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전환
2026년 2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1-4
1: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1: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분명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개인적 여망’이나 ‘소원’은 무산됩니다. 단지 확정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집단적으로 그 하나님의 예언에 도전하는 성향을 보이느냐를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일으키시는 사건이란 인간들의 모든 짐작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쉴새없이 자기 인생을 본인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진해서 불행을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어느 인간이 스스로 병들이 죽기 위해 난간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자살해도 그것마저 자신의 가치를 고려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은 개인적으로 그 어떤 의도마저 고려하지 않고 일으키십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하시아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든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는 이 사건으로 죽게 됩니다. 왜 뜸 들이는 경우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의미있게 성립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죽는 이유가 첫째, 아담이 선악과 과일을 따먹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병이 난 상태에서 자신이 나을지 여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둘에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모든 인간은 결국 어떤 식으로도 죽는다는 것은 확정된 사실입니다. 따라서 아하시아가 죽는 이유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굳이 엘리야로 하여금, ‘여호와께 묻지 않고 바알세붑이라는 블레셋 우상에게 묻었던 것’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입까?
그것은 아담 부부가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그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던 모든 후손들에게도 선악과 지식만큼은 대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7의 원칙은 이러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원칙을, 이미 원칙을 위반한 자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약사가 환자보고, “이 약은 절대 먹지 마세요. 먹는 날에는 즉사합니다”라고 주고 난 뒤에 그 환자가 그 약을 먹고 난 뒤, 약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지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나에게 거짓말 했어요? 그 약을 먹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당신이 나를 속인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당신 말을 믿지 않겠다”
이처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결코 하나님의 예언이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인생을 본인이 관리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을 통해서, 왜 인간들은 정녕 죽어야 마땅한지를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이미 결정된 것(정녕 죽으리라)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은 이미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이 되어지는 데 인간은 개인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 책임하에 꾸며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나 이런 이렇게 살고 싶어”,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 싶어”라는 포부를 갖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보편적 심상이 한 정점으로 모아 대표적으로 드러낸 자리에 앉은 자가 바로 왕입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특출한 재능이 뛰어난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릴 때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 백성들의 보편적 마음의 정점에 있기에 그 어떤 백성도 왕의 생각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오로지 왕의 마음만 쳐다보는 것이 지당한 태도라는 사실은 왕의 지시를 받아 엘리야를 체포하려 간 50+1 병사들에 의해서도 보여집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만났을 때에 결코 자신들이 왕의 계열의 일부이며 엘리야 선지자도 마땅한 왕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왕의 말을 거역할 수 없듯이 엘리야 선지자는 왕의 지시에 곱게 따라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는 따로 다른 계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왕의 미래에 대해서는 천사의 지시가 따로 있었습니다.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왕하 1:4)
신약의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천사 → 사도 요한→성도’ 계열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결코 선지자는 자기 인생을 개인적으로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7-8) 반면에 인간들의 계열도 왕으로부터 나옵니다. 집단적입니다.
단순히 왕만의 잘못이 아니라 왕에 붙잡혀 사는 계열 말고 다른 계열이 있음을 세 번째로 ‘50+1’로 선지자에게 다가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오십부장은 선지자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더는 ‘왕이 보낸 자신들’이 아니라 ‘왕에게 향하는 선지자 계열’의 일부로 받아달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만 하늘에게 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느 쪽에 붙어야 내가 사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선지자의 존재 자체가 어차피 이 세상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집단 대 집단의 마주침을 알게 된 겁니다. 두 집단은 각자 보편성만이 작용합니다. 선지자 쪽은 천사의 예언이 작용하고, 인간쪽에서는 인간 스스로 자기 인생을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작렬합니다.
