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74강-은사(롬12;6-13)이근호140302

아빠와 함께 2014. 3. 2. 16:43

은사(로마서 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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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02 13:22 
은 사

2014년 3월 2일                           본문 말씀: 로마서 12:6-13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을 받은 자를 통해서 성령의 활동이 실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등장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리를 제쳐두고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 그것으로서 성령받은 자의 진면목이라고 우길 수는 없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말씀처럼, 자신은 행함으로서 참된 신앙인을 증명하고자 오늘 말씀을 준수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나 아니면 잘못된 일이냐를 다져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어디까지나 ‘성령님의 은사’ 혹은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하여 야기된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이 ‘성령’이라는 조건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인위적으로 결합되는 조건’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군대생활을 들어봅시다. “앞으로 5분 후에 전원 완전군장해서 연병장에 집합! 알아들었습니까?” 그러면 병들은 말합니다. “알아들었습니다!” 도대체 뭘 알아들었다는 말입니까?

군대 명령자는 지시받은 쪽의 성품이나 마음가짐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5분 후에 완전군장하고 집합된 그 결과만이 따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군대는 어떻게 집합되고 어떻게 해체되든지 간데 천국의 은사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14-1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주말에는 반드시 짜파게티를 해먹자. 내가 요리사가 될것이다”고 아버지가 나섭니다. 이게 은사입니까? 아니면 아버지가 주도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견고히하고자 나서는 봉사입니까? 봉사한다고 해서 은사가 아닙니다. 은사란 필히 그 은사가 나온 출발지로 환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와중에서 온갖 인위적인 요소들은 모두 발각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인위적 작업을 실패케 하는 방식으로 성령의 은사의 가치를 따로 분류시키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모든 태어날 때부터 정신적으로 문제있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정신분열증이요 다른 하나는 강박신경증이요 다른 하나는 도착증(倒錯症)입니다. 신에 대해서 적용하면 이러합니다. 정신(분열)병자는, “신이 없어 너무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릅니다. 마치 물에 조금씩 빠져들어가면서 “내 근처에는 물이 전혀 없어 너무 행복하다”고 외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서히 죽음의 모래톱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왜 죽는지, 이렇게 죽을 것 같으면 왜 태어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저 자기 몸만 만져지니 이것으로 너무 행복하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강박신경증세는, 신이 지시하는 것을 바짝 따라 다 순종하고 실행에 옮기므로서 자기에게 지시하는 그 지시의 권위능력마저 잠식하려 드는 사람입니다.

즉 신의 지시를 최선을 다해 지키므로서 자기에게 지시내리는 그 지시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려고 합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지적질 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과도한 말씀 순종으로, 지시자의 영역까지 정복 합류하려고 덤비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신을 따로 만들어놓고 그 신과 노닥거리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겁니다.

신과 친구사이가 되고 막연한 사이가 되어, 신에게 할 도리를 다 해주되, 나머지 자기 영역에서 어떻게 살든지 관여하지 않는, 서로의 영역이 존중되는 것으로 신을 다루고 조롱내지는 희롱하듯이 대합니다. 이 변태적 성향은 결국 자신이 요령께 해놓은 업적과 실적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탄하면서 거기서 행복에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생활고로 인하여 세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서 일어났습니다. 가장은 일찍 죽고, 과년한 장녀(35살)은 당뇨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그녀의 여동생(32살)은 아르바이트 하면서 언니를 돌봐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월 120만원을 받았지만 얼마전에 넘어져 그것마저 소득이 사라진 형편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현실을 비관하다가 동반 자실하고 말았습니다. 인생 실패입니다.

또 다른 경우의 실패도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아내의 고문당하는 것이 가슴 아파 아내로 하여금 일찍 처형당하도록 변질한 남편이 중국으로 넘어가 마약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어느날 불량배에서 얻어맞아 넘어지면서 구정물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고, 거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너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서 지하교회 교인들을 다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거라”는 겁니다. 아내를 일찍 죽게 만든 그 죄책감을 갚은 기회라고 여기고 북조선에 들어온 사람은 온 지하교인들을 도강(두만강)하여 남한으로 갈 계획을 실행하지만 교인들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로 인하여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모두 처형됩니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것도 실패입니다. 과연 우리는 둘 중의 어느 실패를 싫어할까요? 세 번째 실패를 해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장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은사를 통해서 우리 육신의 실패를 유도하십니다. 즉 이미 용서받았기에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케 하시는 겁니다.

