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 당하는 말씀
2025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17-26
21: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1: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21:19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21: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1:22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1: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1: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21: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많은 사람들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17에서는 비로소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나봇이 죽을 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나봇이 온전히 죽고 난 뒤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로서 이 나봇의 죽음 사건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의도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는 왕상 21:26에 나옵니다.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즉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십계명, 초반부 계명에도 이 우상이 거론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3-5)
하나님께서 이 우상에 관한 계명부터 시작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상 필히 ‘우상 섬김’이 당연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섬기는 신은 우상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하여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상을 섬기는 정신으로 모든 인간들이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성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다른 민족에게는 알려주시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셨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이유도 모르는 채 이방나라로부터 압제도 받았고 이유도 모르는 채 이방민족에 대해서 승리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경우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알’이라는 우상 섬김이 다른 민족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큰 낭패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관여하는 방식이 인간이 알아채는 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온 아벨의 죽음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봇의 죽음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면 믿음있는 자기 사람이 낭패당하기 전에, 그리고 죽기 전에 나타나서 기적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알을 섬기는 목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시집온 이세벨만 기세 등등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얻지 못해 고민에 빠진 아합왕을 충실히 내조하기 위해 왕비 이세벨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책을 수립합니다.
⓵왕의 도장을 찍어 전국에 공문서를 돌린다
⓶나봇이 이스라엘 땅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왕은 자리에게 물러나와 마땅하다는 식으로 유포한 이것이 아합왕을 통치자로 앉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 행위가 해당되기에 전국은 국가 비상상태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
⓷ 나봇을 반드시 사형수의 자리에 세워서 왕의 권위로 바로 세워야 하는데 여기에 신명기 17:6-7 율법에 입각해서 매수당한 증인 두 사람을 동원시키는 재판이 제대로 가동되게 하는 것.
이러한 이세벨의 행위는, 왜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하느냐 그 취지를 들추어내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됩니다. 인간은 사단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세벨의 행동은 배후에 사단의 뜻과 관계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계 2:20,24)
나봇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선지자 엘리야의 등장은, 하나님의 예언이란 세상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이 예언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어남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언에는 반드시 끝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예언이 큰 ‘가두리 양식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세계에서는 악마가 인간을 가두는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말씀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인간 내부에 사단이 집어넣어준 탐심이 작렬하고 있는가 인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옛날 찬송가 432장 1절 가사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 내용을 접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안 다치고 잘 살 수 있게 하시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습니다.(요 19:30)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사단은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놀립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즉 이미 사단의 권세에 휘둘리고 가두어진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자기 좋아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결코 제대로 우상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끝’입니다. ‘끝’은 모든 인간들의 그동안 했던 바를 무효로 돌리게 합니다. 인간이 죽든 살든 상관없이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으심이고 그 죽으심을 위해 아벨이나 아벨도 만드시 언약과 관련해서 죽어야만 했던 겁니다.
자신에게 찾아든 절망마저 예언 성취차원에서 주어진 삶이라고 여기고 감사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죽음 파동에 갇혀 있는 바는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열왕기상 21장 17-26절(조롱당하는 말씀) 25121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1장 17-26절입니다.
열왕기상 21:17-26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굉장히 많습니다. 열왕기상 21장 26절에 등장하는 이 말씀의 결론을 내기 위해서 주께서 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을 화나게, 분노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임하게 하는 이유는 딱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말씀은 십계명의 초반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3-5).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심정임을 대변해 주고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자다.’ 그 사실을 누가 모르느냐? 인간들만 모르고 있어요.
인간들이 모르는 그것을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율법으로 알려줬습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필히 만나게 되는 게 우상이다. 너희가 약속의 땅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서, 우상은 섬기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게 되면 너는 나 여호와와 함께 영원히 사는 천국 백성이 된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조건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그렇게 드러내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 가운데서 뭐가 빠져 있느냐?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그 방법은 인간 쪽에서는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알지를 못한 거예요.
