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75강-원수 심판(롬12;14-21)이근호140309

아빠와 함께 2014. 3. 9. 19:25

원수 심판(로마서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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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09 13:34 
원수 심판

2014년 3월 9일                             본문 말씀: 로마서 12:14-21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오늘날 인간들에게 ‘원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각자 자기 갈 길만 가면 그만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원수를 만들지 않고자 합니다. 원수, 즉 적이 있으면 사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원수’가 나옵니다. 이 ‘원수’라는 개념에 접속하지 아니하면 성경 안에 함께 있는 ‘천국’에도 접속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원수 없이 살고 싶어하는 우리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원수’와의 접속에 시켜서 그 안에서 비로소 ‘천국’과 닿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란 말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각자 개인적인 자신의 처지에서 세상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에 내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인지 아닌지를 제일 먼저 마음에 와 닿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를 힘들게 하면 그것은 무조건 ‘나의 원수’가 되고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면 무조건 내 편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형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서 9:2-3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사람이 신에게 잘 보여서 행운을 조금이라고 남들보다 더 얻고자 시도한다면 다 부질없는 짓을 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끼리 비교해서 더 낫다고 해서 복을 받아 살기가 나아지리라고 여기는 것을 세상을 잘못보고 내린 결론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오류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이스라엘에게 시행하십니다.

즉 천국이란 ‘출-애굽’ 과정이 없이는 성사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나오면서 사적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 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애굽하면서 뭔가 이스라엘 내부에 같이 동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ㅛ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도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문 앞을 페인트질 했지만 그 이후에서는 아침, 저녁 마다 어린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심은 그 어린양에 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왕 애굽에서 빼져나왔으니 자기네들 끼리의 왕국을 약속의 땅에서 건설하겠다는 희망이 집중합니다.

그들은, 자기네들과 동행하는 어린양에 의해서 본인들이 하나님의 원수의 자격으로 심판받고 멸망당한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도 같이 얼마든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방민족에게 있는 신탁, 곧 신의 계시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구 달성과 관련있습니다.

아테네에서 두어 시간 버스를 타고 가면 델포이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배꼽(중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우스 신이 세계의 극단적 앙쪽에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 보내니 그 만난 지점이 바로 이 델포이라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곳에서 신탁, 곧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신의 계시를 받아내고자 방문하는 객들은 먼저 성전 아래쪽 마을에서 대기하면서 일주일 동안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 절차를 마친 자는 사제 앞에 서게 되는데, 사제는 염소에게 차가운 물방울을 떨어뜨려서 염소가 몸을 떨면 신탁을 받을 수 있고 몸을 그대로 있으면 신탁을 받을 수 없고 한 달 더 대기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자는 ‘예’ 혹은 ‘아니요’라고 하는 간단한 답변 외에는 들을 길이 없습니다. 방문자가 질문을 하면 무녀는 콩이 든 주머니를 가지고 오는데 이 때 하얀 콩이 나오면 ‘예스 '요, 검은 콩이 나오면 ’노‘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신을 자애롭고 자비로운 신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신이 있음’이 진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현재 활동’이 진리라는 겁니다. 부활이란 이미 사람 손에 넘겨져 죽으신 적이 있는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전부가 하나님의 원수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나라 보존을 위한 사적 심판자로 활용하고자 했기에 벌어진 사태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마태복음 18:3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는 제자들이 평소 관심사대로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가’가 다툼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어른들의 관심사들이 실은 천국의 원수가 되는 발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아는 항상 본 자아의 자리로 추락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눌리고 눌려도 본래의 자리에 찾아가지를 못합니다. 허영심과 허풍과 허세로 붕 떠 있는 상태에서는 사적인 복수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잠언 20:22에 보면, “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면서 정작 자기 구원은 놓쳐버린다는 겁니다. 잠언 24:16-19에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어린양은 인간들이 그 누구도 기피하는 제일 낮은 자리로 추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성도의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입성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사적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나님에게 호소한다면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짓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속죄의식에는 죄인이 회개하는 표시로 숯불이 담긴 대야를 머리에 이고 옮기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스라엘에서는 불이 귀했었는데 불이 꺼뜨리면 다른 곳에서 불씨를 얻어와야 하는데 불씨를 얻어다니는 모습은 부끄러움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평소에 자기 야망만을 생각하는 자가 곧 십자가 앞에서 부끄러운 원수의 모습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사적 원수도 같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2:14-2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애초부터 우리에게는 원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네 팔 네가 흔들고 내 팔 내가 흔들면 되지 원수를 의식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구태여 언급하는 자체가 “너는 성경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예 원수를 안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해서 수고한 그 안에서 조그만 집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서 살면 되지 구태여 원수라는 것을 만들 리도 없고 원수를 생각할 여유조차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원수가 없으니까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사실은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고, 성경이 우리와 상관이 없고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된다는 말은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성경과 관련없는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러면 성경에 나와 있는 천국이란 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나라고 예수님도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존립하는 겁니다. 성경 안에 천국이 있거든요. 천국에 들어가려면 일단 성경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해외강의 하는데 어떤 분이 머리 깍은 모양새가 마동탁과 많이 닮았어요. “당신 머리는 마동탁과 많이 닮았습니다.” 하니까 마동 탁이 누군지를 몰라요. 옛날 야구만화에 마동탁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마통탁을 닮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 만화책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천국이요? 천국을 알려면 우리가 성경 속에 들어와야 천국을 알지 우리가 상상한 천국은 모릅니다. 성경 안에 들어와서 천국이 그 천국 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원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저 원수 없는데요? 저는 인간성이 좋아서 원수 같은 것을 만들지 않습니다.” 라고 해 버리면 우리는 성경 바깥에서 노는 셈이 됩니다. 



