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전쟁의 목표와 목적

아빠와 함께 2026. 1. 1. 09:03

전쟁의 목표와 목적 

2025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1-3

(22: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내었더라
(22:2) 제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22:3)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아람나라하고 북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된 이유는 길르앗 라못이라는 땅을 아람나라가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있었던 아람 나라의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이 이겨서 기릇 라못 땅은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왕상 20:34)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돌려받기 위한 전쟁을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먼저 개시한 겁니다. 누가봐도 인간 대 인간의 전쟁입니다.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란 의견 차이 때문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주장에 옳다고 내세울 때, 분쟁의 해결은 결국 전쟁을 통해서 실시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이방민족인 아람나라 왕의 생각입니다. 이미 군사력으로 강대져서 힘으로 북이스라엘과 밀리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얕보고 길르앗 라못 지역을 북이스라엘에 돌려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이 아람나라 왕과 동일한 생각을 아합왕이 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보다 더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하여 길르앗 나못을 아람나라에게서 돌려받는 것이 북이스라엘로서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돈 관계인 남쪽 유다나라 왕 여호사밧까지 합류시켰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두어 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나아갔더니 아합이 저와 종자를 위하여 우양을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더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대하 18:1-3)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으로 굳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으로 보면 인간 대 인간 대 전쟁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전쟁은 예수님과 악마의 전쟁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즉 궁극적으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입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율법의 효능을 통해서 영적 전쟁이 세상 전쟁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6) 소년 다윗은 전쟁 상대자에게는 율법이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음을 간파했습니다. ‘할례없는 자’들에 대한 ‘할례 있는 자들’의 전쟁은 필히 율법 실현이 곧 ‘현실 자체’가 됨을 소년 다윗은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아합왕의 전쟁은 이런 소년 다윗의 전쟁과는 달리 그냥 ‘인간 대 인간의 힘겨루기’ 양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을 배제하는 이유는, 전쟁의 명분과 정당함과 권한이 전쟁을 유발한 자신들에게 돌아와 자기 의가 됨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이 이방나라인 아람의 왕이 갖고 있다면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는 이스라엘 왕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은 바로 예수님의 의로움과 악마 의로움의 차이를 보이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의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1-3)

배후의 전쟁의 목적은 요한일서 3:8에 나와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포괄적이고 일관된 원칙에 준해서 아합왕은 전사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는 ‘우연히’ 적이 쏜 화살을 맞아 죽습니다.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왕상 22:34)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과 움직임은 우연입니다. 예수님과 악마의 전쟁에서 파생된 역사 속의 모든 현상들은 다들 우연에 속합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우연이 아니라고 하고 자신의 애쓰고 노력한 ‘필연적’ 결과로 얻은 것이라고 우긴다면 그 순간 그 인간은 고정됩니다. 변화을 멈춘 고정이 됩니다.

고정이 되면 ‘이러어러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주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렇고 확고하고 고정된 나를 건드리면 내가 가만 두지 않는다. 전쟁이다. 싸우자!”라고 나올겁니다. 이로서 전쟁의 명분과 정당함과 권한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서 자기 의(義)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기대가 바로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과 무관한 이방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율법의 규정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로운 자도 없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
3)

즉 전쟁 승리를 통해서 자기 의로움을 확보할 자격자가 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전쟁은 인간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성도만이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성도의 전쟁은 세상 재판을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구약의 가나안 땅은 두 이질적인 전쟁관의 마주침을 보여주는 무대였다면 오늘날 이 세상도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마주치는 무대입니다.

자기 의로 최종 가치라 여기고 자기를 위한 싸움에 나서는 자는 주님의 의에 의해서 돌파당해 가운데 찢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십자가가 보일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잘남으로 멈추지 말게 하옵소서. 모든 공로가 예수님에게 돌아가도록 확정되었음을 알고 매사에 주님의 무대에서 맡은 죄인 연기에 집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열왕기상 22장 1-3절(전쟁의 목표와 목적) 25123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2장 1-3절입니다.

