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 78강-시기(롬13;11-14)이근호140330

아빠와 함께 2014. 3. 30. 16:58

시기(로마서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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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30 13:19 
시기(時機))

2014년 3월 30일                           본문 말씀: 로마서 13:11-14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구원이라는 말은 탈출이라는 말입니다. 벗어나라는 겁니다. 뛰쳐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계속 살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 미련 버려라 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탈출을 호소하고 있지만 정작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느냐에 몰두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바는, “내가 무슨 말씀을 지키면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무는데 유리한 복을 타내겠느냐”와 관련 있습니다. 사람들의 타고난 종교성은, 이 땅을 떠나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천국이란 보편적으로 인간들이 기대하는 좋은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이 들어가셨고 만들어낸 그 세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는 모든 일들과 말씀은, 결국 그 어느 인간도 예수님이 들어갔던 그 천국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합류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천국도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2:31-34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직접 상대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베드로만 있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여전히 눈치 못채고 있다는 다른 요소와 더불어 있는 환경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의 존재와 그 활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직접 상대할 처지가 아님을 나타내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단의 활동을 집어넣습니다. 이는 인간들은 전혀 천국이라는 것을 본성상 알지 못하는 존재다 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들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사단을 언급하므로서 베드로의 세계는 예수님의 세계와 반대 형국 안에 붙잡혀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이 반대로 오늘 본문을 장식합니다. ‘자다’와 ‘깨다’가 상호 반대말이요, ‘가깝다’와 ‘아직 멀았다’가 반대말이요, ‘어두운 밤’, ‘밝은 대낮’이 서로 반대말이요 ,‘단정함’과 ‘방탕’ 및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가 상호 반대말이 됩니다. 더구나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육신의 일’과 ‘그리스도의 옷’이 반대말입니다.

이러한 반대 의미군들이 우리 인간 눈에 뜨이지 않는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기가 모델로 정해놓은 자와 유사성을 갖추므로서 구원에 이르도록 시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반대’가 우선이 아니라 ‘유사성’이 우선입니다. 누구와 닮으면 구원이 될 것 같은 희망을 갖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구원이 될까?” 아니라 “왜 인간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고자 일어난 일입니다. 구원이 모델을 눈에 뜨이는 모습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까이 오고 있음’이라는 시간 의식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가깝다’ 는 말은 목적지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하여 움직이는 쪽은 우리 쪽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시간 표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요 다른 하나는 ‘아직’입니다. 이 두 가지 표현 방식 자체가 나란히 서로 역인 채 같이 이동한다는 생각을 해봅시다.

마치 타이타닉 갑판 뱃머리에서 두 남녀가 한 사람은 팔 버리고 있고 하나는 그것을 바쳐 주는 자세를 취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둘은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바깥 풍경은 노을을 지고 있고 어딘가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Celine Dion의 "My heart will go on"(내 마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가냘픈 리코드(피리소리)와 더불어 전달됩니다. 

하지만 그 배는 얼마 안가서 빙산에 부딪쳐 침몰합니다. 인간들의 애정과 같이 차가운 북극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이 세상의 무상함입니다. 즉 구원의 때란, 인간이 현재 자신의 시간관으로 따라잡거나 파악할 수 없는 때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곧 제한된 환경을 지닌 타이타닉호이고 인간은 세상이란 알 수도 없는 암초에 부딪쳐 좌초합니다.

