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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4-06 13: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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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강-롬 14장 1-4(믿음이 연약한 자)14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3장 1절에서 4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1-4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인간과 인간들만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로만 구성되는 현실에서는 해답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서의 사람이 점유하는 위치를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조정을 해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여기 안계시고 인간과 인간만 있다면 자기 빼놓고 다 믿음이 안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럴 때 너는 누구냐, 하는 말은 “너의 지금의 위치가 네가 정했느냐, 아니면 남이 너를 정해주더냐? 현재 너 빼놓고는 믿음이 다 안 좋은데 그러면 너만 믿음이 제일 좋은데 나만 믿음이 좋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 믿음이 못하다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 네 자리는 누가 너보고 그런 자리를 점유하라고 이야기했지??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뭐라고 답변하느냐 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가 정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정하셨으니까 저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정하는 자리는 주님만 할 자리지 네가 그렇게 나설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예요. 주인의 자리에 그 교회 당회장, 어떤 목사, 교황, 그 어느 누구라도 주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 우리가 어느 자리를 배정받았는가, 어떤 자리가 우리 자리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가 나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 소리 듣는 것을 마치 나에 대한 비난, 단죄, 또는 폄하, 또는 우습게 보는 것처럼 표현한 것인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믿음이 연약한 자리가 바로 나의 자리라고 수긍하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에요. 믿음이 연약한 자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예수님 빼놓고 다 믿음이 연약해요. 예수님 빼놓고는 다 믿음이 연약한데 어느 정도로 연약하냐 하면, “나는 믿음이 좋은데 왜 너는 믿음이 약해.”라는 말을 주저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약해요. 많이 약해요. 아주 약해요.
교회 내에서 믿음 시합이 벌어지고 믿음 경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목사는 그걸 유발시키지요. 새벽기도 나오시면 그만큼 어드벤티지가 주어지고 새벽기도 안 나오시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고. 보통 교회에서 예배가 세 번 있어요. 낮 예배, 오후 예배, 수요예배, 그리고 거기에 보탠 것이 새벽기도시간, 거기에 금요일 시찰회, 그건 백수 아줌마들이 모이는 건데 그 시찰회, 별 직업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게 구역예배인데, 그게 벌써 몇 개입니까? 새벽기도 일곱 번, 주일 낮, 수요일, 금요철야, 구역예배. 그게 숫자가 여덟 번이 넘는데 거기서 숫자가 감한 만큼 믿음이 약한 자가 되고 숫자가 추가한 만큼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버려요. 이건 뭐냐 하면, 일부러 신앙 경쟁으로 유도하는 느낌이 들어요. 신앙을 가지고 누가 강한 자냐, 많이 참석하는 자는 강한자고 적게 참석하는 사람은 믿음이 연약한 자다. 그러면 석달 만에 온 사람은 믿음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금 6개월 텀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요. 일 년 되어도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믿음 다 약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야기 할 때는 “나는 어떻게 믿음이 강합니까?”라고 묻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믿음이 어떻게 강합니까?”라고 묻지 말고 “주님이여, 제가 어떤 면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에 해당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꼬박꼬박 모임 때마다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연약할 수밖에 없는 그 연유가 뭡니까, 라고 우리가 물어야 돼요.
로마서 14장을 보면서 출발부터 오해되는 대목이 뭐냐 하면, 기존의 교회라는 것이 있잖아요. 기독교라는 이름이 교회가 있잖아요. 그 21세기 교회에서 나오는 현상들을 가지고 이 로마서 14장을 비교해가면서 평가를 내리는 이것이 원인부터 잘못이에요. 기존이 교회를 교회라고 여기고 그 다음에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서 어떻게 이상적인 교회가 되는가, 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전혀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간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입니다. 들어가지를 못했어요.