성경에 있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성경의 원수라는 것에 우리가 접촉을 해야 되고 ‘아, 성경에서 원수라는 것이 이런 의미구나.’를 아셔야 그 원수를 이기고 제공되는 천국이 우리의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원수란 누구를 원수라고 하느냐, 우리가 바로 원수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우리는 사적인 원수가 유발될 수밖에 없는 몸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는 생각지도 않고 사적인 원수, 내 돈 떼먹은 사람, 나에게 악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원수라고 우리가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원수도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하고 다릅니다. 그게 달라버리면 성경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보 뒤에 이번 주 설교 요약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설교요약이 제 설교하고 거의 98퍼센트가 안 맞습니다. 미리 한 번 읽어보시라고 드린 것이지 설교는 이것 보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설교준비 할 때 제가 은혜 받은 것이고 지금 이시간은 제가 은혜가 받아야 되기에 이 요약은 이미 지나간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백프로는 아니어도 일부 맞는 것이 있습니다.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전도서 9장 2절에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이게 뭐냐 하면 착하나 안착하나 하나님께서 그 차이를 일체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나 안하나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특별혜택은 없다는 겁니다. 전도서 9장 2절의 말씀입니다. 



악하다고 벌 받고 착하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미 아멘 나와 버리면 제가 할 말 없습니다. 우리가 선인과 악인, 착함과 안착함의 구분이 없다면, 이 구분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하나로 뭉쳐서 다룬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기준에서 저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그 기준자체가 하나님한테는 안통하고 그런 쪽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거든 그것은 성경 바깥에서 노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물론 성경바깥의 이야기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망상의 세계에 불과한 겁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창기나 창기 아닌 자나 강도나 강도 아닌 자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자나 안 다니는 자나, 심지어 예수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동일합니다. 이 말은 소용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이걸 다지고 잘 살았나 못 살았나, 못 살았으면 잘 살아야지, 그런 애씀과 노력과 다지고 또 다.지는 그 다짐, 맹세,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것,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나님, 이런 인간 되겠습니다.”하는 용기,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괜히 한 번 움찔 해보는 거예요. 꿈틀, 해보는 겁니다. 뭔가 아무것도 안하자니 인생사는 것이 서글프고 뭔가 내가 움직임이 있고 교회 목사부터 주변 사람들이 신앙 좋다고 할 때 뭔가 위로가 되면서 구원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은 상호속임수에요. 그것은 사기 치는 겁니다. 그 짓에 말려들지 마시고 전도서 9장 2절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착하게 살았나? 복? 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 한 거야, 너. 쓸데없이 인생 하나님을 위해서 산거야.”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하나 안하나 골인지점은 마찬가지인데 뭐 설친다고 복 더 받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출애굽이라고 하거든요. 애굽에서 나왔다 해서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면서 도리어 애굽을 확장시켰어요. 애굽에서 나오게 하면서 본인들은 “하나님, 저 애굽에서 나왔지요? 멸망 받는데서 나왔지요?”라고 우기고 정작 하나님은 애굽이 죽죽 더 늘어진 것으로 보는 겁니다. 



