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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3-16 13:28 |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보통 구원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상대해서 천국 간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개인이 어디를 간다고요? 천국, 나라에 가지요. 개인은 개인인데 나라는 집단이거든요. 개인에서 집단에 가려면 그 개인의 개인임을 주장하는 모든 조건을 파괴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개인만을 위해요. 나 좋은 쪽으로만 모든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에, 자기 좋은 쪽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해석하기 때문에 집단에 어울리지를 않아요. 천국 가서 자기 부동산 주장하면 곤란한 겁니다. 이 땅에서는 부동산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내 개인을 위해서 허용된 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제가 늘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요. 산자나 죽은 자나 다 무덤에 가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믿었다고 여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도 없고 전도 되나 안 되나 결국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호출되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라고 우리가 전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마지막 상황, 누구든지 예수 앞에 섭니다, 하는 상황을 미리 당겨서 전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자와 예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자가 구분된다면 그 마지막 때의 심판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입에 담아서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눈에 띠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앞서서 알고 있는 정보를 그들에게 소개하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살든 간에 그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결국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다루어질 그 때가 온다고 이야기를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자존심이 강한 환자가 있는데 딴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고 딴에는 으스대는 사람인데 위암에 걸려서 병원에 갔어요. 의사가 “잠시 진단을 해야 되니 옷고름을 푸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뭔데?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지시나 명령을 들은 적이 없어. 나는 나 나름대로 살아온 사람인데 네가 뭔데? 요새는 젊은 것들이 예의도 없어. 젊은 것들이 나이 많은 사람보고 옷고름을 풀라고 하다니. 네가 뭐야?”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의사선생님이 어떻게 하겠어요? “마취주사 놔.” 주사 놓기 전까지는 버둥거리면서 “네가 뭔데 나한테 날카로운 주사기를 꼽아?” 이렇게 하다가도 마취주사 맞고 난 뒤에는 축 늘어져 버리지요. 그러면 강제로 수술하지요. 그 권세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의사가 그 회장님한테 어떤 감정이 있는 겁니까?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보편성이라는 거예요. 의료술의 보편성이에요. 의사가 진단하고 진찰하는 모든 의학 앞에서는 재물이 있든 아니면 밑바닥에서 노는 노숙자든 개별자들이 갖고 있는 개별의 권한과 의미를 중지시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적용시키지요. 동일한 기준, 표준화라고 하는데 동일한 표준화, 질서에 의해서 실시해버립니다. 분명히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몰라요. 그 이야기 맞습니다. 눈만 뜨면 밤에 잠을 잘 때도 내가 그 꿈의 주인공이에요. 드라마의 주인공이 납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몸이 아플 때는 이 잘난 주인공도 의사 앞에 옷고름을 풀어야 되고 마취제를 맞아야 되고 이 귀한 장기를 적출해서 끄집어냄을 당해야 되는 그런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니들이 뭔데 내 몸에 손을 대?”라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권세라고 이야기하고, 개별을 인정하지 않는 보편적인 질서라고 하고 그 질서는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주위의 가까운 병원이나 학교나 특히 젊은 애들에게 짜증나는 군대……, “네가 뭔데 내 스케줄을 조종하는 거야? 난 아침 열시까지 자다가 온 사람이야. 네가 왜 ‘빠바바밤~’ 네가 뭔데 새벽 여섯시에 깨우는데? 기상나팔을 왜 부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지난 20년 동안 안 살았어.” 해봐야 버티지를 못하지요. 장래 모든 인간이 죽고 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침 아홉시까지 자야 되고, 하는 그것이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재벌이기 때문에 누구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 맘대로 움직일 거야, 하는 것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동화사주지기에 내 스케줄 내가 조종하고 도 닦는 것도 내가 한다, 는 그것도 주지스님 돌아가면, 제가 중한테는 ‘님’자 안 붙이는데 붙입니다, 주지스님 돌아가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보편적인 거예요. “개별적인 것은 네가 살아 있다고 여길 때만 즐겨라. 