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네가 뭔데

아빠와 함께 2026. 1. 9. 09:59

네가 뭔데

2026년 1월 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9-13

22:9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22:10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22: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22: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22: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 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22: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설마 이들에게 ‘거짓의 영’이 임하리라는 사실을 일반인들은 생각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거짓의 영, 곧 악마가 임하게 되면 이들 선지자들은 자신이 진실만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 됩니다. 거짓이란 진실과 견주어보면서 밝혀집니다.

진실이 제대로 드러나는 데 있어 거짓의 영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현 인류의 형편이 모조리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의 수는 무려 400명입니다. 반면에 참된 선지자는 미가야 선지자 단 한 명입니다. 즉 땅에서 같은 인간들끼리의 의견 한계는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거짓 영을 보게 된 자에 의해서 들통납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놓고 사람들은 ‘권력의 소유자’가 중심으로 움직이고 의견을 하나로 모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준해서 움직이는 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이 권력의 종에 붙잡혀 있고 죽음에 붙잡혀 있고 소유에 붙잡혀 있음을 전제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르고 진실하게 살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400여명의 거짓 선지자와 아합왕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뭐가 그리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기 힘듭니다. 거짓 선지자들 중에는 얼마든지 가정적으로 정성을 다해서 자기 맡은 일에 종사하는 진실된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국가 공무원으로서 비록 많은 봉급은 받지 않더라도 병든 부모님 섬기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아합왕이 자문을 구할 때, “임금님이 이번 전쟁에 나가시면 반드시 승리하시고 잃어버린 영토를 얻을 겁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거짓 선지자일까요 참된 선지자일까요?

악한 영이 임한 자일까요 선한 영이 임한 자일까요? 당연히 악한 영이 임한 거짓 선지자입니다. 아합왕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국가 영토를 회복하려는 정당한 명분을 위해 전쟁을 벌리는 것이 도리어 ‘아합왕 본인을 제거하는 전쟁’이라는 미가야 선지자의 해석을 기쁘게 받아드릴까요? 그렇지 못할 겁니다.

도대체 근원적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말씀을 거론하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소유성에 뿌리박고서는 자신에게 최후가 오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아합왕의 문제점은 자신의 최후를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소유를 통해 두려움을 씻어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는 ‘소유의 자리’가 아니라 ‘말씀의 자리’입니다. 말씀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는 나옵니다.

이것이 지상의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의 교류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는 죽음의 근거가 되고(선악과 나무) 다른 하나는 생명의 근거가 됩니다. (생명나무) 인간 존재는 이 두 나무의 취지를 품은 자라야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인간은 선악과 나무과실은 얻었고 생명나무 과실은 잃었습니다.

인간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악마입니다. 악마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지식을 따먹게 하므로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의 다리로 걷게 하는 식으로 살게 했고 악마의 권력 아래에서는 이 선악 지식만 최종 갖추어야 정상적인 인간 조건인 것처럼 여기게 했습니다. 권력이 집중된 자가 자신의 권력 소유성에 집착하게 되니 모든 이들은 그 권력이 두려워 권력자가 사는 것처럼 삽니다.

죽기 싫어서 그러합니다. 왕도 자신이 권력 소유성이 끝장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소위 선지자, 곧 하늘과 통하는 자들을 많이 불러모아 조언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견들을 들어봤자 모두 끝장나는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소유에 매달리는 자들 뿐입니다. 즉 근원적으로 ‘소유의 자리’에 묶여 있는 자들이지 결코 ‘말씀의 자리’에 해당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보면 인간이 마땅히 죽은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0: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수님의 이웃 됨은 그 상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신 은혜에 되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소위 말해서 ‘밥값도 못하는 존재’가 곧 인간입니다. 즉 인간은 그 어떤 소유를 의지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거짓 영에 의해서 유지되는 세상에서 진실이란 자신이 살고자하는 의지에 의해서 방해받고 있는 겁니다.

