가 여자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의 본질에 해당되는 여자는 영생이 됩니다.
아담의 본질이 생명으로 통하기 위해서는 필히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냥 좋게, 흥겹게 흙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바로 이 저주를 오실 메시아도 같이 감내하시는 겁니다. 그 감내하시는 메시아로서의 저주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도 같이 하게 됩니다.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백성의 죄의 무게에서 느끼는 저주의 가혹함을 선지자가 받기 때문에 선지자는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난다’는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뼈입니다. 죽음으로 사라지는 방식은 아닙니다. 메시아를 드러내는 참여된 자들은 죽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뼈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에스겔 37:1-4에 보면,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1-4)
여기 하나님과 같이 등장하는 선지자의 호칭이 인자(人子)입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자신을 나타낼 때의 호칭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따라서 구원의 본질은 뼈+인자(人子)의 만남에 바탕을 두고 시작됩니다.
뼈에 인자의 기능이 입혀지면서 새로운 살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뼈의 등장은 선지자인 다윗의 인생사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다윗왕은 간음죄가 살인죄를 저질렸습니다. 누가 봐도 다윗 본인의 죄로 인한 범죄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편 51에서는 다윗은 예상 밖의 전혀 다른 고백을 내어놓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1-5)
즉 다윗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 모친으로부터 물러받은 죄가 자기를 통해서 죄를 짓게 했다는 근거는 바로 자기로 인해 꺾어진 뼈의 기능을 구현하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겁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8-9)
결국 다윗은 예언합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바는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인 ‘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다윗은 기존 인간들의 환경이 아닌 꺾여진 뼈로 오실 메시아의 새로운 환경을 미리 맛보고 그 안에서 처신하고 있습니다. ‘죄+인자(메시아)의 오심’이 기존의 인간 환경에서는 상상도 못할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 복음을 전하는 심부름꾼입니다. 이 심부름에 충실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시도 우리 안의 메시아의 꺾여진 뼈를 잊지 않고 늘 운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예레미야애가 3장 3~9절(뼈의 활용성)2602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3~9절입니다. 구약성경 1146페이지입니다.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아멘.
지금 한탄하는 당사자는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육신이 겹쳐있는, 중첩되어있는 특이한 존재로서 주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고통스러워하지만, 실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 시킨 대로 하기 때문에, 본인이 본인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 선지자로서는 상당히 자유롭다고 볼 수 있어요.
본인에 의해서 본인의 인생이 꾸려지지 않고, 장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인이 본인 인생에서 손을 떼도 괜찮다는 점에서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인이 된 선지자가 운반할 것이 있어요. 무엇을 운반해야 하느냐면, 주님 십자가의 고통,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했던 혹독한 시련을 자기 몸이라는 전달체를 통해서 운반한다는 점에서, 이거는 자기 고통이 아니고 주님의 고통을 짊어지다 보니까, 자기 안에서 장차 올 예수님의 고통을 미리 앞당겨서 표출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십자가 지기 이전에 선지자이고, 성도는 십자가 이후에 나타난 선지자에 해당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본의 아니게, 본인의 의사와 반해서 주님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찾아들게 됩니다. 이렇게 찾아들게 될 때,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 고백 되게 돼 있어요. 오늘 본문의 고백에서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면, 바로 4절입니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여기 ‘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뼈라는 단어의 뜻은 우리 인간성의 본질을 통해서, 죽음 직전에서 죽음의 고통을 뼈에다가 다 담아내는 그 내부 구조라고 할 수 있어요. 내부 구조. 이거는 사람의 신체를 후벼파게 되면 마지막에 남는 게, 죽음 직전에 끝까지 최후로 남는 구조, 육신의 구조가 바로 뼈입니다.
뼈는 인간 속 가장 내부에 있고, 내부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어요. 창세기 2장 23절에 아담이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내 마음대로 뽑아낼 수가 없는 존재가 내 안에서 생성되었고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건데, 여기서는 여자잖아요.
여자인데, 창세기 3장에 보면 20절에 보면 그 여자가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자신의 미래로 바뀝니다. 미래. 아담 본인은 조기 은퇴하고, 은퇴할 때 어떻게 하느냐, 흙에서 흙으로 은퇴해도 나의 미래는 여자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여자의 뜻은, 하와라는 뜻은 생명이 된다. 내가 흙이 되어져야 할, 필수적으로 내가 흙이 되어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안에 나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 생명이 생명으로 나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잘난 척하는 나는 중도에 없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라는 이 말을 그때 아담이 몰랐어요. 나중에 보면 “내 생명 중의 생명이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없어져도 너는 영원하리라”라는 뭐 이런 거예요. 나는 없어져도 당신은 영원하리라. 그리고 그 영원성은 내 힘으로 뽑아낼 수 있다, 없다? 없다! 이미 박혀버린 하나님의 영원성은 너로서는 뽑아낼 수 없다.