열왕기상 22:1-3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었더라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전쟁이 없었는데 전쟁이 있다. 그래서 ‘전쟁할 때 사람과 사람이 전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쟁할 수 있는 어떤 명분이나 정당성과 권한이 없습니다. 인간은 전쟁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누가 하느냐?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영적 세계가, 거기에 두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그 영적 존재로 인하여 전쟁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은 없습니다. 이게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서로 싸우느냐? 전쟁은 피할 수 없는데, 그래서 반드시 일어나는데, 그렇게 일어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전쟁 같은 그런 전쟁이 아니고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전쟁의 대리전이죠. 거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웁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전쟁,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의 전쟁, 이게 전쟁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전쟁은 대리전쟁이라 할 수 있어요. 인간 전쟁은 없는데 인간은 만났다 하면 싸우죠.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전쟁도 할 수 있는 명분과 정당성과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떤 무대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 무대가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 그 전쟁의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감으로써 거기에서 차이 나는 이질적인 두 민족 사이에서 피 터지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요.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은 사람 대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이방 나라에서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가지 않은 전쟁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한판 붙자’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한 판 붙자. 너 인간이잖아. 그리고 나도 인간이잖아. 우리 인간 대 인간의 전쟁으로 한번 붙어보자.’라는 식으로 전쟁하는 거예요.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애 과외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젊은 부부가 말다툼을 했어요. 남편 쪽에서는 ‘학원을 그만 보내자. 애 잡겠다. 애들이 어릴 때도 낭만이 좀 있어야지 맨날 학원 가서 공부만 해서는 안 되잖아.’라고 하는 겁니다. 남편 쪽에서는 “애 학원을 좀 줄이든지 끊든지 하자.” 이렇게 하는 거지요.

아내 쪽에서는 “지금 바짝 기초를 잡아놔야 한다.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못 따라간다. 지금 따라잡는 정도가 아니고 선행 학습을 해서라도 선두 그룹에 들어가야 나중에 의대 보낸다.” 이렇게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논쟁하는 겁니다.

이게 전쟁이죠. 논쟁할 때 둘 다 합의 본 게 있어요. ‘내가 제시하는 이 의견은 가정의 화목과 우리 자식 장래에 도움 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둘 다 똑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 있어요. 엄마나 아빠 둘 애의 장래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의견을 제시하는데 왜 그렇게 논쟁하죠? 논쟁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가정의 잘못된 점은, 논쟁하고 있는 그 가정이 하나님이 지정한 싸움, 전쟁의 무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람나라하고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자꾸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이스라엘 이겨라’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어서 아람나라의 장군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람의 왕, 지금의 시리아 왕이라 해 봅시다. 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하는데 전쟁하도록 유다 왕이 이스라엘 왕을 자극합니다. 열왕기상 22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0장 34절에 보면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벤하닷은 아람 나라 왕이죠. 그 벤하닷이 이스라엘과의 1차 전쟁, 2차 전쟁에서 졌어요. 그래서 ‘아벡’이라는 곳에서 조약을 맺습니다. 요단강 동쪽의 땅, 아라비아 쪽이지요, 지중해 쪽이 아니고 동쪽 땅이지만 이게 갓 지파의 이스라엘 땅인데 그 이스라엘의 동쪽 땅을 원래대로 다 돌려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 놓고는 약속을 안 지켰어요. 예를 들어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라고 해놓고는 러시아가 그걸 쳐들어왔잖아요. 그렇게 약속을 안 지킵니다. 약속은 소용없어요. 그냥 쳐들어가면 그만인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물어보는 거예요. 자꾸 이스라엘 편들지 말고 아람 나라 왕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아람 나라 왕 당신은 왜 약조를 어기고 길르앗라못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아람 나라 왕이 하는 말은 이겁니다. “내가 이 전쟁을 하는 명분은 그 땅이 우리 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내 나라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전쟁한다.”

