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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4-13 13: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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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강-롬 14장 7-9(주님과의 관계)1404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4장 7절에서 9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그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을 인간으로 부르지 않고 이렇게 달리 표현합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너는 산자야.” 혹은 “너는 죽은 자야.” 이 두 종류로만 분류해서 표현합니다. 너는 키가 몇 센티야, 너는 재산이 얼마야, 너는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아, 너는 집사인지 목사인지, 그런 식으로 우리 존재에 붙어 있는 직분이나 직업가지고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인간끼리 이 지상에서 서로 평가하는 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평가하는 그 기준을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내세운 그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의하면 인간은 달랑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살았나, 죽었나? “네가 산자에 속하느냐, 아니면 죽은 자에 속하느냐?” 서랍이 있다면 그 서랍에 딱 두 종류의 서랍밖에 없어요. 한쪽 서랍은 양말, 한쪽 서랍에는 양말, 이렇게 집어넣듯이 이쪽과 저쪽 서랍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다 분류시켜 놓고 그 분류시킨 작업을 하시는 그 분은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 부를 때 “예수님 당신만이 그런 분류를 우리에게 적용시킨 당사자입니다.”라는 말을 짧게 이야기하면 “주여.” “모든 인간을 산자냐 죽은자냐, 죽은자냐 산자냐, 달랑 두 종류로만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때는 그냥 앞에 뭐가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을 완전히 철회해 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도입시켜서 우리를 보신다는 겁니다. 그런 작업을 지금도 하셔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재판받을 때, 진리가 무엇이냐,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지금 당신은 피고고 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기준이 당신에게 먹히지를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나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피고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니까 나에게 잘 보이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나설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사가 와서 나를 풀어줄 수 있는 문제다.” 했어요.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고 할 때 예수님이 “당신 말대로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 이스라엘 왕이라고 할 때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기준이 뭐냐, 진리가 뭐냐?” 할 때 예수님께서 답변을 안하고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도 예수님이 활동이에요. 세상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됩니까? 주께서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해서 지금도 일을 멈추지를 않습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이야기가 그거예요.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너희에게 일을 시킬 것이다. 왜? 내가 일하니까.” 아버지가 일하니까 내가 일하고 내가 일하니까 너희도 일하게 되고. 때로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그것이 침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침묵조차도 활동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 활동은 뭐냐, 바로 이 기준입니다.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거예요. “두껍아, 두껍아! 죽었니, 살았니?” 네가 죽은 자에 속하느냐 아니면 산자에 속하느냐. 지금 로마서 14장 17절을 보고 있습니다. 죽은 자와 산자를 나눠놓고 산자는 한꺼번에 묶어서 천국이라고 부르고 죽은 자를 한꺼번에 묶어서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분류해서 묶는 모든 기준은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거절하십니다. 다 거부하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그 기준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이 분류가 돼요. 사실은 이 점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도 이미 언급을 했었습니다. 보라 하늘나라가 가깝다, 심판 날이 가깝다고 이야기했고……, 하늘나라라는 말은 심판 날을 의미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때는 반드시……, 학교에서 학기 끝날 때는 시험을 치잖아요. 시험을 치면 그 다음에 방학에 들어가잖아요. 시험을 치고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시험 치는 날이 가까이 왔으니, 기말시험이 가까이 왔으니, 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면서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모아서 유황불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그런 기준을 제시했을 때 특별한 기준은 없었어요. 단지 회개하며 기다리기만 하자는 식이었어요. 