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72강-영적제사(롬12;1-2)이근호140216

아빠와 함께 2014. 2. 16. 14:52

영적 제사(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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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16 13:30 
영적 제사

2014년 2월 16일                             본문 말씀: 로마서 12:1-2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보통 구원을 받게 되면 구원의 능력만 추가적으로 주어지기에 이 몸은 그대로 유지되고 사수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몸은 그냥 가만이 버려두고 방치하는 식으로 구원하시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몸을 통해서 ‘영적 예배’를 실시케 하시겠답니다.

실제로 이 영적 예배의 실시 여부는 어떻게 판정될까요?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고 되고 있습니다. 즉 ‘영적 예배’ 실시 현장에는 이 세상 전체가 ‘본받지 말아야 될 이 세대’라고 규정되면서 호출된다는 겁니다. 이 현상은 이 인간 세상에 투입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야기된 현상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은 나름대로 건전성이 지속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들의 안목으로 아무리 온갖 심오한 지혜를 짜내어 자체 검열과 자체 정화를 실시해도 극단적으로 잘못된 쪽으로 전향하지는 않는다고 장담할 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오셔서 외친 말씀의 사역은,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판명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방식을 구원된 성도의 몸을 가지고 반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더 깊이 알아야만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됩니다. 즉 “왜 본받지 말아야 하지?”에 밀착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앎에 대해서 성도 본인의 몸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본받지 말아야 될 이 세대’ 안에 성도 본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몸이기에 그 몸 가지고, “왜 내 몸은 자꾸만 이 세대를 본받고자 하느냐”를 본격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나님은 실시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이 세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파악하는 상황 속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성도의 몸이란 그냥 박제된채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세대가 ‘꼭 본받지 말아야 될 부정적 세대’로 움직이냐에 대해서 제대로 해답을 가지고 증명해야 될 임무를 성도가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친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그들에게 베푼 것은 병치료가 아니라 ‘죄사함’이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이 ‘본받지 말아야 될 이 세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의 의의를 위해 죄사함을 발생시키는 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병자를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 겁니다. 아무리 병에서 고침받아도 ‘이 세대’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수님에 의해서만 발생되는 죄를 모르면 구원이 성사될 수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있는 이 세상에 무척 다양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이 점을 반박합니다. 기원전 5000년, 이집트에서는 상(上)이집트 지역(나일강 상류)과 하(下)이집트 지역(나일강 하류)로 나뉘어져 여러 부족들이 흩어져 있었다가, 기원적 3200년 경에는 바로 왕에 의해서 통일 국가가 됩니다.

기원전 30년, 로마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무려 30개의 왕조가 그 지역을 거쳐지나갑니다. 이들 제국을 통합한 게 뭘까요? 그것이 바로 종교성입니다. 이집트는 ‘라’라고 하는 태양신을 믿었으며, 인간이 죽고 난 뒤에는 ‘죽음의 신’이라는 오시리스 신 앞에 불러 나가야 합니다. 바로왕은 ‘신이 깃들여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서 ‘라’신의 아들로 행세합니다.

이는 곧 왕의 운명이 영원한 불명의 생명을 보여주는 운명이 됨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므로서 큰 나라의 뭇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시를 훼손하지 말아야 될 이유는, 심판의 신인 오시리스 앞으로 심장을 가지고 나와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를 많이 지었으면 그 죄의 무게로 인하여 진리의 저울의 눈금이 심장 쪽으로 기울러지고, 그렇게 되면 그 기우려진 심장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선한 일을 많이 자의 심장은 진리와 균형을 맞추면서 ‘라’신이 제공을 배를 타고 영원한 나라에서 본격적인 영생을 삶을 산다는 겁니다.

이 태양신 종교의 요소들은 여타의 모든 종교의 요소가 다 담겨 있습니다. 모든 신학이 다 담겨있다고 보면 됩니다. 바로 이 신학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본받지 말아야 될 세대’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지혜에서 나왔기에 인간으로부터 충분히 선택가능한 신으로 환영받게 됩니다. 그래서 거대 종교로 오래 지속됩니다. 