육신적인 야망과 포부와 욕심은 모두 자기가 살기를 원하고, 이왕 사는 것,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런 육신은 ‘나의 것’이라는 범주를 확고히 다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에 나오는 성령받은 사람들의 은사 작용은 이런 ‘나의 것’이라는 범주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7-10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4:12-13에 보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 근하여 고생하는 일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밤새 평안하다면 하나님의 주신 은사요 기적입니다.

깜박깜빡 점멸하는 등처럼, 우리는 이 지상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서 다루지면서 주님께서는 이런 은사자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공로가 오직 주님께만 있도록 조치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의 것, 나의 행복을 다치지 말기를 원하지말고, 이미 용서받은 자로서 다루어지는 육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2:6-1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하늘로부터 뭔가 받은 것이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성도는 뭔가 받은 것이 있는데 그 받은 결과가 이런 식으로, 방금 읽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거지요. 부지런해야 되고, 서로 긍휼을 베풀어야 되고,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되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존경받고 난 뒤에 하지 말고 먼저 존경하고, 먼저 우애하고,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고, 주를 섬기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님 대접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 뭔가 받은 것이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뭘 받았는가, 보니까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그 조건 말고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방금 읽었던 본문을 인위적으로, 인간적인 자비심, 양심, 타고난 성품, 이런 것을 총동원해서 만들어낸다면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여기서 일어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서 이렇게 하는 것과 성령 받지 않고 자신의 선한 성품, 착한 성품을 총동원해서 이런 단체를 만들었을 때, 그것은 가짜거든요, 이 가짜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질문을 잘못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앞에 있는 성령의 은사, 하늘로부터 뭔가 받았다는 그것은 없다고 치고 오늘 읽었던 6절에서 13절 말씀을 눈으로 딱 봤다고 합시다. 이것 하면 되잖아요. 성령 안 받아도 이것을 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이런 결과만 나온다면 성령을 받고 이것 하나 성령과 상관없이 이것을 하나 차이점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하늘로부터 뭔가 받았다는 그 골치 아픈 이야기, 그것은 잊어도 지금 방금 읽은 그 대목, 부지런히 교회 봉사하고 부지런히 서로 섬기고 서로 존경하게 되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누가 뭐래도 성령 받았다고 확정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않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불확실 할 경우에는 방금 읽었던 본문을 교회에서 그대로 해 보는 거예요. 해 보게 되면 누가 와서 “너 성령 받았나?” 하고 물으면 “너는 성령 받은 것 자랑하지? 나는 지금 실천에 옮기고 있는 이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고 있어. 너는 말로만, 입술로만 하지 이런 것을 내놓지 않잖아. 하지만 그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나는 이런 행함으로 믿음을 제공했느니 내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맞다.”고 우길 때 그 말이 맞습니까? 그 판정을 좋게 내려줘야 돼요?
 


성령을 생각지 않고 행해버리면 그것이 전부 인위적인 일이 됩니다. 인위적인 일이 뭐냐 하는 것, 하나의 예를 들면 알 수 있어요. 군대생활에서 지휘관이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들은 5분 내에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한다. 알겠나!” 해요. 다, 나, 까, 로 해야 돼요. “알겠습니다!” 하지요. 알기는 뭘 아는데? 그래서 그들이 완전군장을 해서 연병장에 집합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성령 받은 거예요, 아니면 인위적인 겁니까? 완전군장을 꾸려서 5분 내로 연병장에 집합 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네가 알겠느냐, 라고 지휘관이 말했고 병사들은 알겠습니다, 라고 했단 말이죠.



뭘 아는데? 알기는 뭘 알아요. 그들이 5분 내로 완전군장을 해서 연병장에 다 집합했습니다. 집합하면서 마음속으로 ‘좀 쉬려고 하니 쉬지도 못하게 하네. 제대하고 보자. 너는 죽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모일수도 있거든요.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까? 시키는 대로 하지요. 했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 마음속까지 그 지휘관의 속사정을 알 수가 없거든요. 지휘관이 어제 부부싸움을 해서 성질이 나서 졸병들 괴롭히는 것으로 풀겠다는 그 속마음을 난데없이 집합하는 병사들은 알 수가 없지요.