그러면 마이크를 이스라엘 쪽으로 돌려봅시다. “이스라엘 왕 당신은 왜 길르앗라못을 차지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이게 본래 우리 땅인데 전쟁에서 빼앗겼으니까 도로 찾기 위해서 전쟁한다.”라고 이야기하지요.

‘애를 학원 보낼 거냐, 안 보낼 거냐?’에 대해서 제3 자가 보게 되면, 가정의 화목과 그리고 애의 장래를 위해서 부모가 같이 힘쓴다는 점에서는 합의 본 것처럼 보이지만 합의를 봤다면 논쟁이 안 일어나야 되잖아요.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내 자식을 학원에 계속 보내야 한다’라고 하든 혹은 ‘아니다. 학원 너무 많이 보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라고 하든 이것을 최종 점검할 수 있는 점검의 절차가 둘 다 막혀 있어요.

‘내가 이야기하니까 옳다’ 그걸로 그쳤어요. 그걸 돌파 못 한 거예요.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 내 이야기에 반대하지 마. 왜?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냈으니까. 내가 이야기 끄집어냈으니까 너는 내 말을 그냥 듣기만 해.’ 이거거든요.

또 다른 예를 들게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내가 우울증 걸렸다는 걸 알아요. ‘우울증에서 낳기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텐데 지금 우울증 때문에 신앙생활 못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본인도 그렇고 남들도 그렇게 오해해요.

그러나 방금 이야기하는 예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뭐냐? ‘이게 내 생각이고 나에게서 나온 의견인데 그 의견이 과연 하나님의 전쟁, 악마와 예수님과의 전쟁의 그 기준에 비추어서 그것이 옳은 의견인지’를 대조해 봤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걸 대조해 봤어요? 우리 가정의 자식이 잘돼야 한다는 이 무대, 이 무대가 하나님이 지정한 하나님의 영적 전쟁의 무대와 일치되는 됩니까? 일치돼요? ‘우리 애를 학원에 보낼 것인가, 안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 잘났다, 할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한 번 물어보자’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전쟁은, 다툼은 인간에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나와요.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할 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돼 있어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상당히 특수한 거예요. 남들 보기에 너라는 인간과 나라는 인간, 너라는 집단과 나라는 집단이 서로 전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다윗은 왜 그렇게 보이지 않았느냐? 인간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모든 것은, 인간 보기에는 필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연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예요. ‘요래 하면 요래 돼야 하고, 또 요래 하면 요래 돼야 해서 내 인생은 요래 돼야 한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만약에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돼야 하고…’, 이런 식으로 내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한다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그 중심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명분과 권한과 정당성이 나한테 있다’라고 우기는 게 돼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았기에 나는 정당하다. 그런데 누군가 날 건드리면 나는 정당하니까 그 정당성을 지키고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든지 가만두지 않고 싸우겠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내가 보기에 ‘애들 학원은 계속 꾸준히 보내서 기초부터 쌓아야 한다’라는 그 내 주장을 성경 말씀 앞에, 그 말씀 앞에 내놓은 적이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걸!

그걸 만약에 안 내놓으면 그것은 아람 나라하고 똑같아요. 여호와의 말씀은 있으나 마나 똑같아요. 여호와의 말씀은 물어보라고 준 거예요.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의견이 말씀에 포함되는가? 달리 이야기해서 나는 우연한 존재이고 늘 변화하는 존재인데 만약에 ‘내가 이렇게 하고, 또 뭘 이렇게 하고…, 그래서 그게 나다’라고 돼버리면 나는 변화에서 고정으로 바뀌고, 우연에서 뭐로 바뀌느냐? 필연적으로 바뀌어요.

필연적으로 바뀌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누구든지 이런 필연적 가치를 지닌 나를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람 나라에요.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고 전쟁이에요.