인간쪽에 선 자들은 자신이 이미 죽게 되어있음과 그 이유를 자신들의 일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깨서 내려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압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확정된 복음 내용을 신나게 전하는 것 뿐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에 쓰임을 받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8강-열왕기하 1장 1-4절(방향 전환) 26020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본문에 사건 하나 일어납니다. ‘아하시야’라는 왕은 북쪽 왕 아합이 죽은 후에 차기 왕으로 등극한 자인데 그 사람이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 사건이지요. 왜 사건이냐 하면, 자기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난 이쯤에서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 죽어야겠다.’ 그런 인간은 없잖아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미리 예상치 못했는데 벌어진 일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 범위, 자기 환경에 대한 나름의 대책, 사건은 항상 그것을 넘어섭니다. 왜 그걸 넘어서는가? 그렇게 해서 인간부터 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친히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이것까지만 알고 있잖아. 너희들이 아는 그것에 너희가 매여 있다. 너희들이 아는 그 지식과 노력으로는 알 수 없는 사건을 내가 일으키겠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너희는 예전에 미처 몰랐지, 그렇지? 이게 바로 너야.”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해요.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온갖 것 다 생각해요. 주가지수가 6천까지 올랐을 때 ‘지금 팔까 말까?’ 하고 또 4천으로 떨어지면 ‘미리 팔걸’ 이런 식으로 온갖 것을 다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미리 아는 것을 사건이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미리 아는 것은 지식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다 했나? 애 많이 썼어? 네가 아는 지식으로 단도리하면서 예측도 하고 대비도 했어? 너의 대비와 예측이 완전히 쓸모 짝이 없도록 내가 만들어줄게.” 그게 바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를 단도리 할 수 있다거나 책임질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알아야 해요.
내 인생이라는 그것은 맞아요. 내 인생이니 내 것이지요. 내게 속한 내 인생인데 ‘내게 속한 내 인생’이라고 우겨봤자 책임질 수 없는 그것이 또한 우리 자신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할걸…’ 또는 ‘그때 이렇게 선택해야 좋았을 걸…’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기대를 모를 것 같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건으로 움직입니다. 우리하고 협상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사건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쥐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죽는다. 창세기 3장 19절에 보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생 실컷 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라.
여기서 열왕기하 1장 2절,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라는 이 본문 가지고 이런 문제를 낼 수가 있어요. 아하시야 왕이 죽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1) 난간에서 떨어졌기에 죽었다. 2) 원래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죽도로 되어 있다. 답은 몇 번입니까?
난간에서 떨어질 것은 본인이 예측을 못했어요. 자기가 난간에서 떨어져서 죽으려고 한 적이 없으니까요. 아무 예측을 못했으니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이미 앞선 하나님의 예언과 확정된 말씀에 예속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너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확정된 사실이 창세기의 이야기잖아요.
옛날 아담에게 일어난 그 확정된 사실이 어떤 경로-경로-경로를 밟아서 아하시야의 개인적인 인생 가운데서 깊숙하게 들어와서 그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적용 중 하나가 뭐냐?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들어 죽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이 확정된 예언의 말씀, 이 원칙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 어떤 그 요령을 부리고 통박을 굴려도 소용없어요.
큰 원인은 무엇인가? ‘아담이 선악과 따 먹었으니 아담 후손들은 순차적으로 다 죽게 돼 있다. 자식을 낳든 손자를 낳든 다 죽게 돼 있다.’ 그 큰 범위의 죽음 안에서 어떤 사람은 ‘난간에 떨어져 병들어서 죽었다’라는 그 세부 사항으로 가지치기 된 거예요.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며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선제 된, 먼저 있는 예언의 큰 범위 안에서 새끼 치듯이 작은 예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그 말이죠. 큰 말씀, 큰 예언은 꿈쩍도 안 해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세세한 작은 예언들이 큰 예언 ‘정녕 죽으리라’에 예속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네가 난간에서 떨어져 죽든지, 아니면 병들어 죽지 않고 그냥 늙어서 죽든지, 잠자다가 그냥 가든지, 아무리 해도 인간은 죽는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다면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서 죽었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어서 그 후손도 당연히 죽었다’ 하면 되는데 오늘 본문처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그래서 결국 죽었다는 쪽으로 집중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다’ 할 때 그 후손들 입장에서는 선악과 구경도 못 했어요. 집사님은 구경했어요? 문경 사과는 구경했겠습니다마는 선악 과일은 구경해 본 적도 없어요. 죄라는 것은 내가 눈으로 목격하고 ‘죄를 지을까 말까, 지을까 말까? 나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내가 잘못 선택하면 죄가 되고, 잘하면 죄가 아니다’라는 생각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 하는 것은 이미 정신병자예요. 인간은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소지용으로, 곧 자기가 갖고 있는 용도로서 자유를 생각한다면, 인간들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지금 자기가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대상인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유가 인간보다 더 셉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자기가 자유를 부릴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객이 전도되었죠. 이게 정신병이에요.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다는 이것으로 죄를 더 세분화시키는 이유는,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나는 현장에 없었기에 내가 죄인이라 하는 데서 나를 빼주세요. 나는 그때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니까요? 그러니 빼달라고요.” 하는 말을 못 하게 만들어요.