미가야 선지자 입장에서 아합왕을 대하는 태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네가 뭔데?”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왕이 붙들고 있는 권력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아합왕이 죽기 위해서 아합왕에서 전쟁의지가 발생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왕은 나름대로 큰 일을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네가 죽으므로 백성들이 평안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왕상 22:17)

사람들은 자기 소유 중심으로 살기에 자기를 매우 사랑하고 지키기 보니 하나님 말씀이나 예수님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망하기는 것을 못믿는 자들은 기어이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 말씀과 과연 그렇게 되는지 자기가 검증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말씀 속에 사는 참된 영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인질이 되어버립니다.

“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왕상 22:26-27) 소위 자신의 소유 자리를 포기못하는 자들로부터 미움받고 공격을 받는 그들이 오늘날 말씀의 자리에 속한 참된 선지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벌써 망할 대로 망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열왕기상 22장 9-14절(네가 뭔데) 25010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2장 9-14절입니다.

열왕기상 22:9-14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합왕이 주동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들러리로 붙어 있는 것이 남쪽의 여호사밧 왕인데 보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합왕이 아람 나라를 상대해서 전쟁을 해서 길르앗 라못 지방을 다시 가져와야겠는데 전쟁하기 전에 선지자를 불러 모으고 묻습니다.

그래서 동원된 선지자가 400명이에요. 열왕기상 22장 6절에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선지자는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이죠.

선지자가 “올라가서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라고 했어요. 선지자나 왕뿐만이 아니고 거기 있는 대신들이나 주위의 사신들, 즉 관료들까지 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여기 13절에 보면,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여(如)’라는 뜻은 한결같다는 뜻이죠. 한결같이 ‘출(出)’ 나온다, ‘일(一)’은 하나, ‘구(口)’는 ‘입’이니까, ‘여러 사람이 말을 해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일치되게 의견을 모았습니다.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이 이야기를 하니까 지금 전쟁에 나가려는 아합왕과 여호사밧 왕은 자기들이 내심 원했던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그냥 전쟁하려고 했는데 남쪽의 여호사밧 왕이 “혹시 여기 있는 선지자 400명 말고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묻습니다. 열왕기상 22장 8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그렇게 하니까 남쪽의 여호사밧 왕이 “그러지 마시고 그 사람마저 불러내어서 예언을 한번 들어봅시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서 “전쟁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물어보니까 답변이 열왕기상 22장 15절에 나옵니다.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400명이 이야기한 것과 미가야가 예언한 것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면 401명의 생각이 동일하고, 이제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이 전쟁에 나가 승리를 낚아채면 되겠잖아요. 그런데 16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었던 왕의 기분이 굉장히 짜증이 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16절에, 아합왕이죠,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그러니까 아합왕이 400명을 제껴놓고 미가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딱 들어보니까 자기를 비꼬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예, 올라가세요. 올라가시면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까 ‘너는 잘렸어. 너는 끝났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왕이 화가 난 거예요. ‘내가 아합왕 당신 자리에 있다 치고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부터 출발해서 그때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 할 겁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미가야가 예언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말씀을 대하면서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게 옳은 해석입니다.” 이렇게 할 게 아니고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질 때 전제적인 원칙이 있어요. ‘하나님을 찾고 믿는 내가 뭐 그리 잘못되었습니까?’ 하는 그러한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뭐 그리 잘못되었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 말 듣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선지자의 말을 들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이 일이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 일이 되고자 추진하는 것은 나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 과연 나의 그 생각이 바른 생각입니까?’라는 것, 여기서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제대로 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미가야가 전하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세요. 열왕기상 22장 17절부터 나옵니다.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으로 흩어졌다’는 말은, ‘이번 전쟁에서 임금이 죽습니다.’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이 되는데 왕이 죽은 것에 대해서 백성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편안히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간다는 거예요. 왕이 전쟁하는데 그 전쟁의 취지가 뭐냐?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을 훼방질하고 거짓되게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목자도 아닌 게 목자인 척하는 왕을 제거하는 전쟁에 현재 당신은 말려들었다’라는 겁니다. ‘당신을 죽이는 전쟁에 지금 당신이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연결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거나 또는 기도 응답받고자 할 때 응답은 이미 정해졌어요. ‘나는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 너를 제거하기를 원한다.’ 제거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밥값도 못하는 거 살 가치도 없다.’ 이 말이에요.

