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찢기
2026년 2월 18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2:11-14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인간은 자기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죽고 난 뒤에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을 미리 걱정하게 마련입니다. 특히 ‘죽은 자를 살려주신’는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용할 마음을 갖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제대로 된 ‘죽음 이후’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 처신입니다. 목숨 끊어질 때는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자기 백성이 된 자들에게는 지상생활 속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능이 마감 여부가 곧 ‘세상과 하직’하는 순간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고 죽고 싶다고 죽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을 고상하게 유지할 생각을 갖고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염두에 둔 진정한 세상 하직이 아닙니다.
성도는 한순간도 ‘자기를 위한 삶’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엘리야를 데려가 세상은 이 세상과 대립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특히 엘리야를 데려가는 천사는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24의 말씀이 여전히 가동 중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엘리야는 놀랍게 그 막혀 있는 세계에 끌려올라 간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약속의 땅이 다가 아니었던 겁니다.
진정한 약속의 세계는 엘리야가 합류한 하늘나라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참으로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소중히 여기며 품어야 될 일은, 지상과 하늘 나라에 막으로 막혀 있으며,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전무하다는 겁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늘로부터 막혀 있는 이상, 이 지상의 모든 일은 다 부질없는 일의 연속이요 넘쳐남입니다. 막에 튕겨져 나온 처지에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출세하고 행복해봤자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엘리사는 현장에서 경험했습니다. 줄기차게 스승을 따라 다녔으면 하나님께서 이왕에 자신도 같이 불말과 불수레 태워줄만도 한데 냉정하게 스승만 하늘나라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과연 엘리사는 어떻게 하면 스승이 간 그 하늘나라에 합류될 수 있을까요? 엘리사가 발견한 것은 스승이 하늘나라 가면서 겉옷을 벗어놓고 갔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지속적으로 선지자 일을 시켰다는 증표요 형식입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벗었다는 것은, 곧 성도의 죽음이란 숨끊어지는 것으로 판정내릴 것이 아니라 업무가 종료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될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엘리사 본인을 스승과 함께 하늘로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게는 남은 선지자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속되어야 선지자 기능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영생과 영원한 저주가 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기능입니다. 엘리야의 승전이 다름 아닌 요단강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전의 요단강 건넴의 취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3:13-17에 보면,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홍해만 건너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홍해 건너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인간들은 자기 존재의 바닥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살고자 하는 정신이 최종적 마음이었습니다. 요단강을 맞이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홍수로 인하여 건널 수 없는 시기에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건너가는데 있는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에 발을 적시는 순간, 상류로부터 흘러들어온 물줄기는 더 위 상류지점에 멈춰서 대기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통과한 물들은 사해쪽으로 빨리 흘러가 넓은 폭의 강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이 요단강의 모습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보여줍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늙어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영생 얻을 날을 고대합니다. 하지만 언약궤 상자 안에서 맹렬하게 인간를 지적하는 율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율법의 요구에 부합되고 합당한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제사 기능은 바로 율법으로 죄인된 자를 희생 제물의 피로 죄를 씻는 기능에 해당됩니다. 저기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참으로 합당함을 받아들이는 자는 더는 자신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통과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엘리사는 스승이 남겨준 겉옷을 가지되 자신의 겉옷은 가차없는 찢어버립니다.
스승의 겉옷을 가지고 왔던 요단강을 도로 건너가게 됩니다. 거기에 스승님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 선지자의 마지막 죽음을 궁금해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스승 엘리야를 죽게 하셨음을 미리 아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무려 50명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무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은 엘리야의 좋은 관계가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은 없고 세상 하직만 있을 뿐이다’는 사실을 못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가능성을 반영해줄 형식을 마련코자 하는 자들입니다. 죽은 스승님의 시신을 잘 모시려는 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모으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말려봤자 소용없습니다. 사흘 동안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없었습니다. 오늘날 참으로 성도라면 자신의 가능성이 하늘나라로부터 막혀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제 남은 세월은 이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의미가 종결되었음을 증거하는 선지자 기능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구원능력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 구원의 능력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열왕기하 2장 11-14절(형식 찢기) 2602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2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한 사람이 지상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누구든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사람 같으면 천국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무슨 수로 하늘로 올라갑니까? 다이어트를 얼마나 해야 하고, 몸무게를 얼마나 줄여야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그저 교회 열심히 다니면 구원받는 줄로 알았는데, 성경 말씀 달달 외우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엘리야 본인이 날개 짓해서 올라간 것은 아니거든요.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들이 내려와서 엘리야를 낚아채듯이 해서 강제로 하늘 위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열왕기하 2장 11절에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성경에서 ‘승천했다’라는 말은 두 공간을 마련했다는 겁니다. 두 공간을 마련했는데 엘리야는 승천해서 그 두 공간 가운데서 하늘에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요? 이 세상에 구원받은 사람이 엘리야밖에 없습니까?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나 저기 가야 하는데.’ 그 말은 ‘나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나 저쪽으로 가야 해.’