물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오실 심판 주를 물속에 들어간 사람만이 보이기에 “나는 물속에 빠져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는 식으로 나는 이미 죽어도 합당하다는 자세를 가지고 오실 메시아를 받아들이면 비로소 그 사람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관련성이 있는 사람에 속하는 겁니다. 산자가 될 수 있어요. 서울에 가서도 그런 강의를 했는데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미리 앞당겨서 재판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거기 예수님 앞에 재판받는 사람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세리는 말하기를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하늘나라 믿습니다, 천국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어요. 어떤 존재를 인정합니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정한 기준 앞에서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 나라에 내가 들어갈 입장이 못 됨을 인정합니다. 그런 나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나라에 합류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라는 것을 인정을 했어요. 그런데 정작 재판하시는, 마지막 시험 치시는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연구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연구했습니다. 천국을 탐색하고 보고 왔습니다.”가 아니라 정말 주님의 기준을 안다면 그 주님의 기준에 내가 어떤 노릇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내가 자인해야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것이 의미 없는 존재,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겁니다. 세리가 그런 식으로 의인 되었는데 문제는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했다, 금식했다, 구제했다, 했는데 바리새인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게 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했다.”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나는 저 세리가 있는 장소와 영역에 나는 끼지 않습니다.” 한 거예요. 바로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주님께서 의인이라고 판정을 내린 그 세리의 모습과 나는 같지 않다고, 자기 말로 스스로 지옥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바리새인이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 흉악범이나 성 폭행 범이 아니고, 구원받는 저쪽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그 이야기가 곧 스스로 자신은 지옥 간다는 결과를 낳게 된 거예요. 주님이 제시한 천국의 기준이 이 땅에서 부합되는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땅에서 지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나는 저 죄인과 차원이 다르고 질이 다릅니다.”라고 자기존재의 의미를 둔 그 쪽, 이쪽이 아니니까, 천국 쪽이 아니니까 나머지 배제된 쪽이 다 자동적으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 이것은 천국의 조건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조건 속에서 우리라는, 영어로 We, 천국에 가도록 같이 모아놓은 이 우리가 어떤 우리인가 하면 7절과 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7절과 8절을 제가 연달아 읽어드렸는데요, 제가 보기에 재미있는 것은 이거예요. 8절이 없다고 생각하고 7절만 읽어봅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했을 때 그 뒤에 나오는 8절을 감춰놓고 우리가 모른다고 한다면 7절만 가지고서는 해답이 없고 대략난감해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나는 나 말고 또 누굴 위해서 사는 존재란 말인가, 해답이 없는 거예요. 7절 나오고 그 다음에 8절 나올 때 그리되면 그것이 부합된 사람은 천국에 가는데 8절 나오고 7절 나와 버리면 이것은 천국 갈 지 지옥 갈 지 분명치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8절이 먼저 나와 버리면 “여러분, 우리는 다 주를 위해 삽시다.” 흔히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다 주를 위해 삽시다. 아멘 하십니까?” “아멘.” 우리교회는 거의 아멘이 없지만 아멘, 하는 분은 오늘 출석을 안했는데, 홀로 아멘인데, 주를 위해 살자고 할 때 그렇게 합시다, 해서 주를 위해 산다고 헌금을 하든지 청소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자기를 위해 하는지 주를 위해 하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주를 위해서 하는데 사실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잘 보이면 ‘내가 살겠구나.’ 할 때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도입된 주를 위함이지요. 주님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사실은 은밀하게 내가 잘 되는 것, 내가 목적인데 은근히 주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티를 내놓고 실제로는 결국 주를 위해서 잘 사니까 그것을 근거로 내가 사는 식의 꼼수를 한 번 써 봐,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요. 8절부터 먼저 나온다면. 그런데 7절부터 나오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소리 듣고 다 가버려요. 사람이 은밀하게 숨겨놓은 목적 자체를 먼저 밝혀내버려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지요? 있습니까? 있으면 가주시고. 없지요? 없지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이용하든지, 하나님을 이용하든지, 삼위일체를 이용하든지, 결국 자기 잘되는 쪽으로 생각했다가 딱 7절이 나오니까 그 현장에서 다 가버렸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몇 명 남은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아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이 없으면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면, 주님도 없으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어떤 명분을 위해서 살겠다고 나서면 그것이 구원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이 안돼요. 