인간들은 망해가면서, 죽어가면서 ‘내가 섬기고 있는 이 우상에서 여호와께로 갈 수 있는 그러한 재주나 능력이나, 마음 자세나 태도가 일체 나한테는 없다’는 사실을 발각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기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전혀 가능하지 않은 말씀을 하나님 쪽에서 주신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때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인간 속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어, 안 했어? 했지! 그런데 너희에게는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섬길 능력이 있어, 없어? 없지!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징벌을 내리고, 저주하고 심판한 것은 정당하지, 그렇지?”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내가 여호와 믿는다, 예수 믿는다, 또는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이것이 어떻게 우상이 되는지, 나는 분명히 정답대로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찾고, 복음대로만 산다고 자부했는데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그것마저 이게 우상이라고 지적할 만한 일이 되는지?’ 그 내력을 알면 되는 겁니다.
그 내력을 알도록 우리보다 먼저 앞서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 역할을 하게 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정작 하나님 당사자에게는 우상 섬기는 것에 해당된다는 그런 결론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제가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렸잖아요. 듣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 믿어도 우상이고, 하나님이 안 믿어도 우상이고, 예수 믿어도 우상이고, 예수 안 믿어도 우상 같으면 ‘뭐 그러면 별 대책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라는 결론에 여러분이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믿는 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여호와께 돌아오는 길은 없으니까, 내가 우상을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우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게 나인데 주님께서는 그게 쓸모가 있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안목입니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네’라는 이것은 자기 안목이죠. 주님의 안목에서 보게 되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쓸모 있게 사용하고 있느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뜸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쓰인 나봇은 죽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이런 거나 혹은 ‘나봇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봇을 쓴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쓰시니까 나봇은 그냥 죽었어요. 마치 누구처럼? 아벨처럼, 아벨처럼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나를 가치 있게 살려줄 것’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 그러면 우상을 버릴 테니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라는 거래 형식으로, 즉 ‘좋은 게 좋다고 하나님이 좋게 좋게 갑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뭔가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과 동일한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 열왕기상 21장 17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나봇이 죽을 뻔할 때 엘리야가 선지자가 개입하는 게 아니고, 나봇이 죽고 난 뒤에 뒤늦게, 뒤늦게 선지자가 개입해요. 하나님께서, 형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아벨을 살리기 위해서 개입한 게 아니고, 형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난 뒤에 그때 하나님이 등장했습니다.
“너는 왜 동생을 죽였느냐?” 그렇게 나오니까 가인이 하는 말이 “저 안 죽였습니다. 제가 동생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증거가 있다. CCTV 깔까?” 그런 식으로 해서 땅이, 동생 아벨의 피를 머금은 땅이 형을 거치지 않고 우회해서 직접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렇게 의인의 피가 흘렀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호소했고, 하나님께서 그 호소를 들으시고 방문해서 “가인아, 너는 왜 동생을 죽였느냐?” 이렇게 나오신 거예요. 창세기 4장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아벨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형이 찾아와서 갑자기 돌로 쳐 죽인다고 할 때 아벨 같은 신앙인은 뭐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겠습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럴 거예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형이 날 막 죽이려고 해요.” ‘급박한 상황인데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살려주세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 소식이 없어요. 호소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하나님이나 혹은 천사가 그 자리에 나타나도 “그냥 죽어, 그냥 죽어!” 이랬을 거라는 말이죠. 아까 불렀던 찬송가 432장의 가사를 보세요. 제목 자체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에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그다음에 “주 너를 지키리”라고 해요. 주님이 누구를 지킨다고요? 나를 지킨다고 하잖아요. 이 내용이 성경 내용과 틀린 거예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근심 있는 자들아, 교회로 나오라.’ 왜요? ‘주님이 너를 지켜줄 것이니까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잘해라.’
지금 이것 때문에 이 교회라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이 내용과 달라요. 성경은 나를 지키시는 게 아니고 나에게 품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언을 지켜요. 그 예언을 지키기 위해서 열왕기상 21장 17절에서 나봇이 죽고 난 뒤에 엘리야선지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간단한 이야기예요. 지금 아합왕은 포도원에 대해서 탐이 났잖아요. 그때 아합왕은 계명을 알았어요. 왕이니까 지적으로 율법도 알고 계명을 아는데, 그 계명을 못 본 척했어요. 왜? 자기 탐심이 우선되니까.