기존교회, 한국교회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이것은 주 안의 세계입니다. 교회 안의 세계가 아니고, 교회 안의 공동체라는 세계를 이렇게 맞추라는 말이 아니고 주 안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지금 제가 말한 취지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할 때 사람들의 기본적인 본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합니까?”라고 일단 묻고, 자기가 질문의 틀을 일단 만들어놓고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지?”라고 하면서 로마서 14장 17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게 잘못이라니까, 이게 잘못이에요.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다 같이 구원받고 참된 교회라고 인정받지? 옳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내용을 채우면 되겠구나.’라는 것이 잘못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잘못되지 않은 게 뭐냐 하면, “그냥 하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냥입니다, 그냥. 우리 교회를 거기다가 집어넣지 말란 말이지요. 그냥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10년 만에 한 번 물어봅니다. 믿습니까? 이것은 너무 중요하니까 10년 만에 물어보는 거예요. 왜 내가 사는 교회를 여기에 집어넣습니까? 오히려 내가 사는 교회를 빼버려야지. 내가 다니는 교회를 믿지도 마세요.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하늘나라 속하면 되었지 왜 교회에 속해야 됩니까? 내가 지금 하늘나라에 속하면 되었지 내가 다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성경에 우리 교회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날 사랑하심이라고 하는 찬송이 있는데 전 용렬 목사님이 이런 시비를 걸어 놨어요. 성경에 날 사랑하심이 없어요. 주님은 하늘나라만 사랑하지 날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왜 자꾸 나를 거기에 깔고 들어가느냐는 말이지요. 날 깔고 들어가니까 내가 속한 교회도 잘 되어야 나도 덤으로 잘된다고 착각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무엇도 더 필요 없습니다. 예배당 건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사시면 누가 뭐래도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제 말이 어렵습니까?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목사님, 기존교회는요…….” 자꾸 기존교회를 생각하니까 이게 어려운 거예요.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네가 받되 비판하지 말라, 그런 뜻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를 빼버리세요. 그냥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그 선입감을 버려야 됩니다.
삼거리에 가면 플래카드 붙어 있어요. 대구대학교에서 강연하는데 월명스님이 오신답니다. 대구대학교가 원래부터 기독교재단이거든요. 언제부터 이 학교가 스님 모시고 강연을 하게 되었는지. 그 주제가 뭐냐 하면 소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 이게 주제에요. 아니, 죄송합니다. 주제가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도’ 같은 뜻이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도’가 주제입니다. 월명스님. 그리고 뭐라고 해 놓았느냐 하면, 수능점수 높이고 싶은 사람들, 취직이 안 되고 있는 청년들은 오라고 되어 있어요. 그게 월명 스님이지요. 그게 월명 목사라 해도 아무 달라질 것이 없어요.
교회라는 게 바로 그런 곳이에요.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도. 오직 듣고 싶고 보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과 연관시킨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이렇게 한다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도’를 염두에 두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아버리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내 기도가 이루어지는구나.’라고 흥정과 거래와 타협조로 나오기 마련이거든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되, 할 때는, 이 말을 실천에 옮기려면 일단 자기 믿음은 연약한 자가 되면 안 되고 강한 사람이어야 하고, 자기 빼놓고는 다 연약한 사람이고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으면 “로마서 14장 1절 말씀대로 제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습니다. 지금 사진 찰칵 찍으시고 내 소원은 이루어주소서.”라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나라, 진정한 교회, 참 교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족관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놓쳐버렸어요. 인간의 가족관계, 혈육관계, 사람의 혈통으로나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람의 육으로나 혈통으로 난 자가 아닙니다. 뭐가 끊어졌다는 것을 자기의 인생의 주요소로서 사건이 벌어져야 돼요. 혈통과 육으로 끊어지고 뭐가 되었다는 것이 있어야 돼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할 때 혈육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목사라거나 집사니 검사니 아무 상관도 없어요. 어쨌든 간에 ‘혈육이 아니요’ 이 말은, 네가 진정 믿는 자라면 네가 혈육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네가 수긍하고 인정하느냐, 그걸 묻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로마서 14장은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관한 이야기고 하나님 백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성령 안에서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믿음은 혈육과 관계되어 있지만 성령 안에서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뭘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유해야만 연약한 믿음이든 강한 믿음이든 상관없이 믿음은 새로운 질을 부여받습니다. 죽음을 경유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데서 새로운 성질을 부여받을 때 그게 바로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구성원들 조사해 보면 사실 전부 다 씨족이고 혈족이에요. 특히 촌에는 다 그래요. 백씨 촌에 가 보면 장로 권사 다 백씨에요. 혹은 최씨 집안이든지. 성씨가 다른 경유는 며느리나 사위의 경우지 대부분 혈족이고 가족중심이에요. 이것은 인류사회가 BC 5천년 경 국가라는 것이 성립되기 전에 처음에는 수렵사회로부터 어느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정주사회가 되거든요. 그 때부터 씨족사회가 되는 거예요. 씨족사회 자체가 씨족입니다.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부족연맹을 이루어서 국가가 되거든요.