그 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나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보편의 고마움, 그 영원한 질서의 고마움, 우리는 그게 성경을 통해서 미리 당겨서 덮쳐진 거예요. 덮쳐진 겁니다.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혼자서 울고불고.” 시스타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혼자서 영화보고 혼자서 책을 보고”,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저 내가 주인공이고 나뿐이에요. 어떤 권세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다가 남자들은 군대 가서 또 다른 현실을 맛보고 여자들은 시집가서 시댁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게 뭐야? 나는 이 남자와 결혼 한 거지 시집과 결혼한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렇게 버티다가 자식새끼 하나 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시집에 시집살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 뒷바라지 한다고 평생을 허비하고 소비하는 것, 내 잘나갔던 그 똑똑한 두뇌도 자식 아침 도시락 챙겨주는데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인터넷 열어놓고 레시피를 찾아야 되는 평범한 주부로 전락해버리죠. 나이 20대의 그 화려한 그 모든 패션도 결혼하면 남편 학교 때 입던 츄리닝 입고 장이나 보러 가지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우리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개인으로 출발하는 현실과 보편적인 현실을 천국가기 전에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했는데 왜 하나님나라 이야기하면서 국가 이야기를 중간에 끼워 넣는지 그 순서를, 그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 있는데 나 개인, 개별자가 여기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오해에요. 그렇게 되면 신약성경만 있으면 되고 구약성경은 가위로 잘라내도 괜찮은 것이 되거든요. 그런데 정말 구원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구약이고 거기에 대표적인 사건이 나오는데 그게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나라입니다. 지금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있었다. 어떤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어떤 민족이 있었다. 보세요. 어떤 나라도 집단이고 어떤 민족도 집단이지요. 개인은 날라 가고 눈에 띄지도 않아요. 거기에 어떤 나라가 구성되어서 나오는데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벌써 개인은 없지요. 그 나라에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동행하셨다. 보세요. 하나님은 나라와 동행하지 개인과 동행하지 않지요? 구약을 경유해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구약 끝나고 세례요한이 외치기를 광야에서 엘리야 폼 잡고 가죽옷 입고 “우리는 진정 출애굽 한 적이 없었다. 광야에서 다시 대기! 여기 요단강 있어. 우리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갔던 것을 이 시대에서 다시 되풀이하자.” 하고 요단강에서 회개하는 사람들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지요.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네가 이발사인지 제빵사인지 교사인지 배관공인지 농부인지 성직자인지 이 모든 개별적인 직업은 다 일소에 붙이고 그저 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바다에서 다시 기어 나온 사람들, 개별적인 속성이 죽어 있고 보편적인 질서만 장악된 그 사람들. 보편적인 질서만으로 소속돼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너 개인적인 선행이나 악행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대신할 대표자를 보고 그 효과로서, 그 대표자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체결의 효과 속에서, 그 힘 속에서, 권세 속에서, 능력 속에서 너를 천국으로 넣겠다는 진짜 하나님이 진짜 약속된 계획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집사님, 헌금 얼마 했어요?” “이 만원 했는데 다음에는 좀 더할까?” “집사님은 기도한 번 했다 하면 한 시간 반씩 하는데 나는 오 분 하면 지치던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어요?” “집사님은 소프라노 하는데 음정 하나 안 틀리네. 나는 음정도 못 맞추겠어.”이런 것. “집사님은 전도를 다섯 명 했는데 나는 벌써 십년 째 전도 한 명도 못합니다. 그동안 한 한 명도 삐져서 교회 나오지도 않고.” 이런 모든 개별적인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경쟁을 유발하는데, 그것이 마치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목사들이 유도를 해요. 그래야 헌금이 나오고 그 다음에 전도를 하고 그 다음에 봉사를 할 테니까. 그런데 실제 성경속의 세계는 개별의 자질이나 능력 같은 것을 경쟁하거나 견주지를 않습니다. 비교하지 않습니다. 너도 말고 나도 말고, 다른 대표자를 경유하라 그 말입니다. 지금 수십 년간 복음 듣고 수십 년간 교회 다녀도 이렇게 정립해야 돼요. 이렇게 정립해야 되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별적으로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국가에 사실은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에 복종하기 이전에 그 국가라는 보편성에 대드는 어떤 악한 힘이 있어요. 