이는 곧 이 세대는 거의 대동소이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로 소통될 수 있는 집합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런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 어느 인간이 이 세대를 형성한 그 사상을 먹으면서 기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생겨납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모든 제자들은 딴데로 돌려버리고 단독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 여인은 자신이 줄 수 있는 물만 주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남성편력을 말했을 때, 그 여인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해놓으신 예배란 바로 그 여인이 감추고 싶어하는 그 죄의 현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제공하는 것만이 예수님으로 받으시는데 그 제공되는 자리가 인간의 죄의 자리입니다. ‘본받지 말아여될 이 세대의 자리’입니다.

이 세대에 속한 인물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셔서 그 현장을 예수님 본인이 죽는 자리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공로와 죄사함을 말하기 위해 동원된 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이 그 어떤 궁극적 해답과 희망을 줄 수 없음을 증명하는 자들이 됩니다.(세리와 창기와 장애자들과 저주받은 자들) 이처럼 성도는 새삼스레 해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 피’라는 해답을 가지고서 ‘왜 나의 인생에 있어 그것 만이 해답인가’를 보여주는 질문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성도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구르고 말썽을 일으켜도 궁극적 확정된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아무리 무거운 체중의 사람이 누어있어도 원형이 곧장 회복되는 ‘메모리 폼’이라는 침구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죄사함의 능력만이 증거하는데 이것이 바로 평생 반복되는 ‘영적 제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이 곧 날마다 주님의 사랑이 발산되는 자리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2강-롬 12장 1-2(영적제사)140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2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6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우리 몸은 주께서 주신 구원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기에 이제는 천국 갈 날만 남아 있는데 가기 전까지의 날들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기에 천국 갈 그날까지 우리의 몸은 다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의 몸이 온전하게 보전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가만 두지를 않네요. 네 몸을 가지고 영적 제사를 드리라고 나옵니다. 그냥 방치했다가 홀라당 데려가면 좋겠는데 이 몸을 가지고 뭔가 일을 하시겠다고 나서시는 거지요.

 

주께서 나서시는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우리 몸이 다뤄질 때 이것이 구원받는 자의 모습인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2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알아서 선택해서 골라잡아서 뭘 하나 더 챙기려 합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은 알고 나한테 도움이 별로 안 되는 것은 안 알아도 된다고 제외시켜 버리지요. 그런데 오늘 2절에 보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되어 있어요. 부정적인 언사입니다.

 

제가 항상 부정적으로 한다고 욕들을 많이 하는데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너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순간 도대체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거예요.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본받지 말아야 된다고 하며 본받지 않는 상태의 몸으로 다뤄질 때 그것이 영적 예배로서 천국갈 수 있는 몸이라고 앞뒤 논리가 맞춰지거든요. 우리는 그냥 멍청하게 있어도 주의 능력으로 구원받고 죽을 때 천국 곱게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다루겠다고 나서시고 어떻게 다루는가가 궁금했는데 우리 보고 요구하기를 “네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한테는 숙제가 생겨버린 거예요. 도대체 이 세대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그게 뭐길래 우리보고 그것을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영적제사,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이것이 영적예배다.” “그게 뭔데요?” “이 세대를 알고 그것을 본받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에게 할 일이 생겼어요. 그게 뭐냐, 이 세대를 부지런히 알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 세대를 알고 싶은데 이 세대라는 것을 알 때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도서관에 가서 연구합니까? 서점에 가서 참고도서 논문 찾아보면 이 세대를 알까요?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 쪽에서, 우리로부터 ‘이제 이 세대를 알아야지.’하고 나설 문제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이 세대와 섞일 때에 예수님을 넣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세대는 자기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노출시키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주변에 이 세대가 발생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 이 세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나 다 같은 이 세대이기에 정상으로 보거든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것은 부정적인 겁니다. 그런데 내가 속한 이 세대는 절대로 자진해서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이 세대를 부정해 버리면 그 세대의 출신자인 우리도 더불어 부정해 버리게 되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려고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자기를 긍정하려고 살지요.

 

그래서 ‘내가 이 세대를 알아봐?’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기는 빼놓고 나머지를 이 세대로 간주하는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천지일보에서 이런 질문을 저한테 했어요. 이단이 뭐고 정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단이 뭐냐 하는 것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가라지는 무엇을 말하고 알곡은 무엇을 알곡이라고 하느냐, 그 질문을 던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가라지와 알곡을 나누겠다는 그 자체가 가라지입니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뭔데 가라지를 구분해요? 사람이 가라지를 알고 구분하게 되면 자기는 반드시 알곡에 집어넣고 자기 맘에 안 드는 쪽을 가라지라고 할 것이 뻔한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마찬가지고.

