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 73강-한 지체(롬12;3-5)이근호140223

아빠와 함께 2014. 2. 23. 14:55

2014-02-23 12:41:42 조회 : 17         
   한 지체 140223 이름 : 이근호   

한 지체(로마서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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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23 13:27 
한 지체

2014년 2월 23일                            본문 말씀: 로마서 12:3-5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누가 방해할까요? 바로 인간들이 방해합니다. 인간들은 모든 생각들은 ‘나에게 몸이 있다는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항상 자기 몸에 유리하도록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몸 빼놓고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을 보세요. 예수님 몸에 무슨 특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짊어진 그 죄로 인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은 버림받는 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흘 만에 부활의 몸으로 살리심을 받게 됩니다.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맺어진 그 약속대로 진행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죽으신 아드님을 죄없다 하시면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몸은 이중성을 띱니다. 하나는, 죄있는 자의 몸은 저주받는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몸은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산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몸을 근거로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몸은 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지옥갈 몸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천국 갈 몸입니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자행되는 모든 일들은 모두 이 두 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입니다. 저주로 나가가는 몸은 곱게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에 대들면서 갑니다.

이들에게는 ‘지체’라는 의식은 없고 오로지 모든 게 자기 자신의 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의 몸에서는 감정이 발동합니다. 예를 들면, 태극기 게양식 때 태극기를 보고서 가슴에 손을 언집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실제적으로 각자 가슴에 태극기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예는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여럿 사람이 분노를 느꼈다면, 분명 나쁜 짓 한 사람은 하나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인 분노는 여러 사람 고유의 것으로 발생된 겁니다. 자, 그렇다고 해서 그 분노가 동일한 분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잠재되어 있는 감정이 활동성된 것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란 단순히 인간 내부에 자기잡고 있는 잠재적 감정의 활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한결같고 동일한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는 것은 그들이 각자 핵심자가 아니라 한 몸통에 붙어있는 지체일 경우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한 몸’이란 인간들의 몸을 모아놓고 그 대표자로서 등장되는 그 한(1)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몸을 두고 ‘하나’라는 의미를 붙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1)’가 있다는 시작은 바로 그렇게 헤아리는 자기 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생각으로 인하여 성경에 나오는 ‘한 몸’을 이해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 37:3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여기 나오는 185,000명의 대군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몰살당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다르고, 그들의 신체 신장이나 몸무게나 가정 환경에 다 달라도 모두 하나(1)의 이유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예루살렘’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신약에 와서 새언약의 이름으로 완성을 봅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 새언약의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을 건드리고 공격하는 자는 영원히 저주받게 됩니다. 비록 각자 자신들을 한(1) 몸이라고 우겨도 하늘나라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사건에 모든 인류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새언약 완성자가 로켓 추진체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갑니다. 그 분이 몸통이며 그 몸통에 붙어있지 않는 지체들은 그분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체가 되지를 못합니다. 반면 지옥갈 몸들은 자신의 주체적 태도로 인하여 '누구의 지체됨‘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인간의 몸에 주체가 발생됩니다. 논리적 주체, 경험적 주체, 초월적 주체, 도덕적 주체로 활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활동해봤자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왜 내 몸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는가?”하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이 유리한 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모아놓고 그것으로 새로운 자기만의 세상을 꾸미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 짜증나고 세상이 원대로 움직여지지 않게 되면 자기 빼놓고 다 죽이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입니다. 칼을 쥐고 마음에 안드는 모든 이들을 다 죽이고 싶은 이 일이 왜 악한 일로 느껴지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즉 내가 죽이겠다는데 왜 내가 하는 일이 죄로 느껴지느냐는 겁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죄로 느껴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이 세상이고 싶지만 막상 세상과 자신의 몸은 그것을 반성케 한다는 점이 짜증나는 겁니다. 