그걸 욕망, 인간의 욕망이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머리, 이성적으로 따진다고 자제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에덴동산을 기억해요. 에덴동산의 쾌락이 어떤지는 설명이 안 되지만 ‘이것은 아니야, 이것은 아니야.’라는 식으로 기억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이가 아프잖아요. 이가 아프면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야.’ 또는 허리나 어깨가 아프면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야.’ 그리고 뭔가 남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이것은 내가 원했던 다정스런 사랑의 음성이 아니야.’ 뭔가 우리 몸은 이 고통이라는 곳에 있으면 고통을 빨리 해소하고 고통에서 빨리 저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는 고통이 없는 쾌락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발산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쾌락을 향하여 욕망이 작용해서 내 몸은 거기에 뒤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욕망을 달성해야 되는데 이 세상은 에덴에서 추방된 세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추구하게 돼요.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 자꾸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행여나 나의 행복의 마지막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내가 해볼까? 그것도 영 만족이 안 되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욕망에 의해서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이 딱 일치되는 것을 찾고자 하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유학을 간답니다. 그러면 유학 간다고 인천공항에 나가야 될 때 그 때 자기 모습을 스스로 상상해요. 내가 저 남자를 평소에 사랑하기 때문에 인천공항에서 드디어 출입구로 나갈 때 내 눈에서 줄줄 눈물이 쏟아질 것이고……, 이모티콘에 보면 눈물표시 하듯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난 뒤에 갑자기 냉정해지는 그 나는 뭐냐 이거예요. 어, ‘가려면 가라.’ 나는 분명히 저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슬퍼야 그것이 나답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항에서 그 남자가 떠날 때 전혀 슬프지가 않아요. 왜 내가 생각한 나와 실제 삶속의 나와 일치가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반대 일을 생각하겠습니다. 만날 붙어 있으면 싸우고 “너 없었으면 좋겠다.” 하다가도 막상 그 사람이 없을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헤어진 그 순간에 평소에 사랑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란 헤어지는 그 순간에 비로소 확인이 되는 겁니다. 헤어질 때. 그렇게 되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안 헤어진 상태에서는 사랑이 없어요. 헤어질 그 때부터 사랑은 이제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겁니까? 사랑하다고 해서 붙어사니 사랑을 모르고 헤어지니까 사랑을 느끼고. 잠시 헤어져 있어보니 그리워서 다시 만났는데 다시 또 싸우고 헤어지면 또 사랑을 느끼고, 도대체 진짜 내가 원하는 나는 현재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없고 현재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게 되어버려요. 생각과 내 모습이 일치되지 않는 그 모습. 그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욕망이 자꾸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자꾸 찾아나가는 작업에 내가 말려들어서 그런 거예요. 자,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을 봅시다. 나는 주님을 믿는다. 전도도 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 하나님을 믿을 거냐, 아니면 내 생존을 먼저 챙길 거냐 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내 생존 쪽으로 축이 기울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뭡니까? 이게 믿는 거였어요? 이게 진정 믿는 거였습니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입에 발려서 수천 번 이야기했는데 막상 인천공항에 출국하고 난 뒤에는 전혀 울지를 않아요. ‘쳇, 갈 테면 가라. 나는 너한테 매인 몸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매여 살 시시껄렁한 존재가 아니야.’라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막상 예수님보다 더 좋은 게 나타났을 때는 ‘쳇!’ 하고 “내가 예수라는 추상적인 과거인물에 매일 존재가 아니에요.”라고 현실적인 현찰을 선택하고 현실적인 힘을 선택할 때 내가 생각하는 믿음과 믿는다고 여긴 나와 실제로 믿음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전혀 나는 믿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거기에 대고 목사들이 믿으라, 믿으라, 하니까 믿어주는 척은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과 위선과 가면 쓴 무도회 같은 교회 집단에 주님이 속을 리가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서 우리를 또 다른 현실, 이 국가라는 현실에 집어넣어버려요. 