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6. 2. 15. 16:33

숨어 계시는 하나님

2026년 2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40-43

3:40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3:41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3:42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3:43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절망, 그것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로부터 철수하는 절망, 그것도 진노하심을 자신을 커버하시면서 물러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바는,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기서 ‘스스로 행위를 조사한다’는 것은 자기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전면 재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남기신 율법을 철회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되지만 진노하심을 거두워질 수는 없다는 겁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여기서 ‘구원자’라는 단어와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의 조치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백성들과 터놓고 구원 할래 안 할래를 논의할 시점은 지나갔다는 겁니다. 새로운 구원방식은 백성들에게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을 성사시키시는 방식입니다. 왜 백성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식을 고수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이 알았던 하나님 개념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상상되었던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고, 자신이 살아 있는 식으로 하나님도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과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그런 믿음을 가질 자일까요?

아닙니다. 로마서 4:17-18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보통 인간들에 있어 ‘믿는다’는 것은 일단 관찰의 대상으로 손에 쥐고 확인한 다음 믿어야 될지 아니될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이미 분명히 ‘살아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자신이 제대로 살아 있는지 혹은 정당하고 제대로 바르게 살아 있는지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대상을 관찰합니다.

대상을 확인하는 경로를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스스로 찬미하고 흐뭇해하고 싶어하고 인정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이 기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겨난 믿음입니다.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의 기대 안에 들어있지 않는 내용을 믿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믿음은 믿어야 될 대상이나 사태의 일부로서 삽입된 믿음입니다. 사태 자체로서 벌어진 상황이 그가 믿는 자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이삭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신약의 제자들도 이런 믿음의 질을 공유해야만 합니다. 은근히 기대한다든지 노리는 바를 갖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깊은 절망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절망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알아봅시다.

레위기 24:16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훼방하지 않는 심정으로 부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따로 떼내어 그것을 인물화시켰습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언제가 지상에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그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망령됨에서 이탈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들 입장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은 듯하면서 실은 본인의 가치와 의미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셨을 때에 인간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실패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결과적으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떡이 남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십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자기네들 배불리는 기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바는 사람들이 배불리는 떡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12광주리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먹고 난 뒤, 비워있는 것을 또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니라 인간들이 포기했을 때, 새롭게 나타나도록 이해되어야 할 떡입니다. 5병2어의 떡을 먹었던 자들이 예수님을 간절을 열망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요한복음 14:8-9에 보면,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는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어져야’ 합니다. 창세기 8:11에 보면, 노아가 멀리 보냈던 비둘기 입에서 새 땅에서 자라난 감람나무 잎사귀가 물려져 방주로 나타났습니다. 노아는 비록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벌써 하나님께서 새 땅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화목할 관계를 미리 준비해주셨음을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랄 수 없는 신세계를 미리 마련해주신 겁니다. 이런 환경을 통해서 굳이 자신들이 이 땅에 살 생각을 하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절을 스스로 받아주시고 그 처리된 것을 도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주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예레미야애가 3장 40~43절(숨어 계신 하나님)2602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40~43절입니다. 구약성경 1146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온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는 고백을 예레미야가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는 안 찾았는데, 함께 있을 때 찾지 않던 하나님을, 이제는 하나님이 떠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이러한 말씀은,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은 진정한 성도의 삶이 아니고, 백성의 삶이 아니라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43절에 중요합니다.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앞에 말씀인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떠났다, 또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웠다는 말입니다.

근데 가려울 때, 그냥 잠시 “나는 어디 볼일 보고 올게”가 아니라, 가리우면서 뭐를 남기느냐 하면 “진노로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압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그렇게 현 상황을, 성전이 불타고 쫓겨나는 현 상황을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을 함으로써 예레미야의 이 계시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우리가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이게 인간에게, 우리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하도록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창세기 8장 11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아 홍수 이야기에는 1년 동안 심판받고 1년 후에 노아가 나오게 되는데, 1년 거의 가까이 되어갈 때, 8장 11절에 보면, 이제 비는 안 와요. 비는 안 오는데, 그 물이 줄어드는지 안 드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비둘기를 보냈더니만, 8장 11절에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라는 이 대목이 나와요.

이 대목에서 노아도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희망이 있다. 물이 이제 점점점 빠지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방주 생활을 청산하고 땅에서 살 수 있겠다’라고 이렇게 감격스럽겠지만, 이것이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그 감격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왜냐 하면은 “감람 잎사귀, 새 잎사귀가 있다” 이 새 잎사귀는 노아가 알았던 자기 시대에 그 잎사귀가 아니고, 이건 물에 잠겼는데, 물에 잠긴 것이 물이 빠지면서 잎사귀가 나왔으니까,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솜씨죠.

