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77강-율법의 완성(롬13;8-10)이근호140323

아빠와 함께 2014. 3. 23. 19:55

율법의 완성(로마서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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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23 13:39 
율법의 완성

2014년 3월 23일                               본문 말씀: 로마서 13:8-10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평소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힘과 돈과 명예입니다. 즉 일단 자기 자신이 살 이유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 곁에 자꾸만 이런 것들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이러니 나는 계속 번창해야 돼!”라는 것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이라는 것도 율법을 근거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미 틀어져버린 겁니다. 요한일서 3:15-1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지만 인간들 치고 형제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취미로 여길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지 않고 존재해야 하나님을 위하여 근사한 일이라고 하게 된다고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하나님이 사랑을 요구하더라도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내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기에, 계속 살려주는 조건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사랑을 해줄 용의가 있다는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타협이요 협상이요 흥정입니다. 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테니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바로 들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막상 ‘형제를 위하여 아예 죽게 된다면?’ 모든 것은 다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낙을 누리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죽고 나면 아무리 후에 명예와 힘과 돈을 얻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따라서 사람들이 신과의 협상 조건은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쪽에서 신을 사랑해 줄테니 그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달라는 식입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을 것도 있어야 공평하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 바탕에는 ‘일단 살고보자’가 깔려있습니다. 근사하고 멋있고 숭배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춘채 건강하고 살아있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인 자신의 자리를 놓치고 있고 모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감추어진 것인데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죽음의 자리’가 곧 인간 본래의 자리입니다.

인간의 출현과 세상 모든 것들의 창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죽음은 인간이 아무리 여러 번 자살해도 알지 못하는 그 죽음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근원알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아는 것은 없습니다.

나타난 것이 곧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자신이 ‘여기 있음’부터 따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며 죽게 되면 그 꿈도 깨어지고 ‘죽음 속’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대하게 됩니다. 즉 인간이란 죽기 위해 태어났으며 죽음 위에서, 죽음 속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시도한 모든 것은 죽는 순간, 커튼이 주저앉는 식으로 무너져버리고 한낱 꿈으로 환원됩니다.

그동안 줄기차게 시도했던 모든 삶에 대한 여망도 꿈 속에서 헤엄친 모습일 뿐입니다.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는 반복적인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존을 영원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앞장 세워 신과 협상과 타협에 나서고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 17:13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를 버린 상황’ 이것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누리는 상황입니다. 저주요 죽음의 연속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율법 속으로 다시 집어넣어버립니다. 율법 속에서는 인간은 자신이 기대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메시아가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과 마주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위주로 생각한 그 사랑은 결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도리어 정반대로 잘못 생각한 내용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율권, 혹은 선택권을 두고 말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나의 자유성, 선택성을 분명히 해두기 위한 대상자와의 관계요 사랑이기 때문에 곧 나에 대한 사랑이다. 내가 선택한 대로 타인이 따라주면 그보다 더 큰 희열이 없을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하기에 설레임이 됩니다. “두근두근”

그런데 상대가 이런 말을 해옵니다. “당신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이게 자신을 화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방적 사랑 관계가 상대가 걸어온 자기 선택적 발언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조건이 맞지 않아 깨어질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겨서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자율이지만 자신의 자율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건방지게 나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도전하다니…”라는 식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 선택권 행사를 이미 사랑이라고 일방적으로 지정해놓았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분노가 일어나고 그 분노로 인하여 메시아가 죽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왜 세상이 나의 자율권을 마음껏 긍정해주는 장이 아니냐는 것 때문에 인간들은 분노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율권과 선택권이 무한대로 펼쳐지는 세계를 원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천국이니 영생의 나라니 합니다. 영생을 얻고 싶어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장면이 누가복음 10:25에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에 대한 답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전제는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해야 영생얻는다”입니다. 여러 가지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등장하고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서는 그냥 지나간 제사장도 나오고 그냥 지나간 레위인도 나오고 정성껏 도와준 사마리아인도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에 강도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실은 강도로 인하여 야기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는 일로 인하여 욕 얻어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 주신 자체가 인간 자체가 ‘예수님이 없고 자기들만이 세상’을 구성하며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원인은 모르는 채 자기네들의 변명만 일삼으면서 영생은 따로 노리고 챙기려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제시된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님이 계신 세상이라는 차원에서 이 비유를 해석하게 되면 모든 인간은 이 비유에 등장하지 않는 강도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점은, 선한 사마이아인만 다가가서 알 수 없고, 인간들이 강도 맞은 자, 제사장, 레위인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태를 설명해줄 구비 조건임을 알게 됩니다. 즉 모든 이들은 자신의 존재 때문에 예수님을 때놓고 현실 세상에서 구성하며 산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참된 사랑을 알게 되면 바로 자신이 율법을 어기거나 지키거나 할 수 있는 그 권리 자체가 이미 박탈되어 있는 입장인 것을 아는 겁니다. 예를 들면, 간음죄를 저지르거나 아니 저지르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선택권 자체가 포기되어야 함을 아는 자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이미 십자가 자리에 들어선 자는 사랑만 받을 뿐이지 결코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을 살려내고 영생얻는 짓은 성립되지 않음을 아는 자입니다. 율법 못지키는 것 대신,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것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나 구원은 인간이 피하는 것 가운데 끈질긴 사랑으로만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자율권이 십자가 안에서 이미 박탈된 상태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경에서 사랑이 나오고 또는 율법이 나오고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한테 무척 부담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우리가 사는 목적이 사랑하려고 사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은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 있어야 되고, 나한테 힘이 있어야 되고, 나한테 돈이 있어야 되고, 교회 다닌 이후부터 나한테 돈이 더 생기고, 이익이 더 생기고, 소망이 달성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거래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사랑이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지 우리의 목적은 아닙니다.