국가라는 현실 속에서 네가 실생활을 하면서 교회 와서 쌍 시옷 넣어서 “믿쑵니까, 믿쑵니까?” “믿쑵니다, 믿쑵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거 백날 외워봐야 소용없고 네 가 실생활에서, 가정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 실생활에서 너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가를 실습으로 우리로 하여금 보여주는 절차를 주께서는 마련하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권세를 느끼고 권세 앞에서 우리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유도 없고 맹목적이에요. 아무 목적도 없이 무조건 살아야 돼요. 저는 이 집사님의 페이스 북에서 보면 그것을 많이 느껴요. “지금 12킬로 달리고 있습니다.” 혹은 “지금 24킬로 달리고 있습니다.” 다른 데 보면 예수는 누구시고 믿음은 어떻고,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없어요. 지금 어떤 것을 하면 몸에 좋고 어떤 식품을 먹으면 된다는 거예요. 지금 혈당량 수치를 그래프로 그려놨어요. 바로 저거다, 저게 바로 복음이 되는 거예요. 어떤 권세에 눌렸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위선 떨지 말고. 사실 우리의 가치는 내 몸이 얼마나 건강한가, 그 위주지 허황되고 망상된 것들, 예수니 삼위일체니 그런 것은 다 이념이거든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제가 지금 집사님 욕하는 것 아닙니다. 이 냉정한 현실, 냉혹한 현실을 실제 살아가면서 느끼게 하는 겁니다. 세상 권세가 뭔가에 대한 예를 다 들 수는 없어요. 이 시대, 소위 근대국가에서는 행정 강제와 행정제재로 나눠요. 행정법에서 행정 강제란 현재 일어나는 일에서 강제하는 것이 행정 강제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행정제재를 취해서 범칙금도 매기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법률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과거 이야기를 해보면 머리에 확 들어올 거예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때 천민들끼리 다투거나 또는 양반들끼리 다툴 때는 처벌할 때 그냥 갚아주고 보상하면 그만이에요. 지금 태국도 마찬가지인데요, 왕을 욕하다가 십년 언도받은 외국인이 있어요. 이렇게 만약에 임금을 욕한다든지, 때린 것도 아니고 본인 앞에서 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저잣거리에서 몇 마디 했는데 그것으로 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일족, 사돈의 팔 족까지 다 죽여 버리죠.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을 국왕이체 론이라고 합니다. 왕은 신체가 두 개가 있어요. 하나의 신체는 물리적이고 생리적이고 자연적인 신체가 있어요. 이것은 일반인들이 신체를 가지고 키가 몇 센티며 몸무게가 몇 킬로, 이런 신체처럼 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신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신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치적 신체입니다. 만일에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우연히 손에 맞아서 흠집이 났다면 그 사람이 보통 이웃 사람이라면 그냥 후시딘 연고나 하나 사주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국왕의 신체에 흠집을 내버리면 능지처참해버려요. 그것은 정치적신체가 따로 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대로 극형에 처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신체보다 더 우월한 신체가 너의 신체를 지배한다는 것을 현실화된 형법으로 정신적인 지배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웃 사람 욕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임금을 욕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극형에 처해버려요. 심지어 역사서에 보면 상처를 내놓고 물속에 집어넣는다든지 아니면 말에 묶어서 사지를 찢어지게 만드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춘향전에 보게 되면 사또 생신에 누가 형벌을 받느냐 하면, 춘향이가 취조를 당하지요. 변 사또 기쁜 날에 춘향이를 곤장 치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마이너스(-)효과, 반대효과를 노리는 거예요. 개인적인 것을 철저하게 능멸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그것을 능멸하는 주인공이 너희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 다른 신체, 다른 영역에 속한 초월적 존재인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대조를 하는 거예요. 13장에 보면 “각 사람은(개별자)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해서 층층의 권세 제일 위 지점은 뭐냐, 왕이 있어요. 왕을 능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세를 능멸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일반적인 형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지옥에 갔을 때 당하는 형벌을 미리 앞당겨서 당하는 조치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그 정치적 신체의 모든 권력이라 하는 것은 왕의 말, 왕이 선포한 포고령 그 자체가 골격이 되고 거기에 정신적 신체의 혈액처럼 거기에 필요한 기호와 상징들, 언어, 법령들이 혈액처럼 온 몸에 흐르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의 신체의 지체처럼 그 국가가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이 국가를 개인이 수용할까요, 안할까요? 