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존재의 상반신

아빠와 함께 2026. 1. 29. 08:54

존재의 상반신                   
 
2026년 1월 2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45-49

22: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와 그 어떻게 전쟁한 것은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46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22: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22: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게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22: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말씀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나라는 존재는 나를 위한 현실을 따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분투노력하고, 이미 내 것이라고 여긴 것은 사력을 다해 지킵니다. 따라서 말씀은 말씀이고 내가 만든 현실은 따로라고 여기면서 무심코 세상을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함축된 격언이나 교훈집처럼 잔소리들로 가득차 있다는 선입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남쪽과 북쪽 두 왕이 해운 사업을 시도하는 이야기입니다. 훈계쪼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냥 능력 있는 자들의 벌리는 현실 속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왜 거룩한 성경에 나와야 합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뭘 추구하시는데 현실상을 통해서 소개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일상의 삶을 추진시키는 힘이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기를 위한 삶’이 모든 인간 군상들에서는 당연하고 보편적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방치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하나님을 만드신 그 인간의 목적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 목적이란 오로지 ‘주를 위해 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유지시키는 목적에 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평하십니다. 곧 증오와 거기에 합당한 저주를 내리십니다. ‘증오하시는 하나님’, 인간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만든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미움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증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알려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증오하기는커녕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에게 충성함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게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입니다. 로마서 14:7-8에 보면,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노력합시다’는 격려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을 하는 겁니다. 즉 “우리 가운데 더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없지요. 그지요?”라고 되묻는 식으로 확인들어갑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상 ‘자기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방법’은 ‘자기 소유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는 방식’입니다. 자기 존재 걱정은 자기 소유 걱정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밤에 잠을 들려고 할 때, 모든 노동을 쉬면서 점차 무의식으로 내려가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주님 생각입니까 자기 것, 자기 소유 생각하면서 스스로 잠에 빠져들어갑니까?

잠 잘 때 의식의 찌꺼지마저 자기 것 챙기는 것이라면 평소에 일상 생활의 바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오로지 ‘자기를 위한 생각’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분노를 자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지부동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사는 인간’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을 훼방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존재성입니다.

당연하게 여호사밧도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살고자 하나님의 율법에 철저를 기한 왕입니다. 유다 나라에서 바알 숭배를 철폐했고, 오늘 본문에 보면 남색하는 자를 추방했습니다. 이런 정책이 추진하는데 있어 백성들의 협조가 필요하겠지요. 여호사밧은 거국적인 율법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소위 ‘율법 공교육 시책’입니다. 그다음 이러한 율법 교육으로 인해 국가 운영에 실질적으로 효력을 줄 수 있는 것이 사법 시스템입니다. 모든 다툼이나 시비거리에 있어 율법을 개입하므로서 자연적으로 전체 유다나라는 율법실천이 삶의 일부가 되도록 여호사밧은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철두철미한 율법집행에도 불구하고 과연 존재가 완전히 ‘자기를 위함’에서 ‘하나님 위함’으로 바뀌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율법에 헌신하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적인 죄를 알아야 합니다. 남태평양에 이스터섬이 외롭게 있습니다. 거기에 ‘모아이’라는 석상이 있는데 그 석상은 거의 상반신만 드러나고 짧은 하반신은 땅 밑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왕 아하시야와 더불어 해운사업을 벌릴 때, 실패한다고 단호하게 말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 20:35-37)

예언, 곧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이 드러내는 존재의 상반신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하반신, 곧 존재의 뿌리를 공격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7:26-27에 나오는 말씀을 뜻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여호사밧은 자기 신앙에 자신감을 갖고 북이스라엘과 나라 부강 사업에 나셨지만, 바로 이런 것이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반면에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은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건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년 다윗은 어른들 싸우는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단독으로 뛰어든 겁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죽어야 했는데 살아나왔습니다. 이것은 신약에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42에서 다윗과 요나단은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게 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존재에 등록하지 말고 사건에 등록해야 합니다. 사건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서만 나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존재의 뿌리를 발견하려고 애쓰고 인생 경험하는 것은 결국 허탈과 허무로 끝날 뿐입니다. 배의 파선은 곧 존재의 파산을 통해서 인간 존재가 죄에서 드러낸 상반신인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십자가 사건에 등록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바가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7강-열왕기상 22장 45-50절(존재의 상반신) 2601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22장 45절에서 50절까지입니다.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와 그 어떻게 전쟁한 것은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이 있었더라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집중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쪽 왕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라는 북쪽 왕, 이 두 왕이 합세해서 배를 만들려고 하다가 파산됐어요. 본문에 그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두 왕, 두 정치가가 만나서 재정적으로 협조합니다. 더 큰 장사를 위해서 무역선을 만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해보자’라는 이야기예요.

