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앞지르는 능력

아빠와 함께 2026. 2. 12. 09:25

앞지르는 능력 

2026년 2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2:1-3

2: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2: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선지자는 땅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서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약속’을 드러내는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약속’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되면 이 땅에서 젖과 꿀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3년 6개월 동안 이어진 가뭄이었습니다. 도저히 못 살겠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생존과 관련되는 사항에 대해서 할수 있는 대로 모든 시도를 다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우상 섬기는데 열중합니다.

그 이유는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바알 신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 북이스라엘은 담합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엘리야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능력이란 바로 약속의 땅의 원리를 들추어내기 위해 그 위를 덮고 있는 비-언약 사상을 심판을 가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치고 하늘나라로 소환되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이 소식은 선지학교가 있는 길갈로부터 선지 생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첫째 내용은, 엘리야 선지자를 하늘로 소환한다는 것이다. 둘째, 오직 엘리야만 소환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엘리사가 끝까지 엘리야의 능력을 전수받는다는 겁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 전수받은 사실은 엘리야에 떨어진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하 19:17) 여기에 대한 엘리사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버리는 일부터 했습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왕상 19:19-21)

문제는 어떻게 스승에게 준 하나님의 능력을 전수받느냐 하는 겁니다. 이 방식에 동원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지역을 이동토록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겁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다녀간 장소는 요단강은 건너지도 못했다면 이스라엘이 아예 발을 딛을 수 없는 곳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가야 될 이유는 벧엘 지명에 지닌 언약 성취를 위함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언약적 연결과 관련된 정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1-13)

이곳에 벧엘입니다. 엘리야가 신학교를 세워 양성하던 그 길갈에서 벧엘로 내려가는 식으로 승천해야 될 장소로 이동하게 하십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창 28:17) 그런데 북이스라엘 왕인 여로보암은 이곳에 우상을 만들어버립니다.(왕상 12:29)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이름없는 한 선지자가 올라갔지만 결국 그 선지자는 사자에 물려 죽게 됩니다.(왕상 13:24)

바로 이 선지자와 같은 원칙으로 외친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이제 엘리야 선지자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벧엘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또 다른 장소는 여리고입니다. 요단을 건너온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인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에서 누구를 먼저 만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3-15)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의 앞길을 가로 막고 나타났습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상댈고 전쟁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군대가 인간을 상대로 전쟁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두시는 겁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보았던 사다리 위를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여호수아는 발에서 신을 벗습니다. 이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났을 때 지시 받은 것과 같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는 모두 하나님의 일의 충실한 일꾼입니다. 시킨대로, 그리고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서 이 능력을 전수받고자 했습니다.

엘리사나 엘리야나 모두 사람을 상대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계시의 말씀을 최종 완료하실 분이 따로 오실 그때의 능력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앞지르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는 겁니다. 이 능력은 ‘약속의 땅’에서 피어날 ‘약속’은 순전히 하나님에 의해 단독적으로 성취되는 식으로 주어지는 성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니 천사가 와서 제자들을 도리어 책망합니다. 주님께서 사라지기는 하셨지만 떠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오순절 성령이 오시므로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떠나지 않고 홀로 다 이루신 사랑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다 이루신 사랑’이 바로 능력이고 이 능력이 있는 성도들이 오늘날의 선지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으로 해낼 수 없는 사랑을 미리 받았으니 더는 소원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열왕기하 2장 1-3절(앞지르는 능력) 2602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보통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을 대화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뭐가 인간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내용이냐? 첫 번째, 엘리야를 그냥 위로 올라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사람을 그냥 산 채로, 위로 올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는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계시죠? 기중기로 사람을 당겨 올리듯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하늘로 보낸다는 것.

두 번째, 엘리야을 그렇게 하늘로 끌어당긴다는 거예요. ‘엘리야만’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당기는 데 거기에 합류될 수 있는 제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 다른 제자들은 이미 포기를 했는데 엘리사는 기어이 엘리야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왜 자꾸 나한테 붙어 있느냐?”라고 이야기하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내 남은 목숨 바쳐서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과연 엘리사의 기대는 성취되었는가? 성취되었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만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엘리사는 못 올라갔는데 어떻게 엘리사가 엘리야와 함께 있음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능력을 곱빼기로 받았거든요. 빼먹을 것을 다 빼먹은 거예요.