그러니 권사투표나 장로투표하면 같은 집안이 몰표를 주니까 그냥 되지요.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두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혈육에서 나온 믿음과 또 다른 믿음. 혈육에서 나온 믿음이라고 제가 정의를 내렸지만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지요. 하지만 다음믿음을 정의하게 되면 ‘아. 그렇구나.’ 하겠지요. 그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유해서 나온 믿음이라는 믿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을 경유했느냐. 아니면 그냥 자기 육신이 뭔가를 얻고자 해서, 죽어서 천국 가고자 하는 어떤 신념이나 각오나 결심, 그런데서 나오느냐에 따라서 같은 믿음이라도 두 종류로 나눠지는 겁니다.
믿음을 먼저 규정을 해야 되는데요, 믿음이라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가인의 제사를 봐도 그렇지만 사람이 이 땅에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해요. 고생을 많이 하니까 사람의 희망이라는 것은 고생 없는 영원한 세계, 고생 없는 일시적인 세계가 아니고 고생은 없되 영원히 고생이라는 것이 없는 그 세계를 희망으로 삼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아이디어나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단체에 가입해서 신앙생활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교회라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경에 보면 결국 에덴동산으로의 회귀 혹은 복귀가 되는데 사람들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느냐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는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내가 뻔뻔스럽게 들어가기는 미안하고 내가 에덴동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죄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 에덴동산 같은 천국에 넣어주려면 내가 지은 죄만큼 아픔과 희생과 절제를 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에게 피해 입힌 그 만큼 보상을 해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너는 보상이 끝났다.” 해서 다시 원대복귀를 시켜줄 수 있는 그런 희망을 내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육신에서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제가 육신에서 만들어낸 믿음이라 했지만 사실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는 모든 종교행위의 바닥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너무나 사는 것이 고생스럽기 때문에 빨리 저쪽으로 가기를 위하는데 그 쪽으로 가려면 어느 정도 양심껏 신에 대한 내 잘못에 대해서 자백하고 자백했다는 뜻으로 절제하면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이여, 변변치 않지만 제 성의니 받아주옵소서.” 라고 드리면 “그래, 네가 쫓겨난 이유를 아는구나. 내가 다시 받아주마.”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인지상정, 인간세계에서의 정이잖아요.
내가 저지른 일을 내가 알아서 갚아주겠다는 이 대견함, 이 착함, 그 선하신 하나님이 이러한 착함을 외면할 리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에서 나온 아이디어, 육신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제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신앙생활 몇 십 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몇 십 년 하면서 제가 언급했던 원리와 비교해 보세요. 아마 유사성이 있을 거예요. 비스무리 할 겁니다. 뻔뻔스런 놈들은 나쁜 짓을 해도 자기 맘대로 살지만 나는 다르다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구원 받습니까? 그게 믿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경유할 하등의 필요가 없지요.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양심껏 살면 되니까. 사람들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 아내도 그런 것을 했고요, 그게 나쁜 짓인지 어쩐지는 그런데, 제가 젊을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한 게 뭐냐 하면, 밥을 할 때 쌀을 한 컵씩 떠서 따로 모았다가 교회 올 때 그것을 가져다가 교회 뒤에 놓여 있는 쌀통에 넣는 겁니다. 쌀 모아서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용입니다. 성미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천국가기 위한 노자 돈 비슷한 것, 나의 마일리지 쌓기, 쿠폰 모으고, 짜장면 시키면 탕수육 공짜로 하나 주는 것,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지금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내가 한 일들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따로 뽑아내요. 뽑아내서 따로 분류해서 특별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걸 모아서 천국 도장, ‘참 잘했어요.’ 하는 도장을 찍어서 내 밀면 이것이 천국가고 복 받는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본성이에요. 그렇게 뷴류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한국에서 직장생활 어렵게 하다가, 특히 교사나 유치원 원장 같은 분들, 방학이 있는 분들은 주로 어디에 가느냐 하면 계모임해서 스페인 같은 나라로 해외여행가요.
