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확장
2026년 1월 1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29-35
22:2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22:30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22:31 아람 왕이 그 병거의 장관 삼십이 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22:32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지르는지라
22:33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22: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22:36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22: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22: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미리 엘리야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고받았던 자가 아합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아합왕의 시신에게 일어날 일까지 예언될 정도에 구체적입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왕상 21:19)
또한 아합왕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죽는다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왕상 22:20)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미 이 예언을 들었기에 인간 내부에 반발과 오기가 올라옵니다. 인간은 타고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롬 5:10)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함을 통해서 아닌 척을 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모델인 동시에 라이벌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언, 혹은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 속으로 비웃으면서 보란 듯이 거부하므로서 자신은 신의 간섭으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 자율성을 즐기려 합니다. 즉 하나님의 필연적 예언을 자신의 필연적 추진력으로 꺽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입던 왕의 복장을 친하게 지내는 남쪽 왕인 여호사밧에 입히고 전장에 나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전쟁의 현장에서는 남쪽 왕인 여호사밧이 북쪽 왕인 것처럼 적들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과연 아람 장군들은 이스라엘의 왕복을 걸친 여호사밧왕을 집중에서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때 아람장군들은 그들의 판단이 ‘필연’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즉 그들에게 여호사밧 왕 외에는 다른 이스라엘왕이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장군들로 하여금 여호사밧 왕을 먼저 만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아람장군의 필연적 조치와 연결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공격이 자기에게 쏠리자 다급해서 강하게 자신의 정체를 어필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다”고 주저없이 외쳐버립니다. 이로서 아람 진영에서는 이스라엘 왕을 찾는데 있는 그들의 필연적 판단은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어떤 병사가 우연히 화를 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누구의 지시를 따르는 듯이 정확하게 진짜 이스라엘 왕인 아합왕에게 꽂히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왕은 전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연’이 인간의 필연성을 뚫고 등장합니다. 선지자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예언의 필연성으로 인해 인간들에게 있어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연’에 속하게 된 일로 밝혀집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세상 일과 자기 인생에 일치 시킬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만약에 인간이 그저 우연한 존재이며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과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라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필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쏜 화살’으로 인해 아합왕이 죽기 때문에 그동안 ‘아합왕이 죽는다’는 그 말씀이 주어진 이상, 그 말씀으로 인해 이미 아합왕은 죽은 자가 됩니다.
단지 본인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우연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 자신을 필연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겁니다. 아합왕이 우연적으로 죽는 것으로 인하여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도 우연적으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됩니다.
남쪽 유다왕이 살아나게 된 이유는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유다 나라의 등불로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5-36)
이 ‘다윗의 등불’의 원형은 이미 출애굽에 나옵니다.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출 30:6-7) 즉 성소에 있는 등불은 맞은 편에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 위의 떡 12개를 보호하듯이 비춰줍니다.
바로 이러한 공간이 죄사함이 가능한 언약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러한 율법의 말씀들이 곧 ‘필연’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필연을 필연으로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은 그저 비유와 은유와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등불’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그 성소 안에 있는 떡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다윗의 등불’의 실체는 오늘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다윗의 등불’로 지켜주는 쪽의 왕과 그렇지 않는 북쪽 나라의 왕의 운명이 이처럼 판이하게 대조가 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쪽과 북쪽 이스라엘 전체를 기어이 망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어보면 전에 성막 안에 있었던 진열된 12개의 떡이나 다윗의 등불도 필연적인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 우연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을 위하여 신약에 와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가장 근접에서 일어난 필연적 사건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룟 유다나 예수님 자신도 말씀으로 우리어질 뿐인 것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아합왕은 말씀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즉 자신의 죽음은 우연이지만 이 우연이 예수님의 죽음과 필연적 연관성을 갖는 자만이 말씀대로 부활됩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다음 말씀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하나님의 예언대로 죽었다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이 분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분과 더불어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가는 우리의 몸으로 부활의 필연성을 미리 말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5강-열왕기상 22장 29-38절(우연의 확장) 2601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22장 29절에서 38절까지입니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아람 왕이 그 병거의 장관 삼십이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지르는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아멘
아합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하늘의 예언을 이미 들었어요. 그 예언을 들었고, 또한 21장에서 엘리야로부터도 아합 왕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을 또 들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에서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아합 왕이 죽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걸 넘어서서 아합 왕이 죽고 난 뒤에 그 시체에 일어나는 일까지 엘리야로부터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가야한테는 22장 20절에서 이런 예언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그러니 길르앗 라못에 아합 왕이 올라가는 그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죽이기 위해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전쟁을 하는 절차를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셨던 겁니다.