‘네가 언제 내가 주는 은혜에 대해 밥값이라도 했어? 넌 네 생각만 했잖아. 네가 하나님, 하나님, 하고 찾지만 실은 네가 마지막이 된다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잖아.’ 이겁니다. ‘너는 너 자신의 목숨을 네 거라고 소지하고 있고, 내 목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권력을 나의 것이라고 유지하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는 안 들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찾아서 그 뜻을 반영하려고 애를 쓰는 그 거짓된 모습, 사람은 속아 넘어가도 이 하나님은 절대로 너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했습니다.

미가야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라고 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는 뭐냐? 400명이라든지, 백성들이라든지, 관료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는 이 권력체, 국가권력의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면서 주고받는 그 이야기, 자기에게 소유된 그 국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은 ‘여출일구(如出一口)’ 동일한 말을 한 거예요.

그런데 미가야는 그 출발점이 국가에서 출발한 게 아니고, 하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늘의 뜻은 지상의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 그 뜻이 뭐냐? 내가 하늘의 만군의 회의에 참석했는데 하늘의 만군이 좌우편에 계시고 거기 천사들이 있는데 사탄과 악마도 있었던 거예요.

열왕기상 22장 20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길르앗 라못 전쟁은 아합을 제거하고 죽여 버리는 전쟁, 아합 자리가 아예 없어지게 하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누가 인간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고 하니까 악한 영이죠, 21-22절입니다.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거짓말하는 영을 모든 선지자의 입에 집어넣는 거예요. 아합뿐만이 아니고 그 400명 선지자 입에 모든 거짓말 하는 영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아합왕이 순조롭게 제거되니까요,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초점이 뭐냐? 미가야가 소개했으니까 하늘 사정은 알았고, 미가야가 오기 전까지는 하늘 사정에 대해 관심도 없고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하지?’ 이런 식이에요.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소중해.’ 이런 자기들끼리의 판에서 예수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성령이 어떻고…, 이런 태도 이런 자세하고 똑같은 거예요. 화살이 이제 아합왕에게서 어디로 가느냐? 거짓말하는 400명의 선지자에게 갔습니다.

그 선지자 중에 대표자가 열왕기상 22장 11-12절에 나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시드기야가 선동해서 거기에 동조한 400명이 똑같은 말을 하는데, 이 똑같은 거짓말은 하나님이 악한 영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집어넣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들 중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 집안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다든지 자기 부모님이 너무 가난한 분들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선지학교 출신들이 공무원이니까 월급받고 선지자 노릇하는 거지요. 그들 중에는 병든 부모님 모시고, 백혈병 아들 치료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가난한 선지자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선지자가, 399명의 선지자들의 예언, “왕은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에 동조할 때 착하기 그지없던, 순진하고 착하고 한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보는 그 선지자의 마음속에 착한 영이 있을까요, 거짓말한 영이 들어갔을까요? 거짓말하는 영이죠.

인간들 보기에는 너무나 착실하고, 순수하고, 자기 집안 식구 잘 돌보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결론은 ‘너 마귀 들렸다’는 거예요. 너 마귀 들렸다. 그러면 여기서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쉬운 예화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옛날 어떤 왕국이 있었는데 임금님이 사냥을 갔다가 계곡에서 넘어졌습니다.

당연히 다쳤을 게 아닙니까? 신하들이 정성껏 치료를 해서 목숨은 구했지만 다리 한쪽을 못 쓰게 되었어요. 다리 하나를 못 쓰니까 목발을 짚게 된 거예요. 목발 짚게 되니까 왕이 성질나는 거예요. 이 나라 백성들은 다 멀쩡한데 자기 혼자 목발을 짚으니 소위 뿔따구가 나서 포고령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이 나라에서 목발을 짚지 않는 자는 전부 사형에 처한다.”라고 했어요. 왕이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자신이 목발 짚은 것이 알려지면 안 되니까요. ‘나만 병신인가?’ 이런 거예요. 모조리 다 병신을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거지요.

