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제거
2026년 2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33-39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3:34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3:35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라
3:38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사람이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그러면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마귀가 인간을 힘들게 한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마련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고생을 안 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식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집니다. 여기서 마귀의 뜻은,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인간으로 하여금 본인에게 집착하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가련하게 여기는 식으로 계속 자기를 지키도록 유도하게 만듭니다. 즉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 그 어떤 경우라도 나를 지켜야지. 그런데 그런 내가 고생 덜하면서 행복한 내가 방법은 무얼까? 신에게 물어볼까? 성경을 보고 찾아볼까?”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가성비를 찾고자 합니다. 여기서 본인을 빼낼 수가 없는 이유가 빠질 마음이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 되든지 신이 되든지 무조건 나를 지켜주고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대들고 불의하게 구는 것이 자기 자신인 것을 자인하는 자가 없습니다.
즉 ‘나를 지키겠다는 것’ 자체가 자기를 망치는 짓인 겁니다. 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 내부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 덜 시키는 것이 본심이라는 왜 그 본심을 지켜내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느냐고 따지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웁니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우는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우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불행성을 분명하게 대외적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결코 울면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식으로 떠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다’, ‘사는 것이 어렵다’, ‘모든 게 불만이다’, ‘버티기에 힘에 부친다’ 같은 표현들은 한결같이 ‘나의 내부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게 없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천국에 오려면 그런 자아를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내가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아를 제거하는 방법이라는 여긴 결정은 인간들 본인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하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실패입니다. 문손잡이 잡아 당긴다고 해서 문이 같이 따라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주님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격막’ 같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중보자 고유의 영역입니다. 이 지역을 인간이 통과하거나 뚫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학교 학급에 학생들이 한참 공부 중인데 갑자기 어떤 아져씨가 뛰어들면서, “지금 큰 댐이 터져 물이 이곳으로 덮치고 오니 빨리 교실문 들고 빠져 나오세요”라고 외쳤다고 칩시다.
그 말을 듣고 학생들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과연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겠습니까? 나가지 않을 겁니다. 나가더라도 일단 그 말이 진실된 말인지 확인하고 난 뒤에 과연 사실이라면 나갈 겁니다. 그리고 나가더라도 자기에게 있어 귀중한 것과 챙길만한 것을 챙기고 나갈 겁니다. 그애말로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버리고 빈 몸으로 교실에서 뛰쳐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혹은 학급의 인솔자나 학급 반장의 말을 참조해서 움직일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그 어떤 멸망 소식을 듣더라도 자기를 제거하지 않는 식으로 본심을 보이는 겁니다. 그 어떤 최후의 순간에서는 자기를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멀쩡하게 유지하면서도 구원은 구원대로 얻고자 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 시대에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즉 자기 전체를 벨 줄 모르면서 무슨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냐고 따집니다. 신체에다 율법대로 문신 새기듯이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자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제안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24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뭘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쪽에서 뭘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제거하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사기 6:6-8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여기에 이름 모르는 한 선지자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구원하시려면 이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만 전할 것이 아니라 이 선지자가 직접 선봉장에 나서서 미디안에 전쟁을 벌리면 되잖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통해서 전쟁케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기드온 자신이 이무런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이 미약하기 짝이 없는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에 무능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해서 하나님에게 대듭니다. 신약에 가까이 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성비’가 아니라 ‘복음의 가성비’를 챙기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통함입니다. 곧 하나님의 고통이 자기쪽으로 밀려오는 겁니다.
모세의 가정에 그 원류를 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출 4:24-25) 즉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참여되고 합류된 자들은 더는 자기를 위한 삶 같은 것이 방해와 장애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해내시는 십자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에 가로막고 나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1-23)
우리의 모든 불행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려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데 있습니다. ‘생각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 안에 있어 십자가만 드러내는 삶’임을 드러내면 되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말씀 완성인 십자가의 효과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예레미야애가 3장 33~39절(자아 제거)2602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33~39절입니다. 구약성경 1146페이지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아멘.