좌초되지 직전의 이 남녀 사이의 심정은 ‘그저 이대로 영원토록!’입니다. 노래 가사에는 ‘한결 같이’, ‘스러지지 않아요’ ‘변치 않는’ ‘함께 할 겁니다’, ‘변함없을 겁니다’ 라는 등등의 가사가 빈번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했을 때 나올 시간관입니다. 이런 육신은 무상함의 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예레미야 33:8에 보면,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33:15-16에 보면,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의 나라 라고 이미 규정했고, 참된 천국은 의의 나라라고 이미 규정해놓았습니다.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은 이런 식의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안 망하고 잘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나라에 그 나라 안에 소복히 담긴 것은 자신들의 노고와 애씀과 의로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안에 의의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내십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만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실패가 일어나는 자리이어야 구원도 함께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예수님과 대립되는 자리를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시간관에서 우리 몸에서 유발된 시간관을 날마다 삭제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고정점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타이타닉의 배에서 두 주인공이 주인공이 되면 아니되고 침몰하는 배가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그 배는 침몰을 통해서 진정한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참된 구원의 노선과 시간이 나옵니다. 영광의 날은 오로지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보입니다. 그 자리는 나 위주가 실패가 되는 자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에 합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자꾸 성경은 구원을 이야기해요. 구원이라는 것은 빠져나와라, 빨리 탈출해라, 이런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24시간 평소에 신경 쓰고 관심 두는 것, 우리가 이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일하고 돈 벌고 애쓰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쨌든 이 세상에 발붙이려고 그렇게 애를 쓰잖아요. 발붙이려고 애를 쓰는 우리보고 여기서 나오라고 한다면 그 동안 발붙이려고 애썼던 그 모든 노력과 수고와 그 시도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발각당하고 마는 겁니다.


차라리 성경에서 나오라든지 구원받으라든지 이런 이야기하지 말고 “바르게 산만큼 당신은 복 받을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뭔가 형편이 어렵다든지 일이 꼬인다든지 할 때는 ‘내가 바르게 살지 않았기에 이 땅에서 고생하는구나. 고생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지. 성경 어느 대목을 볼까? 아. 여기 이 대목 지키면 복 받는구나.’ 이렇게 되면 우리가 편하게, 정말 편하게 성경을 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자꾸 빠져나오라고 하니까, 우리는 여기 더 있고 싶은데, 자식들 결혼도 안 시켰는데, 자꾸 여기서 빠져나오라고 하니까 이것은 일상 우리가 살아가는 그 시도하고 배치가 되고 정반대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만 이야기하는 그런 설교가 듣기가 싫지요. 사람을 좋게 하는 설교를 원하지 성경대로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뚝 떨어집니다. 성경대로 했을 때, 빠져나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누가 빠져나오라고 하는가, 여기서 빠져나오라고 이야기하시는 분, 그렇게 빠져나와야 된다고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다시피 이 땅에 서른 세 살만 살았어요. 서른세 살밖에 못 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만, 김광석이라는 가수도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33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아니고 왜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가를 충분하게 보여주면서 33세까지 사시고 빠져나온 겁니다. 부처는 그것보다 오래 살았어요. 공자도 더 오래 살았고.


그래서 예수님의 33세의 그 생애는 쓸데없는 시간이 1초도 없었어요. 그 생애 자체가, “그러니까 이 땅에 집착하면서 이 땅이 좋아라, 하고 살지 말라고 했잖아.”호소 하시면서 33세까지 살다가 떠나버린 생애입니다. 60도 아니고 70도 아니고 아주 짧은 인생이에요. 33살까지 살다가 떠나셨는데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떠나서 어디로 갔는데?’ 이 어디로 갔느냐가 문제가 되거든요. 어디로 갔느냐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받아야지.’ 하고 달라요. 예수님이 서른세 살까지 사시고 가신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서른세 살까지 그분이 가신 그곳이 바로 천국이 돼요.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면 결국 천국도 못 간다는 것이 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염원했던 그 나라에 가신 것이 아니고 독단적인, 예수님 혼자만이 아는 그 세계에 갔잖아요. 그 세계에 갔다기보다는 그 세계, 천국을 만들었지요. 아들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 말이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데 살고 싶다는 그 염원이 뭉쳐진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나라가 따로 있어요. 그 나라에 가셨다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극락에 가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나라에 간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보통 문제 아니에요.