절에 가다가 이제부터 교회 다니기로 작정했으면 “하나님, 저는 절에 다니는 심성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 맞지요?”라고 본인은 생각을 해도 절에 다니던 그 사람 때문에 이제는 교회가 절로 변해버리는 계기로 삼으시는 겁니다. 끊어지지 않고 엿가락처럼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사실은 없던 일이에요. 애굽을 더 확대시키는 일인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이 고생 많은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편히 살고 싶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준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천국 갈사람 손들어봐.” “예” “너 따로 나와. 자, 저쪽은 놔두고 너희들만 천국 보낸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천국 가고 싶은 사람 따로 모아서 천국 보내는 것, 이것은 하등 복잡할 것이 없고 너무나 간편한 구원방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구원할 줄로 생각을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면서 거기에 뭘 하나 같이 동행을 시켰어요. 뭐냐 하면, 어린양을 동행시켰다는 말이지요. 어린양을 집어넣으니까 사람들은 정신이 어디에 팔렸느냐 하면, 이 고생 많은, 저주 많은 애굽에서 따로 벗어나서 내가 천국 간다는데 정신 팔리다 보니까 어린양이 동행하고 따라온다는 그것이 왜 따라오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어이, 어린양! 왜 따라오는데? 저거 왜 따라오지?” KBS2에서 하는 드라마, 저는 그 드라마 본적이 없습니다만 <감격시대>라는 그 드라마를 촬영하는데요, 그게 깡패들 싸우는 내용인데 한창 영화를 찍다 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것이 찍혔어요.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주인공들이 적들과 싸우는 씬을 찍는데 동네 개가 촬영현장에 들어온 거예요. “저 동네 개가 왜 들어왔지?”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내가 구원받고 천국가면 되지 저 어린양이 왜 끼어들었지? 바로 어린양 앞에서 정작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가 어린양의 원수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상상도 못한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어서 구원 받는데 정신이 팔리다보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우리가 예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왜, 아무도 그렇게 가르쳐 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가르쳐 준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 피 간 보듯이 찍어서 그 피 묻히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가르쳤죠. 그 피가 아미노산과 효소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 피가 왜 흘린 줄 압니까? 구원받고자 하는 너 때문에 흘린 피가 예수님의 피에요. 그런데 우리는 정작 그런데 관심이 없고 자기가 구원받는데 어떤 수단으로서 방법으로서 예수의 피를 이용하기만 하면 그걸로 자기로서는 천국 간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주셔서 그 다음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양을 잡게 하는데 이스라엘은 또 오해했어요. 양 잡으면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왜, 양 잡으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양을 잡았으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고 열심히 양을 잡았습니다. 열심히 양 잡았던 그들이 바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언급을 해야 되겠지요. 전도서 9장 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양 잡으나 안 잡으나 선하나 안 선하나 상관없이 똑같다, 차이 없다, 한통속이다, 설쳐도 소용없고 안 설쳐도 소용없다, 우리는 자꾸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잡게 한 것은 양을 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양을 잡은 착한 일을 했다는 그것을 걷어내기 시작한 겁니다. 