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위의 십자가
2025년 12월 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0:35-43
20:35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20:36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20:37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20:38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그 눈을 가리워 변형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20:39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질러 왕을 불러 가로되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20:40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20:41 저가 급히 그 눈에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저는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줄 알아 본지라
20:42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20:43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죽음’, 그것은 모든 인간 실존의 바닥을 이룹니다. 이 바닥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모든 바탕에 악마의 정신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마땅함’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합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자신의 정신에 설치되어 있는 선악체계를 활용하는 것 뿐입니다. 즉 “착하게 살면 내 마음에 평화가 온다. 악하면 나만 손해다”라는 태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적 전쟁을 기획하셨습니다.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상당한 폭력적이며 폭력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영적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영적 폭력 사태에 관여되는 것만이 선악체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악마와의 대립에서 필연적인 폭력 사건을 하나님께서 역사 끝까지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매맞는 하나님상’ 이것은 그 누구도 상상못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이방민족과 상대해서 처음의 영적 전쟁의 본질을 보여야 될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일을 잘 드러내지 못하면 하나님의 폭력이 관여하게 됩니다. 아합의 북이스라엘은 아람나라와의 전쟁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 못한 결과입니다. 아합 왕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관여해야 하시는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왜 처음부터 월등한 군사력으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이 전쟁을 돌입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고 이 두려움은 악마은 인간들을 끝까지 자기 수하에 둘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의 근원을 파헤치므로서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손에 마땅히 죽어야 될 정당성을 발견토록 하는데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상호 매여 있는 신세인 두 민족간의 싸움을 영적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 어느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영적 안목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온 선지자의 행색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연출하시고 감독하시고 제작한 연극이 선지자를 통해서 실시되는데 실은 모든 현실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항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지에서 벗어난 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꼭 죽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두려움이 없이 죽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전쟁의 승리로 인해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여깁니다. 그동안 자기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던 아람 나라 벤하닷이 자진해서 항복을 선언한 채 자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과 육의 전쟁에 그칠 뿐입니다. 하나님이 짜신 연극 5명의 등장 인물이 관여되어 있고 각각은 다른 관점을 지니고 맡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선지자, 두 번째 인물은 아합왕, 세 번째 인물은 벤하닷, 네 번째 인물은 선지자를 차마 때리지 못한 동무, 다섯 번째 인물은 선지자는 사정 봐주지 않고 때려버린 동무입니다.
아합왕과 벤하닷은 전쟁을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일을 보았습니다. 승리한 편은 전쟁의 승리 보상으로 여유와 안식과 평화가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안목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 폭력은 항구적으로 영구적으로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가 바로 그런 겁니다.
첫 번째 인물인 선지자와 아합왕과의 차이는 상처입은 얼굴과 맨 얼굴의 차이입니다. 폭력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아예 폭력의 연속성을 통해서 영적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선지자가 스스로 때려서 입은 상처가 아니라 남이 때려서 생긴 상처입니다. 누가 어떤 뜻에서 상처가 필히 생겨야 했을까요?
바로 자기 안에 자리잡은 선악체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땅히 버려야 하고 부정되어야 할 의식인 것을 인정하는 자가 때려서 생긴 상처입니다. 그렇게 되면 때린 다섯 번째 인물은 선지자의 상처와 의미있는 연결자가 되는 겁니다. 반면에 선지자 얼굴에 상처내기를 거부한 자는 여전히 자신의 선악체계로 존재 바탕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을 버텨내어 보겠다는 자에 해당됩니다.
이 네 번째 인물이 선지자의 얼굴을 상처를 내지 않는 결과로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음의 인질이 되어 있으며 그 인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착함으로 악마가 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함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전도저 2:14-1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즉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빈 껍데기임을 인정하는 자가 바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 자입니다. 이런 자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천국까지 전달하는데 도중에 배달사고 나지 않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모든 일이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말미암고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성도란 그저 가라하면 가면 되고 오라하면 오면되는 겁니다.(마 8:9)
“나를 치라! 그리고 구원받아라!” 이제는 오늘날 성도들 차례입니다. 모두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새겨진 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음을 당하기로 확정되었음을 도리어 역할로 전환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9강-열왕기상 20장 35-43절(붕대위의 십자가) 25120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0장 35-43절입니다.