죽어서 가면 맨션아파트가 기다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장례식 때 전부다 구라치고 있었던 거예요. 죽는다고 그 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예수님 모르면 죽어도 그 나라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알면 되잖아, 하는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합니다, 지금. 천국은 예수님 가신 나라가 천국이고 이 땅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이 땅에서 예수님이 사신 33년의 행적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 나라 갈 수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의미를 알면 되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천국은 예수님 혼자 갔어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가 아니라 “왜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구원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왜 나는 구원이 안 되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교회 많이 세워놓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종교적인 열망에다 그냥 이름만 예수라고 붙여 놓은 거예요.


예수님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은 따라 올 수가 없는 길이라,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만 통과하는 길이지 어느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원래 천국과 지상이 통하는 구멍이 없어요. 구멍이 없는데 주님이 다가설 때 그것이 구멍이 되는 겁니다. 뻥, 하고 다가설 때 그것이 입구가 되고 빠져나가 버리며 다시 닫혀 버렸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 헬라의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유대인의 기적으로도, 신의 기적,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도 그것은 모르고.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모르고, 헬라인도 모르고 유대인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고. 다시 닫혀 버렸으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구원이란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지요. <로마>라는 어떤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지하철 공사를 한다고 인부들이 땅굴을 파는 중에 옛 로마 유적인 프레스코 그림이 있는 동굴을 발견해서 당국에 신고를 했어요. 유럽에서 있었던 일인데, 신고를 받고 유적발굴전문가들하고 다 갔는데 그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너무 오해되다 보니 다 무너졌어요. 남아 있는 것은 인부들과 전문가들, 그 시대에 같이 살고 있는 인간들만 보이고 인부들이 봤다는 그 프레스코화는 없어져 버렸어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 봤다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교회 가니까 천국은 보이지 않고 인간들만 있는 거예요. 아주 성스러운 기분이 정상에 서려 있는 그 거룩한 산, 성산, 밑에서 보면 정말 신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 성산이지만 막상 등산해서 올라가 보면 올라가면서 밟히는 것은 보통 평범한 돌덩이 흙덩이밖에 없어요. 끝까지 올라가 봅니다. 끝까지 올라가 봐야 산 밑에서 그렇게 고상하고 거룩해 보이던 그 산이지만 막상 올라가 보니까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 찾아 교회 왔는데 교회 막상 다녀보니까 뭐,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일종의 사기가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믿음 자체가. 풍문이라 하지요, 풍문. 누가 그러타 카더라(그렇다고 하더라). 어떤 사람이 이런 실험을 했어요. 화장지가 가게에 많은데 사람들이 풍문, 거짓말을 유포한 거예요. 화장지가 곧 떨어진대, 라고 소문을 내니까 사람들은 화장지가 다 떨어져서 무지 비싸진다는 그 소문을 듣고는 전부 다 화장지를 사서 집에 쌓아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화장지가 떨어졌어요. 가게마다 화장지가 없습니다. 너무 빨리 다 소진되어서.


최초의 그 찌라시, 최초의 거짓말을 유포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믿음을 조장해서 다른 사람은 그 믿음이 진짜인지 알고 믿어버리니까 전부 다 거짓된 믿음에 빠진 거예요. 이게 교회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그 믿음의 내용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 만난 사람이 없어요. 그러타 카더라, 하는 그 소리에 교회가 여기 저기 막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에 스스로 속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돼요. 괜히 아무렇지도 않는데, 아무렇지도 않는 그냥 일상인데, 보통일상인데 ‘언젠가는 죽으면 천국 가겠지.’ “누가 그러던데, 누가?” “교회 목사가 그카더라.” “당신이 그런 소리 했어?” “나도 누가 그카더라.” “누구야? 찌라시 같은 그 잘못된 소문을 처음에 퍼뜨린 그 인간이 누군데?”


