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위기 조성자

아빠와 함께 2025. 12. 11. 09:00

위기 조성자 

2025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 1-4

21: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21:2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21: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21: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현장성’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조성하시고 지정해 주십니다. 그 현장에서 자꾸만 새로운 의미로운 사태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현장이 아닌 과거로부터 익숙해져 있는 생각들이 현장을 덮게 됩니다. 즉 주님을 위한 현장인데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현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이 주는 경향성에 녹아들어갑니다. 개인은 왜소하고 사회는 큽니다. 개인이 사회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게 사는 방법은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학교를 파하고 온 자식에게 부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친구하고 친하게 지냈니?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어?”라고 말입니다.

어느 부모가 다음과 같이 다꾸치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학교를 전복(뒤엎는 것)시키지 못했어? 학교를 파괴했어 못했어?”라고 말입니다. 세상과 사회는 적응의 대상이지 결코 전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서 내 자리 잡고 그 자리에서 안전하고 평안 안에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 속의 한 개인으로 나타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두 인물, 아합왕과 나봇도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실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움으로 덮어지는 현장이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는 현장성입니다. 아합왕은 전부터 탐이 나는 포도원이 있었고, 그 포도원 구입에 나섰는데 이 또한 자연스러운 움직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성이지만 그 어떤 강제성도 발휘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더 나은 포도원으로 바꾸어주거나 그것이 싫다면 돈으로 포도원에 상응하는 돈을 제공해주겠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신사적인 제안을 나봇에게 합니다. 이 거래 제안에 그 어떤 무리도 없습니다. 억지도 없습니다. 상대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자연스러움이 담겨 있는 거래입니다. 나봇 또한 평소에 아합왕에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해를 끼치기 위해 버려고 노리는 태도를 가지고 아합왕을 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거래 조건에만 주목할 뿐입니다. 이 거래에 그 어떤 위기감도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두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는 사람 사이에는 정작 위기가 일어나게 된 것은 ‘땅’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이방인들이 사는 땅과 같은 땅이 아닙니다. 포도원은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품은 현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탈출’, 혹은 ‘구원’의 원칙을 품고 있다고 점입니다. 보통 땅은 자신이 살기 위한 땅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땅이 아니라 ‘약속’이 살아나는 땅입니다. 이 점이 특이합니다. 신약의 차원에서 말하지만, 십자가 사건이 쉬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땅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 입장에서 위기요 심판이요 저주의 징후입니다. 인간들이 고대하거나 기대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홀로 일으키셔야만 일어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매일의 일상을 사회에 적응하는 것에 몰두합니다.

인간들이 이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합왕은 자연스럽게 옆집 포도원이 탐이 났고 제 값을 치르러라도 그 포도원을 구입해서 나물밭으로 전환시키고 싶어했습니다. 만약에 그냥 자연스러움에 몰입되어 사는 사람 같으면 이 참에 왕가와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로 여겼을 겁니다.

억지로 나봇이 왕에게 줄을 대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왕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오니 왕에게 호감을 갖게 할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것도 공짜로 달래는 것도 아니요 보다 나쁜 포도원으로 바꿔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줄 용의가 있으며 아참에 나봇이 포도원 농사를 그만 둘 요량이라면 상당한 금액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좋은 조건입니다.

하지만 나봇이 보기에 땅 자체에 대해서 나봇 본인이 그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물건인 것을 압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 25:23-27)

특히 레위기 25:5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누구도 그 땅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자기 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땅의 구입에  있어 ‘유월절 어린 양의 목숨’을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은 어린 양의 죽음을 각자 할당받은 바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땅은 수시로 이 ‘어린 양의 죽음 사건’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다른 민족과는 차이 나는 이스라엘에게만 내재된 구원성 혹은 탈출성입니다. 인간들 보기에 ‘현장성’이란 늘 우연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연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필연성의 반복으로 등장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원칙은 하나님 홀로 해내시는 것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되는 겁니다. 피해자가 겪는 위기는 곧장 가해자의 위치(위기?)입니다. 곧 성도가 보여주는 위기는 이 세상 전체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그저 자연스럽게만 살다가 여생을 보낼 작정으로 사회에 적응하지만 말씀은 다음의 원칙을 고수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아합왕의 조상의 팔지 않겠다는 마땅한 답변을 듣고 식사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을 ‘가해자’로 ‘나봇’을 ‘피해자’고 삼아서 그 시대에 ‘구원사건’을 이어나가시려고 하는 겁니다. 나봇은 이제 ‘피해자’의 얼굴을 자신의 본 얼굴로 알아야 합니다. 곧 희생의 죽음을 보이는 주님의 얼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사건의 현장성에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0강-열왕기상 21장 1-4절(위기조성자) 25121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1장 1-4절입니다.