이 원인은 바로 신이 그런 식ㄹ으로 인간 일에 개입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상 그 최종 원인자인 신을 죽여버려서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앞으로 자신이 벌리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이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의식이 들지 않고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손에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마지막 도달되는 사건이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저주받을 몸으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천국갈 몸은 없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부터 의미있는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디를 근거로 복을 받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고 그 자식을 아버지의 손으로 죽이게 하시므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의’의 근거를 친히 장만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 원칙은 야곱에서도 반복이 되는데 야곱이 제일 사랑하는 요셉이 야곱에게는 죽은 자식이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요셉은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서 몸통은 따로 있고 자신은 지체로서 움직이었을 뿐이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 은혜를 보여주는 몸이 곧 영생을 얻을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로마서 14: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이해토록 해주옵소서. 눈만 뜨면 자기 잘 될 것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목에 물 넘어가는 소리조차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3강-롬 12장 3-5(한 지체)140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3절에서 5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6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3-5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성경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생활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안 나게 만드는 요인으로 우리에게 늘 발생되고 있지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 평소 일상은 내 몸부터 시작해서 내 몸으로 돌아오는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이 있다는 것, 내가 산다는 이것이 주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가리는 조로 현재 우리 몸은 부지런히 설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은 이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고 두 가지의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지요. 예수님의 몸 자체가 무슨 사건을 품고 있는데 그 사건이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건이 예수님 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그 버림받았던 몸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약속 때문에 사흘 만에 다시 부활체로, 인간의 흙의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부활체로 다시 사는 사건이 품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버림받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이유를 보여주는 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죄 때문에 버림받게 되고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몸이지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리신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 몸을 살려냅니다. 예수님 몸의 그 이중성은 예수님 몸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결과가 뭐냐 하면, 인간에 있는 모든 몸을 그 두 종류로 분류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이게 아주 무서운 이야기에요.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게 되면 그냥 몸이 있다, 이 정도로 머무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그 몸이 저주받을 몸으로 쓰일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을 몸으로 쓰일 것인가, 딱 두 종류의 몸 밖에 없다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어봐야 “당신은 폐가 문제입니다.” 혹은 “근육 어디가 이상이 있습니다.” 이 정도 보여주지 아무리 좋은 병원에 가서 엑스선 찍어봐야 “지옥 갈 몸이네요. 태생에 지옥 갈 몸으로 활동되라고 몸을 움직였네요.” 이런 것은 찍혀 나오지를 않아요. “이 몸은 어떻게 굴려도 천국 갈 몸이네요.” 이게 찍혀 나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여기 몸이 있다, 이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이 몸을 주신 분에 의해서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이미 미움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에 결정된 그것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 몸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에서나 야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내 이 몸이 지옥 갈 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저주받을 짓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아니면 이 몸이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몸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을 우리 스스로는 판단을 내리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내 위주이기에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몸을 거론해요. 예수님의 그 몸에 대해서 그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것은 그 몸에 붙어 있는 같은 지체가 되어서 그 몸의 지체라는 겁니다. 한 통속이라는 것, 붙어 있다는 거예요. 현재 네 몸이 마지막에 어떻게 떨어질, 어디로 갈 몸인지, 그것이 어떻게 판단되느냐 하면 내가 스스로 내 몸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내 몸이 한 통속이다, 그것을 숫자로 하면 1이거든요, 하나다, 그리고 몸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붙일 수 없고 저분에게만, 예수님에게만 몸을 붙이고 우리는 그냥 지체에 머물 수밖에 없지요.

 