문제는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유통하는 과정에서 돈이 생긴다는 거예요. 아, 이거 교회가 재미있지요? 십일조라는 율법이 생겨버리고 그래서 돈이 생긴다는 거예요. 지금도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보면 다시 메시아가 오게 되어있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다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회복된다는 겁니다. 그리니까 원자폭탄 준비해서 빨리 예루살렘 회복해서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영접할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주요 장소는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쫒아내 버리고……, 6일전쟁 같은 것이 다 그런 이유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사는 일상적인 생활을 보면 그냥 우리 보통사람하고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요. 안 오면, 메시아가 안 오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해야 되기에 제사를 드려야 되고,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 드릴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사람을 고용하려면 월급을 줘야 하고, 월급을 주려 하니 돈을 내야하고, 결국 남는 것은 돈이라는 것이 모아지고 발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유대교가 아무 근거 없이 유대교회라는 그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면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것처럼 오늘날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을 거치고 거기에 많은 돈이 유입되어서 예배당을 짓고 성당 짓는 그것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왜 너희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왜 너희는 구원 받을 수 없는가?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해답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시간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들은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 하면, 유사성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유사성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가 따라잡을 수 있는 모델을 찾아서 그 모델을 모방하고 흉내 내면서 그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유명한 사람들이 있어요. 주 기철, 손 양원, 그리고 한 경직, 그리고 천주교 까지 합치면 테레사 수녀, <울지 마 톤즈>에 나오는 신부, 유명한 믿음 좋다는 사람을 일단 찾아요. 그 사람을 가까이 접근함으로서 주기철도 구원받고 손양원도 구원받고 한 경직 목사도 구원받았다면 유사한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따라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모델을 찾아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모델은 뭐냐, 청교도입니다, 청교도. 청교도라 하는 것이 뭐냐, 이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착하게 살아서 성화해서 구원받는다는 그 이론이 개혁주의 신앙, 청교도입니다.


청교도라 하니까 옛날 기사, 칼싸움 하는 그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교회는 다 알고 있는데 우리교회는 이런 걸 몰라요. 예수 믿고 성경에 나온 그대로, 문자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의 무리를 청교도라 합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그 청교도에 미치지 못하는 내가 그것을 모델로 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과의 유사성, 가까이 감으로서 모델로 삼아서 구원받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어떤 특정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구원받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아무도 나를 따라 올수가 없다는 것을 제시한 거예요. 아무도 너희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존재다, 처음부터 그랬었다는 것을 확정짓는 겁니다.


무슨 모델을 찾아요? 구원의 모델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구원의 모델은 없습니다. 나 누구처럼 될래, 하거든요? 참 과학이라는 것은 고맙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는데, 유명한 성자들이나 성인들 아팠을 때……, 유명한 목사들도 나이 70 넘어서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온 누리 교회 목사도 아팠고 사랑의 교회 목사 그 사람도 아파서 죽었고, 나이 80도 안되어서 다 돌아가셨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야, 참 성자다. 제자훈련을 해서 이렇게 한국교회를 살린 그 분 참 아깝다.” 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셨습니까? 그 분 살리려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술과 학식을 가진 의사들이 달려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의사가 보기에 그 목사는 뭡니까? 60개 혹은 70조개의 세포의 집합체, 그냥 동물세포에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소위 아우라를 다 제거해버리고 네가 믿음 좋은지 안 좋은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지금 호르몬의 이상이 어떻고 세포조직이 어떻고, 그냥 하나의 육질이에요, 육질, 물질이고 고깃덩어리라니까요. 과학은 모든 것을 물질로 만들어버렸어요.


물질이 무슨 신앙의 모델입니까? 어떤 사람이 신앙 좋다는 것은 환경이 받쳐줘서 그렇지 너나 나나 똑같은 육신덩어리고 물질덩어리고 뼈와 골격으로 되어 있는데 그게 무슨 믿음이 좋은 거예요, 그게? 믿을만한 어떤 모델이 될 수가 없어요. 모델은 뭐냐? 오늘 본문에서는 가깝게 되었다, 시기라 하는 것은 지금 적당한 때, 기회라는 뜻이에요. 적당한 기회가 왔다, 이것은 가깝다, 구원이 처음부터 믿을 때 가깝다, 시간이 모델이에요. 어떤 특정인물이 모델이 아니고 시간자체가 모델이라니까요?