열왕기상 20:35-43
“선지자의 무리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그 눈을 가리워 변형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질러 왕을 불러 가로되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저가 급히 그 눈에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저는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줄 알아본지라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죽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정녕 죽으리라’는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어가면서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굳이 죽이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가 말씀을 통해서 발견되는 사람, 그 사람은 죽기 전에 하나님과 접선이 된 사람, 구원되는 사람이 됩니다.
어차피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그냥 ‘늙어 죽는다, 병들어 죽는다’라는 식의 인간들이 설명하는 기존 죽음이 아니에요. 꼭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결의를 정당한 것으로, ‘아, 이건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일하시는 것이다’라는 것을 좋게 여기면서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이 본문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리하기가 좀 힘들 겁니다. 하나님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이 아람 나라하고 전쟁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건방진 아람 나라가 두 번씩이나 패배했습니다.
이 아람 나라는 현재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보고 지금의 시리아를 그때의 아람으로 본다면 ‘저 아람 나라의 헤즈볼라가, 시리아가 힘이 세다고 두 번이나 이스라엘에 쳐들어왔다가 두 번이나 졌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누가 관여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관여해서 이스라엘이 이겼거든요.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군사력으로서는 아람 나라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항복하기로 작심하고 전쟁에 임했는데 결과적으로 두 번씩이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이 승리한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우리가 져야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는가? 그것 한 개 하고요, 두 번째,
●왜 처음부터 우리가 저 아람 나라보다 더 센 군사력으로 이길 수 있게 하신 게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기게 하셨을까?
처음부터 강한 군사력을 줘서 “이스라엘 너는 내 편이니까 아람 나라를 이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아람의 막강한 군대를 이길 수도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누가 봐도 이건 지게 된 게임이에요. 지게 돼 있는 전쟁이라서 ‘도저히 이거 못 이깁니다.’ 항복할 마음 자세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겼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긴 것은 물론 하나님 때문이지만 ‘왜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길 만한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서 장만해 주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압도해서 이기는 방식,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취해야 될 전쟁 방식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뭘 가지고 있어서 덜 가진 자를 이긴다. 그거는 이방 민족,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 민족이 전쟁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전쟁, 누가 봐도 이길 만해서 이겼다는 전쟁은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 임하면서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겁을 낸 거예요. 이 두려움이라는 것,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관여합니다. 사람이 힘이 많다고 해서 안 두려워하는 게 아니에요. 힘이 없는 자만 두려워하는 게 아니에요. 힘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이 두려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심이었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자녀들은 혈육( flesh and blood )에 속했다. 혈육이라는 것이 인간을 대변하는 개념이 되었어요. “인간이냐?”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너 혈육이지?” 이렇게 묻는 거에요.
그러면 혈육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사망에 잡혀 있는 상태를 ‘육’이라, ‘혈육’이라 해요. 죽음이 육을 갖고 있으면 육은 죽음 앞에 ‘꼼짝마라’가 되는 겁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는 누구냐? ““…곧 마귀”가 돼요.
그 마귀가 어떻게 했느냐? 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마귀가 인간에게 관여해서 압도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그 무기가 뭐냐? 두려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네가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 두려움이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 두려움의 현장에 관여합니다.