5절에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나를 볼 때 여기 한 몸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나한테 붙이는 것이 아니고, “저를 보고 몸이 있다고 하면 안 되고 지체, 여러 지체 중에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몸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지체로서 붙어 있는 그 그리스도의 몸, 나 말고 다른 몸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로마서 12장 5절이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한 몸으로 간주해요. 어떤 분에 붙어 있는 지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간주한다고요. 자기가 몸통이니까 자기 행동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도 자기한테만 물어봐요. 자기에게만 물어보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자기는 누구의 지체가 아니고 나는 내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내 몸통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몸의 이중성 중에서 저주받을 몸이 꼭 그렇게 살아가요. 누구한테 붙어있다는 의식이 없고 ‘나는 나다. 어떻게 살아도 나는 내가 결정한대로, 내가 선택한대로 내가 살아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몸으로 완결되어 있고 종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골라놓은 것을 조립해서 따로 나만의 세상을 꾸려나가요. 내 몸 위주로. 그게 나중에 불 심판으로 멸망 받고 저주받는 겁니다. 저주받지 않는 것은 독자적으로 내 몸을 따로 주장 안하면 돼요. “나는 누구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네가 누구한테 붙어 있는데?” “예수님한테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살아났다면 그 머리 되시는 분에게 일어난 일이 그 지체에게 그대로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 하고 그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부활의 열매가 맺힌다는 겁니다. 이런 성경이 이해되려면 내가 내 몸으로 시작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아이고, 내가 까딱했으면 저주받을 뻔 했네.’하고 화들짝 놀라야 되고 짜릿짜릿 소름끼치듯이 전기가 와야 되고 ‘내가 한평생 누굴 위해 살았지? 내가 미쳤어. 내가 정신이 어디 팔렸어? 내 정신이 나한테 팔려 있었구나. 내가 미쳤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놀라야 될 문제입니다.

 

사람이 뭐든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가 방금처럼 말씀드려도 믿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5절에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라는 말을 수학을 동원시키면 한 몸이니 숫자로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서로 지체가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가 아니고 2, 3, 4, 5 숫자로는 다양성, 숫자가 많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숫자 1을 이야기할 때 그냥 1로 보지 않고 내 몸이 한 몸이다 할 때, 내 몸부터 숫자 1을 새겨버려요.

 

1이라는 것은 내 몸이 하나다. 하나이니 1이라 하자. 그러면 여기 마이크가 있다면 이게 1이 되는 것은 내 몸이 하나인 것처럼 똑같은 1을 여기에 하나라고 쓰는 겁니다. 그래서 한 몸에 여러 지체라고 할 때 아무리 한 몸이 여러 지체라고 설명을 해줘도 사람들은 그 1, 한 몸이라는 숫자를 평소에 나한테 썼던 그 숫자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 로마서 12장 5절에 나오는 한 몸을 도저히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결혼식 참석하면서 주례에 신경 쓰는 사람을 봤습니까? 보통 결혼식에 손님으로 가게 되면 부조금 내는 거기에 신경 쓰지요. ‘빨리 내고 밥이나 먹고 가자.’ 그렇게 되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말씀이나 성경에 관심두지 않고 ‘교회 윗사람들, 높은 사람들, 장로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노회 때 양복 걸치고 와서 새누리당 전당대회 하는 것처럼 비슷하게 하지요. 만나서 서로 악수 하는 모습들. 국회의원들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 노회나 시찰 회 때 목사나 장로들 거들먹거리는 것 하고 모습이 똑같아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작 교회라는 것은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이 헌금을 어떻게 내고, 맨 그런 것만 잘 알아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시 읽습니다. 신경 안 써서 듣는 것 같아서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태극기가 바람에 날립니다. 태극기가 바람에 날릴 때 그 태극기를 보는 사람이 가슴에 손을 얹으면 그 사람 속에서 태극기가 다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태극기는 하나 달렸는데 여러 사람이 그 태극기를 보고 경례를 하면 거기서 그 하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말이지요. 울컥 감동받는다?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 땄을 때 태극기 보면서 같이 눈물 흘렸다, 이것은 잠재되어 있는 감정이 활성화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데 그냥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감동이 활성화 되면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젊은 애가 노인을 패는 동영상을 사람들이 봤다 합시다. 그거 보는 사람들이 그 젊은 애에 대해서 다 같이 분노를 느꼈을 때 그 분노의 덩어리가 하나입니까? 그게 하나에요? 그것은 잠재되어 있던 감정이 활성화된 것밖에 안돼요. 측은지심이죠.