메주 띄울 때 남는 것이 장이잖아요. 조선간장이죠? 뭔가 위에 뜨는 것을 걷어내고 말간 것을 남기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양을 잡게 하고 양을 잡게 되면 “하나님 보소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양 잡습니다.”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걷어내면 그 밑에, 그것을 다 부정해버리고, 양 잡는 그 행위, 말씀대로 사는 행위마저 죄라고 걷어내면 진짜 남아 있는 진짜 양이 그 이스라엘 밑바닥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이 아니고 그 어린양이 빠져나간 그 곳이 뒤돌아보면 애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면 어린양이 최초로 떠났던 그 자리가 애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도 우리는 이 땅에서 떠날 수 있는 여력과 힘과 재주와 지혜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촬영 장소에 낯선 동네 개 한 마리가 돌아다닐 때 우리는 저게 왜 돌아다니는지를 몰랐지요.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간다고 할 때 그게 무슨 소리인줄 몰랐던 겁니다. 내가 어린양 믿어주면 내가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매일같이 양을 잡으면서도 진짜어린양이 그들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양 잡으라는 지시에 따라서 양을 잡으면 양을 잡으라는 지시에 따랐다는 그 착함이 누적이 되고 마일리지로 쌓이면 그것으로 나는 천국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다 소용없는 것이고 쓸데없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제사행위는 다 쓸데없는 행위입니다. 뭐 예배를 회복하라고요? 하다하다 교회 부흥이 안 되니까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지어내는데 예배를 회복한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죄인데. 예배 회복하지 마세요. 그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냥 사시면서요, 제가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 뜰채로 “그것이 바로 죄였느니라.” 하고 걷어내면 그 밑에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인 되었고 그 죄를 아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신이 존재하는 것과 신이 부활하는 것하고 차이가 납니다. 신이 존재해버리면 신은 죽지도 않고 그냥 옛날 그 신이 그냥 그 신이에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신이 아니고 부활하신 신이에요. 부활하신 신이라는 것은 그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죽은 적이 있는 그분이 죽음을 품고 그 죽음을 적용시키면서 살아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죽은 이유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가,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때문에 죽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겁니다. 그 분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데 왜 자꾸 그 분의 능력 외에 자체적인 능력, 믿는 능력, 소망하는 능력, 사랑하는 능력, 예배 참석하는 능력, 왜 자꾸 자체적인 능력을 따로 키우려고 하고 그것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겁니까? 다 쓰레기 같은 것인데. 그냥 살면 되는데, 그냥 사는 것도 힘들기는 힘들다만, 그냥 사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뭐냐, 이렇게 사는 것도 죄고 내가 이렇게 안 산다고 할지라도 죄가 아닌 방법으로 살 재간과 능력은 우리한테는 아예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죄 아닌 방법을 사는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그냥 편하게들 삽시다, 죄 지으면서. 



