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회개의 효능

아빠와 함께 2025. 12. 25. 08:53

회개의 효능 

2025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27-29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21: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1: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는 것은 ‘권력의 구조’입니다. 그 어느 인간도 권력의 체제에서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권력 안에서 웃고, 권력 안에서 웁니다. 권력이 없는 그 밖의 세계는 감히 상상치도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권력자 아합왕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통해서 ‘말씀의 세계’에 속합니다. 즉 인간들이 수긍하는 권력의 구조 밖에 말씀의 세계가 둘러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그 어떤 활동이나 움직임도 말씀의 세계에 주어진 예언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합왕이 상당히 공순해져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에 아합왕을 잘 아는 친지들은 이런 아합왕의 변화에 낯설어 할 겁니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보일 사람이 아닌데…”라고 느낄 겁니다. 가식적인 자기 연출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정성 있는 것으로 평가하셔서 같은 말씀 세계에 속한 엘리야에게 통보하십니다.

따라서 아합왕 가문에 내리시는 재앙을 보다 더 세밀하게 조정하신 바를 알려주십니다. 바알신을 섬긴 것에 대한 재앙은 아합왕 통치기간에는 내리지 않고 아들대에는 내리겠다는 겁니다. 즉 재앙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효능은 효능대로 작용토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가 분명히 확립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신약 시대에 알려진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는 히브리서 9:27-28에 나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without sin unto salvation.

인간  때문 다시 희생제물 되시   

 상관  자기 바라 자들에게  번째 나타나시리라 f.

not to bear sin, but to bring salvation to those who are waiting for him.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게 된 것이 확정된 사실이요 또한 심판받고 저주받는 것도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기존 권력의 구조망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이방민족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을 시료로 사용하여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하늘에게 오신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되면 그제사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합니다. 이것이 신약에 확립되었다면 구약에서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획인시켜줍니다. ‘인간 권력의 세계’와 그것도 대립되는 ‘말씀의 권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에스겔 2:5에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있는 모든 자들은 권력 망 밖으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관계에 속한 선지자는 그 세상 권력의 한계를 압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 할지라도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 권력에 속하지 않는 선지자가 버젓이 그들 세계 안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아합왕이 잠시 마음을 낮추어 자신의 왕복을 찢고 죽음에 가까움을 나타나는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말씀의 영향력을 입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앙 내리심에 관한 조절’을 주님이 행사하셨다는 말은 구원이 재앙받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세상 권력 말고 다른 요소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겁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지 말아야했음을 분명히 말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한결 같이 구원해 내시고 계십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장도들은 왕을 세워야 안심하겠다고 선지자에게 부탁합니다.

이러한 왕 세우는 절차에서 사울왕은 사무엘상 10:10-11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을 합니다. “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사울왕이 권력욕이 미처 다윗을 죽이고자 따라가면서도 갑자기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2-24)

아합왕이나 사울왕이나 옷을 찢고 벌거벗었다는 말은 더는 자기를 권력이나 다른 것으로 자기를 소유화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즉 권력에 속한 왕이 잠시나마 말씀 권력의 종이 된 겁니다. 더는 자신이 자기를 꾸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이처럼 회개하는 것은 기존 세계에서의 자기 소유의 종으로 사는 자신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벗어나면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의 방해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기가 자신에 대한 책임감에서 떨쳐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실수 했다’ 혹은 ‘앞으로 안 그래야지’라고 반성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을 자기가 책임있게 지켜보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며 심판이 합당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저주 안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가 어디서 주어졌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중심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중심부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은 원래 그 어떤 말씀에 대해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점을 발견했기에 성도는 더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물 노릇을 하지 않고 말씀의 종으로 사는 가벼움을 갖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효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조건이 회개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2강-열왕기상 21장 27-29절(회개의 효능) 25122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1장 27-29절입니다.

열왕기상 21:2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갑자기 아합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집안에 대해서 엘리야에게 예언토록 했습니다. 아합의 그 집안이 어떻게 되는가? 열왕기상 21장 24절에 보면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내 이세벨의 충동대로 따른 아합의 집안에 이런 저주가 임한다.’라는 말을 듣고는 아합의 행동이 갑자기 순해졌습니다. 행동만 순해진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자기가 입고 있던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라고 돼 있어요.

이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해서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 입는 옷이라고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너희들은 내 권력 밑에 있고 나는 그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한 자기의 권력 소유가 옷을 통해서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옛날 왕들의 옷 자체가 폼을 잡는 옷이잖아요.