그런데 이 계명이라 하는 것,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오해하면 안 돼요. 계명은 내가 지킬 때 실효성이 있고 효과 있는 게 아니에요. 계명에 관심이 있든 계명에 관심이 없든, 말씀을 지키든 말씀을 지키지 않든, 이 세상은 율법대로, 계명대로, 말씀대로, 예언대로 그대로 그냥 시행되고 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이나 계명 이런 걸 계산 안 해요. “조상의 포도원은 말씀에 못 팔게 돼 있습니다.” 그 한 소리 했다고 아합왕이 삐져서 밥도 안 먹고 그랬잖아요. 아합왕은 ‘율법 지키는 자에 한해서 율법이 효과 있게 주어진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봇이 율법을 거론하든, 아니면 나봇이 “아, 임금님이 제 포도원을 사시려고요? 웃돈까지 주시면서요? 그러면 팔지요.”라고 기꺼이 포도원을 판다 할지라도, 곧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거래나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이 세상은 율법대로 시행됩니다, 율법대로!
KTX 타고 서울 가는데 대전에서 탄 어떤 아가씨가 앉았어요. 그 햇빛 가리는 차양 있잖아요. KTX는 좌석 네 개에 차양이 하나 달려 있다고요. 새마을은 개인마다 있지만요. 날씨는 막 비 오려고 잔뜩 흐려 있고요. 밖의 경치를 좀 봐야 하는데 그 아가씨가 타자마자 일방적으로 차양을 쑥 내려버려요.
제가 “방금 그거 왜 내렸어요?” 하니까 잠 좀 자려고 내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난 잠 안 자고 싶은데?” 지금 햇빛 가리개를 내리느냐, 안 그러면 올리느냐…, 그래서 합의해서 중간쯤만 내리기로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지금 KTX는 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KTX에서 인간과 인간끼리 어떤 시비거리가 있고, 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의 일은! 이걸 믿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걸! 희한하죠. 뭐 지식으로 ‘세상은 예언대로 되고 말씀대로 되고 주님 말씀 될지어다.’ 백날 교회에서 들어도 막상 ‘말씀 지키면 이 말씀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느냐’를 생각해요.
이 말씀 지키면? 말씀 지키면 이익 없어요. 개인적으로 이익 주려고 말씀을 준 적이 없습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계획도 있고, 어떤 기대를 하는지와 상관없이 말씀은 달린다. 말씀은 달리는 거예요. 끝까지 달립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것은 뭐냐?
‘끝’이라는 걸 준비했어요. 말씀의 완성 상태가 끝인데 그 끝에 가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떻게 행동하고 무슨 짓을 하든지 모든 것이 무효가 됩니다. 무효가 돼요. 딱 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와가지고 “주님, 제가 주의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의 말씀이지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제가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는데 귀신을 쫓아내든, 주의 종노릇을 하든 뭘 했든 간에 일체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고 끝을 장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피사건 그뿐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 ‘다 이루었다’에 인간의 행함은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하시는 방법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여호와께 욕을 했든, 여호와를 저주를 했든, 아니면 여호와께 찬양을 했든 그 끝, 그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는 끝이 우리를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KTX가 달리는 그 종점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는데,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어떤 짓,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죠, 옥경이, 희미한 등불 밑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그걸 다 무시하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 십자가 행하심이 끝이에요.
그 끝에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합류한 거예요, 자기의 죽음으로! 아벨도 자기의 죽음으로 합류했고, 나봇도 자기의 죽음으로 합류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고, 인간 개인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엘리야, 너무 비정한 분이에요. 정말 비정한 분입니다.
그러면 이제 딱 답이 나왔네요. 인간은 왜 우상을 섬기는가? 너무 인간에게 정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나한테 정이 많고요. 나의 연민, 나의 가치, 나의 의미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합니다. 집중적으로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에 하루 24시간을 다 소모해 가면서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내가 나한테는 다정하고 정이 많아요.
오늘 본문 열왕기상 이거 21장에서는 이렇게 보면 돼요. 아주 제가 좋게 이야기 합니다. 아합왕은 그의 부인은 아주 다정한 부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아주 다정한 부부였다는 사실. 아합왕이 자기 부인 말에는 꼼짝 못 하고 엎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대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아합왕 같은 그런 남편이 최고예요! 최고의 남편입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니까요. 세 가지 시킨 것을 다 했어요.