열왕기상 21:1-4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하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포도원이 왕궁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왕이 궁전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봇의 그 포도원을 보면서 굉장히 탐이 났던 모양이죠. ‘저 땅 사서 나물 심으면 참 맛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나봇에게 찾아가 “이 포도원을 나한테 넘기면 이 땅 못지않게 더 아름다운 포도원으로 내가 바꿔주겠다. 혹 땅이 싫다면 돈으로 쳐주마”라고 했어요. 일반인이 아니고 왕이 이야기한 거예요, 왕이! 그럴 때 나봇이 “이 땅은 왕이라도 제 마음대로 넘길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에 제가 팔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종의 프러포즈죠, ‘자기 제안이 거절당한 것 때문에 고민이 되어서 식사도 거르면서 침상에 누웠다’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하나의 나라를 운영하고 경영하는 그 임금님이 결국은 나라 운영 좀 잘 해보고자, 자신의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고자, ‘내가 맛있는 나물을 먹어야 국가도 잘 운영하겠다’ 이렇게 나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밭을 팔라고 했으면 나봇이 그 땅을 왕에게 좀 넘기면 되잖아요?

아유, 이 답답이, 답답이! 이참에 왕과 좋은 관계로 인맥을 쌓으면 나봇의 장래도 훤하게 열릴 것이고, 나봇에게 자식이 있으면 고위직에 이렇게 등용될 수도 있는 문제고요, 이렇게 권력을 가진 자와 인간적인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기의 미래가 활짝 피는 거예요.

남들은 그런 기회가 없어서 지금 섭섭해하는 판국인데 지금은 왕이 의도적으로 찾아와서 “이참에 그 밭을 나한테 넘기라” 하잖아요. 사실 왕이 공짜로 달라고 해도 왕이 달라고 한다면 그 밭뙈기 그냥 줄 수도 있는데 왕이 뭐라고 했느냐? 그보다 더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 달라면 바꿔주고, 혹시 이제 농사짓는 것도 귀찮아서 돈으로 쳐달라면 돈으로 내가 후하게 쳐준다는 겁니다.

왕은 돈도 많고 권력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왕이 이렇게도 신사적으로 나올 때 그냥 넘겨주고 말지 왜 이렇게 빼는지를 모르겠어요. 나봇이 왜 이렇게 나와요? 나봇의 포도원이 왕에게 넘어가면 왕은 좋은 나물 먹고 나라를 더욱 선진 조국으로 잘 키워 나갈 거고, 그래서 나라의 장래도 있을 것이 아닙니까? 기존에 갖고 있던 것은 나라에 바치고 왕이 주는 더 좋은 포도원을 소유하면 다 좋은 일인데 그걸 왜 안 넘기느냐는 말이죠.

참 이게 답답한 노릇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요, 기본이 뭐냐? 세상은, 이 사회라는 것은 개인이 이길 수가 없어요. 이길 수가 없다면 뭐 하면 되느냐? 잘 적응하면 돼요. ‘세상을 뒤집어서 내가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사회가 나 개인보다 월등하게 훨씬 더 크고, 더 넓고, 권력이 많고, 그래서 큰 힘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개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회를 전복하거나 이길 생각하지 말고 누구를 만나든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잘 지내면 그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본분이 아닙니까? 세상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학교 파하고 깡총깡총 뛰면서 집에 돌아왔어요. 그러면 엄마가 그 딸한테 “학교에서 친구하고 잘 지냈어? 선생님에게 칭찬도 받았니? 공부도 재미있게 했지?” 이런 인사를 하겠지요.

이런 게 궁금한 것, 그게 우리 인간이 세상 사는 모습 아닙니까? “오늘 학교에 도전해서 학교를 뒤집어버렸습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하냐, 그래야 속이 시원해? 그래야 후련해? 학교생활은 그게 아니고 좋은 친구 만나서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나한테 다 도움이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왕이 나봇에게 “아저씨! 그 밭 좋네. 그 포도원 저한테 넘기세요. 값은 후하게 쳐줄게.” 이런 식이면 이거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인간이 사회생활 하는 것이 공부하고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이 아합왕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파세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겁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에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서로에게 다 다 좋은 일을 했다는 말이죠. 여기에 무슨 문제 거리가 있습니까?