그런데 그 옷을 스스로 찢어버렸다는 것은, ‘나는 이 권력 소유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금식하고, 굵은 배를 입는다는 것은, ‘나는 죽음에 가까이 있음,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자기 옷으로 고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의 이 겸비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찰하고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21장 29절에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것을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느냐? 하나님의 관찰한 것을 엘리야한테 언급하셨어요. 이렇게 볼 때에 두 종류의 권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권력인데, 말씀의 권력은 엘리야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고요, 그 말씀의 권력 바깥에 세상적인 권력이 또 있습니다.

세상적인 권력과 이 말씀의 권력의 그 차이에 대해서 에스겔 2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에스겔 2장 5절에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들은 기존의 세상 권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권력의 피라미드, 권력의 조직체, 권력으로 짜인 조직체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들 가운데서 세상 권력에 전혀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선지자예요, 선지자!

오늘 본문 같으면 엘리야, 에스겔 같으면 에스겔 선지자죠. 에스겔 선지자,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어느 쪽에 속하느냐 하면, 말씀의 세계에 속해요. 말씀의 권력에 속합니다. 말씀의 권력에 속한 사람은 기존 세상 권력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 2장 5절에서 ‘그들이 듣든지 안 해 듣든지’라는 말은, 그들은 세상 권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지경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 권력에 빠져 있어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들은 말씀의 세계, 선지자의 세계, 하나님과 선지자가 통하는 그 세계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그 담벼락 같은 것이 선지자의 세계, 곧 말씀 세계와 세상 권력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면접시험에서도 얼굴이 예뻐서 다 통과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면접관이 그 얼굴 보고 ‘야, 사람 좋게 생겼다.’ 해서 무조건 통과시켰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세상 권력에서 패스, 패스, 패스…, “우리 회사에서 일해 주시겠습니까? 당신과 일하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인물이 되니까 통과했는데 그 사람이 천국으로까지도 통과 할까요? 인물이 괜찮은 데 천국으로도 통과하겠습니까? 천국은 인물값 한다고 해서 통과시켜주는 게 아니죠.

세상에서는 얼굴 예쁜 것도 권력입니다. 권력에 속한 사람들은 ‘내가 권력을 행사한다’가 아니라, 권력이 나를 장악하고 있고 한 하루라도 권력 없이는 못 살아요. 심지어 유치원도 그렇습니다. 발표회 하는데 애들이 2시간 동안이나 해요. 애를 얼마나 잡아놨으면 그렇게 발표회를 하겠습니까? 유치원이라는 그 세계도 권력의 세계에요.

집에서 그렇게 말 안 듣는 애들도 유치원에서 훈련을 시켜 놓게 되면 “그다음 순서는…” 하고 맑은 목소리로 사회도 보고, 준비한 대로 하고 노래도 하고, 콧수염 붙이고 뛰고 까불고 하죠. 본인이 자발적으로 했겠습니까,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배후에 권력자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유치원 세계도 그런데 인간 세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 권력 세계에서 하늘나라로, 천국의 세계로, 과연 그 기준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 담벼락을 통과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 대목이 히브리서 9장 27절에 나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걸 뽑아낼 수 있어야 돼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은 심판받아 합당하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있다는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심판이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과 인간으로 구성돼 있는 이 권력의 세계에서는 심판에서 면제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끼리는 서로 친하고, 서로 통하고, 출세 좀 했다, 성공했다, 하지만 백날 해봐야 권력 세계 안에서 노는 유치원 발표회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이죠. 그 세계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벗어나는가? 히브리서 9장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의 세계에서 구성되고 있는 그 권력 구조망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얼굴 발 좋아도 안 되고, 인격이 좋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서의 이런 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를 대신하시고 죄를 대신하신 분을 바라는 자에게 반드시 구원하기 위해서 두 번째 오시게 돼 있다.’라는 그 이야기를 지금 히브리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구절만 딱 봐도 우리가 늪에 빠졌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돼요.

우리는 편하게 여기는 이 권력 세계, 권력이라는 것에 빠져 있고 그 권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뭐냐? 이 권력 세계에서 네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자기의 소유성, 그 소유성에서 우리가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내 것’이라는 것에서 구원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합은 자기가 권력을 가졌잖아요. 아합은 그 권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어요. 왜? 왕이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아합이 왕의 옷을 찢어버려요. 그냥 벗는 정도가 아니고 옷을 찢어버립니다. 베 옷으로 갈아입고 금식도 합니다. 행동도 잘난 척 안 하고 조용하게 행동하는 거예요.