선악과 따먹어서 나온 결과가, 이미 인간은 선악 지식에 장악당했어요.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악과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이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다는 말이죠.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게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지 말아야 될 것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려운 이야기라도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테니까 생각해 보세요. 약사가 어떤 환자에게 “이 약은 먹지 마세요. 이 약 먹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독약입니다”라고 하면서 약사가 그 약을 줬다는 말이지요. 그 환자가 그 약을 먹었어요. 먹지 말라고 분명히 했는데 그냥 먹었어요.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약을 먹은 그 환자가 약사한테 “왜 거짓말했습니까, 라고 따질 수 있느냐?” 하는 게 문제예요. “이 약 먹으면 진짜 죽습니다” 했는데 그 약을 먹었고, 먹었는데 안 죽었어요. 안 죽었으니까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말을 하잖아요. 누굴 보고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아 있으니까, “약사 양반! 당신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요?” “무슨 거짓말?” “이 약 먹으면 죽는다면서!” “안 죽었어요?” “죽기는? 지금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당신한테 따지고 있는데!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했다고!” 그러면 약사가 뭐라 하죠? “그래서 지금 당신이 안 죽고 그냥 살아 있어서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예요? 기분 더럽다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으면 “기분 좋다는 이야기죠.” 이렇게 된다니까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인간이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었어요.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는 기어이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전히 살아 있으니까. 그다음에 문제가 생겼어요. 살아 있으니까 이 살아있다는 것을 인간은 결사적으로 밀어붙입니다.
‘나 안 죽고 살아 있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결정은 오류야. 이것은 잘못된 거야’라고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라고, 마치 환자가 약사 보고 따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자부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처럼 인간도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하고 끝내면 될 것을 가지고, ‘난간에 떨어져 병들어서 죽었다’는 이 사건에 왜 집중시키는가? 인간이 선악 지식을 알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그다음에 영원한 죽음 그게 지옥이죠, 영원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그 지옥에 갈 동안에 ‘인간들이 살아 있다고 우기면서 어떠한 죄의 면면을 다 노출시키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죄의 값은 사망이거든요.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인간이 예상한 그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이 있어요. 그 다른 죽음에 갈 때까지의 경로, 곧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죄를 짓게 만들어요. 죄를 짓게 만들어서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너한테 저주를 내려도 할 말이 없지?”라는 것을 확정하기 위한 거예요.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의 인생이란, 이미 결정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우리 인생입니다. 뭘 결정했습니까? 그러니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는 그 확정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 ‘정녕 죽으리라’를 통해서 인간은 보편적으로 이미 다 죽은 거예요.
그렇게 성경을 봐야 할 근거가 뭐냐?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엘리야에게 찾아왔어요. 전에 열왕기상 19장 5절에서도 천사가 엘리야에게 찾아온 적 있어요.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 있으면서 죽으려 했을 때 천사가 와서 이제 구운 떡과 물 한 병 주면서 먹고 힘내라 하면서 천사가 왔었거든요.
이번에도 또 천사가 엘리야에게 왔습니다. 와서 뭐라고 전하는가? 아하시야 왕이 병이 나자 곧 죽은 것이 아니거든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헉! 숨 막힌다…” 하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그날 아담하고 하와는 멀쩡했어요, 안 죽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뿐 죽지는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난간에서 떨어져 병은 들었으나 아직 살아 있는 아하시야에게 ‘너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라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한테 왔고, 엘리야는 확정된 소식을 전합니다. “너는 죽는다”라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왜 저에게 이런 병을 들게 했습니까?”라고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에그론’은 블레셋의 지역인데 그 지역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갔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너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라고 돼 있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3-4).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나 멀쩡하게 살아있어’라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면 살아 있는 이유가 뭐냐? 결국은 죽는데 살아 있는 동안 내뱉어지고, 토해지고, 방출되는 그 모습이 ‘정녕 죽으리라’에 부합되는 죄들을 쏟아낸다는 그 말입니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서 3초 이내에 죽은 게 아니고, 살아 있으면서 한 짓거리를 보라는 그 말이죠. 그 짓이 뭐냐? 바알세붑이라는 이방신에게 찾아가서 “내 병이 낫겠습니까?” 한 거예요. 부채 도사나 점쟁이 찾듯이 한 겁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왕하 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하시야 왕 내부에 있는 본모습, 본색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게 한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뭐가 어려운가? 엘리야가 아하시야한테 “너는 침상에서 못 내려온다. 이제 당신은 끝났어, 죽는다.”라는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아하시야가 엘리야 체포 명령을 내립니다.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서 부대장 포함 51명을 보내는데 여기서 어떤 점이 어려운가? 열왕기하 1장 10절에 보면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지금 잘못은 누가 했느냐? 아하시야 왕이 잘못됐다고요. 그런데 애꿎은 51명이 왜 죽습니까? 아니 우상을 섬긴 자는 왕이잖아요? 아하시야 왕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왕만 죽이면 되지 애꿎은 그 사람들, 왕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51명의 신하들, 장교 하나에 사병 50명이죠, 이 사람들은 왜 왜 죽습니까?