엘리야를 하늘로 보내버리고, 하나님과 엘리야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그 능력, 그 능력의 곱빼기 능력을 엘리사가 받았다는 말은, “선생님 먼저 가시고 그다음 차례로 제가 갑니다”라는 그 프로젝트에 자기가 들어가는 데 성공한 거예요.

1번, 2번, 3번인데 다 잊어버렸죠? 다시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나님께로 호출한다, 소환한다. 두 번째는, 엘리야 외에는 거기 같이 붙어서 올라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1번이 참 신기하죠. ‘어떻게 사람을 하늘로 그냥 가게 하느냐?’ 참 신기해요.

그런데 2번은 안 신기해요. 왜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불러올리는 데 대해서 누구도 반대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따로 엘리야만 올리고 “그 나머지 너희들은 여기 땅에 남아 있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옳은 선택이고 당연한 걸로 여깁니다. 하등 이상한 게 없어요.

그런데 3번이 이상해요. 분명히 2번에서 엘리야만 올라가고 그 외에는 어떤 누구도 같이 합류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데,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그 능력을 엘리사가 인수인계받았다는 사실이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는 사람하고 안 놀아요. 사람하고는 상대 안 합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는요, 세상이 우스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이 더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을 상대하는 사람은 세상이 우습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는 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내 목숨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엘리사가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뻔했다는 것. 사실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죽을 뻔했다’ 정도가 아니고 ‘이미 죽었다’가 되는 겁니다.

이미 죽었는데 하나님이 전하는 그 계시, 말씀이 살아 있어야 되기에 그 말씀의 전달자 엘리야를 꾸역꾸역 그동안 계속 살려왔다는 사실을 엘리사가 알았습니다. 그점을 엘리사가 알았고, 또 다른 제자들도 알았는데 그 능력, 바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준 그 능력을 내가 인수인계받아야 하겠다’라는 것이 엘리사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그의 목숨을 포기해야 되지 않겠느냐?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나고 난 뒤에 포기한 게 자기 목숨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가족을 포기했어요. 열왕기상 19장 19절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는데 그게 엘리야의 본 뜻이 아닙니다. 엘리야는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9)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고 엘리야는 그 지시를 따랐습니다.

엘리사는 농사짓던 사람인데 엘리야의 지시에 호응합니다.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야가 열두 겨리의 소를 앞세워 밭을 갈고 있었어요. 소 24마리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던 겁니다. 거부예요. 농사 크게 짓는 집안입니다. 엘리사가 그 소들을 버려버리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그 소 누가 키우죠? 엘리사는 지금 그런 것 생각 안 합니다. 이미 가족을 버렸어요.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출생지를 포기한 겁니다. 엘리사는 출생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의 시작점을 엘리야부터 새로 시작했어요. 엘리야의 자리가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 자리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엘리사가 합류했습니다. 이걸 보면서 ‘야, 엘리사 대단하다.’ 제발 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오늘날 가족 버리고 말씀 자리부터 새로 시작한 자만이 이게 성도가 돼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이거죠. 하나님과 엘리아의 사이에 있던 그 능력이 배나 빼돌려질 수 있는가? 어떻게 그걸 빼돌렸는가? 엘리야만 가져야 될 그 능력, 아무리 후계자지만 후계자라고 해서 그 능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식으로 해서 그 능력이 엘리사에게 전수가 가능했던가, 하는 겁니다.

그것이 2장에 보게 되면 나옵니다. 첫 번째, ‘길갈’ 나와요. 열왕기하 2장 1절에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두 번째, 어디로 가느냐? ‘벧엘’로 가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왕하 2:2)

세 번째, 또 어디서 가느냐? 여리고로 갑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왕하 2:4).

네 번째, 여리고로 갔다가 다시 어디로 가느냐? 요단강 건너갑니다.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왕하 2:6).

요단강 건너가서 드디어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요.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벧엘→여리고→요단강, 이렇게 움직입니다. 엘리야가 길갈에 있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뽑아 올리는데 그 장소에 대해서도 엘리야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야 돼요. 그래서 이동해야 해요.

어느 부잣집 자식을 유괴해서 “경찰에 알리지 말라. 2억 현금으로 챙겨서 ○○로 나와라!” 해놓고 그 장소에 가니까 “장소 옮긴다. ○○로 나와라.” 물론 별로 좋지 않은 예지만 유괴범이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서 장소를 계속 옮기듯이 주님께서 그 엘리야만을 승천시키겠다는 거예요.