제가 질문할 테니까 여러분 한번 답변해 보세요. “당신은 왜 삽니까?”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전쟁 할 때 이 질문에 대한 그 답변이 달라야 됩니다. 우선 아람 나라 왕한테 물어봅니다. 당신은 왜 삽니까? 답변은 “나 때문에 삽니다.” “왜 당신 때문에 삽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있는 그 나를 위해 삽니다.”그러면 “당신은 왜 삽니까?” 그 질문을 이스라엘한테 물어보면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답변이 나와야 돼요.

시편 115편 1-3절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람 나라 왕이나 이스라엘의 아합왕이나,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구색은 이스라엘인데 시편 115편 1-3절의 그 전쟁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어디 우리 땅인데 건드려!’ 남쪽의 여호사밧 왕과 함께 “저게 원래 이스라엘 땅이니 도로 찾기 위해서 함께 전쟁합시다.” “오케이! 전쟁합시다.” 그 전쟁의 결과가 뭐냐? 전쟁의 그 결과가 북쪽 이스라엘 왕이 죽어요, 죽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전쟁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전쟁하면 안 돼요. 뭔가 고정돼 있으면 고정된 그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움이 되는데 우리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또 달라요. 우리는 고정할 만한 어떤 정당성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이방 민족에게나 물으세요. 이방 민족, 아람 나라, 그런 사람들에게나 물으라고요. ‘나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과연 이것을 결정할 만한 정당성이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볼 마지막, 그 돌파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에게는 그게 돼요. ‘내가 이거 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한다. 뭐 어쩌라고. 끝!’ 이렇게 되는데 이스라엘 같으면 다윗의 전쟁은 그게 아니거든요.

오늘 본문이 아합왕, 그리고 유다 왕 여호사밧과 아람 나라와의 전쟁인데 이게 원래 이스라엘 전쟁 원칙에 위배돼요. 그 원칙에서 이탈되었어요. 이탈됨으로써 진짜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는 하는 것을 이러한 이스라엘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유다의 여호사밧왕, 그리고 아랍 나라 왕 그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이스라엘 땅 자체가 하나의 무대예요, 연극 무대라니까요! 진짜 전쟁은 뭐냐? 인간을 앞장세우는 예수님과 악마의 전쟁이에요. 예수님의 전쟁은 주님의 그 나라의,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하는 전쟁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면서 움직이는 전쟁, 이 전쟁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전쟁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전쟁에서 왕들이 등장할 때 왜 왕들이 등장하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집단의 고정성을 대변해 주고 있어요. 한마디로 대표성입니다. 그 단체, 그 집단을 대표하는 자가 왕이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아람 나라 왕하고는 달라야 하겠죠. 달라도 많이 달라야 돼요. 아람 나라 왕의 마지막 대표성은, 내가 왕이라는 왕의 권력에 의해서 멈춰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어떻해야 하느냐? 이스라엘 왕은 ‘내가 왕이다’ 하면 안 되고요, ‘만군의 여호와가 왕이다’라는 쪽으로, 보이는 왕에서 멈추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 되심으로 이렇게 보이는 그 ‘나’라는 왕을 뚫고 여호와의 왕 됨을 보여줘야 할 그러한 임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 말이 맞아요. “이 싸움은 사람의 싸움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한 싸움이다!” 이렇게 돼야 해요. 그냥 신앙 좋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로 그래요, 진짜로! 다윗은 자기를 뚫고 나가요. 자기를 뚫고 보이지 않는, 그리고 자신과 함께 계신 여호와의 전쟁이 관통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와 싸움하고 있어요? 나의 존재로 막혀 있는 게 아닐까요? 막혀 있으면 안 돼요. 사무엘상 17장 26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이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요.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그다음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라고 했어요.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없는 블레셋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의 신앙은 뭐냐? ‘이 전쟁은 여호와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을 어떤 근거에 의해서 제시할 수 있는가?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의 내용이 뭐냐? ‘모든 전쟁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다’라는 겁니다.