절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국가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있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좋아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국가라는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좋아서 군에 가는 것, 군대소집령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좋다고 존재하는 자연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네가 좋아서 네가 선택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현실이 아니고 던져진 존재고 어쩔 수 없이 굴복당해야 될 신체와 현실을 네가 수용하라는 겁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무덤에서 호출당하기 때문에. 개인이라는 것은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반발이 아주 극심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처벌을 먼저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금지한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여러분이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선악과의 금지는 선악과에 대한 처벌이 먼저 앞서 있고 그 처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개인에게 욕망을 주었고 욕망이 외부로 나오면 처벌, “네가 정녕 죽으리라.”가 구체화되는 “죽으리라”를 담게 되는 현실을 네가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고……, 어려운 대목이니 잘 들어보세요. 진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7절을 근거해요, 그 다음에 그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주님이 되기 위한 조치로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일부러 심어놓았고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고 그것을 유인하기 위해서 거기에 마귀를 침투시켰고 그 마귀의 유혹에 의해서 인류의 조상은 그것을 따먹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그래서 일차적인 죽음은 신체의 죽음이고 이차적인 죽음은 심판에 이르게 하신 거예요. 이것은 에베소서 1장에서 풀리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 개인적으로……,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나는 여기 있고 신은 저기 있는데 개인적인 내가 어떻게 천국가지?’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성경전체가 창세기부터 막혀버려요. 선악과 왜 심었으며 선악과에 아예 접근도 못하게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뱀은 왜 집어넣어놓고?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뭐든지 마음껏, 실컷 따먹고 놀아라, 해야지 ‘다른 것은 다 먹어도 이것만은 먹지 말라.’ 하면 이 금지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거예요. 인간은 금지를 해야만 비로소 욕망이 기지개를 켭니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대해서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금지하지 않으면 인간은 소망하지 않고 욕망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꼭 금지를 해야 돼요. 그래서 국가가 어떤 행정법으로 제재를 하면 일단은 반항합니다. 그러나 반항 뒤에는 처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국가를 준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선과 악이라는 모눈종이를 인간의 머리에 덮어씌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서울에 가게 되면 기흥 그 쪽에서 잠을 자는데 그 집이 맨 그 메모리 폼 이야기 했던 그 집이에요. 이번에는 메모리폼 이야기가 아니고 그 집 애를 보니까 애의 연필 꽂아놓는 통이 있는데 연필을 꽃게 되면 옆으로 기울어지잖아요. 그런데 바짝 서 있어요. 어떻게 했나 보니까 그 연필통 도자기에 풀로 얇은 종이를 막아놓고 연필을 꽂을 때 마다 꼭 찍어서 구멍을 내게 되면 그 구멍의 힘 때문에 연필이 똑바로 서 있게 되어 있어요. 저게 바로 하나님께서 모눈종이로 인간의 각 위치를 고정시켜 놓은 거예요. 너는 네 자리, 너는 그 자리, 왕은 왕 자리, 신하는 신하의 자리, 종은 종의 자리, 자기 위치를 배치를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배치를 하되 그 모든 모눈종이가 선악구조로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것을 네 욕망과 배치가 되는 네 바깥에, 너를 미워하는 어떤 왕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는 권세로 하여금 너로 그 모눈종이라는 질서에 꽁꽁 묶이게 하신 하나님의 전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선악은 여러분,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 이전에 처벌이 먼저입니다. 처벌. 금지하는 것은 결국 처벌이 주는 두려움 속에 우리가 꼼짝 못하게 묶는 거예요. 여러분, 국가, 대한민국이 천국이 아니잖아요. 천국도 아닌 것을 먼저 주께서 선재해서 제시하고 그것에서 인간들은 뭔가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국가권세에 매이면서도 이것은 정녕 내가 원하는 에덴동산은 아니고 그저 두려움의 연속으로서 살다가 죽으면 그때서야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정도로, 그 정도로 군기 잡힌 질서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자기 구멍을 뚫은 거예요. 이걸 어린애는 몰라요. 가정에서는 모르다가 군에 갔다 오면 그 다음부터는 사회를 압니다. “우리 사장님이 어때요?” “우리 사장님은 굉장히 훌륭하지요.” 실제로는 사장님이 운동을 많이 시켜서 괴로운데. “코치님은 어떻습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또 그 심한 운동을 하고 싶습니까?” “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뭐냐? “당신이 사회를 아는군요.” 