인위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겉모습은 비슷한데 속마음이 일치가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흉내는 내지요. 집합은 합니다.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속으로 구시렁거리기나 하지. ‘제대하고 보자. 내가 다 알아놨어. 나는 네 형하고 친구야. 나중에 보자.’ 이런 식으로 하고 있으면 완전군장을 하고서 모인 그 모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 빼놓고 이걸 교회에서 부지런히 하면 이걸 성령의 은사라고 아주 칭찬한다고 난리가 나요. 역시 우리교회도 성령 은사 받은 사람이 왔구나, 하고. 하지만 이것이 5분 내에 완전군장하고 연병장에 집합하는 것과 다른 것이 뭐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흉내만 낼 뿐이지요. 성령 받은 것과 인위적인 것이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은사의 분량, 하나님의 선물이죠, 선물을 받은 사람과 선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시키고 하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똑같이 행동을 유사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적예배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볼 때 이 본문의 취지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걸 째는 것, 인위적인 것과 성령 받은 사람을 양쪽으로 찢어놓고 위해서 이 본문 줬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답입니다. 이 본문 주신 것은 네가 하는 행동들이 인위적인지 정말 성령이 주신 은사로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어렵지 않지요?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유명한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분류시키는데 네가 하나님의 분류자체를 그렇게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 여기 은사가 나오는데 이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은 다 위로부터 온다고 했어요. 위로부터 온다. 위로부터 온 것도 없으면서, 받은 것도 없으면서 로마서 12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헤헤, 이건 우리가 얼마든지 할 수 있겠네. 인정으로서, 혹은 우정으로서 이걸 할 수 있는 일이다. 인정으로, 또는 우정으로 할 수 있다. 나는 정 빼놓으면 시체야. 나는 정 많은 사람이니 이대로 살 거야.’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분류합니다. 단호하게 그것을 째버려요. “어디서 가짜가 천국을!” 하고 이걸 분리시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전체를 보게 되면 분명히 하늘에서 받은 은사가 따로 있고 그 은사는 이 세상에 있는 인위적인 모든 것이 욕심이며 마귀로부터 왔으며 죄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그런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인위적으로 하는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줘서 그로 인하여 성령 받은 사람, 성령 받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러한 인간들의 세상 모든 일에 대한, 인간에서 하늘로 가는, 신을 찾는 모든 실패에 대해서 현대 정신분석에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눕니다. 현대정신분석학에서는 병리적인 것, 병자와 정상적인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요. 모든 인간을 전부 다 정신병 환자로 간주합니다. 정신병 환자를 셋으로 분류해요. 흔히 말하는 정신병, 정신분열증. 그 다음에 강박증, 또는 강박신경증세, 그것을 신경성이라 하는데 그냥 강박신경증, 히스테리 같은 것. 또 하나는 도착증이라는 것이 있어요. 쉽게 말해서 변태입니다.
 


마네킹의 다리를 보면서도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변태 같은 것, 그 성적변태가 인간의 정신까지 다 파급이 되거든요. 인간을 이렇게 세 종류로 나누는데 신을 찾는 행위도 똑같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정신분열증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이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이 땅에 신이 없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진화론에서는 신이 없어요. 과학에서는 신이 없거든요. 천문학에 신이 없고 모든 학문에 신이 없습니다. 신이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종류가 있느냐 하면, 신을 아예 생각하지 않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이 사람은 자기가 물에 조금씩 빠져가면서도 나에게는 물이 없다고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사람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죽음으로 빠져가고 있으면서도 신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신이 없어서 행복하다는 것인데 이게 정신분열증이에요. 두 번째가 강박신경증인데, 신을 믿는데 신이 시키는 대로 다 따라가는 거예요. 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항상 어떤 행동을 할 때 신을 늘 의식해서 “하나님이여, 이만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계속 따라 붙이는 겁니다.
 


가정도 그렇고 군의 조교가 뭘 시키면 시키는 대로 오버해서 더 깔끔하게 해요. 그렇게 해서 조교가 나에게 지시하는 것이 의미 없게 만들어서 조교의 정신세계마저 다스리고 정복해가는 쪽으로 계속 추적하는 겁니다. 집의 어른이 뭘 이야기하면 오버해서 시킨 것보다 더 깔끔하게 열심히 해버려요. 그래서 자기한테 지시하는 그 권위자, 어른의 자리를 우습게 만들고 그것마저 결국 점령하겠다는 집착과 집념이 강한 사람, 강박증이에요. 히스테리 같아요. 지하철 타고 나서는 손을 열두 번도 더 씻는 사람 있잖아요. 병균 묻었다고.