지금부터 여러분이 들어야 할 것은……,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아마 제가 한 설교 중에서 제일 어려운 설교가 아닐까 하는데 이해되고 안 되고 간에 듣기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먼저 언급해 드린 것은 이거예요. 어떤 특정 사람을 본받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델은 없고 뭐가 모델이냐, 시간이 점점 가깝다는 게 모델이라는 겁니다. 뭔가 가깝다는 것은 목적지는 고정되어있고 우리 쪽에서 가까이 접근해 나간다는 뜻이거든요. 목적지가 이미 고정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우리는 내 자신이 나의 목적지가 되기에 내가 목적을 정하고 내가 시간을 늘이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가깝다고 한 거예요. 가깝다. 이미 하나님이 정해준 구원의 날이 가까운 거예요. 이미 말뚝 박아 놓았어요. 이미 정해진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는 자기 맘대로 살아도 그 목적지, 그 때는 변하지 않아요. 따라서 진짜 우리가 진짜 신앙생활 하려면, ‘아, 그 때가 진정 가깝구나.’ 가깝다는 것을 느끼는 이것이 진정 신앙의 모델이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이 주 기철인지 농사꾼인지, 목사 아니라도 괜찮고 집사 아니라도 괜찮아요. 가깝다, 분명히 늘 가까워, 때가 점점 가까워졌어, 정말 어린애라도 관계없어요. 신앙생활 몇 년 했는지도 관계가 없어요. 이게 모델이에요. 본인이 느끼는 거예요. 가깝다, 그 작살날 날이 가까이 온다, 그렇게 하시면서 평소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네 맘대로 하세요. 네 맘대로 무슨 짓을 하시되 가깝다, 그 날은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가 변개시키지 못한다, 그걸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따라서 네 몸에서 나는 시간관, 그것은 잊어라. 네 몸에서 해 봐야 네가 주인공밖에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네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고 나 예수가 주인공이다. 그날이 올 거야. 내가 주인공이니까 시간은 내가 정했고 내가 정한 것에 대해서는 너희들의 시간관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는 거예요. 너희들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시간관 가지고서는 그 때가 되어도 우리에게는 그냥 일상적인 일 뿐이지 정말 우리는 신앙의 모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중심을 내 쪽에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때를 정해놓았다는 그 쪽에 중심을 두신다면 나는 거기에 끌려가는 형국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31절에 “시몬아, 시몬아.”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를 이야기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말씀하기 이전에 설교 처음에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오늘 설교가 어렵기 때문에 자꾸 반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받아라, 가 아니라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야, 사탄이 너를 지금 노리고 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한 거예요. 주께서, 그러니까 못 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못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 한 경직 목사가 구원의 모델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방금 이야기하기를 이미 때는 정해져있고 우리가 끌려간다. 따라서 가깝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가깝다는 것을 느끼면 구원 받겠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31절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시몬아, 시몬아.” 시몬은 베드로의 이름인데요, 거기에 괄호열고 여러분의 이름을 집어넣으세요. 아무개야, 아무개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했다는 말을 예수님만이 아시니까 우리가 아는 척하지 말고 예수님만 아시니까 예수님이 아시는 것을 집어넣으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진 적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못 받는 것이 우리 잘못 아니에요. 여러분, 이런 말 처음 들어 보지요. 우리가 구원 못 받는 것이 우리 잘못 아니니까 우리가 잘못을 회개해서 바르게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못 받는 것이 우리 잘못 아니거든요. 권사님이 여자로 태어났는데 여자로 태어난 것이 권사님 잘못입니까?


여자로 태어난 게 여자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남자 본인의 잘못이 아니듯이 생산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본인을 위해서 있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니거든요. 구원 못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놓았으면 그걸 그냥 수긍하고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구원 못 받는데 기어이 구원 받겠다는 이 고집은 뭐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거기에 주연 남녀가 뱃머리에 올라가서 위험한 장난을 치는 거예요. 여자는 팔 벌리고 꼭 떨어질 것 같이 위험하게 있고 남자 배우는 뒤에서 안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저녁노을이에요. 어디서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노래가 나오는데 “마이 하트 윌 고 언” 내 마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이런 가사거든요.