이 짧은 말씀 가운데서, 인간 같으면 쭉쭉 연결시켜서 연결할 수 없도록, 차단막이 여러 개가 이 짧은 말씀 안에 개입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로 33절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는 말을 딱 듣게 되면, ‘그러면 주님께서 내 인생 이렇게 절단나게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라는 대꾸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 주님은 우리가 고생하게 하신 것이 본심이 아닌데, 마귀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구나. 그렇다면 내 인생을 불행에서 행복으로 다시 바꾸기 위해서는 마귀를 내 속에서 내쫓아내는 일에 내가 열중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날이 추워도 기도원에 한 번 올라가?’라는 이런 거. 여기 가까운데 대구 기도원 있어요. 그런 기도원에 가서 기도 빡세게 해서, ‘마귀야 나가라.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본심은 너를 고생시키는 것이 아닌데, 너를 고생하게 하는 것이 마귀가 아니고 너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불행하게 하는 요인에, 우리가 합세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패 먹고 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인데, 오늘 말씀보다는 덜 극단적이에요.
어떤 고등학교 3학년 학급에 반장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학생들 복장 검사도 하고, 여러 가지 선생님 하시는 일을 보조하면서 좋은 학급을 만들고자 하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아저씨가 뛰어 들어와서, 복도마다 모든 학급의 문을 다 열어젖히는 거예요. 3학년 1반, 2반, 3반 그리고 4반까지 전부 다 문을 열면서, “물 들어온다! 빨리 나와!”라고 물 들어오니까 빨리 나가라는 거예요.
물이 들어와서 홍수가 넘치니까. “여기 나갈 사람 없어? 그럼 3학 년 1반은 치우고, 3학년 2반! 여기 물 들어오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하던 일 놔두고 빨리 나와! 여기도 없어? 그러면 3학년 3반 교실...” 이렇게 미친 듯이 물 들어오니까, 죽으니까 나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물 들어온다는 미친 사람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아니면 학급의 반장으로서 기존 학급을 지켜야 합니까?
인간은 당연히 학급을 지키는 쪽으로 나가게 돼 있어요. 지금 이 선지자는 하나님과 관련돼 있어서, 이 세상에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일단 그 전부 다를 개무시해버려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지 인간의 사소한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지가 어떤 고민을 하든지, 걱정하든지, 인생 설계가 어떻다고 가슴 아파하는지에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손자 키우고 손녀 키우고 하는 가운데, 지금 심판 날이 가까이 오는 거예요. 심판 날이. 그러니까 네가 지금 하는 일을 스톱하고 빨리 교실 밖으로 나와야 산다는 이 다급한 일에 대해서, 인간은 뭉그적거리는 거예요. ‘가만있어봐. 갈 때, 뭘 가지고 나가지? 일단은 그 말을 존중해서 가기는 가야 되는데, 중요한 것부터 챙겨볼까?’라고 이러는데, 내게 중요한 것은 주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나와!”라는 이게 중요한 것이지, 지금껏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성과를 했다는 우리의 고민은 고민거리 축에도 들어가지를 않아요. 그래서 그 33절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게 본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뒤에 나온 걸 보면, 지금 선지자는 굉장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기 34~36절에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 이 선지자를 비롯해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지금 굉장히 가슴앓이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어요. 지난 예레미야 3장 초반에 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6절에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이렇게 힘들고 힘들게 한다 이 말이죠.
이렇게 힘들게 할 때, 이것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지금 세상이 악하다’라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게 패착[(敗着)-바둑에서,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판에서 지게 된 나쁜 수]입니다. 생각 안 하고 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 중국집에 가도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이것 가지고 5분 동안 생각하고요.
뭘 선택해도 물 들어온 거 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세상에 주저앉고, 가라앉고, 멸망하는 거 하고, 짬뽕 먹으면서 멸망하나 짜장면 먹으면서 멸망하나, 멸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왜 그래 생각이 많아요. 생각 끝에 패착 둔다고요. 자칫하면 5억 날아갈 수가 있어요. 한 수 잘못 둬서.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고생하는 게 아니지만, 고생은 사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자기 존재의 가성비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복음의 가성비에 대해서 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인생 이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나한테 얻을 수 있는 건 뭐냐?’라고 뭘 보느냐? 항상 자기 거울에 자기 이미지를 거울삼아서, 자기만 쳐다보면서 생각에 골똘하고 골몰합니다.