사형을 시킨다고 하니 그때부터는 노인이고 아이들이고 전부 예외 없이 목발을 짚게 됐습니다. 처음에 진보적인 젊은 사람들과 저항 세력이 이건 터무니없다고 달려들었는데 실제로 잡아서 사형을 시켜버리니까 어쩔 수 없고 아무 소리도 할 수가 없죠. 마치 히잡 안 쓰면 사형시키는 이단하고 똑같죠. 사형을 시키니까 이젠 무섭잖아요.

미인대회를 하는데 전부 목발 짚고 하고, 대학에서 연구를 해도 목발의 역사성, 목발의 중요성, 어떤 교수는 목발 연구해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도 있어요. 군대와 경찰까지 목발을 짚으면서 아주 날렵한 군사 훈련을 하고요, 전 국민이 목발을 하게 되었어요. 불행한 것은, 왕이 오래 살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오래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유롭게 두 발로 걷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어요. 이제는 어떤 달인이 생겨났는가? 목발로 걷는 달인, 목발로 춤추는 달인, 목발 미스트롯 4, 목발 짚고 노래하고요. ‘이것이 말도 안 되고 엉터리다’ 하는 걸 아는 사람은 누구냐? 젊은 시절, 목발 없던 시절을 지냈던 노인들인데 그 노인들도 아무 소리 못 하는 거예요. 왜? 자기 손자들과 자기 자식들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소리 못 하고 동조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드디어 왕이 죽었어요. 왕이 죽으면서 그 포고령도 없어졌어요. 그러면 다시 정상적으로 두 발을 디뎌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왕이 죽고 난 뒤에 그 권세를, 권력을 이어받는 통치자들에게는 목발이 그대로 있는 것이 나라를 통제하기가 더 쉬웠어요.

왕은 죽었어도 백성들 전체가 ‘인간이 인간 됐다는 불가피한 조건 자체가 목발 짚는 거’예요.
‘목발 짚음으로써 인간다운 사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목발의 이론과 사상의 기득권을 차지한 후대 정치인들에게 그것이 통치하기 유리한 조건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 강제 법령이 자연히 폐지됨에도 불구하고 목발을 의지하지 않는 삶, 목발이 없는 삶을 아예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마음속, 심령 속까지 목발이 있는 것이 정상이라는 마음으로 자체적으로 자율화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목발을 짚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미가야 같은 사람이죠, 숲속에 살던 어떤 사람은 ‘목발 짚는 이것은 말도 안 된다.’ 해서 목발의 부당성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사형당하잖아요. 그래서 숲속에 그대로 숨어 살면서 목발은 불태워 버리고 혼자서 목발 없이 사는 거예요.

이것은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바꾼 거예요. 가끔 생필품 구하기 위해서 마을에 내려올 때는 목발 짚고 사는 것처럼 하면서 하지만 다시 집에 가면 목발 없이 사는 겁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얼추 알고서는 “당신이 목발 없이 살면 우리한테 무언의 압력이 된다. 같이 목발 다 짚고 살자.”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은 목발 짚고 살면서 속임수에 넘어간 그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겼어요.

이미 법령은 사문화, 이미 죽은 문서가 되었어도 사람들 마음속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으로 목발 있어야 정상적인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목발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죠.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젊은 사람 몇 명이 찾아왔어요. 두 발로 걷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겁니다.

여기서 해프닝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 사람이 “두 발로 걷는 법은 저는 모르고 그냥 목발을 버렸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목발을 버리는 비법이나 그 진리를 전수해 주세요.”라고 떼를 쓰는 거예요. “아니 그냥 버리면 된다니까!” “버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버리면 되는지를 알려주세요.”