이거 현실 이야기죠.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왜 성경에 나오죠?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사업을 벌이는 이야기가 왜 성경에 굳이 성경에 나와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이 오늘날 우리 자신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힌트를 제시해 준다는 겁니다.

‘성경은 성경책의 지식으로 끝났기에 별개의 문제고 세상에서 사업을 벌이고, 장사를 하고, 현실적인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몫이다.’ 이게 얼마나 상식적인 생각입니까? 그런데 이 점을 아셔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증오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증오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인간을 처음 만들 때 그 취지가,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걸로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에덴동산에 뱀이 들어가서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바꾸었느냐?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돼 있는데, 이 현실 속의 모든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하느냐 아닙니다. 증오하십니다,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크게 생각하지만, 우리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거기에 도달됩니다.

우리를 증오하시는 하나님, 오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너 하나를 챙기고 너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간을 내가 이 땅에 만든 적이 없거든! 너 어디서 나왔어? 어디서 그런 인간이 나왔느냐?”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투와 마땅한 증오가 주어져야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취지에 부합되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증오를 받을 만한 존재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난 뒤에, ‘끝났어. 나는 하나님의 미움을 마땅히 받아야 해’라고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확정되었을 그때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짓거리와, 나의 모든 태도와 정신 상태가 사랑받을 잽이 못 되고 옴팍 하나님의 미움을 살 뿐인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 미움받을 짓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내가 있다’라는 것을 어디서 그걸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걸 현실 생활에서 알 수가 있는 거예요. 현실 생활을 어떻게 했는데?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남쪽의 여호사밧 왕과 북쪽의 아하시야 왕이 힘을 합쳐서 ‘우리 배 만들자. 배 만들어서 크게 무역하자. 우리가 나라의 지도자니까 각자의 나라를 키워서 한번 잘살아보자.’

하나님은 묻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방금 그 아이디어가 누구를 위해서 나왔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나’를 위해서 했죠. “그 ‘나를 위해서’라는 그런 인간을 내가 만든 적이 없는데 너는 왜 너 자신부터 먼저 챙기는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7-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 하고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 나는 거예요. 남들이 다 ‘나’를 위해 살아가니까 그럭저럭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양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 아쉬울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랬죠. 그 기도 왜 해요? 자기를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도와달라는 식인데 그걸 도와줄 수가 없죠. 백날 도와줘 봐야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만 계속 쌓이고 쌓이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인간 자체를 파산시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파선’이라고 돼 있는데 그걸 파괴시키고, 그걸 무산시키는 거예요. 완전히 그 계획이 절단나게 만듦으로써 나 자체가 문제 있음을, 원래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림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어요. 여호사밧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몰랐어요. 여호사밧도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하고 잘 협력해서 내가 통치하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호의호식하며 살겠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게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사건이 개입해요. 인간은 자기 존재 위주입니다. 자기 존재에 하나님의 사건, 배가 파선하는 사건에 임했어요. 그러자 그때부터는 존재 위주,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인 북쪽의 아하시야는 그냥 살던 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았고, 반면에 여호사밧의 경우에는 그 파선을 통해서 ‘나는 이 존재로 등록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사건에 등록됐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만들면서 둘 사이는 결별합니다, 헤어져요.

그러니까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오늘 본문 열왕기상 22장 49절에 보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제안을 합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야, 배가 부서졌으니 다시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라고 하니까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허락지 아니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어디에 나타나느냐? 역대하 20장 35-37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아하시야, 나 당신하고 안 놀아. 당신하고 이제 어떤 계약도 체결 안 해. 빠이빠이!” 하고 결별한 이유가 나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

‘에시온게벨’의 위치가 어디냐? 이스라엘 남쪽에 보면 이스라엘이 놀랍게도 홍해하고 접해 있어요. 폭이 좁은 채로 홍해가 늘어져서 이스라엘 남쪽 끝에 접해 있는데 거기에 구리 광산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배를 만들어서 같이 무역을 해보겠다고 한 거지요. 37절 계속 보면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어요.