남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엘리야가 승천해서 간 그곳이 성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최종 도착 지점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세상 살면서 ‘이쯤 살았으면 나름 괜찮다’라고 여겼던 그 안일함, 그게 안일함이거든요. ‘이 정도 살았으면 남들보다는 착하게 살았잖아’라는 자기변명 같은 거지요.
그런데 백날 잘 살았다고 자기변명 해 봤자 저쪽으로 간 것은 아니잖아요. 그쪽은 아니라고요. 그러면 우리는 일단 빼고요, 엘리야가 승천했던 그 현장에 같이 있었던 최종적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엘리사입니다. 엘리사가 은근히 기대한 것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스승 엘리야를 데려가실 때 1+1로 끼워서 나도 좀 데려갔으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 하나님 냉정하시네요.
두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지상에 그대로 있고 또 한 사람은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서 ‘우리 스승 엘리야는 어떻게 하늘로 올라갔지? 어떻게 하늘로 올라간 거야?’라고 부러워하면서도 자기는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신세에 대해서 낙담하고 절망하면서 지금의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냐? 엘리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 현장에 없었지만 있었다고 치고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는데 우리는 남겨졌을 때의 그 절망감과 좌절감, ‘그동안 난 뭐 하고 살았어? 나는 왜 안 데려가는데?’ 할 때 엘리사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엘리사가 그 현장에서 안타까워했어요.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고 난 뒤에 제자들의 안타까움과 마찬가지입니다.
늘 주님이 제자들과 붙어 있었으니까 ‘시작도 함께였다면 끝도 함께 붙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제자들인데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에 막 같은 것, 펜스, 어떤 장벽 같은 것이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했을 때 얼마나 낙담이 컸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오죽 분노했으면 예수님을 팔아먹기까지 했겠어요?
결국 여기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엘리야가 들어갔던 그 공간과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공간에는 어떤 막, 격막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 막을 뚫고 엘리야가 갔던 그곳에 합류될 수 없다는 것, 합류될 수 없는 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막이 있다고 합시다. 베니어합판이나 뭐라도 좋아요. 하늘과 땅이 막혀있다는 그 말이에요. 인간이 그 막혀있는 것을 뚫으려고 할 때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가능하지 않아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어, 막이 있으니 뚫어야지’하고 시도하다가 텅, 하고 튕겨 나오겠지요.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현재 80억이 인구가 있는데 그 80억 인구의 공통점은 뭐냐? 차단된 그 막에서 튕겨 나온 채로 하늘나라 가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오글오글 모여 사는 세계, 그게 바로 이 세상입니다. “저리 안 가?”하고 튕겨 나온 거예요. “어딜 간다고? 어딜 넘봐? 너는 네 세계에서나 살아” 하고 강력하게 반발당해서 튕겨 나온 그 인간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고요, 그 세계인 이탈리아에서 현재 동계올림픽 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못 들어가면서 금메달은 따겠다는 거예요. 금메달 따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그것이 전적으로, 확실하게, 분명하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엘리사는 발견했습니다. 왜? 자기 스승 엘리야와 헤어졌으니까.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요. 지상에서야 따라잡았지요. 길갈에서 벧엘, 또 여리고로, 요단강 건너에까지 악착같이 따라갔어요.
인간이 어떤 스승을 너무너무 사랑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요. 그게 나중에는 파토났어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단독으로 데려갈 때 자기의 열성으로 ‘나도 스승따라 천국갈래’라는 모든 희망은 좌절되고 다 실패로 끝납니다. 스승은 혼자 하늘로 빠지고, 자기는 이 지상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스승이 하늘로 이미 올라갔다는 것을 목격한 이상, 엘리사가 이 땅에서 남은 인생 사는 그것이 무슨 낙이 되겠습니까? 분명히 그것을 봤는데요. ‘남은 자들끼리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우정 나누면서 삽시다’ 그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튕겨 나왔는데요.