죽고 난 뒤의 일은 아까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그 시체의 피를 개들이 핥는 것까지 그 내용이 완전히 완료되어 구비되어 있어요. 완전히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지자의 이야기, 성경 이야기이고요, 당사자 아합의 이야기, 아합의 생각은 어떻겠는가?
여러분들이 만약 아합 왕이라고 치고, 어떤 선지자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들은 자기의 행동을 멈추겠습니까, 멈추지 못하겠습니까? 멈추지 못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누가 남한테 부정적인 말, 나쁜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에게 잠복되어 있는 오기가 더 분발해요. 일본말로 하면 ‘요시!’
“그래, 내가 그렇게 죽는다고? 내가 죽고 난 뒤에 개들이 와서 내 시체를 핥는다고? 그래?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마저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마저 이길 수 있는 이 찬스를 내가 놓칠 수가 없지!” 이렇게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이겨보려는 본성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누가 교회 가서 말씀 듣자고 하면 오기가 나서 ‘나 말씀 안 들어. 교회 안 가. 하나님 안 믿어. 교회 가는 너희들보다 더 잘 될 거야. 두고 봐!’ 하는 오기가 안에서 작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안 오면 성품이 굉장히 온화한데, 말씀이 딱 오게 되면, 갑자기 그 사람은 자처해서 자진해서 하나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의젓한 것으로, 아주 사나이다운 배포 있는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평소에 집안에서 친척끼리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잘 도와주고 인자하고 ‘뭐 어려운 거 없나? 애 이번에 대학 들어갔지? 누구는 제대했지? 제대했으면 내가 용돈 좀 줘야지. 대학 들어갔으면 내가 등록금 한 번 내줄게.’, ‘아이고 아재요, 고맙습니다.’ 하면서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그런데 ‘아재요 교회 나가서 주님 말씀 한 번 들어보세요.’ 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적이 되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처럼 갑자기 발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가장 중심의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인간들이 몰라요. 그런데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것을 노골적으로 아주 자랑스럽게 들통을 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분류시키는 그러한 결과를 위해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잖아요. 그러니 아합 왕이 오기가 생긴단 말이죠. 오기가 생겨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30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남쪽의 여호사밧, 북쪽의 아합 왕, 이 둘이 죽고 못 사는 친구 사이가 된 거예요.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죽게 되는 아합 왕입니다. 둘이 사돈 지간인데, 전쟁할 때 보통 왕이 하나만 나가야 되는데 둘이 짝을 지어서 나갑니다. 그러면서 아합이 특별한 왕복을 사돈 입으라고 남쪽 여호사밧에게 입혀버려요.
전쟁의 주인공이자 총사령관인 아합 왕이 시키니까 그렇게 해야죠. 그리고 아합 왕 본인은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군중 속으로 싸악 들어갔습니다. 왜 이런 행위를 보여 주냐 하면, 하나님의 “당신 죽습니다.”라는 하나님까지 거론하면서 미가야 선지자가 자기에게 예언했으니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필연적인 코스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필연적인 코스가 있다고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누가 장래에 대해서 제대로 예측하는가 하나님과 한 번 내기해서 하나님을 꺾어보려는 야심이 있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본심이죠.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거요. 그래서 왕복을 입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생겼어요. 뭐냐 하면, 아람 병거의 장관들이 누굴 먼저 만나느냐 하면, 아합 왕이 아니라 여호사밧을 먼저 만난 거예요.