 

그게 하나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면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 하나님의 의 앞에서 경례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아니면 실제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도 들어와야 되잖아요. 주님의 의에 대해서 감동받았다? 이것은 그냥 동정심이죠. 주님의 희생에 대해서 감동했다, 이것은 감동이고 감정이지 실제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아프게 매 맞으면 ‘아, 안 된다. 착한 분이 맞는구나. 그래, 우리도 저분처럼 저렇게 희생하고 봉사해야지.’ 이것은 자기의 잠재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지 그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로마서 12장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이유는 평소에 내 몸 위주로 살기에 내 몸이 갖고 있던 감정, 또는 의지, 또는 이성, 이 내 몸 위주로 살기에 주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 자체가. 감동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착합니다. 훌륭합니다.” 이렇게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고, 동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데 이것을 실감하시는가 그 말입니다.

 

교회 와서도 성경을 이해를 못해요. 남들 헌금하면 따라 헌금하고 예배참석하면 같이 참석할 줄 알고 밥 먹으면 밥 먹을 줄은 알고 숟가락 들 줄도 알고 축도하면 눈 감고, 그런 것들은 다 할 줄 아는데 정작 중요한 성경말씀, 설교할 때 톤이 높다고 듣기 싫어하는 그런 것은 다 아는데 정작 중요한 성경말씀 있잖아요, 이 성경말씀, 이것이 무슨 뜻인지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내 몸 위주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내 몸, “내가 여기 왔습니다.” 하는 거예요. 네 몸이 오면 안돼요. 우리 몸을 없애버려야 된다니까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지.

 

광주 갔는데 오 목사님 사모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교사가 발령을 받는데 그동안 근무한 학교에서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올 점수를 다 채웠어요. 6학년 담임을 하면 점수를 많이 준답니다. 6학년 담임을 두 번이나 했어요. 그거 말고도 열악한 학교에서 3년이나 근무했으니까 누구나 다 가고 싶어 하는 학교에 갈 점수를 다 갖춰놓고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못 가게 되면 지금 있는 이 학교에서 또 1년을 지낼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일단 이 학교를 떠나는 게 우선이라는 계산 하에 한참을 낮춰서 하향지원을 한 거예요. A등급 학교를 포기하고 B등급 학교를 지원했단 말이지요.

 

나중에 결과를 보니까 자기만큼 고생 안한 사람들, 점수가 훨씬 낮은 사람들도 다들 좋다는 A급지 학교에 발령이 나 있었어요. 더구나 알고 보니 자기 점수가 1등으로 제일 높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손해 봤다는 생각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괴로웠다는 겁니다. 그게 주체에요, 그게. 그게 자기 몸 위주라는 말이지요.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18만 5천명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18만 5천명이 자기 딴에는 다 하나하나가 주체에요. 자기 몸 위주였습니다. 성경에는 18만 5천명을 한꺼번에 다 죽였습니다. 이 18만 5천 명 중에 A급지 학교에 발령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B급지에 발령받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런 것을 일소해 버리고 묻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몸 중심, 주체 중심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세상을 볼 때 내 몸 위주이기 때문에 내 몸 가까운데, 편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스펙과 조건들을 뽑아서 그걸로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상을 구축합니다.

 

그 세계는 현실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18만 5천명을 죽이는 그것이 현실이거든요. 직업과 관계없이 한꺼번에 죽입니다. 그 속에 이발사도 있을 것이고 빵 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의 천사가 와서 “직업 뭐야? 의사야? 살려줄게.” 그런 것 없고 그냥 다 죽여 버렸어요. 단 하나, 하나님의 언약에 대드는 몸, 그 몸이 몸의 이중성 가운데서 저주받을 몸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드는, 신약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몸으로 하는 일에 대드는, 구약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 대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에 대드는, 신약으로 하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 완성인 십자가에 대드는 그런 몸은 직업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목사냐 집사냐에 관계없이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저주받을 몸이에요.

