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메시아의 내면

아빠와 함께 2026. 1. 25. 18:01

메시아의 내면

2026년 1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2:15-17

2:15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이스라엘과 더불어 살아계신 분으로 알았던 그 예루살렘 성전이 형편없이 몰락했을 때, 시기하던 주변 나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유다나라를 흉을 보면서 신이 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직면을 한 유대인 입장에서 마음이 찢어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욕스러움을 벗어날 새로운 해결책을 하나님께서 취해 줄 것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의 오류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미 인간은 낙원에만 있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고, 그 낙원의 자리에서 추방된 처지입니다. 즉 지금의 결코 낙원의 자리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본인들의 마음가짐을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이 분통 터질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형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할 입장에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견해 수정과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문제 해결에 있어 자신이 먼저 나서야 되는 입장인가에 대해서 재고해 봐야 합니다. 인간은 마땅하고 당연히 수치스럽게 마감되어야 합니다. 더 욕심내면 아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멸망이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에 의해서 추진된 일이라면 그 추진하신 취지만큼은 온전하게 드러날 그날이 온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주어졌던 모든 예언과 말씀은 끝을 보지 않고 마감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수치심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하체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21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시기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죽옷으로 대신해서 입혔습니다.

이 대목을 대하는 모든 이들은 ‘이 치마를 인간이 입었다’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을 경우에서 ‘예수님 자신이 이 치마를 자신의 치마로 입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그 치마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수치와 무서움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이 가죽옷까지 인수인계 했다고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이 무너져서 주변의 모든 이로부터 모욕을 받는 이것을 친히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모당함이 끝이 아니라 그 성전의 완성의 끝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오늘 본문 17절에 ‘이미 정해신 일’이라고 합니다. ‘이미 정해진 일’이 완성되는 날이 있을 겁니다. 이 날이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때’란 시간이 더 진전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 그 시점을 두고 말합니다. 이 ‘마지막 때’를 위하여 그 깊은 수모를 당했던 겁니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 손이나 스케줄에 맡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성사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 자기에게 떠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완성의 시기까지 오면서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지막에 웃게 되면 그 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이 웃음을 위해 필연적인 절차였던 겁니다. 바로 이 작업을 위해 메시아께서는 다음의 말씀을 자신이 짊어지게 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여기서 ‘우리 연약’이라 바로 말씀을 감당못하는 우리의 근원적 죄를 의미하고, ‘병’은 그 죄값을 뜻합니다. 메시아께서는 이 죄와 징벌을 모두 자신이 친히 담당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면적으로 드러난 사태는 눈으로 목격하면서 예수님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외부 활동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5000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어시고 각종 병들을 고치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이 나오기 위해 내부에 어떤 능력이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제자들도 이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과 예수님 내부의 만남은 ‘피’가 됩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이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자신이 떠 안게 되면 예수님 내부에서 피가 토해집니다.

그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내부에서 제사가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피 뿌림’이 모든 말씀의 완성으로 봅니다. 더는 역사가 진척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 피로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을 기대를 걸면서 자기 구원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인간에게 메시아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제는 메시아께서 홀로 하십니다. 성도란 바로 이 말씀의 혜택, 곧 예수님의 피뿌림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 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혜택을 입은 자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썩어질 자신의 육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후패해야만 할 것이 마땅히 수모을 입고 창피를 당하고 조롱을 받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은 우리 주님께서도 먼저 개인적으로 받았습니다. 메시아의 개인적인 고통에 참여하는 자만이 자신의 육신도 마땅히 후패해야 됨을 받아들립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갖 아픔을 겪고 난 뒤에 3일 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셨기에 이제 성도에게는 ‘날로 새롭도다’는 실제 사실로 전환되는 것이 마땅한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육신 그 자체로 여겼던 것이 메시야의 안목에서는 보면 ‘옷’이었습니다.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1-3) 썩어가는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을 사모하는 것조차 본인의 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여망과 ‘다 이루심’이 효력을 부여받은 결과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이 좋음이 이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는 자신에 대해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지 말고 히브리인들처럼 노예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 곧 해방의 기쁨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신을 그만 닦달하고 매사 주님의 지시에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예레미야애가 2장 15~17절(메시아의 내면)260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2장 15~17절입니다. 구약성경 1145페이지입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아멘.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면 정답입니다. 예레미야애가라서 슬프다고 하는데, ‘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슬프냐’라고 생각하는데, 이스라엘이 슬프기 전에 주님부터 먼저 슬프다는 사실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치마를 만들 때,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치마를 만들었는데,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래서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혔다’