여호사밧 왕을 만나서 그들도 인간인지라 ‘야, 저기 군복을 입은 이스라엘 왕이 있네. 전쟁 이제 끝났네. 저 인간 달려들어서 죽이고 전쟁을 우리의 승리로 마감시키자.’ 하고 달려드니까 여호사밧 왕이 기겁을 하면서 큰 소리로 자기의 정체를 밝힙니다. 뭐라 하냐 하면,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 나 아이라예. 나 아이라카이.” 이런 거요.
이걸 서울말로 하면, ‘저 아닙니다. 결단코 저 아니라니까요.’ 이런 거죠. 이걸 누가 했냐 하면, 베드로가 했어요. “너 예수님과 한 패지?” “나 아니에요, 나 아니에요, 나 아니에요.” 이렇게 세 번 했어요. 세 번 하니까 큰 소리가 되는 거죠. 큰 소리라는 것은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남한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위급하고 다급한 상태에서는 뭐 본성이 나오는 거죠, 본성적으로.
‘당신이 노리고 있는 그 아합 왕 아닙니다.’ 하고 급할 때는 뭐, 온 전력을 다하여 고함지르면서 아니라고 하는 거죠. 자,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번 전쟁에서 북쪽 왕과 남쪽 왕이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서, 혈육지간처럼 같이 두 왕이 참전했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났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아합 왕이 죽지 아니하면 여호사밧에게 있어서 ‘산다, 내가 살았다.’를 새삼스럽게 못 느껴요. 왜냐 하면, 죽음의 전쟁이니까. 이것은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에 둘 다 참전했으니까, 그냥 전쟁하기 전에 남쪽 유다 왕이 ‘나는 살아 있잖아. 나는 밥 먹고 있어. 나는 잠자고 있어. 이건 살아있는 거야.’ 이런 살아있는 거 말고, 이거는 자기가 뭐 당연히 살아있다, 또는 필연적으로 살아있다라고 느끼는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호사밧 입장에서 이것은 내가 생각한 필연 말고, 진짜로 내가 정말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 살아났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필연적인 죽음을 거쳐야 ‘내가 살아났다.’ 가 필연적인 살아났다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죽으면 살겠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는 부활이 설명이 안 됩니다.
인간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아니고, 죽은 데서 살아나요. 죽은 데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살아있다고 느끼는 거예요. 이걸 직유법이라 합니다. 문자 그대로 보는 게 직유법이에요. 직유법을 조금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인간은 은유라고 했지요. 직유의 반대말이 은유에요. 그런데 구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직유적이에요. 인간들이 말씀에 대해서 직유적으로 해석해요. 다시 말해서 서류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남자하고 여자가 사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여자에게 하는 말이 ‘이 남자, 한결이 아버지다.’라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는 남자가 한결이라는 조카를 키우는 것으로 알고 안심하고 사귀고 있는데, 나이 많은 아줌마가 와서 ‘이 사람 아들 이름이 한결이다.’라고 하니까 여자가 깜짝 놀라서 남자를 쳐다보면서 ‘당신 거짓말했어?’라고 하고, 아주머니는 여자한테 서류에 그렇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류를 가져와서 보니까 한결이 아빠가 맞는 거예요. 여자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남자가 나를 속였구나.’그런데 남자는 태연스럽게 ‘그래, 맞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 서류가 무슨 서류냐 하면, 강아지를 동물병원에 입원시키는데 보통은 동물의 보호자라고 칭하는데, 그 동물병원에서는 친근하게 한다고 이 동물의 아버지 이름을 기재해달라고 서류에 적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개 이름이 한결이고, 한결이 아버지 란에 그 남자 이름이 적혀있었던 거예요.
이게 뭐냐, 직유법이에요. 인간은 서류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성경도 직유적으로 믿는 겁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아합 왕도 그렇게 알았고, 들러리 갔던 여호사밧도 그렇게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직유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죽인다고 알아먹고, 아합 왕이 변장해가지고 살짝 비틀어본 거예요.