누가 나에게 명령을 하게 되면 그 명령이 꼴사납고 더러워서 그 사람이 명령한 것 이상으로 해 줘서 더 이상 명령을 못하게 만드는, 그래서 목사가 뭐라고 하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면 기어이 그 말씀을 다 해내고 지켜내는 거예요. 누가 자기보고 믿음 없다는 소리 일체 못하도록, 입을 아예 닫아 버리게 했어요. ‘누가 감히 나를 지적 질을 해? 이것은 내가 살아 있는 이상은 용납이 안 돼.’ 그게 바로 강박신경증이에요.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고 하나님을 따라잡았다는 그 점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계속해서 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거예요.
 


‘네가 어디까지 신인지 한 번 보자. 지시하는 네가 대단한지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내가 대단한 존재인지 나하고 신하고 한 바탕 붙어보자.’는 겁니다. 아주 지독해요. 갑자기 침묵이 지금 흐르고 있는데, 두 경우 다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들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세 번째 도착증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은 없는데 신을 자기가 만들어요. 만들어서 주일날만 찾아오고 그 다음날은 신을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을 희롱하고 갖고 노는 거예요. 신에게 헌금 주면서 “신이시여, 내가 십일조를 하니까 기분 좋지? 기분 좋지? 나라서 챙겨주는 거야, 나라서. 내가 네 것 챙겨줬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신을 이렇게 따로 만들어놓고 신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겁니다. 집에서 개 한 마리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예쁜 신을 하나 키우는 거예요. 먹을 사료주면서 자기는 자기 맘대로 살고, 그리고 신은 내 일에 절대로 간섭하면 안 되고. 이게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되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 관찰자로 남는 거예요. 신의 말씀 속에 뛰어 들고, 제자들이 순교하고, 선지자가 고생했다고 하면 그게 진짜 내 경험이 될까봐서 겁을 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연극무대에 올려놓고 자기는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나 하고 나는 그것을 존중해서 올려주고 나는 그 경험이 되지 않는 곳으로 도피를 해서 찬양할 준비하고 감사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하이고, 고맙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진짜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심이 넘칩니다. 나 같은 못난 존재를 사랑해주시니, 구원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정도면 되었지요? 내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니까 간섭은 하지 마세요.”
 


첫 번째는 신이 없어 행복하고 두 번째는 나는 시시한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신의 말씀과 상대해서 내가 어느 정도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 신을 따라잡는데서 행복을 느끼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취미생활 하듯이 옆에 두고 하나님도 조금 다루고 대부분은 자기 즐거움과 자기만족에 탐닉하면서 하나님마저 갖고 노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 이 세상에는 이 세 가지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교회도 이 세 가지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빠져나가 보세요. 빠져나갈 재간 없지요?
 


성경이 여기 있다. 그리고 성경을 봤다. 성경이 여기 있고 성경을 봤다고 해도 우리한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 자체가 그 셋 중의 하나인데. 어떤 때는 첫 번째의 그 정신분열증이 될 수 있고 어떤 때는 두 번째인 신경증이 될 수 있고 또 도착증, 변태가 될 수 있고 어떤 때는 두 개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세 가지 다 한꺼번에 튀어나올 때도 있는 형편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 봤다, 읽었다, 실천하려고 애쓴다.’ 이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드는 방식으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이걸 실패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용서하되 이미 용서받았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기에 내 육신의 행복과 욕망도 같이 챙겨 주리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가 아니에요.