그런데 성경 해석을 신약에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하게 되면, 이 가죽옷을 입은 당사자는 바로 아담 속에 있는 예수님 본인이십니다. 그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그것을 예수님이 온몸에, 한 몸에 담고, 아담과 하와가 퍼뜨려놓은 인간 세계에 친히 자진해서 들어오셨어요. 합류하셨어요. 합류하셔서 아담에게 내렸던 그 말씀을 오롯이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받아서, 받기만 한 것이 아니고, 받아서 인간이 해내지 못한 말씀의 성취를 주님께서, 이 가죽옷의 의미를 홀로 다 이루신 겁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 쪽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모든 입장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게 된 그 자체가 하나님께 범죄 한 징벌 중 하나가 되어 있어요. 성경 말씀을 보면서 나 좋으라고, 날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자체가, 그게 하나님께 벌받는 모습입니다. 백날 성경을 봐도, 점점 더 징벌이 가중되지요.

오늘 본문 예레미야애가 같은 경우에는 2장 1절에도 “슬프다”로 시작하잖아요. 그리고 15절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화려했던 성전, 사람들에게 천하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그 성전이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할 때, 이걸 보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이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참 너무 하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다니. 하나님, 어서 우리가 조롱거리가 아니고 오히려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이 조롱을 그 당시 예루살렘이 파괴된 유대인이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 조롱거리를 장차 올 메시아인 예수님이, 지나가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줬다고 그렇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이 모든 말씀이 살아나요. 하나님의 원수, 이스라엘의 원수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 현재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 왜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치십니까? 적을 치지 않고. 오늘 주일학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고 한 것을 왜 전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그 당시 앗수르에 당했던 것이 너무 심해서 그래요. 정말 앗수르에게 시달려도 너무 시달렸던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부터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는 복수심이 있었고, 자기가 힘이 없어서 못 하는 이 복수를 우리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던 겁니다.

‘나의 고통을 대신 갚아주는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선지자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가 이제는 오히려 회개해서 하나님의 자기와 같은 백성이 된다고 한다면 누가 분노하겠어요? 니느웨 사람은 분노하지 않아요. 누가 분노하느냐. 당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히려 들고 일어날 겁니다.

‘이런 하나님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생각했습니다. 정말 화납니다. 이런 하나님을 원망하기는 뭐하니까 차라리 제가 자살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선지자가 요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가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면제되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라고 나섰던 요나의 그 심정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내용이 요나서에 기록이 돼 있다면, 그게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예수님을 경유해서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돼요. 너도 마찬가지다. 너도 마찬가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걸 수정을 해주실 거예요. 수정을 해주시는데 수정 방법은 오늘 본문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여기에 “정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멈추는 시간이 찾아온다는 거예요. 시간이 멈출 때가 있어요.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시간의 내용이 더욱더 진전될 하등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시간이 멈췄다는 것은 그 내용으로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원한 관계가 있어서 미워하지만,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서로 싸우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와서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잘해주고, ‘저 사람이 언제 저런 사람이었었어?’라고 예상 밖으로 나타났을 때, 지난번에 있었던 그 모든 아쉬운 것과 분노가 일거에 다 사라집니다.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해야 해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그 끝이 뭐냐 하면, 정해진 시간이고, 시간이 멈춘 시간이에요. 인간은 이 시간을 멈출 자격이 없고 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면, 이스라엘의 시간이 멈추는 시간을 메시아가 이스라엘 역사를 대신 자기에게 담당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몸에 담긴 이스라엘 역사를 자기의 몸으로 모든 말씀을 성취함으로써, “그렇게 네가 궁금하지? 네 끝은 이거야!”라고 하면서 끝낸 그 모습을 보여주는 시간, 그 정하신 시간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정하신 시간, 끝,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그 시간, 그 시간이 멈추었을 때, 그다음에 우리 인간 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뭐냐? 그것은 뭐냐 하면은 단면이에요. 주님이 하셨던 일에 겉면이 아니고, 바깥 면이 아니고, 쪼개진 단면, 주님 안에 뭐가 들었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활동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겉면만 봤어요.