 

개인은 전체를 볼 입장이 못돼요. 전체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기에 자기가 아무리 파악해도 전체는 파악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답변하기를 질문 자체를 바꾸라고 했어요. “누가 가라지고 누가 알곡이냐고 묻지 말고 우리 주님은 말씀대로 하기에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서 알곡을 생산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라지를 생산합니까?”라고 질문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생산된 것은 비로소 그동안 숨겨놓은 이 세대가 발생된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중풍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새치기를 한 거예요.

 

세계 최고의 새치기인데 지붕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지붕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그 의도와 집착과 집념은 뭐냐, 중풍병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했어요. 중풍 병 낫기 위해서, 나한테 이익이 되기 위해서, 병 낫기 위해서 예수님을 의지해보자고 시도한 것, 그게 바로 본받지 말아야 될 이 세대의 현상 중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대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세대 속에서 죄라는 개념을 새롭게 발생시킨 겁니다.

 

“나는 이 세상에 죄를 사하러 왔다.” 병 고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하러 온 거예요. 그러나 중풍병자 고치러 온 사람이 병 고침 받으려고 온 것이지 죄를 사함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병만 고치면 자기는 건전한 사람이고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행동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거기에는 숨겨진 이 세대의 자기의 정체, 속사정이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사무엘 상 17장의 이야기인데요,

 

골리앗과 다윗이 싸움한 것을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골리앗과 다윗이 싸워서 다윗이 이겼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해석합니다만 그 해석은 그런 식으로 하면 안돼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골리앗이 진 싸움이에요. “도나 개나, 개나 도나 다 똑같은 소리잖아.”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할 것인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고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골리앗이 진 싸움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정상적으로 금메달 밭이었던 쇼트트랙에서 한국과 안 현수 한 사람과 싸웠는데 골리앗 한국이 안 현수 다윗에게 진거예요.

 

사람은 다윗이 이겼다는 쪽에만 자꾸 신경 쓰는데 진 골리앗의 심정을 헤아려 본적이 있습니까? 누구나 골리앗 되고 싶지 다윗 되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 다윗을 옹호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골리앗 되기 위해서 다윗을 잠시 겪어보고 싶은 거예요. 당장은 다윗이더라도 기어이 최종적으로는 골리앗처럼 힘센 사람처럼 되고 싶은 세상, 이게 이 세대입니다. 성경해석을 전부 다 반대로 하고 있어요. 골리앗처럼 못되어서 전부 다 환장을 한 거예요. “하나님, 다윗처럼 되면 결국은 골리앗 됩니까?”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니까요?

 

“마음만 낮추면 결국 힘 가질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게 이 세대에요. 예수님 나시기 전인 BC 만 년 전부터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5000년경에 서서히 부족국가가 생겨나는데 이집트에 보면 군데군데 도시국가가 생겨나는 것이 BC 5천년경입니다. 나일 강 위쪽을 상 이집트라하고 아래쪽을 하 이집트라고 해요. 그것이 BC 3천년경이 되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가 합쳐서 독립이집트가 되는 겁니다. 위 이빨과 아래 이빨을 합쳐서 양악이라고 하거든요. 위아래가 합쳐서 이집트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세대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통일된 독립국가가 되면 두 명의 왕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의 왕으로 통합됩니다. 그 왕이 파라오, 바로인데 그 뜻이 뭐냐 하면 ‘지극히 높은 자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통일된 왕이 등장하면서 그 왕은 보통 인간, 보통 백성들과는 달라요. 왕은 태양신의 아들입니다. 태양신의 이름은 ‘라’ 이름이 간단하지요. 라의 아들, 태양신의 아들이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파라오, 바로왕입니다. 이 바로왕은 태양신의 법으로서 지배를 하게 되고 그 법의 모든 초점은 태양신의 신성함(오늘날의 종교)과 관련되어 있어서 사람이 죽으면 ‘라’로부터 배를 제공받습니다.