변장해서 비틀어서 ‘내가 왜 죽어? 지금 아람왕은 이스라엘 왕복 입은 자를 필연적으로 노릴 거니까, 내가 그것을 틀어서 왕복을 사돈인 여호사밧에게 주고 나는 빠지겠다.’는 거예요. 아까 그 드라마 제목은 ‘스프링 피버’ 인데요. 피버는 열기라는 뜻이니까, 봄 기운, 봄 열기, 봄의 기운이 올라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건 알 필요 없습니다.
그 필연을 아합 왕은 자기가 하나님의 서류에 있는, 직유죠, ‘나는 죽는다는 것, 죽고 난 뒤에 개가 핥는다는 것’ 개가 핥는 것은 죽고 난 뒤의 문제니까 안 죽으면 되는 거거든요. 안 죽는 방법은 바로 변장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변장하다가 먼저 누굴 만나냐? 사돈인 여호사밧을 먼저 만날 때에 여호사밧이 ‘나 아니요!’라고 고함지르니까 그 다음에 아닌 걸 알고, 진짜 왕인 아합 왕을 찾으러 가는데 보통 복장을 한 아합 왕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여기 32절에 보면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했거든요. 필연이라 했는데 필연의 반대는 우연입니다. 34절에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라고 했어요. 우연히 그냥 쐈는데 화살이 찾아가요. 열 추적 화살인지 모르지만, 찾아가서 맞은 상대가 누구냐? 아합 왕입니다. 죽어요, 죽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지금 어디가 사달 났느냐, 인간은 뭐가 문제냐 하면요, 아합 왕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게 비유입니다. 우연한 일이에요, 우연한 일. 우연히 죽었다 했잖아요? 그런데 여호사밧은 우연히 살았어요. 우연히 살았다고요.
신약에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 자는 부활을 받는데, 이 부활 받아서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야무지게 노려서 획득한 직유적으로 성경이라는 서류에 있는 대로 그대로 믿어서 부활 되는 게 아니고, 우연히 부활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죽음을 필연으로 본 자가 없고, ‘예수 당신은 우연히 우리한테 잘못 걸렸어.’ 이런 식으로요.
예수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스케쥴대로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의 예언대로,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이야기했고, 미가야가 이야기한 예언대로 되는데, 그걸 알아먹은 유대인들이 없어요. 왜냐 하면, 구약성경을 서류대로 봐버리니까요. 서류대로, 직유, 직접 자기가 안다는 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들, 우리들 손에 죽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열두 제자 가운데나, 또는 유대인 가운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성전을 46년 동안 짓고 있는 그래도 준공이 안 된 성전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냥 서류대로 해 볼게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요2:19)” 자, 이 이야기를 우리가 요한복음 2장을 모른다고 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 앞에 예수님이 직접 이야기 했다면 여러분들의 해석을 내놓아보세요.
46년이란 시간동안 지었는데, 그 지은 성전을 헐고 그 다음에 다시 시간 들어갑니다.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을 때, 그걸 대비해보세요. 그러면 46년 동안 지은 성전보다 사흘이라는 초스피드로 이 성전 그대로 짓겠다는 식으로 모든 인간은 이해할 겁니다, 모든 인간은. 그러나 주님의 이해는 바로 그렇게 이해하는 우리 자체가 우연적 존재, 절대로 직역적으로 해석해낼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 우연이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귀하게 주어져야 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용을 쓰면서 사는 것을 배제합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와 가벼움으로 옵니까? 아합이 죽는 것이 우연히 쏜 화살에 죽는다면, 우리가 죽는 것도 어떻습니까? 우리는 안 죽으려고 용 써도 소용없는 우연적인 거예요.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자기 죽음을 미리 사전에 알겠습니까? 아침에 출근해서 고속도로 순찰 보며 근무하고 있는데, 저 앞에 사고가 나서 수습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졸음운전하면서 크루즈 기능 켜고 온 차가 앞의 두 사람을 그냥 치어버렸습니다. 크루즈 기능만 믿었죠. 알아서 속도 조절할 줄 알고요.