문제를 야기한 것은 아합왕이 아닙니다. 아합왕은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초를 친 쪽은 누구냐? 아합왕은 아니라고 제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아합왕이 그 땅 그냥 달라고 했어요? 강제조치 해서 막 뺏었습니까? 아닙니다. 신사답게 나왔죠.

여기서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나봇이었습니다. 나봇이 “이 포도원은 왕이라 할지라도 팔지 않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고, 그러니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 하면 이것이 굉장히 올바른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고, 지금껏 한 평생 살아오면서 살아온 우리의 습관에 입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요. 억지스럽습니다.

그렇게 억지스럽게 인생을 살아가면요, 스트레스받아요. 암 걸립니다. 너무 바짝 긴장해서 살면 스트레스받고 암 걸린다니까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합왕은 아무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기존 인간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 자연스러움을 그냥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이 아합왕이라면, 그 자연스러운 호의 또는 제안을 아주 억지스럽게 거부한 그 부자연스러움은 오히려 나봇쪽에서 나왔습니다.

이걸 저는 세자로 ‘현장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장성, 현장이라는 말 아시죠? 사건 현장, 공사판의 그 현장. ‘현장’은 우리의 선입관을 다 부숴버립니다. 나봇이 평소에 ‘왕, 너 한번 나에게 걸리기만 해봐. 내가 네 신앙을, 네 얼굴을 우습게 만들 거야.’ 이렇게 바짝 노리고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나봇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봇도 역시 자연스럽게 자기 조상 대대로 내려온 포도원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왕, 너 내가 딱 벼르고 있었어!’ 이런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깨어질 때 깨어진 그 원인이 나봇의 성질이 더럽다거나 아합왕이 나빠서가 아니라 여기에 그 원인을 제공한 게 누구냐? 바로 땅입니다. 땅, 포도원이에요. 지금 두 인간은 문제가 없어요. 평소에 나봇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운동권 아니에요.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에요.

아합도 왕으로서 자연스러워요. ‘백성의 땅이 탐나더라도 돈을 몇 배나 더 쳐주고 사야 백성의 마음이 안 상한다.’ 이 정도로 상식 있는 사람이에요. 나봇도 조상이 물려준 포도원에서 더 욕심 내지 않고 농사짓고, 그래서 다 자연스러운데 어디서 사달이 났느냐? 이 땅이 문제에요, 땅.

포도원이 부동산입니까, 약속입니까? 아합왕은 이 포도원을 부동산으로 봤어요. 나봇도 그 부동산으로 밥 먹고 자연스럽게 살았는데 갑자기 자기 포도원을 부동산으로 봤던 그 아합왕이 부동산의 안목을 가지고 나에게 그 땅을 팔라고 나왔을 때 나봇은 ‘아하, 왕이 하나 망각한 것, 놓치고 있는 게 있구나.’ 하는 거예요.

자, 아합왕이 뭘 놓쳤는가? 이스라엘의 현장성,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그 현장은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성, 특성이 있어요. 다른 민족은 그 땅에 그냥 살면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의 땅에서부터 탈출했다는 탈출의 그 본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냥 이 땅에 눌러살다가는 지옥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도 땅에 눌러사는 건 맞아요. 땅에 눌러사는 것은 맞는데 거기서 뭘 익히고, 뭘 배우며, 자기의 본질을 그 땅의 어떤 본질에 넘겨야 하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그 어떤 특정한 민족을 이 세상에서 탈출시킨다는 거예요.

탈출은 구원입니다. 구원시킨다. 탈출에 대한, 구원에 대한 그러한 계기, 원리와 법칙이 다른 민족 말고 이스라엘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탈출해야 될 존재라는 거예요. 탈출하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밖에 없고, 저주밖에 없고 심판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거나 탈출돼야 해요.