두 공간이 위와 아래로 격리되어 있고 또 막혀있다는 것, 그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거예요. 다 부질없어요. 서로가 되게 바빠요. 각자가 무지무지 바쁜데 다 부질없어요. 각자 자기 일에 굉장히 바빠요. 야근까지 하면서 바쁘지요. 부질없습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 불렀잖아요.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가,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라고(서울 탱고, 방실이). 다 소용없어요. 바쁜데 소용은 없어요. 어차피 이 세상은 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에요.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첫 번째, 인간이 사는 세계와 하늘 사이에 막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 쪽에서 그 막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 소중한 사실을 안다면 이 세상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 올림픽에서 메달을 몇 개 따든, 정권이 바뀌든, 전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누가 이기든지 다 부질없어요.
어차피 막혀있는 지하실에 있으면서, 막 있는 채 살고 있는 인간들끼리 도토리 키재기밖에 안 되는 그런 세상의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엘리사와 엘리야의 헤어짐, 작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이 땅에 왜 나타나야 할 나라인지’ 그 취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난 뒤에 광야를 통과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간다’고 언급했고요, ‘그것은 이미 너희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했다’고 했어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분명히 약속한 겁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 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3-16).
문제는,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인들은 ‘이제 홍해만 건너면 거기에 약속의 땅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거…, 홍해 나올 때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들은 홍해만 건너면 직행 1번 타고 그대로 논스톱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어요. 더 이상 건널 것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홍해 건너고 난 뒤에 강 하나를 더 건너야 했습니다. 그게 요단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부를 때 그냥 부른 것이 아니고 일단 요단강가에까지 불러내고 거기서 로켓 쏘아 올리듯이 하늘로 불러올렸습니다. 그렇게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요단강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취지에 대해서 추가적인 의미를 하나님께서 제공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오게 했지요.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를 앞장세워서 요단강 건너갈 때 여호수아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요단강 건너가기 전은 광야, 요단강 건너면 거기는 약속의 땅. 다 왔어, 다 왔어, 이제! 저 요단강만 건너면 돼’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에 더 추가된 의미가 있어요. ‘요단강에서 승천, 요단강에서 승천 못 하면 최종 약속의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함’,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르지요? 옛날 여호수아 때는 수평적이에요. 요단강을 건너면 약속의 땅이 바로 그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의 요단강은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거예요.
정리하면 공간이 몇 개인가? 공간이 세 개가 되는 거예요. 우선 엘리야가 간 공간, 천사가 와서 불수레 태워 올라간 그 공간입니다. 두 번째는 엘리사가 멀뚱히 바라만 보고 그대로 서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그 공간입니다. 두 개밖에 없는 나머지 세 번째 공간은 무엇인가?
이 세 번째 공간이 어려워요. 엘리사가 알게 된, 엘리사가 경험한 새로운 이스라엘 공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사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동안 엘리사가 선지자 일을 했던 것을 형식화 시켜주는 것이 겉옷이었거든요. 엘리사의 시그니쳐지요, 특징적인 것, 그게 겉옷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동안의 ‘나’라는 그 형식을 벗기고 하늘에서 입혀주는 불말과 불수레에 합당한 새로운 표현방식으로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 겉옷을 벗은 채 하늘의 옷의 형식을 띄고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딱 보고 어떻게 했느냐? 우리 스승이 하늘로 올라갈 때 그렇게 올라갈 수 있는 그 능력은, ‘아, 그동안 외부적으로 나타냈던 선지자의 형식 자체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 거예요.
좀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엘리야가 세상 하직할 때 다른 사람은 목숨이 끊어져서 하직하는 줄로 알았던 거예요. 그동안 엘리야가 선지자의 기능 때문에 살아왔기 때문에, 선지자 기능을 다 했을 경우에는 선지자 기능을 해왔던 그 옷을 벗는 것이 엘리야 입장에서 세상과의 하직의 표현입니다.
