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밥상머리

아빠와 함께 2026. 1. 22. 10:22

하나님의 밥상머리

2026년 1월 2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41-43

22:41 이스라엘 왕 아합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니
22: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22:43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22: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으로 더불어 평화하니라

아합왕은 결국 죽습니다. 그것도 전장터에서 하지만 아합왕 제 4년에 아합은 이 사실을 젼혀 몰랐을 것입니다.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장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에 대해서 해석을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腺)을 주셨습니다.

넘지 말라고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시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선 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을 넘은 자들은 그후에 계속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을 우습게 여기면서 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남쪽과 북쪽 왕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 넘었음에 대해서 심판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사왕이나 그 아들이 되는 여호사밧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누가 뭐래도 하나님에게 최선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선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 지킴은 인간적으로 반듯하게 산다고 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은 솔로몬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평화롭게 이스라엘을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섬기는 이웃나라와 화친의 혼인계약을 맺어 국가 경영 비용을 줄이려고 했지만 이러한 자세가 선 넘은 것으로 간주되어 징벌이 주어집니다.

그 징벌이 바로 이스라엘 두 조각 나는 겁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왕상 11:29-33)

그렇다면 이처럼 ‘선 넘었음’을 유지하는 선은 유지시켜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12:24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아 돌아갔더라”

이처럼 남북 이스라엘이 따로 명확하게 구분 되어야 될 이유는 사무엘하 7:14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즉 하나님의 최종 계시 해석은 ‘하나님과 가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의 아들’을 모집하고 싶어서 계시를 주신 겁니다. 그 방식은 창세기 3:15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인간은 배제됩니다. 예수님과 악마와 등장합니다. 즉 도닦는 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도닦는 자들은 말이 많습니다. 보다 철저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던 그 과정을 나열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참된 아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반문합니다. 실컷 뭐 해놓고서는 “제가요? 제가 뭘했지요? 어∼ 누가 했지?”가 되는 겁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7:37-38에 보면,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죄많은 여인이라고 알려진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아뭇 소리도 안합니다. 그저 고마움의 눈물만 줄줄 흘릴 뿐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누가복음 15:17-19, 24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들은 계시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해석의 마감은 육의 아들을 영의 아들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더는 자신의 행함을 계시에다 섞어넣는 자가 아니라 순전히 아들의 영으로만 아들되었음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4-17)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제대로 된 아들께서 나타나셔서 계시 해석에 실패한 죄인이 받아야 될 저주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해석을 성령으로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 핵심은 십자가+부활이었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도 닦아서 구원되는 방식을 철저하게 배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영원히 천국 취업에 성공한 바가 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3-24)

모든 육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 이 작업은 오로지 하나님만 해내실 수 있습니다.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8-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자신의 미래를 좋게 정하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6강-열왕기상 22장 41-44절(하나님의 밥상머리) 2601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22장 41절에서 44절까지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 제 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니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삼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으로 더불어 평화하니라”

이스라엘 왕 아합 제 4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아합왕은 이미 그 이전에 죽었습니다. 아람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미 죽어버렸어요. “이스라엘 왕 아합 제사 년에”라고 이야기할 그때 아합왕은 자기가 나중에 전쟁하다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생각을 못 했습니다.

이 말은, ‘아합왕 제사 년에’ 즉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그 왕 제 4년에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었다’라고 했을 때 여호사밧이 유다 왕 되어서 앞으로 자기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역시 본인은 몰랐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약점은 뭐냐? 자기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 장래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 애쓰고 노력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한계 지어놓은 것이 있어요. 그걸 찾아보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의 나이, 성별, 수입, 생활 방식이라든지 건강 상태, 가정 환경 이런 것으로 그 인간의 운명이 확정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이 설교의 처음 시간에 ‘인간은 어떤 선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선을 넘어설 수 없는가?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니”라고 해놓고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느냐?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라고 되어 있어요.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였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여호사밧을 어디에 연결 짓고 있느냐 하면, 아버지 아사 왕과 같은 맥락에서 연결 짓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사 왕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이해를 똑바로 했는가? 이해를 똑바로 못 했어요. 이해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이해를 못 했다는 것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넘지 말라는 선을 넘어버렸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가 못 된 거예요.

아사 왕이 하나님이 설정한 선을 넘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아들 여호사밧은 어떻게 되었는가? 같이 선을 넘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선이 뭐냐를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다 왕에게 선 넘지 말라는 그 선이 어디에 나와 있느냐?