 

노를 저어가게 되면 본격적인 인생, 영혼들이 사는 나라에 가게 돼요. 죽고 나서 갈 나라가 두 곳이 있어요.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 영생인데 지옥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어떻게 판정을 내리는가 하면, 죽은 시체의 심장을 가져가요. 그 심장을 진리의 저울에 답니다. 죄를 많이 지으면 무게가 많이 나가요. 저울이 기울면 자동으로 굴러서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영혼이 균형이 맞으면 그 영혼은 죽은 시체와 합해 하나의 인격이 되어서 천국복락을 누린다는 그것이 바로 이집트가 통일국가가 된 사상, 정신적인 합일체입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냐, 그 말이 구라잖아?”라고 할까봐서 그 ‘라’의 아들인 바로 왕이 죽으면 시범조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미이라로 제공합니다. 왕이 자기 시체를 잘 보관해서 남겨두는 이유는 그동안 살아 있을 때의 모든 종교적인 것들이 그냥 종교가 아니고 실제 사실인 것을 시범조로 왕이 보여주는 거예요. 오시리스가 있는데 그 신은 요새말로 심판관입니다. 재판장이죠.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고대통일이집트의 정신이 하나로 뭉쳤다고 하고 통일국가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김이 다 달라도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동일함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이 세대는 사람의 모양새, 남녀노소가 다 달라도 결국 생각하는 것은 하나로, 정신적으로 뭔가 통합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통합된 것을 제가 고대 이집트의 종교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 통합된 요소를 뜯어보니까 어떤 내용이 나오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심판하는 자가 있고 그 다음에 죽고 나서 몸은 떨어지고 영혼은 살아 있다는 그 요소. 그 다음에 영혼은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의 두 갈림길이 있다는 것. 그 다음에 지옥 갈 것인가 혹은 천국 갈 것인가를 판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생전에 죄를 지은 무게로 판정된다는 것.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가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성폭행 같은 못된 짓을 하면 지옥 간다는 것.

 

그것이 이미 어디서 구성되었는가, 살아 있는 그만그만한 인간들이 끄집어낸 생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세대라는 것. 그 이 세대 중의 하나가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과 유대인이라는 것. 거기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 오늘날 교회와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오시리스종교, 라(태양신)종교, 고대이집트 종교에서 변한 것이 있습니까? 이 세대는 똑같이 그것밖에 몰라요.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 모든 종교의 특징은 자신은 절대로 영원히 살아야 할 불멸의 존재지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져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기반으로 깔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이 종교이고 그 종교의 종류에 기독교, 천주교, 불교, 수백만 가지의 종교가 거기서 거기까지 다 나옵니다. 그 중 하나인 종교, 기독교를 가졌으면 구원받는 겁니까? 불교나 기독교나 삼위일체나 다 뜯어보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으니 이 세대를 몰라도 된다고요? 아니에요. 앞으로 더욱더 생생하게 더 연구하고 더 알아야 됩니다. 이 세대를 알아야 돼요. 이 세대를 알고 비로소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이 뭔가를 알아야 돼요.

 

알곡과 가라지에서 알곡끼리는 공통점이 있지만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생산할 때, 로마서 12장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실 때 대체 이 세대가 뭐길래, 우리 성령 받은 성도는 그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느냐는 말이지요. 도대체 이 세대가 뭐길래? 우리가 아는 이 세대는 기껏 인간들이 끄집어낸 모든 아이디어의 집합체거든요. 이 세대는 온갖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들, 그리고 인간들이 선택한 신들, 선택하기 위해서 후보감으로 인간들이 만들어낼 총 집합이 이 세대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아주 기발하고 아주 똑 떨어진 교리, 참신한 교리, 그래서 골라봤자 그것마저 이 세대에 속한 여러 잡신 가운데 하나일 뿐인 거예요. 참 종교, 어디서 도를 닦든지 어디서 계시를 받든지 뭘 해도 그것도 국밥에 밥 한 그릇 추가한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이 인간의 힘으로 본받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은 먼저 이렇게 하신 분이 우리 인간 말고 따로 계시다는 것을 소개하는 겁니다.

 

네가 새롭게 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말씀의 원형, 모델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말씀을 이루신 겁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영적 예배드리고 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그것을. 제가 서울에 가면 일박도 할 일이 꽤 있거든요. 강의 연일 이어지면 묵어야 하는데 묵을 곳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기흥이라는 곳의 최 도식 성도님 댁에 갔었어요. 그날 밤 자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살짝살짝 간증을 하겠습니다.