이 사람들이 병들어 죽었습니까? 이 사람들도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습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죽었어요.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라는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보편적입니다.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마을의 대장장이가 호미를 잘 만들어요. ‘호미를 잘 만드는 그 사람을 왕으로 세울 수 있습니까?’ 하는 문제예요. 또는 ‘한식 요리를 잘하는 셰프가 있다. <흑백 요리사>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래서 대통령 시킬까요?
자, 왕이라는 것이 뭐냐? 왕은 개인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보편적인 인간들의 심상이 응집돼 있는 게 왕의 자리예요. ‘바알세붑’이라는 이방 신을 섬긴 자는 분명히 개인입니다. 왕이라는 하나의 개인이지만 그 개인이 난간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확산시켜요. 왕은 보통 대장장이나 이발사처럼 그냥 개인으로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TV를 보는데 어떤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술 먹었다 하면 가족들 다 피신했어요. 아버지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엄마가 자식들도 그냥 버리고 집을 나갈 정도였어요”라고 죽 이야기해요. 거기서 “아버지, 제가 노래해서 아버지 잘 모시겠습니다.” 하니까 아버지가 “내가 옛날에 잘못했다. 엄마한테도 잘못했다”라고 한 거예요. 그 현장에 아버지가 앉아 있어요. 눈물 훔치면서 앉아 있다고요.
어릴 때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행패 부리고 가족들 팼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게 개인의 자아 형성에 영향을 입혀요. 그 젊은 사람한테는 그렇다고요. 하지만 그 아버지를 대통령 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을 대통령이나 왕 시키겠습니까?
지금 왕이란 문제는요, 어떤 개인이 어릴 때 아버지한테 학대받았다, 그래서 엄마가 집 나갔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어떤 요리를 잘한다, 호미를 잘 만든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왕의 자리는 아주 특별한 자리예요. 백성들 모든 개인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자리, 그 보편적인 자리에 왕이라는 것이 설정돼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요. 왕이 평소에 생각하는 그 범위가 있잖아요. 왕이 세상을 보는 범위 내에 대장장이나, 요리사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그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사람도 그 보편성을 띠고 있는 왕의 생각과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벗어나지 않는 모든 개인의 대표자가 왕이에요.
만약 어떤 백성이 있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저 왕의 생각은 다 틀렸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이민 가야 되죠, 그 사람이 이민 가야 돼요. ‘나는 저 사람을 왕이라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다른 왕이 더 좋아.’ 한다면 몰래 탈출하든지 해야 해요. 그 왕이 있는 한, 그 왕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백성들은 좋든 싫든 그 왕의 생각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가 왕과 백성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51명이 죽잖아요. 그 뒤에 또 죽어요. 열왕기하 1장 11절에 보면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저가 엘리야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이 51명의 군인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왕이 하는 지시를 받아서 그 말 그대로 전했어요.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이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했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말을 전하는 오십부장과 군대 50명을 다 죽였어요. 그러면 지금 다 해서 몇 명 죽은 거예요? 102명 죽은 겁니다.