난 저렇게 돼야 하는데, 지금의 형편은 왜 내가 보는 저 거울에 비친 내 아름다운 이상적 목표에 미달 되느냐, 왜 합치되지 못하는 거야? 그래 놓고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본심이 아니라 하는데, 아이고 이 사탄이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구나.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자기가 사탄이면서 지금 누구보고 물러가라고 하는 건지. 지가 문제인데요.
방법이 있어야 하겠죠. 방법은 뭐냐 하면, 나를 거세(去勢)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거세하도록 주께서 부추깁니다. 나를 제거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칼이 나오고, 그 칼은 내가 생각한 나와 주께서 생각한 나 사이를 잘라내고 끊어내는 작업을 말씀 자체에서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 나를 잘라내는 그 방식에 대해서 첫째 잘못된 방식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선 잘못된 방식부터 보 몇 군데를 보겠습니다. 잘못된 방식.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는 일은 우리를 고생하게 하는 게 아니고 천국 보내는데, 지금 내가 나와 헤어지지 않아서 문제가 되거든요.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중간에 우리를 잘라내는 거예요.
지난 금요일에 원주 특강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한이 무한을 뚫고 하나님과 합류하려고 애를 써 봐도, 뭔가 유한이 올라가다가 그 무한에 이르지 못하고 도로 유한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줬어요. 그 무한과 유한 사이에 격막이라는, 격차를 나타내는 막,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이 중보자의 공간이에요.
인간은 신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나의 애씀과 종교 생활에 대한, 신앙생활에 대한 그런 보상이 나의 존재에 가성비를 준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신에게 잘할 때, 중간에 끼어 있는 격막 구역을 고려 못 하는 거예요. 유한으로 시작해서 무한에 접촉을 시도하는 이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하나님, 저 부족합니다. 못났습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기에, 무한한 사랑이 있기에, 유한으로써 무한과 이렇게 연결될 수 있도록, 제 쪽에서 뭘 하면 됩니까?’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 생각이 패착이에요.
그 생각 백날 해봤자, 자기를 위한 생각밖에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내 인생 이렇게 망쳤다’라고 자꾸 원망하는데, 원망하는 그것을 베어 버리는 거예요. 그 원망하는 요소가, 하나님이 마련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있는데, 그 찌꺼기 되는, 베어버려지고 잘려야 될 것이, 그게 계속해서 진짜 하나님이 하는 일을 스스로 막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할례입니다.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에서 벗어나면 되잖아요. 더러운 것이 네 몸에 붙어 있는데? 그게 뭡니까? 네 고추다. 이 고추가 뭐냐? 육이에요. 지금 청양고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육, 육을 우리가 떼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도 육, 남을 좋아하는 것도 육, 미워하는 것도 육, 모든 감정은 육에서부터 계속해서 쏟아져 나와서, 이게 나한테 육으로 어떤 이익이 되고, 어떤 내가 원하는 희망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가.
육에서 나오는 육이 계속 하나님께 떼쓰면서, ‘좀, 눈 한번 질끈 감고, 한번 도와주이소!’라는 뭐 이런 식이에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라는 이런 식이에요. 이 모든 육이. 육 자체를 베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제 갈라디아서에서 베어내는 방법이 뭐냐. 그 당시에 할례였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지금까지 할례 행해서 여러분 자신의 육이 뛰어나다고 그런 이야기할 것 같으면, 나는 아예 십자가 이야기도 안 했을 겁니다”라고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말은, 스스로 육에서 육을 떼어내는 방식은 그게 바로 마귀가 더욱더 우리를 육에 옭아매는 이거는 가짜이고, 사실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이고, 마귀가 배후에서 우리 자신을 가지고 그렇게 장난치고 있었던 거예요.
평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할례가 없다 할지라도 이방인들은 양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착함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는 착해. 나는 선해. 선하다’라는 이게 우리로 하여금 육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사람들이 우는 이유가 뭐냐? 착한데, 왜 내가 기대한 착함에 대한 보상 말고 다른 게 오느냐. 나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통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러면서 콸콸 나오는 게 눈물입니다. 이게 눈물이에요. 트로트 노래자랑대회 나가서, 잘 불러서 국가대표 7등 안에 들고 싶은데, 이게 1절 잘 부르다가 2절을 하는데, 울다가 노래가 다 나오질 않네. 이름은 빈예서. 망쳤어요. 꼴등 했어요. 눈물이 콸콸. 그 초등학교 6학년 얘가 울 때, 다 같이 따라 울면서 격려한다고, ‘빈예서! 힘내라! 힘내라!’라고 하는데, 그거는 너도 육이고, 걔도 육이고, 우리도 육이고, 육은 육의 심정, 서로의 심정을 알아줘요.