여기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이 사랑이라고 이미 붙여진 거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 그것을 향하여 질주한다, 사랑을 위해서 나는 일한다,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사랑을 목표로 하고 목적으로 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기도한 내용들이 뭐였던가요? 사랑 달라고 기도했던가요? 아니면 나한테 이익을 달라고, 힘을 달라고 기도했던가요? 이래서는 못살겠으니 숨통 좀 틔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가요? 모든 것이, 만사가 내 뜻대로 안되니까 내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가요?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이 나오면 우리 마음은 한껏 부담을 갖게 되는 겁니다. 부담은 갖고 있으면서도 성경은 안 볼 수가 없어서 어떤 타협점, 흥정과 협상에 나서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을 해드릴 테니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실 용의가 있습니까, 라고 흥정과 협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흥정과 협상이 하나님께 통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흥정에 응하겠습니까? 아주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사랑의 끝이 어디 있는가가, 요한 1서 3장 끝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게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을 기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15절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는 이것까지는 머리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 여기까지인데 주님께서는 그 다음까지 계속 밀어붙입니다. 그 다음에 잘 한 번 들어보세요.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도대체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금 어디로 몰고 있는 겁니까? 일단 내가 살아야 나라는 존재의미가 유지가 되거든요. 내가 어떤 낙을 보겠다는 것도 일단 살아 있어야 낙을 보잖아요. 3년 뒤에 잘 된다든지 5년 뒤에 자식이 출세했다든지 그것을 구경하려면 일단 나부터 살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 가려면 일단 나부터 살아서 주님의 나라를 구경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사랑은 너를 제거하고 삭제하고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온다는 겁니다. 사랑을 네가 안다면 네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그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흥정과 협상과 타협을 해요. “네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테니까 저한테 뭘 줄 거요?” 물론 목숨까지도 안 버리지만 “제가 형제를 위해서 사랑을 할 테니 사랑하고 난 뒤에 사실은 내가 이런 것들을 얻고자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메워줄 겁니까?”라고 우리는 협상과 타협에 나서고자 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익히 아시고 아예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내가 일단 살아 있고 일단 낙을 보겠다는 그 계획을 무산시키는 쪽으로 사랑은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바치면, 바치면, 바치면 그 뒤에 낙을 볼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게 돼요. 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니까. 내가 존재해야 어떤 희망도 살아 있는 법인데 내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맹탕인데 그 다음에 뭘 주고 안주고가 어디 있습니까, 나 자체가 사라져버렸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에서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할 때에 우리가 기대했던 그 사랑, 그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른 이유가 주님께서 사랑이라 할 때는 우리가 직접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경유해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율법 속에 기어들어갔더니만 비로소 발견되는 그 사랑.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살아 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 여기 내가 버티고 턱 하니 있다, 그런데 나는 사랑을 원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사랑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 율법을 경유하지 않고, 율법 없이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세상 전부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직접 구입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성경에서의 사랑, 로마서의 이 사랑,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인데 앞의 율법을 빼버리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이라 하지 말고 그냥 사랑 그 덩어리, 그것만 성급하게 그냥 낚아채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외롭고 사랑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본인이 알기 때문에 성경에 보니까 사랑이란 말이 여러 번 등장하니까 ‘아, 그거 내가 원했던 건데. 그 사랑 내가 낚아채야지.’ 이런 식으로 “주여, 사랑을 해 주옵소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 하고 새벽기도 나와서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율법을 아느냐? 너는 지금 사랑을 달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 이거든요. 율법조차 사랑하지 않으면서 율법의 열매인 사랑은 되게 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큰 오해가 있고 오인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사랑, 사랑, 해도 인간에게는 사랑이 소용없는 것인가? 현재 인간에게는 소용없는 거예요. 개한테 보석이 아무 의미 없듯이. 인간한테는 의미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쓸데없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사랑을 언급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 만드는 그 목적만큼은 하나님 스스로 철회가 안 되거든요. 그렇다면 방법은 뭡니까? 인간을 인간 아닌 걸로 만들어서 사랑은 사랑대로 덮이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인간 아니라고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꿈과 현실을 바꿔놓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면서 꿈을 꾸잖아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꿈을 꿨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것부터가 원초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네가 깨어난 그것이 꿈이고 네가 꿈이라고 여긴 그것이 현실의 징조요 징후였고 정상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이 벌써 첫 번째 걸음에서 벌써 어려운 거예요. 예레미야 17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주를 버린 자는 수치를 당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신약 적으로 말하면 주를 버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 말입니다. 성경에서 주를 버리는 자는 수치를 당한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된다, 라고 하는 말은 저주받고, 심판받고, 인간존재자체가 무시당하는 그 자리, 본래 사람이라는 것이 여기서부터 생겨났다는 거예요. 주가 없는 자리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새롭게 끄집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우리는 자기가 지레짐작, “나는 인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소서.”라고 나오니까 주님께서 다시 말씀, 율법을 통해서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정작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의 취지가 뭔지를 알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죽어서 눈만 감으면 이 현실도 다 같이 무너지는 겁니다. 서울의 가락교회 김 중우 집사님이 계신데 2월인가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당뇨수치가 400까지 올라갔답니다. 400이 뭡니까, 하니까 보통 사람은 80내지 100인데 400까지 올라가서 당 덩어리가 모세혈관을 다 막아서 온 몸이 퉁퉁 붓고 움직일 수가 없었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 했다는 거예요. 점심시간이라 직원들은 다 나가고 없고 혼자서 엉금엉금 기듯이 해서 병원에 가서 인슐린 주사로 쫙 낮춰서 200으로, 보통사람의 곱빼기인데 200으로 낮춰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했어요.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챙길 건 챙겨야 되겠다, 싶어서 물은 거예요. “그 죽을 것 같았던 순간에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아주 냉철한 기자적인 심정에서,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죽는 순간, 그게 궁금한 거예요.