아무리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헌신하고 안중근 의사처럼 국가에 헌신하고 테러를 행한다든지 혹은 육이오 전쟁 때 인민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가 소속된 ‘우리’라는 것이 따로 있어요. 영어로 We. 우리라는 것이 따로 있는 이상은 그 우리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Son of God>라는 영화를 봤어요. 개봉 첫날에 후딱 봤어요. 왜냐하면 그런 영화는 하루 이틀 만에 내려버립니다. 지금도 하는지 어쩐지 모르겠어요.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새삼스럽게 새로 감명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거든요. 소문이라는 것이 본래 과장되고 허황된 면이 있지만 하여튼 촌에서부터 예수님은 유명했었어요. 5천명을 먹였다, 귀신을 쫓아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니까 예루살렘, 소위 서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은 거예요. 로마의 압제에 있던 유대인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나타났다면서 기다렸던 겁니다. 저는 당나귀를 삐딱하게 타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당나귀를 삐딱하게 타시고 거기에 종려나무 깔아놓고, 영화에는 물론 그런 장면이 없지만 성경에 보면 옷가지들을 벗어놓고,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메시아! 메시아!” 연호하면서 팬클럽처럼 “드디어 다윗의 자손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군요.” 그렇게 했던 그 사람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포함해서 자기들끼리 새로운 ‘우리’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한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도 붕 떠서 뭐라도 된 양 좋아들 했지요. 그런데 유월절 이틀 전인가 가야바에게 갔다가 다시 빌라도에게 재판받고 최종적으로 사형판결이 난 뒤에 즉시로 사형집행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를 즐기는데 예수님과 강도 두 사람은 무거운 십자가, 그 덩치가 완전히 전봇대만한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갈 때 연도에 선 많은 사람들은 싸늘하고 냉담한 태도, 그렇게도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그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는 “여러분, 살인강도 바나바를 살려낼까요, 아니면 자칭 유대인의왕이라는 예수를 살릴까요?” 할 때 “바나바! 바나바!”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약간의 사고실험을 했어요. 만약에 김 정은이하고 예수님을 붙여놓고 “김 정은을 죽일까요, 예수를 죽일까요? 이 둘 중에 누굴 살릴까요?” 하면 아마 김정은을 살리자고 할걸요. “바나바, 바나바!” “그러면 저 예수는 어떻게 할까요?” “죽여라.” 그렇게 된 거예요. 그 민중들, 호산나를 외쳤던 민중들, 나라를 구할 메시아가 왔다고 연호했던 그 민중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참 섭섭한 얼굴을 들어서 죽 돌아보지요. 측은하게 여긴 사람은 엄마 마리아밖에 없었다고 영화는 그렇게 전개되는데요. ‘우리’ 인간이 만든 그 ‘우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그 많은 사람들도 자기들이 소속된 그 우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메시아를, 예수를 자기편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끌어당기려 한 거예요. 예수님이 거기에 말려들지를 않았지요. 왜, 그들은 그들의 기준가지고 ‘우리’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천국 가는 백성이다. 그 기준은 자기들끼리 만들어 놓은 기준이에요. 잘못된 기준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라고 하는 이 우리는 천국의 조건, 주님께서 천국이라는 서랍에 집어넣을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서 모아놓은 우리, 8절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하는 이 기준인 반면에 인간들이 만든 기준은 어떤 기준이냐면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다모여라.” 해서 만든 기준이에요. 그러니까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기준이 아니고 “너나 나나 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맞지요.”라는 기준에 의해서 모아놓은 ‘우리’에요. 우리교회, 그 우리도 마찬가지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간단하게 이야기할게요. 나무가 모이면 숲이 되듯이 너와 나가 만나면 우리가 된다. 이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 사실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거잖아요. 나무가 모여서 숲을 이루듯이 두 사람이 모여서 서로 의지하면 그것이 사람 인(人)자다, 되도 않는 한문해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해석 믿지도 않는데 흔히 아마추어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사람이 둘이 모여 서로 의지한다는 거예요. 이게 받쳐주는 것인지 그것을 제가 확인할 길은 없는데 사람이 뭐냐는 말이지요.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고 더불어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사람이다. 마치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는 것처럼. 부부라는 게 뭐예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 의지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부부잖아요. 오늘도 예식장 주례사에 그 이야기가 막 나올 거예요. 글쎄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그 우리가 아니에요. 