성령이 어디를 통해서 오느냐, 십자가를 통해서 오거든요. 십자가를 통해서 올 때 하나님이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고난 없이는 부활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고통을 우회해서 그걸 거치지 않고 자기육신도 편하게 챙기면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것, 그것은 인위적인 거예요. 그것은 주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입니다. 사실은 살아 있는 인간의 사후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이 땅, 이생의 무한한 연속을 가지고 사람들은 천국이니 지옥이니 죽고 난 뒤라고 하는데 진정한 사후라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후라는 것은 경험될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는 말하고 싶다, 이제는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라 하는 것은 내 죽음 이후의 일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나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어떤 현상이냐 하면,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살게 되었을 때 그게 바로 은사라는 겁니다. 나는 내 목숨보다 고귀한 것이 내 안에 쳐들어왔다는 거예요.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이. 목숨을 바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갖다 버려도, 버리나 안 버리나 내 목숨보다 귀한 것.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하는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처럼 은사라 하는 것은 내 허락도 없이 난데없이, 내 행복이라는 요소도 없이 그냥 쳐들어오고 침투한 거예요. 침범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육신도 만만치 않아서 육신은 자신의 행복을 노립니다.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신을 따라잡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신을 믿지만 신은 신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노는 것이 행복할까? 항상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내가 행복하게 살아 있는 것, 이것이 육신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오기에 항상 이 육신이 용서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너를 용서하되 절대로 네 육신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육신이 내 뜻대로 되는 것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실패케 하는 거예요.
 


정신병, 두 번째는 신경증,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교회에서 소위 성화 론이라는 것, 그게 강박증이거든요. 세 번째는 도착증, 건성으로, 취미로 교회 다니는 것. 실제로는 자기 몸뚱아리가 더 좋으면서 주님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해 대는 것, 이런 도착증. 이 세 가지는 몽땅 다 실패로 끝나야 되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실패담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실패담은 정신병, 신이 없다고 여길 때 인간에게 오는 실패가 요 근래 생겼어요. 제가 목요일에 한 달에 두 번씩 가는 가락교회가 송파구에 있어요. 송파구에 가면 우리 공부하는 곳이 석촌동과 가까워요. 아주 못사는 동네에요.
 


석촌동에서 세 모녀가 자살했습니다. 아버지가 병들어서 죽고 난 뒤에 어머니가 두 자녀를 돌보는데 큰 자녀는 서른다섯 살, 둘째는 서른두 살, 60된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하는데 월 120만원 받거든요. 120만 원 이상 받게 되면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수령대상에서 배제가 돼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넘어져서 일을 못하게 되었어요. 서른다섯 살짜리 딸은 뭐하느냐? 이 딸은 당뇨에 걸려서 계속 누가 챙겨줘야 되고 서른 두 살짜리 동생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언니 수발든다고 알바를 그만뒀어요. 그동안 알바 해서 보태면서 살았는데 그것도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원래 시에서는 가장이 죽는다든지 실직을 했을 경우, 두 번째는 가장이 중병이 들었을 때, 세 번째로 주택이 불나버렸을 때는 저소득층일 경우 신고하게 되면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모녀는 그걸 몰랐지요. 죽고 난 뒤에 집 주인이 가보니까 유서 써놓고 봉투에 70만원밖에 없습니다, 해놓고 소주병도 와르르 쏟아졌는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소주나 마시면서 매일 그렇게 살았겠습니까? 이것은 실패에요. 인생 실패입니다. ‘신이 어디 있느냐? 나는 신이 있다는 것을 저주한다.’ 이런 쪽으로 소주를 죽기 전에 많이 먹은 모양이지요.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어.’ 이것이 실패거든요. 그러면 또 하나의 실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주 철호라는 사람이 나와요. 2009년도 회령 정치범 수용소에 아내와 함께 들어갔어요. 아내는 예수 믿고 자기는 건성으로 믿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아내에 대한 고문이 너무 심하니까 아내를 밀고해서 차라리 아내를 일찍 죽게 만들고 그 공로로 자신은 수용소에서 나와서 중국으로 가서 마약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 와중에 깡패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주저앉으면서 구정물을 봤는데 그 구정물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봤고 거기서 예수님 음성이 들렸고 거기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너는 다시 두만강 건너가서 지하교인들을 다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라.”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들이 성공했을까요? 남조선 구경도 못하고 다 죽었어요. 실패입니다. 자기가 마약해서 돈 번 것 가지고 다 건져내려고 하는 순간 그 지하교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생각, 이익, 자기 사랑하는 여자, 이런 개인 사정들이 다 얽혀서 그만 두만강 건넌다는 계획이 누설되어서 자기도 잡혀죽고 온 사람들이 잡혀서 다 죽었어요. 실패에요. 남조선으로 가야 되는데, 구정물에 비추인 예수님의 얼굴과 그 말씀을 실천에 못 옮겼습니다. 실패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할게요. 여러분, 이 두 가지 실패 중에 어느 실패를 하렵니까? 고문 받으면서 그 주인공이 하는 말이 “나는 사탄을 봤다.” 하는 겁니다. 하나는 또 변절을 해서 외국인들이 평양에 오게 되면 관광용으로 만들어놓은 교회가 평양 칠곡 교회인데 거기서 간증한다고 해서 “우리 어버이수령님 덕분에 이렇게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짓 하고 있다가 주인공한테 걸려서 화장실에 가서 실컷 얻어터지게 되지요. 죽은 주인공의 아내가 순교했다고 하니까 주인공이 화를 내면서 “순교한 것이 아니고 내가 빨리 죽으라고 밀고했어. 고문 받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그랬다. 순교가 어디 있어?” 이렇게 하다가 자기 자신도 마지막에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죽어 가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죽었다는 그 대목.