 

몸은 그런 몸이 등장해야 됩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 이 몸 위주로 세상을 다시 구축하고 구성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저주받을 몸이에요. 오 목사님 사모님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몸은 늘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 겁니다. 그 몸은 이 세상 흔히 아는 용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쉬운 용어로 말씀드리고 어려운 용어로 할 텐데 쉬운 용어로 하면 ‘자아’라고 하고 어려운 용어로 한다면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우선 어려운 용어부터 먼저 살피겠습니다. 칸트라는 사람은 이미 현대인들이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을 미리 예고라도 하듯이 네 가지 주체를 이야기했어요.

 

논리적 주체와 경험적 주체와 초월적 주체와 도덕적 주체를 이야기했습니다. 빨리하니 못 외우겠지요? 다시 합니다. 논리적 주체와 경험적 주체와 초월적 주체와 도덕적 주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는데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이 세상에서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그 주인공이 되는 것이 바로 나다, 그래서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내가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험적 주체라는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요즘 소통, 소통, 유행이잖아요,

 

그렇게 소통하고 아무리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세. 서로 도우며 사세.’ 해도 인간이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남이 경험한 것은 절대로 동일하게 경험할 수 없고 내 이빨이 아픈 것을 남이 동일하게 아플 수가 없고 내 발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서 아픈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 아픔을 동일하게 누가 느낄 수가 없는 독자적인 나만의 경험, 그 경험의 나가 바로 경험적 주체라는 겁니다.

 

초월적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병들고 늙고 고생하기에 ‘나’라는 존재, 나라는 인간을 언젠가는 천국에 영원히 앉혀놓기 위해서 종교적인 노력을 시작해요. 그러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곳보다 더 깨끗하고 더 병들지 않고 오래살고 영원히 사는 그 새로운 주체를 상정하는 이것을 초월적 주체라고 합니다.

 

마지막 도덕적 주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칸트철학에서 이게 제일 중요한데 이것이 뭐냐? 내가 어떤 법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양심에 따라서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무조건적으로 내가 내 속에 다른 음성이 있는데 그 음성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는 그 주인공이 바로 도덕적 주체라는 겁니다. 이 네 가지의 주체에 의해서 인간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 새로운 인류를 건설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비록 칸트라는 철학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칸트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빼버리면 오늘날 우리가 평소에 매일의 일상생활이 이 네 가지 형태로 움직이고 있어요. 저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만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 사람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자기밖에 모르는데, 부모를 떠나야 되는 젊은 청년이 되었을 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라는 인간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면 따지고 보면 이것밖에 없어요. 나만 남고 나머지는 다 죽여 버리고 싶어요. 내가 술을 퍼먹고 흉기를 들고 이웃집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리고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형과 삼촌을 죽이는 것이 이게 뭐가 나쁘냐, 그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왜 주위에서 그것을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쁜 짓 같으면 나에게 그런 마음이 안 생겨야 되는데 주위에서 그것이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사람들이 모든 것은 내 중심이 될 때 그게 내 중심으로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내 중심이 될 때 그 내 중심을 파고 또 파서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 보면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맘대로 안 되거든요. 세상은 가만히 있다고 저절로 좋은 세상 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세상이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왜 김연아 선수는 잘 탔는데 은메달입니까? 온 국민이 공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푸틴이 타도 금메달 따겠다.” 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러시아 푸틴을 죽이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문제지요. 러시아를 없애버리면 되는 겁니다. 김연아 빼놓고 다른 선수 다 죽이면 돼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힘이 없어 못 죽인다, 그거 하고 러시아는 늘 번창해야 돼, 그거 하고 다른 문제에요. 내가 죽이고 싶은데 못 죽이는 것은 망하라고 비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잘 되었어요, 그거 하고 ‘진짜 죽이고 싶은데 내가 힘이 없어서 못 죽입니다.’ 이거하고 다른 이야기에요. 다른 이야기라니까!