이 말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전쟁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것이 율법대로 예언대로 실행되는데 그게 전쟁 형식이라는 거예요. 그 전쟁 형식은 어떻게 되는가? 율법이 없는 이방 나라와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과의 그 차이, 그 차이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한쪽은 율법과 함께 있는 민족, 곧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는 민족이고 다른 한쪽은 여호와도 없고, 말씀도 없고, 율법도 없는 민족, 그 둘 사이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은 그걸 뭐라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자존심과 인간의 의, 너는 너의 의고 나는 나의 의고, 여기서 누구 의가 정당한지, 누구의 명분이 확실한지 한번 붙어보고 확인하자’는 거예요.

평소 세상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툼이 있을 수 있잖아요.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하잖아요. 현대사회에서 교통사고로 분쟁이 있을 때 그 끝에는 어디로 갑니까? 서로 잘했다고 할 때 “그러면 재판으로 가볼까? 법원에 가볼까?” 이렇게 한다고요. 법원에 왜 갑니까? 재판 왜 합니까? 재판해서 뭘 기대할 수 있습니까? 재판에서 이겼다는 것으로 나에게 돌아올 게 뭡니까? ‘나는 의롭다.’에요. 나는 의롭다.

아람 나라 같은 이방 민족들은 “넌 길르앗라못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붙어보자. 서로 옳다고 하니까 붙는 수밖에 없지.” 붙어서 승리한 쪽이 어떻게 되겠어요? 아람 나라의 왕이 “길르앗 라못은 내 것이다.” 하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아람 나라가 승리했다면 누구의 의로움이 정당화되고 누구의 명분이 확실해지겠어요? “역시 아람 나라 내 말이 옳다. 그만큼 나는 의롭다. 그러니까 내가 전쟁할 명분은 확실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것이 옳은지 성경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19절까지 굉장히 긴데요, 빨리 읽어봅시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그렇다면, 잘 들어보세요, 오늘날 하나님 주님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떠해야 합니까? 내 의가 없어야 되죠. 이 말씀대로 되어야 하니까. 이해 안 되십니까? 이게 시편 14편을 인용한 거거든요? 1-3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 의인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도 없어요.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말대로 ‘모든 하나님의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근거는 율법’에서 나왔잖아요. 그런데 시편 14편에 나오는 그 율법에 의하면 ‘의인은 없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 치우쳐서 죄인이다’라고 규정을 했으면, 어떤 사람만이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님의 의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다시 말해서 ‘내입장에서 남과 싸울 어떤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 그리고 권한이 내게는 없다’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만 하나님의 의만 드러내는 전쟁에 속한 사람이에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가?’라고 한다면 예를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이렇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남하고 싸우지 말라는 식입니다. 왜? 인간 대 인간이 전쟁할 권한과 명분과 정당성은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전쟁은 예수님과 악마의 전쟁이죠. 무대입니다, 무대.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지금 이 무대에서 설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은요, 자기가 어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어요. 무대는 뭔가 연출자가 있고 공연하는 곳이잖아요. 공연한다는 말은,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고 그냥 연기자예요. 이스라엘 왕도 마찬가지고, 여호사밧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자신의 전쟁의 취지와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연기자로 삼아 충실하게 연기에 몰두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연기에 몰두해야 하는데 살다 보니 너무 연기를 실제같이 해요.

우리 자신의 명분과 정당성과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요. 이거 아니면 내가 살 가치가 없는 걸로 착각해서. 누굴 위해 사십니까?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많이 물어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죠. ‘너희는 그 나라 의를 위해 살라’(33절)고 했어요.

그런데 평소에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할 우리가 누구하고 다투면서 누구 의를 방어하느냐 하면, 자기 잘남을 방어 한다고요. 왜? 우리는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성도라면 우리의 본성이 나밖에 모른다는 걸 가지고 거기서 ‘stop!’ 하면 안 되고, 이것을 성경 말씀에서 어떤 식으로 정리했는지를 찾아봐야죠.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이길 권한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져버려라.”

