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81강-형제판단(롬14;10-12)이근호140420

아빠와 함께 2014. 4. 21. 08:21

 

형제판단(로마서 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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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4-20 13:23 
형제 판단 

2014년 4월 20일                           본문 말씀: 로마서 14:10-12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사람들이 이해하는 ‘절대’ 혹은 ‘절대적’이라는 것은 실은 일단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시작하는 주장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판단해보고 나서 그 다음에 믿든지 아니믿는지 본인이 결정짓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결정과 절대는 이미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시해놓으신 사항입니다. 

이로서 매사에 인간은 하나님과 다투는 입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나 그 복음은 이러한 다툼을 가시화하는 현장에서 보여줍니다. 즉 복음은 다툼을 묵살하시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십니다. 다툼을 통해서 복음이 본질이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툼은 바로 절대냐 아니면 우연이냐입니다. 

우선 절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이 있는 나무를 심어놓았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미 ‘죽음’을 언급하시는 대목과 더불어 나무를 심어놓으셨다는 겁니다. 나무가 있고 그 나무를 인간이 따먹을 경우에, “너는 죽게 되었구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보다 죽음이 우선이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이 죽는 게 아니라 죽음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필연은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 자체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죽음도 아울러 필연입니다. 인간이란 바로 이 필연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우연으로 인식되어야 될 각가지 일들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즉 인간들이 스스로 필연적 존재로 설쳐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절대요, 자기가 영원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절대는 굳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임무는 죽어주는 겁니다. 필히 죽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행위나 실수와 오류나 죄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죽어야하는 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사실임을 알게 함을 감사합니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연한 존재입니다. 우연한 주제에 건방지게 자기 중심으로 세상의 변화를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연히 우연히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 일임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는 새언약을 증거하는 환경으로 다루어집니다. 

에스겔 16:63에 보면,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새언약 안에서, 달리 표현해서 ‘주 안에서’ 인간은 새언약에 의해 이미 용서받아놓고 후차적으로 자신의 죄를 평생 접하게 되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곧 자기 자신을 절대적 존재로 간주하여 자신을 우상시한 죄를 말합니다.  새언약의 피가 겨냥하고 있는 죄의 깊이와 수준을 네가 이제는 접해야 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평생을 걸쳐서 말입니다. 바로 이 언약 자체의 수립을 위해 인간은 죄인으로서 가담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인상(印象)을 사도 요한은 천국의 장로에게 묻습니다. 천국 장로는 말합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씻어 하얗게 된 자들이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가 최종적으로 증거되지 못하는 교회는 한참 지옥으로 질주중입니다. 진짜 천국은 피흘리신 ‘어린양의 보좌’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의 취지가 현 이 세상에서 발휘되어야 하고 적용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이들은 고기를 마음놓고 먹는 것이 복음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우상제사를 간접적으로 장려하지 않는 입장에서 채소만 먹어야 참된 신앙의 도리라고 우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기들이 우상제단을 거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한 행위들이 다 하나님께 바로 직고해야 될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본인들이 마음에 결정해서 내렸다는 것으로 자기 구원이나 신앙의 옳음의 근거로 삼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판단의 최종 주체로 내세우는 죄를 짓게 됨을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81강-롬 14장 10-12(형제판단)1404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4장 10절에서 12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10-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사도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대를 언급하는 상황이 오늘 본문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하고 안 맞는 느낌이 듭니다. 로마서 14장 전체의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고기를 못 먹겠다. 나는 예수 믿고 난 뒤에 채소만 먹을 것이다.”라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면서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고기라는 것이 우상제물을 바치고 난 뒤에야 고기를 먹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제사음식을 신자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기분 나빠서 제사음식 자체를 못 먹겠다.” 할 경우에 “예수 믿는 사람은 먹어도 되는데 네가 왜 그런 음식을 못 먹는다는 말인가? 너 혹시 불신자 아니야? 너 신앙 없지?”라고 하는 경우도 발생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네가 우상숭배 한 그 제사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상제사를 장려하고 독려하는 셈이 되기에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상숭배를 퍼트리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네가 신앙이 있다면 먹지 말아야 되잖아.”라는 논쟁들이 있었어요.