 

그러니까 뭐냐, 러시아는 망해야 돼요. 금메달 딴 러시아 자체가 망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망해야 된다는 말은 누가 안 망하면 내 손으로 망하게 해야 돼요. 이런 마음을 왜 나쁘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왜 나쁜 거냐, 그 말입니다.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내 몸이 했는데 왜 주위에서 나쁘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뭐냐 하면, “그걸 누가 나쁘다고 해? 너 혼자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야?” 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나만 남고 형제고 부모고 다 죽이는 것이 왜 나쁜 짓인가?” 그러니까 옆에서 있다가 “그것이 나쁜 짓 아니야.” 하니까 “그게 나쁜 짓이 아닌데 왜 자꾸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아 이 원인은 바로 하나님한테 있다.” 정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개입해서 인간스스로 망하도록 개입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부모들은 이렇게 하지요. “네가 공무원하든지 경찰을 하든지 아니면 조용한 공기업에서 일해서 평생 월급 잘 받고 퇴직해서 연금 받는 것이 제일 편하다.” 하잖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공무원입니까? 아니잖아요. 일반직장에 가면 영업사원들이 있지 않습니까? 남양유업사건도 있었지만 영업사원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보세요. 그저 손에 칼만 들면 다 죽이고 싶을 거예요. 영업한다는 것은 내 물건 안 사주면 그냥 죽이고 싶은 거예요. 손에 칼이 없고 내가 사람 죽이면 국가가 나를 교도소에 집어넣기 때문에 못하고 또 죽이려 들고 보니 아까 말한 대로 도덕적 주체, 내 양심이 말려서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라. 저 사람도 가족이 있는데 죽이면 안 되잖아. 불쌍히 여겨야지.’ 하기 때문에 못 죽이는 거예요.

 

못 죽이지만 어쨌든 나한테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왜 내 뜻대로 안되고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내 앞에 얼쩡거리고 버티고 살아 있고 까불고 있느냐는 그 말이지요.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데. 누가 나를 이렇게 악하게 몰아갑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조건만 골라서 나만의 천국을 이루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언제 피겨 알았습니까? 십 수 년 전에 피겨라는 종목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김 연아 등장해서 잘 하니까 피겨에 열광했지 그 전에는 피겨 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어요.

 

왜 내 눈앞에 잘 타는 사람이 등장해서 나로 하여금 러시아를 욕하게 만들고,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느냐는 겁니까? 왜 자꾸 뭔가 못된 존재로, 나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고 대체 이 세상이 이 대자연이 나로 하여금 나를 힘들게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누가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세상은 네 몸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 중심, 초월적 주체 중심, 도적적 주체중심도 아니고 경험적 주체 중심도 아니고 논리적 주체 중심도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그게!

 

하나님이 없으면 돼요. 하나님이 없으면 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하나님만 없으면 돼요. 하나님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님을 죽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 개입하십니다. 사람 손에 의해서 하나님 본인이 죽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개입을 하신 거예요.

 

이제 성경을 보겠습니다. 인간의 일이라는 것은 저주받을 몸으로서 행세하는 그 모양새가 내 중심, 내 몸 중심입니다. 내 몸 중심의 마지막 끝은 뭐냐, 나 빼놓고 나머지는 다 죽어라. 내 말 안 듣는 것은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걸 평소에는 억누르고 참고 있을 뿐이지요. 억누르고 참는다고 해서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에요. 성경에서 하나를 어떻게 뽑아내느냐 하면, 숨겨진 하나에서 열둘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열둘이 나와서 다시 하나로 집합시키는 방식으로 성경이 짜여 있습니다. 그게 14만 4천이라는 겁니다.