왜 관여하느냐? 관여해야 육에 대해서 두려움을 행사했던 그 마귀,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서 분명히 마귀가 그렇게 한다고 했어요. 인간에게 그렇게 마귀가 행사해요. 그 마귀와 하나님의 전쟁이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지요. 모든 인간은 남자 출생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 메시아죠, 메시아와 악마의 최초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밀어붙입니다. 인간들은 마귀가 ‘꼼짝 마라’ 해서 벌벌 떨고 있어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창세기부터 있었던 처음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통해서 표출해 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이방 민족은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 없는 쪽은 마귀 쪽이고 하나님이 있는 쪽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전쟁, 영적 전쟁, 마귀와의 전쟁을 어떻게 그 시대에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열왕기상 오늘 본문 앞의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에 두 번이나 패배하니까 기세등등했던 벤하닷이 갑자기 쪼그라들었어요. 쪼그라들어서 변장을 하는데 어떻게 변장하느냐? 열왕기상 20장 32절에 보면 “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가로되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살려주세요.’ 완전히 기가 팍 죽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겁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고 허세 등등했던 그가 목숨을 빼앗기게 되니까 여기서 두려움이 발생된 거예요. 죽을까 싶어서. 그 허세를 계속 못 부리는 거죠.
인간이 허세를 부려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악마에게 장악당한 인간의 육적인 본모습이죠, 본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 아합에게 이방 민족이 갖고 있던 그 허세가 옮겨온 거예요. 옮겨 와가지고 자기가 ‘이제는 이겼다’ 이거거든요.
이 전쟁에서 질까 봐 두려워했는데 상대방이 자진해서 패배를 인정하고 굴복을 하니까 이제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자기가 상대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 이방 민족의 대장이 했던 그 짓을 아합왕이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전쟁은 영적 전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벌인 전쟁인데, 허세 덩어리인 인간과 인간 그 두 권력자의 전쟁으로 마감이 될 지경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중간에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개입해서 도와준 그 취지는 어디서 찾지요? 그거 어떻게 찾죠?
여러분 인생에서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줬다는 그런 느낌 같은 게 가끔은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려움을 해소시켜 주셔서 이렇게 평화가 찾아오게 되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 자세가 되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치고 들어온 취지는 다 까먹고 ‘나는 원래, 원래 이렇게 잘 나가는 존재였었어. 이게 나한테 딱 맞아. 이게 정상이야.’ 이런 식으로 우쭐대기 마련이라는 그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도와줬는데 도움을 받은 인간은 이전의 인간하고 달라진 게 없이 잘난 체하는 인간 그대로 동일하게,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건 육적 전쟁이지 그게 무슨 영적 전쟁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육의 전쟁을 하나님이 벌이는 영적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자, 오늘 읽었던 본문 이야기가 이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어떤 선지자에게 말씀이 딱 떨어졌는데 말씀에 떨어지는 이 상황, 그 연출은 하나님이 연출하시고, 제작 하나님, 감독 하나님, 전부 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채웠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부터 해서 등장인물이 몇 명 나오는가? 총 5명 나옵니다.
첫째 인물, 1번 타자는 선지자. 2번 타자의 인물, 아합. 3번 타자는 벤 하닷, 아람 나라 왕. 4번 타자는 선지자를 못 때린 친구죠. 같은 선지자이면서도. 5번 타자는 선지자를 때린 친구. 이렇게 총 5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5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그 5명의 배역, 역할을 맡은 이들의 관점, 이들의 관점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거예요. 첫 번째 사람 선지자와 두 번째 사람 아합의 만남은 이런 겁니다. 상처를 입은 자와 맨얼굴과의 만남이에요.
선지자는 상처를 갖고 있었고 아합왕은 이게 느긋해요. 전쟁에서 승리 편이니까, 그래서 느긋하니까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상처가 전혀 없어요. ‘어디서 계엄을 해?’ 이런 마음이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계엄일을 법정공휴일로 정해버릴까?’ 이런 마음이죠. 느긋한 마음.
그런데 그 느긋한 승자의 마음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된 자는 얼굴에 완전히 상처를 받았어요. 그리고 처음 만날 때는 붕대를 감았습니다. 붕대를 감고 그 붕대 안에는 상처가 들어 있어요.