어쩌면 우리는 울 일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왜? 울어야, ‘나는 이 정도로 신경 써서 인생을 살아갑니다’라는 그걸 남한테 과시할 수 있잖아요. 냉혈한 아니고, 냉정한 사람 아니고, 나는 정 많은 사람이다. 정이 뭐 구원해 줘요? “지금 물 들어온다. 빨리 나와라”라고 하는데, 그건 안 들리고, ‘나는 얼마나 정이 많을까,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까?’ 지금 이거 감상하다가 물 들어와서 지옥으로 다 간다는 이 말이죠.
문제는 굉장히 간단해요. 예레미야애가에서 선지자는요, 지독하게, 지독하게 자기 자신이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애가가 뭐냐. 눈물 흘리면서 듣고 있는 계시 아닙니까. 슬픔의 계시잖아요. 그런데 슬픔의 계시를 준 하나님이 뭐냐 하면은, “너희들이 고생하는 것이 내 본심이 아니거든”이라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럼 구슬려야지요. 하나님 쪽에서 구슬려서 잘해줘야죠. 그러면 하나님 잘~ 믿습니다. 울 일이 없게 만들어야, 울지 않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속 울게 만드는 이유는 뭐냐. 지금 우는 이유가 잘못이 너한테 있다. 네 안에 있다. 네 안에 마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나를 제거하는 방식은 뭐냐?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면 이거 보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나는 이제 구원받는 겁니까?’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이게 바로, 교회 60년, 50년 다니고 지옥 가는 이유가 그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 글자 그대로, 성경 그대로, ‘헛된 영광을,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되잖아’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2주 전 주일 낮 설교에, ‘세 종류의 기도(26.01.25)’라는 그 동영상이 유튜브에 떴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아놨어요. 댓글을 달아놨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그 본문에 어디를 봐서 기도하는 것과 시험 드는 것과의 관련성이, 그 본문에 어디서 나오느냐는 이런 식으로 막 따지면서, 네 마음대로 중언부언하고 헛소리한다는 이런 식으로 댓글을 달아 놨어요.
그래서 내가 답변을 안 하려고 하다가 답변했어요. “인간의 기도뿐만 아니고 인간의 행함 가운데서, 마귀의 시험과 무관한 그런 행함이 있습니까?”(시험과 상관없는 기도? 시험과 무관한, 시험에서 초연한 인간의 행위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기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답변했어요. 그 사람이 왜 이렇게 반발하느냐 하면은 성경에 “기도하라”라고 하면 기도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딴소리하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성경대로 왜 설교를 안 하느냐. 요새 수능 국어 문제도 그렇게 안 나와요. 수능 국어 문제도요, 현대에 일반인이 풀면, 거의 빵점에 가까워요. 왜냐 하면, 그 글자 말고 글자 뒤에 있는 문맥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해요. 작가의 문맥까지. 성경 나온 대로 하게 되면 이건 성령이 왜 필요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왜 필요해요? 십자가 이야기는 십자가 이야기 나올 때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그러면 거기에서 시키는 대로, “기도하라”라고 하면 기도하면 되는 겁니까?
내부적으로 연결할 줄을 모른다는 말은,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는가. 정신이 바로 자기의 존재에, 살아왔던 자기 인생의 가성비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 유한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됩니까? 탈락이에요. 안 됩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하죠. 그게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자랑하노니” 구원받은 나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그건 탈락이고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흔적은 십자가에서 나온 삐져나온 흔적이 지금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 내 몸을 건드리지 마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이게 갈라디아서 5장 넘어서 6장 14절, 15절, 17절의 이야기예요.
이제 조금 어려운 거 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 어떤 게 어려운가 하면은, 선지자가 그냥 말씀만 전하면 선지자지,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고통당하고, 이렇게 힘들게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 그게 좀 어려워요. 남은 시간 동안에 어렵지만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사기 6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그리고 그 후에 너희가 이방 신을 섬겼고 뭐 이런 식으로 다른 신을 섬겨서 이런 벌을 받는다고 했어요.