말씀입니다. 예언이에요. 그런데 예언은 현실에 올 때는 뭐로 오느냐? ‘존재’로 오는 게 아니고 기존 존재에 대해서 ‘사건’으로 다가와요. 그 사건은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그 존재에 대한 파산을 선고하고, 실제로 현실적으로 그걸 깨뜨리게 만들어요.

나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자꾸 이 존재, 나를 위해 살잖아요. 그러니까 이 존재에 손을 대서, 이 존재에서 나왔던 그 뜻을 무산시킴으로써 ‘나는 이 존재에 기초해서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사건에 기초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쪽이 하나님의 증오에서 사랑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하면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수박 농사를 지었어요. 그런데 수박 농사가 잘 안되고 자꾸 망해요. 그 사람이 학교 다닐 때 다른 과목은 전부 다 그냥 빵점 수준이지만 수학과 물리만큼은 거의 100점을 맞았답니다.

그 사람이 가정 형편상 공부를 계속 못 하고 수박 농사를 짓다가 그것도 잘 안됐어요. 어찌어찌하다가 러시아에 유학갔어요. 러시아에서 물리학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과가 없어서 우주항공학과로 들어갔답니다. 성적 때문에 퇴학도 당했는데 마침 청강생으로 들어갔던 양자역학 교실에서 치른 시험에서 얼떨결에 만점을 받아서 재입학하게 되었고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교수예요. 물리학 교수입니다. 인공위성이 달 같은 데 접근할 때 압력이라든지, 속도 그런 걸 연구하는 학자예요.

여기서 한번 봅시다. 그 사람이 수박 농사짓는 것과, 현재 성균관대학교 물리학 교수, 이 둘 다가 본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의 바탕이 뭐냐? 이게 존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어요. 수박 농사를 짓든 교수가 되든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처음에 여호사밧도 마찬가지고 아합도 마찬가지고, 그 아들인 아하시야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자기 존재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그 존재에서 사건 위주로 자력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바뀔 수가 없고요, 그래서 자기 존재니까 ‘자기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게 세상 모습인데, 현실 모습인데 그게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파산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왔는가? 그 성경 말씀이 오늘날 나와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를 말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 방금 본 엘리에셀 선지자, 하나님의 예언은 그것이 현재 새로운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 찾아와서 우리가 나 중심, 내 존재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훼방하고 그걸 저지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저지함을 통해서 ‘그래, 나는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다시 날 위해 살아야지.’ 이렇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존재 위주예요.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요나단이 나와요. 오늘 본문에서는 남쪽의 여호사밧 왕이 북쪽의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하고 자꾸 친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나단은 누구하고 친했냐 하면, 성경에 보면 다윗하고 친했어요. 다윗하고 왜 친했느냐? 요나단이 다윗을 통해서 뭘 봤느냐? 하나님의 사건을 봤어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형들과 다윗의 아버지, 이스라엘 왕이나 많은 신하들은 다윗을 어떻게 봤느냐?

그저 소년 다윗으로만 봤습니다. ‘저 조그마한 것, 아직 어른도 못 된 것.’ 특히 형들은 동생 다윗이 되바라졌다고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야! 빨리 집에 가라! 이 자리가 네가 올 자리가 아니다.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괜히 아버지 걱정시키지 말아라. 너는 여기 구경할 생각도 말고, 가져온 도시락이나 여기 두고 빨리 집에 가!”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 소년 다윗은 집에 안 가고 고집부리면서 골리앗과 사울의 전쟁판에 기웃거렸습니다. 전부 다 그 골리앗의 모독적인 발언에 대해서 아무런 소리도 못 하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이 그 현장에서 그것도 단독으로, 단독으로 그 골리앗과 1 대 1 데스 매치를 한 거예요.

1 대 1, 이제는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그야말로 전쟁에 나섰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다윗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누가 봐도 죽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사울의 아들, 그 당시 왕의 아들 요나단이 이걸 봤어요.