의로울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없습니다. 좀 의로웠다 하면 자기 자랑 질이 되니까.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이 그러니까 바꿀 수도 없고, 타고난 속성이 그래요. 자기자랑밖에 못하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이 출애굽 하겠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깜빡 오해했지요. 아, 내가 살던 이 국가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 특정한 애굽이라는 제국에서 나오면 구원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빠져나왔지만 같이 빠져나온 어린양이 왜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피만 페인트칠 하면 되는지 알았어요. 그것도 한두 번 칠하면 되는지 알았어요. 



그 다음에 양 잡으라고 하니까 양 잡으면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피 바르고 양 잡고 멸망당했습니다. 희한하지요. 애굽에서 죽을 인간이 광야에서 죽었어요. 어린양 피 바르고 나와서 광야에서 죽었다 그 말이지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되어버렸어요. 자기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어요. 메뚜기가 뛰어봐야 도로 땅에 떨어지듯이 뛰는 흉내만 냈을 뿐이에요. 구원받는 흉내 냈을 뿐이에요. 팔짝 뛰어봐야 나중에 여력이 떨어지면 맨 그 자리입니다. 없어요. 이스라엘나라는 결국은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해서 멸망당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두어내는 작업, 인간이 행했던 것을 다 거두어내서 그 바닥에 뭐가 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 바닥에 계신 양이 사람으로서 드러날 때, 변모될 때 비로소 모든 실체가, 모든 비밀들이 다 까발려지는 겁니다. ‘아, 인간이란 폴짝 뛴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구나.’ 외부에서 누가 와야 된다는 그 사실, 나는 어떻게 해도, 이래도 저래도 죄밖에 안되는데 누군가 외부에서, 진짜 천국에 사시던 분이 직접 와야 된다는 이 사실에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없어지는 거예요. 괜히 수고했어, 괜히. 괜히 수고했어요. 괜히 수고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수고가 어떤 식으로 되느냐 하면,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신에게 요청을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요청하면 신이 어떤 힌트를 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옛날에 기원전 6-7세기경에 그리스에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종교는 제우스신을 섬겼어요. 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줄 때 어떤 특정 공간, 어떤 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는데 그 지점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에 있어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이렇게 생각해 냈어요. 



제우스신이 세상 양쪽 끝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 보내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요. 양쪽 극단의 지점에서 독수리를 날렸기 때문에 그 독수리가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인데 그 기점이 바로 옴팔로스, 세상의 배꼽, 중심이라는 겁니다. 세상의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이 위에서 수직적으로 신탁을 내리는, 오러클, 신탁을 내리는 지점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냐, 지금의 델포이라는 곳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그 신전의 기둥이 남아 있고 거기 가는 관광객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체의 중심이 배꼽이듯이 그 옴팔로스가 세계의 무게중심이 거기니까 거기에 무녀나 제사장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 앞길을 모르니까 신의 뜻을 알고자 해서 옵니다. 매월 7일에 오라고 해요. 3월 7일, 4월 7일, 이렇게 매달 7일에 오게 합니다. 여기서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이 차이가 나는데 일단 돈 많은 사람이 사업을 한다든지 장가를 가야 한다든지 뭔가 뜻을 모를 때 신의 뜻을 물으러 오는 거지요. “신이시여, 이것을 해야 됩니까?” 물으러 오는 거예요. 그때에 질문하기 이전에 먼저 무녀나 제사장들이 염소에 차가운 물방울을 던집니다. 그러면 염소가 움찔 하게 되면 “아하, 이것은 지금 신께서 당신에게 계시를 주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라고 되고 만약에 차가운 물방울을 던졌음에도 염소가 가만히 있으면 “다음달 7일에 오세요. 신께서 마음 준비가 안 된 모양입니다.”라고 해서 그냥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차가운 물방울을 던져서 염소가 움찔 했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하나밖에 못해요. 예스, 아니면 노에요. “내가 사업을 해도 됩니까???” “된다, 된다, 된다, 안 된다!” 이것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은 지금 건전하고 문제가 없고 신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시니까 뭔가 베풀고 뇌물 바치고 용돈 드리면 신은 마땅히 사랑의 신이니 마땅히 우리에게 제공할 만한 것을 제공해야 되는 사명이 있다고 신과 인간을 규정하는 거예요. 



보세요.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중에서 이스라엘 신은 뭐냐 하면, 뭘 해도 죄가 되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돼요. 그런데 방금 제가 그리스종교, 로마종교, 제우스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신은 그냥 그 자리에 계시고 이젠 질문을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이 해요. “신이시여! 이런 사업을 해도 됩니까??” 하면 부채도사처럼 “된다, 된다, 된다, 된다!(혹은 안 된다!)” 예스, 아니면 노에요. 그러면 예스, 할 때는 무녀가 하얀 콩을 갖고 있다가 그 하얀 콩을 던지면 예스고 검은 콩을 던지면 노라고 하는 거예요. 예스, 아니면 노, 노, 아니면 예스에요. 