그리고 아합왕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거예요. 기다렸다가 “왕이여!” 하고 불렀습니다. 아합왕은 상대가 수건을 감고 있으니 누군지를 압니까? 모르죠. 아합이 ‘뭐야? 나 불렀어? 왜 나를 부르지?’ 이런 식이었을 거예요. 그때 선지자가 수건을 벗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마치 왕의 이야기가 아니고 선지자 자기 이야기인 양 일부러 꾸며내서 이야기합니다.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질러 왕을 불러 가로되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왕상 20:39-40).
이런 겁니다. “전쟁 중에 어떤 높은 사람이 와서 포로를 데려와서 ‘이 포로 잘 간수해. 이 포로는 네 포로 아니고 내가 잡은 포로야. 내가 잡은 전쟁 포로를 네가 간수 잘못해서 다시 놓쳐버리면 난 너를 죽이겠다’라고 지시했습니다.”
자기에게 그런 지시를 했다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개입되느냐? 바로 죽음이 개입됩니다. 하나님의 영적 전쟁은요,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고, 인간의 층이 아니라 하나님 관점에서 무엇이 죽음이라는 것, ‘어떤 경우에 하나님 관점에서 죽음이고, 어떤 경우에 하나님 관점에서 사느냐?’를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곧 인간 관점이 아니라 더 높은, 최종적인 높은 차원에서 죽음과 삶을 전쟁을 통해서 알려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이 사람이 죽을 사람인데 죽을 사람을 네가 놓쳐버리면 이 사람의 그 죽음을 내가 너한테 그대로 적용시키겠다. 네가 놓친 사람 대신 네가 죽어야 해’라고 높은 사람이 자기한테 지시를 했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뭐 엉뚱하게 딴생각하다가 그 포로를 놓쳐버렸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여, 어쩌면 좋겠습니까?” 왕이 하는 말이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왕상 20:40). ‘그게 내 일이냐? 너의 일이잖아. 네가 알아서 할 문제를 왜 나보고 이야기해?’라고 하니까 그때 짠짜잔! 하고 선지자가 수건을 벗습니다.
선지자가 수건을 벗고 상처 난 얼굴을 보여주니까 아합왕이 전에 알던 선지자예요. 그러니까 선지자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도달하는 사람이 선지자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왕 자신을 만날 때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만났다는 것은 상처 난 말씀, 상처가 낸 말씀이죠.
신약적으로 한다면 붕대 위에 새겨진 십자가에요. 붕대에 새겨진 십자가, 붕대로서 표현한 십자가. 그리고 오늘 본문 열왕기상 20장 42절에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즉 “하나님이 지시해서 멸하라고 했는데 당신이 기분 좋다고, ‘내가 알아서 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본인이 그렇게 엉터리로 생각하면서 저 사람을 풀어줬으니 이제 당신이 죽을 차례입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 죽었어. 하나님 말씀에 당신 죽는답니다. 죽는 이유를 굳이 제가 또 알려줘요? 더 알려줄 필요 없죠? 충분하죠? 하나님이 죽이라는 사람을 당신이 지시를 어겨서 살려줬으니까 이제 하나님의 일 속에 당신은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구타당한 사건에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공부하고, 군대 다녀오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파트 사고, 나중에 자식 잘 키우고, 요양 병원에 가고…, 여러분, 그게 인생인 줄 알아요?
어떤 인생이든 최초의 영적 사건, 그 최초의 십자가 사건에서 벗어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먼저 실행에 옮기면서 일어난 사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네 번째 인물과 다섯 번째 인물의 대조입니다.
네 번째 인물은 그 선지자가 나를 때리라고 할 때 때리지 않았어요. 안 때린 겁니다. 이 네 번째 친구는 때리지를 못했고, 다섯 번째 친구는 사정없이 때렸어요. 네 번째 친구와 다섯 번째 친구의 이 대조가 아합왕과 선지자의 대조를 미리 앞당겨서 선지자 얼굴에 그걸 담은 거예요. 상처가 나도록 담은 거예요.