“이제 세상은 굿, 굿바이!” 좋은 헤어짐, 그런 의미로 옷을 벗는 거예요. ‘내 기능은 다했다.’ 그동안 선지자 기능이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 기능을 주께서 그동안 수고했다시면서 철수시키니까, 선지자 기능을 위해서 그동안 세상을 살았는데 그 기능이 벗겨진 이상 더는 세상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이제 하늘로 올라가면 되는 겁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여러분도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이 땅에 천구백몇 년도에 태어났잖아요. 다 생년월일이 있잖아요. 주민등록에 다 있지요? 그렇게 태어날 때 주님의 고유기능이 있어요. 그냥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할 일을 주셔서 태어나는데 그 할 일이 끝났을 때 여러분은 엘리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 나 죽는다’ 그게 아니고 세상 하직하는 거라니까요. 세상을 하직하는 거예요. 개만 키우다 하직하지 마시고요. 개 보험이나 넣고 그러다 하직하지 마시고요. 개키우는 그것이 우리 할 일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성도에게 주신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이 다할 때 주께서는 우리를 잡아당겨서 하늘로 보내는 겁니다.
엘리사가 그 힌트를 얻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내 눈앞에서 스승만 끌어올려서 하늘나라 보내고 나를 그대로 지상에 남겨두는 이유는 스승 엘리야의 선지자 기능이 아직 나에게는 마감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겁니다. 단지 그렇게 파악한 것으로써 자기도 나중에 스승님이 가신 하늘나라 간다는 그 보장은 안 되잖아요.
스승님 가신 그 하늘나라에 같이 합류되면서도 선지자 기능을 다하는 방법은 뭐냐? 현재 내가 입고 있던 그 옷을 찢어버려요. 입고 있던 그 겉옷을 찢고 그 자리에 뭐로 대체하느냐?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남겨둔 그 겉옷을 후딱 집어서 어디로 가느냐?
스승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이리저리 헤치면서 요단강을 건넜거든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간 겁니다. 거기서 스승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고 그 제자 엘리사는 멀뚱하니 남아 있는 거예요. 이제 엘리사는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넘어와야 해요. 건너오기 전의 그 지점으로 가야 한다고요.
그래서 다시 건너갈 때 그냥 가지 않고 스승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이리저리 강물을 헤치니까 갈라지네요. 그게 갈라져요. 여기서 엘리사가 걱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스승이 벗어놓은 겉옷 가지고 물을 가르니까 물이 갈라졌다는 말은, ‘나도 스승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 합류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왕하 2:11-14).
지금 나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스승님이 해온 그 선지적 기능이 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후계자로서 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유지되는 한 나는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 일이 일어난 곳이 요단강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단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넘어야 할 강이에요.
‘그 강 넘어서지 뭐. 건너가면 될 거 아닌가? 홍해도 건넜는데 요단강도 건너가지 뭐.’ 이렇게 생각할 것인데 여호수아 3장에 보면, 그 요단강이 건너가겠다고 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평소라면 헤엄이라도 쳐서 건너갈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건너가려고 할 때 갑자기 홍수가 났습니다.
그 대목이 여호수아 3장 15-16절입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개인적으로 헤엄은 칠 수 있지만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씩 헤엄쳐서 건너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안 돼요. 한꺼번에, ‘ALL AT ONCE’라는 말이 있지요, ‘한꺼번에, 단번에’ 모든 것이 같이 이루어져야 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공동체의 동일성, 일체성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하나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지금 위 공간과 아래 공간이 있는데 아래 공간에 사는 엘리야가 위 공간에 들어갔다는 것은,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다른 세계, 위의 세계로 넘어가는 그 길은 오직 하나에요. 그 하나의 길이 막혔거든요. 불수레와 불말들이 왔으니까요. 불수레와 불말들이 왜 왔느냐?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었습니다. 천사가 그 불을 가지고서 허락되지 않는 자는 일절 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 말은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가능성이고 인간의 한계지요. 인간은 그 불을 뚫을 수가 없어요. 엘리야가 승천했다고 해서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데려와 줘야만 갈 수 있어요. 불이라는 것, 인간은 살아서는 불을 통과할 수가 없잖아요.
여호수아 3장 계속 봅니다. 그 시기에 요단강에 홍수가 일어나서 건널 수가 없었는데 그때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섭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니까 상류에서부터 흘러내려오든 물이 스톱되어서 줄줄이 대기상태에 들어갔어요. 번호표 뽑아야 할 지경이에요.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5-17).