제자들은 점점 몰려들고,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노트 필기도 해요. 목발 버리는 방법. “제발 저희를 제자로 받아들여서 목발 버리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아울러 목발의 허구와 환상을 깨닫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때부터는 목발 버리기 위해서 먼저 사전 준비로 고행과 금욕을 하고요, 어떤 사람은 그 목발 버린 사람의 말씀을 적은 것 가지고 계율과 교리를 책으로 만들고, 그래서 목발 버린 그의 생애가 하나의 경전이 되어 버렸어요. 목발 버린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특별수련회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참 재미있죠. 그분을 그리워하면서 기도회를 열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용감하게 목발을 버린 사람을 칭송하면서.

그런데 목발을 버리자고 설교했던 사람 중에서 목발 버린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목발 짚으면서 설교하고 있었던 거예요. 군중 앞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도 목발 짚고, 거기에 참여한 제자들도 같이 목발 짚으면서 “언젠가는 목발을 버릴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리까지 나오는가? “만약 목발을 버리게 되면 사후에 하늘나라에, 천국 가는 보상을 줄 것이다.” 이런 교리까지 만들었어요. 결국 그들이 마지막 한 것은 목발을 버리고 살다가 죽었던 그 사람이 쓰던 목발, 불 속에 던져져서 타다 남은 그 목발을 황금 상자에 소중하게 보관했고 그것으로 종교를 만들었어요.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본문의 선지자 400명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합왕은 뭐가 잘못됐어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아합의 입장이 먼저 되어 보고, 바리새인 입장이 되어 보고, 400명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지금 그들의 잘못은 뭐냐?

아합왕이 잃어버린 나라의 영토를 독도를 찾겠다고, ‘독도는 우리 땅’, 독도를 찾겠다고 전쟁을 벌입니다. 그것도 겸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이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아까 그 목발 예화를 들었는데 이게 인도 우화집에 나온 거예요.

미가야 선지자라면 목발 왕국의 왕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딱 한 마디만 했을 거예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미가야 선지자의 아합왕에 대한 태도가 이거에요. “너 뭐야? 너 잘렸어!” 아합왕이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 400명의 선지자가 아합의 소유된 권력에 같이 끼어들어서 그 권력 부스러기를 나의 소유로 잡아당기게 되면, ‘아합왕이 살아 있다면 나도 살아있는 거’예요.

“모두가 목발짚으라”라고 포고령을 내린 왕이 살아 있으면 기득권자들, 왕이 죽고 난 뒤에 정권을 인수인계 받는자들도 마찬가지로 백성을 통제하는 데서 오는 권력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곧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내 것의 마지막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에 왜 나옵니까? ‘내 소유가 끝나지 않기를, 나는 소유의 속에 뿌리를 내리고 안전빵으로 살고 싶다.’ 이 심보로서 교회 나오잖아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 믿잖아요. 그게 자유입니까?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게 미가야 입니까?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너 뭐야?”라는 말을 왜 못합니까? 우리 자신을 보고 “너 뭐 때문에 계속 살고 있는 거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요,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밥값도 못하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밥을 먹잖아요. 이것은 누가 주신 겁니까?

식사할 때 기도하지요. 누구한테 기도합니까? 나한테 기도합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신 주님께 기도를 하잖아요. 기도하는 것은 뭐냐? ‘밥값도 못하는데 계속 살려주시니까, 그냥 모든 이 소유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감사하다’라는 뜻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인간도 아닌데 계속 살려주니까 고맙습니다.’ 하는 뜻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아합왕 여기에 등장하고 미가야가 등장하는데 왜입니까? 지상에서 하늘의 뜻은 모르고, 똑같은 인간들끼리 자신의 마지막을 두려워하고 겁내고 공포스러워하면서 그저 하나님 앞에 기대서 ‘하나님, 나의 끝이 쉽게 오지 않도록 좀 지켜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사람은 말씀에 의하면 잘려야 돼요, 잘려나가야 됩니다!