선지자가 담은 상처는 ‘네 번째 친구와 다섯 번째 친구의 관점 차이가 바로 아합 당신과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지자와의 차이입니다’라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 네 번째 친구는 때리라고 할 때 왜 안 때립니까?
십자가를 경유해서 성경을 보는 사람,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영적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고 거기에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달려가고 있고, 그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중간에 배달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악마와 만나서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가 뭐냐?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한다는 사실이에요.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하면 자연적으로 나는 악한 쪽이 아니라 선한 쪽에 속해요. 자진해서 악이 되기 싫고,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악을 멀리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의식, 그게 선악 체계라는 겁니다.
이 선악 체계로 자기가 꽉 차 있으니 그 선악 체계에 입각해서 자기한테 아무 원한이 없는 사람을 팬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좋은 이미지가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쁜 것을 안 하고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근원적인 인간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계속 그들은 착해야 되고, 더 착해야 되고…. 왜? 두려움에 쫓기니까요. 완전해야 되고, 완전해야 되고, 완전해야 되고…, 쫓기니까요. 내가 선할 때까지 계속해서 선해 보려 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벌인 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마귀와 한통속이 되었다는 거예요.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줬는데 그 두려움이 다른 게 아니에요. 네가 잘못하면 죽는다는 그 두려움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원래 인간은, 선을 하든 악을 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다 죽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마귀가 인간에게 사기 친 겁니다. ‘착하고 바르게 하면 살고 나쁜 짓 하면 죽는다.’ 이건 마귀가 인간을 세뇌시킨 거예요.
악마가 이 점을 너무 잘 알죠. 전도서 2장 14-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감 잡으셔야 돼요. ‘왜 내가 더 많이 알고, 왜 내가 더 착하고 더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는가?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죠? 아니에요. 그건 자기의 본심을 가리는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의 본심엔 근원적으로 어떤 두려움이 있는데 그 두려움을 나의 착함과 완전함으로 커버하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 나의 두려움을 면제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전도서의 말씀을 보세요. ‘어리석은 자나 똑똑한 자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고, 닥치는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예외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취급하는데 괜히 인간들만 곡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섯 번째 친구는 때리라고 하니까 사정없이 팹니다. 얼마나 팼던지 상처가 났어요. 다섯 번째 친구, 선지자를 패는 이 친구의 특징이, ‘어디서부터 벗어났는가?’ 선악 체제 자체에서 벗어났어요. 전도서 2장의 그 말씀처럼 ‘나는 뭔가 내 것으로 채울 일이 없다. 주의 말씀이 때리라고 하면 때리면 되지 이 때리는 것이 내가 잘못하는 걸까, 착한 일일까 나쁜 일일까를 판정 내릴 어떤 자격도 나에게 없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는 가성비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사실은 5천 원짜리밖에 안 되어 보이는 샌드위치를 샀다고 칩시다. 그런데 가격이 1만 8천 원이다? 아, 5천 원짜리밖에 안 되는 걸 1만 8천 원에 샀을 때 사기당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가성비가 나오질 않아요. 이 비어있는 가성비가 뭐냐?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텅텅 비어있는 것을 돈 주고 산 거예요. 1만 8천 원에서 5천 원 빼면 1만 3천 원, 아무것도 아니에요. 텅텅 비어있습니다. 텅텅 비어있다는 것은 뭐냐? 바보짓 했다는 거예요.
이 바보짓 했다는 이것이 어떤 뜻이냐? 선지자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상처를 입어야 되는데 이 상처를 입는 모습은 내가 때린 상처가 아니라 남이 때린 상처, 그게 있어 주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절차에 필요’해요. 연출자 되시는 하나님, 감독 되시는 하나님이, 제작자 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해서 남이 때려줘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스스로 자기를 때렸습니까? 정말 그랬어요? 자기가 자기 때려서 상처 냈습니까? 시편 20편 6-8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시편 22장 16절에 보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 오면 마태복음 27장 30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가복음 14장 65절에서는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우리 중에 누가 너를 팼는지 알아맞춰 봐?’ 조롱했죠.