‘저 사람 어느 신학교 출신이지? 자기 아버지는 뭐 하시지?’라는 이런 식으로, ‘저 사람은 물 위를 걷네. 저 사람은 병을 고치네?’라는 이것만 따지지, 저분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내부에 뭐가 들어 있기에 바깥에서 그런 효과를 내느냐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전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끝이 되면, 그때는 외부를 보던 자들이 비로소 메시아의 내부를 노출시키는 그 시점이, 끝 지점입니다. 내부를 노출하죠. 그 내부에 대해서 한 단면을 제가 말씀드린다면, 마태복음 8장을 일단은 쉬운 예로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거는 지난 수요일 날 언급을 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돼 있어요.

고맙죠. 감사하죠. 그러나 고맙다, 감사하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한 것을, 우리는 연약해요. 그런데 우리가 연약한 이유를, 끝 지점에서 모든 것이 다 진리로 드러나는 메시아 내부로 옮겨갔을 때,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까지 알았어야 돼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이 연약한 그 병, 합치면 이거는 뭐냐 하면, 연약한 건 죄이고 병은 죄의 값이죠.

우리는 죄를 지었고 죗값이 우리 안에 있을 때는 죄가 되는데, 이것이 예수님한테 옮겨 갔을 때, 예수님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것까지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이것까지 제자 때 알았어요. 알았고, 아는 사람 중에서 베드로가 있는데,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이런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굉장히 도발적인 말씀인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의 피 뿌림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방법은 그 사람에게 피를 토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우리 연약한 거, 우리의 죄, 그 죄가 아버지께서 아들의 내부에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느냐. 그 단면은 피가 쏟아지게 하는 거예요.

재물이 죽을 때 터져 나오는 그 피, 그 피가 예수님의 내부를 꽉 찼습니다. 그 내부에 꽉 찬 피를 주님께서는 자기 안의 피를 바깥으로 쏟아내는데, 이 쏟아내는 광경을 옛날 레위기에서 제사할 때, 피 따로 구분해서 피를 뿌림으로써, 인간이 손댄 모든 자국이 하나님이 받을 만한 거룩함,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유가 되는 현장으로 다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내부가 우리 안에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내부와 우리 내부가 같이 공유하는 영역이 돼요.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까지 들어와요. 피가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피가 묻은 자로서 끝까지 갑니다. 마지막 시간이에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끝이 거룩하면 앞에 무슨 짓을 해도 끝까지 거룩해요.

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다 보여줬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것을 옷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죽옷이잖아요. 가죽옷. 인간의 그 수치스러워서 가리는, “너 참 부끄럽지? 너 하는 행동이 네가 봐도 참 참 추잡스럽고 더럽지? 그래서 자꾸 감추려고 하잖아. 부끄럽지? 그 부끄러움, 나도 너의 부끄러움 속에 내가 뛰어들게”

너처럼 그렇게 낡아 빠진, 그 손으로 만든, 식물로 만든 그거? 그거는 옷 아니야! 동물로 만든 옷으로 하겠어. 창세기에서 이런 점이 상당히 어려워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식물로만 음식물을 주다가, 나중에는 동물로 바뀌어요. 동물로 바뀌는 것은 인간에게 맛있는 사태, 육고기, 뭐 이런 맛있는 음식 다양화를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변화가 곧 메시아가 가까이, 가까이 더 접근하는 하나의 절차로써 인간을 사용하신 겁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가 아니고 가죽으로 만든 치마는 동물성이죠. 그 동물성을 예수님이 입어버리면, 이제는 그 동물성이 그대로 깊숙이 예수님의 내부로 들어가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해서, 예수님 내부가 레위기에 예언이 돼 있는 제사, 다섯 가지의 제사, 그걸 역사로 만드는 근거로써 말씀이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오늘 예레미야애가에서 읽었던 본문, 성전의 무너짐과 관련돼 있는데, 성전 무너짐이 다가 아니라, 지금은 성전이 무너졌다는 말은 그다음 차례는 우리의 육신이 무너지는 걸 말해요. “만일 우리의 장막 집이” 그러니까 이 ‘장막 집’이라는 말은 표현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부끄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거예요.

그냥 피부로 둘러싸여 있다는 게 아니라 옷인데, 이 옷이 더럽고 추잡해서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속된 옷을 걸치고 우리는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이죠. 안에는 우리가 죽어있고, 겉에는 곧 죽어가는 우리의 피부, 썩어가는 피부를 걸치고 있고. 내부는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겉 사람은 후패 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했어요.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새로우냐. ‘나는 내가 이런 식으로 새롭게 되겠습니다’라는 그 말을 해서는 안 돼요. 표준은 예수님의 내면과 외면이 표준이에요. 우리는 표준이 아닙니다. 주님에게 일어났던 그 현상이 그대로 우리에게 복제가 될 뿐이지, ‘하나님, 저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라는 그런 건 없습니다. 주님의 내부는 피, 주님의 외부는 하늘나라 부활의 영광입니다.