그 논쟁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형제라는 한 마디로 전부 다 잠잠케 하는 겁니다. 형제들 사이에 그런 것 가지고는 시비 걸지 말라고 하시면서 심판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나서는 그 자체가 문제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더 유발시킨 동기가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용서 받고 술 먹어도 됩니까?”라는 쪽과 “예수 믿었으면 술을 끊어야지요. 성경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술을 끊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에 “여러분, 술 마시고 안 마시고는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제가 거론하는 자체가 문제꺼리도 안 되는데 도리어 문제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 번 저한테 언급하신 분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자유인데 너무 꼼꼼하게 따진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주차위반까지. 그런 것까지 따져가지고서는……, 성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성도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자기 행동에 대해서 신경 쓰게 만드는 유발요인이 되어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심판대 언급하는 취지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쉬운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에스겔 16장 6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에스겔 16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다.” 영원한 언약을 세우면 그 언약을 너한테 준 효과란 이런 거예요. 죄에 대해서 묻고 난 뒤에 이런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해주고 난 뒤에 “네가 어떤 죄에서 용서받은 줄을 아나? 우리 같이 손잡고 네가 저지른 일을 평생토록 관람해보자. 바로 이 죄거든? 그런데 다 용서되었거든. 네가 27살에 이런 죄를 지었잖아. 그런데 이미 용서했잖아. 자 34살, 네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용서 했거든. 그 다음에 37살…….” 이런 식으로 손잡고 이미 용서가 된 상태에서 뒤늦게 우리의 죄 지은 것을 하나하나 살펴서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가 뭐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에스겔 16장 63절의 구절을 가지고 필연, 반드시, 절대, 이런 표현을 하겠습니다.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확립된 진리, 원칙을 기억해 주셔야 돼요. 이것은 우리가 변경할 수도 없어요. 빼도 박도 못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미 용서를 해 놓고 그 용서는 새 언약 안에 뭐가 들었는가를 열어 보니까 용서하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적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필연적으로 몰고 가신다는 겁니다. 방금 읽은 에스겔 16장 63절을 필연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에서 먹어도 된다, 안 먹어도 된다, 신앙 없니 있니, 이것을 저는 우연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연이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참을 수 없는 우연의 위협’이라고 했어요. 참을 수 없는 우연의 위협. 인간은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따져서 예상이 되어야 하는데, 과학적으로 예상이 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그 재미로 인생을 사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그런 것이 많잖아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딱딱 들어맞잖아요. 십일조 하면 창고가 넘친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그것을 원하고 그런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예요.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모습은 자기는 필연 속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이고 싶어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우연의 덩어리고 우연의 뭉치다. 네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되어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에요. 고기를 먹고 안 먹고,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필연가지고 지금 들이대시는 겁니다. 사람이 채소를 먹고 안 막고,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채소를 먹다가 “나는 죽어도 고기는 안 먹을 거야. 고기는 몸에 콜레스테롤이 쌓여서 몸에 해로워.” 하다가 우연히 길을 잃고 우연히 먹을 것이 떨어지고 배고픈 상태에서 우연히 보니까 마침 남아 있는 것이 고기 한 점, 어느 등산객이 흘려버린 스팸이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따기도 좋게 손가락을 걸고 당기는 그 스팸이 있을 때, 처음으로 고기를 먹는데 왜 그렇게 맛있는지.



그렇게 될 때 자기의 절대적인 기준은 그 순간에 다 깨지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주장도 사실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네가 왜 모르냐는 거예요. 필연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용서했다는 그 용서의 사건, 십자가 사건, 새 언약의 사건, 그것만이 필연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우연인 겁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출생한 것도 우연이고 모든 만남 같은 것이 우연이에요. 이 세상은 서로가 우연으로 다른 우연에 영향을 줘서 그쪽에 변화를 유발시키면서 상호 소통하고 영향을 주면서 누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까 용서한다, 이런 것이 성립하지 않도록. 모든 인간은 그냥 주님의 용서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자기의 죄를 까발리고 들추어지는 방식의 인생을 살지 내가 너를 용서한다든지,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의 심판대를 언급한 것은 그런 취지입니다. 따라서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예수 믿었고 이미 용서받았기에 때문에 술 먹어도 된다, 이것도 잘 못이고 예수 믿었으니 나는 정신 차리고 평생 술 먹지 않겠다는 이것도 잘 못이고. 경상도 말로 곱표(가위표). 술 먹든 술 안 먹든 뭘 해도 그것이 바로 이미 용서가 완료된 상태에서 되돌아 봤을 때 다시 파악되는 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왜, 나는 술 먹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을 하나의 절대적, 필연적인 존재로서 자기를 다시 정립해 있다는 그 죄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이여, 지금까지 저는 술 한 모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우연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절대적인 존재로 보는 겁니다. 예수 믿고 술 한 모금도 안 먹은 사람이 저입니다. 저는 술 한 모금도 안 먹었거든요. 어떤 목사님이 술 먹으라고 막 권해도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식으로 해서 안 먹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우연이 산에 갔다가 포도주가 있는 것을 봤다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먹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의외로 상당히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난해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누가 방해를 하느냐 하면, 소위 예수 믿었다는 본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지요. 그렇지만 성경에 나오는데 봐야 되지요. 천국에 올라온 사람을 보고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하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어서 하얗게 된 사람이다. 어린양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어떤 절대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이고 그게 천국이에요. 이것이 굉장히 쉬워 이지만 어려운 이유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지 않는 곳을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태리의 어떤 배를 몰았던 선장이 사고 배에서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가 걸려서 재판을 받았는데 2743년형을 선고했다는 거예요. 예수님 태어나서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형을 살아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선장이 제대로 승객들을 인도 했다는 뜻이거든요. 그 소리 듣고 뭘 느꼈느냐 하면, 오늘날 목사나 설교자가 선장이라면 이들이 교회에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씻어지기 때문에 어린양이 보좌가 보이는 쪽으로 배를 인도하지 아니하면, 소개하지 아니하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은 골로 간 거예요. 지옥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괜히 요한계시록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가야 돼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뭘 하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만 씻어서 천국 가거든요.