따라서 1번, 하나님은 엘리야만을 승천시킨다. 2번, 누구도 엘리야를 따라오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3번, 하나님의 뜻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돼야 한다.’ 그 세 번째 원칙을 하나님께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엘리야를 길갈에서 벧엘로, 다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계속 이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그 승천의 장소를 이동시킨 거예요.

각 지역마다 선지 생도들이 있었어요. 길갈에도, 벧엘에도, 여리고에도 다 있었습니다. 그 선지 생도들이 누구를 말리느냐 하면, 엘리사를 자꾸 말리는 거예요. “가지 마!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선생님을 하늘나라로 부르신대. 너는 따라가도 소용없어.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도록 그냥 좀 지켜봐 줘. 그분들끼리 하도록 하고 너는 가지 마.”

그런데 엘리사가 “나도 안다, 나도 안다” 하면서 계속 따라 다녀요. 선지 생도들이 “너 아니잖아. 너는 빠져! 네가 낄 자리가 아닌데 거기 왜 끼어 있어? 너는 아니잖아.” “아니야. 나는 목숨 내놓고 선생님과 합류하겠어.” 그 선지 생도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런다고 네가 승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엘리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내 승천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엘리야의 관계에서 오는 그 능력, 하나님 말씀을 말씀대로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내가 인수인계 못 받으면 나는 진짜 엘리아의 전수자, 후계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몇 가지 어려운 게 있어요. 엘리야의 후계자가 엘리사 맞죠? 그러면 엘리사는 엘리야 없이 단독으로 행할 수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모세의 후계자가 여호수아예요. 선배인 모세가 돌아가시고 이제 여호수아가 혼자 남았잖아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자기 힘, 자기 능력으로, 자기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여전히 돌아가신, 그래서 하나님께 가 계신 모세 언약, 그 언약을 받들어서, 그 언약의 한계 안에서만 움직이게 돼 있어요. 쉽게 말해서 ‘모세에게 주신 그 언약을 받들도록 나를 통해서 심부름시킨다. 나는 단지 그 종이다.’ 이런 관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보내면 그 능력은 그만이고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따로 가지고 내 나름대로 내 이름으로 한다’가 안 되고요, ‘엘리야에게 주신 그 능력이 이어져서 그 능력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이어져 갈 뿐 나로부터 새로 출발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엘리야에서 엘리야가 나오는 거예요. 엘리야에서 엘리야가 나온다.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엘리야가 떠나도 엘리야의 능력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도록 나를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겁니다. 자기 고유적인 것은 없지요. 그 예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그때 열두 제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고요. 그렇게 보고 있을 때 거기에 책망이 훅 들어오거든요.

누가 책망하느냐? 천사가 나타나서는 “뭐 구경 났나?”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뭐 멋있는 구경했어? 주님이 사라졌다고? 주님이 안 사라졌어!” 천사가 지금 나무라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던가? ‘내가 가게 되면 너희에게 내 영, 성령을 보내리니 성령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너희들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그냥 이렇게 떠나시면 어떡해요? 우리를 그냥 놔두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걱정들 하는데 주님께서 가신 대로 다시 오신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 지금 너희는 그 틈 사이에서 너희 할 일이 있다.” 하지요.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0-11).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날 성령이 옴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것은 맞는데 떠나지는 않았죠. 예수님이 제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신 것은 맞는데 주님이 제자들을 떠난 적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제자의 일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의 연속성이고, 그게 바로 성령의 특징이죠.

열왕기하 2장에서는 그게 바로 능력이에요. “선생님의 능력, 엘리야의 능력을 제가 곱빼기나 받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

곱빼기 알죠? 짜장 곱빼기, 짬뽕 곱빼기. ‘두 배’라는 것인가요? 그게 아니고 이 곱빼기의 능력은 어떤 능력이냐 하면, 미래를 미리 당겨서 앞지르는 능력입니다. 선생님 엘리야가 주는 말씀, 그 원칙을 그 시대가 아니라 앞질러서 맛보는 능력을 엘리사가 갖게 됩니다.