사회를 안다는 것은 두려움을 감수하고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그것이 사실은 진짜 우리 위치를 말해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내가 원하는 천국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회가 우리한테 필요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커서 20세가 되고 사회에 나가게 되면 이제는 무서운 사회지만 그 무서운 사회 없이는 우리가 못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누군가 나를 호명하거나 호출하지 아니하면 이 사회에서 나는 주체로서 행세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살? 왜 자살할까요?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호명하지 않기 때문에, 호출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이 사회의 나름대로의 질서에서 너는 이 자리에 들어가, 라고 나를 호출하게 되면 비로소 나는 “휴, 살았다.” 하고 진짜 그 말대로 살았다, 가 되고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고 호출하지 않을 때 자살하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내가 내 세계를 따로 만들지.’ 해서 도박에 빠집니다. 도박의 특징은 자기가 자기 세계를 따로 만드는 것이 도박이에요. 둘 다 급속히 망하지요. 나이 60 넘어 은퇴를 했는데 은퇴한 분들의 특징이 뭐냐, 외롭다는 거예요. “외로우면 여자 친구라도 사귀지요. 결혼은 하지 말고 그냥 애인으로 사귀시면 안 됩니까? 부인하고도 사별했는데 3년 지났으니 예의도 차렸고 이제는 서서히 여자 친구 사귀면 안 됩니까?” 라고 하지만 그게 여자가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고 여자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야, 70이 넘어도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 하십니까? 세상에 70가까이 되신 분이 커피를 어떻게 이렇게 잘 타십니까?” 해줄 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호출할 때, 그것을 쉽게 이야기해서 취직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취직한 거예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나를 호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실질적인 나, 말로만 나가 아니라 실질적인 나가 돼요. 그게 안 되면 자살하는데 흔히 그걸 외로워서 자살한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욕망은 나밖에 모르고 사회가 그런 욕망을 이용해서 각자 자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 사회의 욕망에 의해서 내 욕망을 줄여야 되니까 욕망은 욕망대로 성취도 안 되고 괴롭고 만족함이 없고 그러면서도 사회 말을 안 들으면 돈이 없으니까 죽어버리고, 이게 바로 도저히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다섯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다섯 자에요. 뭐냐 하면, “나가야 산다.”입니다. 나가야 살아요. 이 세상에서 나가야 됩니다. 그 나가는 것을 구약에서 뭘 로 보여주느냐, 출애굽이었습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면 애굽하고 싸워서 이겨야 되겠네요.” 놀라운 사실은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은 애굽과 싸우지를 않았습니다. 싸운 적이 없습니다. 홍해바다에 널브러진 애굽 군사들의 시체와 그들의 군장들과 무기, 누가 그렇게 물에 빠트렸습니까? “어이, 이스라엘! 당신들이 애굽을 이겼는데 누가 이겼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가 안 그랬는데요?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가만히 있으면서 누가 활동하고 있음에 대해서 목격하고 증언하는 겁니다. 누가 애굽의 수많은 군사를 이겼습니까? 애굽이 바다하고 싸웠습니까? 지가 돈키호테입니까, 바다하고 싸우게? 바다 속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면 애굽이 바다하고 싸웠습니까? 애굽은 자기가 패배하면서도 내가 지금 누구하고 싸웠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유일하게 아는 사람들은 누구냐? 나왔던 이스라엘은 압니다. “여호와가 용사시니 그의 이름이로다.” 주의 이름이 벌써부터, 십자가 이전부터, 구약 때부터 미리 거기 가 계셔서 그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집단 이스라엘, 천국가는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제국인 애굽 제국을 이기게 한 겁니다. 그 이기게 하면서 불러낸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호명이고 호출된 거예요. “내가 너를 불러 세웠나니.”라는 그 말씀,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나흘 만에 호출할 때 그 호출의 능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호출당할 때 우리는 피가 나를 불렀음을, 피를 증거 하라고 불렀음을 우리는 이해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나의 죽음이 같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개별자로 천국 간다?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나를 죽여서 가는 겁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지옥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심으로서 가게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제가 참 이 이야기하면요, “목사님, 차라리 미흡하나마 내 욕망대로 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할 수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성령이 임할 때 이것은 우리가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살하고 혹은 예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 또는 그냥 너 대로 살아, 그냥 살아요. 