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시온
2026년 1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2:7-9
2: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주께서는 당신의 제단이 보기 싫어 성소를 버리셨구나. 높다란 성벽을 원수의 손에 내맡기셔서 허물게 하시니 원수들이 야훼의 집에서 축제 때처럼 환성을 올리는구나
The Lord has rejected his altar and abandoned his sanctuary. He has given the walls of her palaces into the hands of the enemy; they have raised a shout in the house of the LORD as on the day of an appointed festival.
2:8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2: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사람에게 있어 살아온 모든 것이 귀하고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데 있어 지난 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그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나의 과거를 여태껏 간직하는 데 있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세상 살 맛이 계속 우려나올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성전이 사정없이 무너지게 되면 이런 낭만도 같이 없어집니다. 살 맛이 싹 사라질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애초부터 이런 성전과 제사 제도와 기타 필요한 기구들과 절기 같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되고 제공된 겁니다. 이제 그것들이 주님 하나님에 의해서 철거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부터 자신들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자신들의 기획한 일도 아닙니다. 유랑극단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설 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하다가 다른 곳에 또 공연할 때는 기존의 무대 세트는 마땅히 철저하게 마련입니다. 비록 현 주민들과 정들었지만 무대 철거와 더불어 극단 사람들도 현주민들과 미련없이 헤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누구와 떠나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현 마음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 무대 세트를 뜯어내는 단장 입장에서는 참으로 냉정하고 단호합니다. 그러고 엄격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말씀대로 사는지 검토했지만 역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음이 분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이질성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조성을 성취하는데 있어 원칙 수립에 기여하게 됩니다. 원칙의 본질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면서 광야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접어들어 약 두 달쯤 지나 시내산에 당도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만을 불러내었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모세의 부재시의 상황’과 ‘모세와 함께 있을 때의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모세와 함께 있을 때는 그들도 모세와 같은 신앙인인 줄 알았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높이고 귀하게 여길 때, 그들도 모세 생각에 동의해서 뭐든지 율법에 부합되는 식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40일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있어 없는 존재요 죽은 존재입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구심점을 갖추어야 될 시점인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의 유지를 받들어 모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 쪽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모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모아 만든 것이 금송아지 형상이었습니다. 모세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금송아지 제작 기획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중간쯤 제작할 때도 아닙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다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모세는 하늘애서 내려왔습니다. 이로서 모세가 없을 때, 이스라엘 전체의 생각은 하나로 모아졌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만들어진 황금상을 깨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황금소상을 만드는데 주도했던 자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물건 깨는 것과 다른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물건이야 깨면 되고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물론 금전적인 손실이 생겼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또 벌면 될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게 되면 과연 다시 전에처럼 살려낼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7-29) 과연 금송아지 말고 섬겼다고 해서 평소에 우애 있게 지내는 이웃을 무참하게 죽일 수가 있을까요? 엄두가 나지 않을 일입니다.
(출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For Moses had said, Consecrate yourselves to day to the LORD, even every man upon his son, and upon his brother; that he may bestow upon you a blessing this day.
그런데 레위지파는 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해내었고 그래서 3000명 가량 죽였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모세는 레위지파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했습니다. ‘헌신’이란 자신이 누구를 신나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율법 위반될 경우에 가차없이 죽임을 당할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 또한 불가능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본심이 모세가 40일간 현장에서 사라졌을 때, 다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자신들의 정성을 모은다면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정작 그들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밝혀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입니다. 이 또한 불가능함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에 관심이 없이 사물에 마음을 둔 결과입니다.
말씀은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고 인간들은 자신의 애씀과 추억을 의미로 간직한 사물에 마음을 둡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처녀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예루살렘은 정결성으로 꽉 채운 예루살렘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조치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평소에 제사드리고 신봉했던 성전은 사건 위주가 아니라 자신들이 행함이 추억으로 남게 되는 사물을 전제로 한 건물이었습니다. 이제 그 건물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처녀 예루살렘은 어떻게 달성될까요? 이사야 7:14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처녀와 하나님께서 친히 혼인을 하시고자 합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처녀의 정결함은 바탕이 된 신랑의 정결함에 바탕을 두었다는 자기 표현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정결하게 혼인한 그 모형을 제대로 완성하신 결과가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계 2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온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온전하게 우리 안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예레미야애가 2장 7~9절(처녀시온)260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2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114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아멘.
마지막, 주님께서 설정해 놓은 그 마지막 모습은 주님께서 설정한 그 율법의 계시가 이제는 볼일 다 보시고 철거하는 순간이 마지막 순간입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율법이, 말씀이, 예언이 쑥 들어오고, ‘예언이 있네, 말씀이 있네,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네’라고 하는데 그 들어왔던 하나님의 율법이 철거하는 거예요. 철거하면서 비로소, 그동안 말씀을 주셔서 인간의 부실함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을 주께서 온전히 성사하신 겁니다. 다하신 거예요.