상류에서는 물이 끊어지고요, 이미 흘러간 물은 사해 쪽으로 빠져버렸고요. 그래서 수 킬로미터가 훤하게 강바닥으로 길이 나타났어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인간이 왜 천국에, 하늘나라에 못 가는가를 요단강이 보여줘요. 인간은 나이 들어 죽어가면서 그 죽음의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를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겁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요, 인간이 꼭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깔려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왜 저주받아? 내가 왜 심판받아?’라고 해요. 자기 존재의 바닥 자체가 심판이고 저주인데 그걸 모르고 그냥 바깥에 있는 현상 ‘아이고, 점점 몸이 이렇게 아프니 내가 죽어가는구나. 죽으면 죽지 뭐’, 눈에 보이는 자기 몸이 망가지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왜 내 몸이 늙어가고 망가지고 모든 것이 피폐하고 무너지는지, 안 아픈 구석이 없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저주받고 심판받는 중에 있기에 그런 거예요.
그 심판과 저주는 바로 언약궤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하나님의 율법 들어있잖아요. 율법은 뭐지요? 우리 죄를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슨 백입니까? 요단강에서 다 수장시켜야 마땅한데 그 수장을 면하고 “어이 강물! 저 위쪽은 대기하고 있어. 하류! 그쪽은 빨리 빠지고! 내 백성 지나가야 해.”
내 백성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특징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기능이 있어요.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저주와 심판의 기능, 그리고 제사에서 죄를 없애는 기능이 합체되는 언약궤, 그 언약궤를 모시는 제사장의 고유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면서 제사를 하지요. 그러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생각해야 하느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우리를 기다렸구나. 맛있게 잘 먹고 배 부르자’ 하면 안 되고요, 요단강의 그 취지가 약속에 있거든요, 그러면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가면 그 약속을 놓치고 잊어버리면 안 돼요. ‘우리는 갈 수 없는 땅에 들어왔다.’
여호수아는 엘리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잖아요. 그때는 수평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 요단강 건넌 후, 그래서 요단강 이전에는 광야와 사막,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면 약속의 땅. 인간들 눈으로 보기에는 다 수평적으로 옆과 옆이에요.
그런데 의미가 추가되면 요단강이 단지 건너면 되는 요단강이 아니라 엘리야가 갔던 위, 천군 천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엘리사가 계속 선지자 기능을 해야 하는 이 땅, 수직적인 두 공간으로 정비되고 정리가 되는 겁니다. 엘리사가 스승이 입었던 겉옷을 가지고 물을 헤치면서 동쪽으로 건너기 전의 서쪽으로 옮겨왔을 때 누가 기다리고 있었느냐 하면, 같은 선지생도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서 차이가 납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고요, 다음에 엘리사죠, 그리고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선지 생도들이 있어요. 열왕기하 2장 16절에 보면, 그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우리 엘리야 스승님의 시신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해요. 엘리사는 참 답답하죠. 왜냐하면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그들은 목격 못 했으니까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스승님 엘리야를 죽이신다.’ 그렇게 죽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그렇다면 시체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열왕기하 2장 16-17절에 보게 되면,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시체를 며칠 찾았는가? 3일을 찾았는데 어떻게 됐는가? 못 찾았어요. 못 찾는 게 아니라 시체가 없었죠. 뭐가 있어야 찾지요. 그러나 선지 생도, 그리고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던 그 나머지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봅시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는 그걸 목격하고,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강물을 헤치면서 요단강을 다시 건너왔다.’