마가복음 15장 19절에서는 “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당했습니다. 누가요? 하나님이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얻어맞습니까? 영생과 지옥, 천국과 지옥은 그 기준이 인간 본인의 선악 지식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얻어맞음에서 확정되는 거예요. 구원받는 게.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와는 전혀 관계없는 거예요. 도리어 반대로 해야 돼요. “‘주님의 상처에 제가 가해자로 관여되었습니다.’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런데 선악 체제에서 그 두려움을 뭐로 해소하느냐?
두려움을 자기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바르게 살고 완벽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는지를 남한테 인정받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네 번째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네 번째 인물도 필요하고 다섯 번째 인물도 필요해요.
네 번째 인물은, 아합과 벤하닷이 하는 짓이에요. 다섯 번째 인물은, 바로 선지자가 내세우고 싶은 이야기예요. 영적 전쟁에서 ‘누가 천국 가느냐, 누가 지옥 가느냐?’의 어떤 기준점을 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영적 전쟁을 연출시킨 겁니다. “맞아라. 그러나 네가 남을 때리지 말고 남으로부터 네가 얻어맞는 그 모습을 보여줘라.”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폭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폭력. 지금 벤하닷과 이 아합 두 왕은요, 한때 전쟁을 했잖아요. 그들은 ‘전쟁은 한시적이고 일시적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 다가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마음에 평화가 오기를’ 간곡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걸 항구적, 연속되는 것으로 바꿔요. 항구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 폭력 상황, 이 폭력 상황을 영구적인 것으로 굳히는 쪽으로 유지시켜 나가는 겁니다. 주께서 십자가 중심으로 처음과, 구약이라는 중간과, 마감이라는 신약의 완성을 동일하게 이어가는 노선의 원칙이에요.
좀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영적 전쟁 안에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는 무는 것부터 시작하게 유도해요. 뱀이 여자의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폭력이에요. 그 폭력을 당한 자가 누구냐?
놀랍게도 폭력을 당한 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보통 상식은 하나님은 강하고 사람은 약하다고 되어 있죠. ‘약한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는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은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다.’가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인간들의 선입관을 바꿔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악마의 존재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개입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이 나쁜 악마라는 이미지를 집어넣었다’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현실 사회에서는 악마가 나쁜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진짜배기 착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의 이미지로서 악마가 그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거꾸로 알고 있는 거예요. 반대로 알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악마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악마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어떻게 뚫었는가? 선지자는 폭력 사태 속에 본인이 희생물로 들어갔기 때문에 뚫어내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나를 치라.”(왕상 20: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나를 쳐라.”
‘나를 치라’고 하니까 평소에 같은 선지자면서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내가 너를 치는 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건 옳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널 치지 않아.”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오늘 본문에서 네 번째 인물, 선지자를 치지 않는 그 네 번째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까 우리가 봤잖아요.
어떻게 되었는가?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멧돼지 밥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사자의 밥이 되었다는 것은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예요. 물려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네 번째 인물의 사고방식과 연계해서 그 이유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거예요.
인간이 마땅히 지옥 가야 될 이유가 뭐냐? ‘착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왜 착하려고 하는가? 악마가 그것을 교육 시켜 놨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악마에게 선악 체제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착하게 사는 그것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우상이 되었어요. 이 착함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 자기 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사에 ‘행여나 나쁜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나는 저주받아 지옥 가고 죽는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찾아와서 벌벌 떨면서 착한 일을 하는데 저는 그걸 가지고 ‘착함의 전도사’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두려움의 전도사’죠.
반면에 다섯 번째 친구는 어떤 입장이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텅텅 비어있어요. 텅텅 비어있다는 걸 아는 이게 은혜거든요? 주의 말씀이 때리라면 “그래! 난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씀이 더 중요하니까 말씀대로 네 소원대로 패줄게.” 하고 장갑 꼈는지 안 꼈는지 모르겠는데 실컷 패줬어요. 상처가 나도록, 때리는 척이 아니라 그냥 때려버렸어요.