“어땠습니까?” 하니까 “모든 장막이 어둡게 내려온다.”는 거예요. 아, 바로 내가 원했던 말은 그거였어요.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봄철이고 벚꽃도 피고 이런 소리도 들리는데 막상 죽으면 이것이 무대의 커튼이 닫히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한낱 꿈이었던 겁니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겁니다. 현실이 아니었던 거예요. 이걸 일단 현실로 간주하니까 거기서 욕심이 생긴 겁니다. 현실 속에서 나는 얼마나 튀느냐, 얼마나 대단한 존재냐, 남한테 기죽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살고 싶다, 하는데 그러한 욕구불만과 욕망 같은 그 자체가 지금 죽은 상태에서 꾸는 꿈이라면 정작 꿈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이 바로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그 자리라면, 지금 이 자리가 꿈이고 꿈에서 깨어난 그 자리가 주와 함께 있는 영원한 천국이라면 지금의 나의 모든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인이고 오해고 착각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해석이 그동안 왜 안 되었는가, 착각 속에 헤매고 있으니 성경해석이 될 리가 있습니까? 주를 버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 처음부터, 날 때부터 우린 주를 버린 자에요. 언제 우리가 주를 생각합니까? 내가 존재하고 이 존재하는 70조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인데 언제 주를 생각할 여유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몸을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오인과 오해의 연속이었어요.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내가 당뇨 안 걸려서 살아야 된다, 라는 그 생각조차도 죄가 되고 그것이 오인이고 내 자리를 착각한, 원래 내가 살아 있어야 이것이 내 자리라고 여긴 그 자체가 착각이었던 겁니다. 그런 착각 속에서 성경에서 율법이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천국이 어떻고, 하니까 전부 다 마귀의 장난질에 의해서 거꾸로 다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꿈속에서 해매고 꿈 아닌 현실은 주님께서 만들어서 가야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망이 그거였습니다. 꿈만 꾸는데 꿈 그만 꾸고 이 몸이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제대로 된 현실 속에서 살고 싶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눈치 챘어요. 알아챘단 말이지요. 왜 그렇게 당뇨수치가 올라갔느냐 물으니 사업한다고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날 때 마다 제일 먼저 물어봐요. “지금 혈당수치가 어떻게 됩니까?” “250입니다.” “혀를 좀 봅시다.” 보니까 이빨자국이 혀에 그대로 나 있어요. 모세혈관이 잘 작동을 안 하니까. 그래서 지금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분이 가까이에 있을 때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처 모르는 정보를 빼낼수 있는 그런 것이 있어요.