이 모든 것이 실패한 겁니다. 첫 번째 실패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 하나님이 있었다면 내 딸도 죽지 않고 남편도 아프지 않아서 이렇게 자살까지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증거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없다는 이유는 내가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써도 나를 살려주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확실하게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병이에요. 그 사람이 60이었지만 나중에 90이 되어도 죽어요. 나중에 결국 죽는데 미리 앞당겨서 죽은 거예요. 죽으면서 나중에 할 고백을 미리 한 겁니다. “신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실패했다고 느끼지요? 두 번째는 뭐냐, 신의 계시를 받았어요. 흙탕물 속에서 주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러면 이번 일은 확실하게 성공이 돼야 돼요. 두만강 건너서 남조선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실패했어요. 뭔가 신에 대한 집착, 헌신과 그 모든 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는 이겁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를 가지고 “여러분, 교회라는 것이 뭐냐?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뭐냐, 은사를 나누는 겁니다. 그러면 은사는 뭐냐? 은사라는 것은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렇게 할 때 참된 교회입니다.”라는 것이 세 번째 실패에요.
 


그것은 마네킹에 스타킹 신은 다리를 보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자기가 세운 교회를 보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목회 성공했다는 어떤 쾌감, 내가 돈 낸 그 교회가 보란 듯이 교인수가 늘어났다, 다른 말로 회원 수가 늘어났다, 예배당을 새로 증축했다, 이것은 변태고 도착증세입니다. 여자의 스타킹을 보거나 만지면서 어떤 정욕을 느끼는 것처럼 예배당에 와서 자기가 헌금한 것이나 자기가 어떤 일을 한 것을 보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거예요. 이것은 왕창 대 실패에요.
 


우리 교회는 어떤 면에서 진짜 성령공동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피아노 해 온 사람이 교회 안 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모르지요? 울산의 어떤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커튼 한 분, 몇 년 나왔어요. 저 유아 실에 보일러 놓은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이 엠프 한 사람은 돌아가셨어요. 주께서 도착 증세를 방지하시는 것 같아요. 도착 증세를 방지하든지 아니면 아예 헌신을 안 하게 하든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뭐냐? 하늘에서 오신 은사는 뭐냐 하면 바로 흔적입니다. 징후에요. 잠시잠간 반짝이는 점멸등 같은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뒤 유아실에 있던 형광등 같은 것. 반짝, 반짝, 반짝, 반짝……, 성질도 나하고 똑같아요. 반짝, 반짝, 반짝, 반짝! 켜는 것도 아니고 끄는 것도 아닌 것처럼 성령 받고 은사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반짝 등장했다고 곧장 사라지는 것, 이게 바로 인생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의 모든 활동은 내가 이 땅에서 실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하나님에게 그때그때마다 점멸하는 형광등처럼 쓰일 뿐임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병, 도착증, 그리고 신경증, 이 신경증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떤 범위가 있어요. 이것 넘으면 악이고 이것 넘으면 선이고 이것 넘으면 행복이고 이것 넘으면 불행하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여전히 계속해서 악마의 무서운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여기까지가 바로 나의 영역이니까 주님께서 지켜주옵소서.”라고 자기의 범위를 따로 갖고 있다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사는 범위가 없어요. 고린도후서 4장 7절부터 보면 성령 받은 은사를 이렇게 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라는 범위가 없다는 말입니다. 은사란,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거니까 주께서는 다른 것은 다 파멸시켜도 이것만은 부수면 안 됩니다.” 하는 이런 것이 없어요.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진짜 성령 주시는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의 대결장으로서 이 로마서 12장 6절에서 13절을 사용하시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너 나하고 한 번 붙어보자. 네가 도착 증세인지, 아니면 신경증 환자인지, 아니면 정신병 환자인지 내가 다 까발릴 거야.” 뭐 하나 줬다고 해서 그것을 떠벌리고 자랑 질을 하고, ‘나 아니면 교회 안 돌아가게 되어 있어.’ 라고 하는 그게 도착 증세인지 정신병인지 한 번 보자는 거예요. 사이코패스인지. 속이 시원하네.



