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강-YouTube강의(물고기와 새 전도서 9:12)20250422-이 근호 목사
제497강, ‘물고기와 새’. 갑자기 물고기, 새는 왜 등장하는가? 성경에 등장하니까 제가 제시해보는 겁니다. ‘아, 물고기 등장하고 새 등장하니까 주께서 기르시는구나. 그럼 우리 인간도 기르시는구나.’ 그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죠(마 6:26).
그런데 전도서 9장에서는 물고기, 새를 등장시키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어요. 9장 12절에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이거에요.
자,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인간인 것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물고기고 새라고 역할을 잠시 한 번 바꿔보겠습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렸을 때, 물고기하고 새가 그렇게 자기 생을 탄식합니까? ‘괜히 물고기 되었어. 나 괜히 새 되었어. 나 인간이 되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생각 안 하겠죠. 재앙에 걸린 물고기가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고 머리 싸매고 뭐 이렇게 합니까? 안 하죠.
전도서에서 방금 전도서 9장 12절을 언급한 이유는 인간이 되지도 않으면서 참 별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는 인간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 꽉 누를 필요가 있다. 세상에 돌아가는 일 중에서 인간이 관할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게 전도서 1장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바람, 그리고 강물이 바다에 가는 것(전 1:4-7). 이걸 요새 과학적으로 하면 중력이죠.
‘인간은 이런 강물이나 바람, 이런 것만 통제 못한다.’ 이건 인간이 능히 알잖아요. 그런데 통제 못하는 게 인간 자체에 있어요. 그걸 물고기와 새의 이야기로서 인간에게 언급한 겁니다. ‘네가 때를 아느냐? 때. 사건의 때. 일이 벌어지는 때에 대해서 네가 내일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내일, 미래죠, 미래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미래가 현재로 바뀌면서 지나온 과거가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아, 네가 물고기만큼만 되어라. 인간아, 네가 새만큼만 되어라.’ 그 물고기, 새는 안다는 거예요. 올무에 걸렸다고 해서 자기의 과거까지 싸잡아 탄식하고 이런 법은 없다는 거예요.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왜? 사람은 미래를 모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도 좋소.’ 그런 뜻이란 말이죠. ‘오늘까지라도 저는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내일을 걱정하니까 지금까지 하는 게 걱정, 근심, 스트레스로 우리에게 한짐 지워지는 거예요. 내일이 있으니까.
이 전도서 예를 들면요, 7장 예를 들면 앞으로 생일날을 1년마다 반복할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자기 장례식을 반복해야 된다. 케이크 해서 살아온 만큼 초 꽂고 ‘잘 가세요~ 친구들아’하는 것처럼 매일 매일 주위에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너희 안됐다마는 미안하다. 나 제대한다. 나 이제 오늘부터 예비군도 아니고 아예 제대다. 제대한다. 고생 조금, 조금이 아니고 엄청나게 죽도록 고생해라. 난 고생 끝, 복 시작이다.’
매일같이 자기 장례식을 하는 것이 바로 ‘올무에 그물에 언제 걸려도 좋소.’하는 물고기의 심정이라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새, 물고기를 비교한 겁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니 울어라.’ 그 말이 아니고요. 전도서 내용이 이상해요. ‘헛되고 헛되니 헛되니까 우리 얼마나 즐겁지 아니한가.’ 이렇게 나온다고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가버려요. 헛되고 헛되고, 요리 봐도 동쪽으로 헛되고 서쪽으로 헛되고, 요리 따져도 헛되고 저리 따져도 헛되고, 노벨상 타도 헛되고 탈락돼도 헛되고, 월드컵 축구 예선 통과해도 헛되고 통과 못해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니까 이것이 진리니까 헛되다는 진리를 미리 간파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냐.
오늘 장례식 치르니까 원 없이 맛있는 거 먹고, 어? 맛있는 거 먹고 사우나 가고, 어? 그렇게 해라. 조건이 있어요. 단, 내가 헛되다는 사실을 기쁘게, 슬프게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쁘게 인지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엄명이에요. 기뻐하라. 강제로 웃어. 내가 입 째서 올려붙여 줘? 강제로 웃어. 강제로 감사해. 강제로 기뻐해. 너는 짐승과 똑같아. 마찬가지야.
짐승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는 전도서 3장 19절에 나옵니다. 3장 18-19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짐승과 동급이다 이 말이죠.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절에 짐승과 인간은 동일하게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절,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 그러니까 모양새에 있어서 이 땅에서 죽는다는 점에서 그게 다 흙이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짐승보다 나은 점이 뭐냐? 짐승은 그냥 죽지만 인간은 따지죠.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애들 다 시집, 장가가는데 맨날 장례식한다고 혼자 웃고 난리고? 그럼 무책임한 일이 아니냐?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전도서는 마지막에 그걸 이야기합니다. 죽으라는 뜻이 아니고, 성경에서 말씀은 내가 살려준다는 뜻이에요. 이상하게 뉘앙스가 다르죠. ‘악착같이 살아가자’하고 ‘주께서 악착같이 살려준다’는 것. 어제 한달 전에 죽어야 되는데 악착같이 살려준다. 이게 주의 지시와 명령이라는 거예요.
주의 지시, 명령 가운데서 악착같이 너를 살려준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 내용 안에 들어있습니다. 왜 악착같이 살려주느냐? 12장에 보면, 언젠가 너는 끝날텐데 그동안 악착같이 살려주신 분이 창조자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게 전도서 12장 1절이에요(“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낙이 없다 하기 전에 네 생각하지 말고, 네 생각의 주제, 포인트, 테마가 네가 아니고 ‘저를 왜 만들었습니까?’하는 주님이 만드신 취지, 이 성경 안의 내용에 마음 두고 사시라 그런 뜻입니다.