“여보, 도장 가져와. 도장 찍어.” 두 번째가, “여보! 비상계엄 선언해.” 비상계엄이 뭐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있는 경우에 국왕이 비상계엄을 내려서 백성들을 금식하도록 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군사가 몇 되지 않는데 블레셋이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금식을 선포함으로써 국가의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어요.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국왕이 판단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한마음으로 백성들이 다 같이 금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그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게 요나서에도 나오지요.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심판을 외칠 때 니느웨 성 전체가 비상계엄을 해서 국왕부터 해서 다 금식했잖아요.
그 이세벨이라는 아합왕의 아내, 김건희죠, 그 아내가 남편에게 시킨 거예요. “금식을 선포하세요.” 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이 터졌다는 겁니다. 금식을 선포하게 된 이유는 뭐냐? ‘나봇이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고 있는 임금님에게 저주의 발언을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진 우리 남편인 아합왕을 나봇이라는 포도원지기가 돌아다니면서 유튜브로 이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더라.’
그 내용인즉 ‘아합왕은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왕을 저주했는데,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신 왕을 저주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비상계엄으로 전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가짜 뉴스의 주동 인물인 나봇을 재판에 걸라고 여론을 조성해 나가는 그 일을 이세벨이, 아주 다정하게 남편을 잘 내조하고 있는 그 이세벨이 시켰어요.
세 번째, 재판을 하게 한 거예요. 금식 선포하기 전에 우선 왕의 도장을 찍었어요. 공무원부터 전체 백성들에게까지 반포해서 지금 나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북이스라엘 전체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왕의 도장을 찍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두 번째, 금식을 선포했고요, 세 번째가, 재판을 열게 했습니다. 나봇을 재판하는데 하나님 저주의 벌을 받게 하려면 두 증인이 있어야 해요. 두 증인은 이미 이세벨 쪽에서 돈 주고 섭외를 했어요. “저 나봇이 돌아다니면서 임금님을 욕하고 저주했다”라고 이야기하라고 돈을 받았으니까 안 할 이유가 없죠. 그래서 그 세 가지 일을 이세벨이 나서서 한 겁니다.
아직까지 엘리야는 그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아까 봤던 열왕기상 21장 26절에서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라고 해서 마지막 나봇이 죽는 사건으로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세벨은 온 북이스라엘을 어떤 사상으로 전부 물들였는가?
바알 숭배 사상으로 나라 전체를 다 바꿔놨어요. 사상적으로 그렇게 바꿔 놓고는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바알이 승리하는 쪽으로, 우상이 승리하게 하는 조치를 한 거예요. 이것은 한 마디로 율법 조롱이예요. 율법 조롱, 여호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세벨이 여호와를 믿는 나라에 시집을 왔기는 왔는데 바알 입장에서는 뭐 하나님의 율법이고 예언이고 다 시답지 않은 거예요. ‘웃기고 있네!’ 자기의 바알 신 입장에서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실체가 없으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들이 섬긴다고 했는데 섬기는 그 방식은 바알을 섬기는 방식과 다를 바 없고 똑같은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또는 천주교 성당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안 믿는 사람들이 알아요.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안다고요. 크리스마스쯤 되면 공영방송 KBS에서 한 회는 가톨릭 특집으로 내고, 또 한 회는 개신교 특집으로 내놔요.
그 내용은 뭐냐? 목사나 신부 또는 수녀가 등장해서 어렵고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모습들을 크리스마스 주간에 내보내서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 도와주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현실화다. 진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인간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게 진짜배기 가톨릭 신자고, 진짜배기 목사고 기독교 신자다.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KBS라는 언론을 통해서 다시 한번 성탄절의 의의를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서 살려보자.’ 그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누가 한다? 제대로 된 교회, 제대로 된 성당은 그 일을 한다는 거예요.