물론 이것은 돈 없는 자의 경우고 돈 있는 자는 약간 길어요. 약간 길게 이야기 해줍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리스종교 또는 로마 종교라고 했지만 그리스 로마를 떼버립시다. 종교가 뭡니까? 신은 뭡니까? 인간의 아쉬운 것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그럴 때 우리는 그 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존중해줄 수 있는 마음준비가 되어 있는 것, 바로 그런 사이가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입니다. 그 사람이 천주교를 가든 기독교 가든 절에 가든, 절에 가나 교회 가나 성당 가나, 또 아무데도 안다니면서 보름달을 보고 비나, 뭘 보고 바치나……. 



드라마 시작할 때 5만 원짜리 돼지아가리에 집어넣고 절을 하나 뭘 하나, 묻는 것은 인간이 묻고 거기에 대한 답변은 신이 한다는 식의 그러한 관계, 그게 우리가 여태껏 알았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걸 이미 하나님은 아시고 네가 신을, 나를 찾되 어떤 식으로 찾든 나는 일체 너희들이 찾는 그 자체를 용납 못하겠다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경건티를 내고, ‘내가 착하고 성스럽게 살면 어떤 예언을 해주시고 뭔가 혜택을 베푸는데 남보다 더한 특혜를 주실 것이다, 뭔가 약간의 남이 모르는 특별한 행운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 자체를 가지고 주께서는 “그런 짓 하려거든 아예 오지도 말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우리가 타고난 게 그거예요. “신이시여, 어느 것이 옳은 길입니까? 이게 천국 가는 길입니까?” 이런 거요.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믿겠나이다.” 이런 거요. 그런 인간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죄에 의해서 붕 떠서 있거든요. 뭔가 자장이 있는 곳, 카이스트에서 실험을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해요. 전도체 같은 것 실험할 때 밑에 자석이 있는데 그 위에 붕 떠요. 모노레일인데 자장을 이용해서 붕 떠서 가는 기차도 있잖아요. 그렇게 붕 뜬다고요. 



우리의 자아는 주제파악을 못해서 뭔가 붕 떠 있어요. 그래서 진정 내가 누군가를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이놈의 자아가 내려가지를 않네요. 추락이 안돼요, 추락이. 심지어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희망과 꿈을 가지고 붕 떠서 있다니까요? 7번가의 기적? 교도소 가 있는 주제에 기적을 찾고 있어요. 7번가의 기적, 봤어요? 사람은 항상 매일같이 붕붕 떠서 있어요. QT한다면서 붕붕 떠 있고. 이게 눌러도 눌리지를 않아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는 그 자리에 닿지를 않아요.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 지시고 인간의 갈 수 없는 제일 밑바닥에 계십니다. 계셔서 “네가 이 밑바닥을 모르면 이 밑바닥을 경유해서 접촉하고 올라가지 않으면 천국은 너한테는 (북한 말로) 일 없어요.” 아무 일 없습니다. 잠언서 20장 22절에 보면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너의 돈 떼먹고 도망친 사람을 ‘내가 잡아서 족치겠다.’고 네가 말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러면 내가 네 돈을 갚아주겠다.’가 아니라 너를 구원하겠다.” 너를 출애굽 시키겠다는 거예요. 



네가 잃어버린 그 이상으로 돈을 되돌려 줄게, 가 아니라 네가 이 땅에 사는 사람에서 벗어나 천국에 사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내 돈 떼어먹은 사람 원상복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현실이고 그런 사건을 통해서 너로 하여금 돈 안 받아도 구원받게, 천국에 가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네가 나서면 안 되고 돈 떼먹고 도망치고 돈 떼이고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알면, 그 여호와를 알면 너는 돈 받고 안 받고 상관없이 너는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잠언 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잠언서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책이 아니에요.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 잠언서 24장 1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기분 좋은 이야기죠.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고요, 악인은 재앙으로 넘어진다는 이것만 보면 상당히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그 다음에 무서운 이야기가 나와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이게 인간으로서 가능합니까? 러시아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받을 금메달을 자기가 낚아채서 김연아 은메달 주고 자기가 금메달 땄다고 깃발 들고 까불다가 엎어질 때 우리는 갑자기 즐거워했잖아요. 