열왕기하 1장 13절,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안 가면 어떻게 됩니까? 안 가면 왕의 손에 죽겠지요. 그래서 또 가는 거예요.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첫 번째로 죽었던 51명, 두 번째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죽은 51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도 역시 왕이 보낸 자였잖아요. 그런데 세 번째 보냄을 받은 오십부장은 방향을 틉니다. 왕이 보낸 자가 아니라 엘리야가 왕 쪽으로 다가가는 그쪽 진영과 같은 방향으로 돌려버려요. “내 생명은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은 엘리야 당신이 주관하고 있습니다”라는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방향 전환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엘리야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나님의 천사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확정된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확정된 예언의 말씀이 뭐냐? “아하시야야, 너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 그 이유가 뭐냐? 네가 나한테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너는 결국 침상에서 죽은 채로 내려올 것이다”라는 확정된 예언의 편으로 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50명 군인의 전향이 있습니다. 돌아선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요한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께서 천사를 보내고,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내리는 그러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장 오늘 본문에서 누가 누구를 만나기 위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아하시야 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병드는 사건을 통해서 아시아 쪽에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 우상과 관련돼 있고요, 엘리아 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가 있었고, 그 천사가 엘리야에게 통보해서 ‘너는 아하시야 왕에게 이렇게 예언을 전해라’라는 그러한 관계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에요. 엘리야에게 50명의 군대를 보냈다는 것은 강제 구인하기 위한 겁니다. 강제 구인한다는 것은 ‘북 이스라엘에서 내 권력이 당신 개인보다 더 세다’ 그 말이죠. 왕이니까요. 왕은 보편적인 권리를, 권한을, 국가 권력을 모두 한 손에 쥐고 있는 자예요. 그 나라 권력의 정점을 이룬 곳이, 바로 왕의 자리라는 말이죠.
국가 권력의 정점에 왕이 있고, 지금 왕은 병들었고, 그 왕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이라는 우상을 섬겼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뾰족한 정점이거든요. 그 정점에 대해서 이쪽 정점은 뭐냐? 엘리야가 있고, 엘리야는 이미 확정된 말씀을 천사로부터 받았고, 천사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개의 정점이 만나면서, 이미 아하시야 왕의 우상 섬김에 대한 그 처벌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 이 말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데 그 불을 누가 먼저 받았는가? 102명의 애꿎은 군사들이 먼저 맛을 본 거예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 이걸 보편적으로 생각해야지, 자꾸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 죄 없는 병사들이 그저 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어떤 병사는 형제가 다섯 명이고, 병든 노모 모시는데 도대체 보상금 5억을 줘야 해? 얼마 줘야 해?’ 자꾸 이런 식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모든 인간은 정녕 죽도록 확정돼 있어요. 언제 불 떨어진다고 해도, ‘왜 죄도 안 지었는데 내게 불이 떨어집니까?’ 이렇게 반박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미 큰 예언으로 ‘정녕 죽으리라’가 확정된 상태라니까요.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이것은, 떨어져 죽는 이유가 세부 상태로서 예언이 더욱 세밀해진 거예요.
그 102명의 군인이 불에 떨어져 죽은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왕 편에 섰다는 거예요. 왕의 편에서 왕의 말을 듣고, 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엘리야 앞에 엎드려 경배할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냥 엘리야를 개인으로 본 거예요. 그 군사들은 ‘이 나라의 특출한 초월적인 개인은 오직 아하시야 왕, 우리 임금님만 특출한 분이지 엘리야라 할지라도 임금님보다 못하고 특출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 대목이 열왕기하 1장 10절에 나옵니다. 9절 끝에 보면 오십부장과 군인들 50명이 올라가서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우리 임금님이 당신을 보자고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태도는 뭐냐?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우기는데, 백날 우겨봤자 이 나라에서는 당신 말보다도 나를 보낸 아하시야 왕의 말을 나는 더 추종합니다. 그래서 나는 왕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든 아니든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그러한 의사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0절에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즉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 말고,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 그 정도 수준 말고 진짜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내가 너희들 편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해 줄게” 하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왕이 보낸 51명의 군인을 즉사시켰습니다.
참 이거…,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번 요약해 봅시다. 이 세상에는 개인은 없습니다. 그냥 양대 진영의 집단만 있을 뿐이에요. 집단만! 엘리야도 ‘정녕 죽으리라’에 포함되는 사람 맞아요. 그런데 그 엘리야를 누가 보호하느냐? 하나님의 천사가 보호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에 의해서 천사가 보호하도록 하나님과 이미 한 편 먹었어요.
그러니까 엘리아의 특징은 뭐냐? 개인의 의견이 없어요. 엘리야는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왜 천사가 시키니까요. 이게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는 개인으로 놀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게 이사야 6장 6-8절에 나와요. 이사야 선지자에 관한 건데요, 마찬가지입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이야기해요.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가 지금 개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위에서, 하늘에서, 성전에서 자기가 죄인 중에 하나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어요. 자기는 망하는 사람인 줄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망해야 되는데 안 망했다고요. 왜냐하면 성전의 숯불이 자기 죄를 씻어줬으니까.