 

최 도식 집사님 부인, 하은이 엄마가 방에 요를 깔았는데 제가 평소에 누웠던 3만 원짜리 요와 달랐어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제가 물으니 그 요가 메모리폼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라텍스라는 재질인데 제 몸무게가 72킬로그램이 되어도, 제 몸무게가 공개되어 버렸네요, 하여튼 제 몸무게로 눌러도 원형으로 곧장 복구가 되어버려요. 꽉 감싸주는 느낌? 몸이 그렇게 편하고 잠이 잘 왔어요. 이거 지금 간접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체험입니다. 제가 남의 집에 가면 잠을 잘 못 자는데 그날은 참 푹 잤어요.

 

어떤 점에서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바로 이것이 이 세대가 아니고 영적예배를 통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예수님 세대,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대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뭐냐,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얹어도 곧장 복구가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아무리 이 몸 가지고 싸대고 눕고 까불고 착한 일 한다고 돌아다니고 주의 일 한다고 돌아다녀도 전혀 그 결과는 달라질 것도 없고 곧장 원형으로 복구가 되는 겁니다. 곧장, 또 곧장. 내가 설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거나 변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가 뭐냐? 제사는 그야말로 이미 놓인 세상이 절대로 우리의 새롭게 추가된 행동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로 이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변화와 변경과 변환의 계기가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라는 것은……,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예배라는 것은 뭐냐?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계속 추적하고 탐색하고 연구하고 선택해야 되고, 선택해 놓고도 내가 잘했을까 혹은 못 했을까로 항상 고민에 빠지지요.

 

인간의 걱정과 고민과 두려움은 자기 선택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까봐서 걱정되잖아요. 그런데 메모리폼은 이미 결과는 끝났어요. 따라서 내가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 새로운 세대에서의 어떤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해답 찾는 것이 아니고 왜 그것만이 해답일 수밖에 없는가, 그 질문을 차후에 계속 던지는 삶, 그게 영적 제사로 드리는 삶입니다. 답은 나와 있어요. 십자가 피로 주께서 용서해서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삶이다, 그거 예요.

 

내가 어떻게 반듯하게 살아서 반듯하게 산 나를, 그 심장을 저울에 달 때 무거운 심장이 아니고 착한 심장이 되어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이 세대가 만든 종교가 그거잖아요. 진짜 해답이 그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종교가 있는가? 계속 그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를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바로 그런 세대에 누가 개입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거기에 끼어든 거예요. 끼어들면서 너희들이 해답도 모르는 체 해답을 찾아가는 식으로 계속 연구하는 그런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밉상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끝!

 

그렇다면 영적 제사라 하는 것은 메모리 폼에서 계속 몸을 던져보는 거예요. “이래도 구원받습니까?” “그래도 구원받는다, 끝!” “이래도요?” “그래도 구원은 십자가 피, 끝!” 내 몸 하나 교회 와서 호작질 할 때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교회가 변형되고 뒤틀려서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복음이 전파되니까 끝! 애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 온통 세상이 무너졌는데 세월 지나니 그래도 구원받는다는 끝! 어찌 은혜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 세대의 사람들은 서로가 사실은 사기꾼이었습니다. 전부 다 사기 쳤어요. 해답을 내가 가지면 안돼요. 내가 갖고 있으면 나한테서 해답이 썩어버립니다. 나한테 충성을 하고 나를 칭송하기에 그 해답은 해답이 아니에요. 주님께 돌아갈 그 공로가 나에게 돌아올 공로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이 세대가 만든 가짜 복음, 가짜 기독교에요. “우리 교회는 진짜입니다.” 그 소리하는 그게 가짜에요. “저, 사기꾼입니다.” 그게 진짜에요. 우리는 사기치고 싶어서 사기 치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사기 치는 것 밖에 안 배웠어요.

 

이 세대는 그만그만해요.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에요. 노골적으로 사기 치는가, 가만히 치는가, 그 차이뿐이지 전부 다 고만고만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주님께서 준 적이 없습니다. 그 사기성이 남한테서 사기 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사기치고 있다는 것까지 알기 위해서는 “주님이여, 왜 해답이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까?”라고 해야 되고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해답은 “네가 사기꾼이야, 네가. 네가 사기꾼이거든? 너는 너밖에 모르거든.”라는, 이미 변하지 않는 결과, 확정된 해답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수용이 되는 겁니다.