그게 뭐냐, 에스겔 16장 63절에 보면 이미 용서를 해놓고 이 땅에서 용서된 사람에게 손 잡고 데려가면서 세상 구석구석 보면서 “봐라, 세상 모든 것이 죄악이었잖아.” 그런데 네가 그 죄 속에 같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미쳐서 호들갑을 같이 떤 거예요. 뭐가 안 보이니까? 어린양의 보좌가 안 보이니까. 선장이 없어. 자기가 선장노릇을 해야 되고 자기가 항해사 노릇을 해야 되니까 자기 절대성, 자기 잘남, 나는 채소를 안 먹기 때문에 누가 채소를 먹는다면 불신자야, 나처럼 채소도 먹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면 신자 아니야, 라고 자기가 선장노릇 한다는 말이지요.



양쪽 다 뭐가 안 보이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 뭔가 씻어주는 피가 보이지 않는 곳이에요. 로마서 14장에서 사도바울은 상당히 격앙하고 격분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더 심하게 할 거예요. 이 세상은 전부다 우연이거든요. 모든 만남이 우연이에요. 어떤 시에 보니까 어떤 여자가 우연히 여자를 만났어요. 만났는데 그 남자가 여자를 보자마자 엉엉 울더라는 말이지요. 남자는 “(등을 두드리면서) 용서해줄게.” 했다는 거예요. <우연히>라는 노래 가사에 그런 게 있어요.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는데 다 용서했노라고.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우연으로 되어있다면 문제가 뭐냐 하면, 왜 우연에 불과한 일들에 대해서 왜 인간들은 호들갑을 떠느냐는 말이지요. 왜 인간들은 그걸 필연인 것처럼 바라보는 안목이 왜 장착되어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자체가 재난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자체가 재난이에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자체가 재난이에요.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만드시고 별을 만드시고 바다를 만드시고 뭍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만들었잖아요.



누굴 위해 그걸 만들었습니까? 그걸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다요? 바다는 사람을 위한 바다가 아니에요. 바로 천국을 위한 바다고 하나님을 위한 바다다 그 말이지요. 그런 면들,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해도 그게 눈에 띄지를 않는 거예요. 바다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은 전부 다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이 뭐냐,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에서 나와야 돼요. 절대적인 원리와 원칙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선악과라는 것은……,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악과를 심어놓고 아무소리 안하다가 나중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니까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나?” “예, 제가 따먹었습니다.” “그거 따먹으면 안 되는데. 그것 따먹으면 죽게 되어 있어.” 이렇게 해서 선악과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선악과는 먼저 만들어 놓고 “네가 따먹는 날에는 죽어.”라고 하시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뭐가 절대적이냐 하면, 선악과가 있는 것도 절대적이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도 절대적인 겁니다.