열왕기상 12장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아 돌아갔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두 조각 냈습니다. 사정이 북한하고 남한하고 똑같아요. “‘북쪽과 남쪽은 서로 친하지도 말고 서로 싸우지도 말고 내가 이미 따로따로 관리하기로 결정했다’라는 이 하나님의 결정의 선을 왕들은 넘지 말라.” 곧 ‘하나님께서 북쪽과 남쪽에 차이점을 두었는데 너희 왕들끼리 화친하거나 서로 싸워서 그걸 무너뜨리고 무산시키는 식으로 그 선을 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아사 왕, 선 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했어요. 여호사밧의 아버지 되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그냥 공격한 것이 아니고 아람 나라에 뇌물을 줘가면서 그래서 공격하게 된 거예요. 선 넘었지요. 그 선 넘은 것에 대해서는 역대하 16장에 나와요. 아사 왕이 본때를 보인다고 선을 넘어서 공격했습니다.

그때 북쪽 이스라엘 왕 이름이 ‘바사’예요. 이름이 서로 비슷비슷해요. 남쪽 유다의 아사 왕이 북쪽 이스라엘의 바사 왕을 공격했어요. 물론 바사가 먼저 공격했지만요. 하나님께서 선을 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은 둘이 이제 선을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사 왕도 그 아들인 여호사밧 왕도 둘 다 하나님의 계시 해석에 실패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계시 해석에 실패했으니까 계시 해석에 실패한 그 빈 자리에 본인들의 의견이 반영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모르니까 모든 행동의 결정에 있어서 자기의 의지가 그 계시 자리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누굴 보냈느냐? 역대하 16장 7절에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선 넘으라 했어, 넘지 말라 했어? 선 넘었잖아. 선 넘었으니까 이제 그것에 대해서 내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 그동안 아람 나라가 조공 바쳤지? 그것은 네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네가 선을 넘지 않았다는 조건을 지켰기 때문에 아람 나라가 너한테 잘해줬는데 너는 계시 해석, 북쪽을 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 해석에 네가 실패했다.”

하나님 계시 해석, 말씀 해석에 실패했으니까 거기에 자기의 의사, 자기 뜻, 자기의 야망이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누구를 보냈는가? 선지자 보내지요. 그때 아사 왕이 그 선지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어떻게 알았죠? 참, 하나님께서 용하기도 하십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해석에 실패하니까 모든 관계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전락했어요. 이게 선 넘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선 넘은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 빼고 이야기하자.’ 하나님 빼고 이야기하면 남는 건 뭡니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죠. 인간대 인간의 관계는 뭐냐 하면, 바로 힘과 힘의 관계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으나 마나 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있으나 마나 하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좀 빠지세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빠지세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는데 고맙게도 하나님은 안 빠지십니다. 빠지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냈고, 그 선지자에 대해서 아사 왕의 태도가 이렇습니다.