열왕기상 22장 25절에 보면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했는데 열왕기상 22장 11절에서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해서 분위가 확 분위기 확 띄웁니다. 그래서 “나는 영원한 아합왕의 종입니다.” 딸랑딸랑하는 이 아부쟁이에게 왕이 좋겠습니까, 가진 권력이 좋겠습니까?

그 권력이 있어야 병든 아들 치료비도 대고, 가난한 우리 부모님도 모시고 살 거 아니겠어요? 사람이 소유가 있어야 거기에 터전을 뿌리박고 살아야 내가 살잖아요. 아니 나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나보다 소중한 게 없다는 그것, 누가 그 마음을 집어넣었는가?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해서 마귀가, 악한 마귀가 그런 거짓말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종노릇한다’는 말은 갇혀 있다, 못 빠져나온다, 그런 겁니다. 인간은 권력에서 못 빠져나오고, 자기 소유에서 못 빠져나오고, 자기 죽음에서 못 빠져나오는데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인간은 육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목발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의지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오잖아요. 그런데 목발을 버린 그 사람은 “목발 그냥 버리면 되는데!” 그러나 찾아온 그 사람들은 이미 ‘목발 없이는 죽는다’라는 것을 마귀로부터 배웠거든요. 목발 예화를 제가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목발이 하나잖아요.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두 개의 나무 관계에서 나왔어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에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이유는 생명나무 지키려고 한 겁니다. 생명나무에 지장이 되니까 생명나무 지키기 위해서 인간을 쫓아낸 거예요. 그리고 인간을 쫓아내는 근거가 되는 그 말씀도 ‘생명나무는 이렇고, 선악과나무는 이렇다.’라고 하는 겁니다. 목발이 아니고 두 개의 나무 관계, 그 사이에서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인간은 추방될 수밖에 없고, 인간은 정녕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선악과나무 하나만을 갖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목발이죠. “다리 하나로 해도 돼” 하듯이 “선악과나무만 있으면 우리가 신처럼 된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게 가르쳐준 신은 뭐냐?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실제로 활동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근거가 되는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의 관계에서 영생이 주어지고 천국이 주어지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어떤 입장에 있는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라고 보통 이야기하죠.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기 ‘강도 만난 사람’이 나오잖아요. 강도 만난 사람을 두고 ‘거반 죽었다’는 이 말은, 정녕 ‘죽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강도가 악마한테 얻어맞아서 그냥 죽게 되었다는 말이죠. 악마는 이미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기로 확정된 것이고, 인간은 같이 노닥거리고 편승해서 죽게 됐다는 그 말이죠.

악마한테 사로잡혀서 못 빠져나오는 자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이웃밖에 없다는 것을 이 비유로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라는 것은 이렇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일단 네 형편이 이런 형편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열왕기상 22장 27절을 보겠습니다.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아합왕이 화가 나서 미가야를 옥에 가두었어요. 가두는 그 이유가 뭐냐? ‘내가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와서 이 아합왕 그리고 400명의 선지자 말이 맞고, 미가야 네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내겠다’라는 자신감을 아합왕이 보여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오늘날 자기가 밥값도 못하고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말씀의 인질로 주께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끼리만 서로 통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해도 안 믿습니다.

성경 말씀이 오히려 반발을 유발합니다. 일본말로 “요시!” ‘그래. 말씀대로 내가 안 믿고, 이 말씀을 내가 거부해도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이렇게 성공하고 있다는 것, 내가 본때를 한번 보여주겠다.’ 이런 오기를 유발해요. 왜? 악마가 집어넣어준 거짓 영이 충만하기에.