이게 우상입니다. 불신자가 ‘교회가 뭐냐’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는 마귀한테 점령당한 거예요. 목사의 설교를 불신자가 알아듣는다? 이미 그 교회는 마귀의 전당이에요. 만약 성령 받지 못한 불신자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돼야죠. 그렇게 돼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지배자 마귀와 만났어요. 마귀와 만나서 시험을 받는데 먼저 마귀가 선방 때리죠. “40일 금식하니까 배가 많이 고프지? 지금 머리가 헤롱헤롱, 하면서 곧 갈 것 같지? 네가 하나님을 아들 메시아로서 하나님 일을 하려고 왔잖아. 내가 너 하는 일에 협조해 줄게. 일단 식사하시고, 힘내서 기도도 더 하시고 앞으로 하나님 일을 더 하셔야죠.” 하고 마귀 쪽에서 나왔어요.
마귀가 그런 조언을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40일 동안 굶어서 헤롱헤롱 하니까 에너지가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언급해서 ‘마귀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수단으로 해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인간을 지배했는가’를 노출시키는 작업에 들어가신 거예요. 왜? 마귀가 그 짓을 했으니까요. ‘떡이 우선인가, 말씀이 우선인가?’를 놓고 육체로 된 인간은 말씀, 말씀, 해도 항상 무엇이 우선이다? 떡이 우선이다. 여기서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왔어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은 이거에요. 인간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귀, 그 우상 섬기는 인간도 하나님의 예언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외곽에 두르는 프레임, 그 틀은 마귀가 이렇게 쳐서 인간을 꼼짝 못 하게 했다면, 그 틀을 포함해서 더 넓은 틀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고 율법이고 예언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가두리 양식장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가두리 양식장, 마귀 안의 인간들은 전부 다 탐심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어요. 다 탐심이에요. 그런데 그 마귀가 가두리 양식장처럼 인간을 가두어 놓았는데, 그렇게 가두어놓은 마귀까지 합쳐서 그 전체가 주님 말씀의 가두리 양식장이에요.
다시 아까 우리가 부른 그 찬송가 다시 보겠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근심 걱정이 있다는 말이죠. 그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이 찬송을 부르고 이 가사를 보면서, 그 가사를 보는 우리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제발 살려만 주이소!’ 하잖아요. ‘주유소’가 아니고 ‘살려만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봇은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엘리야가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나봇이 죽고 난 뒤에 왔다고요, 죽고 난 뒤에야. 아벨도 죽고 난 뒤에야 하나님이 찾아왔어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여기서 그 근심 걱정을 해소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해요. “그냥 죽어버려. 그러면 근심도 같이 없는 거야.”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그런데 우상을 앞장세운 마귀는 “그렇지. 네가 하나님 믿고 기도하고 금식해서 살아야지.”
이게 우상을 인간에게 유포하고 전파하고 전도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크리스마스고, 마귀들이 교회와 성당에 대한 해석과 설명에 자신만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너희들이 교회에 갇히고 성당에 갇혀서 백날 해봐라. 우리가 불신자라도 그 정도 상식은 다 있어.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일을 착한 일이라고 하면서 하는지 그 일을 우리도 다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아쉽거나 필요할 때만 교회나 성당에 나가고, 뭐 안 가도 그만이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요.
그게 말씀에 대한 모독이고, 말씀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걸 이세벨이 한 거예요. 왜? 이세벨은 진짜배기 사탄이기 때문에요. 이세벨의 정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아디라 교회에 나옵니다. 이세벨이라는 명칭이 나와요. ‘여자 이세벨’이 요한계시록 2장 20절에 나오고요, 요한계시록 2장 24절도 봅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계2:20, 24).
그러나 티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비밀을 배우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으니
But unto you I say, and unto the rest in Thyatira, as many as have not this doctrine, and which have not known the depths of Satan, as they speak; I will put upon you none other burden.
이세벨은 그 배후의 사탄과 연계되어 있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세벨은 그 두아디라 교회에서 뭘 했느냐? 사람들을 꾀어내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주님의 복음으로부터 사람을 빼내는 일을 해요. 이세벨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그냥 놀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고 예언 성취에 꼭 필요했던 거예요.
아합왕은 나봇을 못 죽여요. 그냥 밥도 못 먹고 고민이나 하고 있었어요. 바알 종교의 전파자, 바알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시집온 이세벨이 아니면 남편 아합은 나봇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해보면 결국 남는 것은 뭐냐, 최종 결선자는 누구냐? 여호와와 그리고 바알이죠. 여호와와 바알이에요. 인간은 그들이 만든 가두리 양식장의 들러리에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서 나봇의 재판을 엽니다. 두세 증인에 관한 것은 신명기 17장 6-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건 율법이잖아요. 율법에 보면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것이며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찌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찌니라.”