지금 머리 좋은 사람은 제 말의 취지를 벌써 알아차렸을 것인데 대부분 못 알아 차렸어요. 그런데 우연히 마귀가 왔고 우연히 인간이 그걸 따먹었을 때에 인간은 따먹고 난 뒤에 아담과 하와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절대 양보 못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것은 절대적으로 양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절대는 절대적으로 유지가 되어야 하고 고수가 되어야 하고 확정이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인간이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제가 선악과 따먹고 죽어가면서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나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군요. 고맙습니다.” “그게 왜 고마운데?” “내가 절대가 아니고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 자체가 절대라는 사실을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죽어가면서 깨닫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왜 저를 죽이십니까?” 하고 호들갑을 떠니까 도대체 누가 절대고 누가 우연이라는 말입니까? 이 세상 중심이 누구여야 되는 겁니까?



조미미가 불렀던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거든요.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왜 있느냐 하는데 그것은 네가 물을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다는 주님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있고 주님은 구체적으로 언급을 했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걸 추리면 그냥 “죽으리라.” 죽으라, 그 말입니다. 그냥 죽어라, 에요. 그 죽으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먹고 미소를 띠면서 당황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살다가 윽, 하고 죽는구나, 끝. 이 모든 것이 절대적인 원칙 속에 그냥 갈 뿐이거든요.



그런데 마귀가 나서서 이렇게 해요. “야, 이왕 따먹은 거 우리끼리 새로운 절대적인 것을 만들어버리자.”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절대로 우리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요? 그렇지요?” 라고 마귀가 인간을 앞장세워서 인간중심으로 절대를 구성하게 새롭게 확정해 버린 거예요. 이것이 교회라고 해서, 예수 믿는 단체라고 해서 안 생길까요? 나는 채소를 안 먹는다, 절대적이다. “어, 너는 고기를 먹네? 너는 신앙이 아니야.”라고 해 버리면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노렸던 그 노림수에 말려든 게 돼요.



에베소서 6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앞에 있는 6장 5절과 6절에서는 종과 주인의 사이에서 먼저 종에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대하듯이 하인을 대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사장되고 그 회사 사원되는 것이 전부 다 우연의 산물이라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우연이라는 거예요. 내가 사장되고 싶어서 사장 되는 것이 아니고 파도에 밀려서, 세상 파도에 밀리다 보니 사장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사장 되고 싶어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까 우연히 말단 직원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와 있던 거예요. 그럴 때 뭐가 절대냐를 찾아보면, “누가 나를 이렇게 했습니까? 사장님도 아니고 종업원도 아니고 자기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이미 용서되고 난 뒤에 내 죄가 무엇인지를 까발리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사장되게 했고 나로 하여금 내가 진짜 미워하는 그 사장의 말단 직원이 되게 하셨다.”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왔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평소에 내가 악마와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사장님이 너무 심하게 굴어요.” 또는 “내가 사람 하나 잘못 들여서 얼마나 애를 먹는지. 장부조작에 돈을 횡령하지 않나. 저런 인간은 내가 때려죽이고 싶다.” 하는 정도로 그 직원하나에 대해서 미워하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평소에 자기가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미처 내가 내 중심인 것을 몰랐었는데 우연히 그런 직원과 사장, 사장과 직원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죄, 모든 것을 내 절대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이 까발려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5월이 되면 어버이 주일이 있지요, 어린이 주일이 있지요, 5월 1일의 노동절도 있지요, 모든 세상의 관계 속에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연히 까페에 갔는데 ……, 제가 갔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드는 겁니다. 커피 한 잔에 500원이나 천원이면 되는데 5천원이나 해서 안 갑니다. 예를 드는 겁니다. 카페에 갔는데 늘 갈 때마다 어떤 여자가 앞자리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한두 번 오는 거겠지, 했는데 갈 때마다 매번 그 여자가 있었어요. 365일 동안 그랬어요. 물론 말은 서로 안 했지요. 그런데 366일째 그 카페에 갔는데 그 날은 그 여자가 없는 거예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 여자가 왜 없지?’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 전에 365일 동안이 한 번 한 번 다 우연인데 자신은 반드시 그 여자가 나타나야 된다는 생각에 그것이 정립이 되고 말았어요. 그것은 그 여자의 잘못이 아니고 본인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세상이란 내가 익숙해졌고 반복해서 했던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정상’이라는 사고방식이 어느새 나를 뒤집어씌운 겁니다. 그 카페는 나의 삶의 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에는 반드시 그 여자가 앉아 있어야 격에 맞는, 내가 생각하는 공간에 합치되는 것인데 어느 날 보니 그 여자가 없더라는 말이지요. 그 다음날부터 그 남자는 그 카페를 안 갔습니다. 왜, 자기가 생각했던 그 공간이 아니기에 다른 카페에 갔지요.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말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하지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세상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대로 그려져야 자기가 행복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업신여긴다는 말이 나와요.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업신여긴다는 말은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불행해지니 네가 없어지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업신여긴다는 말은, 네가 내가 구축한 시간과 공간속에 쓸데없이 네가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어디 가서 죽든지 좀 빠져달라는 말이지요. 네가 빠져줘야 내가 구축해 놓은, 내가 행복하다고 확정된 공간에서 네가 방해 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누가 너의 공간이래? 누가 너의 시간이래? 네가 지금 네 인생을 고집하고 있는데 네 인생은 네 인생이 아니야.” 그것은 우연이고 절대적인 공간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한 인간을 뒤 늦게 손잡고 다니면서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다고 다시 한 번 용서의 가치, 용서의 의미를 높이기 위해서 주께서 다니고 있는데 너는 손잡고 계시는 주님은 생각 안하고 ‘저 인간은 제 눈에서 좀 꺼져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그 주장은 “네가 주야? 네가 뭐야?”라는 식으로 지금 지적하고 계시는 거예요.