부활의 영광이에요. 말씀 성취에 대한 보상이니까. 모든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이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아침 되면 특히 여자분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기초부터 해서, 머리 다듬고, 뭐 뿌려서 머리 볼륨 막 키우고 신경 되게 쓰잖아요. 이제 굳이 그럴 필요 없는 때가 오는데, 그게 마지막 때입니다. 근데 그때가 되려면 일단은 이 파마한 거 무너져야 하고요.

일단 우리의 속은 교체가 돼요. 고물은 저리 가라! 폐차 처분당해요. 성전인 우리 몸도 성전의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같이 폐차되고, “장막 집이 무너지면”,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자연물이 아닌, 우리 아빠 엄마가 만들어낸 그 육체 말고, 예수님이 표준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갈아치우는 그 새로운 피부, 새로운 영광된 모습이 오는데, 문제는 이 작업이 우리가 요구하고 원하는 작업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는 사실이에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거는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해줘요. 가만히 있어도. 닦달 안 내고 초조해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 뒤에 나와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주님 어서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더 살기 싫어요’라는 그러한 희망이 있더라도 그 희망 자체는 네가 만들어낸 희망이 아니고 주님이 너에게, 주님의 영이 네 속에 그렇게 유발시킨 희망이라는 거예요. 네 희망이 아니고 예수님 자기 숙제이고, 예수님 자기 소망을 너의 썩어가는 육체를 통해서 그걸 토해놓도록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아침에도 얘기했지만, 지금은 우리 일이 없지요. 우리 일은 짜증 내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우리는 맨날 짜증 내요. 맨날 불평이고. 우리는 이래요. 우리 본심이 뭔지 알아요? ‘나는 나를 정화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미워 죽겠어. 미워 죽겠어. 너는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살았어? 내가 맨날 나를 탓해요. 내가 나를 나무라고.

꼬깃꼬깃 모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나를 나무라는 데 다 소모하고 있어요. 그 에너지를.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라고 나를 보고 막 나를 나무라고 있다고요. 그럼 나는 또 내 변명들 늘어놓고. 그 두 개 한다고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달이고, 당신은 가사고, 나는 가락입니다, 나를 연주해 주세요~’

You are the sun
I am the moon
You are the words
I am the tune
Play me

‘Play Me’라는 팝송이에요. 미국 가수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가 1993년에 불렀어요.

나를 주님이 즐거운 대로, 말씀대로 연주해 주세요. 이게 바로 주께서 예레미야애가 본문에서 무너뜨리는 이유예요. 지금 너의 할 일은 네가 무너지는 그걸로 네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걱정하지 마. 이제는 내가 이 말씀을 내가 인수인계할게. 내가 인수인계해서, 내가 무너진 데서 새로운 피조물, 새 생명을 내가 만들어낼게. 그게 바로 두 번째 아담인 내가,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내가 다 이룰 테니까. 그게 바로 정하신 날이고, 정하신 때고, 그게 정하신 때의 단면, 그것을 너에게 보여줄게.

그게 십자가 피예요. 그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묻을 때, 우리는 더 인생을 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안에는 정하신 최종의 시간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이런 기쁨을 계속해서 좀 이어갈 수가 없는가. 방법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인이 되지 마시고요, 우리가 주님의 노예가 되세요.

왜냐하면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노예가 되었기에 구원이라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왔거든요. 이제 여러분 자신에게 그만 시달리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채찍질을 너무 했어요. 좀 아프다고 하면 뭐 해독 주스다 뭐다, 하여튼 본인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어요. 그것도 60대 이상부터 해서 본인 지키는데 사력을 다해서 피곤할 정도예요.

여전히 나는 나에게 주인이라고 이렇게 자꾸 착각하시는데, 몸이 아파도 좋고, 연세가 많은 건 어쩔 수 없고, 이미 정하신 때가 우리 안에 장착돼 있으니까, 정하신 때가 기다리는 때를 대체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주인 되지 마시고 주님의 노예로 사시면, 이 세상을 떠나는 해방감을 우리에게 앞서서 마음껏 늘 느끼게 해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말씀을 내가 지키는 말씀으로 큰 착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지키고, 다 지켰던 말씀인데, 이제는 주님이 주신 말씀의 혜택이 어떻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지 그것만 헤아리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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