그 탈출의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뭐냐? 이스라엘 땅이었습니다. 그 땅을 누가 분배 받는가?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땅을 분배받은 거예요. 레위기 25장 55절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25장 23-25절을 제가 읽어드릴 테니 잘 한번 들어보세요.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토지를 얼마를 팔았으면 반드시 일가친척이 그 토지를 되사서 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 토지는 사람이 준 게 아니고 주님이 할당해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까 본 레위기 25장 55절에 ‘땅에 살고 있는 자가 주인이 아니고 땅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너희는 임대차 계약한 그 땅의 품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동산 같으면 그 부동산에 살고 있는 자가 그 부동산의 소유자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 땅은요, 소유자가 여호와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땅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민수기 26장 51-56절까지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 칠백 삼십명이었더라.” 남자의 숫자만 그래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것이니 그들의 계수함을 입은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땅에 대해서 정리가 끝났어요. 자기 족장, 자기 지파에서 내려온 그 땅에 대해서 왕이라 할지라도 그걸 팔라고 할 수가 없고 넘겨줄 수도 없어요. 물론 살다 보면 너무 가난해서, 빚이 많아져서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는 있어요. 왜? 너무 힘들어서. 가장이 전쟁에 나가서 죽어버리면 농사지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 때는 일시적이고요, 본질적인 것은 빨리 유력한 어떤 친척이 그 땅을 다시 되사가지고 회수해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본래 할당받은 그 땅을 나눠줘야 해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땅을 나누어 받아서 품꾼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자기 백성을 구출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옮겨놨잖아요.

옮겨놨다, 다시 말해서 구출했다, 또는 구원했다. 그 구원의 증거로 새로운 땅 약속의 땅을 얻게 된 겁니다. 이게 왜 내 소유가 안 되느냐 하면, 구원하신 분이 땅 소유주, 곧 여호와께서 주인이 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내 일 열심히 해서 내 의로 구원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에게 복속되어야 될 원칙은 계속 유지돼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때 달랑 집게로 집어 옮겨서 그렇게 약속의 땅에 왔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그 약속의 땅으로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값을 치른 게 있는데 그 값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값을 치렀어요. 다시 말해서 죽음, 하나님의 뜻을 담은 희생 제물이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취지가 함유된 땅 위에서 하나님이 홀로 하신 그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으면서 살아가는 이 관계, 이게 바로 진정 ‘산다.’ 또는 ‘생명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겁니다.

이방 민족한테는 이러한 바탕이 전혀 없죠. 내 땅이니까 내가 노력해서 열매 맺으면 내 것으로 돌아오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러한 특수성이 있습니다. 다시 나봇으로 돌아와 봅시다. 나봇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함이나, 왕에게 어떤 미움이나 악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나봇도 포도원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아합왕도 자연스럽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아합왕 쪽에서 뭐가 잘못되었는가? 자기가 왕이니까요, 요샛말로 돈 많은 재벌이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 의논하게 되면 남의 땅이지만 돈 많은 내가 돈만 지불하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 의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나봇은 이 약속의 땅에 대해서 인간 대 인간이 아니고, 그 중간에 끼어들고 개입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거예요. 땅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어려운 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봇은 아합한테 감정 없고, 아합왕도 나봇에게 아무 감정 없어요. 그런데 땅 자체에서 어떤 새로운 현장성이 유발되었어요. 땅은 그냥 농사짓는 보통 흙, SiO₂(이산화규소), 일반 흙으로 덮여 있는 땅 우리한테는 그렇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땅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뭔가 moving, 움직입니다. 구원의 핵심 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아합은 포도원을 탐냈고, 나봇은 돈 줘도 절대 안 판다고 하고, 그 포도원을 놓고 그런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그 사건이 터지면서 무엇이 생기느냐? 여기서 위기가 드디어 발생됩니다.

그 위기라는 것은 뭐냐? 땅에 살면서 그냥 농사지으면 “하나님 은혜로 농사 잘 지었습니다.” 이걸로 끝나버려요. 그런데 땅 자체를 놓고, 처음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그 사건이 땅 자체를 가만두지 않고 방금 말한 구원의 핵심 사건을 계속 유발시키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드러나는가?