숫자가 모였다고 그게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라는 20세기 초반의 실존주의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어요.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하는 철학의 주제 중에 이게 있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단이 있다. 하나는 산재된 집단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융화된 집단이 있다고 본 거예요. 버스 정류소에 사람들이 모일 때 전부 다 버스 기다리기 위해서 모였지만 서로 간에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401번 타기 위해서 한 명 모이고 두 명 모이고 자꾸 모이면 그게 하나의 집단이 되는데 그 집단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우발적으로 모였으니까 그것을 집합이라고 하고 그것 말고 공동체라는 것이 있어요. 서로의 사생활을 까발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집단이 있어요. 그런데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현대사회에서 두 집단이 어떤 집단이 되든지 간에 인간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물체,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어떤 집단이든 어떤 공동체든 그의 목적은 항상 실패로 끝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인간이 사적으로 갖고 있는 자유는 어떤 공동체도 만족시킬수가 없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부부가 서로 만났잖아요. 한 몸 되었다고 했잖아요. 살아가면서 보면 한 몸이던가요? 개인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욕구와 욕망과 자유성과 선택은 아무리 결혼생활을 오래해도 옆 사람이 말릴 수가 없어요. 잔소리를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부부가 시작부터 이미 깨진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계약결혼을 한 겁니다. 일단 살아보겠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우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왜 멸망했는가? 이게 바로 하나의 인간 대 인간의 이익을 노리고 모아놓은 집합으로서, 단체로서,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생각하기에 그것이 깨진 겁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것은 뭐냐, 우리 속에서 ‘나’라는 것이 절대로 상실되거나 사라지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것은 천국에 갈 사람들에게나 하는 이야기지만 보통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라는 격언, 그 원칙이 이 7절을 대신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교회 와서 로마서 14장 7절을 보고 있지만 이 말씀 속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평소에 이것과 정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 보면서도 이 성경 속으로는 들어가지를 못해요. 서랍열고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냥 서랍이 있네, 라고 이야기 할뿐이지. 바깥에 놓여 있는 거예요. 7절이 안되니까 8절은 물론 안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미쳤나, 나한테 손해될 일을 내가 왜해?’ 그런데 여러분이 이 한가지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단독적으로 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고 주가 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함으로서 주가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빼놓고 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잡아서 분명히 우리 힘으로 안 되고 될 수가 없는데, ‘우리 힘으로 절대로 안 돼.’를 되게 하심으로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세리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그 죄인을,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네가 바로 의인”이라고 해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주는 요소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그 요소가 나와요. 그러한 근거가 나오고 원칙이 나온다고요. 분명히 죄인 맞아요. 누가 봐도 죄인이 맞는데 죄인인 자를 놀랍게도 의인으로 바꾸는 그 능력을 쏟아내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 된다니까요? 그리고 주님은 쏟아냄으로써 본인은 주가 되어야만 하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능력이 뭐냐, 그 능력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예배 전에 권사님하고 이야기하는 중에 좋은 말씀을 들었어요. 여기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절에 보면 “뱀을 집으며…….” 그 다음에 권사님이 아주 좋은 지적을 했는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라고 되어 있어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저는 권사님이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이 독을 마신 적이 없고 이 독을 안마시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권사님이 하는 말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 커피 안에 나트륨을 비롯해서 많은 독성물질이 들어 있다.”고 했어요. 현대인들은 하루 석잔 씩 커피라는 독약을 마시고 있는 거예요. 독을 마시고 그거 빼낸다고 효소 먹고, 무 갈아먹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먹고. 황금알 보면 다 알려 준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구약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을 바꾸는 그 능력이 반드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과 맞닿는 일에 집어넣어요. 물속에 집어넣잖아요. 불속에 집어넣지요. 