더 설명한다면, 엘리야가 했던 그 기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예언의 능력을 선생님보다 더 앞지르게 되면 어느 쪽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 쪽이에요. 앞질러서 신약 쪽으로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능력을 엘리사가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뭐냐? 엘리야는 구름 타고 하늘로 승천했잖아요. 승천했을 때 그 능력보다 앞질러 가버리면 뭐가 되느냐?

우리 선생님 엘리야가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 엘리야의 능력의 궁극적인, 최종적으로 다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그 능력자가 오시는데 그 능력자가 엘리야로 오시는 겁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게 누구 이야기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성취하는데, 그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킬 어떤 경우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엘리야로 오셔서, 또는 말라기 4장 5절의 말씀을 싣고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말씀을 다 이루었다면 이것은 뭐냐?

아버지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가고, 그리고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이키는 이러한 결말, 이러한 현상이 필히 이 땅에서 일어나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 능력을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좀 더 맛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엘리사의 기적이 엘리야의 기적의 곱빼기, 두 배인 거예요. 짬뽕 곱빼기가 양이 많아요. 그 양이 많은데 질적으로 계산한다면 예수님이 오는 그 시대에 더 가까이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어떤 능력을 말하느냐? 앞지른다는데, 앞질러서 얻게 되는 그 내용은 어떤 것이냐? 엘리야가 자기를 떠나지 않고 동행하는 그 엘리사와 더불어 이동했던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의 그 지역을 순회하는데, 그 지역, 그 네 지명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지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장서서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지명들이고, 그리고 그 지명에 합당한 완성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언약궤가 요단강을 건너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장소가 길갈, 여리고, 그리고 벧엘이에요.

진격하는 거예요. 광야 지나서, 요단강 건너서 진격해서 쳐들어갔다는 말이죠. 6.25때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에 의해서 드디어 서울은 탈환돼요. 그래서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합니다. 그때는 휴전선은 아직 없고 38선이죠. 그 38선을 넘어서 개성, 그다음에 평양, 그래서 어디까지 가느냐? 북으로 진격한 미군이 압록강 물을 떴어요.

개성은 여리고, 그다음에 평양은 벧엘, 그리고 압록강쯤에 실로라는 지명이 있어요. 실로는 정복했던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길갈’이라는 장소가 두 군데예요. 여리고성 3km 내에 길갈이 있었요. 돌 열둘을 세워서 기념탑 세웠다는 곳(수 4:20)이지요.

거기 말고 또 길갈이 따로 있어요. 길갈은 엘리야가 신학교 세워서 선지자를 양성한 곳이고요, 실로는 뭐냐? 더 북쪽에 있는 실로는 옛날 사울 왕 때부터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어요. 이스라엘의 중심지, 언약궤가 있던 곳입니다. 광야 지나서 언약궤가 어디에 도착했느냐? 실로에 도착이 되는 겁니다. 사울 왕이 거기서 제사하고 이랬어요.

6.25때 이야기 아니었으면 이거 제대로 설명 못 할 뻔했네요.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니까 다시 후퇴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너희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적도 없다는 식으로 거꾸로 다시 내려오는 거예요. 요단강 건너 쪽으로 와버린 겁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요단강 쪽으로 왔다는 그 말은, ‘현재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가 이 약속의 땅에 거주할 약속의 민족의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엘리야의 능력은 뭐냐? 심판이죠. 약속도 모르면서, 언약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산다? “너희는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어. 새로 시작해야 해.”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요. 처음에 그 요단강 건너올 때부터 있었던 그 능력을 새롭게 해야 해요. 선지 학교가 있던 북쪽의 길갈, 그 남쪽에 벧엘이 있어요. 그 벧엘이 뭐 하는 곳이냐? 야곱이 가족을 떠나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가 벧엘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2절, 하나님의 사다리가 야곱의 꿈에 나타났어요.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이제 너는 같은 인간하고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야곱 너는 위, 곧 하늘을 상대해야 한다’라고 야곱의 정체성을 하늘에서 지목된 사람으로 굳어지게 만들었어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를 만나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바뀐 이름이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의 사다리를 통해서 받았던 그 언약으로 인해서 굳어졌던 자기의 정체성 ‘야곱아, 너는 내 언약을 이루어야 해’라는 그 야곱의 본디 기능과 사명, 그 사명을 그대로 국가 단위로 이어받아야 할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벧엘의 정신이 누락돼 있어요. 여기서 벧엘이 뭐냐? 창세기 28장 15-17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늘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늘과 땅이 닫혀 있는데 이게 연결되었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거예요. 구멍이 뚫려서 사다리가 왔고, 그 사다리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고, 그 천사가 도착하는 지점이 바로 야곱 본인인 거예요.