한쪽은 가해자가 발생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약속을 개입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가 발생돼요. 가해자 발생하고,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면 그 둘이 만나서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아까 제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도 그렇고,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이렇게 크고, 넓고, 강한 세상을 확 엎어버리거나 어떻게 할 재주는 없어요. 이 넓은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은 빨리 내 자리를 확보하고 내 자리를 마련해서 그곳에서 안정과 평안을 생이 마감될 때까지 누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게 어디 있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워요. 너무나 자연스럽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것도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 나와서 말씀 듣고, 내 자리 확보하는 것 편안하게 하고, 약간의 여유가 된다면 연금도 많이 받고, 이렇게 살면 평소에 인생 사는 이 자연스러움이 계속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학교 갔다가 깡총깡총 뛰어서 집에서 편안하게 쉬려고 온 그 딸아이 보고 엄마가 에베소서 2장 1-3절을 들려줬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엄마도 없지만요. 요새는 뭐 말씀 보는 엄마도 별로 없어요. 하여튼 엄마가 들려주는 말씀이 이 말씀이에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학교 갔다 온 초등학교 4학년 딸보고 이 이야기를 하면서 “너 오늘 학교에서 이렇게 살았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 딸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엄마, 나 오늘 친구하고 재밌게 놀았어. 오늘도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 이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가까운데 성경 에베소서 2장 1-3절은 우리의 본성의 자연스러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질적인 겁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뭔가 다른 대인관계에서 억지처럼 느껴져요, 억지. 내 자연스러움을 내가 스스로 파괴시키면서까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지금 마귀가 작렬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진노 받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세요!”라고 외치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입니까?

어떤 얼굴도 예쁘고 가정에서 칭찬받는 딸이 어느 날 학교 잘 다니다가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거예요. 엄마는 울고불고, 특히 늘 친하게 지내던 바로 위의 언니는 대성통곡을 하고, 얼마나 울었던지 인천 바다가 짜질 정도로 울었다고,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딸이 수녀 된다고 하는 순간 집안은 완전히 울음바다가 되고 박살이 난 거예요. 아버지가 애써 말리고, 엄마도 말리고…, 결국은 딸의 고집을 누가 이깁니까?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그 여자분, 불교로 치면 출가인데 이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죠? 갈 데 있습니까? 집을 떠난다? 바보 같은 생각 아닙니까? 주님의 ‘현장성’이라고 하는 것, 내가 여기서 저기로 떠난다고 그 현장성이 임의대로 바뀌는 게 아니에요.

제가 오늘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지금 나봇이 이 세상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을 뒤집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죠,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세상이 불신의 세계니까 내가 나서서라도 복음을 전해야겠다.’ 지금 나봇이 그런 생각을 합니까? 아닙니다.

나봇이 생각하는 것은 올해 포도값 생각 외에 딴 것이 없어요. ‘올해 포도값이 영 안 좋아.’ 이런 것. 왜? 포도 농사를 지으니까요. 자연스럽게 그냥 자기 삶 사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나봇에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만든 거예요.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을 만든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구원 사건은 주님 홀로 일으킨다는 거예요. 믿음 좋다고 나대고,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 하면서 민폐 끼치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인간 본인은요, 각자 자기가 갖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Please, 제발 그냥 자연스럽게 사세요. 자연스럽게 사세요, 자연스럽게!

“오늘 학교에서 재미나게 지냈어.” 이렇게 그냥 자연스럽게 학교 다니면서 사세요. 일을 일으키는 것은 에베소서 2장 1-4절을 일으키는 몫은 누구 몫이냐? 그 몫은 우리 주님의 몫이에요. 의도적으로 세상을 복음화한다고 깝죽대고 나대지 말란 말이죠. 그게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 내가 나서서 주의 일 하겠다는 거, 그것은 완벽한 자기 의입니다.

수녀 되겠다고 수녀원에 가는 것은 누가 뭐래도 딱 한 마음밖에 없어요. 가족들을 향하여 ‘나 당신들 싫어!’ 그 표현이에요. ‘당신들이 싫어. 이제부터 나 당신들 말 안 들어. 싫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난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살 거야.’

마리아 핑계 대고, 예수 핑계 대고, 성경 핑계 대고, 하나님 핑계 대지 말고 딱 그거입니다. ‘나 당신 싫어. 난 내 인생이 좋아. 내가 좋은 대로 살겠어.’ 그 내가 좋은 게 뭐냐면요? 자기 의가 흠집 나지 않는 그 삶이 모든 인간에게 가장 좋은 자연스러운 삶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아합왕이 포도원을 구매하는 데 실패합니다. 열왕기상 21장 4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탐심을 냈는데 그 탐심이 좌절되었잖아요? 갖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왕은 그냥 살지 왜 그렇게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습니까? 그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갖고 싶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네가 뭔데? 세상 왜 너 하고 싶은대로 해?”