그런 말들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 인간들은 자기 생각만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필요하다.’ 그것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엘리야가 능력이 많았다. 엘리야가 기도하면 3년 6개월 동안에 비가 안 올 정도로(약 5:17) 그렇게 능력이 많은 분이 우리 곁에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안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은 형식주의입니다. 그저 형식이에요. 인간은 자기 형식을 버릴 수가 없어요. 엘리야는 자기 형식을 버렸죠, 승천할 때. 엘리사도 그 스승 보고 자기 겉옷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니고 찢어버렸어요. 자기 겉옷을 찢고 스승님의 옷을 자기 것으로 취했다는 말은, ‘그동안의 나 자신이 누군가’를 비추어 보고, 그 ‘나’를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그 형식을 내가 찢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인간들은 대외적으로 자신의 ‘불가능성’이 딱 싫어요. 자기가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밀어붙이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그것들이 축적되어 최종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걸 의지해.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하고 내세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선수 같으면 금메달 같은 것, 또는 공부 잘하는 학생 같으면 초등학교 때 상장 같은 것, 피아노 잘 쳐서 받은 상장 있잖아요, 그러고 어떤 연로한 부모 같으면 자식 4명 잘 키웠다는 이런 것…, 이게 전부 다 형식이에요. ‘내가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는 아니야. 나는 얼추 가능한 존재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증빙 서류 같은 것, 그것을 인간은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엘리야도 겉옷 벗었고, 엘리사도 벗었는데 그 승천하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엘리야 스승을 잘 모시고 따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시체를 기념물로 여기고 정성껏 좋은 묘지에 모셔서 ‘우리는 이처럼 절실하게 선생님을 계속 찾고, 기리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 티를 내려고 하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을 우리가 헤아려 봅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종류 아닙니까? 오늘 본문 내용은 딱 이거예요.
“하늘나라로 가고 싶어?”
“예, 가고 싶습니다.”
“엘리야가 간 그 나라에 합류하고 싶어?”
“합류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네 형식을 버려라. 너의 잘남과 너의 가능성, 내 가능성은 이 정도라고 자기 가능성을 증빙할 수 있는 그 형식을 버려라.”
어떻게 버립니까? ‘나라는 존재는 존재 자체의 심판과 저주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내 가능성으로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것, 막혀있다는 것, 분명한 것은 내가 막혀있다는 것, 내 식대로 생각하고, 내 식대로 행해서 구원받는 이것은 차단돼 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두는 그것, 그것을 발견하면 돼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예요! 어떤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야, 엘리야가 벗어놓은 겉옷을 엘리사가 흔드니까 요단강이 갈라졌다지? 나도 그 겉옷을 후딱 취해서 흔들면 요단강 갈라지겠네. 그런 것 있으면 우리도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사도행전 19장 12절에,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그 손수건과 앞치마를 박물관에 기념물로 해놓고 그런 걸 따라 하면, 거기서 고유한 능력이 막 나오는 겁니까?
누가복음 8장 44절에 보면, 어떤 혈루증 걸린 여인은 몰래 와서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어요.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그 옷만 만지면 전부 다 구원받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살아 있어요?
엘리야가 벗어놓은 그 겉옷을 엘리사가 쥐고 흔들어서 요단강 건넜다면, 그다음부터 엘리사가 그 겉옷 가지고 계속해서 능력을 행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이게 뭐냐? 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엘리야도 그렇고 엘리사도 그렇고요, 내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소유될 만한 것은 일절 없다는 거예요.
소유 당해야 하죠. 나는 주님의 기능과 주님의 일하심에 소유 당하는 것이지, 내가 주님의 사람인 것 티 낸다고 능력 될 만한 것을 소지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누가 바라고 있었느냐? 엘리야 승천할 때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제자들이나 그런 걸 찾고 있었던 거예요. ‘스승님의 시체와 함께 있으면 계속 능력이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딱 하나예요. 우리 존재의 바닥을 보세요. 우리 존재의 바닥을 보게 되면, 우리의 존재 바닥은 저주요, 죽음이고 심판이 있습니다. ‘죽고 난 뒤에는 좋은 나라에 가겠지.’ 자꾸 이렇게 죽음을 극복할 생각하지 말고, 자기를 찢을 수 있어야돼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쪽으로 나오려면…, ‘이미 너는 네 능력으로, 네 가능성으로 천국 못 간다’가 확정이 된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뭐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그게 언약궤예요, 언약궤의 완성입니다! 주의 십자가는 우리보고 죄인이라 하고, 우리 힘으로 죄를 씻을 수 있는 능력, 가능성은 아예 없고 ‘주님의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라는 그 ‘불가능성’이 우리의 남아 있는 인생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새로운 능력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엘리야고, 우리가 바로 이 시대의 엘리사로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찢어야 되는데, 우리의 잘남과 우리의 치적과 업적을 찢어야 되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가능성을 싫어하고 그저 남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닌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 세상 능력인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능력인 것을 이제는 기뻐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