 

12곱하기 12곱하기 1000. 여기서 12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12라는 숫자로 현실화된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거든요. 아브라함에게 복이 등장하고 그 복의 원리가 반복되어 버리면 나중에 야곱의 열 두 명의 자식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나타날 때 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복이란 없고 저주밖에 없어요. 저주밖에 없는 이 몸에서 복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발생이 되고 피어오르는 거예요.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쓰레기같이 나밖에 모르는 것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뭔가 피어오르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도대체 내가 어디를 봐서 복 받을 구석이 있나, 하고 몰랐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강제로 심어줬습니다. 애를 못 낳게 해 놓고 애를 낳게 했습니다. 애기를 못 낳게 해 놓고 애를 낳게 했어요. 애기를 낳았는데 그 애는 자식 취급도 안하고 못 낳는 아내에게서 아이가 나옵니다. 이삭입니다. 그 이삭이 없는데서 있다는 것도 신기할뿐더러 이미 자라서 잘 살고 있는 아이를 네 손으로 죽이라는 그것도 신기한 일이에요. 이것은 낯선 사건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있는데서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게 바로 네가 복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걸 믿으니까 네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섯 번째 다시 읽어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우리는 죄투성이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왜 죄투성이냐 하면 하나님마저 죽여 버립니다. 하여튼 나 빼놓고는 다 죽여 버려요. 나 빼놓고는.

 

내가 여기 있음 자체가 이미 내가 원하는 세상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내 말 안 듣는 세상은 다 망해야 돼요. 정신이 멀쩡해도 술만 처먹으면 그 짓 나오거든요. 취중진담이라고 술김에 자기 할 소리 다 해버려요. 윽박지르고 억지스러워요. 사람들의 모든 대화가 윽박지르는 식이고 억지에요. 나는 다치지 않고 남은 나에 의해서 다쳐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어요.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뭐냐 하면, 희생이에요, 희생.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 있는 자에 의해서 그만 살해당하는 희생이에요.

 

그 희생이 그대로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서 자기가 복의 근원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대체 어느 구석에서 내가 복 받을 인간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열 한명의 아들보다 더 유독 사랑했던 아들, 요셉에게 특별히 채색 옷을 입히고 특별대우를 해줬어요. 그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심증이 아니라 물증이 있어요. 짐승한테 물려죽었다는 그 증표, 오직 내 아들 요셉만이 입었던 그 채색 옷에 짐승에게 물려죽었다는 표식으로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없었어요. 감정을 의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증거물로 댔을 때 야곱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은 죽어버렸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죽였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자기위주입니다. 그 죽인 이유가 형들이 제각기 자기가 다 몸이에요. 왜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저 요셉만 사랑하느냐, 그래서 죽인 겁니다. 다들 동조했습니다. 한 통속이 되었습니다. 숨겨진 감정이 활성화 된 거예요. 숨겨진 감정이 활성화 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고서는 죽어도 괜찮아, 여기에 다 같이 동감한 거예요.

 

소치 올림픽 때 김연아 대신 금메달 딴 그 아가씨가 일주일 후에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리면 한국 사람들은 짝짝짝, 박수 다 칩니다. 왜, 숨겨진 잠재된 감정의 활성화에요. “어딜 감히 한국을 건드려? 러시아가 어딜 감히 한국을 건드려?” 이 한국이라는 1, 1이라는 숫자, 우리는 내가 속해있는 이 숫자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주받을 몸이에요. 나밖에 모르는 저주받을 몸.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전혀 이해 못하는, 한 사람이 대신 죽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그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예요.

 

복을 받아요? 천국을 가요? 무슨 자격으로 천국을 가요? 그게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아야 될 몸짓을 하면서 무슨 천국을 갑니까? 주님께서는 그 몸을 파고서 주의 복 받을 근거를 심어버립니다.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소식이 들려지고 난 뒤에는 야곱은 그 다음부터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용했어요. 그리고 슬퍼했습니다. 슬퍼한 것도 문제에요.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슬퍼합니까? 자기가 슬퍼할 자격도 없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야곱은 슬펐습니다.