연세 많다고 죽음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짜 인간이 죽는 그 죽음을 금지시켰습니다. 네가 백번 자살해도 그 죽음은 인간 본래의 그 죽음의 자리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죽음으로부터 창조를 하신 거예요. 그 죽음이 뭐냐,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십자가 죽음. 내가 먼저 있고 내 죄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 있고 그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천지 창조 때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항상 해석이 예수님부터 해석이 되어야 됩니다.



이 성경전체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거거든요. 그걸 가지고 인간 쪽에서 사랑, 이렇게 하니까 자기의 진짜 꿈같은 본질은 아주 안 들키게 감춰놓고 기껏 윤리도덕으로 세상을 좋게 해보자고 주장들 해요. 성경에서 사랑 나오니까 갑자기 설교자나 목사들이 뭘 아는 듯이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해서 설교 하는 것 가만 들어보면 이것은 부위부강, 부위자강, 군위신강,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알았던 그 윤리도덕, 공자니 맹자니 하는 그 선이에요, 그선.



부자유친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는 자식을 애정으로 다스리고 군신유의라 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되고 부부유별은, 부부간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되고 장유유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간에 서열이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은 친구 간에 서로 우정이 있어야 되고 믿음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납니까? 그것은 꿈을 더 꿈 되게 하는 거예요. 꿈이 마치 현실인양 위장하는 것밖에 안돼요. 인간의 모든 윤리나 도덕이라 하는 것은 일단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윤리 도덕에 나서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 동양권에 속하기에 동양윤리가 몸에 아주 배겼어요. 그래서 동양윤리를 좀 더 보게 되면, 맹자 같은데 보게 되면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삼강오륜 같은 것을 하나의 도리라고 이야기하고 또 원칙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원칙을 실천에 옮기면 이상적인 도덕사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 방법은 뭐냐 할 때 맹자의 주장에 의하면 측은지심,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한 것이 있는데 뭐든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애가 우물에 빠졌을 때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건져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게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그 다음에 수오지심, 나쁜 짓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수오지심. 그 다음에 사양지심,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낮출 줄 아는 사양지심. 그 다음에 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그 시비지심. 이걸 인의예지라고 해서 이걸 사단(四端)이라 했어요. 사탄, 흔히 사단이라고 하는데 말이 비슷하죠. 여기서 ‘단’이란 세상이란 뜻입니다. 인간 속에는 이런 선한 것이 있는데 환경 때문에 이런 선한 것이 발휘를 못했지만 환경고치고 마음고치면 이 선한 것을 개발해서 악은 줄이고 선은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가 이상적이 공동사회, 이상적인 윤리도덕의 사회, 우리가 살만한 사랑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 동양의 윤리 도덕이에요.



아까 원칙은 삼강오륜이라고 했고 그 원칙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훈련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훈련을 동양철학에서 ‘함양’(涵養)이라 합니다. 쉬운 말로 공부에요. 공부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런 새싹이 올라올 때 나쁜 새싹도 같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이런 말 하면 잘 이해되지요? 인간 자체가 주를 떠났기 때문에 주를 경유하지 않는 이야기라면 다 이해가 돼요. 하나님의 약속, 말씀, 그 율법을 경유하지 않고 우리 몸이 얼마나 대단하게 착할 수 있는 존재냐를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야,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습니다.’가 된다니까요.



악한 생각과 나쁜 생각이 같이 올라오기 때문에 공부와 훈련 경건을 쌓아서 나쁜 생각은 제거하고 착한 생각은 장려하는데 그것도 오랜 기간 숙달시키고 훈련을 쌓으면 착한 마음이 되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은 인간다운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동양에서 말하는 윤리 도덕이에요. 그러면 서양은 궁금하지요? 서양의 뿌리가 로마입니다. 로마에서는 어떤 윤리가 있느냐, 이것은 죽 한 번 읽어볼게요. 첫 번째 경건, 두 번째 인간미, 세 번째 자유, 네 번째 관용, 다섯 번째 도덕, 여섯 번째 권위, 일곱 번째 믿음, 여덟 번째 규율, 아홉 번째 엄격, 열 번째 위엄, 열한 번째 일관성. 보세요, 좋은 것은 다 모아놓았지요.