 

그 영적 예배의 예를 두 가지만 들고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 예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열두 제자가 없어요. 열두 제자가 빵 사러 갔어요.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만 나오고 아무도 없어요. 보통 추수하려면 자기직원들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직원들은 다 빵 사러 가고 아무도 없어요. 제자들도 없고 유대인들도 없고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으신 것은 이 세대에서 드리는 예배는 모두 있음의 예배라는 겁니다.

 

일단 내 몸이 있고 내가 가진 것이 있고 이것 가지고 신과 흥정과 거래에 나서는 겁니다. “제가 이 정도로 착한데 이 착함가지고 죽게 되면 내 심장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영혼이 불멸할 심장으로 되겠지요?” 하는 식, 아까 이집트종교의 예를 든 것처럼, 이 심장,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심장, 심장의 모습이 하트 모습이거든요, 이게 일종의 저금통장, 착한 일을 많이 담는 저금통장입니다. 착한 일을 담는 저금통장이 있다는 말은 그만큼 뻔뻔하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그 말이에요.

 

왜냐, 착한 일을 너무 하게 되면 좀 여유부리면서 나쁜 짓을 좀 해도 재고가 남으니까. 그래서 어릴 때 많이 착한 사람은 커서는 좀 나쁜 짓을 해서 빼먹어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우리가 갖게 돼요. 이게 이 세대입니다. 이것은 어느 인간도 다 마찬가지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부모가 있는데 자기애가 어릴 때 콩을 안 먹는 거예요. 콩이나 채소를 먹어야 몸에 좋다고 아무리 영양학적이거나 식품학적으로 설명해도 말을 안 들어요. “먹기 싫은데 어떻게 해? 엄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안 땡겨.”라고 콩을 안 먹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엄마가 ‘이 아이에게 어떻게 콩을 먹일까?’ 하다가 ‘되나 안 되나 해 보기나 하자.’ 하고 했는데 여러분도 듣고 아이에게 시험을 해 보세요.

 

“얘야! 네가 지금 콩을 안 먹으면 네가 전에 억지로라도 먹었던 그 콩과 헤어지잖아. 너도 친구끼리 헤어지면 얼마나 슬프겠나? 네가 콩을 먹어줘야 네가 전에 먹었던 콩과 친하게 지내면 네가 착한 사람 되는 거야.” 그 때부터 애가 환장하고 콩을 먹었던 거예요. 애는 유치원에 가서 뭘 느끼느냐 하면, 친구와 헤어지면 아프다는 것을 느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아프니까 나는 절대로 남들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 아프게 하면 죄책감이 든다는 거예요. 그 죄책감을 부모가 노리고 이용해서 사기를 친 거지요.

 

“얘야, 네가 친구하고 헤어지게 되면 그게 마음 아픈 일이지? 그처럼 네가 콩 사이를 이간질해서 콩을 헤어지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한다면 너는 나쁜 놈이야.” 할 때 “엄마, 내가 죄인입니다.” 해서 콩을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어쨌든 악은 멀리하고 선한 양심과 착함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심보들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열 두 제자가 없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 것인데 무슨 추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비로소 추수가 되는 거예요.

 

선과 악을 따지는 인간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따져봐야 마찬가지지만.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 그 여자는 예수님이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하는 줄 알았지요. 그것이 오늘본문에서 말씀하는 영적 예배, 산제사와 관련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들은풍월이 있어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어떻게 제사 드리면 됩니까?” 하는 식으로 살아왔던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제사)드리면 됩니까?” 우리가 흔히 묻는 질문, 저에게 하는 질문이 그거잖아요. “우리가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 어떻게 제사(예배) 드려야 됩니까?” 하는 거예요.

 