그러면 이 여자가 누구냐? 이 여자는 오늘날 말하는 여자는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나온 여자, 여자의 후손에서, 남자 제끼고 남자와 상관없이 출생한 자손, 그게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돼 있습니다. 기존의 여자는 남자에 예속되어 있으니 해당 되지 않고, 그러면 결국 생명은 여자로부터 온다는 그 여자는 남자를 제끼고, 남자와 관계없이, 상관없이 여자의 몸으로 난다는 그 예수님이 곧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다”, 또는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길이다, 예수님은 진리다”라고 이렇게 되는데, 그전에 먼저 우리의 뼈가 우리가 죽음을 품고 있다는 거, 아담으로서 죽음을 품고 있다는 그게 먼저 밝혀져야 해요. 그게 나타나야 해요.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왜? 주님께서 그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주님 밟은 코스 말고 딴 코스대로 우리가 다른 코스, 인생길, 천국 길을 생각 못 합니다.
지난 수요일 날 기도 제목이 이거였습니다. 수요일에 참석하신 분은 기억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오늘 설교에서는 객관식으로 할게요. 가장 무서운 것은? 1번- 귀신, 2번- 죽음, 3번- 폭싹 속았수다(폭삭 망했음), 4번- 길. 몇 번이겠습니까? ‘4번- 길’입니다. 이걸 집에서 시험해 볼 수 있어요. 계란판 있잖아요. 빈 계란판 계란판에다가 물을 부어 보세요.
물을 부어 보게 되면, 출구가 없는 계란판은 이게 고인 물이 돼요. 학교에서 배우는 세상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그냥 고인 물이 돼요. 인간들의 노력과 수고와 그리고 지혜와 지식으로 이 지구 문제를 우리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예요. 목성을 가든, 화성을 가든, 달에 가든, AI를 만들든, 비트코인을 만들든, 뭘 하여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거.
우리는 그 안에서 그것이 다인 줄 알고,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춤 인생으로 살았고, 그걸 자녀에게 또 교육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것은 성경에 보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라고 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여기에 빠진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손자 키우는 거’ 이거 들어가야 해요. 생각하는 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런데 이게 전부 다 고인 물이에요. 갇혀 있어요.
근데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이건 뭐냐? 물을 부었는데, 이게 가는 길이 있다면, 물은 빠지게 돼 있어요. 그 빠진 물이 가는 곳이 길입니다. 근데 그 길의 특징은, 그 물의 특징은 이 땅에서 머물지를 않아요. 자꾸 빠져요. 뭘 부었는데 자꾸 빠져나간다고요. 그 출구가 바로 “나는 길이요”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나는 길이요”라는 말이 왜 무서우냐면, “너는 이 땅에서 뭐 하면서 살지?”라고 우리한테 추궁하는 말씀입니다.
책망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손자 키우고, 끝” 그럼 뭐? 그러면 뭐? 그러면 뭔데?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을 평생 동안 우리는 듣고 왔습니다. 친구를 통해서, 가족을 통해서, 일가친척을 통해서, 또 구정 설날, 추석날 하면서. 이게 너무나, 길이 있다는 게 너무나 무서운 말이라서, 이거는 찾는 사람이 적어요.
‘나는 길 따라 빠질래’라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성공할래’라는 이것만 있어요. 성공해 봤자 고인 물이에요. 빠져나간 게 없어요. 지금 뼈가 바로 인간 내부의 장식인데, 그러면 그 뼈 다음에는 죽음이 있지 않느냐? 주님께서는 이 죽음에 대해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인도하느냐? 뼈까지만 인도해요. 이게 참 무시무시한 일이에요.
뼈까지만 인도한다고요. 잠언서 14장 30절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뼈가 썩으면서 나타나는 고통, 그 고통을 맛보라고 우리로 하여금 뼈까지만 스톱(Stop)시킵니다. 에스겔 37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이제 하나님이 에스겔 인자를 데리고 어느 골짜기로 가게 돼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골짜기는 안지랭이밖에 모르는데, 대구 앞산, 안지랭이, 아들 낳는다는 그 안지랭이, 피(선지) 국밥 많이 파는 그 동네, 그 안지랭이 골짜기 밖에 모르는데, 에스겔이 어느 골짜기 가운데로 갔는데, 뼈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근데 뼈들이 사라지는 뼈가 아니고 그냥 뼈들만 있어요.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돼 있어요.