그동안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성전을 만드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여기서 착각들을 하신 거예요. ‘야, 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지키면 구원이 된다’라고 여긴 겁니다. 구원에 대한 기대감, 희망 같은 것을, 그들의 근거가 뭐냐, 율법이 있으매, 말씀이 있으매, 그대로 적혀있는 것을 기대하면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애가 2장에 와서 주님께서 설치한 그것을 철거하신 거예요.
이걸 4자로 이야기하면, ‘무대세트’이고, 마지막은 무대세트가 이제 철거하는 겁니다. 이사 가는 거예요. 부모님이 뜻이 있어서 이사 가는데, 철없는 어린아이가, 엄마, 그동안 내가 사귄 친구도 많고, 학교에 정도 많이 들었고,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과 여기 집안에 있었던 나의 낙서, 내 기억 속에 있던 이런 것들. 갑자기 포크레인이 와서 다 파쇄시키죠.
그러면 어린 아이 입장에서는 그냥 벽체 하나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의 벽체가 무너지는 거예요. 자기의 아름다웠던 정과 추억들이 거기 있는 거예요. ‘엄마, 왜 이래. 아빠, 이사 가지마’ 뒷집 순이랑 돌이랑 잘 지내다가 이제는 헤어지는 거, 또 전학 가야 하는 거, 그런 것이 아쉬울 때, 그때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너는 모형이야’라는 이런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내가 왜 모형이야. 나는 내 위주로 이게 진짜인데, 이게 왜 가짜이고 모형, 마네킹이고, 언젠가는 무너져야 하는 마네킹, 없어져야 할, 소멸해야 할 마네킹이 되는가’라는 식으로 잘 이해가 되질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을 설치했다는 것은 모든 말씀의 성취가 오로지 주님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인간들은 거기에 끼어들 자리가 못 됩니다. 하나님께서 테스트를 해본 거예요. 율법을 지키냐, 안 지키냐를 테스트를 해보니까, 다 탈락하는 거예요. 율법에 의하면, 전부 다 망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두고두고 신기한 것이 뭐냐 하면, 다 망해야 하는데, 아직도 그 망한다는 성경 말씀을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믿는 자가 아직도 있다는 그게, 너무 신기해요.
그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이야기를 우리가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모세가 살다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모세가 있는데 갑자기 시내산 산 위로 등정할 때, 모세는 40일간 없어졌어요. 사라졌습니다. 납치된 건지, 아니면 스스로 가출한 건지, 사람 자체가 죽었는지 어떤지 소식도 없고, 살았다는 소식도 역시 없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왜 갑자기 치워버렸는가.
모세를 치우고 났을 때, 모세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를 하나님께서 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세가 있을 때는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모세가 사라지고 나니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황소 우상을 만들고 그런 짓을 했습니다.
우상을 반쯤 만들었을 때 내려온 것도 아니고, 우상 막 시작하려고 설계도면 만들 때 온 것도 아니고, 그들에 의해 우상이 온전하게 다 만들어졌을 때, 그리고 이제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모세는 잊어라. 모세는 아무 소식도 없이 산에 가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 어느 누구도 40일 동안 밥도 물도 없이 살아온 경우는 없으니까, 정확한 합리적 결론은 모세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세 찾지 말고, 우리끼리 여호와 섬기며 살자’
우리끼리 여호와 섬기며 살자고 했을 때, 그때 여호와와 백성 사이에 어떤 식으로 그들은 여호와에게 다가가려고 했는가. 자기의 숨어있는 본심이 유감없이 나왔습니다. 그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였다’라는 본색을 드러냈어요. 그다음에 하나님이라는 것이 모호하니까, 형상화되지 않았으니까, 각자의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지정된 장소에다가 지정된 형상을 따로 만들어 놓고, 여호와를 생각할 때마다 그 형상을 경유해서 여호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회상하는 식으로 여호와를 잊지 말자.
여호와의 기념물을 우리 쪽에서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 취지에 대해서 진지하고 좋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는 이게 인간의 속에 담겨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품성을, 이미 모세 때부터도, 모세가 부재할 때, 없을 때, 백성들의 마음은 공통적 보편적이라고 하잖아요. 똑같은 생각에 대해서 거기에 ‘아니오’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니오’라고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땅에 내가 존재한다고 했을 때는 ‘아니오’라는 것은 없어요. 그런데 이 땅에 없고, 다른 세계에 갔다가 온 사람한테는 이거는 100% ‘아니오’예요. 엉터리예요. 엉터리.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전이 있었고, 절기가 있었고, 여러 가지의 성전의 기구가 있었고, 제사하는 방식부터 제사장도 그렇고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전부 다 재건축 들어가시듯 다 철거시켰어요.