여러분, 무당은 굿할 때 치장하는 것이 그렇게도 많아요. 무당의 풍어제 같은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도 직접 본적은 없고 영화로 봤어요. <박수무당>이라는 영화에 나와요. 거기 보면 치장이 그렇게도 많아요. 무당 옷도 치장을 하고 신부들을 보세요. 자기 몸치장 하지요. 교회를 보세요. 굿 하는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있음이에요 있음, 있는 것 중에서 고상하고 괜찮은 것, 의롭게 보이는 것을 다 하는 거예요. 옛날 우리 할머니도 음력 6월 말쯤인가 되면 꼭 빠지지 않고 무슨 할매인가 한테 드린다고 제사를 드렸어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하는데 제가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아서 살짝 부엌을 들여다보니까 물을 떠놔요. 할머니는 우깁니다. 그게 정화수라는 거예요. 제 눈에는 그냥 수돗물이지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볼까요? 그게 수돗물인지 정화수인지. 그냥 수돗물인데 정화수라는 거예요. 우물이 없으니까 옛날 우물물을 대신한 겁니다. 있는 것을 정결하고 고상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것을 드리는 거예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에서 깨끗하고 성화된 마음을 드리면 받는다는 거예요. 고만고만해요. 기껏 인간의 종교적 아이디어가 그 정도밖에 안돼요.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물을 달라 할 때 “그 물을 네가 네 힘으로 길을 수 있고 나에게 먹게 할 수 있는, 네 쪽에서 나에게 제공하는 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한테는 없는 거예요. 나에게 바칠 물이 없어요. 영적제사 같으면 영적 제사를 바칠 몸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영적 제사는 아무나 그 몸을 받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받느냐? 주님이 주셔서 주님이 생산한 그것만 주님이 받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우물로.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깨끗한 우물입니까, 더러운 우물입니까?

 

그걸 따져보자는 말이지요. “네가 남자 다섯이나 사귀었지?” 물론 남자 다섯 명 사귄 것이 요새 같으면 자랑거리지만 옛날 같으면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미모가 되니 다섯 명이지요. 어쨌든 다섯 명을 사귀었는데 그것도 다 헤어졌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아요. 데미무어 같은, 그만큼 잘나가는 여자고 그만큼 남자들이 따른다는 그 말입니다. 너 없어도 다음 남자 사귀면 그만이니까 그 자신감은 대단한 자신감이 아닙니까? 그것을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고백한 것이 아니라 먼저 이야기한 거예요.

 

갑자기 그 여자는 내 쪽에서 드린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도 이 여자가 고집이 있어서 “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심 산은 예루살렘 이전에 제일 먼저 요단강 건너와서 첫 번째로 예배드렸던 곳입니다. 어느 쪽이 원조인지 그 싸움이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예배를 드리면 됩니까?” 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를 지적한 것을 무마하려고 시도합니다. 주님입장에서는 그게 무마가 안돼요. 왜냐, 이 세대이기 때문에.

 

그것이 절대로 무마될 수가 없어요. 따지고 보면 그 여자에게 남자가 들끓는 것은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거 참 위험한 말이지요. 어쨌든 주께서 그렇게 일을 하신 거예요. 남자가 백 명이라도 괜찮아요. 그런 여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청산하느냐, 그걸 어떻게 포기하느냐와 상관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그 때가 온다는 겁니다. 네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 어떤 특정한 타이밍이 예배드리게 되는 그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타이밍을 죽죽 늘이면 그게 세대가 되어버려요.

 

타이밍은 사건인데 그 사건을 늘이면 새로운 세대로서 기존 세대를 뚫고 나오는 새로운 세대가 되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시간을 찢어버리면 영원한 시간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메모리 폼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남자 끊고 새 인간 되겠습니다,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자기가 거룩한 모습으로 깨끗한 모습으로 변화되겠다는 하나의 추구지요. 아직도 변화의 완성, 거룩의 완성은 남아 있는 거예요. 이것은 아직 변화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메모리폼은 아닌 거예요. 보다 어느 것이 진리다운가, 어느 것이 진리에 근접했는가, 어느 것이 완전에 가까운가, 그걸 시도한 거예요.

 

그러나 그 시도한 자체가 이 세대에 속한 종교입니다. 거룩을 빙자한 종교에요. 그걸 찢음으로 그렇게 더러운 세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세대와 차별되는 새로운 주님만의 세대를 주님께서 말을 걸고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예수님에 의해서 생산되게 만드는 조치로서 더러운 우리의 몸이 있는 이 지점을 예배드리는 지점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없음입니다. 영적 예배가 뭡니까, 물으면 아무것도 없는 채로 드리는 겁니다. 굿거리 하지 말고, 풍어제 하지 말고, 풍악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없이, 찬양과 경건도 없고 열한시냐 열두시냐 그런 것도 없고 예배당도 없고 그냥 있다는 것은 죄만 나오는 이 몸뚱이, 이 육신덩어리, 72킬로그램, 스티로폼에 눕히는 겁니다.