역대하 16장 10절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아사 왕이 선지자를 뭐로 봤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봤어요. “선지자 주제에 네가 나보다 높아? 네가 내보다 높으냐? 어디서 나한테 대들어? 이래서 나라 꼴이 잘~ 되겠다. 여봐라! 저 인간을 옥에 가두어라.”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난 뒤에 아사 왕의 발에 중병이 생겼습니다. 중병이 생겼을 때 아사 왕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역대하 16장 12절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여호와에게 구하지 않고 의사한테 구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모든 일이 선을 넘어버린 거예요. 선을 넘은 것은 성경 해석에 오류가 있기 때문인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을 못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좀 하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변자인 선지자를 무시하고 중병에 걸렸는데 여기서 아사 왕의 본색이 뭐냐? ‘내가 이런 병 걸렸다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됐다 한다든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지롱? 하나님, 저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인간대 인간으로 끝까지 밀어붙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용한 의사 없나?” 의사한테 물었는데 병이 나을 리가 있습니까? 이게 아사 왕이에요. 그런데 그 아사 왕의 그 길을 누가 가느냐? 아들인 여호사밧 왕이 그대로 갑니다. 여호사밧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역대하 18장 1절에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사돈지간이 되었다는 그 뜻이거든요. ‘사돈지간이 되었으니까 우리 좋게 지냅시다. 가끔 만나서 커피나 합시다.’ 이런 관계가 아니고, 분명히 남쪽과 북쪽을 쪼개 놓은 하나님의 선을 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그걸 아주 개무시해 버렸어요. 제가 열왕기상 12장 24절을 자꾸 언급하는데 그 이전에 이미 열왕기상 11장 30-33절에서 하나님 쪽에서 파견된 아히야 선지자가 이미 ‘선을 넘지 말라’라고 그 ‘선’ 자체를 분명히 했어요.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어떻게 했느냐? 아히야 선지자가 입었던 옷을 찢어 12조각을 내서 10조각은 북쪽, 두 조각은 남쪽의 유다 지파로 정했습니다. 이게 무슨 선? 휴전선, 이미 휴전선으로 이미 정해졌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쯤에서 여러분들이 이제 궁금해해야 할 게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두 조각 내시고 서로 친하게 지내지 말고, 뭘 주고받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 여호사밧 같은 경우에는 그 사돈끼리 친하게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때문에 본의 아니게 북쪽 나라와 아람과의 전쟁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끌려 들어갔을 그때 여호사밧도 아합도 미가야 선지자의 하나님의 계시 해석에 대해서 실패했습니다. 만약에 미가야가 하는 그 계시 해석에 대해서 여호사밧이 동의했다면 말렸을 겁니다. 아합왕이 음주 운전을 하고 있다면 여호사밧은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에요. “야! 네가 술 먹고 운전하면 너만 걸리는 게 아니라 나도 걸려. 좀 참고 대리 부르자. 술 먹고 운전하지 말자.” 이래야 마땅하잖아요.

이게 음주 운전을 금지한 법을 제대로 해석한 거잖아요. 그런데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줬을 때 미가야가 분명히 해석했어요. “아합왕은 죽습니다.” 미가야가 분명히 해석했는데 둘 다 ‘설마? 이건 구라겠지. 내 인생 경험이 얼만데? 세상이 말씀대로 다 될 리가 있어? 역시 믿을 것은 말씀이 아니고 내 인생 경험이야.’ 이런 식으로 그냥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오기가 나서.

여기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남쪽과 북쪽을 쪼갠 이유가 뭐냐? 올라가지도 말고 내려가지도 말라고 선을 그어놓은 그 이유가 뭐냐? 그게 사무엘 7장 14-17절에 나옵니다. 그게 더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거예요. 이렇게 돼 있어요.

나단 선지자가 등장한 겁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계시하기를 “나는 이스라엘 중에서 다른 지파 말고 유다 지파, 유다 지파 가운데서 다윗의 자손만을…”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 가족으로 삼고 싶다.” ‘아들’이 나와요. 가족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겁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을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도 닦지 말고 가족 되어라. 도 닦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 되어라.” 이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이 뭐냐?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가족이 돼요. 그런데 도 닦는 사람은 자기가 완벽해야 돼요. 철저해야 합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실수 있으면 ‘내가 이 실수 때문에 벌 받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사 왕과 여호사밧 그 두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거든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다윗에 게는 하나님의 언약 관계, 영적 아버지와 아들을 생각했는데 그들은 육적인 아버지와 아들이에요. 육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특징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만큼 내가 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도 닦는 거예요.