그러면 아합왕이 하나님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포도원을 갖고 싶은 마음을 주셔가지고 나로 하여금 그게 좌절돼서 짜증 나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게 만드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아합왕에게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이유를 알려줘?”
“알려주세요. 난 탐내고 싶지 않은데 주께서 탐내게 만든 이유가 뭡니까?”
“그건 십자가 사건에서 네가 가해자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사건, 이스라엘 땅이 품고 있는 구원 사건은 그 위에 기거하는 사람들이 그냥 밥이나 먹고 농사나 지으며 사는 게 임무가 아니라, 그 땅 자체에서 뿜어내고 있는, 애굽에서 출애굽 했던 그 취지와 법칙과 원리를 그 땅이 있는 한 계속해서 그 사건이 위기를 유발하며 몰고 가야 하는 거예요.

아합으로 인하여 나중에 그 나봇이 죽습니다. 죽어요, 나봇이 죽는다고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성질나서 “당신 일 그렇게 어렵게 하지 말고 그 인간 그냥 죽여버리고 그 땅 뺏으면 되잖아. 당신이 왕이잖아!” 이렇게 나와서 나봇이 죽는다고요.

그런데 나봇이 죽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아합왕이 자기를 방문한 그 순간부터 나봇 인생에 위기가 왔고, 그 위기는 곧 이스라엘의 위기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무슨 말이냐? 이런 뜻이에요. 성도는요, 하루하루 삶이 밥이나 먹고 편안하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위기를 유발하는 위기 유발자로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라고 할지라도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그냥 내 것 가지고 평생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무탈하게. 적당하게 나 이렇게 잘 산다, 행복하다, 약간은 자랑질도 하면서 ‘우리 가족은 화목해. 우리 가정은 싸우는 일도 없어.’ 우리는 그게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걸 누가 가만두지 않아요?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넌 너대로 자연스레 살고 난 나대로 자연스레 살면 되는데 저쪽에서 뭘 건드리느냐 하면, 성도만이 안고 있는 이질적인 것을 건드려요. 성도만의 이질적인 것을 건드린다고요.

아주 극단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교회 안 가는 조건으로 당신 딸을 우리 며느리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후하게 값을 쳐 드리죠. 댁의 딸을 우리 집에 주시면 이제 사돈댁 김장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제가 댁의 김장 다 감당하겠습니다.”

대전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에요, 실제. 딸을 시집보내는데 사돈댁이 그 딸을 너무 맘에 들어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평생토록, 이 삶이 끝날 때까지 자기가 사돈댁 김장까지 다 한다는 거예요. 얼마나 후한 조건입니까? 아합왕보다 더 좋은 조건이에요.

물론 그 집안에서 이런 것은 없었지만 제가 지금부터 각색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대로 불교 집안이니까 따님이 교회 다니는 건 좀 삼가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 십자가 진 것도 확실하고,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지금 죄사함 주시고, 모든 은혜를 주시는 것도 확실한데, 뭐 세상적으로 돈 좀 더 주고 김장 좀 해준다고 해도 그것까지는 양보 못 하죠.”

지금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순간 ‘이제 당신 딸은 죽었어.’ 대전의 그 집사님 딸이 어디 들어가서 사느냐? 시댁에 들어가서 사는 거예요. 이것은 또 실제 맞는 이야기고요. 지금 실제하고 각색하는 것하고 막 혼동은 되는데 알아서 들으세요. 제가 약간씩은 지금 억지로 이야기를 만드는 거예요.

신앙만큼은 일체 양보 못 한다고 나왔을 때 “그러면 우리 집에 사는 당신 딸 이제부터 저는 계속 구박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건은 누가 유발했습니까? 주님이 유발한 거예요. 우리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도대체 한시라도 세상 사람을 흉내 내면서 ‘남들처럼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평생 죽을 때까지 고요하게 끝내겠다’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주께서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흘려서 대신 구원해 주는 그 피의 능력, 그 피의 능력이 계속해서 이 세상의 위기가 되고, 이 세상에 저주와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성도를 통해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존재 자체가 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무한한 공간에 영원한 침묵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무한한 공간에 영원한 침묵이다. 신의 계시, 복음 계시, 그딴 거 없어. 그냥, 그냥 살면 돼. 그냥 살면 된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너희는 나의 품꾼이다. 품꾼이니까 땅 팔지 마라.’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조상한테 물려받은 땅 팔지 마라” 할 때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은 “‘주께서 주신 땅, 팔 리가 있겠어? 안 팔지!’ 안 팝니다, 하나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땅 안 팝니다”라고 장담하겠지요.