노을 확 지면서 피리소리가 깔리는데 그 가사를 죽 보게 되면 한결같이, 변함없이, 이런 내용으로 가사를 도배를 해 놓았어요. 샐린디옹이 불렀죠. 한결같이, 변치 않고, 함께 할 겁니다, 우리 둘 사이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변하지 않기는 뭘 변하지 않아요. 타이타닉 빙산에 받혀서 빠져죽었는데. 이게 무상함이에요. 타이타닉같이 이 세상은 빙산에 부딪혀서 깨어져서 침몰하도록 이미 정해진 거예요. 정해졌는데 그 두 남녀는 그것도 모르고 빠빠빠~, 우리 사랑 영원할 겁니다, 떨어지지 않아요, 죽 함께 할 겁니다, 늘 내 맘은 당신 곁에,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나와 너, 너와 나, 둘은 시간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자기를 닮은 자와 유사성을 통해서 어떤 인생의 행복의 모델을 찾은 겁니다. 우리도 남들처럼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아보자. 남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그들과 유사하게, 그들을 모방해서, 그들을 흉내 내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아보세, 했는데 배가 침몰해 버렸지요. 그 침몰의 때가 가까웠는데 그 가까움을 놓친 거예요. 그 놓친 이유가 뭐냐? 바로 유사성, 자기를 쳐다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탄이라는 말을 분명히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주님하고 가까운 것이 아니고 마귀하고 가까운 것이거든요. 주님은 멀리 있고 마귀는 가까워요. 마귀가 직접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을 모르고 주님께서 그것을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리지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예수님만 상대했는데 예수님은 자기하고 비슷하게 유사성만 있거든요. 자기도 인간이고 예수님도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니까 직접 주님을 상대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사탄을 거쳐서 주님을 상대해야 될 존재인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것을 잊어버린 거예요.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사탄은 우리를 구원해주지를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고 우리를 지옥에 빠트리는 사탄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일부러 깔아놓은 거예요.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겁니다. 아무도 자기공로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 지켜서, 십일조 내서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교회 다녀서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천국에 어느 한 것도 들어가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가 살면 살수록 모든 것은 천국에서는 다 없어져야 되고 버려야 될 것들이에요. 사람이 이사 안가고 오래 있으면 짐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자꾸 쌓여요. 그거 다 버려야 될 것들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데도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나를 모른다, 나를 부정한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베드로가 우리의 모델입니다.


신데렐라라는 동화에 보면 아주 천한 여자인 신데렐라가 계모하고 의붓 언니들한테 구박을 많이 받았답니다. 고무줄놀이 할 때 많이 해 봤지요? 구박을 받았더래요, 이런 노래. 그렇게 구박을 많이 받았는데 우연히 파티에 참석을 했다가 왕자, 이상적인 남자를 만나요. 조건 다 되는 남자를 만난 거지요. 그런데 어느 날 놀다보니 12시가 다 되어갑니다. 후다닥 12시 되기 전에 가려다가 신발 하나 빠트리고 마차타고 집에 왔거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오늘날 교인들이 살아가는 것이 그거예요.


십자가, 천국 다 좋은데 예배만 마치면 무슨 마법에 걸려서 다시 집으로 가야 돼요. 빨리 장사하러 가야 되고. 주님은 우리를 그 마법에서 구원하려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데, 내 모든 힘은 거기에 다 모아놓았어요. 이번에 대전공부를 하는데, 지금도 다 듣고 계실 텐데 김 종인 권사님 내외가 시큰둥하게 오셨다가 강의 내내 그랬어요.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니까 복음하고는 상관은 없는데 두 분 다 그러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법에 걸려 버렸어요. 내 것이 있고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되고. 내 고장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은 향토예비군정신 아닙니까? 향토 예비군 정신이라.


