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방향 전환

아빠와 함께 2026. 2. 4. 22:46

방향 전환 

2026년 2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1-4

1: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1: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분명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개인적 여망’이나 ‘소원’은 무산됩니다. 단지 확정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집단적으로 그 하나님의 예언에 도전하는 성향을 보이느냐를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일으키시는 사건이란 인간들의 모든 짐작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쉴새없이 자기 인생을 본인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진해서 불행을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어느 인간이 스스로 병들이 죽기 위해 난간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자살해도 그것마저 자신의 가치를 고려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은 개인적으로 그 어떤 의도마저 고려하지 않고 일으키십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하시아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든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는 이 사건으로 죽게 됩니다. 왜 뜸 들이는 경우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의미있게 성립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죽는 이유가 첫째, 아담이 선악과 과일을 따먹기 위함이다. 둘째는 병이 난 상태에서 자신이 나을지 여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둘에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모든 인간은 결국 어떤 식으로도 죽는다는 것은 확정된 사실입니다. 따라서 아하시아가 죽는 이유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굳이 엘리야로 하여금, ‘여호와께 묻지 않고 바알세붑이라는 블레셋 우상에게 묻었던 것’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입까?

그것은 아담 부부가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그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던 모든 후손들에게도 선악과 지식만큼은 대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7의 원칙은 이러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원칙을, 이미 원칙을 위반한 자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약사가 환자보고, “이 약은 절대 먹지 마세요. 먹는 날에는 즉사합니다”라고 주고 난 뒤에 그 환자가 그 약을 먹고 난 뒤, 약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지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나에게 거짓말 했어요? 그 약을 먹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당신이 나를 속인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당신 말을 믿지 않겠다”

이처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결코 하나님의 예언이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인생을 본인이 관리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을 통해서, 왜 인간들은 정녕 죽어야 마땅한지를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이미 결정된 것(정녕 죽으리라)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은 이미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이 되어지는 데 인간은 개인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 책임하에 꾸며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나 이런 이렇게 살고 싶어”,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 싶어”라는 포부를 갖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보편적 심상이 한 정점으로 모아 대표적으로 드러낸 자리에 앉은 자가 바로 왕입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특출한 재능이 뛰어난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릴 때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 백성들의 보편적 마음의 정점에 있기에 그 어떤 백성도 왕의 생각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오로지 왕의 마음만 쳐다보는 것이 지당한 태도라는 사실은 왕의 지시를 받아 엘리야를 체포하려 간 50+1 병사들에 의해서도 보여집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만났을 때에 결코 자신들이 왕의 계열의 일부이며 엘리야 선지자도 마땅한 왕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왕의 말을 거역할 수 없듯이 엘리야 선지자는 왕의 지시에 곱게 따라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는 따로 다른 계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왕의 미래에 대해서는 천사의 지시가 따로 있었습니다.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왕하 1:4)

신약의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천사 → 사도 요한→성도’ 계열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결코 선지자는 자기 인생을 개인적으로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7-8) 반면에 인간들의 계열도 왕으로부터 나옵니다. 집단적입니다.

단순히 왕만의 잘못이 아니라 왕에 붙잡혀 사는 계열 말고 다른 계열이 있음을 세 번째로 ‘50+1’로 선지자에게 다가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오십부장은 선지자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더는 ‘왕이 보낸 자신들’이 아니라 ‘왕에게 향하는 선지자 계열’의 일부로 받아달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만 하늘에게 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느 쪽에 붙어야 내가 사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선지자의 존재 자체가 어차피 이 세상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집단 대 집단의 마주침을 알게 된 겁니다. 두 집단은 각자 보편성만이 작용합니다. 선지자 쪽은 천사의 예언이 작용하고, 인간쪽에서는 인간 스스로 자기 인생을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작렬합니다.

인간쪽에 선 자들은 자신이 이미 죽게 되어있음과 그 이유를 자신들의 일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깨서 내려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압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확정된 복음 내용을 신나게 전하는 것 뿐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에 쓰임을 받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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