그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찰칵, 찍으면서 “그러니까 네가 구원을 못 받는 거야.”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즐거움으로 삽니까? 모든 드라마, 왕가네고 김가네고 간에 모든 것은 나한테 해코지 한자가 망해버렸을 때 오는 쾌감 때문에 끝까지 그 드라마를 본다고요. 드라마에서 선이 이기지 않고 만약 악이 이겨버리면 “진짜 미~춰버리겠네!” 정말 그 드라마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결국 마지막에는 해피엔딩, 마지막에는 이겨야지. 



춘향이가 변 사또 첩으로 들어가서 변 사또 학대나 받는 것으로 끝나면 춘향전 누가 봅니까? 아무도 안 봐요. 이 도령 암행어사 하는데 이 도령의 암행어사가 나중에 가짜로 드러난다면 춘향전 누가 봅니까? 결국 선이 이기고 정의가 승리한다, 그렇게 하는데 주님은 밑바닥입니다, 밑바닥. 승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주님은 아무도 가지 않는 제일 패배당한 자리에서 너를 기다립니다. 빨리 네가 추락하라고. 네가 네 선에서 생각하는 네 원수, 네 원수를 대신 하나님이 갚아 달라고 외칠 때 “내가 보기에는 네가 원수다, 네가! 나는 너, 원수를 심판할거야. 네가 심판을 요구하는 그 원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요구하는 너를 심판할거야.” 



옴팔로스, 신탁, 그런 식으로 신을 믿지 맙시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절에 더 무서워요.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네가 원수가 못되니까 기분 좋지? 기분 좋지? 기분 좋아? 그러면 네가 한 번 당해볼래?”라는 식으로 나올 때 아까 봤던 전도서 9장 2절,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 해코지 하는 사람이 망하기를 바랐는데 망하기는커녕 나한테 해코지 하는 사람은 더 잘되고 그가 망하기를 기다리는 나와 내 집안은 갈수록 더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선이라고 하는 것이 선이 아니었고 내가 악이라고 하는 것이 악이 아니었고,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고, 내가 선인지 악인지 구분도 안 되는 세상, 뭔가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 그것을 판단할 기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 형편이 그런 형편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동행시켜 놓고 동행했던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가 어린양을 감춰놓고 뚜껑처럼 이스라엘 자체가 날라 가 버릴 때 외롭게 남은 것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만 남아있지요. 



그 어린양에서부터 이제 우리가 그리던 천국이 나옵니다. 부활의 세계가 나오고 그 어린양에서 인간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천국이 거기서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던 그 멸망의 작업이 이제는 제자에게 덮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이런 논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어린아이를 모독하려거든 차리라 연자 맷돌 짊어지고 바닷물에 풍덩 빠져서 자살해라. 그게 네가 가야 될 미래상”이라는 겁니다. 일단 어른이 되고나면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법은 없어요. 그 뒤에 마태복음 2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어머니가 왔어요. 옛날에도 치마 바람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20절, 21절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생각 말고 내가 마시는 그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결국에는 너희가 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지옥 보내야 될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속성이라는 겁니다. 거기서 출애굽되어야 돼요. 그게바로 애굽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애굽도 이젠 의미 없어요. 진짜 애굽은 어디 있느냐, 애굽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퍼지면서 온 세상 전부가 애굽입니다. 애굽에서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이것은 국가 문제가 아니고 개인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고 이 제자들에게 했던 그 일을 이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각 개인에게 이야기합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 자체가 바로 네가 너에게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네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 네 원수거든요. 네가 생각하는 원수.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유발시키는 것은 유발시킴으로서 “주님이여, 저 원수는 나의 원수입니다.” 하는 그 자체, 그 자체에서 출애굽이 돼야 돼요. 우리는 자신을 건전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고,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고,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누구나 스스로 자부합니다. 거기서 유발되는 원수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개인적인, 사적인 원수에요. 사적인 원수에 왜 하나님을 개입합니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원수에요. 따라서 그동안 우리는 구원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당연히 구원받을 것처럼 생각한 그 자체가 당연히 잘못된, 주님의 원수다운 잘못된 엉터리 구원이었어요. 