왜? 네가 지는 게 아니고 넌 지는 역할, 그 배역에 충실한 게 되기 때문에요. 아합왕이 전쟁을 하는데 전쟁 하다가 죽어요. 어떻게 죽느냐? 열왕기상 22장 34절에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여기 보면 ‘우연히’에요, 우연히. 아합왕은 안 죽으려고 했어요. 열왕기상 22장 30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역대하 18장 1절에 보면 그 둘이 사돈 관계에요. 그래서 그 전쟁에 여호사밧이 합류된 겁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두어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나아갔더니 아합이 저와 종자를 위하여 우양을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더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두 집안이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예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연합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 그것은 율법이 없는 이방 민족한테나 그렇게 하라는 그 말입니다. 아합왕이 전쟁 중에 결국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는데요, 여호수아와 모세 전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 전쟁부터 먼저 봅시다. 출애굽기 32장 34절에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니까 모세의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천사가 와서 모세를 이끌면 모세는 그냥 시키는 배역, 연출, 이스라엘 땅이 무대니까 연기자가 무대에서 연기하면 되지 자기가 주인공이라도 된 양 설치면 안 돼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시키는 대로! 자기에게 '명분과 정당성과 자기의' 같은 것은 없어요. 권한 같은 것 없습니다. 승리는 주님이 승리하지 내가 왜 승리하는데요?

아까 본 시편 115편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게 전쟁의 목표입니다. 오늘 본문 설교에서 어려운 게 별로 없을 건데요. 여기서 어려운 거 잠깐 하겠어요. 목적과 목표의 차이가 있어요. 그냥 목표와 목적의 차이라고 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게 되면 구분이 잘 될 겁니다.

전쟁의 목표는 시편 115편 1절입니다.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게 목표에요. 그러면 목적은 뭐냐? 목적을 말씀드릴 텐데 이제 여러분들이 목표와 목적을 구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적은 요한1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목적이에요. 숨어있는 그 깊은 의미는 목적이 돼요. 숨어있는 것, 그게 역사로 나타난 것은 목표입니다.

전쟁의 목적은 뭐라고요? 창세기 3장 15절, 주님이 뱀을 쳐부수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 목적을 달성하는 현상이, 약속의 땅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자들이 나타나는데 그 연기자들이 오늘 본문의 아합왕이고, 여호사밧왕이고, 아람 왕이고 그런 겁니다. 전에는 모세가 나타나고, 여호수아가 나타났고요, 오늘날에는 우리가 재판장에 끌려가기도 하고 이런 거요. 전부 다 우리는 하나의 엑스트라에요. 내 인생의 감독은 내가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3-4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 이야기입니다. 여기 의가 두 종류가 나와요. 하나는 이방인들의 의인데 자기 의로 모든 의미가 막혔어요. stop이 되어 있어요.

아까 질문 다시 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가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면 묻습니다. “그러면 왜 사십니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산다. 그게 나쁘냐?”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성도가 뭐라고 하느냐? “인간은 원래 나쁩니다. 그걸 인정하시겠습니까?” “난 인정 못 해.” 그게 아람 나라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인간은 원래 나쁩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요.” 이게 내 전쟁이 아니잖아요. 내 전쟁이 아닌 데, 악마에 속한 자들은 뭐냐? 악마가 자기를 뒤에 감추고는 성도인 그들을 앞장세워서 ‘이건 너의 자존심이 걸린 전쟁이고, 너의 위신과 명예와 정당성과 명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이기면 넌 의로운 자야.’ 이렇게 자꾸 뒤에서 밀어요. 이 세상 전쟁이 이런 영적 전쟁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알았죠? 전쟁의 목적은 ‘악마를 멸하기 위해서.’ 목표로 그것이 나타난 현상은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만한 어떤 공로도 보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게 목표에요.

이걸 응용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이 사는 목표는 뭡니까?”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구분하라고 했는데 막상 물으니 또 답변하기가 애매하죠? 그러면 목적부터 먼저 질문해 봅시다. “당신이 사는 목적이 뭡니까?” “내가 잘났기 때문에.”