사자 굴에 집어넣지요. 전쟁이라는 그 죽음에 집어넣지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가다 죽음과 맞닿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택한 백성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와 그 내가 어떤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요. 정답은 거기에 있어요. 세리가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한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우리가 알기 쉬운 요새말로 번역하면 “주님이여, 내가 어떤 행위를 할지라도 그게 의미 없는 일인데 왜 자꾸 나는 의미 없는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줬던 그런 죄를 지었나이까?” 라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고 그 남편 우리아를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살해를 했어요. 일부러 위험한 곳에 집어넣어서 죽였다 그 말이지요. 그럴 때 다윗은 자기 행동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밧세바와 간음을 해놓고 그게 의미 있는 걸로 알아가지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이미 임신이 되었으니 그 임신이 자신의 유전자가 아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 장군의 유전자라고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이렇게 모든 것은 의미를 주는 거예요, 그 의미를 주기 위해서 살인이라는 추가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겁니다. 그 때 나단선지자가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다윗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이걸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교회에서 하는 거짓주장들이고요,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회개한 것부터 해서 내가 한 모든 죄도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근거를 받아들이면 돼요. 그게 뭐냐, 난 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왜 진즉에 몰랐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날 때부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는 착한 일 안할 수도 있고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악한 일을 안 할 수도 있고 악한 일을 할 수도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고 우겼던 그것이 바로 죄였던 거예요. 성전에서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나는 십일조도 하고 금식도 하고 구제도 했습니다.”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무슨 보탬이 되고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게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맞닿게 해서 죽음 앞에서 평생토록 자기가 구원받고자 애썼던 모든 시도, 십일조, 예배참석, 교회 목사 잘 듣기, 선교헌금 내기,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나오기, 이 모든 것이 주님이 마중 나와서 했던 주님의 낯선 죽음 앞에서는 그게 전부 다 의미 없는 일인 거예요. 그 말은 인간은 내가 죽었다가 산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기준을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지옥가고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천국가고, 라고 내가 바르게 행동해야 복 받고 나쁘게 행동하면 저주받는다는 자기 기준을 아직도 의미 있는 기준으로 착각을 해서 그걸 계속 자기 인생에 강요했고 그걸 집어넣은 그 자체가 바로 진짜 낯선 죽음, 십자가라는 낯선 죽음 앞에서 의미 없는 것이 되었어요. 평소에 뭐하고 살았습니까, 도대체. 어떤 분이 방송에 나와서 그 한 멘트를 날리는데 아주 평이한, 쉬운 멘트 하나가 인간의 인생에 대해서 전부를 다 말해주는 멘트였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생만 하다가 인생 다 간다는 거예요. 그 두려움, 공포, 그 말을 들으니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한 평생 좋은 날을 보기 위해서, 좋은 날, 좋은 날, 희망했지만 희망만 연발시켰는데 뒤돌아보니 고생만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고생만 할 거예요. 뻔해요. 도대체 인생이란 게 뭐냐는 말이지요.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그러다가 인생이 끝난다는 그 공포심. 사람의 공포가 두 종료밖에 없어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내가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그 공포, 첫 번째 공포가 그거예요. 죽으면 안 된다는 그 공포. 두 번째 공포가 뭐냐 하면,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충동이 왠지 한 번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 수가 있다는데서 오는 그 공포,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이 사업하다가 실패하면 우리 집안 다 거덜 난다는 것을 아는 그 공포와 그러면서도 도박하듯이 그 일에 뛰어들까봐 겁나는 그 사전공포. 실제로 당하는 공포보다 더 무서운 공포는 미리 앞당겨서 하는 공포가 더 무서운 공포에요.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을까, 해서 어쨌든 안 죽는 쪽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힘듦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죽으면 그 만이냐? 인간이 생각하는 그 죽음이라는 것은 베드로라는 그 경계선을 못 벗어나요. 베드로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나 아버지께로 간다.” 하니까 “그러면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버지에게로 가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죽어도 그 나라에 못 간다.”고 하는 거예요. 죽어도 그 나라에 못 간다는 말은 베드로가 죽기 전에 하는 모든 일도 다 무의미하고 소용없는 짓거리를 해 온 거예요. 