철거시켰단 말이죠. 그럴 권리는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에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에 율법을 주고, 하나님이 허락하에 성전을 줬는데, 그걸 전부 몽땅 다 철거시켜 버렸단 말이죠. 철거시켰을 때, 그들은 뭐냐 하면은,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고 하는 것처럼, 이건 뭐 차(車)도 없고, 포(包)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신앙이 가능해? 이게 가능하냐는 말이야.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도저히 불신,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로마서 4장을 제가 읽고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일단 4장 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이건 인간의 상식이죠. 인간 세계의 상식입니다. 이건 누구나 보편적으로 동의해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 (But to him that worketh not, but believeth on him that justifieth the ungodly, his faith is counted for righteousness. )를 의롭다 하시는 이”라는 이것을 과연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본성상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성상 구원될 자는 없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 일을 모세를 통해서 하신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모집하고 만들어내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하나님의 일할 취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더불어서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모세와 함께 있으니까 ‘백성 맞다’라고 여겼는데, 모세가 잠시 출타 중에, 그것도 40일 동안 출타 중에, 그들은 모세가 부재하고 죽었다고 여기고, 이제는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에 자신의 본심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딱 하나로 집중되었습니다.
‘금으로 송아지 만들고 여호와라고 하자. 끝!’ 이거였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다 금가락지 빼서 넣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들 가운데서 ‘혹시 여기서 아니라 하는 사람은 손 드세요’라는 뭐 이런 거. 통과되었습니다. 끝난 거예요. 이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미처 모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인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로마서 4장에 나오면 일한 것도 없이 천국 간다는 이런 자에 대해서, 우리 힘으로 믿을 능력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세워놓고, 교인은 단 한 명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단 한 명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자, 모세가 어떻게 했겠는가? 모세는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했어요. 전반전에는 이렇게 했습니다. “일단은 깨자! 송아지 우상 깨자!”라는 이게 첫 번째이고요. 두 번째는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서 깰 때 같이 깨고, 그다음에 “그때 주동자들을 너희들이 칼 들고 죽여라”라는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불가능하죠.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만들어진 그 우상은 깰 수 있어요. 뭐 돈이 좀 들었지만, 돈은 벌어서 또 또 생활하면 되니까.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이거는, 사람 한 번 죽으면 다시 그 사람은 못 살려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물건이야 깨면 깨지만, 사람은 깨면 못 살아납니다.
출애굽기 32장 27~28절에,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현재 이란은 사람이 얼마 죽었어요? 지금 한 6만 명 죽었습니까? 하여튼 몇 명 죽었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3천 명을 죽였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물건을 깨뜨리면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은 죽이면, 다시는 그리웠던 사람, 정들었던 사람, 그 사람과 너무 친하게 지냈는데, 단지 우상 섬기는데 주동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고, 그 친한 친구의 목을 따고 칼로 죽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이 또한 불가능해요.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이 불가능한 일을 레위 지파가 선두에서 행하니까, 모세가 레위지파에게 하는 말이 이겁니다.
‘네가 너를 돌보지 않았구나’ 그걸 헌신이라고 합니다. 성경 하나하나가 어려워요. 자꾸 가능성을 설교하면, 성경 하나도 이해 안 됩니다. 다 엉터리입니다. 불가능성, 불가능성, 불가능성을 계속 집어넣으세요. 집어넣으면,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어,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는 이게 계속되는 거예요.
“일한 것도 없는데 경건하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천국을 가?”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어! 기쁘고 좋은 건 나중 문제고요. 일단 있을 수 없으면, 그 문턱을, 그 구원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거든요. 여기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여러분은 정리가 다 된 겁니다. ‘사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냐, 아니면 사건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냐’라는 이걸로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지금 저 사람 죽으면,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저 사람은 없다’라는 이거는 사람을 사물로 보는 거예요. ‘지금 무슨 일이 있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지?’라는 이거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희한하고 불가능한 일이, ‘지금 현실 그 자체 아니야’라는 게 덮쳤단 말이죠. 윤석열 대통령 재판할 때, 검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형이라고 했어요.
사형. 윤석열 대통령 사형이라고 했어요. 그럴 때 윤 전 대통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게 뭐냐. 더는 자기 시대에 윤 대통령을 이제는 못 보는 거예요. 죽었으니까, 사형당했으니까. 그 검사가 이렇게 선고해야 해요. 윤 대통령에게 선고가 아니고 구형을 이렇게 해야 해요. 사형!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제가 검사라면 이렇게 합니다. ‘저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저도 사형당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해야 해요.
저 사형당하겠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 있는 자가 죄 있는 자를 쳤으니, 나도 그 죄로 인해, 윤 대통령 사형당하는데 내가 사형당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인간이고, 너에게 무가치하다고 구형한 나는 아직도 살아야 할 가치 있는 인간이야. 이렇게 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모세가 가지고 온 율법의 취지에 위반됩니다.