그러면 구체적으로 “당신이 사는 목표는 뭡니까?”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증거 수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확실하죠, 이제? 내가 잘났기에 사는 그것이 목적이고, 왜 잘났는지를 증거 수집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목표가 돼요. 우리 인간의 형편이 지금 이렇습니다.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 나라 의를 구해야 하는데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내가 잘못한 거 없잖아. 그러면 내 말이 옳잖아.’ 거기서 자꾸 멈추고 마는 거예요.

자, 과연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는 어떻게 했는지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5장 15절을 보기 전에 약간의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얼마나 책임감이 넘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지금 광야에 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저 약속의 땅에는 아낙 자손이라는 아주 크고 장대한 거인족이 살고 있고, 또 무기도 발달해서 게임이 안 돼요.

원래 인간 대 인간은 처음에는 누가 옳은지 명분 싸움을 하다가 “그러면 누가 옳은지 붙어보자.” 하잖아요. 그렇게 붙을 때는 여호와가 빠져요. 여호와도 빠지고, 여호와의 말씀도 빠지고, 율법도 빠지면서 뭐냐? 누가 힘이 센지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우울증 나으면 신앙생활 잘 한다.’

여러분, 우울증이 있거나 혹은 우울증이 걸리지 않은 정상인 인간도 그 속에서 자기 의를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부합되는 거예요. 병이 나았다고 해서 신앙생활 더 잘하고, 병이 들었다고 해서 신앙생활 더 못하는 게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넌 어디서 막혀 있느냐? ‘나의 의’에서 창호지 뚫듯이 찢어져서 ‘주님의 의’쪽으로 가려면 그냥 갈 수가 없고 ‘나의 의’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 비로소 그 사람 앞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 강도가 받았던 구원, ‘이 세상에 하나님 의보다 더 귀한 건 없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옵니다.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말씀이 실현되는 거죠.

그러면 주님께서 “너 훌륭하구나”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너 대단하네! 믿음 좋네.” 하지 않습니다. “너는 네 배역에 아주 충실한 연기자였네.” 죄인 됨에 충실한 연기자가 ‘나는 연기자에 불과하고, 배역을 맡은 자에 불과하고, 이 무대는 주님이 깔아놓은 무대고 내 무대가 아니고, 주님의 의가 드러난 무대’라는 데서 결국 나오는 것은 ‘말씀은 말씀대로 예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서 가장 주의가 되어야 할 것은, 뭔가 자아가 고정되고 확정되면 굉장히 곤란해요.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 난처하거든요? 실제로 다른 사람이 볼 때 “이건 안 돼. 끝났어, 끝났어! 이스라엘은 이제 다 죽었어. 몰살당해.” 이렇게 할 텐데 여호수아 5장 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용감하게 나섰다?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용감하게 나서지 않았어요. 여호수아 5장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지금까지는 여호수아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해 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럴 때 14절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군대 장관이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 꿇어!”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엎드려 절했습니다. 갑자기 종이 돼요. “주여, 종에게 무슨 역할을 맡길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수아 5장 15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의 군대 장관의 역할이 전쟁하는 거예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전쟁하는 겁니다. 그 전쟁하는 하나님이 앞장서서 하는 전쟁이 바로 마귀를 이기는 전쟁이에요. 그게 바로 전쟁의 목적이었어요. 그 목적대로 되어가는 증거 수집하는 현상이 뭐냐?

모든 매사에 “영광을 저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잘남을 세우고, 내 의만 챙기고, 나의 명분만 챙기면서 ‘나는 누구한테 이겼다’ 그것만 생각하는, 하나님보다도 나부터 생각하는 이런 나, “주여, 영광을 이런 저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모든 영광은 십자가 지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께 돌리옵소서.” 이 전쟁 무대에 지금 우리가 가담되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전쟁은 우리 보기에 ‘필연’ 같지만 우연히 벌어진 전쟁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사람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딱딱 원리로 계획 잡아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의 들이닥침임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여주시고, 그 사건 속에서 필연적인 예수님의 승리됨과 공로만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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