씻어주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혼잣말로 이야기합니다. “이 소식을 누구한테 전해야 하는데 백성에게 누가 가지?” 하니까 “거기에 제가 가겠나이다.” 이거는 종속적인 거예요. 종속적이라는 말은, 선지자는 자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는 거예요.
지금 아하시야 왕은, 본인이 본인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본인에게 갇혀 있는 꼴이에요, 본인한테. 만약에 하나님의 지시자 엘리야가 “임금님,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침상에서 거뜬하게 일어나서 걸을 겁니다. 걷게 되고 튼튼하게 될 겁니다.” 이런 말을 했으면요, 아하시야 왕이 50명 보내서 그 엘리야 잡아오라고 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들은 자기한테 갇혀 있기 때문에 자기네 인생이 뭐냐 하면, ‘나는 절대로 망해서는 안 되는 인생이고 고귀한 인생인지’를, 개인적으로 본인이 본인에게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너무 소중하니까 얼마나 소중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평생 그거 점검하고 확인한다고, 평생동안 그것에만 몰두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그러나 선지자는 거기서 벗어났어요. 선지자는 ‘내가 얼마나 개인적으로 훌륭하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무슨 일을 시키느냐?’에,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인 거예요. 왜? 이미 큰 그릇, ‘정녕 죽으리라’의 예언이 자기에게 확정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참고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바알세붑’이라는 게 뭐냐? 영어로 하면 fly, 파리입니다. 윙~ 날파리, 파리의 신이 바알세붑이에요. 그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왜 그 ‘신’을 섬겼느냐 하면, 파리가 들끓으면 전염병이 돌거든요. 전염병이 돌게 되면 누가 죽고, 누가 힘든가? 누구의 가족이 죽어가면 결국 본인들이 힘들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전염병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파리의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거예요. 이게 우상인 겁니다. 바알세붑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신이기 때문에, 사전에 잘 보이고 싶은 거예요. 이 ‘바알세붑’이 나중에 신약성경 마태복음 12장 24절에 악마의 대장 ‘바알세불’로 나와요.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이게 뭔 뜻이냐? ‘자연의 안정성, 이 대자연의 안정적인 질서가 곧 신의 질서라면 나도 자연의 일부로서 신에 의해서 늘 튼튼하고 건강하고 자연스럽고 안 아파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 인간은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느냐? ‘정녕 죽으리라’가 날아가요. 그 예언은 예언 값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 쪽에 속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확정된 예언대로 모든 것이 그냥 차질 없이 이루어짐을 그대로 그냥 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할 입장이 못 되고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될 뿐이니까요. 이것을 가지고 다른 말로 하면 엘리아는 뭐냐? ‘천국의 원정대’예요.
천국 원정대. 그러면 아하시야는? 아하시야 왕은 지옥 원정대죠. ‘천국 원정대와 지옥 원정대’가 첨예하게 아주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선 듯이 양쪽에서 대표자들이 만난 거예요. 그래서 격돌한 거예요. 보편성과 보편성, 망해야 될 인간의 보편성, 다른 이쪽은 구원받아야 할 보편성, 집단으로서 구원될 사람과 집단으로서 지옥 갈,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난 겁니다.
이쪽은 말씀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나는 고귀하다. 나는 행복해야 돼.’ 그거 주장하는 거예요. 그게 만남이에요. 여러분, 누구를 만나보세요. ‘나 이거 하고 싶어요. 나는 이런 사람 되고 싶어요.’ 뭐를 뺀 겁니까? 자기의 부정성,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정된 심판성을 빼고 “나 이런 사람 되고 싶어요. 나 이렇게 잘 살고 싶어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겁니다. ‘우상’이라 하는 것은 자아의 단단함이 돌출된 게 우상이잖아요. 자아의 이상적인 모습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하시야가 원래 늙어 죽도록 돼 있고, 사고 안 나도 늙어 죽어요. 하지만 왜 이런 사건을 일으켰는가? 그 당시의 선지자 엘리야, 하나님의 지시받은 엘리야 앞에서 도대체 인간은 ‘어떤 세밀한 죄를 보편적으로 드러내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신약에 와서, 이미 십자가 앞에서 오늘날 성도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의 죄사함이 우리 개인의 모든 일탈과 범죄를 용서해 주시고, 없애주시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대변적으로 보여주는 그 사명을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들이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늘날 우리가 바로 선지자고 우리가 제사장이고 왕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님을 늘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항상 다루고 있음을 고맙게 여기게 하시고,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자들이 자기 개인적인 야심과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들을 접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됨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