정말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주의 원수임을 자인을 해줘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가? 부끄럽게 살아야지요. 그게 뭐냐, 바로 20절에 나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갑자기 왜 숯불이 나옵니까? 연탄가스 피울 일 있습니까? 숯 불 머리에 얹어보세요. 이 냄새가 무취고 무색이지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서 죽어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니고요. 



옛날 이집트나 이스라엘에 보게 되면 여자 분들이 가정에서 불씨를 꺼트리는 일이 생기면 “살림살이하고는!” 하고 남들이 욕을 했어요. “어떻게 자기 일에 그렇게 게으른가? 어떻게 불씨 하나를 유지 못하는가?” 하면서 지적했던 풍습이 있어요. 불씨를 꺼트리고 이웃집에 가서는 “불씨를 꺼트려서 밥도 못해먹고 있습니다. 불씨 좀 주세요.”라고 한다면 “아이고, 아줌마! 살림 살아요, 안 살아요? 불씨 여기 있소.” 하면 그냥 가져가면 안돼요. “저는 그저 내 일도 못하는 어설픈 주부입니다.” 하면서 불씨를 머리에 이고 가야 되는 거예요. 마치 오줌싸개가 키 뒤집어쓰고 소금 얻으러 다니면서 “나는 아직도 오줌도 못 가리는 어린애입니다.”라는 표를 내듯이 “나는 불씨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여인네입니다.” 할 때 사람들이 전부 다 “아이고, 시집 온지 몇 년째인데 아직도 불씨를 꺼트리지?” 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보시기에 자신의 원수, 자신의 사적인 원수 같은 것 가지고 하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참 철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입장만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체입장을 모르는 부끄러운 짓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 원수만 생각한다면. 나의 원수라는 것, 그것은 붕, 떠 있는 상태, 허풍과 허세와 허망한 욕망에 떠 있을 때는 나를 해코지 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시면 뭐합니까? 신이면 뭐합니까? 저 인간을 쳐부숴줘야 사랑의 하나님이죠.” 우리는 이런 사적인 원한과 원수, 한 맺힘,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 부흥된 거예요. 그러니 이게 절인지 교회인지, 불교인지 뭔지 분간도 안돼요. 



그거 뜰채로 다 걷어내십니다. “네가 내 원수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알 때 우리는 부끄러운 주부처럼 십자가 머리에 이고 “주여, 나는 나만 챙기고 나만 생각했습니다.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십자가 품에 안고 백날 내 원수는 못되고 나만 잘되기를, 그래서 그것을 사는 보람과 재미로 느끼면서 살아왔던 이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일 때 그 모습이 바로 걸어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시 받고 신탁 받아서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살아가는 그 자체, 어설프기 짝이 없고 나밖에 모르는 그것마저 주께서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저게 바로 죄인의 모습”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계시로 만들고 계시로 쓰이게 하신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 너무나 고맙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죄지은 것 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똑같다고 했는데 왜 유난히도 나만 잘 살아야 되고 내 가족, 내 자식만 잘 되어야 하고 내 남편만 미남이어야 되고 내 아내는 안 늙어야 되고 수술 잘 되어야 되고, 모든 것이 전부 다 나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으로 철저하게 평생토록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나는 죄인이군요.” 십자가 앞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받았기에 성경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수가 뭐라는 것을 이렇게 파악케 해주시니 내가 걸어가는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신탁입니다.”라는 것을 증거케 하는 그 기쁨, 즐거움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이용해서 나 잘되기를 원했는데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말려들고 끌려들어가서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 고마움만 드러내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평생 애쓰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 다 버리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주의 계시인 것을 감사함으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