그 때리는 자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뭐냐? 자기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그 인정한 나는 어느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돼요?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십자가 사건 안에, 십자가라는 그 폭력 사태 안에, 인간이 하나님을 쳤던 그 폭력 사태 안에서 그 사건을 안다는 것은 그다음부터는 나에게 뭐가 없다? 죄가 없다. “정죄함이 없느니라.”
저는 이것을 ‘두려움의 전도사’와 대비해서 ‘예수의 전도자’로 말하고 싶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34절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자기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하등의 건덕지가 없음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의 그 중심은 이사야 52장과 53장 거기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52장 14-15절에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너무 얻어맞아서, 얻어터져가지고 “당신 왜 그래? 인생 꼴이 왜 그렇게 꼬였습니까?”라고 측은해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이 말이죠. 자기 인생 자진해서 엉망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만큼 지금 마귀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멀쩡해야 구원된다는 이 의식, 그것은 사기입니다. 정작 구원받은 주님은 완전히 엉망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53장 7-8절에서는, ‘그는 도살당할 어린양같이 얻어맞으면서 끌려가면서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라고 했어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7-9).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로마서 8장 36절에,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쉽게 말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이게 현실이거든요. 이것은 우리가 지킨다고 될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는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내가 남한테 내세울 만한, 인정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걸 아는 게 뭐냐? 그걸 아는 게 은혜를 받은 거예요. 성령의 은혜를 받은 거예요. 굳이 나를, 내가 나를 사수하거나 방어하거나 지킬 하등의 것이 없어요.
바로 이 선지자가 보여주는, 하나님이 제작한, 이 5명의 인물이 등장한 이 연극, 이 연극의 마지막 멘트가 뭐냐? 하나님 입장에서는 마지막 멘트가 이거예요.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로마서 11장 36절,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돌아간다.’
십자가의 의미부터, 그러니까 빅뱅처럼, 처음에 우주가 폭발한 그 사건 안에 의미가 담겨서 우리에게 배달되듯이, 주께서 일으킨 영적 전쟁의 그 의미가 배달 사고 나지 않고 그 의미가 계속 남아 있는 사람만 천국에서 받아줘요. 그 외에는 안 받아줍니다.
“여기 천국입니까?”
“왜? 뭐, 천국 들어오려고?”
“예!”
“뭐 갖고 왔나?”
“뭘 갖고 와요? 내가 착한데!”
“너 착한 거 말고, 네가 배달한 거 있잖아.”
무슨 사건요? ‘주님의 죽음 사건에서 내가 주님을 쥐어팼다’라는 거예요. 주님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게 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그런 ‘선악 체제의 소유자’라는 사실, 그것으로 주님의 십자가만이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그 십자가의 의미를 놓쳐버리고 죽어서 좋은 데 갈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기를 원한다’입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성도가 마지막 연극에서, 마지막 날릴 멘트는 뭐냐? 간단합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마태복음 8장의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8장 9-12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는 그 기준을 우리 자신이 정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정한 기준을 가지고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이 정했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우리의 얼굴에다 붕대로 감읍시다. 쪼다 같은 나지만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얼굴에 붕대로 감으면서, 가끔은 그 감긴 붕대를 벗어서 ‘내가 도살할 양같이 이렇게 상처를 받아 마땅하다’라는 그것, 주의 말씀 자체에서, ‘상처를 받아 마땅한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들춰내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닌데 누구한테 속아 넘어갔는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하는 저희들, 주여, 십자가 지신 주님만은 이 점을 잘 아시기에 십자가와 우리를 엮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피해자요, 우리는 상처를 입힌 가해자’라는 관계를 가지고 오직 주님의 어린 양의 희생이라는 십자가 의미만 전달하는 배달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