성령 필요 없네요. 이 좋은 세상 만들기에. 경건, 인간미, 자유, 관용, 도덕, 권위, 믿음, 규율, 엄격, 위엄, 일관성, 열한 가지 여기서 뭐 빠진 거 있습니까? 성경 왜 보는데요? 이것만 하면 되는데. 윤리도덕만 있으면 되잖아요. 동양철학에 묵자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하나밖에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이것은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왜 그게 다른 곳에 없습니까? 묵자라는 중국의 사상가는 “약한 자를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묵자라는 사람입니다.



중국의 우왕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 하면, 중국에서 최초로 치수사업을 벌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불행할수록 상대가 행복하다는 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에요. 이 정도 대단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 사람은 임금이면서도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춘 이유가 “왜 그렇게 자기를 학대해서 낮춥니까?” 하니까 “내가 낮추면 낮출수록 백성들이 행복해지니까. 백성들만 행복해진다면 나 같은 것은 지금보다 더 낮아지고 깨져도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거예요. 이분 성령 받았습니까?



교회에도 이런 사람은 없어요. 목사도 이런 사람은 없어요. 이거 복음입니까? 인간의 몸이 이미 가상현실, 꿈속에서 이런 걸 만들어 낸 거예요. 꿈이 현실인양 되기 위해서. 그 꿈의 주인공은 누구냐, 내가 이 정도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잘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근본적인 육신, 주를 떠난 존재로서 어떤 자기의 천국을 회복하기 위한……, 이미 이 세상이 힘들잖아요. 힘드니까 힘든 생활을 천국으로 바꿀 방법이 없을까,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을 이성이라 합니다. 양심, 이성, 그런 거거든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지혜를 끄집어내도 십자가 앞에서는 전부 다 가로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만 들이대 버리면 윤리 도덕 외치는 사람한테 십자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거예요. 따라서 십자가복음을 전할 때는 먼저 뭘 깔아야 되느냐 하면, 최고의 윤리, 최고의 도덕 가운데서 십자가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가 나쁜 인간들이었어요? 강도였습니까? 창녀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는 세계 최고의 윤리도덕을 자처했던, 그것도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선할 수 있고 경건할 수 있고 거룩한가를 모델케이스로 만들었던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 못 간다.” 했습니다. 묵자, 우임금, 그 정도 레벨이 바로 그겁니다. 십자가는 죽음 사건이에요. 살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어딜 넘봐? 넘볼 수 없는 지혜가 나옵니다. 거기서 능력이 나와요. 내가 살아 있고 이 살아 있는 것이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이미 그 노선으로 간다면 십자가는 튕겨져 나와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고 자기가 위대하다는 입장에서 성경의 사도바울의 편지 같은 것을 읽어요.



거기에 나오는 육신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읽으면서 얼마나 구라를 쳐댔습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9-23)



이런 본문들이 보이니까 ‘야, 내가 이정도 같으면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을 받고 은혜 받으면 이걸 해 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구라입니다. 그게 가짜고 거짓말입니다. 교회서 하는 윤리 도덕이 다 거짓말이라니까요. 그것은 율법을 통하지 않은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기 잘남의 티를 내기 위한 우회적인 방식에 불과한 겁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는 이유를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자살을 백번 해도 못 죽어요. 죽을 수가 없어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가 구원론에 관해서, 스스로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내 존재의 구원이 우선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있는데 우리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고 그것마저 내가 사는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론이라 하는 겁니다.



구 자억 목사님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따, 참말이여” 그런 노래가 있어요.



(참말이여)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하나님 인간이 되셔 이 땅에 오셨다고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하나님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이리저리 사방팔방 둘러봐도