만약에 아합을 잘 아는 그의 친구나 동료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즉 아합이 베옷 입고, 금식하고, 말씨를 줄이고, 모든 행동 심지어 발걸음까지도 조용히 하는 걸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북한 말로 한다면 “니 돌았니? 니 돌았어! 니 왜 그래? 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이지! 니가 왜? 니는 이런 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니가 하던 대로 해. 니 원래 잘난 척했잖아. 니가 최고 권력자잖아. 인간은 바뀌는 게 아니야. 니가 이런 행동 한다고 해서 새 사람 되는 줄로 착각하지 마.”

얼마나 비아냥거리겠습니까? 그 비아냥대는 소리를 아합 왕이 듣고는 ‘아, 안 속네. 하던 대로 그냥 하자.’ 평소에 하던 대로 큰 소리 내면서 “내가 왕이다!” 그런 식으로 하자, 하고 돌아섰으면 관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흉내를 내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네가 흉내 낸다고 뭐가 되나?’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 하겠는데, 아합의 회개가 이 진정성이 있네요?

이걸 누가 누가 판정했는가? 하나님이 판정을 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판정하고 이걸 누구에게 일러줬는가 하면, 엘리야한테 일러준 거예요. “엘리야야, 엘리야야! 아합왕의 겸손함을 네가 지금 보고 있나? 나는 보고 있는데 너도 보고 있어?”

아합왕이 스스로 겸손하게 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했다는 것이고, 같은 말씀의 권력 안에 들어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불러서 그걸 확인시켜 준 겁니다. 확인시켜 주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열왕기상 21절 29절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이 본문의, 오늘 설교의 핵심이 뭐냐? 재앙이 내려오는 중심점이 있다는 거예요. 재앙이 내려오는 중심점이 있습니다. 그동안 아합이 권력 놀이에 맛을 들였어요. 권력 놀이에 맛을 들였다는 것은, 자기 소유한 권력, 자기가 갖고 있는 그 힘 가지고 하는 게임, 놀이의 즐거움에 맛을 들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소유를 가지면, 적든 많든 어떤 소유를 가지게 되면 본인이 그 소유 안에서 중심점이 됩니다. 내가, 이 자아가 중심인물이 돼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 개코도 소유한 것도 없으니 큰소리 칠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야, 돈 많이 벌었네! 부동산도 10채나 되네.” 한다든지 “너는 우리나라 1%의 부유한 사람이다.”라고 주변에서 이야기들 할 때 그 사람은 더 자기의 많은 재산에서 점점 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걸 늪에 빠졌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얼굴 보니까 지금 늪에 안 빠진 사람들이에요. 개뿔 뭐가 있어야 늪에 빠지지요, 아무것도 뭐가 없으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많이 가지게 되면 여러분들은 발 빼기가 정말, 정말 이것은 불가능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명쾌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심판받기 위해서입니다, 저주받기 위해서예요. 사람이 죽는 이유, 한 번 죽는 이유는 심판받기 위해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이미 확정된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딱 거기까지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세요. 인간이 왜 저주받아야 되고, 왜 심판받아야 되는가? 우리가 지금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저주받아야만 하고, 심판받아야만 되는가? 그 이유, 정답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샘플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인간은 필히 심판받아야 되고 저주받아야 되는지?’의 그 사실을 말씀 권력 차원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뭐 이의 있습니까? 이의를 달 수가 없죠. ‘우리는 이스라엘 아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이방 민족의 대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 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나 보고 자꾸 거기에 엮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내 식대로 살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생각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내가 바알을 섬기든 아세라를 섬기든 그것은 내 자유지 여호와 하나님이 관여할 것이 없다’라고 했던 그 아합의 집안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무리 다른 신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이미 말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입장에 있다.” 그것을 지금 엘리야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이미 아합왕이 우리의 선배가 되어서 보여줬어요. 아합왕만 보여준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서 인간들이 원해서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사울입니다.