내 것은 내가 지켜야 하고 남에게 손해 보면 안 되고 ……, 마법이 안 풀린 것 같아요. 분명히 내가 마법의 복음을 이야기했는데. 권사님이 나중에 그래요. “아이고, 복음 들어보니 내가 복음 안다고 해놓고 여전히 내가 죄인이군요.”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항상 12시만 되면 다시 집으로 가야 돼요. 우리 교인들은 다 집이 멀어요. 집을 비워놓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마법에서 어떻게 우리를 건질 것인가? 여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자다가’의 반대말이 ‘깨다’ 지요.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그 다음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밤과 낮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어두움과 빛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단정함과 방탕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그 다음에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와 육신의 일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타이타닉호 침몰처럼 우리의 먹고 마시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만드는 그 때, 그 때는 고정적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에서 나온 그 고정적인 것, 그 때가 가깝다는 것이 모델이 되면서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반대라는 것이 발생이 돼요. 반대가 발생이 됩니다.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은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볼 때 대립되는 두 반대의 요소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게 빛일까, 저게 어두울까?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하면 저게 빛일까, 어두울까? 저게 복음과 가까운 행동인가, 아니면 복음과 멀어지는 행동인가? 저게 육신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성령에 속한 것인가? 항상 이 반대를 동시에 다 드러내는 그러한 현상들이 자꾸 일어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이야기 다시 해 보겠습니다. 베드로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사탄이 너와 함께 있다 했을 때 그 때까지 베드로는 사탄의 장악 속에 있어요. 나중에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베드로는 그 때부터는 사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어요. 성령 안에 있으면서 이제는 뭐가 사탄의 일인가가 다 보이는 겁니다. 그동안 객기를 부린 거예요. 내가 주를 위해서 뭘 하겠다는 이 자체가 나한테는 있을 수 없는 것, 내가 주를 위해서 산다는 이 자체가 나한테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베드로야, 너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 구약을 잠시 보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33장 8절에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되어 있고 예레미야 33장 16절에 보게 되면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뜻으로 이 본문을 채택했느냐 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의를 대립시킨 거예요.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어요. 율법이 오게 되면 지키기에 급급했지 자기가 죄에 속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쁜 짓 하면 죄가 되고 착한 짓을 하면 죄가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분명히 모세가 이야기했어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라고 분명히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언급을 했지만 그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몰랐어요. 그러나 이스라엘나라가 몽땅 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느낌을 아니까, 착해 봐야 원래부터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을 못 받게 되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우리가 죄, 마귀에 소속되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죄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몰라요. 그 의는 외부에서 다가올 때 아는 겁니다. 그 의가 뭐냐,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예수님의 희생제물이 되어서 의를 만들어내서 우리에게 공짜로 선물로 줄 때 비로소 외부에서 주입된 그 의만 의가 되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한다고 의가 아니고 십자가 믿음으로 오는 의가 의예요. 이것은 인간이 착하고 안착하고, 나쁜 짓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마귀한테 묶이고 죄한테 묶인 상태에서는 거기서 착해서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니까. 나로부터 출발한 죄, 나로부터 출발한 의는 그것은 죄도 의도 아니고 그 전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반대가 되었어요. 인간은 하나님과 반대가 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렇게 끌어당기고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하고 자기의 유사성을 얻으려고 해서 예수님처럼 되면 구원 될 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어떤 인간도 구원받지 못해요.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이 반대가 아니라 인간이 속한 환경자체가 주님이 속한 환경자체와 반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극락은 천국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옥이에요. 마귀가 조작해내서 만들어낸 거예요. 진짜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그 때가 구원의 완성이고 그게 바로 천국이고 소복하게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면류관을 다 반납해야 될 반납의 장소가 어린양의 보좌 앞에 있는 겁니다.