‘내가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하자가 없으면 없을수록 내 인생은 잘 풀린다’는 의식을 유지했던 겁니다. 여러분이 역대상 22장의 오늘 본문 읽어봤습니다만 그들은 자기 힘이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당을 없애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43절에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이것은 아사 왕도 마찬가지고 아들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예요. 산당이 뭐냐? 기도원이에요. 높은 산에 있는 신당이거든요. 아쉬울 때마다 자기 한을 풀고 기도 응답받기 위해서 산당이라는 걸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식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방법은요, 알려드려요? 선을 넘지 않으면 돼요. 선을 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의 의사, 자기 생각을 굳이 어필할 필요가 없는 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는 제가 알 수가 없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 넘은 왕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여러분들에게 있다고 치고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나이, 성별, 수입, 생활관습, 건강 상태, 가정 형편 이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여기에서는 ‘말’이 많이 나와요. 굉장히 말이 많습니다. 나이 성별, 수입, 생활 습관, 이런 게 다 뭐냐 하면, 내 속에 내가 소유한 것이고 장착한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돼버리면 나이가 어떠니, 성별이 어떠니, 수입이 어떠니, 생활관습이 어떠니, 건강 상태가 어떠니, 어릴 때 가정 환경이 어떠니…, 이런 말을 굳이 하나님 앞에서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 이런 것을 말 안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에 의해서 아들답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거든요. 우리 십자가 마을에 어떤 분이 쓴 책에 이런 것이 있어요. 책 제목이 ‘밥상머리’입니다. ‘밥상머리’라는 제목이 마음에 드는데 이유가 뭐냐? 밥상머리에는 누가 낄 수가 없느냐? 가족 외에는 낄 수가 없어요. 가족은 늘 같이 앉잖아요. 거기에 다른 사람은 끼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그 가족들이 이야기할 때 자기 도 닦는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자기의 완벽함과 나의 철저함을 거기서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 하느냐? “우리 가정은…, 우리 가정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은…” 이렇게 하는 게 그게 밥상머리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그거예요. “내가 너희를 하늘나라에 취업시켜 줄게” 이 하늘나라에, 천국에 취업 자리가 마련되는데 그 취업 자리가 뭐냐? 하나님의 아들 자리예요. 이거 아셨어요? 이 땅에서 백수로 지내든지 나는 모르겠는데 하늘나라에 취업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영원한 취업이에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아들 되기’예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가 다 해줍니다. 아버지가 알아서 다 해 줍니다.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제가 도 닦는 거 하고 계속해서 지금 대비를 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인간이 낄 자리가 있느냐? 인간은 낄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는 누구와 누가 끼어 있느냐? 예수님과 마귀만 이 자리에 끼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귀만 끼어 있으니까, 인간이 도 닦는 것은 천하의 민폐가 되죠. 도 닦는 것이 뭐라 했습니까? 자기의 철저함, 완벽함, 실수 줄임, 하자 없음, 이 정도 하면 저주는 안 받겠지, 복도 받겠지… 하는 이거, 개인적으로 산당에서 빌면서, 밥상머리가 아니고, ‘나 혼자 잘 되면 그만이잖아’라는 그 생각.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사 왕도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북쪽과는 관계하지 말라 했는데 아사 왕은 그 선을 넘고 북쪽을 쳤고, 또는 그 반대로 전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여호사밧 왕은 북쪽 아합왕과 화친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하 7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현재 인간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예요. 그걸 히브리서 12장 9절에서는 육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고 했어요. 육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육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뭐로 바꾸느냐? 영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전환시키는 그 일에 누가 투입되느냐? 하나님의 독생자의 아들 예수님을 거기다가 투입시키는 겁니다.

왜? 육의 아버지 아들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줘요. 아버지가 천국 갔다고 해서 아들도 자동적으로 천국 가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아들과 아버지가 개입돼야 해요. 그 예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입니다. 그 대목을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릴게요.

누가복음 15장 17-19, 24절의 그 탕자 이야기,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들은 개인적입니다. 밥상머리 몰라요. 가족 모릅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미안해하면서 내가 감히 아들 자리에 주제넘게 끼어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아들 생각이에요. 육의 생각을 갖고 있는 아들 생각이에요. 그러나 그 육의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는 그 육의 아들을 영의 아버지로서 받아줍니다.

“네가 죄지었다고? 내 재산 다 날렸다고? 네가 완벽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못 한다고? 네가 실수가 많았고 죄를 많이 지었다고? 그게 하늘나라 취업되는데 아무 상관이 없어. 너를 내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아버지의 일방적인 통보요 사랑으로 결정된 건데 왜 그 결정에 니 행함이 왜 끼어드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게요, 이런 하나님의 계시 해석을 해내지 못하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사람과 사람의 만남, 더 나아가서 나와 나의 만남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 해석, 계시 해석에 전부 다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여호사밧이고 그게 아사 왕이예요.

하나님의 진짜 다윗의 자손은 사람을 볼 때 사람과 사람 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계 있고, 그들은 부족하고, 그들은 뭐 얻을 거 없고, 인간에게 더 뭘 얻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뭘 찾지를 않았다고요. 인간에게서 아무것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똑바로 아들답게 행동해야지’ 우리 주님은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더 획기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쉽게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특징이, 본인이 다 해놓고 본인이 이렇게 물어요. “누가 했지?” 상당히 특이하죠. 예를 들어서 본인이 예배당 청소를 했잖아요. 진공청소기로 윙~ 돌려서 청소했다는 말이지요. 예배당이나 화장실 청소까지 다 했어요.