 

변형될 것 같지요? 나 때문에 세상 엉망진창 될 것 같지요? 다시 보니까 전혀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어요. 여전히 예수의 피. 따라서 예수님이 채용한 사람들, 예수님이 영적 제사로 채용한 모델을 보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세리와 창기, 마태복음 11장에 보니까 소경과 앉은뱅이와 문둥병자와 귀머거리와 죽은 자, 이 모든 것은 드디어 이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여기 살아간다는 이것이 나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존재, 지금 영적 제사중입니다.

 

이미 완료된 결과만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또 한 가지 예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벨의 제사입니다. 아벨의 이름은 허무한 거예요. 허무의 제사를 받느냐, 아니면 가인의 넉넉한 제사를 받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허무의 제사의 특징은 뭐냐, 이름대로 되어야 돼요. 아벨은 제사 지내고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었습니다. 영적제사, 아벨의 제사의 특징은 인간이 속해 있는 이 세대와 우리 자신이 아담 이후에 어느 정도 밖에 안 되는지를 감추지 않고 다 드러내는 제사, 십자가와 함께 있는 제사,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 제사, 십자가 앞에 다시 우리를 곧게 세우는 제사, “주여, 저는 주를 피 흘리게 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케 하는 제사, 이미 확정된 정답을 다시 정답으로 드러내게 하는 질문적인 삶, 이것이 바로 치장할 필요 없는 몸 그대로의 산제사입니다. 이게 영적 제사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내가 속해있던 이 세대가 나에게 요구했고 나를 쇠뇌 시키고 나에게 강요했던 이 세대와 그것이 나로 인해서 변화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복음과 함께 있을 때 이 세대에서 어떻게 나는 다른 세대에 변경되었는가? 이 세대에 속한 존재이면서도 다른 세대, 메모리 폼에 속한 새로운 세대에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삶, 질문하는 동시에 이미 해답을 알기에 해답을 위주로 질문을 다시 해대는 완료된 질문, 그것이 바로 영적 제사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박제된 것이 아니에요. 딱딱하게 굳어진 게 아닙니다.

 

늘 던지세요. 주께서 마련해주신 남자가 다섯 명이 생겼습니까? 괜찮아요. 갈아치우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세요. 아이고, 큰일 났다. 오늘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어떤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과를 어떻게 갉아먹지 않는다는 사실, 그걸 증명해 주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그랬었으니까.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으니까. 그냥 누리세요. 끝! 그리고 만나세요. 왜 저 인간들이 사기꾼인지를. 그리고 못지않게 사기 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 세대가 서로의 이익밖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의 행복과 자기 이익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 사마리아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면서 세계 평화를 논했습니까? 북핵문제 다뤘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냥 즐겼잖아요. 즐기기나 한 인생이 영적 예배를 드릴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자기는 남자들 사귄 것이 후회스러워서 철없게 자기 쪽에서 “죄인입니다.” 하고 나오면 그것이 제사가 될 줄 알았지요. 아니에요. 그냥 가만 두시고 주께서 십자가로 팔 때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 있음을 증거 해주면 되는 겁니다.

 

저는 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볼 때, 기존 교회에서 주일 오후나 수요일에 청년회 헌신예배 하면서 상투적으로 동원되던 그 헌신예배의 단골메뉴본문이 이 본문이에요. 결국 그 모든 설교의 핵심은 돈 내라는 거예요. 특히 청년회 헌신예배 때 누가 오는가, 선교사들이 주로 와요. 결론은 뭐냐? 돈 내라는 거예요. 헌신예배 한다고 하면 벌써 주머니에 헌금부터 준비하는데 잘못 골라서 천원 낸다는 것이 만 원짜리 내면 얼마나 후회가 됩니까? 그런 기억이 없습니까? 무를 수도 없고 확실하게 보고 뺄 것을 그냥 빼가지고 말이지요.

 

그냥 사세요. 그러면 당신의 숨겼던 죄는 나오고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십자가를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그 말씀이 내 몸을 통해서 현실화 되고 있는 과정을 여러분이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만 일하는지 알았더니만 주께서 일하십니다. 주께서 말씀대로 일하셔서 사마리아 여인같이 자기 죄 감추기만 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드리면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던 그 철없음을 주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가운데를 파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심으시고 이미 확정된 정답자로서 세상을 대하여 주님 찾아오심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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