이게 누구를 데리고 왔냐 하면 에스겔을 데려갔어요. 에스겔을 에스겔이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야”라고 했잖아요. 인자라는 호칭은 나중에 단독으로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호칭할 때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자라고 주었던 그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한테 끌어당겨서, 자기가 친이 길이 되시고, 친이 진리가 되시고, 친이 생명이 되시는 유일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먼저 에스겔을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라 하는데, 여기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뼈들”이라고 이야기해요. 뼈.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붙여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뼈였습니다. 욥기 7장도 마찬가지예요. 욥기 7장 15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욥은 죽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안 돼. 너는 뼈에서 머물러야 해. 뼈에서 계속해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통이 우러나고, 또 우러나야 해”
곰탕처럼 계속해서 우러나야 해요. ‘이제는 그만, 그만, 그만!’이라고 해도, 그거는 주님 마음대로지 우리 마음대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자기 인생관이라고 하는 것은 사지가 멀쩡해도 주님이 규정한 그것, 그게 뭐냐? 뼈, 자기를 뼈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김뼈, 최뼈, 이 뼈, 권뼈, 뼈라고 생각하고 살아 있어야 합니다.
왜 뼈라고 해야 하냐. 뼈라고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 뼈를 통해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기 때문에. 뼈가 있음으로써 하나님이 특정한 죽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성도가 모델이 되어서, 뼈라는 모델로써 활용함으로써 그 진리를 나타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좋으라고 하는 일은 하나님께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선지자가 괴로운 무게를 느끼기 때문에 괴로운데, 뭔가 짓누르거든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 범죄 해서, 그 범죄의 무게 중량이 선지자 하나를 초점으로 지금 짓누르고 있습니다. 짓누르고 있으니까, 선지자 입에서 메시아적인 고통이 터져 나온 거예요. 선지자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말씀을 알고 전달할 뿐인데. 선지자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근데 장차 올 메시아가, 잘못도 없는 메시아가 자기 백성에게 있는 그 죄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당하는 고통을 앞당겨서 선지자가 그때 고난을 받는 거예요. 선지자도 알아야 해요. 자기가 받는 고통이 자기의 미래인 것을. 미래에 오실 분과 자기가 연관돼 있고 관련돼 있다는 거, 떨어질 수 없는 거, 자기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뽑아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냥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심부름꾼입니다. 이걸 이 세상에 하나의 원리로서 정착해서 문장을 만들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인의 무게가 본인을 짓누른다’ 인간의 인생사에서 제일 많은 고통과 고민, 걱정과 공포와 두려움은 자기가 자기를 짓누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겁니다.
‘나는 죄 없다’라고 하지만 같은 아담이잖아요. 같은 인간이잖아요. 사람은 뭐, ‘나는 저 사람 밉다, 좋다’라고 하지만 또 만나면 반갑다고요. 같은 인간이니까 통하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인간은 이 아담에게 물려받은 이 육신의 고통은, 흙이 돼야 할 이 운명은 우리가 밀어낼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의 중량, 자아의 무게에서 오는 그 고통을 여러분들이 겪어야 해요.
선지자도 겪었다면 우리도 겪고, 에스겔도 겪습니다. 겪으면서 그걸 겪는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 말고, ‘죽으면 숨 거두면 그만이지’라는 이거 말고, 주님, 메시아의 죽음과 영생의 나라에 가까이 가 있음을 날마다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에게 주신 환경이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님들께, 감히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환경에 맞게 처신하면 되는 겁니다. 환경에 맞게 처신함과 관련해서 적절한 예가 하나 있는데, 이거는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이 ‘페르시아어 수업’(2022년 개봉)이라는 영화예요. 그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게 추리면 이렇습니다. 독일군에게 어떤 유대인이 잡혔어요. 잡혀서 차례대로 총으로 죽입니다. 한 유대인이 보니, 자기도 곧 죽겠다 싶은 거죠.