목사가 “집사님! 화장실 청소 다 하시고 예배당 청소도 했네요.” 이렇게 하니까 집사님이 하는 말이 “누가 했지? 누가 했을까요?” 남들 보기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았다고 여겼는데 본인은 밥상머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를 안 해요. 내가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고, 이렇게…, 이게 아니라 밥상머리, “누가 했지? 이것은 아버지가 하셨네.” 이게 밥상머리 아닙니까?

가족은 그 구심점이 나한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하잖아요, 성경 해석을! 성경 해석을 할 때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가 완전히 빠지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고 바꾸는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누가 했지?” 그런 조로 한 사람이 바로 누가복음 7장 37-38절에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어떤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귀한 향수를 다 뿌립니다. 뿌리면서 “내가 한 것은 죄지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주께서 죄 사함을 주시다니! 이게 바로 사랑인 것을 알고 사랑 앞에서 저는 저를 잊어버리겠습니다.”

죄를 탕감해 줬으니까요. 그 뒤에 탕감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탕감받지 않은 사람은 놀리고 있어요. “저 여자가 얼마나 악한데 예수님은 선지자라 하면서 그것도 모르네?” 이러고 있다고요. 예수님은 지금 밥상머리를 이야기해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이야기한다고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예요.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에 누구를 집어넣는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죄인을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다가 주님이 대신하여서 취업 자리로 끼워 넣어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핵심적인 최종 해석이에요.

이걸 누가 알았느냐 하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알았어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그 계시 해석, 그 설교 내용의 마지막 종착점이 어디냐?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었고 주께서 영을 준 사람은 살린다. 살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주님의 아들 된 것처럼 그 아들의 자리에 너희를 꽂아주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이유다. 꽂아주기 위해서 자기 맏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죽은 데서 다시 부활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과학에 미쳐서 ‘과학이 최고다.’ 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 사람에게 성경을 줬다고 칩시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딱 보니까 ‘하나님이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하거든요. 그 사람은 피식 웃지요. 우주는요, 137억 년이 걸렸고 지구는 45억 년 만에 만들어졌어요. 지금 공교육, 모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그 사람은 피식 웃는 거예요. ‘신아, 신아! 무슨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어디서 구라를 떨어!’ 하거든요. 창세기 3장에 보니까 ‘뱀이 사람 보고 이야기하고 사람이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니까 ‘뱀이 사람 보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단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켜서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다고? 이것은 완벽 신화네. 이런 거짓말, 구라가 어디 있어?’ 하고 넘어간다고요.

그다음에 창세기를 죽 보고 지나가면서 ‘거짓말이 참 많이 섞이기는 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오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나라가 있으니까 이것은 구라는 아닌데 대부분은 구라고 거짓말이네. 출애굽 할 때 바다가 갈라졌다느니 이런 것은 다 거짓말이다. 과학시대에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다가 ‘다윗은 역사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 나머지는 믿을 수 없지’ 하는데 마지막에 어디에서 걸리는가? ‘예수님이 어디라고 대들어? 그래, 맞아 죽어도 싸다.’ 그러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라는 여기에 딱 걸려버린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외친 것은 딱 걸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사람의 인품, 학력, 돈 관계, 인간관계, 어떻게 완벽하게 살고, 죄를 적게 짓고…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도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뭐냐?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그게 밥상머리 이야기예요.

그러면 성도끼리 이야기할 때 중간에서 멈추면 안 돼요. 어디까지 가야 돼요?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 되어서 우리도 아들 되게 하셨다.’ 그것까지 나가야죠. 그러면 응용문제 한번 내볼까요? 중국집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야, 오늘 간단히 짜장면 먹자.” 이렇게 운을 뗐어요.

가족이니까 밥상머리 아닙니까? “짜장면 먹자.” 아들이 있다가 “아버지! 군에 있을 때 짬뽕이 많이 먹고 싶었는데 짬뽕 먹고 싶어요.”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가 ‘짜장면 먹을 것인가 짬뽕 먹을 것인가?’ 이렇게 시작됐잖아요. 저는 거기서 멈추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에서 식구들이 합의한 것은 뭐냐? ‘짬뽕이나 짜장면이나 뭘 먹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죽을 죄인이다’에까지 계속해서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나가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응용문제가 잘 풀렸습니까? 왜냐하면 주께서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육의 아들을 영의 아들로 되게 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기 때문에 거기서 세상 누릴 수 없는 큰 기쁨을 얻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듭니다. 재판하는데 전 국무총리가 내란에 가담했다고 23년형을 선고를 받았어요. 그 사람 나이가 거의 80이 다 돼가는데 80 더하기 24 하면, 100살이 넘어가니 백살이 되도록 감옥소에서 못 나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면 안 되죠.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면 안 돼요.