 

나중에 죽었다고 여겼던 그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일 밑바닥 까지 내려갑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 거기서 요셉이 느끼는 것은 뭐냐,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물들만 만나게 돼요. 보디발의 아내도 마찬가지고 보디발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자기가 꿈꾼 것 해몽해줘서 감옥에서 풀려나고 다시 원래 자리로 원상복귀 되었던 그 신하도 마찬가지고, 세상 어떤 인간치고 자기희생을 할 인간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절감하면서 느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를 앞당겨서 요셉이 경험한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자기만 고생을 죽어라고 하는데 자기가 고생한 덕분으로 룰루랄라,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약이 더 오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해서 바로 왕으로 하여금 졸지에 요셉을 특채시켜서 국무총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요셉은 알아요. 자기가 숨겨져 있는 질서에 말려든 것을, 그것은 뭐냐 하면 내 몸은 내 몸 마음대로 되는 질서에 속한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의 지체로서 움직이는데 다른 몸에 의한 하나의 지체로서, 문어가 있다면 문어의 몸통이 아니고 하나의 다리처럼 움직이는 몸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형들이여, 당신들이 나를 죽였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내가 그렇게 복수할 입장이 못 되고 나를 그렇게 하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온 가족이 다시 만나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본문 3절에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 은혜라는 용어가 나오지요. 은혜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요셉으로 하여금 문어다리처럼 활동하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추적해 보면 나 같은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희생하신 그 희생의 원천지가 따로 있어요. 원천지에서 은혜가 나오는 겁니다. 그 은혜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성도라면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그냥 만나지 말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은혜의 원천, 복의 근원을 경유해서 다시 보시고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죽일 마음이 들어요? 숨겨져 있는 질서입니다. 김연아가 피겨 나오니까 사람들은 금메달감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은메달 따고 난 뒤에 뭐로 변했느냐 하면 “고맙다, 연아야! 그동안 감사했다. 연아야!” 갑자기 은메달하고 금메달을 김 연아와 연계시키다가 갑자기 금메달 아니라도 고마웠다고 대승적인 여유를 줘요. “너는 금메달을 안 따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할게.” 이거거든요. 그 여유, 소유하지 않더라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않더라도 그저 너의 희생만으로도 고마웠어, 라는 대자대비한 마음이 국민들에게 생겼습니다.

 

실패했을 때 그동안 감사해야 될 것을 미처 감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대로 감사하는 거예요. 목이 아플 때 평소에 그렇게 시원하게 넘어가던 그 맹물도 넘기기가 힘이 들었지요. 목이 아팠다가 나은 뒤에 마시면 목으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그게 신기하고 너무나 놀라워요. 목에 맹물 넘어가는 소리가. 모든 것이 은혜를 경유해서 그렇게 살면서 죽기 전에 이 땅에서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그 사람은 축복의 사람, 영생의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 안에 뭐가 있기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은혜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럴 때 그 사람의 몸은 이미 딴 몸이 있고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나 빼놓고 다 죽이고 싶지요.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너부터 죽으라고 하실 때 비로소 주어진 질서, “맞습니다. 저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를 느끼게 만드는 그러한 은혜가 비로소 감지될 때 ‘아, 그동안 내 몸이 내 것이라고 한 것이 착각이었구나.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구나.’를 알게 되는 겁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다는 이야기,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거든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을 때 ‘참 나도 오래 살았습니다. 진작 죽어야 될 것인데.’라고 생각했다면 망대 무너진 것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느껴질 겁니다. 어떤 사건이 여러분에게 닥칠 때도 그것은 바로 여러분 속에서 나 같은 몸은 저주받을 몸 하지만 주님의 근거로 인해서, 주님의 십자가 피로 인하여 그 속에서 다시 사흘 만에 부활되는 몸으로 사용되라고 이 십자가 소식을 알게 했다는 것, 이 은혜를 이미 주셨다는 사실을 품고 있다면 그 사람 속에 은혜가 가득한, 영생 얻는 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죽으심, 사람 손에 죽었던 하나님을 경유해서 세상을 봐야 되는데 그렇게 보지 못하고 왜 세상은 내 맘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분개하고 분노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것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죄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죄마저 죄라고 드러내시면서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 그 은혜가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주님의 희생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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