그런데 아합왕이 자기 왕궁 옆에 있는 남의 포도원을 탐내더라, 이 말이죠. 탐을 내서 땅 팔라고 오더라, 이 말이죠. 이게 내가 유발한 사건입니까? 나봇이 유발한 사건이에요?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나봇은 그냥 순진하게 “땅 안 팝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못 팝니다.” 했어요. 그런데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나섰고 결국 ‘죽여라!’ 해서 나봇을 죽여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나봇은 졸지에 뭐가 됐습니까?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왕상 21:11-15).

진짜 나의 본 얼굴은 편안하게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는 게 내 얼굴이 아니고, 내 얼굴을 하나님이 강제로 벗겨버리면 ‘이 땅의 모든 죄로 죽임을 당한 죽음의 얼굴’로 갈아치기를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진짜 네 얼굴은 주님이 이 땅에서 매 맞은 얼굴이 진짜 네 얼굴’이라고, 그 얼굴로 우리를 갈아치우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성도는 성도 본인의 위기가 되게 하지만 곧 성도를 그렇게 힘들게 한 이 세상이 심판받을 세상인 것을, 성도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 날마다 들추어내는 일을 주께서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누가 한다고요? 성도가 하는 게 아닙니다! 나대지 마세요. 주께서 자연스럽게 사건을 일으켜서 주님 홀로 처음부터 그래왔고, ‘구원은 주님 홀로!’ 하실 홀로의 몫이지, 우리가 수녀 되겠다고 서원하고 신부 되겠다고 나대서 될 일은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삶의 현장이 우리들의 수녀원이고 수도원이 되는, 그런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사건은 우리가 미리 짐작해서 우리가 실천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개입하셔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과연 세상이 마귀의 통치를 받고 진노의 자식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건마저 그런 현상마저 일구어 내시는 그것도 주께서 홀로 해내신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51210) 요약 열왕기상 21장 1-4절(위기 조성자)

수요 설교 요약하겠습니다. 지금껏 제가 강의와 설교를 많이 했잖아요. 어제 수요 설교 같은 경우는 생전 처음 한 경험이에요. 뭐냐 하면, 보통 설교하고 나면 잘했다, 못했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설교한 당사자로서 복기(復棋), 또는 시험 치고 난 뒤에 점수 체크 하듯이 하잖아요. 어제 수요설교는 하고 나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것을 주께서 홀로 하셨는데 홀로 하신 것에 대해서 내가 평가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평가할 권한이 없다. 왜냐 하면, 어제 수요 설교에 보면, 나봇은 아합 왕에게 억한 감정이 없어요.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라든지,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까 믿음 좋은 내가 한 번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냥 포도원에서 농사짓고 평범하게 사는데, 그걸 어제 수요 설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산다.’고 했어요. 인간은 자연스럽게 살지, 자연을 벗어나서 부자연스러우면 안돼요. 그러면 본인이 힘들어요. 그냥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요. 그걸 보통 사회에서는 ‘최단거리로 빛은 날아간다.’는 말이 있어요.

뭔가를 할 때, 에너지를 최소화시키는 물리학 법칙이 있어요. 사람은 세포라는 물질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의 모든 생각이나 행동은 어떻게 돼요? 에너지를 제일 적게 소비하는 쪽으로 움직이겠죠. 괜히 남 간섭하고, 주제넘게 행동하면 안돼요. 그걸 어제 설교 요약에 보면, 왜소한 개인은 사회를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나를 이깁니다.

따라서 내가 사는 방법은 철저하게 사회에 적응하는 겁니다. 어떻게 적응하느냐? 잘 지내면 돼요. 이건 뭐 안 가르쳐줘도 그냥 남하고 쓸데없이 다투지 말고 잘 지내면 그 모든 이득은 나에게 오지요. 큰 욕심 안내고 그러면 뭐 나 살 만큼은 살 수 있는 세계, 그게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훈련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예를 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초등학교 학생이 수업 마치고 집에 오면서 ‘깡충깡충’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죠. 깡충깡충이라는 것은 ‘공부 끝났다, 신난다!’하고 오지요. 원래는 제가 준비할 때는 깡충깡충하며 오는 아이를 보면서 ‘오늘도 잘 놀았어?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 오늘도 수학 100점 맞아서 칭찬 받았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럽죠.