나쁜 일을 했기에 지옥 간다? 그러면 천국은? 천국은 누가 가느냐? 착한 사람은 천국 간다!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착한 사람은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지옥 가야 돼요. 이게 인간의 머리로써는 나올 수 없는 불가능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은 하나의 배역으로 삼으세요. 인형, 마네킹들입니다. 마네킹과 마네킹을 통해서 누굴 살릴지, 누굴 안 살릴지는 어디까지나 주님 자기 마음대로지, ‘인간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다’라는 건 안 돼요.
주께서 결정을 내릴 때는, 이미 남을 죽일 때 그 사람도 ‘내가 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 법 조항, 율법 조항에 저도 몸담겠습니다. 저 사람을 죽여야 해서 죽였는데, 만약 그 조항이 나한테 저촉된다면 나도 기꺼이 죽겠습니다’라는 그런 자만 헌신이라는 말을 하면서 모세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그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다 멸종시킨다는 거예요.
거기 있는 인간들, 지금 살아남은 인간도 우상 섬기는데, ‘아니오’라고 하지 않고, ‘예’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차츰차츰 다 광야에서 죽일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나설 때, 그때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제가 시내산에 가서 책을 봤는데 생명책 봤습니다. 그 명단을 봤는데, 모세 명단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 명단을 담보로 맡기고, 이제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제 말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책에 넣어줄 수 있도록, 제 이름을 걸고 혜택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콜?”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나머지 인간들은, 3천 명 이미 죽은 인간이나, 그걸 죽였던 인간이나, 살아 있는 인간이나, 그건 아예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안 돼요. 모세가 계약됩니다. 그걸 ‘모세의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전화 통화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책을 보니까 자기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게 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성전 멸망하고 난 뒤에 바벨론에 간 사람들이 남은 자고, 그 남은 자들은 다시 약속의 땅에 와서 구원받는 남은 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목사님 책에 보니까 이 세상에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제가 그런 이야기한 근거를 찾아드렸죠. 남은 자는 완악해졌다는 로마서 11장 7절,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남은 자도 뭔가 호되게 당하면 정신 바짝 차리고 저들도 뭔가 할 거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남은 자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을 살해하기 위한 남은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끝으로, 여기서 오늘 본문에 말씀이 “처녀 시온”인데 이 처녀성을 계속 유지하는 식으로 진짜 천국 백성을 만들거든요.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을 제가 뒤엎겠습니다. 보통 상식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인간 상식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통해서 본인이 태어난 거예요.
다시 할게요. 자식이 부모를 통해서, 다른 표현으로는 ‘자식이 부모를 이용해서’ 본인이 최종 전결(專決)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부모를 위해 태어나도,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로 굳히기 되어가는 겁니다. ‘부모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지만, 나는 결코 부모 소유가 아닙니다’라는 것이 모든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어요. 이걸 감춘다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뭐 전화도 해봤지만, 그거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속고 속이는 거고요.
실제로는 부모라 할지라도 날 건드릴 수 없는 독자적이고 고유적인 가치가 있는 그런 이상한 괴물로 태어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을 때, 예수님은 그 처녀의 자식이 아니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그 처녀가 이용당한 겁니다. 마리아가 이용당한 거예요. 따라서 ‘처녀’라는 말, 이거는 모형이고 이스라엘은 모형이에요.
처녀 예루살렘은 모형이었고, 진짜 처녀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태어나는 자, 이사야 7장 14절 말씀대로 태어나는 그 처녀, 그 처녀와 태어나게 한 주님이 혼인합니다. 그게 바로 이사야 62장 5절에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게 요한계시록 21장에 준비된 혼인 잔치가 그겁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흠도 티도 없이,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기 때문에, 이제 너는 무조건 나랑 같이 살자” 그래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남자가 있고, 남자에 의해서 여자가 만들어진, 그래서 한 부부가 된 그 말씀을, 그 모형을, 이제는 실제로 천국에서 영원히 현실로 내가(주님이) 바꾸어 놓을 테니까, 너는 나의 처녀다.
이것은 마지막이라는 그 턱을, 인간이 뭘 해서 구원받는다는 이 모든 것이, 이 땅을 왔다가 부재하신 주님의 일방적인 말씀 예언에 해당한다는 거, 주님을 겨냥한 예언에 의해서 지금 자신에게 이 말씀이 안으로 들어온 말씀, 안에 들어온 실재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을 그런 사람에게만 이것이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이해하지 마시고, 이 안에 들어온 말씀이 지금도 우리를 어떤 소소한 일조차도, 모든 것을 만들어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데, 인간은 자신이 일해서 자기가 미래가 결정된다고 우기는 거, 이 자체가 얼마나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는지를 이제는 그 깨달은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