악령이 들어와서 거짓 영이 충만하게 되면 인간은 점점 더 내가 가진 것에 뿌리 박고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소유, 권력이든 돈이든 자식이든 건강이든 행복이든 그 소유, 그 소유를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장하게 지켜내는지 그것을 하나님 보기에 본때 보이듯이 보여줄 요량으로 살겠다.’는 그러한 오기가 더욱더 충천하죠. 그게 이 세상이고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생존경쟁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리는 뭐냐? 자기 자리예요. 출발점이 자기 자리라고요. 마귀에 갇혀 있는, 마귀가 심어준 악한 영이 있는 자리, 그 악마의 자리에서는 말씀에 대해서 그런 오기로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가야 선지자같은 이런 사람들은 드물죠. 드물뿐더러 미가야 선지자 쪽, 즉 하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이 땅에서 그 사람을 인질로 삼아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옥에 가만히 있어.”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보고 ‘보면 믿겠다’고 하잖아요. 보면 믿겠다. 검증을 하겠다는 그 자세, 검증을 촘촘히, 꼼꼼히 해서 ‘역시 믿을 만하니까 믿자’는 이것은요, 여전히 자기 자리가 끝이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두려움의 영, 마귀의 영이 임하기 때문에 내가 안 망쳐지기, 내 인생이 망쳐지지 않기 위해서 벌벌 떨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정당한 말씀도 줄 의사가 없습니다.

검증을 왜 합니까? 말씀 검증을 왜 해야 해요? 누가 살아 있는 데요? 주님이 살아 있지 우리가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살아 있는 분이 열심을 다 한다는 그 말이죠. 어떤 분이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냈어요. 그 책을 냈는데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로 댓글이 달렸어요. 그런데 기가 막힌 댓글이 나왔어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지은 그 목사님은 말은 하나님의 열심히라고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열심을 냈다.” 와…, 진짜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중에서 최고의 댓글입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하는데 자기가 왜 열심을 더 내요? 자기가 자기의 끝을 무서워해서 그래요. 내가 끝이 된다는 걸 무서워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미가야 입장에서는 검증하거나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왜? 미가야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미가야는 사람하고 논쟁하거나 상대하지 않아요. 마치 어르신이 계신데 애들끼리 서로 싸울 때 어르신이 그 싸움에 관여합니까? “까자, 이거 누나 까자가 내 까자가?” 싸우고 있는데 어른이 그런 것에까지 꼭 관여해야 하겠어요?

주님께서 아합왕과 그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 영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전쟁을 주께서 이미 계획해서 만들었다면, 그 전쟁의 한계 바깥에서 팔짱 끼고 보고 있는 미가야는 그냥 그들의 출발점, “왕이여! 승리하소서” 그것에서부터 출발해서 “당신은 죽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이 전쟁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미가야였다면 “당신이 이번 전쟁에서 죽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그렇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왜? 이번 전쟁에서 당신이 맡은 배역, 역할이 그거니까.” 엑스트라 주제에 어디서 주인공 역할 하려고요? 그냥 활 맞고 죽는 역할을 하면 되지 내 인생이 왜 필요해요? 성도가 공포에서 감사로 바뀌는 이유는요, 모든 과거 이야기를 주의 일로, 내가 나의 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주의 일로 기억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을 낸 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가지고 말씀대로 움직였던 그 일, 주님께서 그렇게 했다는 걸로 기억해버리면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집착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죠. 왜냐하면 그때 그렇게 하신 주님이 지금 나에게도 “네 생각하지 마. 잊어버려, 너를 잊어버려! 내가 했다는 그것만 기억해.” 이게 미가야입니다. 이게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냥 하나님 앞에 계속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주제에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가 알아서 뭘 합니까? 무슨 열심을 내요? 주님이 다 도와줬는데. 주님께서 다 도와줘서 영생까지 주시는 데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뭘 무서워하는지, 내 인생에 최후가 올 까봐 무서워하고, 끝이 될까 봐 무서워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단단히 내 소유를 쥐고 있는 그 자체가 거짓 영의 시험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시고,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항상 잊어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주의 일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더 매 순간 낮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의 목표와 목적  (0) 2026.01.01
회개의 효능  (1) 2025.12.25
조롱 당하는 말씀  (0) 2025.12.18
위기 조성자  (1) 2025.12.11
붕대위의 십자가  (2) 202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