신앙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우리가 주인의 자리에 앉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거예요. 용서를 받았지 용서를 해 달라고 해서 용서를 소유한 것이 아니에요. 용서를 소유한 내가 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용서라는 그 사랑을 늘 얻어맞는 자리에 와 있어요. 용서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항상 용서가 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 용서가 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항상 죄가 있는 자리에 있어야 저쪽에서 용서가 이쪽으로 날라 오잖아요. 14절에 보면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을 했습니다.
  As one who is in the Lord Jesus, I am fully convinced that no food is unclean in itself. But if anyone regards something as unclean, then for him it is unclean.(NIV) I know, and am persuaded by the Lord Jesus, that there is nothing unclean of itself: but to him that esteemeth any thing to be unclean, to him it is unclean.(KJV)  I know and am convinced in the Lord Jesus that nothing is unclean in itself; but to him who thinks anything to be unclean, to him it is unclean.(NASB)


이 본문이 엄청 어려운 본문이에요. 왜 어려운가 하면 이 본문을 이렇게들 오해하는데 그 오해하는 해석을 먼저 해볼게요. 사도바울은 권위 있는 해석자잖아요. 사도바울의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성령으로 한 이야기니까. 사도바울의 말이 “더러운 음식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더럽다고 여기니 더러운 것이니 더러운 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떤 사람들이 “그거 봐라.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먹어도 되잖아. 그런데 왜 너는 ‘고기도 못 먹겠다. 나는 채소만 고집한다.’ 하느냐.? 다이어트 하냐? 그러니까 믿음 없다는 소리와 합치되는 것이고 합당한 거다.”라고 사도바울을 편드는 것처럼 나오는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더럽다고 여기니까 더러운 것이지 사실은 더러운 것은 없다. 없으니까 네가 음식물 가지고 따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사람을 망하도록 하지 말라.”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말이 “그러니까 사도님, 사도님의 말과 내 말이 맞아떨어지지요? 그런데 내가 고기 먹는다고 채소 먹는 사람이 나더러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니 사도님 제 편이 맞지요? 제 편 들어주는 거지요?”라고 언급을 하는 거예요. 이래서 됩니까, 안됩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14절에 보면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다 같이 용서받는 입장에 있기에 어떤 사람도 그 주 안에 있는 원칙을 자기한테 집어넣어서 자기를 절대화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전혀 우리는 이렇게 해라, 하는 해답을 전혀 얻을 수가 없고 결론을 내리려니 결론을 내릴 수가 전혀 없게 되었어요. “이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지요.



11절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 45장 22절, 23절의 대목을 인용한 겁니다. 23.  By myself I have sworn, my mouth has uttered in all integrity a word that will not be revoked: Before me every knee will bow; by me every tongue will swear.(NIV) 23.  I have sworn by myself, the word is gone out of my mouth in righteousness, and shall not return, That unto me every knee shall bow, every tongue shall swear.(KJV) 23.  "I have sworn by Myself, The word has gone forth from My mouth in righteousness And will not turn back, That to Me every knee will bow, every tongue will swear [allegiance.](NASB) 인용을 하면서 음식문제, 채소나 고기문제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제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먹기 때문에 신자입니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신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저 사람은 채소만 먹는데 나는 채소든 뭐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개고기도 잘 먹으니까 나는 신자가 맞다.’는 식으로 내가 신자다 혹은 아니다, 이걸 음식 먹는 행위를 가지고 판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바로 고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아직은 저로 하여금 채소만 먹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여, 저에게는 채소도 먹어도 되고 고기도 먹어도 된다고 그렇게 시켰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시라는 말입니다. “아직은 술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서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라고 직고하라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제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지금 남자들 좋아서 가슴이 두근두근, 벌렁벌렁.