어디가 이쁜 구석 있어서

하나님 친히 찾아오셔서

그 목숨을 내 준단 말이여

근디 참말이여 성경에 써있는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 이 땅에 오셨다고

진짜 참말이여 성경에 써있는디

하나님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아주 복음의 돌직구를 던졌어요. 이게 뽕작으로 부른 노래의 가사에요. 복음의 돌 직구, 춤을 추면서. 가락은 아싸, 호랑나비하고 좀 유사한데. 여러분, 집에 돌아가시거든 구 자억을 치고 한 번 들어보세요. 문제는 그게 구원론이라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복음의 내용으로 돌 직구를 던졌는데 그게 구원론이 되는 겁니다. 출발점이 일단 나부터 챙겨놓고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목적 자체가 자기한테 기회가 되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자체가 원천을 통과하지 않았어요. 원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 자리가 역시 꿈의 자리에서 시작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서 도망치게 만들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 안 믿겠다고 만들어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는 방법으로 구원하십니다. 그래야 내가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나의 원래 기대했던 그 구원 구원이 아니고 내가 기대했던 그 천국이 천국이 아니고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의 자리에서 나왔던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보통 사랑이라 할 때는요, 남녀가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을 조사해보면 이런 겁니다. 사랑이라 말 했지만 뜯어보면 뭐냐 하면, 나의 자율권과 나의 선택권발휘를 가지고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로 내가 이미 결심을 해서 선택을 했다. 따라서 내 선택에 대해서 당신이 (속으로 그런 거예요, 속으로. 말을 하면 안 되겠지요.) 따라줬으면 좋겠다. 내 선택을 당신이 존중해주면 좋겠다.” 해서 두근두근, ‘과연 내 선택에 대해서 과연 호응해줄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이라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신 인물이 잘 생겼기에 좋아한다.” 이렇게 나와 버리게 되거든요.



그럴 때 두근두근과 희열과 조바심은 다 깨지고 분노로 바뀌어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선택했다는데 왜 네가 내 허락도 없이 네 맘대로 너의 선택을 나한테 언급을 해버리냐.” 하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잘 생겼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면 만약에 내가 못생겼을 경우에는 그 사랑이 파토 날 가능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그 사랑을 볼 때 우리가 분노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이 돈이 많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합니다.” 할 때 만약에 돈이 없어질 경우라면 나는 당신의 선택권에 말려들지 않을거야, 라는 본인의 자기주장이 또 튀어나와 버려요.



그러면 사랑이 결렬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래서 좋아. 내 죄를 위해서, 아따 참말이여,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하나님 인간이 되셔 이 땅에 오셨다고.” 세상에 하나님이 세상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대놓고 하는 것은 첨 봤어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순간에 하나님 쪽에서 “그건 네 꿈속의 착각이야.” 할 경우에는 우리가 삐져버리는 거예요. “네가 나를 믿는다고? 그러면 나는 너를 구원 안 해.”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가인이 딴에는 정성 드려서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가인 자기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 주님께서 호흥을 했는가 하면 호응을 안했어요. “난 네 제사를 안 받는다.”고 하는 겁니다. 가인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진짜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내가 예배 참석한다 할 때, “하나님이여, 내가 예배참석 안 할 수도 있는데 오늘은 예배참석 했습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내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좌지우지 하려는 하나의 노림수거든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진짜 사랑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내가 예배참석 안 할 수 있는 권리를 내가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지금 눈들을 보니 못 알아듣는 눈들이신데 그러면 다른 이야기로 합시다. “내가 간음을 안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항상 율법은 위반을 해야 돼요. 위반을 해야 그 속에서 율법의 진수가 나와요. 율법은 위반하지 않으면 율법의 참된 진수, 본질이 안 나오거든요. “내가 간음을 안했습니다.” 또는 반대로 “간음을 했습니다.” 둘 다 율법의 정신, 사랑의 정신과 다릅니다. 내가 간음을 했습니다, 하는 것도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율법대로 하지 말라는 것은 안했습니다, 하는 것도 율법 지킨 것이 아니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택권에 관한 문제인데요, “내가 간음을 안 할 수 있는 그 권리마저 저한테는 없습니다.” 해 줘야 그것이 제대로 율법의 사랑, 주님의 사랑에 걸려든 겁니다.