그처럼 천국 가는 것도 돈 모아서 해외여행 가듯이 착한 일만 모아서 그것으로 하늘나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늘나라는 해외 여행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비행기로 갔지만 같은 지평이에요. 같은 지평에서 그냥 멀리 있는 나라일 뿐이지 위에 있는 나라, 영적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같이 이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어요. 붙어 있는 나라 같으면 착한 일을 가지고 노자 돈 모으듯이 해서 갈 수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들어갈 수 없는 나라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뭐냐 하면, 그게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착한 일 뽑아내고 경건한 일 뽑아내고 교회 일 뽑아내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마일리지 모으면 짬뽕주고 탕수육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봐야 천국티켓 얻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지금 알려드릴게요. 지금 착한 일 많이 했잖아요. 육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챙긴다고요. 다른 사람은 수요예배 안 나가는데 나는 참석한다, 이런 게 있다는 말이지요.
그걸 다 모아서지고 십자가 앞에 가서 중국산 라이터를 가지고 그걸 불 질러 버리세요. 십일조 한 것 있잖아요. 예배당 지을 때 전세금 빼서 낸 거요, 그거 십자가 앞에서 불로 싸질러 버리세요. 하늘나라 여행은 그렇게 가는 거예요. 자기 의가 없어야 돼요. 십자가가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또는 업신여기지 말라는 이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에서 이미 언급을 했어요. 언급을 해도 이해를 못하지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이 여러 번 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너희 자리가, ‘남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그 자리 자체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고 그 자체가 그야말로 잘못된 자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이 연약하면 잘난 것인가?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믿음이 연약한 자라면 그러면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자면 되겠네, 할 때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우기는 그것도 일종의 마일리지고 자기 자랑이 되거든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것도 자기 자랑이 된다니까요. 믿음이 연약한 자가 구원받는다 할지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도 잘못된 믿음이 되는 거예요. 육신에서 나온 본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하라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궁금해요? 한 사십 몇 년 전에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어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하는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에 보면 초반부에 이런 것이 있어요.
미국 CIA에서 러시아 공작원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없는 사람인데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 명의로 전화 개설하고 신분증 만들고 그 사람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한 것처럼 해 놓았어요. 사람은 없지요. 미 정보부에서 러시아 정보원을 잡기 위해서 덫을 놓았습니다. 러시아 정보원은 그 사람이 실제 인물인줄 알고 체포하려고 합니다. 호텔에서 그 가상의 인물을 체포하기 위해서 잠복하고 있는데 그 가상의 인물 이름까지는 지금 기억이 안나요. 그 사람 이름을 스칼렛 이라고 그냥 합시다.
그것도 모르는 체 카운터에서 “거기 스칼렛이 있습니까?” 하는데 여기 스칼렛이 없지요. 가상 인물이라 본래 없는데 “스칼렛 씨! 전화 왔습니다.”하는데 그 때 마침 아무것도 모르는 보통 시민, 미국이든 러시아든 정보국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냥 보통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저요” 하고 등장한 거예요. 그 때 러시아 정보원이 진짜 그 사람인줄 알고 체포해 버린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원래 없어요. 원래 없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자리, 공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가 출생하면서 거기에 걸려 든 거예요. 주의 일에 말려든 거예요.