그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이런 예언이 주어져요. 이것은 엘리 제사장에 관한 건데요, 사무엘상 2장 32-33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바로 자손에 대한 저주입니다. 자손 저주를 받을 때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고치세요. ‘저주를 안 받아도 됐는데 받는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의해서 잘못된 거예요. ‘저주를 안 받아도 될 건데 실수해서 받았구나.’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자손 대대로 저주받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거예요. 지금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저주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저주받는 것은 확정되어 있는데 저주의 이유에 대해서 네가 간파한다면, 세상 권력에 속하지 않고 선지자처럼 말씀 세계에 속한 자만이 그 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 얼마나 복된 겁니까?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으세요. 왜? 사람에게 이것은 당연한 거니까요. 말씀 세계에서 저주받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이라면, 그 말씀 세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그것도 우리가 속해 있는 말씀 세계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아울러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그런데 ‘아, 내가 실수했구나. 다음부터 실수 안 하면 되지.’ 이것은 아닙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 거의 모든 인간들이 진짜 크게 잘못된 게 있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하고, 회개한 자는 구원이 된다’는 그런 논리입니다. 아, 그것은 정말 잘못된 거예요. 마귀가 그런 이론을 내세웠을 거예요.

다시 한번 예를 들게요. 이 세상에서 얼굴이 예쁘고 호감이 있어서 모든 직장의 면접에서 패스된 사람이 천국 면접에 간다고 합시다. 다음 네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객관식이라서 쉬워요. 찍으면 되니까요. 천국에 담이 있다면 그 담을 통과하는 기준은 다음 중 뭘까요? 1) 못 들어간다, 포기하자. 2)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들어간다. 이게 2번입니다.

3) 회개하면 들어간다. 제가 보기가 4개라고 했으니까 1) 2) 3) 번이 답이 아닌 걸 아시겠죠. 지금 제가 시비 거는 것은 ‘회개하면 들어간다.’ 이게 답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답은 4) 인데 ‘회개가 밀고 들어와야 된다’에요. 회개가 밀고 들어와야 해요.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예언된 회개가 나를 찾아와서 그 말씀의 세계에 속한 현상화 되는 것, 나에게서 그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합왕에게 재앙이 주어지는데요, 재앙은 재앙대로 주어지면서 그 재앙이 아합왕 시대에는 주어지지 않고 그 아들 시대에는 주어진다는 것, 즉 재앙에 대한 더 세밀한 내용이 추가될 수 있는 계기는 뭐냐?

그것은 관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합왕이 진지하게 회개했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본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가 뭐냐?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된 권력이나 재산에서 발을 못 빼서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기 중심성에서 자기가 빠져나오지를 못하니까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심판받아 마땅하다.’ 이게 전제가 돼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회개는 뭐냐? 왕인데 왕의 옷을 벗어버려요.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그런 경우가 생겼다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나에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 거예요, 내가 나에게. 그러니까 내가 날 붙들고 시비 거는 거예요.

“너 뭐야?”
“나? 나는 나지.”
“너 나한테 해준 거 뭐가 있는데?”
“없지.”
“바이바이바이, 굿, 굿바이~! 너 나하고 헤어져.”
“너 나와 헤어지면 어디로 갈 건데?”

나를 대신해서 죄를 처리하신 분에게 소속되고 그분의 종이 되겠다는 것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그것은 신약이에요. 그것은 신약 성경에서 나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인류의 멸망이에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저주 받는 게 합당하고 심판받는 게 합당하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면서 이스라엘에게 남긴 이슈, 문제가 뭐냐? 도대체 저주가 어디서 오느냐는 거예요.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 저주가 나오는 중심부, 센터가 어디냐? 그게 어디서 나오냐? 그것은 신약의 십자가에서 나와요.

십자가는 신약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지금 구약을 보고 있다고요. 구약을 보고 있으니까 이 구약을 보면서 몇 가지 우리가 봐야 할 게 있어요. 신약의 십자가에서 저주가 나와요.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져버렸고 확정이 되었으면, 인간은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저주받기로 확정이 된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으로 저주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를 붙들고, 자기를 아끼고, 자기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인생 헛사는 게 되죠. 구약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두 가지를 끄집어내겠습니다. 하나는 추락, 또 하나는 상승입니다.

우선, 자손에 대한 저주를 하면서 엘리 제사장 다음에 사울 왕이 등장해요. 사울 왕이 등장하면서 좀 복잡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복잡한 내용을 제가 쉽게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사울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도 해요.