그렇게 해서 순찰하다 죽은 경찰관은 자기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모르지요. 그래서 인간은 우연적 존재예요, 우연적 존재입니다. 죽을 때만 우연이 아니고, 그 동안 살아왔던 모든 행적과 학교 다닌 것, 결혼 한 것, 애 낳은 것 전부 다, 우연, 우연, 우연, 우연, 우연의 중첩과 연속이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느냐 하면요, 우리가 십자가를 아는 것도 우연이고, 십자가를 앎으로써,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에 우리가 우연히 접하게 된 거고, 그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서 우리는 우연히 부활되어서 우연히 천국 백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응어리진 고민거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겠는데, 과연 부활될지, 안 될지 그게 늘 찜찜한 거예요. 그걸 목사님이나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없어요. 목사한테 물으면 ‘아이고, 집사님 신앙생활이 지금 몇 년째입니까? 아직도 그런 믿음이 없습니까?’ 하면서 된통 꾸중만 들을테니까 그런 질문을 자기가 왜 합니까? 그런 말을 못 하죠. ‘믿습니까?’ 하면 ‘네, 믿습니다.’하죠.
매주 사도신경 외우면서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하지만, 이건 직유로 서류에 있는, ‘저 남자는 한결이 아버지’라는 서류에 있는 것, 기껏 그거죠. 예언에 그렇게 되어 있더라는. 아합 왕이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도 시건방지게 구는 것처럼요. 그게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와 닿지를.
그럴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요, 우리 자신이 현재 살아있고,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언에 입각해서 우리를 우연적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합이 말씀 듣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기 죽음을 막으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아합의 용 쓰는 것을 누가 이겼습니까? 우연히 날아온 화살 하나가 이긴 거예요, 우연히 날아온 화살 하나가.
그런데 이것은 아합 뿐만이 아니고 아합과 여호사밧 두 사람이 아합 죽이는 예언 전쟁에 같이 참여했는데, 아합은 그 당시 북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 남쪽 왕을 대표하는 것은 여호사밧이에요. 북쪽 왕은 우연히 죽었던 그 현장에서 남쪽 왕은 우연히 살았습니다. 남쪽 왕 여호사밧은 왜 살았습니까?
그게 바로 열왕기상 11장 36절(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열왕기상 15장 4절(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에 나오는 거, 다윗의 등불이 남쪽 왕을 살린 겁니다.
다윗의 등불, 하나님의 언약의 등불이죠. 다윗 언약,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이 이미 필연이에요. 주님에게는 필연이고, 인간에게는 우연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주님의 필연을 잘 못 해석해서 주님의 필연을 우연한 존재인 내가 그걸 나도 필연적으로 해석할 줄 안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중요하니까 잘 들으세요.
아합 왕은 하늘나라에서 미가야를 통해서 예언이 떨어졌을 때 이미 죽은 자예요. 이미 죽은 자예요. 예언의 입장에서는 이미 죽은 자를 지상의 사건을 통해서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네가 죽는다.’는 그 말에 대해서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인간의 본성이 오기가 있잖아요, 아까 말했듯이 오기가 있다고요.