죽는데, 그 독일 수용소 소장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나치에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에요. 전쟁이 지긋지긋하거든요. 자기도 빨리 제대해서, 전쟁 빨리 끝나고 제대해서, 국가고 뭐고 이런 거 사실은 귀찮고,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에서 자기는 이스탄불, 터키로 가서 터키에서 사업을 벌이려고 시도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겠어요? 사업을 하려면 페르시아어가 필요한 거예요. 사업이고 교역이니까. 그런데 이 유대인이 살려고 페르시아어 비슷한 말, 이런 사람 있잖아요. 일본 말 아닌데 코미디언이 일본말처럼 억양이랑 이상한 단어 막 하니까 일본 말 들리는 거 있잖아요. 그렇게 페르시아어 비슷하게 말하니까 죽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에게 공부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하루 2시간인가 하여튼 이렇게 집중 훈련을 시키는데, 이 유대인이 가짜예요. 가짜인데 머리는 좋으니까, 지가 페르시아어를 잘 모르는데, 처음에 우연히 어디서 들었던 걸 해 보니까, 이게 소장에게 먹혀 가는 거예요. 먹히니까 그때부터 자기가 페르시아어를 조작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만들어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같은 수용소에서 하는 일을 맡겼는데, 서기 일을 맡겨서, 수용소에 수용된 명단, 이름들을 다루다 보니까, 이름들인데 페르시아 어투로 바꿔서 교묘하게 조작한 것들로 2시간 집중 강의를 하는 거예요.
가르치는 사람도 가짜고, 듣는 사람도 이게 가짜고, 중요한 것은 빨리 전쟁 끝나서 둘 다 여기서 이제 헤어지기만 바라고 있다는 거죠. 제가 이 예를 드는 이유는, 환경이 바뀌면 이거는 가짜라도, 엉터리라도, 새로운 환경에 맞는 처신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나약함이고 인간의 본능이에요. 왜 예레미야를 이렇게 압박하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예레미야를 왜 압박을 하고 숨 못 쉬게 만들고 하느냐면, 예레미야는 메시아 시대가 아니에요. 신약 시대가 아닙니다. 예수님 오실 때가 아니에요. 아닌데, 환경만 압박해서, 그러니까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짊어지는 그 죄의 무게는 자기가 앞당겨서 지금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형편에서 자기가 할 것은 뭐냐? 이 무게를 감당하면서 그냥 신음 소리 내면서 외치는 것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 다시 볼까요?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쉽게 말해서 내가 앞으로 하는 일을 전부 다 좌절시키고, 전부 다 그걸 못 하게 하고, 내 뜻대로 세상에 안 돌아가게 만드는 그러한 환경에 처신하도록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럼 이러한 처신에 대해서 끝으로 한 말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51편에 8절에 보겠습니다. 그 처신에 대해서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시편 51편 4절에 먼저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분명히 이게 사람에게 범죄를 행했잖아요. 우리야 장군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했잖아요. 나쁜 일 했잖아요. 다윗은 이럽니다. “그거는 그쪽 환경이고” 그거는 그쪽에 환경이고, 지금 시편 51편에는 성신이 왔어요.
성신이 뭘 나한테 제공했는가? 새로운 환경을 앞당겨서 다윗에게 제공한 겁니다. 왜? 다윗은 선지자니까. 성신이 임한 거예요. 성신이 임했을 때, 자기가 죄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고민을 해야 마땅한데 기쁨이 주어집니다. 8절에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내 안에 모든 죄를 내 안에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예언으로, 시편 51편이라는 예언으로, 말씀으로 제공합니다.
10절에,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번제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이 고통받는 내 상한 심령이다”(17절) 이 상한 심령을 뽑아내기 위해서, 이걸 미래의 죄사함과 상한 심령과 결합시키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이렇게 죄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이게 말씀입니다. 죄를 누가 짓는다? 기존의 세계에서는 ‘내가 짓는다’가 돼요. 시대의 모든 세계에서는. 교회이고 유대교고 다 마찬가지고, 바리새인도 그렇고. 그런데 복음은 뭐냐. 죄는 누가 짓는가? 죄가 나를 통해서 죄 되게 하시는 거죠. 로마서 7장에. 내가 죄짓는 게 아니고, 내 안의 죄가 나를 사용하여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한 죄를 남은 생애를 통해서 드러내게 하시는 이 놀라운 기쁜 소식, 이거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실생활을 통해서 이걸 외치고 전파할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자동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 환경 속에서, 떠나야 할 환경 속에서, 썩은 고인 물 같은 세상 속에서, 저희들에게 이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사람에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맡겨준 그 전달품, 복음의 기쁨을 마음껏 전개하고 외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