하나님이 미리 노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대기했던, 노아는 아직 도착 안 해서 모르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마련하신 그 새 땅에서 나오는 잎사귀예요.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그 세례 받으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비둘기같이 왔을 때, 창세기 8장에서는 비둘기가 그냥 맨몸으로 온 게 아니에요. 입에 뭐를 물었느냐 하면은 잎사귀, 잎사귀도 옛날 잎사귀가 아니고 새 잎사귀를 물고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새 시대를 잡아당겼다, 몰고 왔다, 선도했다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새 시대가 성령을 통해서 왔다면, 우리는 옛 시대가 불로 망한 것에 대해서는 박수치고, 환호해야할 입장에 있어요.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가 흔히 듣고 들었던 그 시대는 이제 물러갈 때가 되었다, 없어도 무방하다, 나는 이 시대에 그만 살래’라는 그런 마음으로 기뻐해야 돼요.

그걸 이사야에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이사야 40:2), 이제는 수갑이 다 풀려 없고, 이제 세상이 주는 수갑은 손에서 풀어지고, 복역, 이 세상 산다고 고생 고생했는데, 이 지긋지긋한 생활은 이제는 그만두고, 이제는 죄 없는 몸으로 비둘기가 잎사귀 물고 찾아온 것처럼, 저쪽에서 이쪽으로 찾아왔거든요. 저쪽에서 이쪽. 비둘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방주에 있는 자에게 저쪽 소식을 알려줬잖아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할이잖아요. 성령 받았다, 뜨겁다, 신난다, 열난다, 땀 난다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사할 곳이 주께서는 “마련되었다. 마련되었어”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새집이 마련되었다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됐다고 우리에게, 하나님 본인의 기쁨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는 거예요. 하늘의 기쁨이 땅의 기쁨, 땅의 평화로 바뀌는, 그래서 그 기쁜 소식이 우리한테 기쁜 소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언제 들리느냐. 우리가 아주 절망적일 때야 그 기쁜 소식이 소식답게 들립니다. 절망적이어야 돼요. 오늘 본문의 내용도 상당히 절망적인데, 예레미야애가, 슬픈 노래에 포함되는데, 절망적이죠. 우리가 어디서 행위가 잘못됐는지 우리를 한번 살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이곳을 철수했는지, 철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그렇게 돌아가는데, 문제는 그냥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막을 쳐서, 가리워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뭐 달리 재촉할 것은 없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의 행위를 조사 해보자.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지.

조사를 한다는 게, 우리가 잘못된 걸 반성한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이 율법을 가지고 다시 우리를 한번 엑스레이 찍듯이 한번 찍어보자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찍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한번 찍어봅시다. 찍어보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레위기 24장 16절을 한번 찍어보겠습니다. ‘쏘세요’ 하면 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니까요.

레위기 24장 16절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이 안에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특히 손녀 손자까지 포함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반드시 죽여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게 하나님의 정의죠.

그것도 그냥 죽이지 말고, ‘하나님이 번개 쳐서 죽이고, 우리는 그냥 애통하면 되겠지’ 하지 말고, 네 손으로 돌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를 죽이라고 이렇게 했어요. 레위기 24장 16절에. 그 이유가 뭐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이거는 십계명 제3계명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신명기6:11)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찾아서 돌로 쳐 죽여야 하겠다. 근데 문제는 여호와 이름이 망령됐다는 상황에 대해서 누가 나서서 이것이 망령되었다고 할 자가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거든요.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는 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말합니다. 주의 이름, ‘인간이 있고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이거는 구약 때 인간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데, 주의해서 망령되이 안 부르는 쪽으로 부르자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대답 없어요. 진노로서 가려서 없습니다. 그럼 뭐냐? 이름 부위를 따로 떼 내서, 이름이 인격화되는, 인물이 되는 그러한 경우를 하나님께서 조성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이름만 떼서 인격이 되는,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 이름.