재판할 때 두세 증인으로 해라, 해서 신명기 17장에 예언이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세벨은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잖아요. 나도 존중합니다. 말씀대로 이 재판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유효한, 정말 정당한 재판입니다.”
그래서 나봇을 죽여서 포도원 뺏겠다는 자기의 탐심은 안 들켰죠. 그 탐심은 들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 탐심을 누가 아느냐? 하나님만이 아시고 다른 백성들은 무지해서 몰라요. 권력이라는 가두리 양식장에 있으면 그 양식장 안의 일반 백성들은 권위의 무서움만 알지 최종 권위, ‘인간 왕이 가지고 있는 권력마저 가둬 버린, 탈출 불가, 벗어날 수 없이 갇히게 만드는 더 큰 가두리 양식장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나봇이나 알지 다른 사람이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일관되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거에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 사는 데 도움 되고, 유리하고, 남한테 멋있게 보이고 인정받는 그런 것을 기대하신다면 그것은 마귀가 먼저 마중 나옵니다. “이렇게 해. 이렇게 하면 돼.” 교회나 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면 마귀가 먼저 그 수법을 알려줍니다.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말씀을 딱 던지니까 마귀가 걸려들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라고 하는 근거는 시편 91편 10-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여기서 사자는 천사죠. 이걸 누가 사용했다고요? 마귀가 사용했거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시편 90편 10-12절을 가지고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성도 여러분! 시편 90편 10-12절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거의 백이면 99는…, 한 마리는 놔둡시다. 여지를 둬야지요.
100명 중에 99는 뭐냐? ‘하나님 잘 섬기면 주께서 우리를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지켜줍니다.’ 이런 해석 나와요. 그런데 그 해석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도 다 짐작하고 있는 해석이라니까요, 그 해석은! 그러면 그 100명 중에서 1명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시편 91편 10-12절의 말씀,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라는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마귀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빠져나올 분이 필요한데 그 빠져나오는 분이, 기존에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의 해석에서 증오와 미움을 받고 죽음으로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온 그분이 ‘너 시편 91편 해석을 잘못했다’라고 인간들과 마귀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이 말씀은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 해석 참 길죠. 그걸 간단히 줄여보면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가하는 것이라’(요 5:39). 시편 91편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요 19:30)를 위해서, 십자가 이전에 시편 91편 10-12절이 있는 것인데, 인간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는 이 성경책, 이 귀한 성경책을 가지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 써먹더라는 그 말이죠.
누가? 마귀가! 그러면 또 누구입니까?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정신, 인간들 대부분의 정신세계, 성경을 모독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입니다. ‘내가 성경을 몇 독 했는데, 내가 신앙생활을 몇십 년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서 자기의 체험이 어떻고, 신앙 체험이 어떻고, ‘하나님이 이렇게 도와주더라’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난 끝 지점’에 오게 되면, ‘우리가 뭘 하고 뭘 안 하고’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은 무효가 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나봇이 장렬하게 죽었든, 나봇이 안 죽고 살았든, 아벨이 죽었든 살았든, 아벨이든 나봇이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시대에 미리 보여주는, 곧 메시아의 희생, 말씀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당하도록 조치하신 예언의 위대함, 말씀의 능력,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열왕기상 21장이 준비돼 있습니다.
“준비됐나요? 준비됐어요?” 우리가 준비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줘야 하지, 성경 공부하고, 마음 야무지게 다짐하고, 금식하고…, 이런다고 해서 주님 섬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원체, 원체 우상 숭배자니까, 나밖에 모르고, 나만 챙기고, 나만 설명하고, 나만 정당화하는 성경 해석 외에는 신경을 안 쓰니까, 우리가 주께 할 말은 “주여, 우리가 바로 우상 숭배자 맞습니다!” 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때, 우리의 절망마저, 우리가 망해도 마땅하다는 것, 그 망함마저 우리가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때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얼마나 전체가 오염되었는지 상상도 못 하지만 주께서 일으킨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통해서 ‘마귀가 이런 식으로 말씀을 모독하고,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 속에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느끼면서 알게 된 이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