“말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뭐 피할 재주 없는 줄 아냐?” 이렇게 나왔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세하고, 거기에 우연은 필연에 의해서 종속되거든요. 그러니까 아합 왕은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과연 아합 왕은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똑같은 문제를 내 드리겠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게 바로 이번 수련회 때 나왔습니다. 고린도후서를 했기 때문에. 자,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떤 태도입니까? “웃기고 있네!” 이러는 겁니다. 이건 나쁜 사람만 그렇다는 게 아니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은유인 주제에 자기가 직유로써 해석하면 그게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모든 인간인 거예요. 이 점을 더 분명히 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걸 미가야 예언, 엘리야의 예언이고, 우리를 아합 왕이라고 치고, 지금 이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는 죽었고, 네가 사는 것도 다른 분 때문에 사는 것이다. 네가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고, 다른 분 때문에 사는 것은 두 번째 아담, 예수님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를 그 당시에 아합에게 이야기 하고, 그 당시에 여호사밧에게 이야기 하고, 오늘날 지금 우리보고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안 받아들입니까? 이유는 뭐냐? 내 인생, 용을 써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인생을 내가 단도리하고, 내가 용을 써서,,감사고, 가벼운 것이고 다 귀찮고, 내 힘으로 내 인생을 가꾸어보고 싶은 욕구, 욕망 때문에. 그래서 ‘내 인생은 이렇게 내가 노력해서 필연적으로 이런 업적을 낳았다.’ 이걸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긴장되게 살았는데, 내 인생 지키기 위해서. 그러면 그건 자기 나름대로 필연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우연은 어디 갔습니까? 우연을 찾아볼 데가 없지요. 오늘 설교제목은 ‘우연의 확장’이에요. 지금 말씀을 통해서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든 간에 그건 전부 다 우연, 우연, 우연, 우연, 우연이란 말입니다, 우연. 전부 다 우연이에요.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하는 것도 전부다 우연이고요. 어떻게 하든.
자, 아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사람은 내가 살아있으니까 믿기는 하겠는데, 과연 죽은 내가 진짜로 부활될까? 자,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죽은 내가 진짜로 부활된다면, 교회 차단기 내려가도 큰 문제 아니겠지요. 차단기 내려가서 오늘 예배 못 드릴 뻔했잖아요. 그러나 차단기 내려간 것도 우연이고, 집사님이 마침 건강하셔가지고, 고쳐서 예배드리게 되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내가 용을 쓴 거예요? 용을 썼겠죠. 뭐라고? ‘안되는데, 안되는데’ 라는 그 용씀. 그런데 그 순간 뭐냐? 주께서 이렇게 말씀을 다시 한번..., 예수님에게 부활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나머지는 ‘내가 괜히 용을 썼구나, 그래서 내 인생을 참 하루하루 찡그리면서 화를 내면서, 짜증내면서 하루를 지옥같이 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아까 그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아담 때문에 이미 우리가 죽은 거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부활이 기뻐지는 건 아니고,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된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된다는 그것, 그 문제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기쁨이 되느냐?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등불 이야기가 나옵니다. 등불. 빨리 말씀드릴게요.
다윗의 등불 이야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 때에 속죄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곳입니다. 죄를 사하는 곳, 속죄소 더하기 향 더하기 등불 더하기 진설병, 이게 한 세트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성했던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 30장 6,7절에 나와요.(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찌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서 죄를 사하지 아니하면 영원히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이 천국 가는 과정을 한 세트로 보여주는데, 그게 성소와 지성소예요. 지성소에서 죄 사함을 해주는 피뿌림을 받는 그 상자, 언약궤가 있고, 그 다음에 언약궤 커튼 그 앞에 향이 피워져있고, 향의 양쪽 편에 북쪽에는 열두 개의 떡이 여섯 개씩 테이블 위에 있어요. 일주일마다 교체돼요. 그 맞은편에는 등불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다윗의 등불이 뭐냐, 무엇을 보호하기 위함이냐? 바로 진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윗에게 언약, 계약, 진짜 계약을 준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등불을 이스라엘에게 줬는데,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졌어요. 하나는 북이스라엘, 하나는 남쪽 이스라엘입니다.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졌는데, 이 인간들, 여호사밧과 아합 왕은 하나님의 계약이고 뭐고 무시하고, 지들끼리 죽고 못 사는 사돈관계가 된 거예요. 그렇게 사돈 관계가 되어가지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겼는데 다윗의 등불에서 배제되어 있는, 저주받는 북쪽 아합 왕이 전쟁을 할 때, 여호사밧도 같이 가기를 요청받고 그 요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대하18장) “사돈 같이 갈래? 같이 가야 우리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거 증명되거든” “같이 가지 뭐. 옛날에 같은 이스라엘이었으니까.” 그렇게 따라간 거예요.