그렇게 나타난 이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벌였어요. 그 내용이 요한복음 5장 23절에,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라고 돼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말입니다. 인간들 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 하면, 이사야 45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에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스스로 숨은, 스스로 주춤주춤 물러가는, 스스로 숨은 자예요. 사람들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어디 있지요? 하나님, 어디 있어요? 숨바꼭질합시다’

아무리 해도 못 찾아요. 찾을 수가 없어요. 스스로 숨은 자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숨은 자라고 하지만 이걸 단출하게 말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가 돼요. 단 한 사람도 없다가 됩니다. 스스로 숨어버렸으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숨었는데, ‘하나님 여기 있지요, 저기 있지요’라고 찾는 것은 전부 엉터리 하나님을 엉터리 방식으로 찾고,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다시 5장에 돌아와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자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를 보내신 자.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뜻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것을 아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해하면 인간치고 하나님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이 이 언약에 어떤 식으로 가담되게 되었는가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여기 앞에 17절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거는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이에요. 그리고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으니. 이게 인간으로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믿는 것은 일단 붙잡고, 바라보고, 관찰하고 믿는 거예요.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데 믿는다는 것은 이게 말이 안 돼요. 인간은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바라기 때문에, 자기 바라는 것을 그냥 믿는 것으로 한번 시도해 보는 거예요. 한번 그냥 시도해 보는 거예요. 바를 수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거는 인간 쪽에서 접근해서 생긴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아브라함을 밀어붙인 거예요. 뭘 믿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를 뺐느냐 하면은 바로 믿음이라는 거, 아브라함의 믿음을 빼버린 거예요.

믿음을 빼고 거기다가 예수님의 믿음을 집어넣는 결과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은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 일은 아들만 믿기 때문에, 인간이 믿었다는 것은 빼버리고 그 현장에다가 아들, 보내신 예수님의 믿음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한 경우가 바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시험하는데, 5천 명이 모였어요.

식사 때가 됐는데 전부 다 식사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빌립을 시험했습니다. 빵집에 가서 빵 사려고 하면, 이 5천 명을 위해 도대체 어떻게 빵을 구입할지를 네가 한번 생각해 봐라. 빌립이 이렇게 대답하죠. 우리가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다 먹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먼저 5절에서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물으신 거예요.

그 뒤에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인간의 생각을 경유해서 주님 생각에 도달되게 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생각을 먼저 경유해서. 예레미야애가 오늘 본문도 지금 예레미야라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절망적이죠. 노아로 하여금 노아가 방주에서 절망의 끝을 보게 합니다. 물에서는 구원받았는데, 방주에서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절망적입니다.

비둘기를 보내 봤는데, 비둘기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물고 왔어요.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습니까? 앞길에 대한 절망은 곧 자기에 대한 절망이에요. 내가 과연 할 수 있느냐? 내가 할 수 없구나. ‘내가 할 수 없구나’도 절망이 아니에요.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하면, ‘사는 게 나의 권리가 아니다’까지 와야 해요.

‘굳이 내가 살 필요가 없겠구나’ 내가 자꾸 사는 걸 권리처럼 생각해서, ‘하나님 저를 살려주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살겠습니까? 살겠습니까?’ 맨날 전제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게 마땅한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다음에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나오는데, 이건 아직도 절망이 아니에요. 자기에게 남은 배 12척을 아직도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이순신 장군 같은 그건 아니에요. 근원적으로, 더 근원적으로 가야 돼요. 아주 더 근원적으로 절망적이어야 해요. 우리는 절망적이 되려면 내가 산다는 것이 이게 내 뜻이 아닐 수 있다는 거,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야무지게 악바리처럼 살아서 살았다는 이 내 생각이, 이게 틀려먹었다는 거, 이게 엉터리라는 거, 내 일방적인 오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해요.

악착같이 살아서 이만큼 살았다는 것은 내 주장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야말로 마태복음 6장에 나온 말씀처럼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마6:26) 주께서 친히 길러주는 거예요. 길러준다는 생각을 못 하고 악착같이 내가 버티고 살았다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내 생각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절망으로 몰아넣는 이 예레미야애가의 말씀도 메시아가 하시는 일을 미리 앞당겨서 근접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숨어 계시죠. 그것도 진노로 막아버렸죠. ‘우리가 우리 행위를 조사해서 한번 돌아가자’라고 해 보겠지만, 이거는 어디까지나 현재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근원적으로 어떤 해답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나오는 말씀을 오병이어 기적이라 하잖아요. 그때 주께서 이야기하시기를 그다음에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먹음으로써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먹은 만큼 더 채워준 하나님이 아니고, 포기할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을 제공하는 하나님, 그게 오병이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불리 먹고 난 뒤에 남았다 하니까, 일단 뭐 남은 게 열두 광주리가 있든 말든 난 모르겠고, 배불리 먹었으면 되지 않았느냐. 주께 책망받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너는 배불러야 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배부른 너희들 5천 명이 아니라, 남은 거, 남겨둔 거,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너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남은 열두 광주리가 너보다, 더 배부른 것보다 더 주께서 얻고자 하는 그거예요. 인간의 배부름 때문에 막혀버려서 결국은 배부른 것으로 마감되고 끊어버리는 그 인간, 그 인간들 그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절망적인 사태가 아니면, 비둘기의 입에 있는 새 감람 잎사귀는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냥 희망 사항이고 상상의 날개를 펼 뿐이에요.