“나 정도 되면 간음 안 할 수 있습니다. 간통 안 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 생각이 있는 한,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에요. “저는 간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이 두 가지 권리를 저는 다 포기했습니다. 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나에게는 일체 선택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이 원하는, 율법이 완성된 그 십자가 안에서는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의미나 존재의 가치가 일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본래의 자리에 가지 않고 자꾸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서 바깥에 관찰자, 관람자의 자리에 가니까 율법은 내가 지키거나 안 지키거나 둘 다 된다고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런 것이 나쁘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율법을 보니까 율법을 못 지켰다. ‘아, 내가 율법도 못 지키고 내가 어찌하지? 내가 죄인이다.’ 할 때 믿음이 왔다. ‘아하, 율법으로 안 되는 것을 믿음 줘서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라니까요?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니까요. 율법으로 해보다가 안 되니까 십자가는 쉽네, 해서 십자가를 선택했더니 구원받았다, 이것은 자기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 꿈속에서 어떤 선택을 발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의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복음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와요. 누가복음 10장 25절에 보면……, 제가 이것만 설명하면 아까 어렵게 느껴지던 것이 다 풀릴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 나올 때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율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벌써 잘못되었지요? “네가 뭔데 영생을 얻어?”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 선생님이여, 나는 나를 선택했습니다. 내가 잘되는 쪽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영생을 못 얻는 것이 문제기 때문에 그 영생을 내가 어떻게 하면 얻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내가 영생 받아야 되겠어, 라는 그것이 먼저 시작점이 된 거예요. 그것은 말도 안 되지요. 영생 얻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영생 달라고 했으니까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경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다고 율법사가 답하지요. 오늘 본문에도 나왔지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똑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해라.” 했지요.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율법 속에 집어넣습니다. 율법 속에 집어넣고 나니까 그 사람이 뭐가 궁금하냐 하면,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는 그 가운데서 자기가 볼 때 뭐가 모호하냐 하면 이웃이 누군지 그 점이 켕긴다는 거예요. 몇 미터 옆까지가 이웃이냐는 말이지요. 몇 킬로미터 반경이 이웃이냐 말이지요. 몇 촌까지가 이웃이며 동창생도 이웃인가 하는 그런 구체적인 문제가 있잖아요.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정말 난해한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데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갔다.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그 사마리아인, 사람취급도 못 받는, 이것은 주를 모르는 족속이라고 이미 제쳐놓은 그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불쌍하게 봐서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에 데려가서 돌봐주고 자기 돈을 지불해가면서 혹시 돈이 더 들면 제가 줄 테니까 다 치료 잘 해주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 이야기 끝에 “여기서 누가 네 이웃이냐?” 한 거예요. 여기서 강도 이야기가 빠져 있어요. 지금 이 강도만난 사람이 강도를 만난 이유가 지나가는 사람들 잘못이 아닙니다. 제사장 잘못이 아니고 레위인 잘못도 아니거든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장 원수는 누구냐 하면 강도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에 대해서 언급도 안 했어요. 강도가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누가 욕을 얻어먹느냐?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바빠서 거길 지나가는 사람이 만났어요. 여기서 지나가던 제사장도 욕 얻어먹었지요, 레위인도 욕 얻어먹었지요, 사랑 없다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다 그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자 하고 영생을 얻었다고 우기던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전부 다 개인이잖아요. 개인, 강도 만난 사람도 개인이고. 그런데 정작 강도를 만나게 한 그 사건, 그 사건을 유발한 강도에 대한 언급은 없는 거예요.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가서 자비를 베풀라고 한 거지요.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 이렇게 되거든요.



자비를 베풀려면 어느 자리에 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강도의 자리에 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강도만난 사람의 자리에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제사장 자리에 있어야 되고 레위인 자리에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성급하게 “제사장은 나 아니야. 레위인은 나 아니야. 강도는 나 아니야. 강도만난 사람도 나 아니야. 나는 강도를 돌봐준 선한 사마리아인 자리야.”라고 그 자리에 성급하게 끼어드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비유는 등장인물이 다섯이든 열이든 그것이 하나의 꽃다발이 되어서 그것이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 말은 지금 강도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수님 빼고 자기만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가지고 공박하는 겁니다. “너희들 속에는 너희 생각밖에 없지? 영생 얻을 생각밖에 없지? 예수 그리스도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서 그렇게 느껴지지?” 그러니까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계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강도가 아니에요.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갔을 뿐이지 그들은 강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이 바로 강도에요. 인간전체가. 누굴 죽이는? 예수님을 죽이는. 그래서 우리 쪽에서는 뭐냐 하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대로 알고 들었으면, 이 자기의 본래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십자가의 죽음에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걸 봐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한 그 상황이나 정황과 그 환경은 예수님 있는 곳에만 그 환경이 펼쳐지고 조성되고 만들어지고, 그 환경 속에서 예수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이웃이 되고 율법의 완성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로소 그곳에 영생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곧 영생인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내가 곧 길이요 곧 진리요 (예수님이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내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생명 안에 우리가 놓여 있으면 더 이상 내 생명 네 생명 이야기할 것, 끄집어 낼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 이미 생명을 안 사람 같으면 이 본문을 들으면 ‘아이고,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군요.’라고 하면 돼요. 왜, 자기생각을 안하니까. 바로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이 생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런 고백이 나오고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그런 고백이 안 나와요.