요나단은 다윗을 보면서 뭐를 생각했느냐? ‘저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보는 존재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사건이 저 다윗에게 함께 있음’을 본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서 나왔던 사건이 그 사람에게 도달되고 있고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3-4절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는 뭐가 게재돼 있느냐? 그냥 존재가 개입된 게 아니에요. 존재라면 지금 사울은 왕 집안이고 다윗은 변변치도 않은, 그냥 목축하는 집안이에요. 서로 친구 사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나한테는 없고 너한테는 있다”라고 할 때 다윗이 ‘나한테 주어진 언약이 나한테 있는 것처럼 요나단 너한테도 같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4절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라고 해서 모든 것을 줄 요량으로 했고요, 사무엘상 20장 17절에 보게 되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20장 4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오늘날 수박 장사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교수하는 사람에게 이게 주어집니까? 사람들은 수박 농사짓다가 교수를 해도, 무슨 직업을 해도 오로지 존재인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 거의 전부 다! 너와 나 사이에 여호와의 사건이 게재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모릅니다.

이게 어느 정도 무서운 일인가는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남태평양에 가면 칠레 본토에서 약 3, 700km 떨어진 ‘이스터’라는 섬, 부활절 날 발견했다고 ‘이스터’라고 했어요. 그 섬에 가면 모아이 석상이 있습니다. 모아이의 석상의 얼굴이 길쭉하거든요. 그 특징이 뭐냐? 상반신만 나와 있고 하반신은 감추어져 있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그 모습이 전부 다 모아이 석상들이에요. 전부 다 상반신이 나타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 자기 자신의 존재, ‘누가 누가 잘 먹고 잘사느냐?’ 여기에 정신 팔려서 쑥쑥 자라는 자기의 소유, 재산 증식, 주식 오르는 것, 우리집안이 잘나간다, 좋은 집 산다, 좋은 차 탄다, 그 상반신에 나타난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한 것, 그것 가지고 자기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은 어디를 공략하느냐? 모아이 석상의 그 보이지 않는 뿌리, 그 존재의 뿌리를 말씀이 공격한다고요. 세례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존재의 뿌리에 놓여 있다’(마 3:10)라고 했고요, 마태복음 7장 24-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온 천지가 모아이 석상이에요. 전부 다 상반신만 드러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연주회 하는데 옷은 어떻게 입지?’ 남들이 내 뿌리를 안 보거든요. 내 발밑을 보지 않아요. 존재의 뿌리를 안 본다고요. 주님의 말씀은 어디를 겨냥하느냐? 우리의 존재의 뿌리를 겨냥해서 그걸 사건화시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존재를 주장해?” “예!” “나는 이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으로 너희들에게 다가서겠다.”

그러니 이 성경을 봐도 ‘성경은 그저 책이고 이 현실은 달라.’ 현실이 다른 게 아닙니다. 현실은 자기 상반신만 드러내고 하반신은 감추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그 다음에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위에서 보면 똑같아요. 똑같은데 그 뿌리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것을 겨냥해서 주님의 말씀은 다가가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그 뿌리를 인간의 힘으로 한번 파헤쳐보고자 하는 사람들중에 누가 있느냐? 이 창동 영화감독도 그중에 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얼추 눈치는 챘어요. 인간이 모조리 돈만 밝히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너무 삭막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 힘을 합쳐서 인간의 그 뿌리가 뭔지 한번 파보자’라고 새서 만든 영화가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이 신애(전도연)’라는 여성은 자기의 파괴된 가정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소위 진실이라고 하는 가상 진실로 옮겨 타려고 하다가 신의 용서라는 것 앞에서 좌절해서 다시 허무한 세계로 돌아오죠. 피해자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이 기독교 신자인 걸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인 그 범인을 찾아가지요.

“당신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니까 교도소에 있던 사형수가 하는 말이 “애기 엄마가 용서하기 전에 우리 주님이 저를 용서했어요.” 이 소리 듣고 돌아버렸어요. “내가 용서해야지 하나님이 뭔데, 하나님 뭔데? 하나님 당신이 피해자야? 내가 피해자인데 내가 용서해야지.”

그다음부터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틀어놓고 다니면서 허구적인 기독교 복음보다도 허무를 택한 겁니다. 다시 옛날의 허무한 생활, 아무 답 없는 허무한 생활로 돌아와요. 이창동 감독은 그런 작업을 하면서 해답이 없어요. ‘그냥 한번 파보자’ 하는 식이죠. 그 이창동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영화가 뭐냐 하면 <버닝>이라는 영화입니다.