그런데 거기에 대고 엄마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을 얘기하면서 ‘본질상 인간은 진노의 자녀거든? 그러니까 너는 학교 갈 때 그냥 가지 말고, 학교를 전복해야 돼, 왜? 이건 악마의 전당이야.’라고 이야기 할 엄마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 말은 뭡니까? 모든 인간들이 안 다치고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것을 이미 세상사는 적응의 방법으로 굳힌 거예요.

그런 점에서 아합도 자연스럽죠. 나봇도 자연스럽죠. 누가 부자연스러워요? 부동산이 아닌, 부동산으로 보이지만 약속이 품고 있는 땅이, 이게 사달 나게 한 거예요. 아니, 좋은 포도원 주겠다는데, 바꿔치기하면 되지, 왕이니까 그런 유도리가 있잖아요. 아니면, 돈으로 쳐주겠다, 재벌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안하면 자연스럽게 반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이방나라와 다른 특별한 요소가 있어야 이스라엘이죠. 특별한 요소가 뭐냐 하면, ‘그냥 땅에서 산다.’ 이거는 별다른 거 아니에요. 그러면 애굽 땅에서 그냥 살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애굽 땅에 살던 사람을 애굽 땅에 못 살게 했어요. 애굽 땅에서 못 살게 하면, 이사 가는데, 이사 갈 땐 목적지를 알고 가야되잖아요. 목적지는 없어요.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거기서 나를 섬기리라.”(출23:20, 25) 이래놓고 목적지는 없어요. 어딘지를 몰라요. 모른다고요. 목적지는 어디냐? 죽음이죠, 홍해바다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버렸죠. 그런데 홍해바다는 죽음,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의 효과가 작렬하는 장소, 그것은 뭐냐 하면, 네가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땅은 어린양의 죽음으로 구원이 된다는 그 법칙을 계속 유지해야 될 원칙이 살아있는 땅, 그 땅이 바로 아합도 살고 있고, 나봇도 살고 있는 약속의 땅이었던 겁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을 살려주죠. 살려주는데, 노동력으로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노동력으로 살 것 같으면 안식일이 필요 없어요. 일요일도 일하면 더 잘 살 수 있어요. 그러나 노동력으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가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의 풍성한 삶,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보장해줍니다.

그러면 그 땅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냐? 너희가 기존의 땅, 부동산 땅에서 약속의 땅,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죽어야 된다는 그 원칙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사건화 되는 땅이 무슨 땅이다? 약속의 땅이죠. 그걸 나봇은 기억하고 있었고, 아합 왕은 그걸 놓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본문이 다 마감되지를 않아요. 4절이 남아있어요.

4절이 뭐냐 하면, 땅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왕이 쿨하게 ‘안 파는구나.’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잠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그 동기로서 하나님이 아합에게 개입했다는 것이에요. 아합이 제 탐욕도, 제 마음대로 욕심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관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럼, 아합을 그렇게 만드는 이유는, 그렇게 잠 못 이루고, 그걸 잊으면 되는데,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는 기어이 유월절 어린 양의 사건을 재발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게 가해자가 필요하고, 피해자가 있어야 돼요. 그냥 아무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했어요. 가해자의 일방적인 탐욕이, 나봇을 그냥 죽이면 안돼요. 그러면 그냥 왕 앞에 폭력을 당한 것밖에 안 되니까.

나봇에게서 이질적인 게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우리 조상의 땅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못 팔게 되어 있습니다.(레25장)” 그 이야기를 왜 했어, 왜 했어?? 그냥 내 놓지! 그 상황에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 이야기를 하더라도 왕은 쿨하게 다른 나물 밭을 찾으면 되는데, 왜 그것 때문에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어서 바알 섬기는 그 마누라가 ‘내 남편 자존심 누가 이리 상하게 만들었냐’면서 나서게 만든 동기가 작동되게 되는 거예요.

신기하지요. 이것은 결론적으로 뭐냐? 모든 일은 누가 일으킨다? 나봇이 잘난 것도 아니고, 나봇은 자연스러운 사람이고, 나봇이 못난 것도 아니고, 이 일을 누가 일으킨 겁니까? 주님 홀로 일으킨 사건, 그것이 어제 수요설교의 핵심입니다.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개의 효능  (1) 2025.12.25
조롱 당하는 말씀  (0) 2025.12.18
붕대위의 십자가  (2) 2025.12.04
고마운 망신  (1) 2025.11.26
수치를 통한 영생  (1) 2025.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