너무 어렵지요? 쉽게 이야기하면 연약한 사람도 없어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뭘 만드느냐 하면 연약한 것을 만들어요. 연약한 것을 만들고 강한 것을 만들었어요. 연약한 것, 믿음이 연약한 것을 만들고 믿음이 강한 것을 만들어서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우연히 말려들어 걸려든 것처럼 인간들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용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 하면, 믿음이 연약한 것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로서 행세를 해줘야 돼요.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 자체가 없으니까 믿음이 강한 자도 없는데 다만 믿음이 강한 자리를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믿음이 강한 자 역할을 해야 될 사람을 우연히 결합을 시켜놓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강한 자 행세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신 그 분이 주인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 죽으심의 효과가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 넣느냐,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존재하거든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은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설정물들이고 전부 다 할당된 산물들이거든요.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늙어 죽어야 되는데. 이것은 주인만 알고 있어요. 주인만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믿음 약한 자, 믿음 강한 자,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주인도 아닌데, 네가 주최 측도 아닌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안중근 하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이등 박문)을 저격한 사람입니다. 어떤 애들은 안중근 의사라고 하면 그것도 모르고 산부인과 의사였나, 이비인후과 의사였나, 이런 식으로 하는데 안중근은 이등 박문을 저격한 의로운 사람이잖아요.
안중근 하면 반드시 이등 박문이 따라와야 돼요. 성도라면 ‘나는’이라는 것이 빠져버리고 어떤 역할을 부여받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나는 고기를 못 먹겠어. 사람들이 우상 섬길 때 고기를 사용하니까 그 제사고기 먹으려니 찝찝하다. 난 채소만 먹겠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에 가면 절에서 주는 비빔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어요. 제 아내 같은 사람도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저는 맛있게 먹었거든요. 믿음이 연약한 거예요. 본인이 믿음이 연약한 것이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믿음이 연약한 자가 되어버리면 영구히 그 사람은 믿음이 연약한 자가 돼요.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것을 보여줄 어떤 시점이 있다고요. 몇 년 있다 보면 믿음이 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한데 그것은 주인소관이지 내가 저 사람한테 가르치거나 훈육의 결과가 아니에요. 설교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니까요? 주께서 다른 역할, 다른 배역을 맡겨주면 다른 역할을 또 하는 겁니다. 믿음이라면 주인을 경유해야 되는데 주인을 경유할 때는 라이터를 들고 ‘동안 나는 이런 점에서 저 사람보다 낫다.’는 그것을 아주 쓰레기로 태워버려야 되거든요.
제가 긴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만 크게 느낀 것이 있어요. 중학교 때, 나이 한 열 서넛 되었을 때 저보다 나이 많은 열여덟부터 서른까지 된 누님들을 보니까 왜 그렇게 착합니까? 왜 그렇게 착하고 전부 다 힘든 인생을 살아요. 그리고 그 착한 누님들을 누가 괴롭히는가, 술 처먹은 머슴애들, 남자 어른들이 그렇게도 누님들을 괴롭혀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세요. 눈물이 막 나요.