해미(전종서)는 아프리카에 가서 부시맨 만나서 뭘 발견했느냐? ‘이 세상에 두 종류의 굶주림이 있는데 하나는 배고파서 굶주리는 것이 있고, 또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를 몰라서 굶주린다. 이 두 가지의 굶주림이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삶의 의미를 한번 찾아보겠어.’ 이렇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그 해미라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종수(유아인)가 있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갖고 노는 제3의 남자가 또 있어요. 벤이라는 이름의 재벌 아들입니다. “돈도 없는 것들이 고상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 웃기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 두 사람을 그냥 갖고 놉니다. 결국 여자를 죽여요. “삶의 의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돈 없는 것들이 꼭 그런 생각하더라.” 이렇게 비아냥대는 그 남자 벤의 취미가 뭐냐?

돈은 집에 많으니까 심심하면 취미로 농촌의 비닐하우스에 라이터로 불을 질러요. 방화하는 취미가 있었어요. 그런 벤이 삶의 의미 찾는다는 그 순진한 해미라는 주인공을 갖고 놀다가 죽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은 여자를 사랑했던 종수(유아인)가 ‘너도 한번 죽어봐라’ 해서 벤을 유인해서 칼로 죽이고 “네가 이거 좋아했다면서? 네 취미라면서?” 하면서 포르셰 자동차와 함께 불태워버립니다.

제목이 버닝(burning), 그렇게 불태우면서 영화는 끝나요. 무슨 뜻이냐? ‘인간에게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 영화가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정직합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느껴요. 자기 자신을 느끼니까, 이게 소중하니까 이제 삶을 사는 것은 오로지 이 소중한 나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아까 그 로마서 14장 7-8절 그 말씀 다시 안 드려도 되겠죠. 그냥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다시 한번 보세요. “여러분, 주를 위해 삽시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없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지요?”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이창동 감독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현재 있는 자기 자체가 지금까지 나이가 60이 되든 70, 80이 되든 어떻게 되든 죽을 때까지 오로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어요. 제가 과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시험해 보세요.

여러분, 오늘 밤에 주무시죠? 잘 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그렇게 자는 것은 아니잖아요. ‘피곤하다’ 하고 잘 때 무슨 생각하면서 잠에 드십니까? ‘오늘도 주님이…’ 뭐 이런 생각합니까? ‘가만 보자. 내가 가진 거 지금 잘 있나? 가스 불은 제대로 껐나? 문단속은 잘했어? 주차된 차에 고양이가 올라가지는 않겠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곧 잠이 와서 의식이 끊어지고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기 직전의 의식, 그러니까 내 노동이 중지될 때, 잠에 막 빠져들어가는 그 시점,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평소대로 오늘 하루 종일 생각했던 그 바닥의 생각이 잠들 때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 생각이 뭡니까? 자기의 소유성이에요. 나는 얼마나 가졌느냐, 내 것을 어디까지 가졌느냐, 우리 손자는 잘 있을까, 더 안 아프나, 설사한다는데 좀 괜찮나, 이게 전부 다 뭡니까? 나를 위한 나의 소유성과 관련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증오, 분노를 산다? 그딴 것은 모르겠고 지금껏,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요. 나를 위해 산다, 끝! 그 외에 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잠을 잘 때나 안 잘 때나. 잠잘 때 그런 생각한다는 것은 깨어 있을 때도 자기 소유만 걱정하며 살아왔다는 그 고백 외에 다른 고백이 있을 수가 없어요.

이제 끝으로, 그러면 해결책이 있어야 해요, 해결책. 분명히 성경에서는 “여러분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지요?”라고 찾고 있는데 우리는 유구무언, 전부다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나는 내 가진 거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이러고 있으면 “그러면 이제 사랑해 줄게” 하고 그냥 넘어갑니까? 아니죠.

나를 위한 생각에서 주를 위한 생각으로 뭔가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바뀌는 방법은, 그 대책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장 46절에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참고로 말씀드려서 지금 여호사밧은 어떤 평소에 어떤 생활을 했는가?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은 첫 번째로, 바알 종교를 제거했어요. 바알 종교 바 종교를 제거하면서 남색하는 것, 곧 자기를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모든 수단 같은 것을 거부했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그걸 본격화하기 위해서 거국적인 율법 교육, 전체적으로 전 국민에게 율법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율법의 공교육화를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모든 공교육에서 율법을 가르쳤어요. 그다음에 세 번째로 여호사밧이 한 것은 사법 개혁, 검찰 개혁을 했습니다.
요즘 많이 하고 있죠. 개혁 사법 개혁을 했어요. 판사 검사 길들이기.