사무엘상 7장에 보면,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8절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그리고 10절에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그렇게 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요구하기를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에요. 사무엘이 그걸 기뻐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고, 백성들은 왕을 세워 달라고 억지로 요구했을 때 그때 세운 왕이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여러분께 소개할 구절은 사무엘상 10장 5-6절입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게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소년에게 주어진 현상입니다. 그다음에 역시 사무엘상 10장 10-11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고 한 거예요.

제가 이 본문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말씀의 세계에서는 왕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는 왕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권력의 구조로 움직이는 세상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세계는 무슨 세계냐?

말씀의 세계, 하나님의 예언된 세계, 선지자의 세계,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대로, 진행하는 대로 그냥 살면 되는 세계가 하나님이 표준으로 정해놓은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미 사울이 거기를 거쳤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상 19장 23-24절에 보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옷을 왜 벗습니까? 인간이 옷을 벗는다는 말은, 누구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를 꾸밀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치장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단독적인 자아의식을 내가 가질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때가 어느 때냐 하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추적했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울이라는 왕 자체에서 두 가지의 경우를 다 보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왕으로서의 책임감, 이 나라를 하나님의 왕으로서 제대로 운영해야겠다는 책임감, ‘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막대한 권력을 계속 지탱하고 유지하고 그걸 지켜내야 한다. 필요하면 계엄이라도 해서 권력이 있어야만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답다.’라는 이것이 인간들의 보통 상식적인 의식인데 뭐는 아니다? 하나님 신이 임한 말씀 세계의 관점은 아닌 거예요.

회개가 뭡니까? 회개라는 것은 본인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나한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내 소유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 나에게서 내가 벗어나는 그게 회개잖아요. 이게 오늘 본분에서 아합왕이 보여준 ‘겸비함’이라는 겁니다. 가진 게 없으니까 겸비할 수밖에 없죠. 소유가 없는데 뭘 지킬 거예요? 내 소유가 없는데, 다 주님 건데요. 이게 회개잖아요. 사울 왕이 그랬단 말이죠.

그런데 사울 왕이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 다윗이 라이벌이네? 저 다윗이 나의 권력을 탐내고 찬탈하려고 하네? 내가 다윗을 죽이지 않으면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네.’ 이런 식으로 정신이 돌아오는 거예요. 만화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애들 만화가 주로 그렇지요. 평소에는 평범한 애로 있다가 갑자기 지구가 나쁜 인간들에게 위협을 받을 때는 “크로스! 지구를 지켜라!” 해서 갑자기 빛이 나오고, 온갖 초능력이 나와서 일이 해결되죠. 그러면 다시 평상시로 돌아와서 보통 아이처럼 됩니다.

애들 만화 주제가 뭐냐? 어린아이가 아니면 이 지구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이게 주제거든요. 슝슝, 날아다니는 그 만화들도 내용이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린이가 아니면 이 지구를 지킬 수 없단 말이죠.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회개해야 돼요. 왜 회개해야 하느냐?

지구는 주님의 말씀대로 되어가지,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인간은 날 때부터 저주받고 심판받는 대상일 뿐이지, 인간보고 지구를 지키는 책임감을 준 적이 없습니다. 이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게 회개에요. 벌거벗고 있는데 무슨 책임감이 있습니까?

‘이것은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잘하겠다.’ 아니에요! 그거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감이 있으면 그 무게 때문에 추락해요. 타락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사울 왕도 어느 때는 밤낮으로 벌거벗고 있다는 말은, 책임감이 하나도 없으니까 상승, 상승 분위기에요. 가벼워지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까? 이게 얼마나 시건방진 생각입니까? 만나가 주어지는 대로 먹듯이 날마다 주어지는 말씀의 예언대로…, 우리가 먹는 건 아니고요, 그저 예언대로 될 뿐이에요. 그대로 되어질 그 예언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옵니다. 말씀이 우리 안까지 들어 오거든요.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내가 중심이 아니고 중심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을 받았던 그 사울이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변장해요. 변장하고 누굴 찾아가는데 여자 무당을 찾아가요. 그 용하다는 사무엘 선지자, 이미 사무엘은 죽었습니다, 그 죽은 사람을 끄집어내달라고 부탁하지요.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삼상 28:8).

부탁하는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권력을 여전히 내 소유로 해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여자 무당이 얼마나 용한지 변장도 소용없어요.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삼상 28:10). 또 이미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삼상 28:9)라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당신의 권력과 소유욕에서 당신이 빠져나가지 못한 이상 당신은 제대로 된 말씀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죽습니다. 구약에서 정리하면 이래요. 실제로 보통 인간들이 그냥 상식적으로 편하게 사는 것, 그것을 말씀의 세계 입장에서 보면 권력이라는 새장에 갇힌 모습이라는 거예요.