<여자의 일생>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그 여자의 일생이 다 수난과 고난의 인생, 그걸 중학교 때 들으면서 ‘아, 여자는 너무 불쌍해. 여자는 다 착하고 누나는 다 어질고. 세상에 이런 착하고 어진 누나를, 남자들은 진짜 못됐어. 이용해 먹고 돈 빼먹고 술 먹고 때리고, 살림한다고 저렇게도 애를 쓰는데……’ 뜨신 물도 안 나오는데 손 호호 불면서 장사하고 자식 키우려고 애쓰는 것 보면 다 착해요. 이게 중학교 감성이었습니다. 60대 감성으로 보니까 그 누나들이 다 이기주의자들이었어요. 믿음이 강한 거예요.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다 이기주의자에요. 자기 새끼밖에 모르고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
착해요? 천사요? 천사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을 중학생인 내가 판단하고 60이 된 내가 판단해 버리면 그것은 바로 잘못된 판단이에요. 내가 70되면 무슨 판단을 내릴지 모르거든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믿음이 없는, 육적일 수밖에 없는 이 인간들을 어떻게 하늘나라에 거듭나게 해서 들어가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서 나온 그 믿음의 성질이 그 사람에게 퍼져서 그 믿음이 드디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인간은 처음에는 ‘내가, 내가’ 하다가 점점 자기는 껍질이 얇아져요. 그리고 그 사람 내부의 내용물이 하늘로 솟구쳐서 올라가는 겁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 믿음이 참 연약하지요. 다시 참고로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본인 믿음이 세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약하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줄 그 증거물이 희미한 겁니다. 그림으로 한다면 스케치, 데생, 영화로 하면 흑백영화, 건축공사장으로 한다면 틀만 쳐놓은 그것, 스케치만 해서 색은 안 칠했잖아요. 스케치만 되어 있으면 그것은 연약한 것이고 색까지 칠한 것은 강한 믿음이고.
색까지 칠했다는 것은 본인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의 증거가 뚜렷해졌다, 그만큼 분명해 졌다는 거예요. 예수님, 하면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고 그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줄 역할을 우리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계실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거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 속에 뭐가 움직이는가를 보자는 말이지요. 이해 되십니까? 지금 내가 뭐냐, 네가 뭐냐 가지고 대립될 문제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뭘 하려고 지금 그런 속성을 증거 해 보이고 지금 내 속에 있는 증거는 내가 믿음이 좋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가지고 뭘 또 따로 끄집어내서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증거로서 사용하는가, 각자 보여줄 증거를 내 놓으라는 겁니다. 그게 주인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거든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끼리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겠는가? 네가 높겠는가, 내가 높겠는가?” 믿음이 연약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했잖아요. 믿음이 연약하다니까요?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높은 자리하고 너는 낮은 자리해라.” 이렇게 하고 끝났습니까? 주님께서 지금 지목하는 것은 뭐냐? “나는 너보다 높다.” “아니야! 내가 너보다 높다.” 각자 뭘 주장하느냐, 나, 나의 것, 나를 주장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 안목에서는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그 말이에요.
너희들 안목에서 나오는 그런 기도는 내가 이해는 하겠는데 지금 수준이 그것은 아래층이고 예수님이 해야 될 기도와는 전혀 연결이 안 되고 기도 자체가 엉터리고 모든 것이 엉터리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 너희가 모른다고 했으니 그 다음에는 알려주셔야 할 것이잖아요. 진짜 신앙의 알맹이는,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야, 사약입니다. “내가 마시는 그 사약을 네가 같이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약은 사람 죽이는 잔이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일단 살아 있을 때 “어이, 살아 있는 너. 살아 있는 내가 보기에 살아 있는 너는 영 나보다 덜 살아있고 늘 못난 존재야.” 양쪽 다 살아 있다고 언급할 때는 누가 잘났나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할 때도 누가 머리가 잘 나왔나, 매사 우리는 너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고, 그래서 둘이 같이 살아 있는 중에서 누가 더 높은가? 살아 있는 채로 기도할 때는 자연스럽게 자기 증거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에게 사약을 줄 테니까, 내가 먼저 마시고 그 다음에 내가 마시는 그 죽음의 쓴 잔을 너희도 같이 먹어야 된다.” 이 독약을 먹을 때 누가 폼 나게 먹는가가 비교 대상이 될까요? 지금 죽는 마당에. 살아 있기 때문에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가 성립되지 내가 죽는 마당에는 내가 제일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이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나보다 더 좋아 보이고 죽는 나는 손해처럼 보이잖아요.
바로 그 자리가 우리 본래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경유할 때만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고 하늘나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문제는 그거예요.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자기가 죽어 있으면서도 안 죽어 있다고 보이고 믿음이 강한 모습은 내가 죽은 것은 마땅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강한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때에 따라 시에 따라 달라요. 어제보다 5년 전에 믿음이 더 좋을 수도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그 때 그때마다 쓰임에 따라서 완전히 주의 증거로 쓰이는 겁니다.