같이 갔는데 갔을 때, 다윗의 등불인 한 쪽은 살려주고, 한 쪽은 죽이고, 다시 말해서 한 쪽은 지옥 보내고, 한 쪽은 부활의 나라, 천국 보내는 그 은유적 기능이 이스라엘 속 두 왕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어요. 같이 갔는데, 죽을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리면서 죽을 자는 왜, 무엇이 빠져서 죽었느냐, 살 자는 무엇 때문에 살았느냐를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의미를 확장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렇게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서 보여주신 거예요.
그러면, 남북 이스라엘 갈라져서 북쪽은 망하고 남쪽은 산다는 것이 어디까지 가는가? 둘 다 망해요. 둘 다 망합니다. 다윗의 등불이, 다시 말해서, 조금 어렵지만 참아주세요. 진설병 있는 이스라엘이 이게 서류거든요, 서류.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오해했느냐 하면, 진설병이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직유적으로. 은유인줄 모르고, 모형인줄 모르고.
은유보다 모형이라고 하는 게 더 쉽지요. 모형인줄 모르고 이게 진짜 우리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이 지켜주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윗의 등불도 마찬가지고요, 다윗언약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모형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내 것이라 여겼던 그 작자들이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 현장에서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 사탄의 앞잡이로 등장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사탄의 앞잡이 중에 가장 근접한 앞잡이가 바로 가롯유다예요. 가롯유다는 사탄이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어요.(요6: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따라서 십자가 사건에서 십자가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십자가 사건이 서서히 fever, 열기가 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이야기하셨어요.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네 생각에는 네가 안 태어났으면, 그걸 고수한다면 참 좋을 뻔 했는데, 네 생각이 아니고 이것조차도 기록된대로, 예언대로 진행되거든요.
마태복음 27장 7절에서 9절, 가롯유다가 죽고 난 뒤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가롯유다가 죽은 그 밭이 피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대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 직분을 강제로 빼앗긴다는 것이 사도행전 1장 20절에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어요.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그러니까 아합 왕도 예언대로 되듯이 ’아합 왕은 예언대로 개들이 핥았구나.‘ 여기에 멈추지 말고, 여호사밧이 먼저 아람 군대가 여호사밧에게 찾아왔지만 화살도 맞지 않고, 칼도 맞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았다는 말은 이것도 뭐 때문에? 예언대로 된 거예요, 예언대로. 자기가 요령을 부려서 산 게 아니고. 한 쪽이 지옥이 지옥 되기 위해서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 갈 사람은 천국을 가야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예언대로예요.
그걸 이 지상에서는 뭐라고 한다고요? 우연. 모든 것이 우연대로 되는 겁니다. 내 잘남의 필연을 포기하고, 내가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우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예언된 말씀에 입각해서 나를 다시 보는 거예요. 골로세서 2장 12절,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골로새서 2장 12절 이 말씀 들으면서 가슴이 벌렁벌렁해야돼요. 너무 좋아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별로 벌렁벌렁 안하죠? 그렇다면 로마서 10장 9절, 제 말은 진짜로, 진짜로 부활된다 이 말입니다.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네가 부활되리라, 네가 반드시 천국 가고, 영생 얻는다.‘ 이런 겁니다.
별로 벌렁벌렁 안하죠? 그러면, 끝으로 로마서 14장 9절,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영생 얻는다는 말씀에서 ’주‘가 무엇인지 보충 설명한 것이 로마서 14장 9절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내가 주라고 인정하는 그 분은 지옥 갈 자를 지옥 가게 하시고, 천국 갈 자를 반드시 천국 가게 하시기 위해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실제로 죽고, 그리고 실제로 살아남을, 살아나야 될 자의 첫 째 열매가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20절(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 분이 첫 번째 열매가 됨으로서 그 다음에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예수님이 첫 번째 부활이 되시고, 그 다음에 주를 믿는 자들이 잡아당기니까 그 뒤에 방어 나오고, 그 다음에 오징어가 낚시대에 걸려 나오고, 주 안의 택한 백성은 다 걸려서 주님 가신 나라에 합류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은 예언이, 말씀대로 그대로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영생이 보장되었기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용을 쓰거나 긴장하거나 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우연의 선물인 것을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