요한복음 14장 8절에 보면 여기에 빌립이 또 나옵니다. 하여튼 들어보면 제자들이요, 제자들이 그렇게 3년 동안 있으면서 진짜 철도 되게 없다는 이런 생각이 들겠죠.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 보기에는 철이 없는데, 그 당시에 그 현장에 우리들이 지금 예수님 십자가 지심에 대해서 모르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의 속셈을 대변해 주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절망에 이르지 못하는 그 한계, 그걸 빌립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 보여주시면 그게 좋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또 책망이 또 주어집니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말씀에 “내가 아버지에게로 간다”라고 했거든요. 아버지께로. 그러니까 인간들은 두 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두 분이 계시다. 아들 따로 있고 아버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이니까 가시더라도 아버지는 우리가 알고, 두 분 중에서 한 분 떠나도 한 분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은 신학입니다. 모든 신학은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다는 그것부터 시작한 게 신학이에요. 그러나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안 믿고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의 하나님만 생각할 뿐이에요.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있어요. 이 현상 상태에.

그러면 출발은 어디에서 하느냐. 출발은 간단하죠. 예수님이 책망한 대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는데, 자꾸 나 떼고 아버지 안다고 생각하지마. 내가 없어지면 아버지도 자동으로 없어지는 거야” 왜? 내가 접촉점이니까. 예수님이 접촉점이니깐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예수님이 하신 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거, 또는 고린도후서에서 예수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이고, 고마워라’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너 죽었어. 너 죽었단 말이야” 그분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 십자가 못 박을 때, 우리도 같이 죽어 있는 상태인 것을 살아 있는 우리가 그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이 말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안에 내용물로 해서 살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에 입성한 사람이에요.

천국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꾸 ‘저 사람은 어떻게 잘 믿지?’라고 사람이 자꾸 사람하고 비교하고, 요새는 뭐 사람하고도 비교 안 해요. 개하고 비교해요. 설 됐다고 개 설빔을 장만하는데, 개 설빔 한 벌이 65만 원이랍니다. 또 요새 뭐가 있느냐 하면은 개 호텔이 있는 건 여러분 다 아시고, 개 호텔 말고 개 유치원이 있어요.

개 초등학교 말고 개 유치원. 개 유치원에서 개가 소풍 가면, 개 유치원 도시락 준비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외손자 유치원에 답사를 했는데, 거기 보면 졸업생들 장래 희망 사항이 쭉 이렇게 영상으로 나왔어요. 그중에서 딱 기억에 남는 영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장래 희망이 전쟁 없는 나라의 대통령 되겠다는 거예요.

난 좀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어린 마음에서는 순수하기는 하지만, 정말 커서도 그러면 진짜 바보예요. 왜냐하면 전쟁 없는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면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해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전쟁 없는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전쟁을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다 끝냈어요. 우리의 왕이 되셔서, 이미 우리가 할 전쟁을 주께서 다 끝내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전쟁이 없어요. 그걸 화목 제물이라고 해요. 화목 제물. 전쟁은 어떤 경우에 전쟁이 두려우냐. 내가 살아 있을 때 전쟁이 두려운 거예요. ‘내가 저 사람한테 지면 안 된다. 꼭 이겨야 한다. 저 사람 물리쳐야 해. 내가 너 같은 것에 이게 질 줄 아냐?’라는 이런 거. 이게 내가 여기에서 어떤 살 권리가 있고, 살 이유가 있다고 자꾸 생각하는데,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살 권리는 박탈당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와서, 성령으로 찾아와서, 그러니까 주께서 오지 아니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우리는 새로운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제는 나의 구원이 아니고 구원의 장입니다. 필드(Field). 구원의 장이 우리를 통해서 형성되는 거예요. 못난 우리를 통해서.

전기가 흐르면 저항이 생기고, 그다음에 그 저항을 저장하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기가 흐르면 거기에 저항이 형성돼 있어요. 임피던스(Impedence)라고 하는데, 그 전기학에서 ‘Capacitance(저장)’ 또는 ‘Reactance(저항)’도 있지만, 장(Field), 자기장(Magnetic field)이 있어요. 이 장은 환경입니다. 우리 개인이 아니고 구원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성령 받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구원에 승리하고 따내는 게 아니라, 주께서 예수님의 장, 활동의 장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고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철없는 행동과 철없는 말들을 내뿜는지, 그런 모든 것을 다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조사를 다시 해서, 복음의 조사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 밖에 나올 게 없음을 또 한 번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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