그게 벧엘이에요. 야곱이 잠을 잘 때 꿈에서 봤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 하늘과 내가 내통하는 그 계시의 내용을 받은 장소가 벧엘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떠한 민족이어야 되는가?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이 돼야 하고, 주고받음이 성립돼야 할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열왕기상 12장에서 그 벧엘이 북이스라엘 영토가 되면서 그 벧엘에서 뭘 했는가? 여로보암 왕이 거기다가 우상을, 황소 송아지를 떡~ 하니 만들어 놓은 거예요. 하나님의 집에다가 황소를, 그 부처 불상, 갓바위를 거기다가 세운 거랑 똑같다, 이 말이에요.

우리 교회 예배당 강대상 뒤에다 금칠한 부처상을 두었다고 해 봅시다. 기분 어떻겠습니까? 내가 교회 왔는지 절에 왔는지, 십자가가 있을 자리에 부처가 있다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보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조했어요. ‘뭐, 나라가 중요하지, 그까짓 그 종교가 여호와 종교가 뭐가 중요한데?’

전라도 말로 하면 “뭣이 중헌디! 내 인생에 있어서 뭣이 중헌디! 돈이 중요하고 나라가 중요하지. 십자가가 있든 갓바위가 있든 뭐가 어떠냐? 그거 다 취미잖아. 그게 뭐가 중요한데?” 그렇게 북이스라엘 전체가 동조를 했어요, 나라 전체가. 그러니까 열왕기상 13장에서, 벧엘의 제단에 어떤 이름 모를 선지자가 징조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3:2).

여로보암이 거기서 제사를 지내니까, “당신 죽는다. 당신, 이 벧엘의 단이 어떤 단인데 거기다가 우상을 섬기느냐? 너는 이제 죽었다.” 그렇게 예언을 하니까, 여로보암 왕이 당연히 화를 내겠죠. 선지자는 다른 길로 빠졌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그 선지자에게 이미 경고했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왕상 13:9-10).

이것은 왜냐? 이미 하나님의 땅이 ‘약속의 땅’이 안 된 상태에서는 선지자의 기능은 딱 하나로 고정됩니다. 심판입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복권인데, 동전으로 긁어내는 복권 있죠. 대부분은 ‘꽝’이지만 어떤 때는 500원짜리도 될 수 있잖아요. 긁어야 당첨금이 나오는 복권에서 그 긁는 역할, 그게 심판 역할이거든요.

그걸 누가 했느냐? 이름 모를 선지자가 했고, 엘리야가 가뭄을 통해서 했어요. 원래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게 돼 있어요. 젖과 꿀이 흐르고 단비가 오게 되어 있는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습니다. “이게 약속의 땅인지 광야인지 분명히 해라. 이 약속의 땅이 이렇게 비 오지 않는 광야처럼 된 것이 다 누구 탓이냐?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될 ‘약속의 자리’에서 너희가 우상을 섬겼다. 거기에 다른 신이 있었고, 너희는 즐겨 그것에 동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주하셨다”라는 그 역할을 엘리야가 했습니다.

열왕기상 13장의 그 이름 모를 선지자는 결국 죽었어요. 어떤 늙은 선지자가 “나도 계시받는 선지자다” 이렇게 속여서 나눠준 그 떡 먹다가 죽어버렸는데 엘리야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야도 가뭄을 전하면서 “이것은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 소리 했다고 그 아합왕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지명수배죠. 이세벨과 아합, 부부는 용감했다. 부부가 합세해서 “엘리야 잡아들여라! 어디서 국가 권력을 모독해?” 선지자 잡는 것, 사람 하나 잡는 게 뭐 큰 문제겠습니까? 수배령이 내려져서 엘리야가 쫓겨 다녔어요. 엘리야는 쫓겨 다니다가 그만 스스로 죽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적들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가 알아서 자결하는 게 낫겠다’(왕상 19:4) 하다가 천사한테 걸려서, “빨리 마지막 임무를 완수해라” 그 소리 듣고 말씀대로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바알의 우상에 의해서 덮여버린 이 비-약속의 땅에서, 언약이 사라진 땅에서,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이 선지자는 이미 어떤 목숨이다?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엘리사가 아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그 벧엘을 거쳐서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적도 없다. 들어온 적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신다’는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다시 요단강 건너가기 그 이전으로 끌고 오는 거예요. 엘리야를. 이 약속의 땅을 어디서부터 새로 봐야 되는지, 그 하나님의 능력,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왔잖아요. 언약궤 앞장세워서, 홍수가 난 그걸 강제로 막아서 건너왔잖아요.