지가 진짜 죽음도 모르면서 안 죽고 싶어서 권력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권력 앞에서 고개를 안숙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내가 속해 있는 우리가 아무리 밀어붙여도 천국은 뚫리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맞닥뜨리게 하는 모든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을 표현하면 언약 죽음이죠. 예를 들어서 불속에 들어갔던 다니엘 세 친구 같은 경우, 사자 굴에 들어갔던 다니엘의 죽음, 홍해 가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죽음, 요단강 앞에서의 황당함, 여리고성 앞에서의 황당함, 이 모든 죽음은 우리가 거기서 죽으라고 자기를 낮추고 죽으라고 자기를 때려도 건너갈 수 없는 하나의 경계선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천국에 못가요. 죽어도 천국에 못갑니다. 다윗이 제대로 본 거예요. 인간이 곧 인간의 울타리였고 한계였기 때문에. 울타리가 설친다고 해서 울타리가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법은 없어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결국 안에 있어요. 아무리 몸부림치면서 구원받게 해 달라고 새벽기도 나가도 맨 그 안에서의 발작에 불과한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얼마나 좋은 말인지.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이걸 사람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게 따지고 보면 이런 거예요. “나는 여기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결국은 자기가 자기 한계밖에 안돼요. 그 인간이 스스로의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서 자기 기준을 벗어나서 주님의 기준 속에 들어간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에요.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도 또 절망이 되어버리는데 아무리 해도 될 수가 없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기준을 스스로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서 나올 수가 없다니까요? 백날 해 봐야 나 자신의 위선을 점점 더 감출 뿐이거든요. 그러면 다니엘이나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그 하나님의 죽음, 또는 다윗 같은 경우에는 천공, 구멍을 뚫어요. 뭐냐 하면, 그들이 살고자 하는데다가 대못을 박아서 구멍을 뚫는 거예요. 예수님만 창 자국, 못 자국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때리시는 언약 적 망치에 의해서 우리가 살려고 애썼던 모든 것이 완전히 뻥, 하고 구멍이 뚫려버려요. 영화에 보니까 예수님이 도마에게 못 박힌 손을 제시하는데 그 장면은 상상도 못했어요. 창 자국이나 못 자국에서 영화는 아주 노골적이에요. 뻥 뚫려서 아예 하늘이 보일 정도에요. 주님께서는, “나는 건전하고 나는 대단하고 나는 훌륭하다.” 여기에다가 하나님의 낯선 죽음, 내가 생각하는 그 죽음 말고 주님의 낯선 죽음이 뻥, 뻥, 하고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러면 보통 회사에서나 공기업에서 중요한 서류는 구멍을 뚫어서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폐기처분 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금식하고 철야해서라도 기어이 구원 받아내고 천국 가고야 말겠다는 그 집념의 덩어리가 우리거든요. 따라서 절대로 우리는 우리 구원을 포기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선한 것, 조금이라도 경건한 것, 건전한 것을 기어이 뽑아내서 비밀 금고 깊숙한 곳에 집어넣는 것이 우리이기에 그 자리까지 대 못을 박아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 박는 방법이 뭐냐, 이사야 5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6절에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고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는 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어린양은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도살장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계가 도살장입니다. 도살장과 양의 만남에서 숨겨져 있는 낯선 기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도살장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도살장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내가 태어나면서 내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데 그 우리는 십자가라는 죽음을 능가해서 저쪽 우리, 본문에 나오는 우리,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산다는 그 우리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 중심의 우리를 우리가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사나 죽으나 우리는 자신만을, 최종 마지막으로 챙기는 것은 나거든요. 우리가 지옥가도 어깨를 두드리면서 내가 나를 위로해요. ‘지옥 가도 뜨뜻하게 살면 돼.’ 사우나 정도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할 정도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관대합니다. 따라서 이 ‘우리’, 이 우리는 못 들어가는데 주께서는 저쪽 천국 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의 그 우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사는 그 우리, 그 우리를 경계선 밖에 따로 만들어 놓아요. 그 우리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와 일단 우리가 돼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도 나오고 10장 30절에 나오는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하고 나(예수님)하고 우리가 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 때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너희들(사도들, 성도들)도 같이 모여서 새로운 우리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 우리가 만들어지려면 이 세상의 우리는 내 중심으로 조성된 우리가 되는 반면에 천국의 우리는 뭐냐 하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우리가 새로이 형성됩니다. 