‘그래 이 세상은 이게 뒤집어야 돼.’ 하거나 ‘그건 정당한 거야’ 이렇게 여러 정파가 있더라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 같으면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23년형을 선고받았든지, 안 그러면 그냥 무죄로 나왔든지 ‘결국 인간은 죗값으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죄지은 적이 없어서 교도소 안 가는 인간이나 23년형 선고받은 사람이나, 사형을 구형 받은 사람이나, 인간의 어떤 성격, 자연환경, 학력, 자산, 전혀 관계없이 주님께서는 보편적으로 똑같이 ‘너희들은 하늘나라에 취업 못 되기는 마찬가지다. 지옥에나 자리 있지, 천국에 자리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그 선까지 가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제대로 된 해석입니다.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어요. 그게 계시 해석입니다.

그 사람이 교도소에 있으면서 나중에 성령 받아서 예수 믿을 수 있는 문제고요, ‘이 세상 더러워라!’ 하다가 교도소 안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교도소에서 할 거도 없어서 성경을 보다가 십자가와 부활 딱 거기에 걸려서 ‘야, 이런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구나. 왜 나는 진즉에 자신이 누군지도 몰랐지? 내가 아들도 아닌데 아들 되게 해줬구나.’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7-9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계시 해석 이제는 놓치지 마세요. 계시 해석의 끝은,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무엘하 7장 14절의 계시에 의하면, 아들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고 아버지의 천국에 못 갑니다. 이게 계시의 최종성이에요. 그래서 다시 로마서 8장 14-15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주시고, 그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알고 계시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밥상머리’ 그 밥상머리는 ‘아버지가 이렇게 하셨고,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라는 것으로 대화가 최종 마감이 돼야지 그 중간에 멈추면 안 돼요.

끝까지 십자가와 부활에 닿을 때까지 닿을 때까지 계속 밀어붙여야 돼요. 물론 세상 사람하고 이야기하게 되면 중간에 끊어집니다. 로마서 8장 16-17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로마서 8장에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끝으로 요한복음 5장 19절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다 아들에게 다 일임했다고 돼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 5장 20-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도 닦는 것, 산당에서 비는 것은 아무 소용 없어요. 아버지 아사 왕과 아들 여호사밧의 그런 관계 아닙니다. 진짜 관계는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인데,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계시가 찾아올 때 우리가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심판으로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아들 아닌 걸 알고, 그다음에 아버지를 공경하기 위해서 선택된 자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겁니다. 알게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와서 심판에 이르지 않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돼 있어요.

요한복음 5장 23-24절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마지막에 무덤 속에 있을 때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지.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너는 영원한 천국 가야지.”하고 형제들의 맏이가 되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불러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음성으로 불러주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일단은 우리가 육의 혈육적인 관계의 선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돼요. ‘아, 내가 백날 도 닦고 바르게 살아도 내 행한 일이 나를 좋게 하려고 하는 시도를 했구나. 악마와 주님과의 문제에 내가 주제넘게 끼어들었구나. 내가 낄 자리도 아닌데 끼어들어서 내 운명을 내 방식대로 완전히 새롭게 바꾸려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라는 거예요.

끝까지 안 가본 거예요, 끝까지. 끝까지 가보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고 뭘 했든지 간에 끝까지 가보면 우리는 우리 죄로 죽어 마땅함이 나오고, 더 끝까지 가면, 우리에게 죄를 알려주신 그분이 이미 천국의 취업 자리를 마련해 놓고 ‘너는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소식을 우리에게 통보해준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따라갔다가 그다음에 부활까지 이르고, 나중에 천국까지 최후의 완전 취업, 영원한 취업이 완성되는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을 해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위주로 해석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 유리한 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게 하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게, 해석할 권한도 자격도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끝내시고 해석한 그 효과와 능력을 성령으로 보내셔서 우리가 죽을 죄인이며 부활 자리까지 마련했음을 이제는 어떤 기쁨보다 큰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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