이것은 뭐냐? 율법에 근거해서 사법시스템을 총괄적으로 개혁 시행한 거예요. 그랬더니만 이 여호사밧에 대해서 ‘다윗의 길로 행한 왕’이라는 그러한 칭찬을 받았어요. 좋은 신앙이라는 평을 받은 겁니다. 여호사밧이 옳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문제는 무엇이 온전하게 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신앙 좋은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존재,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요.

이게 무슨 뜻이냐? 내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할 수가 있어요. ‘이게 말씀대로 옳은 일이야.’ 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못하느냐 하면, ‘옳은 일을 하는 나’ 그 나의 존재를 내가 부정하지를 못해요. 이게 문제예요. ‘나 지금 옳게 하고 있지. 말씀대로 살고 있지. 잘 지키고 있지.’ 이걸 부정하지 못한다고요.

지금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았다’라는 건데요, 오늘 본문의 취지는 이거예요. 그것 가지고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22장 47절에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이 있었더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때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이 있었다’라는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여호사밧이 말씀대로 생활하니까 ‘에돔’이라는 그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누구 통치 아래 두었다? 바로 여호사밧의 통치, 유다 나라의 통치 아래, 지배 아래 있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도 그렇고 솔로몬 시대에도 그랬어요. 식민지가 되면 그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섭정왕, 곧 유다에서 파견한 총독이 에돔을 통치를 했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이 하는 일은 다 옳고, 옳고, 옳았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옳았는데,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하반신이 오롯이 들춰지지 않았던 거예요. 뿌리, 여호사밧이라는 존재의 뿌리는 율법, 성경 말씀, 성경 지식을 뒤집어쓸 정도로 하고, 실제로 실천을 해도 그 뿌리, 본인이 본인의 뿌리를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여호사밧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잘 되기 위해서 북쪽 나라와 동맹을 맺고 배를 만들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 뿌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건이 도달돼야 해요. 끝으로 제가 드릴 말씀이 이겁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같이 와야 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뿌리를 말씀과 동반해서 볼 수 있어야 돼요. 아까도 했지만 고맙게도 역대하 20장 35-37절에, 엘리에셀이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그 선지자가 여호와의 몫을 해요. 하나님의 몫을 한다고요.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 20:35-37).

하나님 몫은 그 상반신을 보는 게 아닙니다. ‘너의 뿌리, 애초부터 네가 죄인이다’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 사건은 누가 해야 하느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뿌리를 툭툭, 이렇게 건드려줘야 돼요. 건드려 주니까 여기서 여호사밧이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다. 말씀이 왔을 때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은 엉터리예요.

말씀이 왔을 때 “주여, 내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일부라는 것을 또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다윗이라는 어린애가 죽는 줄도 모른 채로 가서, 죽은 데서 살아오는 것처럼 우리는 내 뿌리로 이야기하면, 뿌리로 하면 진작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 죄인이고 무능력한 나를 오늘도 또다시 이렇게 살게 하셔서, 나를 위해서 사는 그 존재의 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사건, 사건으로 될 때 우리는 ‘사건에 등록된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 등록된 존재. 이것 때문에 이 평범한 일상의 생활이 하나님의 성경책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너, 뭐 하는 사람이야?” 수박 농사, 거기서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그러면 상반신은 그럴싸해요. 대단히 성공했어요. 그러나 뿌리는? 뭐 전에 수박 농사도 ‘나를 위해서’, 교수가 돼도 ‘나를 위해서’, 앞으로 퇴직해도 ‘나를 위해서’. 그러면 달라진 것이 없잖아요.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증오가 그대로 유효하게 작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아, 어떤 착한 왕도 온전한 인간은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는 없다’라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수련회에 나왔던 고린도후서 5장의 19절의 말씀,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 수련회 녹취한 거 보니까 나왔어요.

“택시!”
“예~!”
“고린도후서 5장 19절, 실을 수 있습니까?”
“예. 실어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사건을 실어 나르는 택시’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반신이나 드러내면서 남과 우열을 논하던 저희의 어리석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 주시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상반신 내밀지 말고 죄 많은 우리의 뿌리를 십자가 사건에 실어서 내밀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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