여러분이 화초나 과실수 가꿀 때 화초는 꽃을 보기 위해서 가꾸고 과실수는 열매를 따기 위해서 가꾸잖아요. 열매 딸 때 “나무야, 미안하다. 따먹어서.” 그런 마음을 별로 안 갖잖아요. 나무는 나를 위해서 꽃을 오래 피워줘야 해. 이처럼 모든 것은 자기 위주이듯이 주님께서도 약한 것, 강한 것, 꽃으로 피워놓고 “그래, 이렇게 네가 약한데 저렇게 강하게 만들어줄게.” 이것은 주인만이 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화초가 나서서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렇게 저렇게 간섭할 입장이 못 됩니다.
죽은 자인데, 자기가 제일 낮은 자인데 뭘 간섭을 해요. 아까 교독문 15번을 읽으면서 다시 제가 느낀 겁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편 51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보세요, 믿음이 어떻습니까? 본인은 믿음이라고 내세울 것도 없지요. 아예 믿음 자체가 삭제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지요. 그 다음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것이 지금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신앙고백서, 신앙일기장이 이것으로 장식되어 있어요. “내가 주께만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 “주여, 나는 믿음이 왜 이렇게 좋습니까?” 이런 일기내용이 여기에 기록이 안되어 있다니까요? 사람하고 비교할 때는 내가 믿음 좋다, 나쁘다, 이게 되지만 정말 평소에 주님 앞에 있어버리면 라이터 가지고 내 믿음 좋은 것도 불살라 버려야 돼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울산에서 강의했습니다만, 진짜 믿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여, 제가 믿습니다.” 하지 않아요. “주여, 그걸 제가 어찌 믿을수 있습니까?” 반문하면서 믿음을 토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할 때 “어떻게 그런 일이? 나 처녀, 처녀인 내가 회임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내가 육신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 내가 마일리지 쌓는 그것,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 실력 자랑이고 진짜 예수님의 죽음을 경유했다면 “주여, 저 감당 못합니다. 이것은 이해가 안 되네요.” “어이,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보고 하는 이야기 아니야. 살아 계신 주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고기 못 먹습니다. 나는 채소만 먹습니다.” 할 때 “어이, 지금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야?” “나는 주님 보고 이야기해.” 그런 자를 용납하라,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단 말이야. 아직까지 율법에 매여 있네.”라고 할 때 내가 그 정도 믿음이라고 ‘내가’가 들어가 버리면 믿음이 강한 자가 아니고 믿음이 없는 자에요. 너나 나나 ‘내가’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예요. 할 일만, 뭔가 보여줄 일만 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주께서 판단하신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는 죄악 중에 출생했기 때문에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했다, 제 모친이 여기 지금 계시지만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했습니다.” 처음 태어날 때도 죄고 지금도 죄였다. 왜 죄인인가? “예수님이 그 죄를 어떻게 속죄하는가를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고 활용되라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육신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를 보여주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교회? 그게 왜 있는데요? 지금 교회가 문제가 아니에요. 하늘나라 백성 되는 것이 문제지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나의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어버리면 남하고 비교하게 되는 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믿음이 좋고 너는 믿음이 약하다고 평가 할 때 주인님이 나섭니다. “그러지 마라. 네가 그럴 자격이 안 된다. 그것은 네 자리가 아니야. 나와. 그 자리는 내가 있을 자리야.” 너는 다만 다루어질 나의 기능인이고 주께서는 십자가라는 일괄적인 용서로서 나를 이렇게 새사람 만들었다는 증거의 용도로 쓰일 뿐이지 내 믿음 갖지 마시고 내 소망 내 사랑 갖지 마세요.
다 육신 적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쓰이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죄 중에서 태어나서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데 늘 이것이 본래 자리고 본래 모습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사실을 주께서 다루어준다는 이 입장을 우리게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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