건강 챙기고, 돈 챙기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라니까요. 내가 내 계획대로 살면 항상 내가 지금 삶과 말씀이 일치될까 하고 계산하는데 그거 계산하지 말고 그냥 사시면 사는 그 자체가 주께서 원인이 되어서 만들어진 삶이 되는 거예요. 다니엘에서 느부갓네살왕이 권세자에요. 그것은 바벨론제국입니다. 못 빠져 나옵니다. 다니엘과 그 세친구가 빠져나가겠다고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시위 했습니까?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세친구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용광로 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속에 네 번째 분이 있어서 그들은 영생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유난떤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았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8장 3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섰어요. 빌라도가 하는 말이 “나한테 잘 보이면 너를 빼줄 수 있다.” 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 말은 뭐냐, “빌라도야, 너도 이 세상 권세에 그냥 놀아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우리를 정죄하는 거예요. 우리를 정죄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정죄 받아야 돼요. 간통하다 잡힌 여인이 구원을 받았지만 먼저 정죄당해야 되는 순서가 있어야 되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의 법이고 세상법이고간에 제대로 살지를 못하니 정죄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라고 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죽으라고 사는 거예요. 결국은 죽습니다. 결국 죽으라고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모눈종이로 질서를 만들어서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결국 죽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전도서 9장 2절, 착한 사람이나 안 착한 사람이나 결국 마지막에는 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런데 한 번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진짜 심판은, 본격적인 심판은 후반전에서 되거든요. “누가 정죄하리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죽으실 뿐 아니라…….” 죽은 적도 있었고 다시 사신적도 있는 분이 우리보고 “너는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 최종심판자를 우리는 미리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들린 기쁜 소식은 세상 돈 버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네가 어떻게 살아도 이미 용서받았다는 그 기쁜 소식이 성령을 통해서 들려올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악마에 속한 거예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헷갈리는 것은 분명히 로마서 13장에서는 하나님의 권세라고 해놓고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이 마귀 지배하에 있다고 하니 이 둘을 연결을 못시켜서 당황하셨어요? 많이 당황이 되는 거예요. 교인들이 이것 가지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저렇게 물으면 저렇게 답하고……. 여기 보면 권세 자에게 세금 내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해서 개별자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순서상 먼저 국가에게 당하고 실컷 욕보고 고생하고 정죄당하고, 교도소나 경찰서나 가면 안 되겠지만 하여튼 가 볼 수도 있고, 복음 때문에 고생을 받더라도 그런 것을 통해서 이 개별자가 이 개별자자격으로 구원 못 받고 나의 대표자,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진짜 구원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 선악과를 깔아놓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구원은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사랑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거예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우린 이미 선악과 따먹어서 죽는 것이 당연한 조치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십자가 피가 얼마나 천하보다 귀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만이 참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만만하게 보다가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자살까지는 안했지만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가 괴롭고 스트레스 받는 이 세상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될 스트레스와 죄 지었으니 값을 받아야 되는데 웬 사랑인지 십자가 피 흘린 그 피가 우리로 영생을 얻는다고 했사오니 주님만 전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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