종교, 교회, 그것은 유사천국을 유발하고 조장해 내는 거예요. 아까 화장지 이야기 했지요. 그냥 풍문이지요, 풍문. “풍문으로 들었소.” 전부 다 풍문이라니까요. 하나의 소문이에요, 소문.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참된 믿음은 나한테 어떤 믿음이 있을 필요도 없고 주님의 믿음 자체가 그대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질 때 내가 만든 믿음과 주님이 만든 믿음이 서로 반대가 된다는 새로운 반대가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한 짓은 모두 다 구원받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하는 일에 훼방질을 할 뿐이고 진짜 구원은 그 십자가의 용서……, 예레미야의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이런 죄를 지었지만 내가 피로써 용서할게.” 이사야에 나오는 그 어린양의 피, “그 피로서 용서할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것이 너한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나한테 일어난 일이 너에게 그대로 의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어버려요. 그 옷을 입어버리면 그 옷의 향기가 온 몸에 퍼지면 우리는 비로소 최종목적지가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변하고 변하는 것들, 타이타닉 선상위에서 일어나는 파티와 파티의 부질없는 연속, 뱃머리에서 팔 벌리고 장난을 쳐도 그 때뿐이고 그 웃음기가 확 달아나는 차가운 북극의 얼음바다에 빠져버리면 다 죽어버리지요.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죽어야 될 존재로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한테 축복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항상 실패로 끝날 때 그 실패가 주님 주신 선물인데 내가 실패할 때 비로소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행동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실패의 자리를 일부러 구멍을 만들어내시는 그 손길에 의해서, 그 안에서 구원이 내가 그동안 관심 없이 있었던 그 십자가 피라는 것이, 주님의 용서라는 게 내 의 말고 하나님의 의가 이미 고정적으로 우리한테 주어졌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는 이미 다 완료가 되었어요. 마귀는 그 십자가를 아주 대수롭지 않게, 우습게 만드는 작업에 계속 종사할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설쳐댈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난 1월 18일 날 우리 딸이 결혼했잖아요. 결혼식이 이미 1월 18일에 정해져 있어요. 그것은 사돈하고 우리끼리 다 합의해서 정해져 있는 겁니다. 삼일교회라고 있어요. 그 교회가 보통교회가 아니거든요. 그 교회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못하는 거예요. 하여튼 18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작년 12월에 정했어요. 한 달 남짓 전에 정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요. 본인들이 안정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아, 그 전에 파토나면 안되는데, 파토나면 안되는데.’ 자꾸 그러면서 가까워오는 거예요. 왜, 주님 하는 일이 내 일이기 때문에. 사돈과 우리 사이에 정한 것처럼 주님이 정해놓은 그 마지막 때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내가 정한 그 일이 이젠 네가 정한 일이다.” 하는 거예요. 이제는 내 시간이 네 시간되었다는 거예요. 네 시간을 버리고 네가 알고 있던 세상적인 모방, 유사성 버리고 주님의 시간 속에 네가 합류해 버리면 주님의 시간이 주님의 시간만이 아니고 너와 나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1월 18일이 다가오는데, 신랑은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 내외는 초조한 거예요. 사돈은 열심히 기도해서 그날 날씨 좋게 해달라고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어요. 자기 딸 결혼식이 아니니까. 주님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가 되어서 주님이 어서 오소서, 주님만 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아! 어서 오세요, 하고 같이 주님과 동감해서 같이 그 때를 기다릴 때 그거 축복입니다. 그거 기적이에요.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자기 잘난 체 하는 자기 시간 따로 있는데 그걸 제키고 주님이 정해놓은 그 시간이 점점 가까이 온다는 것이 기쁠 때 방탕, 술 먹어도 방탕이 아니고 나이트클럽에 가도 그것은 타락이 아니에요.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생각이 주님의 시간에 꽂혀 있는 이상은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해도……, 마지막이 또 이상하게 끝나네요. 옷 벗은 여자를 봐도 그것이 음란이 아니라니까요. 왜, 정신이 저쪽에 팔려 있으니까. 저 여자와 한번 살아보고 싶다, 이것은 이쪽이에요. 살아보니 뭐하겠나, 하면서 항상 저쪽에 생각이 꽂혀 있는 이상은 세상 어떤 일어나는 일에 자기 힘 좀 빼시고 내 것 없다고 여기시고 다 잃어도 주님의 시간이 곧 지금은 주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인 것을, 그 가까움이 바로 모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행동 조심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주님의 의에 묶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그 말씀에 우리가 묶여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