어떤 벌을 받느냐 하면 미디안, 이 인간들이 약아빠져서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꼭 추수할 때만 오면,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들, 동방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이 추수할 때만 기다렸다가 와서 그걸 다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는 도둑놈이 온 게 아니고, 고추 말리려고 널어놨을 때, 그때 오고, 아니면 수박이 다 익었을 때 와서 다 가져가는 거예요.
제주도 귤 딸 때, 딱 그때 와서 가져가는 거, 아주 얍삽하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힘들어서 몰래는 못 하고 동굴 속에 살아요. 굴속. 이게 구멍과 굴속에 산성을 만들어서 따로 살아요. 그러니까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움츠리면서 사는지 그 모습을 보여준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렇다고 할 게 아니고, 선지자 본인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되잖아요.
이게 시발점입니다. 이름도 없는 선지자 보내서 통보만 하지 말고, 통보한 선지자가 그 당시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구원을 선지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누가 하느냐? 기드온이 해요. 기드온은 미약한 사람입니다. 본인도 스스로 이야기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한 거예요. 그
런데 예레미야가 오게 되면, 예레미야는 이제 말씀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만큼 메시아와 시기적으로 가까워졌으니까,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당할 때 저주받고 심판받는 그 심판을, 예레미야는 그대로 백성들의 죄와 더불어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 직이 메시아에 의해서, 선지자나 제사장이라 구원자가 아니고, 구원자는 왕이 있다고 구원자가 아니고, 그 세 가지가 다 완성될 때,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선지자, 제사장, 왕은 자기 힘으로 구원할 수 있는,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은 그쪽에서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출애굽기 4장 26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에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남편 이름은 모세, 아내 이름은 십보라예요. 그런데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남편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죽이려고 하니까 십보라가 모세가 죽어가는 모습과는 전혀 결이 안 맞는, 엉뚱한 행위를 해요.
사람이 죽어가면, ‘여보 숨을 쉬어’라고 하든지, 뭐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시는 그게 아니고 할례를 하지 않은 아들의 육적으로 제거돼야 할 고추 끝을 할례 하니까, 죽어가는 남편이 ‘허!’하고 숨을 쉬더란 말이죠.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예요. 십보라가 연관성을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면, 이제부터는 십보라의 남편은 모세가 아니고 십보라의 남편은 피 남편이에요.
“잘 주무셨어요? 피 남편. 당신은 피 남편입니다” 피는 할례를 의미하고 당신은 언약에 속한 남자입니다. 나는 당신을 피 남편으로 부르면서 나도 같이 언약에 속했고,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가정의 행복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고백을 십보라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자기가 지은 죄도 아닌데, 자기는 신앙이 좋은데, 이처럼 고생을 많이 합니다.
끝으로 한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그 중보자의 격막은 인간이 뛰어들 수 없어요. 그러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모든 말씀을 친히 이루신 분이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아까 댓글 이야기한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면 되고, 그러면 복 준다는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문이 있는데 문이 있어서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겼어요.
분명히 문고리를 잡아당겨서 문고리는 내 손에 있습니다. 있는데 문이 안 열려요. 왜냐? 격막! 문고리와 인간이 잡아당길 수 있는 문고리와 문은 격막을 통해서 끊어져 있어요.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바로 주님께서 일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 중간, 격막의 공간은 주님 혼자 들어가서 혼자 해결할 문제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고난받아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우리가 있는데 그런 고난을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23절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말은 뭐냐? 주님이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주님이여, 우리가 주를 위해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주의 말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우리는 지금 자꾸 문고리만 잡으면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 지키면, 말씀 열고 천국이 환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천국 문과 끊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 하세요. 그럴 때 우리는 ‘내 인생의 보상은 애초부터 기대하는 자체가, 이게 사탄 짓이구나’
주께서 주시는 것은 복음의 가성비, 십자가의 가치이고 가격이지, 내가 노력한 내 인생의 가치는 그 앞에서 어림도 없습니다. 봐주지 않는 거, 그냥 문 열고 나오라고 하면, 다 버리고 주의 십자가 따라 나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이 말씀을 통해서 고생 고생했다고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불쌍하게 보지만, 진짜 고생 같은 고생은 주님밖에 없음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