수원에서 강의를 하니까 강의 마치고 어떤 분이 질문을 해요. 자기 남편의 권유로 수원공부에 참여를 했답니다. 남편은 베트남에 일하러 가 있는데 오게 되면 참석하겠다고 해요. 그런데 남편의 말이 기존교회는 다 틀렸고 이 근호 목사님 말이 맞는데 이 근호 목사님은 술 먹어도 된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그것을 따지려고 온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저는 제 편든다고 해서 제 편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만나봐서 그 취지를 봐야 하는데 사람은 자꾸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그걸 주님, 특정목사, 복음 아는 목사를 집어넣는 경향들이 있는데 ‘나는 이제는 술 먹어도 죄가 아니고 마음 놓고 술 먹어도 된다.’ 하는 그 자체가 형제를 자빠트리는 일이 된다는 말이지요.



바로 주님을 보고 해야 할 이야기를, 자랑도 아닌 것을, 그게 무슨 자랑입니까, 그걸 형제를 경유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절대적이 돼요. 술 먹기 싫어라 하는데 우연히, 우연히 술을 한 잔 먹은 것이 결코 우리로 하여금 천국 지옥을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라는 식으로 술을 먹으면 되는데 인간이 우연히 한 잔 먹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술 먹어도 되네?’ 그 다음부터는 술 먹는 공간이 자기의 절대공간, 절대카페가 되는 거예요. 내 공간에는 술 먹어도 되는 공간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게 우연이 아니고 절대가 되어서 자기가 신앙의 기준이 되면 이것은 그야말로 자기부인을 엎어놓고 때리는 것과 똑같이 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우연히, 우연히 술집에 갔는데 우연히 치맥을 먹었는데, 진짜 우연히 위스키와 폭탄주를 마셨는데, 안 먹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손이 갔는데, 안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손이 가서 우연히 손이 그 잔을 들었는데 우연히 그게 목으로 넘어갔거든요. 우연히 넘어가서 우연히 얼굴이 뜨거워지고 벌게지는데, 우연히 비틀거리다가 차 못 몰아서 우연히 대리 불러서 우연히 집에 갔는데 우연히 취중에 떠들다가 잤는지 어쨌는지 우연히 깨보니까 우연히 술을 마셨더라. 그 ‘우연히’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입니다.



그런데 자기 정당성, 이거 먹어도 구원된다, 이런 것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안하려고 했는데.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성경말씀 알면서도 우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해야 돼요. ‘내가 이렇게 술을 먹으면 지옥가기에 나는 절대로 술 끊겠습니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술 먹은 적이 있는 형제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고 모든 것이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거든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바람을 안 피운 사람은 있어도 바람을 한 번 피운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남자들은 압니다, 무슨 뜻인지.



바람을 한 번도 안 피운 그런 사람은 있어도 한 번 피워놓으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두 번 세 번 계속 피운다는 그 말이에요. 왜, 자기의 절대공간, 절대시간,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세 번을 피우든 네 번을 피우든 이것도 우연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제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미치겠다! 항상 말씀 앞에 우리는 어린양의 보좌, 어린양의 보좌가 아니면 여러분은 망해요. 어린양의 피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엉뚱한 ……, 차리라 세월 호 타고 바다에 빠져야 돼요.



하여튼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는 곳에 가면 여러분은 안전 빵입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배를 탔으면 그 모든 용서라는 것, 이미 용서받고 시작된 일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바로 내 잘남, 내 정당성, 나의 의, 나는 신앙에서 마치 해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부추기고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나 자신이 내 구원을 방해하는 하나의 재난처럼, 그것이 바로 죄였구나 하는 것을 되돌아서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이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깊이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채소 문제, 고기문제 하다가 단번에 심판대를 언급하는 이유가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 제발 입 좀 다물라, 아까 본 에스겔에서 입을 열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저 모든 것에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핑계, 핑계, 변명, 변명, 한평생 변명과 핑계로 된 이런 죄를 이미 용서했기에 ‘아, 내가 핑계 대는 이런 죄가 살아가면서 날마다 나오는구나.’ 주여, 이것도 어린양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고 새 언약에 감사하는 바로 그런 모임이 형제들의 모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복음이고 뭐고 다 까먹어버리고 같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어느새 우리가 절대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바다고 세상이어야 되는 것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갔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