그러면 그 요단강 건너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요단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너왔지만 약속의 땅에서 전쟁한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아니에요. 그게 바로 벧엘 다음의 지명 여리고입니다.

여호수아 5장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 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깜짝 놀랐죠.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여호수아는 아직도 칼 빼어 들고 막아서는 자가 하나님이 보낸 천군의 천사장인 줄 몰랐어요.

그저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우리의 적이냐, 아니면 우리 편이냐?” 여호수아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 힘으로 약속의 땅에서 전쟁해서 승리를 낚아 보려고 그렇게 시도한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여호수아는 모세의 연장이라고요.

모세가 애굽에서 피신했다가 다시 애굽으로 들어갈 때, 그 모리아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누구를 만나죠.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 벗으라, 신발을 벗어라.” 신발 벗으라는 말은 ‘너는 이제는 종이다.’ 너는 종인 거예요. ‘내 신발 내가 신고 다닌다.’ “안 돼!”

신발이 그의 앞길, 모든 앞길의 움직임을 밑에서 받쳐준다면 그 신발을 벗음으로써 주님의 말씀으로 모세의 앞길을 친히 이끌게 되는 것처럼, 여호수아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하니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니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네 발에 신을 벗어라.” 하지요.

그 장소가 여리고예요. 무슨 뜻이냐?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경솔해서 ‘이제 요단강 건너왔으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전진하면 승리를 주신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도 안 돼요.

앞에 남아 있는 모든 약속의 땅, 벧엘이든 길갈이든 앞으로 있는 접수해야 할 모든 약속의 땅은 누가 전쟁하느냐 하면, 군대 장관, 역시 하늘에 속한 천사의 부대가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고, 이스라엘은 거기서 떨어지는 전리품이나 주워가면서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소산물을 먹어야 해요. 이게 약속이고, 그게 언약의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나오죠. 나다나엘은 구원받고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예수님이 먼저 나다나엘을 알아요. 그러면 나다나엘이 구원받는 방법은 뭐냐? 본인에게서는 더 이상 나올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인자 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을 해놓게 되면 그게 약속의 완성이거든요.

약속의 완성이 그다음에 누구한테 오느냐? 나다나엘에게, 나다나엘을 미리 아니까, 미리 아는 자에게 주께서 친히 홀로 이루신 성과를 주게 되면 그 사람 나다나엘은 천국,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능력이에요. 앞지르는 능력입니다.

앞지르는 능력을 더 말씀드릴까요? 요한복음 1장 15절입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스포츠 중계 재방송 보는 느낌이지요. 이미 경기 끝났어요. 이미 승리했습니다. 승리하고 난 뒤에 그 경기의 녹화분을 되돌려서 보는 거예요. 재방송이죠. 그러면 그 승리의 비결은, 승리케 한 모든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늘에서 주는 능력이죠. 하늘에서 주는 능력이에요.

그게 바로 요단강의 현장이었고, 무너지는 여리고성의 현장이었고, 벧엘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서 언약을 예언했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는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람, 약속이 침투하고 들어온 사람,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 성도입니다.

끝으로 이런 노래가 있어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노래인데 사랑을 품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그냥 주신 사랑이에요. 요한계시록 2장에서 사도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한 거 말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 바로 앞지르는 능력, 엘리사가 기대했던 그 능력, 이제는 주님이 이미 우리를 구원한 능력, 그 사랑 안에서 여러분들은 이미 구원받은 그것을 날마다 재방송으로 틀면서 주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주는 능력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는 능력이 있기에 더 이상 우리가 세상 사람하고 다투거나 경쟁하거나 비교하는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지 말고, 늘 주님을 상대하고 주님 오신 것에 고마워할 줄 아는 참된 이 시대의 선지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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