‘나는 예수도 모른다. 하나님도 안 믿는다. 나는 그저 나 살기 바쁘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요, 세상 권력 안에서 인간들끼리 그렇게 분주하게 주고받는 말이에요.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갑자기 하나님께 말이 많아져요.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걸 본 친구가 “너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가만있어봐. 나 지금 주님 보고 이야기해.” “네가 주님을 믿냐? 네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냐?” 이렇게 막 놀리죠.

말씀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길어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짧아요. 이야기해 봤자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과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 주께서 주신 어떤 말씀 중에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말씀은 단 한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땅에서 저주받고 심판받는 것은 참 합당한 조치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이 죄를 드러내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데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게 이슈화가 돼요. 문제가 된다고요. 일상생활을 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태인 것’을 감 잡는 사람은 말씀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주여,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저로서는 말씀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너무나 합당한 주의 일입니다.’라고 수긍하면 돼요. 참 쉽죠? 참 쉬워요.

그 이야기가 로마서 8장 28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무슨 말이냐? “주여, 제가 실수했습니다.” 하는데 네가 실수를 한 게 아니에요. 주님 앞에 실수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그것은 굉장히 건방진 말이에요.

실수가 개발된 거죠. 우리의 오류가, 내가 몰랐던 오류와 실수와 연약함이 취약점이, 주님이 일으킨 사태 안에서 새롭게 밝혀진 거죠. 왜? 밝혀져야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요. 무슨 선을 이루는데요?

왜? 밝혀져야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무슨 선을 이루는데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를 고소하리오? 내가 너를 위해서 모든 죄를 사했는데 누가 너 보고 죄 있다 그래요, 누가? 죄 없어!”라고 언급해 주는 그 말씀은 주님이 중심됨을, 중심성에서 활동하는 그 활동성 안에 이미 우리가 같이 놓여 있는 상태에서 파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가볍지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니까 가볍죠. 상승 모드입니다. 가벼워서 새털처럼 자꾸 위로 올라가고 싶어요, 가벼워서. 위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세상에 나와서 누구하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주식 아무 데나 던져놨는데 30배나 올랐고, 나는 이번에 다섯 배나 꼬라박았네. 이게 뭐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상승 모드가 추락 모드로 바뀔 때, ‘아, 내가 저걸 찍는 게 아니고 이걸 찍어야 되는데 이건 실수였어’ 하죠.

그것은 실수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이 세상 모든 사태에서, 인간에게 ‘실수’라는 게 얼마나 교만한 말이에요. 인간은 실수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실수를 유발함으로써 주께서 찾아주시는 ‘회개’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 회개는 뭐냐? ‘나의 존재 자체가 주께서 하는 일에 방해물’이라는 사실을 정기적으로, 새롭게, 새롭게 파악하게 하시는 일이 바로 말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의 중심 조건은 ‘십자가’지, 주께서 하신 일이지, 내가 한 회개는 내게 구원의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식의 회개, 내가 아는 식의 회개는 나한테 또 책임감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악 체제, 윤리⸱도덕에 해당되는 회개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가짜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합왕은 그 시대에 처참하게 망가져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합왕을 잠시나마 회개케 했어요. 회개케 함으로써, 아합왕에게 회개를 들이댐으로써 그 회개의 효과로써 아합왕 때는 재앙이 내려지지 아니하고 그다음 대의 아들에게는 재앙이 내려진다고 주께서 정리를 해줍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재앙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 두 번째, 재앙이 면제되는 경우는 본인의 권력이나 본인의 소유로부터 본인이 작별할 때입니다. 작별하는데 본인이 알아서 작별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을 가지고, 엘리야의 말씀, 선지자의 말씀을 가지고 찔러주셔서 그 말씀이 잠시나마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붙들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허락합니다.

일종의 벌거벗은 상태, 내가 나를 조작하거나 연출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태, 우리는 날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러한 구조 안에서, 더 이상 자기를 연출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크게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저 ‘여기까지가 내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내 것이 아니다.’ 하며 협소하게 세상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말씀 세계 안에서 우리가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그 말씀 세계가 얼마나 기쁨의 지적이 되고 그게 합력하여 주 앞에서 선함이 되는지, 주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고 참여시키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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