‘나 선한 사마리아인 돼야지.’ 그거 돼서 뭐할 건데요? 그거 되면 구원 받습니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를 구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없는 세계를 만들어놓고……, 이게 꿈이고 현실이 아니죠, 이렇게 해놓고는 자기를 거기서 주인공으로 해놓고 ‘이 주인공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영생이라 하는 것은 내 착각 속에 만들어진 가짜 영생이 되고 가짜 천국이 되고 가짜 예수가 되고 가짜 삼위일체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끄집어낸 모든 것이 사실은 다 가짜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짜 인간은 바로 인간이 백번 죽어도 갈 수 없는 진짜 인간의 죽음, 내가 살아 있기 전부터 먼저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 그 죽음을 경유해서 그 죽음 안에서 모든 진리와 생명을 다시 파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길었고 어렵지만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느끼고 보았던 모든 자리가 본래 내 자리가 아니에요. 어느 자리냐,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본래 내 자리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그 성령의 열매라는 것 하기 이전에 “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자꾸 사도바울은 제시하면서 네가 십자가를 믿은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네가 지켜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율법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십자가로 달려가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마저 죽이게 된 가해자역할을 우리는 톡톡히 한 거예요. 바로 우리가 강도라는 말이지요. 사마리아 비유에서 강도가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도 “내가 강도고 나는 죽일 놈입니다.”라는 것을 품지 않고 모든 말을 내 뱉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평소에 모든 것을 그렇게 내뱉고 있는 거예요. “엄마, 오늘 아침에 반찬 좀 시더라.” 김치가 오늘 좀 시더라는 그 말 가운데 뭐가 안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강도라 김치 먹을 자격도 없다는 그것이 포함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맛있는 김치를 먹어야 마땅하고, 엄마는 맛있는 김치를 제공해야 되고, 김치를 시지 않도록 해서 먹게 해줘야 되는 것이 엄마의 책임이다. 왜, 나는 그만큼 고귀한 존재니까.’ 이것부터 출발하니까 나만 있는 세계에서 나를 위한 김치가 되는 거예요. 요즘 중국김치 때문에 한국 김치가 안 팔린다 하는 소리가 있는데.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런 거예요. 그동안 성경해석 어떻게 했습니까? 다 엉터리였어요. 아따, 참말이여? 참말이고 뭐고 간에!



사람이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아무리 어기고 혹은 지켜도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율법을 어겨서 죄의식이 있으면 ‘십자가가 있는데 뭐 용서해주겠지.’ 십자가마저 자기가 사라지는 자리로 보지 않고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리로 십자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분명히 네가 어떤 행위, 어떤 법을 지킨 행위가 아니라고 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했다 해도 내가 예수 믿었다는 그 법을 스스로 유지하고 있어요.



본디의 자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치게 하고 성경을 피해서 다른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들면서 주께서 따라가면서 밥에다 김치 얹어서 식탁 밑으로 도망간 그 세 살 네 살짜리 아이들 밥 먹이듯이 주께서 영생을 먹여줌으로써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맨 날 도망치고, 맨 날 성경말씀 피하고 예수 피하고, 내가 주인공으로 있는 쪽으로 도망을 치고, 도망을 치면 주께서는 계속 따라와서 영생과 주님의 사랑을 먹여줄 때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아가서에서 말한 사랑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어디까지? 네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죽을지언정 그것은 너의 선택이 아니고 너의 결정도 아닌 상태에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까? 여러분들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그 모습으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주께서는 해석을 바꿔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마지막 때 환란이 오는데 어떤 걸 환란이라 하는가? 아주머니들이 마사지 방에서 웃통 벗고 마사지 받을 때 “아이, 시원하다.” 하는 그것이 환란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환란이란 부활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환란이에요. 왜냐하면 누워서 마사지 받을 때 시원하지만 뼈 같은데 누르면 아프잖아요. 얼마나 환란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이 환란이 아니고 천국에서 볼 때 모든 것이 환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만약에 여러분이 환란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마사지 받다가 지옥가세요.



그것이 아니고 마사지 받고 돈으로 누리고 뿌리고 멋있게 해도 천국에서 누리는 그 누림보다 영 뒤떨어지고 한참 못한 환란이고 고난이 되는 거예요. 제발 고난 주일에 밥 굶지 마시고 게먹으러 가고……. 이 고난, 환란을 내가 구별하고 내가 판정하는 그런 식으로 환란을 구별하거나 판정하지 마시고 천국에 가서 천사처럼 누리는 그 누림에 비해서 세상에서 어떤 호사를 누려도 그것이 전부 다 성도한테는 환란인 것으로 해석을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고난이라고 해석을 해주시는 거예요.



따라가면서 숟가락으로 먹여주면서 믿음으로 행하는 거예요. “주여, 저는 행함만 했습니다.” “그 행함이 믿음이었어.”라고 숟가락 가지고 처넣어 주는 거예요. 그게 믿어질 때는 성령을 받은 사람 맞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생각하지 않고 자기 행동만 주시하고 검색하고 관찰했고 검열했습니다. 성령의 일이 아니고 육신의 일인 것을 깨닫고 이것마저도 주께서 해석해주시는 그 사랑에 넙죽 우리가 뛰어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