새로이 형성되는 그 원리원칙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취한 거예요. 이 땅에서 성취할 때 어떻게 성취했는가?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고 이 땅은 도살장이 돼요. 이 세상은 우리를 잡아먹는, 우리를 처치하고 죽여 버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장, 만남의 환경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남들이 핍박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한통속이 된 우리이기에 예수님이 고난 받는 것처럼 예수님이 구원 받을 때 우리가 주와 함께 구원받는다, 는 그런 말을 하시는 거지요?” 자꾸 저에게 이야기하신다면 거기에 중요한 것이 빠졌어요. 뭐냐 하면, 도살장, 예수님을 죽였던 도살장 중에 우리가, 나가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이것은 제일 중요한 것을 빼먹는 셈이 되어버려요.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남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내가 핍박한다니까요?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나는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포기할 의사가 없고 그런 마음도 없어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오직 나밖에 몰라요.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게 끝이에요. 우리는 매일 같이 예수님을 도살할 만한 의사와 의도를 가지고 매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왜 죄인인지를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 지고 갈 때에 거기 섰던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집에 가면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다 할 사람들이에요. 제가 강의 중에도 그런 소리 했지만,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데 옆에 있는 아줌마들이 “대들기는 왜 대들었어. 이렇게 죽을지 알았다니까. 아무리 해도 예수 혼자 힘으로는 되지를 않지. 집에 가서 빨래나 하자. 설거지나 하자.” 여러분, 빨래하는 것이 죄입니까? 설거지 하는 것이 죄입니까? 예수님 빼놓고 우리끼리 아무리 연구해 봐도 설거지 하는 것이 죄가 될 수가 없고 빨래하는 것이 죄가 될 수가 없어요. 밥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되고 옷이 더러우면 빨래를 해야지 뭐 어쩔 건데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게 죄가 아닌데 예수님이 나타나는 순간 빨래해도 죄고 설거지 해도 죄고 설거지 안 해도 죄고 빨래 안 해도 죄고.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내가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것이 바로 우리, 그 안에 있는 나, 나를 위한 우리라는 그 자체가 주님보기에 죄가 되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 만나서 이렇게 합시다. “설거지 참 잘했지요?” 하고 자랑 질 하지 마시고 또는 “내가 주부가 되어서 설거지도 팽개치고. 난 나쁜 주부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체 회개하지 마시고, “내가 자식도 제대로 못 키웠는데 무슨 엄마답습니까?”라고 되도 않는 자책 하지 마시고 자식 잘 키웠다고 자랑질도 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세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우리, 나를 포함하고 있는 그 우리가 천국 간 우리 앞에서,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께서는 이미 성령을 통해서 넘을 수 없는 곳에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소속을 우리에게 통보해준 것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로 심각한 질문을 했는데 한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하면서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설교를 지금 죽 듣고 있는데 목사님 설교는 결국 하나밖에 안 듣기더라는 것, 결국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는데 문제는 성령이 안 오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질문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나한테 안 왔으니까 주께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니고데모도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할 그 때 바람이 불지요. 성령은 바람같이 분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도 성령이 불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불고 있다, 안 놀고 있다는 겁니다. 나한테 안 찾아왔다고 해서 논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도 이런 질문 하는 자체가 바로 이미 주님이 자기 백성 건지는 작업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내가 이렇게 “어떻게 하면 주님이 찾아올 수 있습니까?” 하고 내가 내 뱉는, 내가 결정해서 내뱉고 내가 선택해서 내뱉는 이 결정조차도 주님의 작업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우리라는 동네, 그 자체가 폐기되어야 할 동네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잘 하면 구원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 죽음만 생각했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각 못한 우리를 십자가 죽음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될 때 “주여, 죄인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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