복음 근처에 사이코 패스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만 날 반지나 돌리고 있고. 이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그 이야기는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오는 장면이고요. 내가 보기에 복음 자체가 정신병을 유도하는 것 같아요. 가장 좋은 것은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 땅에서 자기를 빛낼 실적과 성과를 목사 앞에 내놓고 목사 앞에서 “내가 이 정도 하니 성령 받은 사람이 맞지요?” 하고 숙제검사를 맡는 식으로 하는 교회, 그게 정신병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빌립보서 4장 12,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게 뭐냐, 나의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는 “왜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합니까?”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권리가 나에게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점멸기니까. 그때그때 잠간잠간 반짝반짝 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육신으로 돌아오면 나는 죄인이고, 그런 입장이거든요.



아까 예배 전에 우리 권사님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권사님이 목 디스크가 와서 아프다는 거예요. 제 아내도 그 소리를 받아서 나도 오른쪽 팔이 아프다고 해요. 나도 아픕니다, 지금. 오십견으로 아픈데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창세기 3장을 보세요. 우리가 이 땅에 올 때 고생 하라고 온 거예요. 그러면 아픈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면 뭐가 정상이 아니냐, 안 아프고 고생 안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에요. 따라서 오른 손이 아픈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돼요. 왼손이 편안함을 오른손이 몰라야 됩니다.



우리가 늘 편하게 된다면 천국은 뭐한다고 갑니까? 우리에게 죽음이 왜 오는 거예요? 죽으라고 죽이는 거예요.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사후를 봐요. 내가 죽을 때. 성령의 은사는 미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 육신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정신병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남들이 볼 때 “성령의 은사를 받았네요.”라는 소리로 그들로 하여금 고백하도록 하는 거예요.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인데 천하의 괴수가 하는 그 짓을 보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주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는군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께 영광돌리도록 우리를 완전히 파멸케 하는, 맨 날 우리를 망하는 인간으로 조지는 겁니다.
 


북한의 지하교회나 송파구 석촌동의 자살한 세 모녀나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고 살고자 했기에 그렇고 그 사는 것은 나만의 범위, 나의 범주, 이것은 하나님 아니라 누가 와도 이것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니까 이 행복의 원천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것입니다. 사탄을 봤다고요? 그게 바로 네가 사탄이에요. 날 위해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성경 어디에 그런 것이 있어요? 하나님을 이용하지 맙시다. 주님은 절대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처음에 했듯이 분류를 하는 거예요. 인위적인 것과 진짜 성령 받아서 되는 것을 분류할 때 그 분류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 안에 들어와서 제발 좀 실패한 자라는 것을 자인하라는 겁니다.
 


뭘 해도 성과, 뭘 해도 실적, 예수 50년 믿었는데 얻은 게 뭐가 있나, 맨 날 그것만, 노동의 대가만 계산하고 있고. 성령의 은사 안에서는 주님이 노동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노동에 그냥 질질 끌려서 하게 되는 겁니다. 섬기는 일이나 위로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과 성실히 베푸는 것도 전부 다 그 일속에서 내가 실패자인데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바로 주님의 강력한 십자가의 자비하심이 나를 이렇게 망가지도록 하시면서 성령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도록 사용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흔적으로서, 하나의 징후나 징조로서, 하나의 피어오르는 뭔가 징후로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항상 뭔가 하고 난 뒤에는 잊어버리세요. 렛 잇고, 렛 잇고, 잊어버리세요. 그런 게 있습니다. 항상 돌아서서 잊어버리세요. 주께서 주신 그 흔적, 모든 것은 주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오직 주님만 높아지게 하는 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일을 해도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이러한 정신병적 증세, 육신이기에 필연적인 속성인데 우리가 부정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저 나 같은 인간을 지금도 매몰차게 사용해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